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상여놀이 |
|
지게상여놀이는 죽장면 지역에서 전승되어 오는 향토 고유의 민속놀이로 지게로 상여를 만들어 장례 때의 운구를 흉내 내는 놀이다. 그러나 넓은 의미로는 죽장 지역 사람들이 지게를 지고 산에 나무하러 가거나 풀 베러 가는 과정에서 벌이는 놀이의 총칭으로 여기에는 「지게상여놀이」뿐만 아니라 「짱치기」라는 민속놀이와 「지제목발노래」,「어사령」과 같은 민요까지 포함된다. 즉 죽장면 지역에 전해 오는 네 가지의 서로 다른 민속놀이가 하나로 통합된 형태의 민속놀이다. | | |
|
|
|
민속놀이가 하나로 통합된 계기는 1986년 10월, 영일군에서 주최한 일월문화제 민속경연대회에 죽장면을 대표하여 참가하면서 하나의 민속놀이로 엮어지게 되었다. 놀이의 전개는 지게를 지고 산에 오르다가 따분함을 느끼면 무리 중 연장자에 해당하는 이가 “지게행상 하고 가자.”하면, 일제히 “예”하고는, 지게를 벗고 땅에 주저앉아 통곡하는 시늉을 한다. 사람이 죽었다는 표시이기도 하고, 이웃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때에는 신을 벗어 쥐거나 막대기를 들고 땅을 치며 애통해 하는 시늉을 한다.
지게상여를 만드는 데는 지게 10개 정도가 필요하다. 우선 8개를 2개씩 지게뿔이 서로 어긋나게 단단히 묶은 다음 지게를 최대한 벌려 4쌍을 나란히 놓고 지게 작대기를 지게뿔이 연결된 부분 위아래에 가로로 다시 묶고, 목발은 목발끼리 묶는다. 연결된 지게를 땅에 놓고 윗부분 중앙이 나머지 지게 2개를 마주보게 엎어놓고 묶는데. 이 두개의 지게는 관을 상징한다. |
|
|
입암 28경(立岩二十八景) |
|
여헌 장현광은 임진왜란 이후 1596년 43세경부터 정유재란기에 입암에 머물렀다. 그 뒤 이곳의 경치와 학문여건을 사랑하여 정자를 짓고 문하를 모아 학문을 강토하고 저술하였으며 다양한 출처를 거쳐 1637년 84세에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입암 28경은 여헌 장현광 자신의 시편 "입암십삼영(立巖十三詠)" 에서 부터 노래되기 시작했으며,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크고작은 것들이 다 빼어난 경치를 지니고 있고 그 이름도 이름 지은이의 학문적 태도와 풍류를 잘 드러내고 있다고 한다. 그 뒤 노계 박인로의 <입암>이하 29수의 연시조에서 입암 28경에 대한 경치와 절경을 노래하기도 했다. | | |
|
입암 28경의 분포는 죽장면 소재지 남쪽 세이담으로부터 입암리 일원과 동쪽 산지령에 이르기까지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반경 2km 이내에 걸쳐 있다. |
|
|
탁입암(託立岩) |
|
입암 또는 탁입암이라고 부르며 입암 28경이 입암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며 입암리의 지명도 여기에 근거하여 정해졌다고 한다. 죽장면 소재지에서 상옥쪽으로 300여m 가다보면 도로변 좌측 마을이 솔안마을인데 마을앞에 20여m 높이의 입암이 우뚝서있고 우측에 일제당이 보이며 일제당과 입암 사이에 계구대가 있고, 일제당 뒷편에 기예암이 있다. |
|
|
기예암(起豫岩) |
|
기예암은 일제당 뒷편 바위 언덕으로 바위틈사이에서 자란 나무들이 고풍스러움을 더해 주며 계구대와 연접해 있고 그 명칭은 논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하고 여헌 선생은 기여암이라 불렀다고하며 기예암 옆에 물멱정이란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만활당 옆에 오래된 우물이 물멱정이 아닌가 추측하는 사람이 많다. |
|
|
피세대(避世台) |
|
구인봉의 동쪽면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절벽 아래로 소를 이루며 물이 흐른다. 이곳을 입암서원쪽에서 보면 절벽의 하단부에 평평하게 방처럼 패인곳이 있는데 이곳을 피세대라 하는데 여헌은 "後負危崖 前臨險流 又爲九 인 之所蔽擁 幽閑深寂 漠然與外人若不相接(후부위애 전임험류 우위구인 지소패옹 유한심적 막연여외 인약불상접)"이라 하면서 초옥 수간을 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높지 않아서 물이 불으면 잠기므로 짓지 못하겠다고 했다." 이라 하면서 초옥 수간을 지을 수 있겠는데 다만 높지 않아서 물이 불으면 잠기므로 짓지 못하겠다고 한다. |
|
|
초은동(招隱洞) |
|
초은동은 심진동(尋眞洞)과 함께 입암이십팔경의 초입에 해당한다. 죽장면 일광리(광천마을)를 지나 멀리 죽장장터가 보일 즈음에 왼쪽으로 속칭 까치소, 부엉드미 사이의골짜기, 즉 도덕골이란 곳이 초은동이며 그 다음 골짜기가 심진동이다. 여헌은 "동재하구자 명이초은 연부미익어환해이막지반자야 동재계상자 명이심진 사부포진비둔자이부득견야(洞在下得者 名以招隱 憐夫迷溺於宦海而莫之返者也 洞在溪上者 名以尋眞 思夫抱眞肥遯者而不得見也)" 라고 명명한 이유를 밝혔다. 골짜기가 좁고 한적하며 깊이 들어가면 양편에 약간의 밭들이 있고 민가도 있었던 곳이다. |
|
|
경심대(鏡心台) |
|
탁입암의 정면에 펼쳐진 암반을 경심대라고 하며 냇물이 많을 때는 대부분 물에 잠기며, 가운데 수어연을 감싸고 있다. |
|
|
계구대(戒懼台) |
|
입암과 기예암 사이에 있는 절벽이 계구대이며 계구는 중용의 戒愼乎其所不睹(계신호기소불도) 恐懼乎其所不聞(공구호기소불문)에서 나온 말로 도를 떠나지 않도록 경외(敬畏)하여 마음에 천리본연의 상태를 유지해야 함을 함축한 말이다. |
|
|
수어연(數漁淵) |
|
탁입암의 정면에 펼처진 암반이 경심대인데 경심대 가운데에 바위가 패어서 늘 물이 고이는는 곳으로 수심이 항상 1m이상을 유지할 정도로 깊고 맑으며 물고기가 노는 것을 구경하며 셀수 있다하여 수어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
|
|
토월봉(吐月峯) |
|
입암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봉우리를 가리킨 것으로 솔안마을 뒷산줄기가 서원 뒤쪽으로 흘러 서원의 동편에 이룬 둥근 봉우리인데 교훈적 가탁없이 서정적으로 사물을 파악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
|
|
상두석(象斗石) |
|
일제당 앞뜰의 하천가에 작은 바위들이 북두칠성과 같이 놓였다하여 그 일곱 개의 바위를 상두석이라 한다. |
|
|
답태교(踏苔橋) |
|
계구대나 일제당에서 탁입암의 앞쪽으로 돌아 나오려면 몇 개의 작은 바위를 돌다리 처럼 밟아야 된다고 하여 답태교라 한다. |
|
|
세이담(洗耳潭) |
|
초은동 입구의 자호천에 속칭 "까치소"란 소가 있는데 물이 맑고 깊어 이를 세이담이라고 명명하지 않았겠나 생각한다. |
|
|
화리대(畵裡台) |
|
입암 장터에서 69번 지방도를 따라 입암까지의 하천주변이 야연림 자리이다. 이 야연림 자리를 따라 서원을 향해 오다가 솔안마을 들어가는 향옥교(響玉橋) 못가서 북쪽 산에 붙여 선 바위가 화리대이다. 그 모양이 특이한 것은 아니어서 기문에서도 "수불능자기 이제령제봉제암제석범일안소수득자 홀난상 의의화중 사비진면(雖不能自奇 而諸嶺諸峯諸巖諸石凡一眼所收得者 惚難狀 依依畵中 似非眞面)" 이라고 하였다. |
|
|
경운야(耕雲野) |
|
지금의 죽장면사무소 뒤로 자리잡은 마을이 입암 큰마을 평지동이다. 이 마을에는 주로 동봉 권극립(東峯 權克立)의 후손인 안동권씨들이 세거하고 있는데, 현재의 마을자리와 거기서 탁입암쪽 들이 경운야이다. 입암에서 바라보면 격진령(隔塵嶺)이 이 들 뒤로 내려오면서 바깥 세상을 가로막고 있고, 입암 아래로 흘러가던 가사천(佳士川)은 이 들 앞으로 사라진다. 여헌은 기문에서 각별한 관심으로 이 명명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였다. |
|
|
정운령(停雲嶺) |
|
계구대(戒懼臺)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마주치는 것이 구인봉이며, 구인봉에서 남쪽으로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수석봉:해발820.5m)가 정운령(停雲嶺)으로 초은동의 뒷산 정상이다. |
|
|
함휘령(含輝嶺) |
|
정운령의 동쪽으로 더 멀리 보이는 높은 봉우리가 함휘령이며, 기문은 "매견백운정취어기정 혹여관건지대수 혹여횡대지재요 유혹애학엄장진자 유혹봉만노출반자(每見白雲停聚於其頂 或如冠巾之戴首 或如橫帶之在腰 有或崖壑掩藏盡者 有或峯巒露出半者)" 하다고 하여 꼭 어느 지점이라기보다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보이며, 봉화봉(해발610m)주변을 가리킨다고 한다. |
|
|
산지령(産芝嶺) |
|
<입암기(立巖記)>는 산지령의 위치에 대해 다만 "토월봉지동 유령심수 반장반로 창연울연 초부채객 선혹적언자(吐月峯之東 有嶺深秀 半藏半露 蒼然蔚然 樵夫採客 鮮或跡焉者)" 라고만 하고 있을 뿐, 구체적으로 골짜기나 봉우리의 위치를 지적하지는 않았다. 현지의 고로들은 욕학담의 뒷산 골짜기와 봉우리를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다. 토월봉의 동쪽이라 했지만 함휘령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산지령의 산이 서쪽으로 가서 함휘령을 이루었다고 했고, 산지령 설명에서 반은 감추이고 반은 드러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도 역시 욕학담 뒷산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명명을 설명하면서 상산사호(商山四皓)의 자지가(紫芝歌) 고사에 대한 존경을 표하고 있는 것도 구체적 경물보다 관념적으로 그 일대를 가리킨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
|
|
채약동(採藥洞) |
|
서원에서 마주 보이는 가까운 봉우리가 구인봉이고 구인봉 뒤로 멀리 보이는 봉우리가 함휘령(含輝嶺)인데 지도상으로 해발 610미터의 봉화봉(烽火峯)이다. 이 함휘령에서 입암 방향으로 흘러 내리는 골짜기를 채약동(採藥洞)이라 했다. 한시를 전문 번역인용한 시조에서 보듯이 구체적으로 승경을 지적한 것은 아니며 멀리 보이는 아름다운 골짜기를 함휘령의 의미와 조화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
|
|
조월탄(釣月灘) |
|
31번 국도상에 입암1교와 입암2교를 가설하면서 합류대를 깨고 조월탄을 매워 지금은 흔적도 없으나 입압1·2교 사이의 산자락이 하천과 접하는 부분에 합류대가 있었으며 그 아랫쪽 죽장초등학교 뒷편쯤에 조월탄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
|
|
구인봉(九인峯) |
|
계구대에서 정남 방향으로 내 건너편에 선 봉우리가 구인봉이다. 송내교를 건너기 직전 오른쪽으로 붙은산인데 동쪽면이 절벽으로 되어 있고 <입암기(立巖記)>에서 "봉재계지남 입암재계지북 약상공읍자연(峯在溪之南 立巖在溪之北 若相拱揖者然)" 이라 하여 입암과 서로 읍하는 형상이라했다. |
|
|
욕학담(浴鶴潭) |
|
입암서원에서 상옥 쪽으로 600여m 올라 가다보면 물이 맑고 암벽이 절경을 이루는곳이 있는데 여기를 욕학담이라 하는데 학소, 학담, 학소대 등으로 부르고 있으며, 옛날에 욕학담 옆에 낙문사란 절이 있었다고 전합니다. |
|
|
소로잠(小魯岑) |
|
입암이 있는 솔안마을의 서쪽 "달바위산" 산등성이는 마을 뒤로 경사를 이루면서 높이 솟아 있다. 이것을 여헌은 공자의 "등동산이 소로 등태산이소천하(登東山而 小魯 登泰山而小天下)" 고사에 의하여 소로잠이라 불렀다. |
|
|
물멱정(勿冪井) |
|
<입암기(立巖記)>에는 기여암 옆에 우물이 있어서 물멱정(勿冪井)이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기여암에서 좀 떨어진 만활당(萬活堂) 동북쪽에 마르지 않는 우물이 있어서 마을 사람들이 물막정이라 부르니, 혹 여헌이 명명한 물멱정인지도 알 수 없다. |
|
|
심진동(尋眞洞) |
|
심진동과 초은동은 죽장면 소재지에 이르기 전 자호천에 절경을 이루고 있는 속칭 까치소에서 일광리의 개일이 심진동이고 도덕골이 초은동이라 칭한 것으로 보인다. |
|
|
야연림(惹烟林) |
|
입암장터 입암1교에서 서원쪽을 향하여 가사천(佳士川)을 따라 걸으면 그 길이 야연림(惹烟林)터이다. 명명 당시에는 이 냇가를 따라 전아한 숲이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지금은 숲을 전혀 볼 수 없고 69번 지방도로가 숲이 있던 자리에 닦여 있다. |
|
|
상암대(尙巖台) |
|
욕학담의 100여m 하류에 "자래소"란 곳이 있는데 이곳 계곡을 가로지르는 암반을 상암대라 한다. |
|
|
향옥교(響玉橋) |
|
입암의 50m 하류에 지방도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세월교가 있는 부분이 향옥교 자리로 바위 사이로 맑은물이 흐르고 아직도 큰 바위들이 아름답다. |
|
|
합류대(合流臺) |
|
탁입암 쪽에서 흐르는 가사천과 월평리 쪽에서 흐르는 자호천이 합류하여 영천댐으로 흘러들게 되어 있는데 합류하는 지점에 큰 바위가 있어 이를 합류대라 하였으나 31번 국도상에 입압1교와 입암2교가 가설되면서 없어졌다. |
|
|
격진령(隔塵嶺) |
|
함휘령의 서쪽으로 마을을 향해 낮아지는 봉우리가 격진령(隔塵嶺)인데 지금의 죽장초등학교 앞산 능선입니다. |
|
|
|
|
죽장면 입암리에 위치한 산남의진기념비 (투혼에 빛나는 의병활동) |
|
정용기, 최세윤으로 이어진 산남의진은 신돌석부대와 함께 구한말 제2단계 의병 운동을 대표하는 의진으로, 주로 포항, 영일 일대를 중심으로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었다. 산남이라 함은 경상북도 문경 새재 이남의 영남 지방을 이르고, 의진이라 함은 오직 구국 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 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기개있는 선비와 우국 지사들은 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하였다.
당시 삼남도 시찰사 정환직은 평소 고종의 신임을 받고 있던 몸으로 왕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밀지를 받게 되었다. "경이 화천지수(華泉之水)를 아는가?" 이는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서, 정환직으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데 힘을 써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내용이었다. 이에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와 함께 의논 끝에, 아버지 환직은 서울에서 군사를 모집, 가산을 정리하여 각종 무기를 마련하고, 특히 인천의 중국 상인들을 통하여 신식 무기를 몰래 들여와, 이를 석 달 후까지 강릉으로 옮기기로 하며, 아들 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규합. 강릉으로 북상하도록 하되, 대구, 대전을 거치게 되면 반드시 왜병들의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므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기로 하고, 도중에 이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는 영덕 지방의 신돌석 의진과도 합세하기로 하였다.
작전 계획을 수립한 후 정용기는 즉시 영천으로 내려와 평소에 큰 뜻을 함께 하던 친구인 이한구, 정순기 등과 함께 인근 각처의 선비와 유림들에게 격문을 발송하여 의병을 규합하니, 순식간에 3,000여 명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정용기는 이들 무리의 대장으로 추대되고, 군호를 산남의진이라 칭하니, 이 때가 광무10년(1906년) 2월이었다.
이해 3월 정용기를 대장으로 한 3,000여 명의 의병들은 강릉을 향하여 출발하였으며, 강릉에 운집한 의병이 대관령을 넘어 서울로 돌진하면, 경기 지방의 의병도 이에 호응하여 끝내는 서울의 적을 몰아낼 수 있으리라는 최후의 목적을 염두에 둔 의병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산남의진의 행렬이 영일군(지금의 포항시) 신광면 우각동 앞에 이르렀을 때, 대구의 의진에서 급히 보내는 서한을 가져왔다는 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편지의 내용인 즉,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이 지금 경주로 내려와 있으니 즉시 와서 만나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정용기는 부친과 헤어진 후, 의병을 규합하고 북상하게 된 그 동안이 경과를 아버지에게 알리려는 급한 마음에서 지휘권을 임시로 이한구에게 맡기고 심부름 왔다는 자와 함께 경주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대구 진위대 경주 제8대대 분견대장 신석호란 자의 계략으로 정용기는 관군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으로 송치되고 말았다. 일시 산남의진의 지휘권을 위임받은 이한구는 의병을 인솔하고 청송군 진보까지 진군하여 주둔하면서 대장의 귀진을 기다렸으나 대장의 체포소식을 접하고는 일시 의병을 해산하고 대장의 출옥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정용기의 체포소식을 들은 정환직은 은밀히 고종 황제를 배알하고 그 간의 사정을 아뢰어 다행이 그 해 8월 황제의 내명이 대구 감영으로 하달되어 정용기는 석방될 수 있었다. 석방된 정용기는 잠시 옥고로 상한 몸을 치료한 뒤, 그 해 11월부터 다시 흩어진 의병의 무리를 모으고, 군비를 다져 이듬해(1907년) 3월 다시 옛날의 군세를 회복하였다. 다시 뭉친 산남의진은 5월에 강릉에서 정환직이 내려 보내는 사람들과 합세하기로 약정하고, 다시 북상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이번 길은 더욱 험난하였다. 당시 영덕 지방을 중심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 일본 군대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신돌석부대와, 산남의진이 합세하는 것을 크게 두려워한 일본군들이 곳곳에서 완강한 저항을 해왔던 것이다. 그건 중에도 의병들은 영천, 신녕, 청송, 진보, 흥해, 청하 등 북상 중 곳곳에서 일병들의 기지를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마침내 일본군들은 대부대를 집결, 영덕군 달산면 팔각산 부근에서 산남의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병과 일본군들 사이에는 일대 격전이 벌어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사흘간 계속하다 일단 후퇴한 의병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겨울채비를 한 후 9월 10일까지 재집결토록 하고, 정용기 자신은 일본군의 기지를 습격하여 총과 탄약을 탈취하기로 하였다.
마침 영천 수비대 소속의 상당수 일본군들이 영일군 죽장면 창리에 들어왔다는 정보가 입수되어, 정용기는 동지들과 작전계획을 수립하여 이세기, 우재용, 김일언 등 세 장령에게 각기 군사를 나누어 매복한 후 새벽에 적을 급습키로 하였다. 그 중, 광천으로 가던 이세기의 의병들은 입암동 주막에서 일본군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탐지하고, 눈에 뜨이는 일본군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주막을 덮쳤으나, 주변에 매복해 있던 일본군 무리에 포위되고 말았다. 이에 다른 매복지로 가고 있던 정용기,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의 조가 지원, 대항하였으나 예상외로 많은 일본군 병력과 5시간의 접전 끝에 산남의진은 패배하고 말았다. 1907년 9월 1일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를 위시하여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도합 40여명의 의병이 일시에 순국하였으니 이 날의 전투를 산남의진입암지변(山南義陣立巖之變) 이라 한다. 영천군 자양면 검단리 본가에 머물러 있던 정환직이 이튿날 비보를 접하고 입암의 격전지로 달려갔으나 미처 감지 못한 눈을 부릅뜬 채 참혹한 모습으로 뒹구는 시체만 겨우 수습할 수 있을 뿐이었다. 40여 순국 의병들의 장례를 치른 의진은 재결성을 서둘러 같은 달 27일 정환직을 2대 대장으로 추대하고 또 한번의 비장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때 이미 정환직은 쉰을 넘은 나이로 노쇠하였으나 그의 기개와 충절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한편 일본은 헤이그 밀사파견을 트집잡아 고종을 강제 폐위하고 순종을 즉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맺어 우리 군대를 해산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해산된 진위대 제3대대 경주 분견대 부위 이하 30여명의 훈련받은 군인들이 대거 산남의진에 합류하게 되어 의진의 전력은 급격히 증강되었으며 의병들의 사기는 날로 충천하여 갔다. 그 해 10월에는 곳곳에서 일병들의 주둔지를 엄습, 공략해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니, 포항 일원의 모든 일본군과 일인들이 산남의진을 크게 두려워하였고 이 때가 산남의진으로서는 가장 기세를 떨치던 무렵이었다. 그러나 가을이 깊어지면서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여 부족한 군량미에 날씨마저 추워진데다 산남의진의 기세에 놀란 일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더는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정환직대장은 일단 의진을 해산하고 차후에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후 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부하 둘을 대동하고 청하현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일군의 감시망을 피하지 못하고 체포되니 이때가 1907년 11월 9일이었다. 동년 11월 15일 영천옥에 수감되었다가 이튿날 이름이 밝혀지지 않은 두 부하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2대 정환직 대장의 순국 이후 산남의진의 700여 병력은 흥해사람 정순기의 지휘아래 청송군 보현 산악지대로 이동하였다. 정순기는 얼음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평소 정환직과 가까이 지내던 최세윤에게 사람을 보내 산남의진의 지휘를 간곡히 부탁하였다. 1908년 3월 5일, 산남의진은 제3대 대장으로 최세윤을 추대하여 새로이 출발하였으나, 일본군의 전력이 날로 증강되고 조직화되어 가는 반면, 의진은 무기와 군량이 바닥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이에 최세윤대장은 전략을 바꾸어 전체 의병을 4개 대대로 편성하고 유격 게릴라 전술을 감행키로 하여 영양, 진보, 안동 등의 시, 읍을 산발적으로 공격하여 크고 작은 전적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전략도 한계에 이르러 대장 최세윤을 비롯한 많은 지휘관과 군병들이 하나 둘 체포되고, 살상당하자 남은 병력은 뿔뿔히 흩어지니, 산남의진은 1906년 2월 이 땅에서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고, 명실공히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성스러운 뜻을 품고 구국의 횃불을 든지 4년 만인 1909년 마침내 그 의로운 횃불을 민족의 가슴속에만 영원히 꺼지지 않게 밝혀 놓은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
|
|
|
|
정면 3칸,측면 2칸의 팔작기와지붕으로 구성된 일재당은 조선 선조 33년(1600년:병자)에건축되어 여헌 장현광,수암 정사진, 윤암 손우남 등이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며 1692년에는 노삼계 박인노 선생이 내유하여 입암가 29수와 입암별곡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7년 산남의진 사건으로 왜군이 방화 소실되었던 것을 1914년 복원하였다.
일재당은 평면구성에 있던 보간 2칸 중 후열 3칸은 절벽에 의지하여 놓은 자연석축대를 쌓고 그 위에 앉혔는데, 어칸이 마루이고 양측에 온돌방을 각 1칸씩 배치하였으며, 마루 뒷벽에 출입문을 세우고 마루를 꾸며서 계자 난간을 돌렸다. |
|
|
내연산 수목원 |
|
죽장면 상옥리에서 청하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는 내연산 수목원 입니다. | | |
|
|
관람시간 |
|
- 하절기(03월-10월) : 오전10시-오후5시 - 동절기(11월-02월) : 오전10시-오후4시 |
|
|
찾아오는 길 |
|
- 포항 => 청하월포사거리 좌회전(직진은 영덕, 우회전은 월포해수욕장) 상옥방면 5km 직진 => 서정삼거리 우회전(직진은 신광, 안강) 상옥방면으로 8km 산을 구비구비 오르면 정상에 수목원이 있음. - 영천 => 자양댐을 지나 삼거리에서 죽장방면 좌회전(우회전은 기계) => 죽장면사무앞에서 상옥방면으로 직진(좌회전은 청송) 18km => 상옥1리에서 청하방면 우회전(직진은 상옥2리, 하옥)하여 6km 산을 구비구비 오르면 수목원이 있음. |
|
|
|
|
면봉산은 포항의 최고봉(1,113m)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옆의 보현산(1,124m)에 가리어 그동안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백산을 연상케 한다는 면봉산은 일대가 민둥봉을 이루고 있어 지역 주민들이 일명 “민봉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면봉산 정상에서 보면 하늘 아래 첫동네인 두마리를 가운데 두고 사방이 준봉들로 둘러싸고 있다. 오른쪽 건너편으로는 손에 잡힐 듯한 보현산 천문대와 천문대로 오르는 차도가 두 눈에 확 들어온다. 또 이곳에서 영일만과 포항시가지가 보인다. 또한 정상에서 보는 조망은 가히 일품이다.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경관은 가슴마저 후련하게 하고 보현산이 손에 잡힐 듯한 거리에 있고 봉우리 정상에는 봄에는 철쭉 가을에는 억새풀의 운치가 장관을 이룬다.
면봉산을 오르는 주요 산행코스로는 두마리 입구 무학대에서 베틀고개를 지나, 베틀봉으로, 전망대 바위, 그리고 곰내재를 거쳐, 면봉산에 오르는 코스를, 내려 올 때는 보현산쪽으로 방향을 잡아 두마리 윗마을(상촌)로 이어지는 임도를 따라 마을회관으로 내려오는데 2시간∼5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 여러 코스가 있다. 그리 힘들지 않아 가벼운 산행코스로는 제격이다.
폐교된 두마초등학교를 마을에서 인수하여 등산객들에게 주차장으로 제공하고, 교실을 개조하여 50여명이 식사를 할 수 있는 시설을 마련해 두었다.
산행코스 : ① 두마리분교 ⇒ 베틀고개 ⇒ 곰내재 ⇒ 면봉산 ⇒ 보현산차도 ⇒ 두마분교(2시간 30분)
|
|
|
△ 면봉산 표지석 모습 (2003. 6. 6) |
|
|
▼ 면봉산의 야생화 (2003.5. 4 촬영) |
|
|
|
|
|
|
|
일 반 현 황 |
|
|
연 혁 |
|
- 1991. 10. 23 경상북도 영일학생 야영장 설치 승인
- 1992. 6. 12 초대 관리소장 천명환 취임(영일교육청 교육장 겸임)
- 1993. 4. 20 경상북도 영일학생야영장 개장
- 1995. 4. 14 경상북도 포항학생 야영장으로 명칭 변경
- 2001. 10. 24 경상북도 초.중.고생 90,288명 수련
|
|
|
규모 및 시설 장비 현황 |
|
- 부지 : 12,393 (3,755평)
- 기당 적정 수용인원 : 500명
- 건물 및 시설 현황
|
|
|
구분 |
수량 |
비고 |
구분 |
수량 |
비고 |
본관 |
소장실 |
1 |
33㎡ |
부속시설 |
야외식탁 |
8 |
|
교무실 |
1 |
33㎡ |
숙직실 |
1 |
|
사무실 |
1 |
33㎡ |
쓰레기처리장 |
1 |
|
자료실 |
1 |
33㎡ |
극기장 시설 |
2단등판 오르기 |
1 |
|
강당 |
1 |
231㎡(침상112) |
등판오르기 |
1 |
|
후관 |
취사장 |
1 |
82㎡ |
훌라잉 점프 |
1 |
|
샤워장 |
2 |
82㎡ |
거꾸로오르기 |
1 |
|
양호실 |
1 |
33㎡ |
타잔타기 |
1 |
|
분임실 |
3 |
99㎡(침상48) |
흔들다리 |
1 |
|
부속시설 |
지도교사실 |
1 |
30㎡(2실) |
타이어동굴 |
1 |
|
막사 |
11 |
25인용4, 30인용7 |
파도타기 |
1 |
|
급수대 |
3 |
수도꼭지54개 |
철길통과 |
1 |
|
화장실 |
4 |
재래식 |
로프오르기 |
1 |
|
줄타기 |
2 |
두줄, 세줄 | |
|
|
교육 기자재 현황 |
|
|
장비명 |
수량 |
비고 |
장비명 |
수량 |
비고 |
TV |
1 |
|
투영기 |
1 |
|
VTR |
1 |
무전기 |
3 |
리듬연주기 |
1 |
배드민턴 |
50 |
전자올겐 |
1 |
배구공 |
5 |
사이키 조명 |
2 |
축구공 |
5 |
앰프 |
2 |
탁구공 |
2 |
유선 마이크 |
2 |
소고 |
28 |
무선 마이크 |
1 |
사물놀이기구 |
30 |
환등기 |
1 |
도서 |
970 | |
|
|
야영장비 현황 |
|
|
장비명 |
수량 |
비고 |
장비명 |
수량 |
비고 |
텐트 (5~6인용) |
22 |
|
씽크대 |
2 |
|
밥솥 (50인용) |
8 |
식판 |
500 |
국솥 (200인용) |
2 |
조리대 |
2 |
버너 |
36 |
냉장고 |
1 |
코펠 |
41 |
식기 소독기 |
1 |
모포 |
600 |
보온물통 |
1 | |
|
|
야영장 입소 안내 |
|
|
기본 방침 |
|
- 학생 야영수련은 학교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실시한다
- 수련대상은 초등학교 4,5,6학년생 및 중. 고등학교 1, 2년생으로 한다
- 각급학교는 야영장 관리소장과 입소10일전에 협의하여 학교 실정에 맞는 자체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효율적인 수련활동이 이루어지도록한다
|
|
|
제출 서류 |
|
입소 1주일 전까지 다음 서류를 야영장에 지참 제출한다 |
- 야영장 사용 허가 신청서 1부.
- 야영장 입소 계획서 1부
- 학생 야영 입소자 명부 1부
- 수련활동 프로그램(일정표) 맑은 날, 우천시 각1부
|
|
|
안전관리 및 사고의 책임 |
|
- 학교장은 학생들의 안전지도를 위해 인솔 책임자를 임명하여 안전사고 예방에 만전을 기한다
- 응급환자 발생에 대비하여 당해 학교 양호 교사를 야영 수련기간 동안 합숙케한다
- 야영장 사용 기간 중에 시설 및 장비를 파손하거나 손해가 발생하였을 경우에는 이를 변상해야 하며 사용자(수련생)의 과실로 인한 사고에 대하여는 당해 학교장이 책임을 진다
|
|
|
야영장 사용료 |
|
야영장 시설이용료 및 학생야영장 자체에서 초빙한 강사료는 무료임 |
|
|
시설이용에 대한 문의 |
|
학생 야영장 사용에 대하여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다음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경상북도 포항 학생 야영장 ⇒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하옥리 444번지 ☎ 054) 262-6421 |
|
|
|
|
천문대가 있는 보현상 정상은 1,124m로 포항 인근 지역의 최고봉이며, 포항시, 영천시 청송군과 접경을 이루며 정상부는 영천과 청송에 속하고 1996년 준공된 천문대로 더욱 잘 알려진 산이다. 이 산은 너그럽고 장중한 산세로 인해 동서남북 어디에서 봐도 그 모습이 같아 마치 거대한 코끼리를 닮았다 해서 “보현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보현'은 코끼리를 상징한 보현보살에서 비롯된 불교식 이름이다.
보현산은 지구내부의 더운 열로 인해 땅 표면이 솟아올라 끝이 뽀족하고 전체가 방패모양을 하고 암석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두마리에서 천문대가 있는 정상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코끼리 등줄기 같은 산 능선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곤 한다.
눈에 띄는 기암괴석은 없지만 초원에 가득한 억새풀 등은 이름난 산의 그것에 버금가며 정상에서의 조망은 남서쪽으로 팔공산이 보이고 날씨가 좋으면 멀리 가야산, 덕유산까지 볼 수 있다.
천문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찾는 이가 거의 없었고 교통이 불편하여 자연 그대로의 깨끗함을 간직한 채 고고히 외로움을 가슴에 품고 어쩌다 찾는 이를 반겼지만 천문대가 들어서면서 보현산 정상까지 도로가 개설되어 차량으로 천문대 견학 등 관광객과 등산객이 많아진 곳이다.
찾아가는 길
죽장면 소재지에서 청송방향으로 약 2.5km 지나다 보면 왼쪽으로 두마리와 무학사로 들어서는 이정표가 있다. 이후 무학사를 지나면 두마리에서 보현산으로 이어지는 임도가 개설되어 있다(방흥리-두마리:8km) |
|
|
베틀봉 |
|
죽장면 봉계리, 두마리와 청송군 현동면 월매리의 경계에 위치한 해발 934m의 암봉으로 봉계리에서 바라보아 베틀모양이라고 해서 베틀봉이라 한다. 베틀봉은 꼭두방재에서 면봉산을 있는 주능선에 위치한 산이며 이 지역의 제2봉이면서 시군 경계지 종주 산행구간으로 봉계리에서 면봉산을 잇는 코스로서 산행을 즐길 수 있는 산이다. 꼭두방재에서 시군 경계지를 따라 베틀봉까지 약 6km로 2시간 30여분 소요되며 곰내재를 거쳐 면봉산, 보현산 주능선을 따라 작은 보현산, 죽현까지 산행할 경우 7∼8시간이 소요된다. | | |
|
또한 다른 코스로는 두마리 두들마을에서 출발하여 임도를 따라 봉계리와 경계 지역인 베틀고개를 거처 베틀봉에 도착한 후 곰내재쪽으로 내려와 곰내재에서 두마리 마을로 내려오는 짧은 코스를 이용할 수도 있고, 곰내재에서 면봉산에 올랐다 두마리 윗마을로 내려오는 코스 등 기호에 맞는 다양한 등산을 할 수 있는 산이다. |
|
|
향로봉 |
|
향로봉은 해발 930m로 경북의 금강산이라는 내연산(內延山)한 귀퉁에 위치하며 죽장면 하옥리와 송라면 중산리가 접한 경계지역이다. 하옥리에서 향로봉으로 오르는 길은 계곡에서 가장 절정을 이루는 향로교 바로 옆에서 오른다. 아직 잘 다듬어진 등산로는 아니지만 복잡하게 사람들이 많이 오가는 길보다는 더욱더 대자연의 진한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운치가 극에 달한다. 하옥리 향로교에서 향로봉 정상까지의 거리는 3.7km, 3시간 정도면 어느 누구나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거리다. 정상을 오르는 동안 역시 내연산의 묘미에 빨려 들어가기가 충분하다. 뼈대를 드러낸 적송이 바위와 어우러지고, 맞은편으로 뻗어 있는 태백의 기상이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무엇보다도 내연의 정상 향로봉에 서면 낙동정맥의 자욱한 산무리들, 한반도 최동단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하는 호미곶 끄트머리를 굽어볼 수 있다는 기대 때문에 가파른 산행길이지만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는다.
| | |
|
다른 코스로는 죽장면과 청하면 경계지역인 상옥리 숙밭(내연산수목원)에서 출발하여 삿갓봉, 매봉 능선을 따라 향로봉, 우측봉까지 이르는 곳으로 숙밭에 조성된 경상북도 내연산 수목원으로 볼거리와 더불어 금상첨화의 산행을 즐길 수 있다. |
|
|
동대산 |
|
동대산은 죽장면과 영덕군 남정면과의 경계를 이룬 산으로 해발 791.3m이며, 경방골의 계곡을 이용한 등산로와 능선을 이용한 등산로가 있다. 경방골의 크고 작은 호박소와 목포는 자연의 청정함이 그대로 살아 보존되어 있다. 등산을 하려면 상옥리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하옥기 포항학생야영장에서 느티나무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소의 우측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오른다. 사람의 발길이 많이 닳지 않는 곳에 안내 리본이 등산로임을 알려준다. 마실골 계곡을 따라 산행을 시작하면 태양을 보기 힘들 정도로 숲이 우거져있고 아직 일반인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다. | | |
|
동대산에서 비탈진 언덕에 내려서면 물침이골이다.
물침이골에는 쌍폭포가 있고 호박소를 지나 경방골을 따라 내려서면 하옥리 계곡의 지류를 만나 옥계계곡으로 흘러내린다.
산행코스 : 하옥리 - 동대산 - 경방골 - 옥계계곡(약10km정도, 5시간 30분)
|
|
|
봉화봉 |
|
봉화봉 등산로는 죽장면 입암, 일광, 정자, 감곡리의 경계 지역에 개설된 등산로로 면소재지에서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산 자체는 특이한 산세나 볼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하나 입암서원을 중심으로 한 입암 28경의 빼어난 경관과 가사천, 자호천변에서 피서를 즐기면서 등산할 수 있는 산으로 산행시간이 짧고 조용하여 가족 산행지로 적합한 곳이다. 노계 박인로 선새의 입암 28경에 소개된 명칭 중 일부 현재 사용하는 지명도 있으며 정운령, 함휘령, 격진령, 심진동 등은 특정 지점을 지칭하기보다 그 주변의 풍광에 따라 지어진 이름이다. 면사무소 오른쪽 마을 안길을 따라 200미터 정도 가면 안동권씨 종가집(큰 기와집)에 이르는데 이집 뒤편 들길을 지나 가파른 능선 길을 따라 7부 능선쯤에서 안동권씨 무덤 2기가 있는 산소를 지나면 주능선에 이른다. 이 등산로는 40분에서 1시간정도 소요되어 가족단위 가벼운 산행과 산책하는데 적격인 코스이다. | | |
|
|
수석봉 |
|
자호천 변에는 여름철이며 피서객이 줄을 잇고 있지만 정작 산자락 너머에 꼭꼭 숨겨진 수석봉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이는 드문 편이다. 죽장면과 영천시 자양면을 경계하며 우뚝 선 산봉으로 이름처럼 빼어난 계곡이나 바위를 품고 있지는 않지만 때 묻지 않은 능선에 올라 청정산길을 이어가는 맛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수석봉을 오르는 등산로는 포항-죽장간 도로변의 보현사, 바울기도원이 있는 도덕골, 광천리, 일광리의 개일동을 비롯하여 논골, 두마리 대태마을의 죽현고개 등 여러 코스가 있다. 어느 쪽이든 등산로는 제대로 없는 편이고 그저 약초꾼이나 일부 마니아들의 희미한 족적만 있을 뿐이다. 특히, 정상 북서쪽 1.4km 남짓한 거리에 있는 바위전망대에서 기룡산, 보현산, 면봉산, 베틀봉을 비롯하여 주변을 조망하는 맛은 가슴이 트일 만큼 시원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