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100년 7월 19일 일요정례법회
> 제목: 정산종사법어 제8 응기편 39장
> 보산 김제원 교무님 설법
> 타이핑: 백도원
반갑습니다. 오늘 우리 교우님께서 준비를 많이 하셔서, 학교에 근무하신 경력이 있어서 ppt도 준비하시고, 교장선생님 출신 아니랄까봐 말도 또박또박,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셨네요. 잘 들으셨죠? 자료를 충분히 하셔서 오늘 제가 성타원님 얘기를 많이 안해도 될 것 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1. 성타원 (聖陀圓) 이성신 (李成信) 종사 (宗師)
오늘 성타원님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면, 성타원님은 도산 이동안 선진님의 넷째 따님입니다. 성타원님은 대종사님으로부터 칭찬을 많이 들으셨어요. 국이 크다는 말씀도 들으셨고, 너는 어디 가서든 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어요. 그 정도로 역량이 뛰어나시고, 전생에 너는 수행을 많이 하고 복을 많이 지은 사람이라고 하셨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타원님은 아마 원불교 교화계의 최고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물론 공타원님도 교화를 참 잘하셨지만, 실질적으로는 아마 성타원님이 더 많은 교화를 하시지 않으셨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원불교에서 최초로 하는 것을 제일 많이 한 분 중의 한 분이 성타원님입니다. 첫째가 유치원이구요, 어린이 학생회, 청년회 이런 것들을 다 많드셨고, 구체적으로 대학교 동아리도 이분이 최초로 만드셨습니다. 교당을 일년에 한 개씩 내고 하신 분이시고, 아주 적극적이시고, 또 설법도 잘 하셨죠. 어떤 사람은 설법만 잘하고, 교화의 성적이랄까 이런 것들이 약하신 분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이분은 설법뿐만 아니라 교화 실적이 고루 맞아서 대종사님 법을 실생활에 그대로 응용해서 하신 대봉도 이면서 출가위에 오르신 공부와 사업 두 가지에 다 정특등을 다 하신 그런 어른이시다.
그리고 이분의 특성을 몇 가지 보면, 아주 적극적이십니다. 기다리는 형이 아니시고, 과감하셨고, 아이디어가 아주 많으세요. 심지어 돌아가신 해 초에 저한테 전화를 하셨어요. 저를 보자셔서 따로 시간을 내서 찾아갔죠. 그랬더니 대종사님 당대에 당신이 들은 법문과 나한테 부탁할 것들 몇 가지를 말씀 해주셨어요. 참 고맙더라구. 내가 대종사님을 직접 뵈고 이런 것 이런 것을 들었는데 이런 것은 이렇다고 해주시는데 아 너무 감동적이었고, 그리고 그 해에 돌아가셨어요. 신기하게도 어른들이 돌아가실만 하면 저를 찾아요. 여러분들 출신 교당들이 있을 거에요. 제가 교당을 대볼 테니까 성타원님 은혜를 안 입은 사람 있는가 보세요. 얼마나 이 분이 덕이 넓은가. 정읍 유치원 출신들이 많거든요. 정읍 출신 교무님들. 그리고 이 분이 교무를 한 스무명 내 놓으셨거든요. 광주교당에서는 서광주 교당을 내셨고. 지금의 여수 교당, 구례 교당, 곡성교당, 제주도의 서귀포 교당, 순천 교당, 장성 교당, 나주 교당, 동광주 교당, 그리고 남광주 교당, 광주에 계실 때 동서남북 교당을 다 내셨어요. 그리고 보성 교당, 문장 교당. 이 분이 그때 당시에 이 교당들을 다 창립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대구에 가셔서 교화를 하시고, 그리고 대전에 가셔서 동대전, 서대전 교당을 내셨습니다. 그리고 서산에 교당을 내셨죠. 또 막판에는 군산에 가서 교구장을 하시면서 여기 저기 연원을 대셨습니다. 이분이 낸 아이디어만 가지고 책자를 내도, 지금도 써먹어도 교화에 좋을 것들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방송 설교도 그때 당시 하셨구요, 전라남도 공무원들 하는 위원회 활동도 하시고, 얼마나 적극적이셨는가 몰라요.
한 여인이 아버지로부터 어머니로부터 사랑을 받고, 또 멋진 남자를 만나서 귀염을 받고, 그리고 나중에 자식으로부터 봉양을 받고, 이렇게 나름대로 자식하나 잘 키우고 갈 수 있는 한 여자의 일생인데, 그런데 이분이 살다 간 인생은 보통 그런 여자 천명보다 낫습니다. 이 분 한 사람이. 종사라는게 아무나 되는게 아니고 대봉도라는게 아무나 되는게 아닙니다. 대봉도만 되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죠. 그러니까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뭐냐면, 사람은 똑 같은 사람인데 그 살다 간 자취가 보통 사람보다 10% 20% 좀 열심히 살았다 그게 아니라, 보통사람보다 10배, 100배 똑 같은 기간에 살다 갈 수도 있다. 그럼 그 힘은 무엇일까? 그건 서원의 힘이요. 신심의 힘이요. 스승의 힘이요, 교법의 힘이다. 사은의 힘이다.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아까 사진 나왔는데 거기 계신 분들 거의 다 돌아가셨어요. 같이 찍으신 분들. 그 이야기는 뭐냐면 좀만 지나면 우리 간타원님도 곧 없어지실 것이고. 여기 머리 하얀 분들 곧 가실 것입니다. 이런 소리 하면 기분 나쁠란가 모르겠는데. 내가 지금 사실을 말하고 있죠. 백세시대라고 해도, 지가 찍해봤자 백세지. 그러죠? 회관님도 곧 가실 거고. 원불교는 이 정도 수준이 되야 한다고 봐요. 죽음을 괜히 두려워하고, 죽음을 이야기 하면 재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바로 왔다갔다 순환하는 것으로서 이야기하는 수준이 도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성타원님 가셨지만, 다시 큰 양반으로 오실꺼고. 저 양반 너무 열심히 살아서 좀 쉬었다 오셨음 좋겠어요. 너무 열심히 살았어. 아마 오셨으리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지만 다 금방 가요. 그런데 무엇으로다 갈 것이냐. 그 아무것도 아닌 오밀조밀 니 죽고 나 살자. 너는 용서 못한다. 이렇게 참 마치 시소가 왔다 갔다 파도가 치듯이 그렇게 번뇌 속에서 한 생을 살다가 때로는 젊은 때는 욕심을 좇고 돈을 좇고 명예를 좇고 감정을 쫓고, 그런 것을 좇다가, 인연을 쫓다가 허망하게 생을 마감할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런 것을 쓸 시간도 없이 오직 중생 제도하고, 자기 마음 공부하고, 사은에 보은하는 이런 것에다가 내가 오늘도 내일도 바쁘게 살아갈 것인지. 사는 모습들이 살아가면서 천차만별이다. 하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은 내가 나라는 존재를 어디까지 보느냐 이렇게 말할 수도 있거든요. 육신을 나로 알면 이 육신을 위해서 살 것이요. 가정을 나의 국한으로 알면 그걸 위해서 살 것이요. 또 이 국가를 나로 알면 국가를 위해서 살 것이요. 일원상 법어에 나오는 불보살처럼 시방삼계가 다 오가의 소유로 인식하고 살 것인가. 저런 어른은 시방 삼계가 다 당신의 소유로 인식하고 그렇게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일을 하시고 그렇게 거기다 바치고 사셨다. 그러면 그것은 뭔 차이냐. 바로 마음의 차이 아니냐. 인식의 차이 아니냐. 내 국한이 어디까지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거기 까지 내 생각이 미치고 내 마음이 미치죠. 그런데 여기에는 수학 공식이 안 맞는거 같아. 예를 들어서 나를 위하고 가족을 위하면 더 크게 에너지가 밖으로 안 나가니까 이것이 더 잘 될 것 같죠. 여기는 수학 공식이 안 맞더라니까. 신기하게도 더 크게 해버리면 이 안에 이것은 밖으로 써버렸으니까 마이너스일 것 같은데 그런데 이놈의 것은 반대여. 나를 위하면 오히려 안되는데, 밖으로 하면 오히려 이것이 되어버리더라. 수학이치로는 도저히 안 맞는 인과의 이치더라.
눈이 작은 사람들은 마음이 작아서 그래요. 인신공격하냐고 누가 그럴라나. 여러분 생김새 하나하나가 그대로 인과에요. 여러분 지혜 하나하나가 그대로 인과에요. 여러분 인연 하나하나가 그대로 여러분이 불공을 어떻게 들였냐 하는 인과입니다. 여러분 건강 하나하나가 그대로 인과에요. 인정하세요? 제가 왜 키가 작겠어요? 인과에요. 하하하. 여러분이 왜 그 남편을 만났어요. 왜 그 아내를 만났어요? 그 인과에는 더 들어가보면 한마음이 있습니다. 한마음이 들어서 선택한 인과더라. 언제? 그 순간에. 그 순간에 그 한 마음이 들어서 이걸 선택하냐 저걸 선택하냐에 의해서 그렇게 천지차이로 천양지차로 벌어져 버리더라. 그 남자를 선택했고, 그것을 선택했고, 그것을 잡았고. 그것을 피했고. 그것이 그대로 인과로 연결돼서 나를 만들었다. 그래서 마음을 작게 쓰면 눈도 작아지고, 그런데 마음을 크게 쓰면 커져. 원만구족이라는 것이. 마음의 무형의 형상이 원만구족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쓰면 몸도 원만구족하게 돼 .이게 인과여. 괜히 부모님 탓하지 마시고. 하하
2. 정산종사법어 제8 응기편 39장
오늘 법문 살짝 하겠습니다.
이 성신(李聖信)에게 말씀하시기를 [심량(心量)이 호대하면 모든 경계가 스스로 평온해지나니 이것이 곧 낙원의 길이요, 심량이 협소하면 모든 경계가 사면을 위협하나니 이것이 곧 고해의 길이라, 고락이 다만 자신의 견지 여하에 있나니라] 하시고 [至誠修道德 坦坦前路開]라 써 주시니, 번역하면 [지성으로 도덕 닦으면 탄탄한 앞길 열리리라] 하심이러라.
여러분의 마음의 크기가 얼마나 크십니까? 넓이가 얼마나 넓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의 색깔은 어떤 색깔이십니까? 실험을 할 때 조그만 병에다가 파란 잉크를 똑 떨어뜨리면 파래집니다. 여러분, 창해수라고 하죠. 저 큰 바다에 잉크를 통으로 갖다 부어보세요. 그 바다가 색깔이 변하는가. 안 변해. 그 주변만 변할란가 몰라도. 그런데 거꾸로 뒤집어서 생각하면, 잉크가 와서 파래졌다고 할 것인지, 아니면 양이 작아서 쉽게 파래졌다고 생각해 볼 것인지. 제일 쉬운 것이 뭐냐면 원망하는 거에요. 외부환경을 탓하는 거에요. 원인을 밖으로 돌리는 거에요. 원불교를 만난 사람이라면 원인은 밖이 아니라 안이다. 하는 것만 알아도 정말 그 사람 인생은 달라지는 겁니다.
내 (內) |
인 (因) |
=심(心) |
외 (外) |
연 (緣) |
=경계 |
이것만 확실히 인정해도 참 크다. 이 바깥의 것을 연(緣)으로 바라보지 않고 인(因)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어떤 결과라는 것은 인과 연이 만났을 때 결과가 있어지는데, 과연 너 때문인가 당신 때문인가. 이놈의 나라 대통령 때문인가... 인(因) 만도 아니고, 연(緣) 만도 아니에요. 인과 연이 하나로 그 시기와 상황이 맞아졌을 때 어떤 결과가 오더라. 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서 똑 같은 연을 만나도 너무 다르다니까 신기하게도. 내가 여기서 화날 정도의 에너지를 탁 똑같이 던져줬어. 그런데 반응은 천차만별이여. 어떤 사람은 톡 문 열고 나가버릴 수도 있어요. 뭐 교무가 저래 하면서. 어떤 사람은 허허허 웃어버릴 수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두고 보자. 할 수도 있어요. 외부 똑 같은 경계가, 연은 경계라. 똑 같은 경계가 그 사람 마음의 크기에 의해서 달라진다. 경계 따라 있어질 수는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오히려 공부로 삼는 사람. 오히려 감사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 오히려 공부의 재료로 삼는 사람. 오히려 불공의 기회로 생각하는 사람. 아니면 원망의 대상으로 삼는 사람. 상처로 간직하는 사람. 다양하더라.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더라.
그래서 마음이 좁아지면 고해의 길이여. 거기가. 그러나 마음이 심량이 호대하면 거기에는 다 들어와도 내 안의 그것이 흔들리지 않더라. 여러분 살면서 흔들렸던 적 많죠? 저도 많거든. 어떠신가 모르겄어. 흔들렸을 때 얼마나 상대방을 탓하고 욕하고 과실을 말하고 두고보자고 하고. 또는 어이구 전생에 죄업을 많이 생각하셨는가. 아니면 내 그릇을 한번 대조해보는 시간으로 가졌었는가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 그 마음이 어떤 믿음을 통해서 어떤 행위로 연결되서 그것이 인연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일을 이루기도 하고 못 이루기도 하는거 아니냐. 맞습니까? 그러죠.
3. 사양지도 (四養之道): 양덕(養德)·양현(養賢)
제가 지난주에 사양지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다가 시간이 지나서 두 개 밖에 못했어. 내가 몇 주 법회를 못 봐요. 다음주에 훈련가고, 그 다음주엔 휴가 법회고, 청년 훈련가고, 그렇게 법회를 오래 못 봐서 오늘 그거 더 해야겠습니다.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길러야 할 네 가지 도[四養之道]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양정(養精)·양신(養身)·양덕(養德)·양현(養賢)이니라. 첫째 양정은 고요하고 두렷한 본래의 정신을 기르자는 것으로, 새벽과 저녁에는 수도 정진하는 시간을 정하여 좌선을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무시선법으로 정력(定力)을 쌓는 적공을 해야 하느니라. 둘째 양신은 몸을 잘 관리하고 길들이자는 것으로, 적게 먹고 많이 씹으며, 말은 적게 하고 묵묵함을 지키며, 근심은 적게 하고 많이 잊으며, 옷은 검소하게 입고 목욕을 많이 하며, 욕심은 적게 하고 많이 비우며, 생각은 적게 하고 활동을 많이 하며, 적당한 운동과 휴식을 겸해야 하느니라. 셋째 양덕은 덕을 기르자는 것으로, 대종사께서 어느 곳 어느 일을 막론하고 오직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덕이라 하셨나니 안으로 근검절약하고 밖으로 헌신 봉공하는 생활로 인류의 무지·빈곤·질병을 퇴치해야 하느니라. 넷째 양현은 어진 마음과 어진 사람을 기르자는 것으로, 단체나 국가도 주인이 없으면 빈 껍질이요 세계도 불보살이나 성현이 나오지 않으면 빈 껍질이니, 인류 사회를 책임질 수 있는 인재를 많이 배출해야 하느니라.」
대산종사법어 제4 적공편 66장
(1) 양정(養精), 양신(養身)
양(養)이라는 것은 공을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화초도 공을 들여야하고, 곡식도 가축도 사람도 공을 들여야 한다. 그 첫째는 정신을 양(養)하자. 정신에 공을 들이자. 정신을 수양하자. 왜냐. 정신은 뭣이라고? 바로 나의 참 주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참 나는 무슨 뜻이냐? 정신이 참 나여. 성품이 참 나고. 그래서 그 정신, 참 나를 어떻게 양을 할 것이냐. 그것은 바로 수양이다. 염불 좌선이라던가 기도 훈련을 통해서 해야 한다. 그리고 나이가 좀 들어가면 묵언안식, 말도 좀 줄이고 그리고 보림함축해라. 제가 지난주에 포도잠거, 둔세양도, 괄낭순회라고 해서 입을 함부로 쓰지 마라 이런 얘기를 드렸습니다.
이걸 더 쉽게 말하면 “착심이 없이 보고 듣고 말해라” 이 말입니다. 우리는 신기하게도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씀에 있어서 그걸 분별하는 데만 쓰는게 아니라 그 분별을 넘어서서 거기 뭐가 들어가요? 감정이 들어가고 더 나아가서는 거기에 끌리는 착심이 들어가죠. 양정이라는 것은 끌려가는 내 마음이 아니라 끌려가지 않는 착심이 없는 본래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양정이다. 왜? 정신은 분별심도 주착심도 없는 경지다. 단지 고요하고 두렷할 뿐이다. 그게 내 본래의 정신이다. 사람이 제일 행복할 때 중의 하나가 내 본래의 고요하고 두렷한 본래 자리에 합일 해 들어갈 때 가장 행복하다. 어떤 것보다 행복하다. 그런데 이것을 바쁘다고, 잠 온다고, 피곤하다고 이놈을 것을 기를라고 생각을 안 해. 그래서 우리가 이목구비를 쓸 때 착심 없는 그 자리를 쓰기 위해서는 아까 유념공부요, 성리공부요, 수양공부다. 그래서 이것은, 정신은, 내가 죽어서도 놓고 가지 않고 가지고 가더라. 있어졌다 없어졌다하는 온갖 착심의 마음은 가지고 가지 않아.
두 번째 양신(養身)이라고 그랬어. 몸은 뭣이라고? 지수화풍 사대로 엮어져 있지만, 부모님의 분신이요. 사은의 분신이요. 만사만리의 근본이다. 그래서 사실은 내 몸이지만, 더 나아가서 가정의 몸이고 국가의 몸이고 세계의 몸이고, 교단의 몸이더라. 그냥 나 혼자 몸이 아니여. 그래서 이 몸을 어떻게 잘 양! 불공하고 기를 것인가. 이 몸의 부처님을 부처님을 태우고 다니는 수레라고도 그래. 색신이라고도 그래. 우리가 공부한다 사업한다 수행한다 보은한다 하는데 뭣이 들어서 해요? 마음이 들어서 이 몸을 가지고 하거든. 몸을 가지고. 그래서 몸을 잘 양하는 것이야 말고, 가까이 있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국가에게 충하고, 또 교단에 크게 보은 하는 것은 바로 이 몸을 잘 양해야 한다. 아파 버리면 불효가 되어버려. 국가에 충이 안되. 아파 버리면 교단에 보은이 안되. 그래서 소식다작. 소언다묵, 소사다망. 소의다욕, 소욕다허. 소심다동. 그리고 적당한 운동과 휴식. 이것이 필요하더라. 공부 삼아서 필요하더라.
(2) 양덕(養德)
그 다음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양덕(養德)입니다. 덕은 무엇을 덕이라고 합니까? 덕은 무엇이에요? 도를 실행할 때 나타나는 결과를 덕이라고 표현하고, 그 은혜가 나타나는 것을 일러서 덕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덕 중에 우리가 인간사로서 쉽게 덕을 이해하기에는 참는 것이 덕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일도 수월하게 되는 일이 없거든. 또 빨리 되는 일이 없거든. 쉽게 되는 일이 없어. 그래서 결국은 크게 은혜가 되는 것은 참고 지속적으로 신분의성을 들이댔을 때 그 속에서 뭐가 이루어지더라. 사람들 보면 성질이 급하고 감정이 격해서 그 순간을 못 참고 어떤 취사 결정을 할 때가 많아요. 그것은 결국 은혜가 안되죠. 그런데, 그렇게 참으려면 어떤 마음이어야 하느냐. 바로 유무초월의 생사문입니다. 상대의 세계, 조건적 세계를 뛰어 넘는 그런 마음. 그리고 또 하나는 그런 마음으로 어떻게 내가 이 세상에 도움을 줄 것인가 하는 마음입니다. 어떻게 내가 저 불타는 집에서 건져줘 살려줘 하는 중생을 극락의 세계로 안내할 것인가. 이것이 바로 덕 중의 제일 큰 덕이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이고득락(離苦得樂)이 덕입니다. 종교의 목적은 이고득락이야. 고를 이별하고 낙을 얻는 건데, 그 낙은 인간락보다는 천상락을, 천상락보다는 극락을 수용함으로써 천상락과 인간락은 자연히 따라오는 원리가 있더라.
그래서 결국 어떤 사람이 제일 잘 살았냐. 세상에 얼마나 많은 덕을 베풀고 얼마나 많은 은혜를 나투었느냐가 그 사람이 얼마나 잘 살았냐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그 덕을 베푸는 방법은 크게 정신 물질 육신으로 삼방면이 있다. 첫째는 정신이더라. 둘째는 육신이더라. 셋째는 물질이더라. 근데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첫째는 언덕(言德)이라고 대산종사님께서 말씀하셨죠. 말을 덕스럽게 한다. 참 저는 옛날에 말을 좀 무시했던 것 같아요. 던져버리면 없어져버릴 것인데. 제가 쉽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신기한 것이, 사람들이 말한 대로 살고, 말한다고 믿고, 말한 대로 받아들여요. 그러기 때문에 말을 덕스럽게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 한마디로 보시가 되더라. 천냥 빚도 갚아. 그 다음에 두 번째가 행덕(行德)이더라. 덕을 행하더라. 그래서 이 행덕이 나오게 하는 것이 뭐더라. 심덕(心德)이더라. 심덕이 어디서 나와? 도를 품음으로써 나와. 유무초월한 자리에 그 도가 들어갈 때, 거기서 광대하고 호대한 심량이 나와서, 그 속에서 미운 놈도 꼴보기 싫은 놈도 다 받아들일 수 있는 심덕이 나오고, 그 심덕에 바탕해서 행이 나오고, 거기에 바탕해서 부드러운 소리가 나오더라. 이 심덕을 중용에서는 중화(中和)라 표현했어요.
그래서 이런 심덕이 있는 사람을 비로소 스승이 될 자격이 있고 큰 회상을 맡을 수 있는 자격자가 된다. 저도 이게 좀 많이 부족한 거 같은데 도를 품으면 국량이 터져서 그 안에 다양한 사람들을 수용하고 키워줄 수가 있어요. 그런데 내가 국이 작으면 신기하게도 어느 선을 넘거나 어느 국을 넘으면 탁탁탁 쳐요. 그런 사람이 지도자가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편가르기가 된다거나, 원근친소에 끌린다던가 이렇게 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리고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첫째가 안으로는 근검절약이라고 하셨어요. 근검절약이라는 것은 뭔 소리야? 정신의 근검절약, 또 육신의 근검절약, 물질의 근검절약이에요. 그러면 내가 베풀 수 있는 덕이 그 안에서 나올 수 있다. 자기한테 팍팍쓰면서 남한테 어떻게 덕을 베풀어요. 자기 혼자 명품 팍팍 사 재끼면서 어떻게 남한테 덕을 베풀어. 자기 가방은 백만원짜리 이백만원짜리 사도, 남한테 내는 것은 만원짜리도 아까워하죠. 근검절약이 덕이다. 그게 덕이에요. 그 다음에 밖으로는 헌신봉공이 덕이다. 안으로는 근검절약이요. 밖으로는 헌신봉공이 덕이더라. 그래서 교단에 여러 가지 사업들이 있죠. 그 사업들을 활성화시키는 것, 그것이 바로 덕이더라. 인류 전체의 무지와 빈곤과 가난, 이 삼대악인 세가지 문제가 우리가 덕을 베풂으로써 해결이 되더라.
(3) 양현(養賢)
마지막 현은 뭔 뜻일까요? 어질현(賢)자지요? 첫째는 내 안의 어진 마음을 길러라. 그 다음 두 번째는 밖으로 어진 사람을 가르쳐라. 길러라. 밖으로 어진 사람을 길러라. 그래서 세상에 보배 중의 보배는 바로 양현이라고 그랬어요. 내 안의 어짊을 기르고 밖으로 어진 사람을 길러내는 것. 아까 세상의 큰일 한다고 그랬는데 그 큰일을 뭐여? 그 큰 일을 누가 해? 사람이 하지? 어떤 사람이해? 어진 사람이 하지? 그죠? 맹자께서는 인생삼락 중에 영재를 기르는 것이 내 인생 삼락 중의 하나라고 하셨어요. 인재를 양성하는 것. 왜? 그 인재는 가문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이고, 국가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고, 교당의 후사를 맞길 수 있는 사람이더라. 여러분 가게에서 직원 하나를 뽑아도 어떤 사람 뽑아. 이왕이면 쓸모 많은 사람 뽑을라고 그러지? 내가 가만히 보니까 회사에서도 가계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쓸모 많은 사람을 찾는 데는 많아요. 원하는 데는 많아요. 참 우끼더라. 즉 필요하다고 말은 많이 해요. 그러면 그건 어디서 나와? 그 인재는 어디서 나와? 막 줄 서 있나 지금? 길러내야 나오지.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네. 어떤 교무님이 부교무가 왔는데 되게 맘에 안 들었나봐요. 총부에 전화를 해서 어떻게 교무를 교육시켜 보냈냐고. 신규였나봐. 어떻게 교육을 시켜 보냈냐고 전화를 했나봐. 그 소리를 종법사님이 듣고, “그래? 야, 너 그 교무님 전무출신 몇 명이나 냈는가 찾아봐라.” 보고하기를 “한 명도 없습니다.” 종법사님이 전화해서 “너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런 소리 하려거든 사람을 내 놓고 해라.”
중생은 요구를 많이 하는 거 같아요. 불보살은 주인으로서 일을 하는 거에요. 명예와 보상과 대가와 돈을 요구하는 사람은 중생인거 같아. 심지어는 당대에 대가를 바라지 마라고 그랬어. 당대에 좋은 소리 들을라고 생각을 하지 말라고 그랬어. 왜? 하지 마라고 해도 죽고 나면 징그럽게 해. 죽고 나면 인과가 없고 영생이 없으면 그때 받아먹어야지? 그런데 죽고 나도 있잖아. 영생이 있고 인과가 있어. 그러니까 안받는 것이 더 은혜가 되더라. 세상에도 은혜가 되고, 나는 더 크게 받더라. 음덕이 되어서. 그런데 사람들이 어떻게 하던 이름 좀 낼라고, 카메라를 좋아하고, 방송을 좋아하고, 신문을 좋아하고. 그것이 보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내는 건 괜찮아. 그게 아니라 자기 이름과 공덕을 드러내기 위해서 좋아한다. 그거 마약 같은 겁니다. 아까 성타원님 같은 경우는 유치원을 건립했다. 진짜 제가 정말 박수를 더쳐주고 싶어. 왜냐하면 우리가 중생 제도 한다고 하는데 똑 같은 중생의 대상 중에서도 유아나 어린이가 사실은 최고 교화의 대상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물론 노인이 다시 죽어서 몸 바꿔 오면 어린이가 되겠지만. 누구누구나 다 부처님의 법이 필요한 대상이지만, 그래도 좀더 효과적인 대상은 유아와 유치원생이다. 내가 마음 속에서는 우리 교당에 애들이 많잖아요. 유치원이나 하나 지었으면 좋겄는디 내가 법력이 없고 도력이 없어 갖고 못 짓고 있네. 그래서 양현이라는 것은 후진을 기르는데 아까 그런 교육 사업. 유치원이라던가 어린이 교화, 학생교화, 청년교화 대학생 교화 이런 것이 양현 아니냐. 집안에서 새끼가 제대로 안 커봐, 그 놈의 집안이 어떻게 되겠어. 마찬가지야 교당도. 교당에 젋은이가 없다면 어떻게 할꺼야.
이 세상에 성현이 나오지 않으면 빈 껍데기라고 그랬어요. 이 세상에 불보살과 성현을 길러내지 않으면 그런 사람이 없으면 빈 껍데기라고 그랬어. 성현을 한마디로 말하면 주인이야. 집에서 성현은 누구야? 주인은 누구야? 성현 equal 주인이여. 따라하세요. “성현은 주인이다. 손님은 성현 아니지?” 그래서 어진 사람. 안으로는 주인의 마음을 갖고. 이 세상에 어진 사람. 어진 사람이라는 것은 이 인류를 책임질 사람을 말해. 일체생령을 책임질 사람을 말해. 그런다고 자기 혼자 제도한답니까? 분야분야에서 제도할 사람들이 있지요. 어떤 사람은 과학 분야에서, 어떤 사람은 의학분야에서, 어떤 사람은 법률 분야에서, 어떤 사람은 교육, 어떤 사람은 정치, 어떤 사람은 경제, 어떤 사람은 종교. 파트파트에서 이 세상을 살려낼 수 있는 그런 인재를 하나씩 길러내는 것이야 말로 양현이다. 그래서 우리가 양이라는 것은 마음을 쓰는 것이잖아요. 불공한다는 것이고. 기른다는 것이니까. 신기하게도, 마음은 쓰는 대로 힘이 있어지고 밝아지고 되는 이치가 있어요. 분명히.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인생 누가 만들었어? 여러분 마음이 만들었을 겁니다.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 지금 말씀 하세요.
여러분의 인생은 여러분의 마음이 순간순간 결정해서 여러분을 지금까지 만들어 왔고, 앞으로의 여러분의 미래도 여러분의 마음이 계속 순간순간 결정해서 여러분의 미래를, 영생을 만들 것이다. 그 순간순간 마음만 챙기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챙기기 위해서 평상시에 온전한 마음을 기르고, 밝은 지혜를 단련하고 함축하고. 이렇게 했을 때 실지 경계에 당해서 순간순간 제대로 깨어있는 마음으로 까닭있는 마음으로 대중있는 마음으로 유념해서 처리할 수 있다. 결국 보십시요. 우리가 실지 경계에서 ‘아 미안해요.’ ‘못했어요.’ ‘어 빼먹었어요.’ ‘그럴 줄 몰랐어요.’ ‘아 안됐네요.’ 너무 많아. 까닭 있는 마음, 대중 있는 마음. 이 마음이 진짜 공부심이요. 이 음을 놓치지 않는 사람이 성자요. 참 간단하네. 그걸 일심이라고 그래요. 까닭 있는 마음 대중 있는 마음. 깨어 있는 마음. 살아 있는 마음. 그 마음을 기르는 것이 그 마음을 기르면 양정이요. 그게 양신이 될 것이요. 양덕을 나툴 것이요, 양현을 길러줄 수 있지 않겠냐. 이 말씀을 드리고 대산종사님 법문 소개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내용이 넘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