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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3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전두환 전 대통령 사망
대한민국의 제11·12대 대통령. 경남 합천 출신으로,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를 거머쥐고 계엄을 확대했다. 1980년 최규하가 하야하자, 장충체육관에서 간접 선거로 단독 출마해 제11대 대통령에 당선, 취임했다. 취임 이후 개헌을 실시하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제12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재임 기간 동안 사회 유화책을 적극적으로 펼치는 한편, 언론통폐합과 삼청교육대 창설, 민주화 운동 탄압을 지속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고 퇴임했다. 1995년 구속 기소되어 1심에서 사형을, 항소심에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0억원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7년 사면·복권되었다. 2021년 11월 23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2019년 김환기 화백의 푸른 점화 ‘우주’ 153억원에 낙찰 한국화가의 최고가 갱신
홍콩 컨벤션센터 그랜드 홀에서 열린 크리스티 홍콩 11월 경매에서 전남 신안군 출신의 화가 김환기(1913∼1974)의 작품 1971년 작 푸른점화 '우주(Universe 5-IV-71 #200)'가 한화 약 153억 4930만원( HKD 101,955,000(구매자 수수료 포함가)에 낙찰됐다. 낙찰가 기준으로 한국 미술품이 경매에서 100억원 넘는 가격에 팔린 것은 이번이 처음. 60억원대에 경매에 오른 '우주'을 갖기 위한 열기가 뜨거웠다. 현장과 전화 경합이 33번이나 치열하게 이어졌다. 낙찰자는 한국인이다. 걸그룹 카라 출신의 가수 겸 배우 박규리와 열애중인 동원건설 장손인 송자호(25)씨였다. 송씨는 현재 동원건설에서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매사 크리스티가 153억원에 쏘아올린 '우주'는 김환기를 '아시아 미술시장 100억대 작가'로 등극시켰다. 현재 100억대를 넘어선 작가는 중국 산유·자오우키, 일본 무라카미 다카시, 나라 요시토모 등 6~7명이 올라있다.
'153억 낙찰'은 세계 미술시장에 김환기 뿐만 아니라 한국 미술품의 인식과 관심도를 새롭게 바꾸는 연쇄 반응이 일어날 것이라는 전망이다.
2018년 필리핀 언론인 32명 포함 58명 무장괴한들에게 끌려가 살해됨
2016년 이집트 나일강 옆에서 7,300년전 고대도시와 고분 발견
2016년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비공개 체결 발효
2011년 알리 압둘라 살레 예멘 대통령 33년 장기집권에서 물러나는 사임문서 서명
2011년 외규장각 도서 반환 기여 ‘직지 대모(代母)’ 박병선 박사 별세
1866년 프랑스가 약탈해 간 외규장각 도서 반환에 크게 기여했던 재불(在佛) 역사학자 박병선(83) 박사가 별세했다. 박 박사는 작년 경기도 수원에서 직장암 수술을 받고 파리로 돌아가 ‘병인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노하다’라는 책 저술 준비를 해왔으나 최근 병세가 악화됐다.
박 박사는 직지심체요절이 1455년에 나온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빠른 금속활자본임을 증명해서 ‘직지 대모(代母)’로 불렸다.
그는 1967년부터 13년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3000만종이 넘는 장서를 뒤져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 ‘직지심체요절(直指心體要節)’과 외규장각 도서 297권을 찾아내 주불 한국대사관에 알렸다. 프랑스 상사들의 시선은 차가웠다. 박씨는 뜻을 꺾는 대신 사표를 냈다.
이후 매일 도서관에 찾아가 ‘개인’ 자격으로 외규장각 도서 열람을 신청했다. 냉대를 견디면서도 그는 “오늘도 안 됩니까?”라며 열람신청을 했고, 도서관 직원이 거절할 때마다 “내일 다시 오겠다”고 대답했다. 한 달 만에 간신히 열람 허가가 떨어지기도 했다.
지난 3월 외규장각 도서가 ‘대여’ 형식으로 145년 만에 고국에 돌아오자 그는 감격해 했다. 박 박사는 서울에서 태어나 진명여고와 서울대 역사교육과를 졸업했다. 이후 1955년 홀로 프랑스에 건너가 소르본대학과 프랑스 고등교육원에서 역사학과 종교학으로 각각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국립도서관 직원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외규장각 도서를 펼쳐놓은 박씨를 보고 ‘파란 책에 파묻힌 여자라고 했다. 외규장각 도서 표지가 파란색이었다.
2010년 북한, 연평도에 해안포 포격
연평도 포격(延坪島砲擊)은 2010년 11월 23일 오후 2시 30분 경, 북한이 대한민국 인천광역시 옹진군 연평면의 대연평도를 향해 포격을 가한 사건이다.
이에 대한민국 해병대는 피격 직후 대응사격을 가하였으며 대한민국 국군은 서해 5도에 진돗개 하나를 발령한 뒤, 곧 전군으로 진돗개 하나를 확대 발령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해병대원 전사자 2명(서정우 하사, 문광욱 일병), 군인 중경상 16명, 민간인 사망자 2명(김치백, 배복철), 민간인 중경상 3명의 인명 피해와 각종 시설 및 가옥 파괴로 재산 피해를 입었다.
한국 전쟁의 휴전 협정 이후 북한이 대한민국의 영토를 직접 타격하여 민간인이 사망한 최초의 사건으로 국제 사회의 큰 관심을 끌었으며, 당시 국제 사회는 북한을 규탄했으나, 북한은 정당한 군사적 대응이었으며 전적인 책임은 대한민국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천안함 침몰 사건에 이어 8개월만에 벌어진 이 사건으로 인해 양측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었다.
2009년 산림청 헬기 추락 사고
2009년 11월 23일 오전 10시 30분쯤 비행교육을 위해 이륙했던 산림항공관리소 전남영암지소 소속 헬기가 호수에 추락해 탑승자 3명 전원이 사망했다.
산림항공관리소 전남영암지소에서 이륙한 헬기는 낮 12시 15분쯤 전남 영암군 삼호읍 지역 상공에서 통신이 두절됐고, 오후 2시25분쯤 전남 영암군 삼호읍 오복마을 앞 영암호 둑 인근에서 70도 각도고 빠진 채로 발견됐다. 소방당국은 헬기가 오후 1시쯤 호수로 추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헬기 안에는 박모(52) 교관 조종사와 이모(46) 부기장, 또 다른 이모(44) 부기장 등 3명이 타고 있었으나 발견 당시 모두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번 비행은 부기장들이 기장이 되는 데 필요한 일명 ‘부기장 비행교육’ 중 하나였으며, 이들은 사고지점인 전남 영암군 영암호에서 물을 담아 나르는 과정을 교육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헬기가 정지한 상태에서 물을 퍼 올리는 ’담수’(湛水) 과정은 산불진화의 필수단계로 항공전문가들에 따르면 고난도의 기술이라고 알려져있다.
사고 헬기는 러시아산 기종 ‘까모프(KA-32T)’로 산불진화가 주 임무인 헬기다. 뒤 꼬리 날개가 없는 유일한 헬기로 최대이륙중량 1만 1,000㎏, 기본중량 6,640㎏, 최대 시속 230㎞ 등이며 탑승인원은 18명, 물탱크 용량은 3천ℓ가량으로, 살포폭은 18~55m다.
2008년 22명 잠자던 비무장지대 GP 내무반에 수류탄 폭발사고
2008년 11월 23일 오전 1시50분쯤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육군 모 사단의 비무장지대(DMZ) 내 GP(최전방소초) 내무반에서 수류탄 1발이 폭발해 이모(21) 이병 등 5명의 병사가 중경상을 입고 민간병원과 국군수도병원으로 후송됐다.
폭발된 수류탄은 무게 260g의 KG14 경량화 세열 수류탄으로 1000여개의 아주 작은 쇠구슬이 들어 있어 폭발 시 이 쇠구슬들이 10~15m 떨어진 곳의 1㎜ 두께의 철판을 뚫을 수 있다. 폭발 당시 GP 내무반에는 병사 22명이 잠을 자고 있었다.
수류탄 폭발로 인해 머리와 목뼈 등에 중상을 입은 이모 이병은 의식불명 상태로 서울의 Y민간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고 있으며, 허모(21) 병장 등 4명은 우측 가슴과 이마, 손가락, 좌측머리, 우측 허벅지 등에 열상(裂傷)을 입고 국군수도병원에서 치료 중이다.
GP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경계근무에 나설 때 실탄 75발과 수류탄 1발씩을 지급받으며 근무를 마치면 GP장(소대장) 입회하에 실탄과 수류탄을 내무반에서 떨어진 상황실의 간이 탄약고에 반납한다.
사고 당시 수류탄은 내무실 출입구에서 오른쪽에서 폭발했으며, 부상당한 장병들은 반대편 침상에서 잠을 잤던 것으로 확인됐다.
2008년 원로 안무가 배명균씨 별세
원로 안무가 배명균(81)씨가 2008년 11월 23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국립무용단 배정혜 예술감독의 숙부이자 무용의 스승으로, 무대에 서지 않고 가르치기만 한 국내 직업 안무가 1호다.
함경남도 삼방 출신으로 경성상고를 졸업한 고인은 신고산 금융조합에서 잠시 서기로 근무하다 초등학교 교사가 된 뒤 학예회를 비롯한 교내 행사를 통해 예술적 기질을 발휘했다.
세 살 때부터 춤을 따라 하는 배정혜의 능력을 알아보고 결국 직장 생활도 그만둔 채 조카를 가르치는 일에만 힘을 쏟으며 무용 작품 200여 편을 안무했다.
2005년 쌀협상 비준안 국회통과,
2014년까지 쌀 관세화 유예받는 대신 의무수입물량 20만5천톤에서 40만8천톤으로 늘어남
비준반대 여의도 농민집회에 참석한 농민 전용철 씨가 경찰에 맞아 쓰러진 뒤 11월 24일 숨졌고, 홍덕표 씨가 12월 18일에 숨짐
2004년 미국 의회, 북한 인권 관련 예산 첫 통과
미국 의회가 사상 최초로 북한인권과 관련, 300만달러를 내년도 예산에 포함시켜 통과시켰다. 미 의회가 북한인권문제를 특정해 관련 예산을 책정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이는 지난달 18일 북한인권법 공포 이후 미국이 북한인권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재정적 뒷받침이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이 예산은 ▲북한인권특사 활동자금 100만달러 ▲북한 인권상황 관련 국제회의 개최 비용 200만달러로 구성되어 있다.
2000년 `그룹 테크놀러지` 개념 정립한 재미 과학자 함인영 교수 별세
상공부 차관보를 지낸 함인영(76) 미국 펜실베니아 주립대 명예 석좌교수가 2000년 11월 23일 미국 자택에서 별세했다. 함 교수는 산업공학 분야의 세계적 석학이면서 평생 한반도의 과학 발전을 위해 음양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재미 과학자였다.
재미한국과학기술자협회 창립회원으로, 1973년 3대 회장을 지내면서 재미 과학기술자 250명을 이끌고 방한, ‘국내외 과학기술 학술 종합심포지엄’ (현 범민족 국제학술대회)을 개최해 당시 낙후했던 국내 학계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40여년 간 교수생활을 하면서 틈만 나면 귀국, 선진 첨단 과학기술을 전달하는 강연 활동을 벌였고 강연료는 한푼도 빠짐없이 각종 학회 발전기금으로 희사했다.
생산공학·생산시스템공학 분야에 나오는 ‘그룹 테크놀러지 (Group Technology)’ 개념이 그의 업적이다. 1960년 상공부 공업국장으로 발탁돼 기획조정관·차관보까지 지냈으나, “선진 과학기술을 더 배워 고국에 기여하겠다”며 1963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지난 1998년 신라유물의 과학적 비밀을 연구한 ‘신라과학기술의 비밀’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1998년 경주시에서 ‘제2안압지’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 대규모 인공연못 발굴
새로 발굴된 통일신라시대의 인공연못 유적. 경북 경주시에서 제2의 안압지로 추정되는 통일신라시대(서기 8~9세기)대규모 인공연못 유적이 1998년 11월 23일 발굴됐다. 이 유적에서는 돌로 축대를 쌓은 인공섬과 이곳에 누각이 들어섰던 건물터, 섬과 육지를 연결했던 다리흔적 등이 확인됐다.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 1998년 10월부터 발굴한 이 유적은 경주시 용강동 용황초등학교 건축 부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발굴단에 의하면 바닥에 흙을 다진 흔적이 확인됐고, 섬 주변에 돌을 쌓아 호안(연못석축)을 만든 흔적이 남아있으며, 다리가 발굴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인공 연못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연못의 크기는 1,200여평이며 섬 크기는 300여평, 섬의 호안 둘레는 50여m이다. 누각 추정 건물은 큰 기둥이 3개 놓인 3칸 짜리로, 서기 8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귀신 무늬 기와(귀면와)2점과 막새 기와 100여점이 출토됐다. 귀면와는 당시 왕궁에서 사용하던 것이다.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에 ‘궁 안에 큰 연못을 팠다’는 기록이 문무왕조 14년(서기 674년)과 경덕왕조19년(서기 760년)에 각각 기록된 것으로 비추어 이 유적이 경덕왕 때 만든 것으로 추정했다.
1993년 시인 김광균 사망
시인 김광균씨(79)가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김 시인은 1930년대 후반을 풍미한 모더니즘 시운동의 주도자로 활동했고, 시의 회화적 기법과 공감각적 이미지를 한국현대시에 정착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1914년 개성에서 태어난 그가 등단한 것은 근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빠른 나이인 12살 때 중외일보에 ‘가는 누님’을 발표하면서였다. 송도상고를 졸업하고 고무공장인 경성공업사의 군산지점에서 일하면서도 틈틈이 작품을 써 1934,35년 두 해 만도 18편의 다작을 내놓았다. 1936년 서울 본사로 올라와 ‘시인부락’ ‘자오선’ 등의 동인으로 참가해 서정주·이용악·오장환 등과 함께 일제말 시단을 가꿨다.
1951년 건설실업 사장이 되고, 1957년 ‘반가’와 세번째 시집 ‘황혼가’를 내놓고 10여년 간 필통을 덮었다. 김 시인은 우리나라 현대시사에서 1930년대 후반을 풍미한 모더니즘 시운동의 상징으로 꼽힌다. 운율과 청각에 대한 전통시적 집착을 버리고 회화적 이미지의 조탁에 공을 들이던 모더니즘 운동, 흄·파운드류의 이미지즘을 김기림이 도입해 이론화한 1930년대 모더니즘을 작품 속에 가장 뚜렷이 구현한 이가 바로 그다.
1990년 미국, 시리아와 13년만의 정상회담
1990년 나자르바예프 소련 카자흐공화국 대통령 내한
1988년 전두환 전대통령 대국민사과문 발표 후 백담사 은둔
전두환 전대통령이 자신의 재임기간 중 일어났던 모든 과오와 비리를 시인, 사과하고 어떠한 비난과 추궁도 각오한다는 내용의 대국민사과문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1988년 11월 23일 연희동 자택에서 발표했다.
TV로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발표된 대국민사과문에는 개인재산과 정치자금 1백39억원을 국가에 헌납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전씨는 오후 3시20분경 부인 이순자여사와 함께 연희동 사저를 떠나 설악산 백담사에 도착, 은둔생활에 들어갔다. 전씨는 이에앞서 5공비리 청산이 국민적 관심으로 급부상하고, 친동생인 전경환씨와 측근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 등 47명이 5공비리와 관련해 구속되자 이에 부담을 느끼고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직 사퇴와 정계은퇴를 발표한 바 있다.
백담사 은둔생활 중에도 국회 증인으로 출석해 수모를 당하기도 했던 전씨는 769일만인 1990년 12월 30일 연희동 자택으로 돌아왔으나 다시 은닉재산이 발각돼 1995년 12월 3일 구속되기도 했다.
1984년 판문점서 관광안내원 소련청년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 월남 망명 요청
1984년 11월 23일 오전 11시 35분경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북한측 안내를 받던 외국인 단체 관광객 중 소련 청년 1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유엔군 관할 지역으로 내려와 망명했다. 이 소련인이 군사분계선을 넘어 탈출하자 북한경비병 20~30명이 군사분계선을 넘어들어와 총격전을 벌여 유엔군측 경비병(한국군) 1명이 사망하고 1명(미군)이 부상했고 북한군도 2명 사망, 2명이 부상했다. 망명한 소련인은 22세의 대학생 신분의 관광안내원으로 판문점에 왔는데, 이름은 ‘바실리 야코블레비치 마투조크’로 확인됐다. 이 소련인은 망명 직후 미군 헬기로 서울미군기지로 이송됐으며 총상 없이 건강한 상태에서 망명 목적 등에 대해 조사를 받았다. 그는 다른 소련인 1명과 함께 망명을 기도했으나, 이 소련인은 총상을 입는 바람에 실패한 것으로 전해졌다.
1983년 미국 중거리 핵미사일 퍼싱2 서독 도착
1983년 레바논 이란과 단교
1983년 호요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 일본 방문
1981년 이춘덕, 제1회 계산기능대회(일본)서 세계계산왕에 당선
1981년 가야시대 철갑, 경남 김해에서 발견
1980년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진도 7.2의 지진 발생, 4,800명 사망
1977년 이영희 교수, `8억인과의 대화` 내용 일부 반공법 위반협의로 구속
1976년 앙드레 말로 사망
프랑스 작가 앙드레 말로가 파리에서 사망했다. 1901년 파리에서 태어난 말로는 동양어학교에서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작품을 발표했다.
그는 크메르문화의 탐험을 시작으로 중국혁명, 스페인내전, 반나치운동 등의 저항운동을 거쳐 2차대전후 1958년 드골이 정권을 잡자 정보장관, 문화장관까지 역임하기에 이른다.
그의 작품으로는 반나치운동을 벌이며 집필한 ‘경멸의 시대(1935)’와 스페인내전 중 공화파 의용군으로 참가했던 체험을 바탕으로 한 ‘희망(1937)’, 그리고 ‘예술의 심리(1950)’ ‘신들의 변모(1957)’ 등이 있다. 말로는 1969년 드골의 실각과 더불어 다시 저작활동에 들어가 ‘反회고록’을 발표했다.
1974년 미-소 정상회담 블라디보스톡서 개최
1974년 영화배우 김지미, 파나마 국제영화제서 여우주연상 수상
1973년 강원도 동고탄광서 메탄가스 폭발 사망 17명
1971년 중국,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선출
1968년 서울 남대문시장에 화재. 775점포 소실
화재비상령이 내려진 가운데 1968년 11월 23일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전기온돌 과열로 큰불이 났다. 불은 개방시장 2층건물(C, D동)과 舊대도백화점 3층건물(E동), 국제시장 등 7백75개 점포를 모두 태우고 꺼졌으나 이 과정에서 불을 끄던 소방대원 1명이 무너진 콘크리트 슬라브에 깔려 순직하고, 3명이 부상했다.
시장의 경비원은 "이날 새벽 4시 25분쯤 개방시장 C동2층 아동복부 339호 가게에서 불길이 솟아, 주변 점포와 3층으로 번져갔다."고 말했다. 신고를 받고 약 10분뒤 소방차 3대가 왔을 때는 개방시장 2층 건물이 거의 불길에 휩싸였고, 점포가 한 건물안에 붙어있어 불길을 쉽게 잡을 수 없었다.
화인을 조사한 경찰은 가게방에 설치된 전기온돌의 스위치가 켜져있는 것으로 미루어 온돌과열로 발화해서 방안의 옷가지 등에 불이 붙은 것으로 보고 가게주인과 점원을 중실화혐의로 입건했다.
1966년 중국 베이징 시내에 국가 주석 유소기를 비판하는 대자보 첫 등장
중국의 수도 베이징 시내에 국가주석 유소기를 `반 모택동의 수령` `중국의 흐루시초프` 등으로 비난하는 대자보가 처음으로 나붙었다. 이와 함께 유소기를 반대하고 당 주석 모택동을 지지하는 홍위병들의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문화대혁명의 일차 표적이 유소기임이 명백해지는 순간이었다. 유소기는 그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린 홍위병들로부터 야만적인 언어적-신체적 모욕을 당했고, 마침내 1969년 제8기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에서 출당과 함께 모든 공직이 박탈된 뒤 비참하게 죽었다.
문화대혁명은 사실상의 권력투쟁이었고 이 와중에 이념보다는 산업을 중시하던 유소기와 등소평 등의 실용주의자들이 제거됐다. 유소기는 1980년에 복권됐다.
1961년 아르헨티나서 여객기 추락 52명 사망
1961년 브라질 14년 만에 소련과 외교관계 재개
1960년 제4차 개헌(소급혁명입법) 통과
1958년 가나-기니 양국 합병협정에 조인
1955년 미국 원자력위, 소련서 최대의 핵폭발을 발표
1953년 미-일간 최초의 TV위성중계 실험방송 성공
1950년 국회, 2대 국무총리에 장면 인준
1946년 정당등록제 실시
1946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결성
9월 총파업과 10월 대구폭동을 두달 앞둔 1946년 7월 남북 좌익세력간에 새로운 결집 논의가 진행됐다. 북에서는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 합당해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을, 남에서는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등 좌익 3당이 합당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자는 움직임이었다.
북로당 결성은 소련 군정 지원하에 순조롭게 진행돼 8월 28일 창당됐지만, 남로당은 미군정의 탄압과 3당간의 헤게모니 싸움으로 예정보다 늦게 이뤄졌다.
남에서의 3당합당은 박헌영이 비밀리에 평양과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돌아온 후 여운형에게 좌익3당 통합을 요구한 1946년 7월부터 시작됐다. 여운형도 북의 진의파악을 위해 급거 평양을 방문했다. 1946년 8월 3일 인민당은 합당을 만장일치로 결정하고 공산당, 신민당에 합당을 제의하자 두 당도 응해 합당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공산당의 이정윤 강진 등이 당대회를 열고 지도체제를 개편하자고 요구하자 박헌영은 이들을 제명-무기정권시켰다. 공산당 내에서 논란이 확대되자 인민당과 신민당도 신중하게 합당을 추진하자는 의견이 대두돼 좌익3당 합당은 혼란상태에 직면했다. 박헌영은 9월 4일 합당을 지지하는 세력만으로 3당합당을 추진하기 위해 남로당준비위원회를 구성하자 인민당 당수 여운형과 신민당 당수 백남운 등이 반발했다. 결국 10월 6일 백남운 강진 등 박헌영 반대파들이 남로당과는 별개로 사회노동당을 결성하면서 3당합당이 무산되는 듯 했으나 소군정과 김일성 등이 반대파들을 비판하자 반대파들은 사회노동당 해체에 적극 나섰다.
결국 남로당은 11월 23일∼24일 양일간 결성대회를 갖고 공식출범했고, 사로당은 1947년 2월 자기비판과 함께 해체를 선언했다. 하지만 어렵게 결성된 남로당은 10월 대구폭동을 겪으면서 불법화된 상태였고 대중적 기반도 약화됐다.
1945년 신의주학생 반공의거
1945년 11월 23일 평북 신의주에서 남녀중학교 학생들이 `공산당 타도`를 외치며 반소(反蘇)-반공(反共) 시위를 벌인 ‘신의주 학생의거’가 일어났다. 그해 11월 21일 신의주 용암포의 구세학교에서 열린 시민대회에서 수산학교 4학년생 최병학 군이 기념사를 통해 폐교조치된 용암포수산기술학교의 복구를 요구하고 공산당 용암포 인민위원장 이종흡의 만행 등 공산당의 불법을 규탄하자 이를 지지한 학생들이 만세를 부르며 `학원의 자유`를 부르짖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됐다.
소련군과 공산당의 사주를 받은 폭도들이 이들을 기습, 제1교회의 홍석황 장로를 현장에서 죽이고 학생과 시민들에게 중상을 입히자, 격분한 신의주시의 6개 남녀중학생 3,500여 명이 11우러 23일 오후 2시부터 일제히 행동을 개시했다. 학생들은 `공산당을 몰아내자`, `소련군 물러가라`, `학원의 자유를 쟁취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시가지를 행진했다. 시위대를 향한 소련군과 공산당의 무차별 사격으로 23명의 학생이 피살됐고, 700여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2천여명의 학생과 시민이 투옥됐다.
사건 후에도 검거선풍이 불어 2,000여 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체포 구금됐으며 일부는 시베리아로 끌려가기도 했다. 함석헌 선생도 이때 수감되는 고초를 겪고 단신 월남했다.
광복의 기쁨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의 만행과 이들과 야합한 북한공산당의 동족탄압행위에 평소 쌓여왔던 분노가 이날 대대적으로 폭발한 신의주 학생의거는 북한주민의 반공의식을 대변한 것이었으며, 한국 학생들의 민족적 의기(義氣)와 애국심의 발로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반공의식이 고조되어 북한 각지에서는 이와 유사한 반공의거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1945년 조선일보 복간
1945년 상해임시정부 요인 14명(김구 포함) 환국
1945년 매일신보, 서울신문으로 속간
1943년 레바논 독립선언
1942년 미국 보스턴 나이트클럽에 불 491명 사망
1937년 임시정부, 호남성 장사로 이전
1936년 사진잡지 ‘라이프(Life)’창간
잡지 ‘타임’과 ‘포춘’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헨리 루스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사진의 이점에 착안해 1936년 11월 23일 정가 10센트의 주간 사진잡지 ‘라이프(Life)`를 창간했다. 잡지는 곧 절판됐고 큰 반향을 일으켰다.
창간호 사진은 마가렛 버크 화이트가 촬영했다. 라이프의 창간호 표지는 당시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진행중이던 포트맥 댐 사진으로 장식됐고, 지면은 9페이지에 걸쳐 포트맥 댐 건설 노동자와 가족사진을 게재했다. 라이프의 지명도를 높인 사진들로는 2차대전 종전 때 뉴욕타임스퀘어에서 한 여인과 키스하는 해군 장병(1945년), 아폴로11호의 달 착륙 특집호(1969년) 등이 있다.
그러나 라이프도 1972년 첫 휴간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당시 광고수입을 TV에 뺏겨 경영난에 빠진 것이 그 이유였다. 그후 연말 등에 특별호로 종종 출판되다 1978년 월간지로 복간됐으나 끝내 경영난을 이겨내지 못한 채 결국 2000년 6월부터 두 번째 휴간에 들어갔다.
1934년 부산 영도다리 개통
영도다리는 길이 214.63m, 너비 18.3m, 높이 7.2m로 1934년 11월 23일 준공되었다.
영도다리는 부산시청 남쪽에서 부산 영도의 북서단을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연륙교이자 일엽식 도개교로서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한 수송로, 보급로 구축을 위해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영도다리(영도대교)는 처음에는 부산대교로 불리었으나 부산항 개항 100주년을 맞아 착공한 부산대교가 준공한 1982년 2월에 비로소 영도대교로 개칭되었다.
오래 전, 영도다리는 다리의 한쪽을 들어올려 선박을 지나가게 하는 광경을 하루 6회씩 연출하면서 부산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으나 1966년 9월 부산 영도구의 인구증가에 따른 교통량의 증가로 도개가 중단되었다고 한다.
이후 2011년 4월, 완전 철거한 뒤 2013년 11월에 도개 기능도 복원하였다.
1934년 영국의 극작가 아서 윙 피네로 사망
1932년 고당 조만식 선생 조선일보사 제8대 사장에 취임
1924년 조선일보, 조-석간제 실시
1922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발기
1920년 대한독립군단 결성
1920년 월간지 「새동무」 창간
1914년 시인 이용악 출생
1895년 시조시인 이세보 사망
이세보는 조선후기의 문관으로 우리나라 시조문학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작가이다
선생은 조선시대 시조작가 중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459수의 시조 작품을 남겼는데, 흔히 다른 사대부들이 관념적이고 음풍농월적인 시조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부정부패 비판, 유배, 애정, 도덕, 절후, 기행, 계고, 유람유흥, 농사 등 작품 주제가 매우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세도정치로 혼미했던 조선후기 철종시대에 고관대작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당시 관료사회의 부정부패와 참상을 시조에 담아 비판·고발함으로써 사회질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으며, 판소리나 민요 등에서 보여지는 현실 비판의 민중가요 형식을 시조에 도입하고 월령체 시조를 처음으로 쓰는 등 기존의 전통적인 평시조의 형식과 내용에 새로운 변화를 주었다.
또한 시조사상 가장 많은 유배시조와 애정시조를 지었으며, 사대부로서 우리 민족의 고유시형인 시조의 마지막을 가장 성대하게 장식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의 시조집으로는 ‘풍아(風雅)’, ‘시가(詩歌)’ 등이 전해지고 있다
1814년 미국의 독립선언문 서명자, 부통령 게리 사망
1553년 이언적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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