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여섯 꽃망울 피고 진 동네
- 경남 마산시 양덕동 한일합섬 앞 냇물 흐르던 골목
이야기 하나,
사라진 기숙사를 더듬다
열여섯 소녀의 고백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양덕동의 어제가 열여섯 소녀들의 삶에서 시작했고, 양덕동의 오늘은 열여섯 소녀의 삶을 콘크리트로 세상에 감추는 일이기 때문이다.
바냇들이라 불리던 양덕동의 논과 밭은 1960년대 후반 한일합섬 마산 공장이 들어서면서 농촌 마을에서 공단 마을로 바뀐다.
삼십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또 다른 변화가 일고 있다. 양덕동을 이룬 공장의 이미지를 지우려고 애를 쓰고 있다. 상업(홈플러스, 신세계백화점)의 중심, 언론(마산 MBC, 경남도민일보)의 중심, 문화(3.15 시민회관, 삼각지공원)의 중심으로 바뀌고 싶어 한다. 허나 어찌 묻을 수 있으리, 어찌 지울 수 있으리. 수만의 열여섯 소녀의 고백이 묻히지도 묻힐 수도 없이 살아있는데.
열여섯의 선택은 당연한 일
충청도 월악산 골짝에서 열여섯 소녀가 가방 하나 메고 집을 떠납니다. 산도 물도 낯설고 말까지 낯선 땅 마산. 열여섯 소녀의 중학교 졸업은 부푼 가슴 꽉 조여 주는 여고생의 하얀 교복이 아닌 작업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87년도지, 87년 1월 5일에 왔어. 눈이, 진눈깨비가 왔어.
충청도에 살았는데, 우리 중학교에 공고가 붙었어. 한일합섬 말고도 여러 곳에서 공고를 붙여. 한일여실(한일여자실업고등학교)은 공부 잘 해야 보내줬어. 시험에 합격해야 하거든. 시험 봐서 떨어지는 애들도 있었어. 우리 밑으로는 미달이어서 다 들어왔지만.
87년 마산 공장 기숙사는 감방보다 더 했어. 한방에 여덟 명이 살았거든. 방이 얼마나 작은지 여덟 명이 쭉 못 누웠어. 양쪽으로 네 명씩 머리를 맞대고 누워 자면 딱 맞아.
계단에 올라서면 시멘트복도가 있고 양쪽으로 방들이 쭉 있어. 화장실과 씻는 곳은 계단 끝 쪽에 있는데 그 층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쓰지.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 벽에는 빨래 줄이 걸쳐있고 그 아래로 모포 개비 놓는 곳과 가방 놓는 데가 있지. 방문 맞은쪽에는 창문이 있어. 오른쪽에는 옷장이 있지. 사물함이야. 방문 반 만하나. 그런 게 다섯 칸씩 위아래로 있거든. 여덟 명이서 한 칸 씩 나눠 쓰고, 두 개가 남잖아, 그걸 실장이 한 개 더 쓰고 이런 식이야.
옷장이 개인 사물함이야. 옷장을 열면 조그마한 책상으로 쓰는 상이 있고 그 위로 책꽂이가 있어. 거기에 책을 넣고, 상 아래 소쿠리에 속옷이랑 티를 개벼 넣지. 바지랑은 옷장 문에 접착식 옷걸이를 붙여 걸어 두고.
사물함이 비좁지는 않았어. 옷도 없었고 가진 게 별로들 없었어. 좁았지만 그 크기 이상 간직할 것도 없었지. 옷이야 바지 한두 개, 티 한두 장이 전분데.
사춘기? 삼교대하며 기숙사, 학교, 공장 오가다 보면 그런 것 고민할 시간이 어딨어. 빨리 이 곳을 떠나자 하는 마음뿐이지.
자취하는 애들 방에 가보는 게 소원이고. 혼자 뭔가 …, 밥을 해 먹고 …, 자유스럽게 혼자 있다는 게…, 그게 ….
(말이 끊어지고, 창문을 한참 바라본다. 지금도 여고 시절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창문을 바라보는 눈에서 수용소 같은 기숙사를 떠나고 싶은 열여섯 소녀의 꿈을 본다.)
내가 얼마나 떠나고 싶었는지 알아. 그래 가지고, 졸업하는 날이 일요일이었거든. 그래서 토요일 날 ‘퇴사를 하겠다.’하니, 펄쩍 뛰며 ‘졸업장을 안 주겠다’고 하는 거야. 별 수 있나. 하루만 참자하고, 일요일에 졸업식하고, 월요일에 사표를 냈지.
한일합섬엔 가난하니까 왔지. 부모님이 가라고 하진 않았어. 그냥 가야 할 것만 같았어. 당연하게 생각했어.
(충북) 제천에 신덕 중학교를 다녔거든. 한 학년이 한 이백 명 됐지. 인문계랑 상업 고등학교에 가는 애들이 절반, 아니 한 육십 프로 됐고, 나머지는 나처럼 실업학교에 갔지. 주로 충주에 대농으로 많이 갔어. 가까우니까. 거긴 시험 보지 않아도 들어가거든.
난 멀리 가고 싶었어. 집과 멀리 떨어지고 싶었지. 한참 반항기고, 구속에서 벗어나고 싶고, 우리 아버지 술 마시는 모습에서 떠나고 싶고. 우리 아버지는 잘 생기지도 않았는데 바람둥이였거든. 그래서 친구들은 대농으로 많이 갔는데 나는 마산에 간 거야.
형제가 오빠 둘, 언니 셋, 밑으로 남동생이 있거든. 여자라고 실업계에 보내고 오빠들은 공부시키고 그러진 않았어. 그냥 돈 벌며 학교 다녀야 한다고 생각 했어. 오빠도 언니도 모두 그랬거든. 큰언니도 초등학교 마치고 부산에 갔고, 큰오빠도 실업계 나와 충북대에 합격했는데 학교를 못 다녔거든. 둘째 언니도 그랬고. 아들이고 딸이고 떠나서 먹고살기도 힘들었거든. 그냥 자연스럽게 실업계에 가서 집에 부담주지 않고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느낀 것 같아. 우리가 선택 할 폭은 좁았거든. 일반 학교에 간다는 것은 아예 생각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끔찍하고. 벗어나는 길은 돈 벌러 도시에 가는 거였고, 공부를 하려면 산업체 학교를 찾는 길 말고 뭐가 있겠어
기숙사의 점호
철컥거리며 방마다 열쇠를 잠급니다. 잠근 열쇠는 모두 수거해 갑니다. 지금부턴 어느 누구나 방문 밖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말똥 두 개를 단 주임이 방문을 지나치면 방안에서 방장이 큰소리로 외칩니다. “총원 십이 명 현재 십이 명 사고 무” 푸른 옷의 죄수들은 세 줄로 맞춰 똑바로 앉아있습니다. 자세가 흐트러지든지 줄이 맞지 않든지 옷을 똑바로 입지 않든지 방안이 지저분하면 곧바로 욕이 튀어 나옵니다. 이건 제가 1988년 영등포구치소에서 경험한 일입니다.
기숙사에선 출입통제가 심했지. 기숙사 밖으로 나가려면 외출증을 끊어야 해. 사감이 있고, 각 동마다 동장이 있는데, 동장한테 외출증을 끊어야 해. 열 시 이후로는 외출도 안 되고. 동장 도장을 받아야지 나갈 수 있어. 경비한테 보여주고. 꼬치꼬치 캐묻는 데 엄청 까다로워. 공부 좀 잘하는 범생(모범생)이는 그래도 쉬워. 범생이는 약간 늦어도 봐 주는 경우가 있어. 공부 좀 못하고 찍힌 애들은 힘들어. 열시에 점호하고 기숙사 소등하는데 그 때까지 다 들어와야 해.
외출 나갔다 늦게 들어오면 얻어맞지. 동장이 찬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고 손들고, 세워 놓고 뺨 때리고, 빗자루 가지고 때리고. 벌 청소도 많이 하지. 풀 뽑는 것 많이 시킨다. 그 다음 복도 청소.
열시에 점호를 해. 점호를 하면 방 확인을 하잖아. 각 방마다 방장이 ‘몇 명에 현재 인원 몇 명 이상 없다’ 보고를 해. 동장이 지나 갈 때. 보고 할 때마다 동장이 오거든. 두 명씩 줄 맞춰 가지고 딱 앉아 있어야 되는 거야. 줄 틀리면 있잖아 막 뭐라 하고.
전체 청소가 있어. 대청소하는 날은 뭐를 해야 하냐면 세수 대야 있잖아, 각자 세숫대야가 있는데 그 세숫대야를 깨끗이 씻어야 되는 기라. 물 때 없이. 그래 가지고 검사를 맡아. 여덟 개면 방 앞에 따따닥 놓고, 위로 짜짜짜작 놓고. 근데 검사해서 지저분하잖아, 그러면 동장이 발로 확 차거든. 복도로 짜악 굴러가지. 얼마나 열심히 닦았는지 반지르한 세면복도바닥으로. 그럼 내 몸이 발로 채여 뒹굴뒹굴 구르는 것 같아. 눈에 눈물이 막 맺혀. 지금 생각하면 왜 그 사람(동장)들이 그리 했을까 그렇게 해야만 권위가 선다고 생각했을까. 질서가 잡힌다고 생각 했을까…. 그래 가지고 소등하잖아. 그러면 문을 딱 잠궈. 못나가게.
(이야기를 하는 중간 중간 이마로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 올린다. 그 때마다 환한 이마가 보인다. 앞이마가 약간 튀어나온 듯 하다. 머리를 쓸어 올릴 때 손으로 양 볼과 눈을 가리고 잠깐 멈췄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이마 위로 올린다. 그 행동은 습관이나 흘러내린 머리가 귀찮아서 하는 것 같지 않다. 좋지 않은 기억을 이야기 할 때 반복 한다. 눈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그림이 자꾸 떠올라서일까.)
소등 뒤에 공부를 하려면, 방문 열어놓고 복도에서 들어오는 불빛으로 해. 방 앞쪽에 애들은 괜찮지만 뒤쪽 애들은 그나마 불빛도 없잖아. 복도에 나가 찬 시멘트바닥에 모포를 깔고 공부하지. 상 펴놓고.
점호 뒤에 불을 못 키고 하는 건, 다음날 공장 일에 지장을 줄 까봐…. 전기세 아까워서 그런지도 모르지.
수용소야. (불 켜달라고) 따질 생각은 하지 못했지. 우리만 소등하는 게 아니야. 기숙사 다른 동에는 학교를 마친 언니들도 있었거든. 거기도 모두 불을 꺼. 감히 (불 켜달라고) 엄두도 못 냈어.
멈추지 않는 물레
여고 시절 내내 공장 학교 기숙사만 뱅뱅 돌았습니다. 공장에서 물레가 삼교대로 하루 이십사 시간 멈추지 않고 돌 듯. 멈춰서는 안 됩니다. 물레가 멈추면 욕을 먹고, 열여섯 꿈이 멈추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공장에서는 물레 일을 했어. 처음에 들어가면 한 주 동안 교육을 해. 안전교육도 하고, 실이 뽑아져 나오는 과정도 배우지. 이런 교육을 쭉 하고 그 다음에 과를 배치 받지. 한 달 동안, 근 한 달 동안 서서 매듭을 배워. 실이 물레에서 쭉 내려오다가 끊어지잖아, 그 실과 실을 연결해줘야 하거든. 근데 옷감을 짤 때 매듭이 없어야 되잖아. 옷감을 짤 때 매듭이 보이면 안 되잖아. 그러니까 나비매듭이라고 매듭 하는 법이 있거든. 그 매듭 연습만 한 달 동안 계속 해. 그러다가 일하지. 물레 일.
실타래가 있잖아. 타래실. 실타래를 탁탁 털어 가지고 타래가 잘 풀릴 수 있도록 해서 물레에 걸어주는 거지. 실 끝을 찾아가지고 실과 실을 연결해 줘. 또 많이 엉켜 있거든. 그러면 걷어내 주고. 물레에 감길 때 왼쪽 오른쪽으로 계속 오가면서 물레에 고르게 감겨야 하거든. 한쪽으로만 계속 감아주거나 하면 불량이야. 실타래를 발에 다 걸고 실패에 실 감는 것 봤지. 그거야. 그게 크다고 생각하면 돼.
그래도 우리 과 일이 수월하다고 해. 물레 스물네 개를 보거든. 실이 가는 것을 감을 땐 그래도 좀 낳지. 물레에 감기는 시간이 기니까. 실이 두꺼우면 정신이 하나도 없어. 스물 네 개 다 걸기도 전에 물레 실이 떨어지고 하니까. 여덟 시간 쉴 참 없이 계속 일을 해야 해. 키가 작은 애들은 더 힘들어. 고생 많이 하지. 손이 물레에 닿지 않으니까. 물레를 댕기면서 하지. 빨리 걸지 못해 (물레가) 서 있으면 욕 많이 얻어먹어.
그래서 주간보다 야간에 일하는 게 더 낳아. 상사들이 주간에 많이 돌아다니잖아. 물레가 멈춰 있으면 안 되니 화장실도 못갈 때가 있어. 하지만 밤에는 좀 괜찮지. 생산량만 얼추 맞추면 되니까. 물레가 잠깐씩 멈춰도 상사들이 자주 돌아다니지 않으니 편하지.
근데 있잖아 색깔이 있는 실을 돌리거든. 빨간 실을 돌리면 머리카락이 빨개지고, 파란 실을 돌리면 온통 파란 색이 돼. 진짜 머리가 빨갛게 염색한 것 같다니까.
환풍도 잘 안돼. 작업장이 늘 뿌옇게 선명하지 않아. 가는 실을 감을 때는 먼지도 작아 잘 안 보이는데, 실이 굵으면 실 먼지가 떠다니는 게 보여. 글고 기계도 문제야. 우리가 쓰는 기계가 새로 산 게 아니라 일본에서 쓰던 기계를 가져오지. 얼마나 낡았겠노. 기계가 낙후 되어 애를 먹지. 근데 그걸 또 중국으로 팔아먹어.
공기 좋은 산골 출신이 많아서 폐병에 걸리지 않은 것 같아. 농담이고, 아직 어리고 건강 했잖아. 우린 몇 년 안다녔으니 잘 모르지. 나는 계속 피곤했지. 삼년 내내. 구내염도 달고 살았고. 그전엔 안 그랬는데.
먼지도 많지만 역겨운 냄새도 많아. 염색을 하니 고약한 화공 냄새가 많아. 실을 큰 포대에 담아 지게차로 옮겨오는데, 자루를 열면 뜨겁게 삶으면 김이 날 때 나는 냄샌데, 뭔 냄샐까? 아무튼 기분 안 좋은 냄새가 나.
공장일은 아닌데. 공장 담 옆으로 산호동 가는 길 있잖아. 거기가 일차선 도로였고 가로등이 있거나 그렇지 않았단 말이야. 우리 과가 여기에 있으면 그 반대편에 비상구가 있거든. 계단이 있고. 우리가 이층 이었거든, 여기로 나가면 난간이 있어. 밤에 졸리면 거기에 나가 바람을 쐬거든. 산호동 가는 골목이 보여. 여기에 머스매들도 오고, 성병 환자들, 뭐라 하지 성도착증, 변태 그런 사람이 오거든. 우리는 잘 안 나가는데 까부는 언니들 있잖아. 난간에 나가가지고, 지가 나를 알 거냐 내가 지를 알 거냐, 장난하고 말이야. 그러면 옷을 홀라당 벗고 그래. 그러면 막 뛰어 들어오지.
공부하러 산골을 떠난 열여섯 소녀는 여고생이 아니라 여공일 뿐입니다. 기계에 손이 잘려 열여섯 여고생이 되었다는 꿈이 무참히 잘린 친구도 있습니다. 잘린 손목은 산업화가 남긴 상징입니다.
우리 과는 먼지가 많아도 기계가 위험하지 않아. 우리 과에는 사고가 거의 없었어. 다른 데는 안전사고가 크게 나기도 하지. 다른 과에는 손 짤리는 애들도 많았어. 맨 처음 실이 되는 게 아니잖아. 솜 같은 걸로 오잖아. 특히 합섬섬유 같은 것은 화학약품이 들어가서 만들잖아. 그 첫 공정이나 그런 곳은 큰 기계가 들어가거든. 큰 기계가 도는 곳은 손이 말려 들어가. 말려 들어가면 잘리지.
손이 잘리면 다른 부서로 발령 내. 청소하는 거 포장하는 거 시키지. 우리 물레 일은 사고가 없었지만 방적과나 소목과는 정말 사고가 많아.
87년 노동자대투쟁과 한일합섬
머리띠를 묶은 노동자들이 공장이 아닌 거리로 뛰쳐나왔습니다. 수출자유지역 후문 앞은 ‘사람답게 살고 싶다’라는 외침이 날마다 이어졌습니다. 해가 지고 싸움이 끝나면 양덕동 시장 골목 술집마다 작업복이 넘쳐 났습니다. 이젠 한숨의 술잔이 아닙니다. 희망의 잔이 부딪혔습니다.
87년에 한일합섬도 싸움에 나섰지. 난 노동자라기보다는 학생이라고 생각했어. 지나고 생각하니 나를 학생으로 대접하기보다 여공으로 대접했는데. 잘 몰랐어. 그때야 ‘어서 졸업장 받고 떠나야지’라고 생각했지. 근데 남자 직원들은 그렇지 않았어. 창원 공단이나 수자(수출자유지역)에 비해 월급이 형편없었거든. 아마 임금인상이 큰 목적이었을 거야. 노조도 만들었는데, 노동운동이라고 볼 수는 없었어. 그 때 노조 위원장이 장기집권 했는데 내가 한일합섬에 92년에 재입사를 하니 총무과장으로 있었으니 알만 하잖아. 내가 한일합섬에 해고될 때 바로 그 사람이 잘랐거든.
아무튼 87년을 거치고 나서 월급이 많이 올랐지. 아니 당연히 올라야 했고. 그 때 재형저축을 학교에서 단체로 들게 했거든. 저축을 하고 나면 내 손에 들어오는 게 몇 천원 남고 만 원 정도 남고 그랬어. 마이너스도 될 때가 있어. 칠만 원 씩 저축 했는데 그 돈도 안 될 때가 있는 거지. 87년 겪고 나서 십 몇 만원 된 것 같아.
난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어. 삼학년 언니들은 관심이 많았어. 졸업하면 (조합) 해야 된다고 생각했고. 난 일학년 때인데 선생들이 엄포를 놨지. 우리들이 데모에 들어가면 학교 문 닫겠다 하는 식으로. 그래 가지고 학생들 다 빼내고 기숙사에 교장 교감 전부 와 가지고 애들 차비 줘서 집에 보냈어. 참여하지 못하게. 그 때 총무과 유리랑 다 깨졌거든. 우리는 집으로 돌려보내졌지. ‘문 열면 다시 전화하겠다.’ 이런 식으로.
남자 직원들하고 선생들하고 몸싸움도 했거든. 그걸 가지고 학교에서 이용했어. 어느 선생님이 맞아 가지고 어떻게 됐다 하면서. 우리는 학생의 신분이 크다고 생각을 했으니까 선생이 맞았다는 것에 더 흥분했지. 참 어리석었지. 걔들은 우릴 여공으로 봤는데 말이야.
여공으로 취급하던 담임선생
공장만이 아니라 학교에 가서도 우리는 학생이 아니라 여공입니다. 공부하려고 일을 하는 게 아니라 미성년자를 일을 시키려고 학교를 만들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담임이 있어. 그 땐 좀 철없다 하고 생각했는데, 지금 떠올리면 참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 돼. 이 선생이 대학 마치고 첫 부임한 학교거든. 여학교의 총각 선생. 생각해 봐. 얼마나 흠모의 대상이야.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컸거든. 스물일곱인가 그랬는데, 나이 차이도 열 살 이내잖아.
우리 반 반장도 선생을 대개 좋아했거든. 무슨 다른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웃긴 일이 많았어. 선생이 다른 애한테 관심을 나타내면 반장이 선생한테 대들거든. 그러면 선생은 조종례도 들어오지 않아. 마치 사랑 싸움 하듯 신경전을 벌이는 거야. 우린 담임이 종례도 오지 않으니 어린 마음에 얼마나 걱정이 되겠어. 이게 어디 한 두 번 이어야지.
또 한 번은 시험기간에 지 생일이 있었어. 그랬는데 생일잔치를 안 해줬다고 삐진 거야. 우리가 뭔가를 지한테 해줘야 한다고 생각 해. 지 좋고 나쁨을 우리에게 감정으로 표현하면 안 되지 선생인데.
우리는 저금을 하고 금요일에 한번씩 학교에서 돈을 인출을 해 주거든. 나는 외출을 많이 안 하니 돈을 인출을 잘 안 해. 다른 애들은 지 돈 찾아 쓰는데도 꼬치꼬치 묻고 말이야 타치가 심해. 일주일에 삼천 원 이상 인출을 안 해 줘. 정말 쓸 일이 있는 데도 말이야. 그 선생이 유독 심해. 근데 한 번은 내 돈을 인출을 하더라. 인출 할 필요가 없는데. 선생이 내 돈을 빌려 갈려고. 그 돈을 끝내 안 갚았어. 그러니까 내가 있잖아, 돈 얼마를 떠나서 그게 두고두고 괘씸한 거야. 그건 우리를 제자로 봤다는 게 아니고 돈 버는 여공으로 본 것 아니야. 그 돈이 어떤 돈 인데 선생이.
그 뿐이 아니라 얼마나 우리를 무시하며 자존심을 상하게 한지 몰라. 이게 첫 시험을 내는데, 우리 수준이 뻔하잖아, 공부할 시간이 어딨어. 그러면 수준에 맞춰 문제를 출제해야 한단 말이야. 지 수준에 맞춰 문제를 내는 것 있지. 50점 넘는 애가 한 반에 한두 명 나올 둥 말 둥 그런 거야. 우릴 무시하려고 문제를 그렇게 낸 것 아냐. 욕도 많이 하고 강압적이고, 지를 위해 우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대해. 등신 같은 것들 하면서 학생으로 대해 주지 않아. 총각선생이라고 좋아하는 애들이 많았는데 그걸 이용하고. 지금 만나면 한 대 쥐어 박아주고 싶어.
양덕동의 기억
헐리다 만 공장 한 귀퉁이는 흉측한 괴물처럼 보입니다. 언제 그곳에 한 해에 이천 명 넘는 열여섯 소녀들이 왔는지 기억마저 떠올릴 수 없게 기숙사는 흔적도 없고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습니다. 학교는 그 자리에 있지만 이젠 한일전산여고로 이름마저 바뀐 체 공부를 하기 위해 삼교대를 돌던 그 때의 학생은 없습니다. 모든 게 과거로 묻혀져 가고 있습니다.
기숙사가 감옥이라고 했잖아. 기숙사 밖엔 잘 나가지 않았어. 가끔 토요일 오전반 끝나고 다음 월요일에 야간반 일을 들어가면 이박 삼일 시간이 남잖아. 그 때 양산 통도사나 남해로 놀러 간 기억은 있지만. 기숙사에 도서실이 하나 있고, 매점, 세탁소, 다리미실이 있고 목욕탕이 있었지. 그냥 거기에 있었어. 양덕동의 섬이야. 양덕동 골목엔 뭘 사먹으러 나갔어. 먹고 싶은 것 많은 나이잖아. 기숙사 앞에 포장마차가 진짜 많았거든. 튀김도 먹고 떡볶이도 먹고 했지. 포장마차 하면 돈 번다 했어.
양덕동에선 또래 여고생을 봐도 실감을 하지 못해. 고향에 가면 느껴. 친구들이 여고생 대접을 받고 있는 걸 보면 뭐 이상한 질투심 같은 걸, 쟨 나보다 공부도 못했는데, 뭐 그런 거 있지. 우린 고향에 가도 학생이 아니라 직장인인 걸.
처음엔 밥을 못 먹었어. 아니 한참을 적응이 안 됐지. 밥이 있잖아 찐밥 있잖아. 찐밥인데 어떤 날은 펄펄 날리는 찐밥이고, 아니면 물을 많이 넣어가지고 찐밥이 고슬고슬하지 않고 떡이야. 주걱을 탁 떠서 식판에 얹으면 주걱 모양이 그대로 나는 그거. 참 밥 먹기 힘들대. 맨 처음 들어가니까 김치를 주는데 청각이 들어 있는 거야. 산골에서 온 아이들은 그게 뭔지를 몰라서 못 먹어. 그 다음에 미더덕 찜 주고 그러면 나는 못 먹었어.
나는 솔직히 마산이 쪼그마한 진짜 충주보다 작은 시골에 한일합섬이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 가지고 용감무쌍하게 가방 하나 탁 들고 나왔지. 차가 우리 마을에는 서지 않았거든. 차를 타려면 면 소재지까지 가야 해. 우리 엄마랑 걸어갔지. 울 엄마가 가방을 들어주겠대. 됐다고 하는데도. 그리 걸어가는 데 중간에 차가 지나가. (버스를) 세워 타려고 하는데 우리 엄마가 눈물을 훔치시더라고. 나는 우리 엄마 우는 모습 잘 안 봤거든. 워낙 우리 엄마는 강했고 무뚝뚝 하셨어. 엄마 눈물을 보니 이게 울 일이구나 엄마로서는 그렇겠구나 생각이 들더라. 근데 나는 그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어.
아버지는 엄마에 비해 감정이 풍부해. 잘 기억은 나지 않고, 지금도 날 만나면 ‘니를 거길 보낸 거 참 미안하다.’ 하시지.
엄마의 눈물
한일합섬에 처음 입사할 적에는 부모님과 함께 갑니다. 교육장에 모여 한일합섬 자랑을 한참을 합니다. 부모님 걱정하지 마시라고 마지막 인사말로 부모들은 돌려보냅니다. 정작 당신네 딸들이 살아 갈 기숙사 안은 보여주지 않습니다.
차를 타고 부산으로 갔지. 부산에 고무부가 있거든. 고모부가 마산에 데려다 줬어. 와서 보니까 시골이 아니라 도시더라고. 그 때 이불하고 다 싸들고 왔는데 얼마나 우스워. 이불을 들고 가니 언니들이 그러데. 여기가 모포 만드는 공장인데 이불을 뭐 하러 가져왔냐고.
처음에 학부모들이랑 다 같이 오거든. 입사 날짜가 다 틀려. 한꺼번에 다 입사를 시킬 수가 없으니까. 우리 일학년이 육십 명씩 사십 반이니 이천사백명이잖아. 지역마다 따로 입사를 시키거든. 우리가 제일 일차로 입사했지. 여기에 오면 나이고 뭐고 필요 없거든. 입사날짜 우선이야. 방 배정도 그렇지만 방장도 입사날짜에 따라 정해지거든. 우리 충북하고 전북 쪽 애들이 함께 입사 했어. 경상도에 오니 충북하면은 좋아하더라. 전라도 보다는. 우리 과 일이 수월하다고 했잖아. 그 것 때문인지 충북 애들이 우리 과로 많이 왔지. 다른 지역에선 충북 애들만 수월한데 보낸다고 수군거리고.
부모님이랑 함께 교육장으로 가서 한일합섬 소개를 받지. 내가 고모부 손잡고 간 날 진눈깨비가 내렸어. 아마 회사만 보여 주고 기숙사는 밖에서 어디에 있다는 것만 가르쳐 준 것 같아. 기숙사 안은 보여줄 수 없었겠지. 수용소를 어찌 보여 줘. 부모들이 곧바로 집으로 데려 가게.
학부모들을 돌려보내고 기숙사 배정을 받아. 배정 받고 탁 가면은 개인용품을 사오라고 해. 세숫대야, 칫솔, 치약. 그런 것 사는데 줄을 짝 서있더라고. 한꺼번에 사니까. 밖에 나가서는 살 수 있게 안 됐거든. 기숙사 매점에서만 사가지고 오게 돼 있거든. 한참 줄을 서서 대야를 사고, 기숙사 방으로 들어오는 데 그 때 내가 아…, 내가 정말 뭐라 해야 되노.
그래 눈물나더라. 막 눈물이 나더라. 방문을 열면 문 앞에 신발장이 있고 대야 놓는 데가 위에 있어. 거기에 대야를 올려놓다 거길 붙잡고 엉엉 울었거든.
(눈물이 맺히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한다. 늘 강하게 보였는데. 단정한 단발머리에 작지도 크지도 않은 눈, 눈은 멈춰 있지 않다. 쉴 새 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움직인다. 유난히 초롱초롱한 눈빛은 멈추지 않고 일을 만드는 그녀가 살아 온 삶을 보는 듯 하다. 한일여실을 나온 뒤에 카톨릭 노동청년회 활동을 하며 방송통신대 교육학과를 다녔다. 물론 직장생활도 계속했다. 딸 둘을 둔 어머니가 된 지금은 유아교육학과 졸업반이다. 소리 소문 없이 새로운 꿈을 키워가고 있다. 함안군 농민회와 여성 농민회 활동도 열심이다. 논 서마지기와 밭 두마지기의 농사꾼이다. 초등학교 운영위원을 맡고 있으며, 마을에서 크고 작은 일을 만들고 사람들을 모으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저 눈빛에서 그 힘이 나올 것이다. 샘처럼 일이 쏟아져 나오는 눈에 눈물이 맺힌다. 나도 코끝이 시큰 해진다. 커피 끓여 줄까?)
아니, 됐어. 내가 배정받은 방이 졸업 앞 둔 언니들이 있는 방이었거든. 언니들은 이미 그 경험(울던)을 했다는 듯 다 안다는 표정이야. (언니들도) 다시 (자신의) 기억이 나는 지 안쓰러워하고 위로도 해 줘. 전라도 언니가 있었는데, ‘아그야, 많이 울어라 우리도 그랬다. 우리도 첨 왔을 때 많이 울었다. 근데 내려와서 울어라. 거기 냄새난다.’ 하는 거야. 대야 놓는 데가 신발 놓는데 위 있으니 냄새난다는 거지.
그제야 엄마가, 무뚝뚝한 엄마가 울었는가가 느껴지고, 나도 그제야 아, 고생이구나, 그런 걸 막연하게 가슴으로 느껴졌지.
아니 생각하지 않으려고 했어. 내 인생에서 지우고 싶은 시절인 것 같아서. 생각하지 않으니 점점 기억에서 사라지는 것 같아. 우리(한일여실 동창)끼리 만나도 그 때 이야기 잘 안 하거든.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부끄러워 할 일도, 부끄러워 할 필요도 없는 기억들입니다. 노동을 천시하다보니 부끄럽게 여기고 부끄럽게 여기며 살게 했던 겁니다.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어린 소녀들을 공장으로 도시로 끌어 모았습니다. 공부를 할 수 있다고 꼬여 데려왔습니다. 낮은 임금을 주고 어린 노동력을 통해 공장의 굴뚝은 높아지고 공장의 건물이 논과 밭을 뭉개고 들어섰습니다. 칠팔십 년대 한국 경제 성장의 힘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제 감춰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드러내야 합니다. 산업사회의 야만성을 폭로해야 합니다. 과거사 진상규명에 함께 이루어져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일학년 때 사십 반이라고 했잖아. 졸업 앨범엔 서른여섯 반이야. 견디지 못해 나간 친구도 있고, 남자 친구 사귀어 나간 친구도 있지. 이리 벌어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질 수 없으니 다른 일을 찾아 술집으로 숨은 친구도 있어. 졸업한 우리는 행복해. 하지만 열 명 중에 한 명은 졸업하지 못했단 말이야. 바로 이 아이들에게 미안해. 정말 우리 담임 같은 사람 말고 스승다운 스승이 있었으면 그랬을까. 공장에서 우리를 여공이 아닌 학생이요, 딸로 봐 준 사람이 있으면 그랬을까. 이 사회에서 한일여실에 다니는 것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봐 줬으면 그랬을까.
공장에서 주임이나 머스마들이 싸가지 없다고 때리기도 했어. 꽉 막힌 생활이 답답해 도망간 친구가 있었어. 우리 담임 싸가지 없다고 했잖아. 삼교대 근무하며 공부하니 얼마나 피곤하겠어. 수업시간에 조는 일이 많아. 공부도 못 하는 게 잠만 잔다고 막 무안을 주안 나무란 거야. 그래서 도망간 친구가 있어. 그 친구 집이 전라도 장흥이었는데, 우리가 고향에 찾아가 달려가지고 데려 왔지. 걔는 졸업은 했어.
그 나이에 (학교를) 그만 두고 나온 애들이 할 수 있는 게 없지. 그러니 술집으로 가기도 한 거지.
창원에 살 적 그 때 중간에 그만 둔 친구를 가음정 시장에서 만났어. 내가 애가 학교를 오지 않아 무척 찾으러 다니던 애야. 걔가 그러더라. 자기는 나를 이전부터 봤는데 아는 척을 못했다고. 왜 그래야 할까?
예쁜 애들은 그냥 일만 할 수 없어. 예쁜 애들은 일이 수월한 포장반이나 Q.C로 주임들이 데려가거든. 내 친구도 옮겨 간 애가 있는데, (주임이) 자기를 쳐다보는 눈이 너무 싫었데. 어깨를 괜히 두들기기도 하고. 나 같이 인물이 받쳐주지 않으면 괜찮은데, 걔들은 회식에 가서도 괴로워.
그 뿐만이 아니라 신발 빨고, 작업복도 빨아 주고, 피곤하다면 등도 두들겨줘야 하고, 뭐 그런 일이 다반사야. 그래서 그 친구 무척 괴로워했어.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야. 학교에서도 걔는 선생들이 그랬거든.
이 문을 들어 올 자격
말로 한 이야기보다 눈으로 한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입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은 생채기를 다시 한번 후비는 일일 겁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알 겁니다. 그 시절이 열여섯 소녀의 가슴에 무엇을 남겨 주었을지. 그 때는 몰랐던 일들이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며 더 큰 흉터로 가슴에 찾아왔을 겁니다.
한일여실 정문에 들어서면 교시를 새긴 돌이 왼쪽에 있어. 뭐라 새겨진지 알아. ‘이 시련과 곤궁을 이겨내지 못할 사람은 이 곳에 들어 올 수 없다’야. 바로 한일여실은 시련과 곤궁을 우리에게 실험하는 장소였어. 학교와 기숙사, 공장은 이 교시에 충실하게 움직인 거지.
근데 너다섯 시간밖에 안 자고 살았거든. 그때는 그렇게 살았던 것 같아. 별로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어. 피곤하더라도. 지금 생각하면 그때 어찌 살았을까 생각도 들어. 졸업하곤 그때를 생각하지 않고 살았거든. 그걸 떠올릴 여유도 없고.
이야기 둘,
양덕동 골목을 어슬렁거리다
이천오년 유월 이십팔일 비온 뒤 그침
어리석었다. 또 찾지 말아야 할 길을 찾아 나섰다.
얼마나 설렜던가. 처음 골목이야기를 쓰자 할 때. 삶은 골목이지 않을까.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숙명 같은 것. 고샅을 돌면 고만한 집이 있고, 또 고만한 삶이 스멀스멀 피어 반갑게 나를 맞이하겠지. 놓아버린 사랑이 있고, 잃어버린 정이 있고, 돌아가고픈 기억이 누렇게 바랜 흑백사진으로 있을 골목. 들 뜬 마음으로 사진기를 챙겨들고 마산 양덕동을 찾아 간다. 지리한 장마의 시작인 이천 오년 유월 이십팔일.
골목, 설레는 기억
경남도민일보 뒤 골목길에 차를 세우고 나는 컬러에서 흑백으로 바뀌는 마산고속버스터미널 옆 골목을 들어서며 추억 여행을 시작한다. 오육십 걸음 남짓한 짧은 골목 끝에 야하게 들어선 모텔의 빨간 간판보다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 있다. 칠이 너덜하게 벗겨진 철 대문 앞에 붙은 종이 한 장. 연습장을 찢어 매직으로 쓴 “달셋방 100에 15만원.” 내겐 한 편의 서정시가 되어 다가온다. 얼마나 울렸던가. 돈이 맞으면 방이 아니고, 방이 맘에 들면 돈이 맞질 않고. 끝내 돈에 맞출 수밖에 없었던 신혼살림이 아직도 골목에 있다.
하지만 내 여행은 여기서 멈춰야 했다. 짧은 골목을 벗어나면 또 이어져야 할 골목이 사라진 거다.
읍과 면 마을을 돌며 살다 오랜만에 찾은 도시의 골목은 바뀐 게 아니라 숨어버렸다. 터미널 옆 골목을 벗어나면 도랑이 있어야 하고, 도랑을 건너면 가난한 호주머니로 곯은 배를 채울 수 있는 허름한 술집과 그들을 눕게 할 자취방들이 모여 있는 골목이 있어야 하는데.
눈앞에 널찍한 사차선 도로가 내 기억을 동강내며 뚫려 있지 않은가. 그 뿐인가 우람하게 버티고 선 붉은 콘크리트 건물은 내가 양덕동 골목을 찾은 이유마저 막고 있다. 골목이 없다니.
멍하니 사차선 도로 앞에 서 있다. 신호등이 빨간불 파란불로 바꾸기를 몇 번, 내 마음도 건너야하나 돌아서야 하나를 반복한다.
소화집
파란불이 깜박거린다. 나도 몰래 찻길로 발을 내딛고 길을 건넌다. 거기서 수출 후문 쪽으로 발길을 옮기니 반가운 간판이 그 자리에 있다.
“소화집”
마산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치고 이 집을 찾지 않은 이가 있을까. ****원을 내고 두루치기 하나를 시키면 오목한 후라이팬 가득 비계가 붙은 돼지고기가 나왔지. 안주 하나만 시키면 소주는 주량만큼 몇 병이고 비울 수 있었지. 값싸고 양 많은 안주. 십 년 전 우리에게 이보다 물(?)좋은 술집이 있었을까.
내가 양덕동하면 소화집을 먼저 떠올리는 이유는 안주의 양보다 ‘소화’라는 이름에 있다. 내가 구십일 년에 마산에 내려와 소화집을 처음 듣고 든 생각은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이다. 마산 창원이 노동운동의 허리라고 생각했던 내게 수출자유지역 앞의 소화집은 지리산이자 빨치산이다. 내겐 신비로움이 감싼 술집이다.
아, 그 신비가 근육질의 콘크리트 건물 아래 아직도 살고 있다니.
간판도 바뀌고 술집 안도 바뀌었다. 홀도 넓어지고 불빛도 예전보다 밝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소화집을 메우고 있는 사람들은 아직도 작업복이 아닌가. 87년 6월 항쟁에 이어 터져 나온 노동자의 함성은 수출후문 앞거리를 메웠고 사보이 호텔 앞은 전경과 대치하는 장소였다. 공장이 아닌 거리에서 무용담을 만들던 노동자는 해가 지면 소화집으로 몰려왔다.
그리운 벗
반가움을 남겨둔 채 수출후문으로 발길을 옮긴다. 수출자유지역 후문 건널목 맞은쪽에서 후문을 바라보면 꼭 교도소를 보는 것 같다. 꽁꽁 철망을 둘러친 후문. 왼쪽 구석 좁은 문을 통해 들어가고 빠져 나오는 노동자들. 내 생각이 아직도 위험한 건가, 아니면 시간이 지나도 저 철망을 고수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위험한 걸까. 리모델링이네, 개발이네 하며 한순간에 삶을 뭉개며 뒤바꾸면서,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의 간판과 닫힌 철문을 지키려는 속셈을 의심하는 내 생각이 더 엉큼한 걸까.
발걸음을 후문 맞은쪽 버스정류장으로 옮겨 몸을 왼쪽으로 틀어 골목에 또 슬그머니 들어선다. 이 곳은 한때 내가 총각인 줄 알고 짝사랑했던 귀여운 벗이 십 몇 년 전에 자취를 하던 골목이다. 둘이 설 수 없었던 연탄아궁이가 있던 부엌에서 꼭 고개를 숙여야 방으로 들어 갈 수 있었지. 늘 잘 열리지도 닫히지도 않아 문 여닫느라 알통이 생겼다고 조잘대던 그 입술이 눈에 선하다.
자취집 대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시장 골목이라 나는 여길 자주 드나들었다. 언제 가더라도 생선 한 토막은 김치와 함께 자취 살림 밥상에 올라 왔지.
한가한 듯한 시장을 빠져나와 벗을 생각하며 사진을 한 장 찍는다. 시장 골목 중간쯤 벗의 얼굴을 그려 넣는다.
이천오년 칠월 십구일 하루 종일 구름가득( 미완성 )
양덕동의 역사는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의 운명과 맥을 같이 한다. 천을 중심으로 논과 밭이었던 양덕동은 1966년 지금의 수자지역에 임해 공업단지 조성을 위한 매립과 산호천 주위로 한일합섬 공장을 지으면서 시작된다.
마산 종합 운동장과 한일합섬이 들어선 곳이 바냇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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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장님, “여가 다 논이었지. 저기는 밭이고. 지금 MBC자리 산이 소 미러 다닌 곳이라. 소 똥에 미끄러지고 그랬제.”
“어린교 근처에서 해삼도 잡아먹었지.”
“타워 맨션은 절대 안 무너질기라. 저기에 동산이 있었거든. 완전 바위라. 산을 깍는데 애 먹은 기라.”
“봉덕 초등학교가 합포 초등학교 분교 제. 우리가 다라이에 흙을 나르며 운동장--”
양덕동의 논과 밭이 골목을 만든 것이 한일합섬과 수자였다면, 골목을 지우는 것도 한일합섬과 수자이다.
칠십년대 공장으로 양덕동을 꾸몄다면, 이젠 부동산 업자의 손으로 새로운 상품을 만들고 있다.
유통(홈플러스, 신세계 백화점), 언론(문화방송, 도민일보), 문화 (315 시민회관, 삼각지 공원)의 중심지라고, 마산의 중심이라고......
긍정하면서도 거부하고 싶은 양덕의 내일이다.
이천오년 팔월 육일 해가 쨍쨍
공장 일을 마치자마자 마산행 시외버스를 탔다. 이런 무더위에 인터뷰를 나가야 한다니. 장마를 핑계로 양덕동 취재를 미뤘으니 이젠 뒤로 미룰 처지가 아니다. 삼십오 도를 오르락내리락하는 더위. 이 더위에 누가 인터뷰에 응할 것인가. 마산시외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오후 세시.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타며 모락모락 열기를 내뿜고 있다. ‘해가 고개 좀 숙이면 나가지 뭐.’ 극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마침 마산에서 ‘웰컴투 동막골’을 첫 선 보이는 날이란다.
동막골 사람들 그리고 산호천 주변 골목 사람들
동막골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그림이 머리에 지워지기도 전에 내가 마주친 것은 합성동 뒷골목의 차와 사람이 어지럽게 뒤섞인 혼잡이다. 서둘러 합성동을 빠져나와 가톨릭 여성회관 앞 건널목을 건너니 ‘지방하천 2급 산호천’이라는 간판이 자리를 잡고 있다. 물이 흐르고 냇가에 어지럽게 자란 풀숲 사이로 초등학교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들고 뛰어 다닌다.
천을 따라 한쪽엔 높다란 아파트가 숲을 이루고, 맞은쪽엔 리어카가 겨우 다닐 만한 골목이 있다. 다닥다닥 칠십 년대 지어진 양옥들은 주변 세상과는 무관심하다는 듯 벗겨진 수성 페인트를 너덜거린 체 천 건너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다.
산호천 한 쪽을 지배한 아파트는 철조망과 나무로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못하게 담을 치고 있다. 하지만 낡은 칠십 년대를 입고 사는 맞은쪽 골목은 다르다. 아들 셋 난 어머니가 축 늘어진 젖을 내놓고 감출 것 무엇이냐는 듯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것 같다.
푹푹 찔 집에서 나와 골목 앞 천변으로 돗자리를 피고 더위를 쫓는 할머니,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는데 구멍가게 앞에서 빈 막걸리 통을 쌓고 있는 아저씨, 장기판을 마주한 할아버지와 똥 누듯 엉거주춤 쭈그려 앉아 훈수를 하느라 얼굴이 붉어진 훈수꾼. 그렇게 양덕동은 이천오년 여름을 나고 있다.
천을 따라 이어진 골목은 눈앞에 철거되다만 흉측한 한일합섬 건물을 만나면 끝이 난다. 여기서부터 산호천 오른쪽엔 한일합섬이 왼쪽엔 찻길을 바라보고 단층 건물의 상가들이 사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한일합섬이 한참 주가를 날릴 때에는 이곳에 포장마차만 열어도 큰돈을 번다고 했는데, 이젠 한가롭기만 하다. 날씨가 더워 모두 피서를 가서 그런가, 중국집에도 손님은 없고, 주방장과 아주머니 한 분이 선풍기도 모자라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다.
업종도 바뀌었다. 한일합섬을 상대로 하는 분식집이나 대폿집은 사라지고, 아파트를 상대로 한 치킨집, 지물포, 부동산이 자리를 차고 있다.
산호천변 골목을 위협하는 저 아파트 자리가 한일합섬 기숙사 자리다. 이미 기숙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엔 아파트가 들어서 있지만, ‘뭔가 흔적이 있겠지’라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에 찾았다. 물론 기대로 끝날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충청도에서 전라도에서 강원도에서 경상도 곳곳에서 이십년 이상을 해마다 수천의 열여섯 처녀들이 이곳으로 왔고, 스물의 꿈을 희망으로 절망으로 지새운 곳이 이곳인데, 그저 과거의 일로 지우기는 안타깝지 않은가.
한일합섬이 들어서며 양덕동 산호천변 골목이 생겼듯, 이제 흉측하게 철거되는 한일합섬 공장과 함께 골목마저 철거되고 있다.
저곳을 거쳐 간 수만의 열여섯 처녀는 스물의 꿈을 희망으로 꽃을 피웠을까.
석 달을 어슬렁거리던 양덕동 골목 찾기는 오늘로 마무리하기로 했다. 사라진 기숙사자리에서 내가 무얼 써야 할지를 찾은 것이다. 열여섯 소녀의 고백으로 양덕동 이야기를 쓴 까닭이 여기에 있다.
첫댓글 다시 올립니다. 추석 전 날 김하경 선생님 한테 꾸지람 듣고 다시 썼습니다. 미완성부분에 쌀집 할머니 인터뷰 들어가야하는 데, 후까이도, 만주 개성 지나 마산으로 왔는데, 한시간 너머 녹취에 양덕동은 없네요. 예구, 다시 헌팅 나가야 합니다. 이러다 하동 못가는 건 아닌지.
헌팅 성공 했는지..한뎃잠을 재워 우짜노..
그날 새벽은 잊지 못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