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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1:11-17절) 바울 복음의 기원
여성들은 가방이나 옷을 살 때, 모양만이 아니라, 브랜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무리 가방이나 옷 모양이 좋아도 만든 나라나, 회사의 이름이나, 지명도가 낮으면, 아무래도 제품에 대하여 믿음이 덜 가고, 싸구려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한때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유명한 짝퉁 브랜드가 많이 돌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짝퉁 가방이나 옷들은 전혀 그 가치가 인정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비슷해도 기분이 나지 않고, 수명이 오래가지 못하고, 쉽게 떨어지거나,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복음(福音)이나,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는 진짜와 짝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틀림없이 짝퉁인데도 구름떼같이 많은 사람이 찾아가서 훈련도 받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는 것을 흔히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복음(福音)으로 훈련 받고, 양육 받은 자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무엇인가가 느낌이 이상하고, 기분이 좋지 않으면서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福音)에 있어서 순전한 복음(福音)은 그 폭발력이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짜가 섞인 경우에도 폭발은 할 순 있습니다. 그러나 그 냄새가 좋지 못하고, 결과가 좋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다이너마이트가 개발되기 전에, 그리고 미국에 의해 핵폭탄이 실험되기 전에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것이 하나 나타났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었습니다.
이 복음(福音)은 유대인의 한계를 넘어서서 로마나, 아시아나,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적으로 큰 폭발력을 나타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복음(福音)의 놀라운 점은 그리스 철학이나, 유대교 종교와 달리 성령의 역사가 나타난다는 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성령의 역사는 한 개인의 인생을 바꾸었고, 세상의 가치관이나, 도덕관도 바꾸었습니다.
심지어는 세계 역사의 흐름조차도 바꾸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가진 복음(福音)은 엄청난 폭발력(爆發力)이 있었습니다. -1-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고,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을 때, 베드로가 전한 설교를 듣고, 전 세계에서 왔던 많은 유대인 중에서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을 정도였습니다(행4:4).
그리고 이 복음(福音)은 이 사람들을 통해서 다시 자기가 살던 곳 즉 로마라든지, 북부 갈라디아 지방 같은 곳에 엄청난 부흥을 일으킬 정도로 뜨겁고 강한 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강력한 폭발력을 가진 복음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곧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이 전한 복음(福音)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회당(會堂)중심의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설교하다 유대인들이 반대하니까 아예 이방인들 중심으로 복음(福音)을 전했는데, 엄청난 폭발력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에게“이방인들은 더 이상 할례를 받을 필요가 없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그 당시 유대인만이 아니라, 세계인들에게 너무나도 쇼킹(shocking)한 뉴스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담대하게 전하기를“하나님은 더 이상 유대인들만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방인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셨다”고 설교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복음(福音)은 그 당시 갈라디아 지방과 고린도에서만 터졌던 것이 아니라, 마르틴 루터에 의해 독일에서도 터졌고, 칼빈에 의해 제네바에서도 터졌고, 웨슬리나 조지 휫필드에 의해 영국에서도 터졌고, 우리 한국에까지 터졌던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福音)에 놀라워하면서 과연 이 바울의 복음은 어디서 나왔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궁금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도 바울의 복음(福音)의 놀라운 폭발력이 우리나라에서는 효력(效力)이 끝나버렸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이 우리나라에서는 옛날 같은 폭발력이 나타나지 않고, 교회나 기독교가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당하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
Ⅰ.바울 복음의 기원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福音)은 원론적(原論的)으로 예루살렘 제자들이 가르쳤던 복음(福音)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최초로 예수님의 복음(福音)을 듣고,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아무런 차별을 느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즉 그들은 모두 할례(割禮)를 받았고, 또 성령(聖靈)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전도자(前導者)로 파송하면서 진정으로 복음(福音)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문제로 대두(擡頭)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전도로 많은 헬라인이나, 야만족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데, 그들은 아직 할례(割禮)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할례(割禮)를 받을 필요 없이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하게 전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할례(割禮)를 받지 않아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聖靈)을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바울의 전함은 너무나도 쇼킹(shocking)한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유대인 출신 전도자 중에서는 이방인들이 할례(割禮)도 받지 않고, 율법(律法)도 모르면, 하나님 믿는 것이 너무나 쉬운 것이 아닌가, 그리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엉망이 되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사람들이 꽤 있었습니다.
더욱이 오랜 전통(傳統)을 지키고 있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할례(割禮)가 부정(不淨)되는 것에 분노(忿怒)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 출신 전도자 중에는 사도 바울의 이 가르침은 순수한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어떤 사람들로부터 배운 것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變形)을 시켜서 가르친 것이라고 사도 바울을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은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순수한 주님의 가르침이 아니라고 비판(批判)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갈라디아 지방을 다니면서 할례(割禮)를 받아야 구원(救援)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는데, 실제로 많은 이방인 출신 기독교인들이 할례(割禮)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 놀라운 것은 갈라디아 지방에서 성령의 불이 한순간 사라지고 만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놀라운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즉 교회에 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곳에서는 한때, 교회에서 부흥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오르다가 무슨 시비(是非)가 생기면서 한순간에 불이 꺼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아주 오랫동안 불이 꺼져 있어서 아예 냉랭한 교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집에 들어가 보면, 온기(溫氣)가 있어야 사람 사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는 폐가(廢家)에 들어가 보면, 벌써 먼지가 수북하게 쌓이고, 온기(溫氣)라는 것은 전혀 느낄 수 없이, 어떤 경우에는 뼛속까지 찬 기운이 들어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절간이나 성당(聖堂), 다른 문화재(文化財)와 다른 점은 그 안에 뜨거 움이나, 따뜻함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개 오랫동안 의식적(意識的)으로만 신앙생활 해온 이들을 보면, 아예 신앙에 불기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불기가 생길까봐 불을 빼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거의 돌부처같이 앉아서 예배 시간을 때우고, 자신의 위신(威信)이나 세우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찬송이나, 기도가 뜨거워지거나, 설교에 불이 붙으면, 뜨거워서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정말 그런 신앙은 죽은 신앙(信仰)이고, 죽은 복음(福音)입니다. 아무리 그 교회가 유명한 교회이고, 유명한 목사가 설교를 하고, 거기에 아무리 유명한 교인들과 부자(富者)들과 교수(敎授)들이 많아도 그 교회는 죽은 교회인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반대하던 전도자들의 의도(意圖)는 나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반대하는 의도(意圖)는 우리가 믿어오던 신앙을 그렇게 쉽게 버릴 수 없다는 것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너무 경박(輕薄)하게 만들 수 있다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도(意圖)했던 것과 달리, 이들이 사도 바울의 복음(福音)을 반박(反駁)하고, 사도 바울을 공격(攻擊)하면서 갈라디아 지방에서 갑자기 성령(聖靈)의 불이 꺼져버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였습니다.
우리가 진정한 복음(福音)과 복음(福音) 아닌 것을 분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정한 복음(福音)이 아닌 것은 아무리 학적(學的)이고, 아무리 교회의 규모(規模)가 크고, 유명(有名)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다고 해도 거기에 불이 없다는 것입니다.
번 꺼져버린 부흥의 불을 다시 일으키는 것은 대단히 어렵습니다. 개인적으로도 복음(福音)과 선교(宣敎)에 대한 열정이나, 교회에 대한 열정이 갑자기 죽어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시험(試驗)이든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돌리는 데는 얼마나 많은 고통과 시간과 아픔의 시간이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이때 사탄(詐誕)이 주로 사용하는 방법이 바로 의심(疑心)의 영(靈)이고, 시기(猜忌)의 영(靈)입니다.
즉 누군가가 뜨겁게 복음(福音)의 역사를 일으키는데, 시기심(猜忌心)이 일어나면서 방해(妨害)를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갑자기 불이 꺼져버리게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 불이 붙었던 사람의 마음에 있는 불까지 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곳의 불은 꺼지게 됩니다. 대개 그런 불을 끄는 사람은 그 지역에서 유명(有名)하거나, 영향력(影響力)이 센 사람, 즉 강(强)한 입김의 소유자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포용(包容)주의로 가기 시작합니다.
즉 너무 한 사람만 중심이 되면 안 되고, 골고루 돌아가면서 다양한 의견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복음(福音)의 기름은 아주 순수해야 하는데, 여러 기름이 섞이면, 연기(煙氣)가 나게 되고, 불이 곧 꺼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복음(福音)운동이 너무 유명해지거나, 규모(規模)가 커지거나, 많은 헌금(獻金)이 모이게 되면, 순수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1:11-12절)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사도 바울은 먼저 그들을 향해“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미운사람이 있으면“이 원수들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흥의 불이 꺼진 것은 꺼진 것이고, 이제 함께 이 불을 일으켜야 하기 때문에“형제들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옛날 우리가 가난했을 때, 아궁이 불이나, 연탄불이 꺼졌을 때, 서로 원망하고, 욕해봐야 소용이 없고, 누군가가 불을 피워야 했습니다.
나중에 번개탄이라는 것이 나왔을 때는 그래도 불붙이기가 굉장히 수월한 편이었는데, 그전에는 옆집에 새 연탄을 하나 주고, 불을 붙여 오든지, 아니면 나무토막 같은 것을 놓고, 연기를 맡아가며, 불을 피워야만 했습니다.
너무나 고생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가장 먼저 한 말은“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는 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복음(福音)을 알게 된 것은 자기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복음(福音)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오히려 복음(福音)을 반대하고,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행8:3).
그런데 예수님이 자신의 인생을 휘어잡으셔서 180도 다른 사람이 되었고, 또 자기를 사용하셔서 지금 여기까지 복음(福音)을 전하게 하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어떤 새로운 지식(知識)이나, 철학(哲學)같은 것은 숨은 스승이 있어서 그에게 배우기도 하고, 아니면 그보다 더 윗대의 사람으로부터 전수(傳受)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福音)은 어느 누구에게서 전수(傳受)받은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 나이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福音)은 아주 오래된 스승들로부터 받은 것도 아니고, 어떤 특별한 선생으로부터 개인적으로 사사 받은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啓示)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福音)만이 성령(聖靈)의 불을 붙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聖靈)의 불이 붙는 것입니다. 그가 어느 학교(學校)를 나왔고, 어느 교단(敎團)이며, 얼마나 지식(知識)이 많은가 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사람들의 가슴에 성령(聖靈)의 불이 붙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때 주의해야 하는 것은 유사(類似)부흥의 불을 성령의 불로 생각해서 속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광신(狂信)주의로 빠지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주지주의(主知主義)즉 지식(知識) 위주로 흐르기도 하고, 어떤 경우는 대교회(大敎會)주의로 빠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의해서 보면, 가짜 불이라는 것은 무엇인가가 깨끗하지 못하고, 개인(個人)숭배를 하며, 지저분한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福音)은 100% 부활(復活)하신 주님으로부터 직접 배운 것이고, 사도 바울 자신이 창작(創作)했거나, 혹은 예루살렘 사도나, 다른 율법(律法)학자로부터 배운 것은 단 하나도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의 복음(福音)은 100% 부활(復活)하신 주님의 말씀이며, 주님의 명령(命令)이며,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불이 붙는 비결이었던 것입니다.
Ⅱ.사도 바울이 진리를 배운 방식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직접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산상설교를 배웠고, 씨 뿌리는 비유를 배웠으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장차 올 심판에 대하여 배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復活)하신 후에 집중적으로 예수님의 부활(復活)과 구약 성경에 나타난 예수님에 대한 약속(約束)들을 배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살아계셨을 때, 예수님에게서 진리(眞理)를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1:13-14절)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오히려 사도 바울은 예수를 만나기 전에 기독교를 반대하고, 박해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그의 부활(復活)을 미친 사람들의 날조(捏造)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기 위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다는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復活)하신 예수님을 극적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처음으로 본 것이었고, 첫 번째 계시(啓示)였습니다(행9:1-19).
그때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낮 열두 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태양보다 더 환한 빛이 그 위에 비쳤습니다. 바울은 눈이 부셔서 그 자리에서 쓰러지면서 그 빛 가운데,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바울에게“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고 책망하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때 바울은“주여,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더니, 그분은“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바울에게“너는 일어나서 시내로 가라. 네게 무슨 말을 해 줄 자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보았던 첫 번째 계시(啓示)였습니다.
즉 그는 지금까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 미쳐서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그분은 실제로 살아계셨고, 미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지금까지 믿고, 추구하던, 모든 것은 엉터리였고, 위선(僞善)이었고, 거짓덩어리였습니다. 세상에 어떻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모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나님을 그렇게 열심히 믿었는데, 이렇게 엉터리로 믿을 수 있었을까? 이것이 곧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의 영적(靈的) 상태였던 것입니다.
그 후 청년 바울은 다른 사람의 손에 붙잡혀서 다메섹 안에 있는 직가 라는 거리에 들어가서 사흘 동안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기도만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아나니아라는 신실한 형제를 바울에게 보내어서 안수(按手)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아나니아는 바울에게“형제 사울아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를 다시 보게 하신다.”라고 하면서 안수(按手)기도를 하니까 바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면서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아나니아의 입을 통해서 자신이“많은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주님이 택하신 그릇이며, 그가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 사도 바울은 언제 주님의 계시(啓示)를 받았느냐는 것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福音)은 엄청나게 깊이 있고, 방대한 내용입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천재(天才)라 하더라도 이것은 한순간에 배운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단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눈이 뜨게 되자 즉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Messiah)라는 사실을 곧바로 다메섹 회당(會堂)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함께 다메섹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왔던 자들은 바울의 변화에 매우 당황해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메섹의 관리들과 짜고, 바울이 성문(城門)에서 나올 때, 잡아서 죽이기로 계획(計畫)을 세웠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아나니아와 같은 다메섹의 기독교인들이 미리 알고는 바울을 성벽(城壁)에서 광주리에 담아서 피신시켰습니다.
1:17절)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여기에 나오는“아라비아”는 아무도 없는 황무지(荒蕪地)가 아니고, 기독교인들이 숨어 살던 비밀(祕密)공동체, 요즘으로 치면, 수도원(修道院)같은 곳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미 그곳에 있으면서 주님으로부터 계속 계시(啓示)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곳에서 이런 진리(眞理)를 배우니까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아무도 바울을 만나기를 원하지 않는 바람에 게바 즉 베드로만 만나서 15일을 같이 있었고, 또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만 만났을 뿐이지, 다른 사람은 아무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처음에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이해가 되었습니다.
1:18-19절)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여기서 삼 년이라는 것은 바울이 아라비아에 있었던 기간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예루살렘을 방문해서 베드로를 만났지만, 다시 복음(福音)을 배울 시간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받은 복음(福音)은 베드로에게 배운 것도 아니었고, 야고보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었습니다.
1:20절)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맹세(盟誓)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모든 사도를 만나지 못하였고, 15일을 게바와 함께 있으면서 복음(福音)을 배울 시간을 가지지도 못했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상한 주님의 섭리(攝理)에 의해서 그들과 오래 만나거나, 가르침을 배우거나, 교류(交流)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에게는 처음에 이해(理解)가 되지 않았습니다.
내가 아라비아에서 주님으로부터 배웠던 진리(眞理)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함께 나누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왜 이런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에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예루살렘 사도들은 나름대로 유대인들의 벽(壁)이 있고, 한계(限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사도나, 교인들과 교제(交濟)하지 않고, 자신의 순수한 복음(福音)을 그대로 가지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유대인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에는 한계(限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도 바울이 그들의 틀에 갇힐 필요가 없다고 생각을 하셔서 그들과의 만남을 막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나, 교인들의 지원(支援)을 받지 못했지만, 부흥(復興)의 불은 그 어느 것보다 더 뜨거웠고, 더 순수했습니다.
Ⅲ.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우리의 길을 깨닫지 못하는 중에서도 그 길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이것을 우리는“섭리(攝理)”라고 부릅니다.
찬송가 390장 *예수가 거느리시니*
사도 바울은 나중에 자신의 인생을 한번 돌이켜 생각해보니까 하나님께서 그를 복음(福音)의 사도로 택정(擇定)하셨던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15절)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사도 바울이 복음(福音) 전도자(前導者)가 되고, 사도(使徒)가 된 것은 이미 어머니의 태(胎)로부터 예수님이 택(擇)하신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그의 어머니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알 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바울의 어머니가 결혼(結婚)하기 전(前)이나, 혹은 바울을 임신(姙娠)했을 때, 다소에 있는 기독교인들의 모임이나, 혹은 복음(福音)적인 사람이 되도록 그의 배를 안고, 계속 기도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바울의 어머니는 바울이 이런 위대(偉大)한 전도자(前導者)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어머니는 바울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이 되도록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바울은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市民權)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부모(父母)가 길리기아(남부 갈라디아)의 수도(首都)인 다소에서 상당한 경제적(經濟的)인 부(富)를 가진 사람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아테네나 레스보스 같은 곳으로 유학(留學)을 가서 지식(知識)을 쌓았더라면, 사업가(事業家)나 학자(學者)로 성공(成功)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부모(父母)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 그 당시 대학자(大學者)인 가말리엘 밑에서 율법(律法)을 배우게 했던 것은 바울이 하나님 말씀의 종으로 사용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 그의 어머니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의 미래(未來) 인생에 큰 영향(影響)을 미쳤던 사람은 아버지라기보다는 어머니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디아스포라의 율법(律法)을 배우는 모임에 나가셨던 것 같고, 바울이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되도록 기도를 계속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제자(弟子) 디모데에게도 해당되는데,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딤후1:5)...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디모데는 아버지가 헬라인이고, 어머니가 유대인인 혼혈아(混血兒)였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신앙은 그의 어머니의 신앙 그대로였고, 그의 어머니의 어머니 즉 외할머니의 신앙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디모데가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들었을 때, 마치 자석(磁石)에 끌려 들 듯이 그 말씀에 붙들려서 사도 바울의 제자(弟子)가 되고, 동역자(同役者)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열심히 주님을 대적(對敵)하고, 교회(敎會)를 박해(迫害)하고, 있는 동안에도 주님은 조용히 바울 옆에 계시면서 그를 지켜보셨던 것입니다.
1:13-14절)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히 있었으나”
여기서 사도 바울은“유대교”라는 단어(單語)를 처음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유대교”는 이미 구약 이스라엘의 신앙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즉 원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따뜻하고, 말랑말랑하고, 살아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굳어져서 죽어버리게 되면, 외형(外形)은 살아있지만, 실제로는 죽어 있는 아주 딱딱하고, 메말라버린 신앙이 되어버립니다. 즉 구약(舊約)이 죽은 것이 유대교인 것입니다.
이것이 곧 박제(剝製)된 신앙입니다. 박물관(博物館)에 가보면, 곰이나 독수리, 멧돼지를 박제(剝製)해 놓은 것이 있는데, 그것을 보면, 진짜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입니다.
종교개혁(宗敎改革) 당시 마르틴 루터가 종교(宗敎)지도자들의 말을 들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때의 종교(宗敎)가 죽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1:16절)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은 사도 바울이 이방(異邦)에 복음(福音)을 전하는데, 적임(適任)자라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는 길리기아라는 이방(異邦)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이방(異邦) 문화(文化)를 잘 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루살렘에 유학(留學)을 가서 히브리 성경(聖經)도 잘 알았습니다.
그는 유대인의 벽(壁)을 넘어서 이방(異邦) 세계에 복음(福音)과 성경(聖經)을 가장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사도 바울 속에 나타내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했던 것처럼 예수님을 외모(外貌)로 한번 보고 마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그의 골수(骨髓)까지 느끼고, 깨닫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아라비아에서 그냥 주님의 계시(啓示)만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구약(舊約) 성경(聖經)을 읽으면서 철저하게 성경(聖經)을 묵상(默想)하고, 연구(硏究)하면서 예수님의 계시(啓示)의 가르침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모세를 생각할 때에도 그가 애굽의 노예(奴隸) 감독(監督) 한 명을 죽인 후에 무려 40년 동안 살인자(殺人者)로 미디안 광야에서 숨어서 도망 다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40년 동안 모세는 낮아지고, 또 낮아졌다가 결국 불붙는 떨기나무 앞에서 주님의 음성(音聲)을 듣고, 신발을 벗고, 무릎을 꿇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어렸을 때, 어머니였던 유모(乳母)로부터 거의 구약(舊約) 창세기(創世記)를 외울 정도로 배웠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40년 동안 장인(丈人)의 양(羊)을 치면서 이 말씀들을 묵상(默想)하고, 또 묵상(默想)하고, 도무지 이해(理解)가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고민(苦悶)을 하다가 어느 날 불붙는 떨기나무에서 하나님의 음성(音聲)을 듣고, 믿음이 폭발(暴發)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당시 바울의 머릿속에도 어렸을 때, 어머니가 가르쳐주셨던 것이나, 가말리엘 밑에서 배웠던 것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하나님 말씀의 폭발(暴發)이 일어났고, 이 불이 아라비아에서 계속 불붙어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면서“혈육”과 의논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보통 “혈육(血肉)”이라면, 가족(家族)을 말하는데, 여기서 사도 바울은 사람들의 인정(認定)이나, 추천(推薦)을 말합니다. 즉 아무도 사도 바울을 사도(使徒)로 뽑기나, 투표(投票)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그를 아주 특별한 이방인(異邦人)을 위한 사도(使徒)로 따로 떼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과거(過去)를 생각해보면, 도저히 우리 머리로 이해(理解)가 되지 않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즉 “그때 나는 이런 공부보다 다른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나는 돈을 벌고 싶었는데, 나는 다른 곳에 가고 싶었는데”등등의 의문(疑問)을 가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강력(强力)한 의지(意志)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막으시고, 이 길로 몰아오신 것입니다.
1:17절)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바울이 먼저 사도(使徒)된 사람들을 만났더라면, 유익(有益)한 것이 참 많았을 텐데, 주님은 그것을 허락(許諾)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사도(使徒)된 자들은 그들 나름대로 한계(限界)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21절)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그 후에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오래 있지 못하고, 수리아와 길리기아 쪽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계속 주님의 계시(啓示)를 받으면서 이방인(異邦人)의 사도(使徒)로 준비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의 핵심(核心)은 성령(聖靈)의 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교회(敎會)는 멋진 건물(建物)을 가지고 있고, 많은 교인과 헌금(獻金)은 있지만, 예배(禮拜)나 교회(敎會)가 썰렁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많은 이론(理論)을 제시하고 있지만, 그것 자체가 더 복음(福音)을 썰렁하게 하는 것들입니다. 복음(福音)이 있는 곳에 부흥(復興)이 있고, 거기에 생명(生命)이 있는 것이지, 사람들만 잔뜩 모여서 자기 자랑과 자기 잘난 체하는 곳에는 불이나, 부흥(復興)이 없습니다.
우리는 먼저 내 가슴에 불이 있는가? 점검(點檢)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로 교회(敎會) 불을 끄는 짓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지옥(地獄)의 심판(審判)을 받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천국(天國)의 불을 지키고, 살리기 위해서 주님 재림(再臨)때, 불타고 철거(撤去)될 세상 것들에 집착하지 말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所望)하며, 삶 전체를 드린 사도 바울 같이 희생(犧牲)]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뜨거운 심령(心靈)부흥(復興)의 역사가 젊은이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찬송가 192장 *임하소서. 임하소서.*
진리의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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