|
11월22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초유의 장군 강등
민주화 이후 군에서 장군이 강등되는 초유의 징계가 이뤄졌다.
공군 고(故) 이예람 중사 사건 부실수사와 연루됐다는 비판을 받아온 전익수(52) 법무실장이 '원 스타'인 준장에서 대령으로 1계급 강등됐다.
군에 따르면 국방부는 전 실장을 강등하는 내용의 징계안을 지난 18일 의결해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윤 대통령은 지난 22일 이를 재가했다.
군인사법에 따르면 '강등'은 해당 계급에서 한 계급 낮추는 것으로, 이번 징계는 즉시 효력이 발생하는 행정처분인 까닭에 전 실장은 곧바로 대령으로 강등됐다.
2019년 미국상원 한국정부에 지소미아 연장 촉구결의안 만장일치 채택, 정부 지소미아 종료 조건부 연기 WTO 제소 정지
2018년 서울중앙지법 신도 상습성폭행 혐의 만민중앙성결교회 이재록 목사 징역 15년 선고
2016년 드라이 스타일링 개발(1962년)한 영국 헤어디자이너 로즈 에반스키 세상 떠남(94세)
2015년 김영삼 대통령사망
한국의 정치가. 9선의원이었으며, 1985년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직을 맡았고,1987년 통일민주당을 창당하여 총재가 되었다. 1990년 민주자유당을 창당, 대표최고위원이 되었다. 1992년 14대 대통령선거에 당선되어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2011년 국회 한미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처리
2010년 캄보디아 물의축제 중 378명 압사
기나긴 우기(雨期)의 마감을 축하하려던 캄보디아 ‘물의 축제’가 최소 378명이 압사(壓死)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AFP통신은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시내의 바사크강 가운데 있는 코피치섬(다이아몬드섬)을 잇는 다리에 축제 참가자들이 몰려들면서 22일 대형 압사사고가 발생, 최소 378명이 사망하고 750명 이상이 다쳤다”고 보도했다.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는 “1970년대 ‘크메르루주 학살’(170만명 사망) 이후 캄보디아에 발생한 최악의 비극"이라고 말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사망자 중 3분의 2는 여성이었고 이 중 대다수는 청소년이었다. 사인(死因)은 대부분 질식과 내부 출혈이었다”고 발표했다.
사고를 촉발한 정확한 원인은 즉각 밝혀지지 않았다. 20~22일 열린 ‘물의 축제(본 옴 투크)’엔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약 7분의 1인 200만명이 참가했으며, 사고 당일인 22일 오후 10시쯤엔 축제의 가장 중요한 행사인 보트 경기를 구경하기 위해 대규모 인파가 몰려들었다. 사고 당시 코피치섬에선 축제 피날레인 콘서트가 열리고 있었다.
CNN은 “사고 다음날 아침 다리 위와 강물에 신발 수백 켤레와 찢어진 옷가지들이 널려 있었다”며 “미처 치우지 못한 시체 틈새에 중상을 입은 생존자들이 처절하게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2009년 연쇄살인범 정남규 사망
연쇄살인범 정남규(40)가 자살시도에 따른 뇌손상과 심자쇼크로 사망했다. 21일 오전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자살을 시도해, 병원으로 옮겨진지 하루 만이었다.
정남규는 21일 오전 6시 35분쯤 서울구치소에 있는 6.76㎡(약 2.05평) 넓이의 독거실에서 독방 안에 있는 높이 1.05m가량의 TV 받침대 모서리에 비닐봉투를 찢어 새끼줄처럼 꼬아 만든 끈을 달고, 여기에 목을 맨 채로 순찰 중이던 교도관에 의해 발견됐다.
정남규는 2004년 1월부터 2년 동안 영등포구, 관악구 등 주로 서울 서남부지역에서 모두 25건의 살인 및 강도상해와 성폭행 행각을 벌여 13명을 살해하고 20명에게 중상을 입히면서 ‘서울 서남부지역 연쇄살인마’로 불렸다. 그는 이같은 혐의로 2006년 6월 구속기소된 후 2007년 4월 사형이 확정되면서 31개월 넘게 사형수로 복역해왔다.
2008년 유엔 북한인권결의안 채택
2002년 미군 재판에서 궤도차량으로 두 여중생 죽인 미군 병사에 무죄평결
2001년 ‘인간기관차’ 체코 육상영웅 자토펙 세상 떠남
1999년 선동열 은퇴선언
‘나고야의 태양’ 선동열(36·주니치)이 1999년 11월 22일 일본 나고야 관광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은퇴를 공식발표,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선동열은 ‘무등산 폭격기’란 별명으로 국내의 녹색 다이아몬드를 평정한 뒤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고교시절의 노히트노런에 이어 1982년 세계선수권을 제패하며 화려한 아마시절을 보낸 선동열은 1985년 프로에 입문해서도 ‘넘버 원’의 자리를 놓지 않았다. 국내 무대 11년 동안 MVP 세 차례, 다승왕 네 차례, 방어율 1위 여덟 차례. 특히 불같은 강속구와 현란한 슬라이더를 바탕으로 다섯 차례나 꿈의 ‘0점대 방어율’을 기록, 난공불락의 요새를 구축했다. 국내무대 통산 146승, 29완봉승과 탈삼진 1698개이다
1996년 일본으로 건너간 선동열은 첫 해 동계훈련 부족과 적응 실패로 5승1패3세이브, 방어율 5.50의 초라한 성적을 남겼다. 그러나 1997년 ‘엉거주춤 폼’으로 재기, 4년 간 방어율 2.70, 총 108세이브포인트(10승4패98세이브)의 성적을 올렸다. 일본 야구에서 22번째로 100SP고지를 넘어섰고, 1997년엔 시즌최다세이브(38개), 연속경기SP기록(18경기)을 수립, 일본에서도 정상급 마무리투수로 족적을 남겼다. 2000년 3월 9일 일본서 은퇴식을 했다.
1999년 당산철교 재개통으로 당산역-합정역(지하철2호선)정상가동
당산역과 합정역을 잇는 당산철교가 재개통 됐다.
1996년 12월, 사고 위험이 높다며 철거가 시작됐다.
오전 5시 30분 합정역을 출발한 열차는 2분후 시속 80km 속도로 당산철교를 무사히 통과했다.
열차 운행이 재개되면서 지하철 2호선은 도심 순환선의 기능을 되찾게 됐다.
1990년 영국 대처수상 사임
1979년 이래 3차례나 총리직을 연임하면서 11년 6개월동안 장기집권해온 영국의 마거릿 대처 총리가 1990년 11월 22일에 사임했다. 대처는 사임 이틀전에 치러진 보수당당수선거 1차투표에서 이기지 못하자 2차투표를 포기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비록 경제침체와 주민세도입, EC통합에의 소극적 태도등으로 인기가 하락, 도중하차 하긴 했지만 강력한 지도력으로 영국병을 치유한 그의 업적은 영국국민들의 머리속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 대처의 후임으로는 역시 보수당출신인 메이저 재무장관이 임명됐다.
1989년 한국과 헝거리 항공협정 체결
1989년 노태우 대통령 국가원수로는 처음으로 헝거리 방문
1989년 르네 무하마드 레바논 대통령 취임 17일 만에 폭탄테러로 사망
1983년 미얀마 아웅산폭발사고 테러범 첫공판
1982년 국제자연보호연맹을 통해 북한에 자연실태통보 요청
1982년 제38차 GATT 개막
1981년 부산 금정산 버스추락사고 사망33명 중상37명
1981년 11월 22일 오후 4시40분쯤 부산 금정산중턱에서 산성교통소속 시내버스가 7m아래 낭떠러지로 15m나 굴러 떨어져 승객 75명중 34명이 사망하고, 37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나머지 승객 4명은 무사했다.
사고버스는 휴일을 맞아 금정산성에 단풍놀이를 갔던 승객들을 싣고 해발 400m의 금정산성을 출발, 종점인 장전동으로 가던 길이었으며, 중간지점인 고별대앞에 이르렀을 때 참사를 빚었다. 이 버스는 정원이 32명이었으나 2배가 넘는 승객을 태웠기 때문에 사상자가 많았다.
사고원인조사에 나선 경찰은 이번 사고가 브레이크와 핸들고장 등 정비불량으로 일어난 것으로 밝혀냈다. 경찰은 현장에 사고버스의 바퀴자국이 전혀 없는 것으로 미루어 사고가 일어나기 전부터 제동이 불가능해 계속 굴러내려 온데다 핸들까지 조작이 안돼 사고지점인 급커브길에 이르러 정지 또는 핸들을 꺽지 못해 계곡 아래로 곤두박질한 것으로 분석했다.
1981년 남조선민족해방전선 준비위원회(남민전) 위원장 이재문 옥사
1981년 소련 사하로프 박사, 유배지 고리키市에서 단식 시작(18일간)
1980년 정부 비상계엄 15호 발표 정치활동 일부 재개
1978년 카터 미국대통령 주한미군 일부 철수
1977년 초음속 콩코드기 파리-뉴욕 첫 운행
영·불합작의 초음속 제트여객기 콩코드기가 미국 뉴욕의 케네디공항 착륙허가신청을 낸지 1년 6개월 만에 처음으로 1977년 11월 22일 케네디공항에 착륙했다.
미연방최고법원은 11월 17일 콩코드기의 뉴욕 케네디공항 착륙을 허용함으로써 말썽많은 콩코드기의 착륙권을 둘러싼 법정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 연방최고법원은 이날 영국 `브리티쉬항공`과 프랑스의 `에어프랑스항공`의 케네디공항 착륙을 허용한 연방고등법원의 명령을 중지 혹은 유예해 달라는 뉴욕과 뉴저지공항당국의 요청을 거부함으로써 콩코드기의 케네디공항 착륙을 가로막던 마지막 장애를 제거한 것이다.
브리티쉬항공과 에어프랑스항공은 지난 1976년 2월 미국 운수성으로부터 콩코드기를 케네디, 델라스 두 공항에 착륙시켜도 좋다는 허가를 받은 후 같은 해 5월 델라스공항에서 콩코드기의 취항을 시작했으나 콩코드기의 소음을 문제삼은 케네디공항당국과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케네디공항이용을 거부당해왔었다.
1975년 모국유학가장 학원침투 간첩단 21명 검거
1975년 카를로스, 스페인국왕에 즉위
후앙 카를로스 스페인 황태자는 1975년 11월 22일 코르테스(의회)와 섭정위원회 합동회의에서 선서식을 갖고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했다.
44년 만에 스페인의 첫 군주가 된 카를로스 1세 국왕은 이날 라스 코르테스궁에서 취임선서를 한 뒤 15분간의 전국 TV방송연설을 통해 자신은 스페인내 정치세력간의 화해와 정치적 정의, 그리고 보다 민주화를 모색할 것이라고 말했다.
1974년 포드 미국대통령 내한
제럴드 R. 포드 미국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1974년 11월 22일과 23일 이틀동안 한국을 공식방문했다. 국내 체류시간은 23시간10분에 불과한 짧은 시간이었지만 북한의 잦은 도발로 인한 한반도의 긴장과 육영수여사 저격사건 등 최근 사건으로 미묘해진 한일관계 등과 관련해 매우 긴요한 방한이었다.
박 대통령은 23일 오후 3시부터 포드 대통령과 제1차 한미정상회담을 하고 한반도 안보정세, 국군장비 현대화, 미국의 대한 군사원조, 주한 미군의 주둔시한문제 등에 대해 광범위한 의견을 교환했다. 이에 대해 포드 대통령은 주한미군의 감축계획이 없음을 확약하고 북한의 한국에 대한 무력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한편 방위산업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이한(離韓)에 앞서 2차회담을 가졌다.
1972년 남북적십자 4차 본회담(서울) ∼ 24일
1972년 유신 헌법 확정
유신헌법이 국민투표에 의해 확정된다.
계엄령이 선포된 가운데 하루전날 실시된 국민투표의 투표율은 91.8%!
이날 새벽 다섯시쯤 투표자의 과반수를 넘는 찬성표가 나와 유신헌법은 확정됐다.
개표결과 찬성율은 91.5%에 달했다.
정상적 방법으로 재집권이 어려워진 박정희 정권이 남북대화의 명분을 앞세우며 발표했던 유신헌법.
유신 헌법이 확정됨에 따라 대통령 선출은 간선제로 바뀌면서 군부독재가 시작됐다.
1971년 인도, 파키스탄 무력충돌 전면전
1971년 11월 22일 시작된 인도-파키스탄 양군간의 무력충돌이 12월 3일 전면전쟁으로 확대됐다. 3일 파키스탄공군기들이 서파키스탄과 인접한 서부인도의 8개공항을 공격했고, 이에 대해 인도는 지상군 3개사단을 서파키스탄에 투입했다. 이로써 지금까지 동파키스탄내에 국한됐던 양군의 충돌은 사실상 양국간의 전면전으로 전환됐다.
이 동파키스탄 전쟁은 전투가 시작된지 14일만인 16일 파키스탄의 항복으로 끝이났다. 16일밤 현지의 니아지 파키스탄군사령관이 무조건항복문서에 조인함으로써 인도와 파키스탄군간의 전쟁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와 동시에 인도군은 시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대카시에 입성했다. 이후 동파키스탄은 방글라데시로 독립을 성취했고, 패전 파키스탄에서 군정체제가 무너지고 부토가 정권을 인수했다.
1967년 한국의 독립운동가 신숙 사망
1966년 종합박물관 경복궁에 신축 기공
1963년 영왕 이은과 이방자여사 56년만에 일본서 환국
1963년 미국 존F케네디 대통령 피살
1963년 11월 존 피츠제랄드 케네디 미국 대통령이 정치 유세를 위해 텍사스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평소 민권에 관한 입법을 강력히 지지해 온 그의 정치적 입장으로 1964년 대통령 선거가 채 일년도 남지 않은 상태였지만 남부 지역에서의 그의 인기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11월 22일 미국 댈러스를 방문중인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이날 낮 12시 30분 무개차를 타고 재클린 케네디와 도심 퍼레이드를 벌이던 중 암살범이 쏜 총탄 2발을 목과 머리에 맞고 숨졌다. 대통령 부인 재클린의 첫 반응은 "오,노!(Oh, No!)"였다. 케네디 대통령은 피격 즉시 인근 파크랜드 메모리얼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사망이 최종 확인됨에 따라 린든 존슨 부통령이 오후 2시 38분 대통령에 취임했다.
댈러스 경찰은 사건발생 2시간 뒤 유력한 용의자로 현장부근에서 서성거리던 댈러스 시민 리 하비 오스왈드를 검거했다. 그러나 용의자 오스왈드도 이틀 뒤 나이트클럽 경영자 잭 루비가 쏜 총에 맞아 숨지는 바람에 사건은 조사도 시작되기 전 무성한 소문만 양산했다.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점점 확산되어가자, 존슨 대통령은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대법원장 어얼 워렌을 위원장으로하는 ‘암살 조사 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도록 지시했다. 조사위원회는 10개월 뒤 “이 사건은 오스왈드의 단독범행이며, 그를 사살한 루비에게는 어떤한 배후도 보이지 않는다”는 워렌보고서를 발표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워렌보고서가 발표된 후에도 범행동기가 속시원히 밝혀지지 않자 의혹이 다시 증폭됐다. CIA 음모설, FBI 관련설에서부터 쿠바의 카스트로 지시설 등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진실은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채 미궁 속에 빠져 있다.
1963년 영국 작가 헉슬리 사망
이튼학교를 졸업하고 옥스퍼드대에서 영문학을 수학했다. 원래는 의학도를 지망했으나 이튼 시절 거의 실명에 가까운 안질로 영문학을 택했다.
1916년 시집 `불타는 수레바퀴` 등 몇권의 시집을 출간한 바 있으나 그가 소설가로 일생을 보내게 된 계기는 소설 `크롬 옐로` 출간 때부터였다. 이 소설을 읽은 시인 T.S. 엘리엇이 그에게 소설가의 길을 걷도록 권유했기 때문이다. 1923년 출간한 `어릿광대의 춤`을 대표작으로 보는 평론가가 있는가 하면, 1928년 출간한 `연애대위법(戀愛對位法)`을 대표작으로 꼽는 평론가도 있다.
하지만 그를 일반에 널리 알린 소설은 `멋진 신세계`(1932)이다.
1962년 인도, 중국 국경분쟁 휴전 발표
1957년 모스크바 12개국 공산당회의 `세계평화선언` 발표
1956년 제16회 멜버른 올림픽 개막
77개 국가가 참여한 제16회 올림픽경기가 호주 멜버른에서 1956년 11월 22일 개막됐다. 이 대회는 12월 8일까지 17개 종목, 145개 세부종목이 실시됐다. 대회직전 소련이 헝가리를 침공해 소련선수는 가는곳마다 관중의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145개 종목중 37개 종목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이 대회는 올림픽이 정치 캠페인에 이용됐다는 점에서 역사에 남는다. 헝가리사건에 항의해 폴란드ㆍ스페인ㆍ스위스가 영국ㆍ프랑스의 수에즈운하 침공에 항의해 이집트ㆍ레바논이 각각 대회를 보이콧했다. 이 대회에서는 소련이 비로소 미국을 제치고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소련은 712점을 얻어 593점을 얻은 미국보다 30개의 금메달을 더 획득해 미국을 압도했다
1955년 서독군 발족
1955년 중앙조약기구(CENTO) 결성
1953년 제1회 프로권투대회 개최
1950년 뉴욕의 리치몬드힐서 열차충돌 79명 사망
1944년 영국의 천문학자 스텐리 에딩턴 사망
1943년 루스벨트·처칠·장제스, 카이로회담
1943년 11월 22일 미국, 영국, 중국의 정상이 이집트 카이로에 모여 대일항전과 전후처리에 대해서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중의 연합국 정상회담으로 22일부터 26일까지 F.D.루즈벨트 미국대통령, W.L.S.처칠 영국총리, 장제스(蔣介石) 중국총통이 참석하였고, 27일에는 `카이로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의 주요내용은 1. `3국은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다.` 2. `3국은 야만적인 적국에는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결의를 밝힌다.` 3.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3국 모두 영토확장의 의도는 없다.` 4. `제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제도(諸島)를 박탈하고, 또한 만주 ·타이완 ·펑후제도[澎湖諸島] 등을 중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몰아낸다.` 등이었다.
특히 카이로선언에는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라는 특별조항이 있었는데 이는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보장받게 된 것이었다. 12월 3일부터 6일까지 미·영 수뇌와 터키대통령 이노뉴가 제2차 카이로회담을 가졌고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는 카이로선언의 조항이 재확인됐다.
1943년 레바논, 프랑스로부터 독립
1938년 독일-이탈리아, 로마서 문화협정 조인
1938년 독일 마그데브르크서 열차충돌 227명 사망
1924년 영국, 이집트에 데모금지 최후통첩
1916년 홍난파, 통속창가집 간행
1916년 미국 소설가 잭 런던 사망
1906년 SOS 채택
전파의 아버지, 마르코니는 1896년 무선전신기를 처음 발명하고, 1901년 영국·캐나다 간 대서양을 횡단하는 무선전신을 성공시켜 이 분야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무선전신기를 선적한 배에 한해 육지와 교신할 수 있도록 배타적으로 무선전신 체계를 운영해 다른 나라들로부터 반발을 샀다.
1906년 11월 22일 29개국이 참가한 가운데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개최된 국제무선전신회의는 국제적인 무선전신 규약을 제정해 해상에서 잇따르는 대형사고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었지만 마르코니에 대한 반발심도 일부 작용한 회의였다. 회의에서는 상호통신 의무, 조난통신 절대 우선권 등의 무선조약도 결정됐고 기술적인 난제였던 주파수 분배도 해결돼 500kHz와 1000kHz 2개 주파수는 해상의 공중통신용으로, 188~500kHz는 군사용으로 결정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조난신호로 ‘SOS’가 채택됐다는 데 있었다. 그 전까지 조난신호 모스부호는 마르코니사가 정한 ‘CQD(come quick danger, - · - · - - · - - · · )’ 였으나 기상이 나쁘면 수신이 불량했고, 모스부호로 각각 세 번씩 짧게, 길게, 짧게 보내는 'SOS( · · · - - - · · · )' 보다 전송과 해독이 어려웠다. ‘save our souls’ ‘save our ship’의 약자라는 설이 있으나 그저 일설에 불과할 뿐이다.
SOS 신호로 가장 큰 혜택을 본 것은 1912년에 침몰된 타이타닉호였다. 해운사상 전례없는 대참사에서 700명 이상의 생존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SOS 덕분이었다. 100년 가까이 조난신호의 대명사로 쓰여왔으나 1999년 국제해사기구(IMO)가 모스 부호를 폐기하고 조난신호를 인공위성을 이용한 세계해상조난 안전체제(GMDSS)로 대체하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1901년 러시아의 동물학자 알렉산드르 코발레프스키 사망
1897년 명성황후 국장 치름(대한제국 건양 2)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본관은 여흥(驪興), 성은 민씨(閔氏)이며, 아명(兒名)은 자영(玆暎)이다.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驪州)에서 영의정에 추증된 치록(致祿)의 딸로 태어났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16세에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부인 부대부인(府大夫人)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完和君)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면서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景福宮) 중건으로 민생고(民生苦)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失政)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儒林)의 거두 최익현(崔益鉉)을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親政)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뒤,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통상수교거부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花開洞) 윤태준(尹泰駿)의 집을 거쳐 충주(忠州)·장호원(長湖院)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하였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國喪)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 뒤 다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1884년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甲申政變)을 일으켜 실각하자, 심상훈(沈相薰) 등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開化黨)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면서 김홍집(金弘集) 등 친일(親日)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公使)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1895년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경복궁 옥호루(玉壺樓)에서 그녀를 난자시해(亂刺弑害)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이다.
하지만 최근 시해장소가 옥호루가 아니라 경복궁 장안당(長安堂)과 곤령합(坤寧閤) 사이에 있는 마당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뒤 폐위되어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復號)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22일국장(國葬)으로 청량리(淸凉里) 밖 홍릉(洪陵)에 묻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명성황후에 대해 재평가작업이 일어나면서, 을미사변이 미우라 고로의 단독범행, 또는 그의 후원을 받은 민간인들이나 일본 낭인들의 범행,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차츰 이러한 통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1890년 드골 프랑스 대통령 출생
1869년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 출생
1850년 중국 청대의 정치가 임칙서 사망
1497년 바스코 다 가마 희망봉 통과
1337년 정몽주 출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