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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4일 오늘의 역사
2021년 스웨덴 최초의 여성 총리 취임 몇 시간 만에 사임
2014년 일반 두개골 포함한 육식공룡 화석 경남 하동서 국내 최초 발견
2012년 제주올레 마지막 구간이자 26번째 길인 21코스 개통
2009년 허정무, AFC 올해의 감독상 수상
허정무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 AFC(아시아축구연맹)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2009 AFC 시상식에서 경쟁자인 북한의 김정훈 감독과 일본의 오카다 다케시 감독을 제치고 올해의 감독상(Coach of the Year 2009)을 수상했다.
허정무는 한국의 7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진출을 이끌었으며 27경기 연속 무패 행진으로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한국 감독이 이 상을 받은 것은 2003년 성남 일화를 K리그 3연패로 이끈 고 차경복 감독 이후 6년 만이다. 역대 한국 축구 감독 중에선 1995년 박종환(일화), 1997년 차범근, 2002년 거스 히딩크(이상 대표팀)에 이어 다섯 번째다.
2007년 파키스탄 육군총사령부 부근서 자살폭탄테러 사망 15명 이상
2005년 황우석 서울대 교수 대국민 사과
2004년 2월 13일 서울대 황우석(黃禹錫) 교수 연구팀이 세계 최초로 인간배아 복제 및 치료용 줄기세포 추출·배양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계기로 ‘황우석 신드롬’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의 과학 붐이 일어났으며, 황 교수는 과학자 중 처음으로 국가요인급 경호를 받게 됐다. 사이언스지는 17일자에서 황 교수의 연구 결과를 올해 10대 연구성과 중 세 번째로 뽑았다.
이어 황 교수팀은 2005년 5월 환자 맞춤형 배아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논문을 발표하고 8월 세계 최초 복제 개인 스너피를 공개해 전 세계의 시선을 모았다. 난치병 환자의 치료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올 연구 결과에 세계가 놀란 쾌거였다.‘노벨상 후보’ 반열에도 오르내렸다.
그러나 황 교수는 11월부터 급전직하(急轉直下)했다. MBC-TV의 PD수첩이 황 교수의 2004년 사이언스 지 게재 논문에서 사용된 난자의 출처에 대한 의문을 방송하면서 불거진 황우석 사태는 2004년 연구 때 금지되어 있는 ‘연구원의 난자 제공’으로 윤리 규정을 위반했다는 논란, 연구용 난자의 매매 의혹과 함께 2005년의 논문이 결국 조작된 것이라는 파문으로 이어졌다. 황 교수는 한순간에 ‘영웅’에서 추락해 전 국민을 울렸다.
이후 2005년 11월 24일 황 교수는 대국민 사과를 하고 연구원의 난자 이용 시인하고 줄기세포허브 소장 등 모든 겸직에서 사퇴하겠다고 발표했다.
2004년 미국 소설가 아서 헤일리 별세
70년대 할리우드 재난영화 붐을 일으킨 ‘에어포트’의 원작 소설을 히트시켰던 작가 아서 헤일리(84)가 잠자던 중 숨졌다고 그의 아내 셰일라가 25일 발표했다.
영국 태생인 헤일리는 ‘에어포트’ 외에도 ‘호텔’ ‘환전상’ 등 11편의 소설을 써 40개국에서 38개 언어로 출판돼 1억7000만부가 팔린 특급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하다.
1920년 잉글랜드의 루턴에서 태어난 헤일리는 가난 탓에 14세 이후 진학 길이 막히자 공군에 입대했으며 2차대전 중 조종사로 중동지역에서 정찰기를, 인도에서 수송기를 몰았다.
1947년 캐나다로 이주해 시민권을 취득한 그는 트랙터, 트레일러 판매업체에서 영업 책임자로 일했으며 이런 경험들이 그의 모든 작품의 배경으로 녹아 있다.
2002년 소설가 겸 음식비평가 홍성유씨 별세
홍씨는 영화 ‘장군의 아들’의 원작 소설가이자 식도락 기행을 쓰는 미식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28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법대를 졸업한 그는 1957년 한국일보 장편소설 공모에 6·25의 체험을 다룬 ‘비극은 없다’가 당선돼 문단에 데뷔했다. 그의 대표작은 조선일보에 1985년부터 1988년까지 무려 1432회를 연재했던 소설 ‘인생극장’이 있다. 8권의 단행본 ‘장군의 아들’로 묶여 나온 이 소설은 영화 ‘장군의 아들’과 드라마 ‘야인시대’로 이어지는 ‘김두한 열풍’의 신호탄이었다.
그가 ‘맛 칼럼니스트’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소설가 고(故) 김동리의 권유 덕분이었다. 호호백발이었던 머리를 비유, ‘백파’라는 호를 만들어준 김씨가 “당신이 알고 있는 음식맛을 우리 문인들도 좀 알자”고 권유해 문예지에 쓰기 시작한 ‘별미기행’은 국내 잡지와 신문으로 자리를 옮겨다니며 무려 30년간 계속되었다.
홍씨는 대한민국예술원상·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등을 받았고 한국펜클럽 이사, 문인협회 이사, 소설가협회장, 예술원회원 등을 지내는 등 활발한 대외활동을 벌였다
1999년 류찬우 풍산회장 별세
류찬우(76) (주)풍산 회장 겸 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이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류 회장은 1968년 산업의 기초소재인 동(銅)제품 생산업체 `풍산금속`을 설립한 뒤 30여년 간 한 업종에만 전념해왔고, 주력사인 (주)풍산을 동제품 부문에서 세계 3위의 기업으로 키웠다. 그는 1970년부터 탄약의 기초소재인 동을 원자재로 방위산업에 참여해 소총탄에서 포탄에 이르기까지 각종 탄약을 개발 생산하는 등 국군 전력 증강에 기여해왔다. 지난 17년 동안 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직도 맡았다. 별세 20일 전 이러한 공로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경북 안동에서 출생해 대구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1959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역업으로 크게 성공한 뒤 당시 정부의 해외교포 자본의 유치정책에 맞춰 귀국했다. 이후 타업종에 눈돌리지 않고 비철산업 한 업종에만 매진해온 그는 "한가지라도 세계 최고가 돼야 나라 경제가 산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서애 류성룡 선생의 12대 손으로, 안동 하회마을을 중심으로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1997년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 여사 별세
윤보선 전 대통령 부인 공덕귀(86) 여사는 생의 대부분을 소외당한 이웃을 돌보는 사회운동가로 보냈다.
1911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난 공여사는 일신고등여학교, 일본 요코하마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7년 조선신학교(현 한신대학) 전임강사로 재직 중 당시 서울시장이던 윤보선씨와 결혼, 파란 많은 정치가 아내의 길로 들어섰다.
공여사는 제2공화국 시절 짧은 영부인 생활을 지낸 뒤 사회운동가로 나섰다.
여사는 환갑도 훨씬 넘은 1974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초대 인권위원장을 맡아 인권운동에 앞장섰으며, 구속자가족협의회 회장, YH대책위원회 위원 등을 맡아 민주화 운동에 동분서주하다 경찰차에 실려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공여사는 1993년 평생 소원이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혼수상태에 빠진 뒤 의사소통이 수월치 않을 만큼 건강을 잃었지만, 1994년10월 자신의 80평생을 정리하는 자서전 ‘공덕귀-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를 출간하기도 했다.
1993년 인도 고속열차와 탈선한 화물열차 충돌 사망 22명 부상 260여명
1992년 중국 여객기 보잉 737기, 이륙 30분만에 추락 승객 133명과 승무원 8명 사망
1989년 북경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제5차 남북체육회담 열림
1984년 월성 원전서 압력보호밸브 정기점검 중 중수누출
1984년 한국표준연구소(대덕), 표준주파수와 표준시간 알리는 표준주파수국 개국
한국은 아시아에서 다섯번째로 1984년 11월 24일을 기해 대전 대덕과학연구단지 내 한국표준연구소에서 개국되었다.
한국표준주파수국의 경우, 5 MHz의 일정한 주파수 발신과 함께 표준시각 ·세계시 (UT:universal time) 보정신호(補整信號)를 보내는 한편 BCD 시간도 방송하며, 1분마다 음성으로 시간 안내 및 방송국 안내도 한다.
또 기상정보 ·전파상태예보 ·재해경보 등을 추가하는 한편, 야간 이용자를 위해 2.5 MHz 표준주파수로 방송한다.
이의 개국으로 일반국민은 전국 어디서나 간단한 단파수신기로 손쉽게 정확한 시각을 알 수 있게 되었으며, 철도 ·항해 ·항공 등의 시간통제면에서도 정확성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
1983년 호요방, 북한 아웅산테러 간접비난
1983년 이스라엘-PLO 포로교환
1982년 일본, 왜곡교과서 시정키로 결정
일본 검정교과서가 사실을 왜곡, 한국 침략을 ‘진출’ 등으로 기술함으로써 7월말부터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다.
한국 국민들은 곧 대일규탄대열에 나섰고 우리 정부도 시정을 촉구하는 비망록을 전달, 일본 정부는 11월말 ‘국제관계 배려’라는 새 검정기준을 추가함으로써 파동이 일단락됐다. 이를 계기로 독립기념관 건립이 추진돼 12월까지 3백30여억원의 성금이 모금됐고, 건립지는 충남 천원군 목천면으로 결정됐다.
1981년 미국 보잉사, 크루즈미사일 첫 생산
미국의 보잉사가 크루즈미사일을 생산하는데 성공했다. `순항미사일`이라고도 불리우는 크루즈미사일은 무인제트기 모양의 신형미사일이다. 미국은 1967년 중동전쟁 중, 이집트함정측에서 소련제 미사일인 스틱스미사일을 이스라엘 에이라트호에 발사하여 격파한 것에 자극받아 크루즈미사일 개발에 착수했었다.
크루즈미사일은 저공비행이 가능하고, 방공레이더를 포착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표적을 우회하여 공격할 수 있는 특징을 가졌다. 또, 명중률도 높다. 미국은 공중발사용(ALCM)과 잠수함발사용(SLCM)의 두가지를 개발했다.
특히 미국은 TERCOM(Terrain Contour Matching)라는 고성능의 유도장치를 개발함으로 크루즈미사일의 큰 발전을 가져왔다. 크루즈미사일의 발달로 차기 전략폭격기 B-1 제조를 중지하고 크루즈미사일만을 의존한 결과, 미·소 제2차 전략무기 제한협정에서 ALCM은 수량을 제한하고, SLCM은 사정거리를 600 km 이하로 제한하기도 했다.
1981년 한국 근.현대문학을 정립한 문학평론가 조연현 사망
1979년 11월 24일 YWCA 위장결혼 사건
계엄하인 1979년 11월 24일 윤보선, 함석헌, 김병걸, 백기완 등 1000여 명의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 서울 명동 YWCA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결행했다.
10.26사건 이후 유신체제의 앞날은 비관론과 낙관론이 엇갈리면서 불확실해졌지만 11월 10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실시방침이 발표되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 대행이 후보로 나설 것이 분명해지면서 자연스럽게 비관론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 유신잔재로 유신종식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중심에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 있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정치권은 최 대행 체제하에서 직선제 개헌을 추진하면 된다는 낙관론이 힘을 얻고 있었고 결국 비관론자들이 정치권의 외면 속에서 반정부 시위를 결행한 것이다.
12월 27일 계엄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00여명이 명동 YWCA강당에 모여 최규하, 김종필의 유신정부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과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한 뒤, 유신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의 개입을 일절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 박종태, 양순직, 김병걸 등 96명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검거됐다.
1978년 전세계 라디오 주파수 변경
1976년 염동균 WBC 슈퍼밴텀급 세계챔피언 획득
염동균이 세계정상도전 두 번째 만에 한맺힌 타이틀을 쟁취했다. 1976년 11월 24일, 5천명의 관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거행된 WBC 세계슈퍼밴텀급 타이틀전에서 고바야시를 2대0의 판정승을 따내 승리를 거뒀다.
염동균은 1회전서 레프트를 구사하며 유리한 경기를 이끌던 중 공이 울리기 직전인 2분40초 만에 다운을 빼앗았다. 시종 큰 펀치와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명중시키며 11라운드까지 고바야시를 궁지로 몰던 중 차츰 고바야시의 몰아치는 공세로 잠시 기세를 압도 당했지만 크런치작전으로 이를 모면, 타이틀을 따냈다.
이로써 염동균은 55전47승(20KO) 6무2패를 기록했으며 고바야시는 24전21승(18KO) 3패의 전적을 마크했다. 이 경기에서 염동균은 1만5천달러의 개런티를 받았다.
1975년 유엔, 고문금지선언 채택
1969년 미-소, 핵확산방지조약 비준
1966년 아시아개발은행(ADB) 창립 총회
아시아 지역의 경제성장, 경제개발 촉진, 경제협력 증진을 위해 아시아개발은행(ADB: Asian Development Bank)이 설립됐다.
1963년 아시아극동경제위원회에서 ADB설립을 제안하고, 1965년 마닐라에서 설립협정에 동의해 이날 설립된 ADB는 1966년 12월부터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우리나라를 포함 57개국이 가입했고, 본부는 필리핀 마닐라에 있다.
주요구성은 최고정책기관인 총회, 업무운영을 관여하는 이사회, 총재, 총재의 지휘하에 업무부문으로 이루어졌다. ADB의 주요업무는 가입국에 대한 기술원조, 실태조사, 프로젝트에 대한 융자, 대출 등이다. 아시아개발기금의 재원은 자본금, 아시아개발은행채의 발행에 의한 차입금, 다목적 특별기금, 기술원조 특별기금. 아시아개발기금이 있다.
1965년 정부와 여당 제2차 5개년 계획 요강 마련
1963년 케네디 대통령 암살범 오스왈드 피살
케네디가 암살되고 이틀 후인 1963년 11월 24일, 살해 용의자 오스왈드가 경찰들이
버젓이 지켜보는 앞에서 피살됨으로써 케네디 암살사건은 영원한 미궁 속에 빠졌다.
오스왈드는 군형무소로 옮기기 위해 경찰서 지하실을 나오던 중이었다.
오스왈드는 ‘나는 희생양’이라고 주장하다 죽었지만 사건을 조사한 워런 조사위원회는 그의 단독범행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모든 게 의혹투성이였다.
정밀조사 결과 오스왈드에게는 발포 흔적이 없었고, 조잡한 구식총으로는 80m 떨어진 건물 6층에서 단 6초 만에 3발을 발사해 이동 중인 케네디를 명중시킨다는 것은 명사수라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더구나 체포 초기 12시간 동안의 조사기록이 없어 의혹을 부채질했다.
케네디의 복수를 위해 오스왈드를 살해했다고 큰소리친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는 댈러스에서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며 워싱턴에서의 조사를 원했지만 결국 사형선고를 받고 수감 중 1967년에 심한 기침과 구토 증세를 보이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1961년 유엔총회 아프리카 비핵지대안 가결
1960년 사회대중당 결성. 위원장 김달호
1956년 한국-이탈리아 국교 수립
1950년 네덜란드군, 한국참전
1950년 맥아더장군, 한국전에 종전 총공격을 명령
1949년 한국,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가입
1944년 미공군 B29 70여대, 일본의 동경 첫 공습
1934년 조선일보, 조선박물전람회 개최
1919년 델리에서 全인도 칼리프옹호대회
1912년 제2인터내셔날 바젤대회 개최
1911년 무용가 최승희 출생
최승희(崔承喜)의 생몰(生沒)이 정확히 알려진 것은 2003년 초 북한 TV가 애국열사릉에 있는 그의 묘비화면을 보도하면서였다. 묘비에는 ‘1911년 11월 24일생, 1969년 8월 8일 서거’라 쓰여 있었다.
최승희를 무용으로 이끈 것은 16세에 처음 접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 이시이 바쿠의 서울공연이었다. 이시이를 따라 도일, 문하생으로 3년간 무용을 배우고 돌아온 최승희는 1930년 서울에서 제1회 신작발표회를 갖고 한국 현대무용의 태동을 알렸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무용가로서의 최절정기를 그곳에서 맞아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1938년부터 시작된 3년간의 해외공연은 가는 곳마다 대성황을 이뤄 그에게 ‘동양의 진주’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미국·유럽·남미 등 각국을 순회하며 마사 그레이엄과는 합동공연을 했고 찰리 채플린, 피카소, 장 콕토 등과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41년 말부터 광복 때까지 계속된 일본군 위문공연은 그에게 낙인 같은 ‘친일’ 딱지를 붙여주었고 이후 그는 남북 양쪽에서 외면당하는 신세가 됐다. 친일 전력은 그를 월북으로 내몰았고, 북한 역시 그를 한때 인민배우로 이용하다 반혁명예술가로 몰았다.
1902년 소설가 주요섭 출생
호는 여심(餘心) 또는 여심생(餘心生)으로 1902년 11월 24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숭실중학, 도쿄 아오야마학원을 거쳐 중국 호강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교육학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신동아’ 주간, 북경 보인대학 교수를 역임했다. 1943년 일본의 대륙 침략에 협조하지 않는다 하여 추방 명령을 받고 중국에서 귀국했다. 광복 후에는 ‘코리아 타임스’ 주필, 경희대 교수,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사무총장 및 위원장, 코리안 리퍼블릭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21년 ‘깨어진 항아리’를 『매일신보』에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발표한 ‘추운 밤’(1921), ‘인력거꾼’(1925), ‘살인’(1925), ‘개밥’(1927) 등은 하층민의 생활과 반항의식을 그린 단편으로 신경향파 문학론이 실제 창작으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1930년 장편 ‘구름을 잡으려고’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고, ‘사랑 손님과 어머니’(1935), ‘아네모네 마담’(1936), ‘추물(醜物)’(1936) 등을 발표했는데, 여성 심리 묘사에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광복 후에는 단편 ‘눈은 눈으로’(1946), ‘대학교수와 모리배’(1948)와 장편 ‘망국노군상(亡國奴群像)’(1958~1960) 등을 발표했다.
소설집으로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48), ‘미완성’(1962) 등이 있다. 주요섭의 초기 작품은 중국 상해(上海)를 배경으로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의 비참한 생활상을 리얼하게 묘사하였으며, 그 밑바탕에는 강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었다. 1930년대에 와서 그의 작품 활동은 휴머니즘이 애정의 세계로 승화되어 애틋하고 소박한 경지로 발전한다. 광복 후의 작품들은 다시 사회적인 현실인식이 드러난다.
1972년 11월 14일 사망했다.
1894년 중국혁명가 손문, 미국 하와이에서 흥중회 창립
1884년 한성조약(漢城條約) 체결
한성조약은 1884년(고종 21)의 갑신정변(甲申政變) 뒤처리를 마무리짓기 위하여 일본과 맺은 조약이다.
1885년 김홍집(金弘集)과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사이에 체결된 조약으로, 일본 조해민(遭害民)에 대한 진휼금(賑恤金)․공사관 재건비(再建費)의 보상 등 몇 가지를 규정하고 있다.
조선 내에서는임오군란(1882), 갑신정변(1884)등 정치적 격변이 자주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이 발발할 때면 청나라와 일본이 관련되고, 두 나라의 대립이 이루어졌으며 일본측은 일방적으로 피해를 당하자 세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청나라는 월남에서 프랑스와 충돌하고(청-프랑스 전쟁 1884 ~ 1885) 있던 터라, 일본과는 평화롭게 사건을 해결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를 이용하여 일본은 군사를 이용하여 조선과 조약 체결을 강행하였다.
일본은 갑신정변을 피해 일본으로 귀국한 다케조에[竹添進一郞] 공사를 조선으로 보내 예비교섭을 주선하였다.
그는 사변시말서(事變始末書)를 제출하여, 정변 당시 일본측이 행한 행동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일본 공사가 난도들(정변 주동자)을 비호하였고 그들을 일본으로 피신시킨 장본인이므로 책임이 크다고 주장하여 그의 협상 의지를 꺾어버렸다.
전권대신의 명을 받은 외무경 이노우에[井上馨]는 서기관 곤도[近藤眞鋤],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D. W. Stevens)와 함께 육군중장 다카시마[高島鞆之助], 해군소장 가바야마(樺山資紀)가 지휘하는 2개 대대병력과 7척의 군함의 호위를 받으며 한성에 들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하는 수 없이 좌의정 김홍집(金弘集)을 전권대신으로 임명하여 협상에 들어갔다(1884. 11. 22).
일본측은 여러 가지 요구를 강하게 하였으나, 공사관 건축비를 반으로 삭감하고, 공사관 호위병 1,000명을 주둔시키겠다는 요구를 제외시키도록 하는 데 합의하고 대체로 일본측 요구대로 협상이 이루어졌다.
일본측은 한국측의 요구인 김옥균(金玉均)의 반환을 인도적으로 수용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으나, 다케조에 공사 등을 일본으로 송환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일본측도 갑신정변에 대한 책임을 느끼고 있었으나, 무력시위를 통해 협상을 강행한 것이다.
1876년 일본 세균학자 노구찌 히데요 태어남
1739년 프랑스, 혁명력을 공포. 1806년 폐지
1713년 영국 소설가 로렌스 스턴 출생
1632년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 출생
1617년 이항복, 광해군의 폐모론을 반대하는 상소문 올림
이항복이 1617년 11월 24일 광해군의 패덕을 비판하고 폐비의 불가함을 지적한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다. 광해군의 가장 큰 패덕은 폐모살제였다.
폐모살제는 비록 계비이긴 했어도 모후가 분명한 인목대비(선조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부왕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강화도에 귀양보냈다가 증살(쪄서 죽이는 것)한 일을 말한다. 정인홍 이이첨 등의 주도하에 3사에서 최종 결정한 폐모론은 온 조정을 술렁거리게 했다. 사안의 민감성 때문에 대신들이 병을 핑계로 좀처럼 조정에 나서지 않자 병으로 반신불수 상태에 있는 이항복은 병환중에도 임금의 폐모론을 비판하기로 결심, 이날 상소하게 된 것이다.
상소문이 알려지자 백관들 사이에는 동요가 다시 일었고 폐모론에 반대하는 신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결국 이항복은 유배형을 받고 유배지인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이항복은 끝내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유배지에서 1618년 세상을 떴다. 64세였다. 백사 이항복은 임진왜란 당시 피란길에 오른 선조를 의주까지 수행하면서 왕조의 위기를 넘긴 충신이었다.
1580년 알성문과에 급제, 벼슬길에 들어선 이항복은 임란 당시 병조판서로 명나라 원군을 맞아들여 왜군을 물리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지만 강직한 성품 탓으로 1591년에는 좌승지로 정철의 죄를 처리하는데 태만했다는 이유로 파면됐고, 1602년에는 성혼을 구하려다 탄핵받고 사직했다. 1613년에도 언관의 탄핵으로 사직했다.
1560년 임꺽정 일당 체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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