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쿠와 아키가 탔던 스쿠터에 올라 기념 사진을 찍는 연인들. ⓒ 이동진닷컴-이동진 |
영화 속 중요한 무대였던 ‘雨平사진관’은 일본 시코쿠섬 카가와현의 작은 어촌 아지초에 있었다. 아지초는 사진관뿐
아니라 이 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에 장소를 제공한 마을이기도 했다. 시코쿠가 처음이었던 나는 ‘해변의 카프카’나
‘태엽 감는 새’ 같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공포영화 ‘사국’이나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같은 영화
를 떠올렸다. 하지만 직접 본 시코쿠는 훨씬 더 부드러운 곳이었다.
촬영 당시의 실제 위치에서 20여m 옮겨진 곳에 놓여 있는 ‘雨平사진관’은 영화와 관련한 각종 자료들을 전시하고
기념품을 판매하는 곳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쿠와 아키가 극중에서 탔던 1층 계단 옆 스쿠터엔 애써 이곳을 찾아온
연인들이 앉아 기념사진을 찍었다.
건물 2층에는 극중 아키와 사쿠가 예복을 입고 찍은 결혼식 사진이 있다. 곧 죽음을 맞게 될 아키는 “잊혀지는 게
두려워요. 사진은 영원하잖아요”라면서 사진을 찍는다. 거대한 바위 울룰루마저 서서히 풍화되어 결국엔 먼 훗날
먼지로 흩어질텐데, 고작 사진으로 영원을 꿈꾸다니. 사랑은 짧을수록 영원을 꿈꾼다. 하지만 연인들이 영원을 입
에 올릴 때, 그것은 끝없는 지속을 의미하는 말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건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시간의 강도이며,
모든 순간에 힘주어 내려찍는 액센트를 뜻하는 수식어인지도 모른다. 사랑에 관한 한, 영원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
사다.
‘雨平사진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은 그림엽서나 책갈피꽂이가 아니었다. 자물쇠였다. 아지초를 찾아온 연인
들은 하트가 그려진 자물쇠를 구입해 자신들의 이름을 적어 넣은 뒤 촬영 명소의 곳곳에 달아놓았다. 사진관 건물
오른쪽 공터엔 아예 연인들이 자물쇠를 걸어놓을 수 있도록 따로 장소가 마련됐다.
오지진자(皇子神社) 앞 역시 그랬다. 영화 속 두 연인이 그네를 타던 곳. 오지진자는 인연의 신을 모신 곳이었다. 연
인이란 글자를 뒤집으면 인연이 되는 게 우연일까. 연인들은 그들 사랑의 한 구석에서라도 기어이 인연을 찾아내고
야 마는 사람들이다. 설혹 찾지 못했다면, 인연의 신을 모신 곳에 함께 와서 만들어내기라도 한다.
![]() 오지진자 앞 공원의 그네와 철망엔 연인들이 매달아놓은 자물쇠로 가득하다. ⓒ 이동진닷컴-이동진 |
가파른 계단을 올라 산 중턱의 신사 앞 공원에 이르자, 마을과 바다가 한 눈에 들어왔다. 아키는 바다를 향해 앉아
서, 사쿠는 산을 바라보고 서서, 그네를 탔다. 두 연인이 서로 다른 방향과 자세로 그네를 탔던 것은 머지 않아 둘
사이를 나누게 될 운명의 힌트 같은 것이었을까. 바다를 향해 그네에 앉아 잠시 몸을 흔들다 보니, 내 스스로가 산
과 바다 사이를 무망하게 왕복하는 허공의 볼모인 것처럼 느껴졌다.
연인들은 이곳에도 끊이지 않고 찾아왔다. 사진을 찍고 그네를 탔다. 그리곤 가져온 자물쇠를 철망에 걸었다. 그네
를 지탱하는 쇠사슬과 그 앞 철망에는 미래를 약속하는 수백개의 자물쇠가 잔뜩 매달려 있었다. ‘우리 사랑은 영원
해요’라고 적어놓은 게 있는가 하면, 이곳에 온 날짜 대신 미래의 날짜를 써놓은 것도 있었다. 주변 벤치는 극중 사
쿠와 아키가 섬으로 놀러가서 뿌연 유리창에 적어넣었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화살표 양 옆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낙서들로 가득했다. 연인들이 잠그고 싶었던 것은 시간일까. 아니면 스스로의 마음일까. 자물쇠는 사랑의
변질을 막으려는 부적이거나 미래에도 효력이 유지되는 약속의 징표 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부적과 징표 자체가 세월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라면? 그곳의 자물쇠들은 적잖이 녹슬어 있었다. 불과 4개월
전의 날짜가 씌어 있는 것조차 그랬다. 자물쇠를 매단 사람이 훗날 이곳을 다시 찾아온다면, 녹이 슬어버린 그들의
약속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녹슬어버리는 것보다는 닳아버리는 게 낫다. 변치 않는 미래를 꿈꾸느라 녹슬어버리느니, 들끓는 현재를 겪어내느
라 해져버리는 게 차라리 좋다. 사랑에는 자물쇠보다 종이 비행기가 더 어울린다. 극 초반 교장 선생님의 장례식이
열렸던 저택으로 갔다. 영화 속에서 사쿠가 추도사를 읽는 아키를 처음 보고 반했던 그 곳은 선원(禪院)이었다. 널
찍하고 깔끔한 마당을 지나 건물에 딸려 있는 아담한 식당에 들어섰다. 한적한 일요일의 늦은 오후. 손님은 나 밖에
없었다. 식당의 네 벽면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에 대한 전시물들로 빽빽했다. 아키 역을 맡은 나가사와
마사미의 사인이 들어 있는 달력에서부터 촬영장 풍경 사진들로 채운 대형 액자가 차례로 눈에 들어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대뜸 ‘겨울연가’와 ‘욘사마’로 말을 걸던 주인 할아버지는 수도자 특유의 깊은 말투를 지닌 선
불교 승려였다. 주문한 식사가 나오기 전, 전통 일본식 가옥인 선원 내부로 데리고 가 일일이 설명해줬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한국에서 온 여행객이 이 식당을 찾는다고 한다.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서 홍차를 마실 때, 할아버지는
파라솔을 펴주었다. 파라솔 옆으로 드는 사양(斜陽)이 좋았다. 정신 없는 일정 속에서 모처럼 취하는 휴식이었다.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곳인 방파제로 갔다. 파도가 밀려오는 쪽에 촘촘히 쌓아놓은
커다란 방파석들이 인상적인 방파제는 바다를 향해 곧고 길게 뻗어 있었다. 둘씩넷씩 짝을 지어 이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은 방파제 초입에서 갖가지 포즈로 사진을 찍으며 즐거워했다. 첫 데이트에서의 사쿠와 아키처럼, 바다를 향
해 걸터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절망에 빠져 질주했던 사쿠를 좇아 좁은 방파제를 달려보는
여자도 있었다.
![]() 쿠와 아키가 첫 데이트를 했던 아지초의 방파제. ⓒ 이동진닷컴-이동진 |
그러나 그 어떤 여행객도 방파제의 끝까지 걸어가보진 않았다. 연인들은 세상의 구석에 서 있을지언정 세상의 중심
을 상상하는 사람들이니까. 끝에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은 ‘가족’이었다. 어린 두 아들과 낚시를 하던 남자는 연신 아
이들에게 뭔가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방파제는 그 끝에서 갑자기 끊어졌다. 대신 비교적 잔잔한 바닷물이 높이가
같은 방파제의 끝 부분에 끊임없이 닿으며 경계를 문질렀다. 방파제의 끝은 붉은 등대가 서 있는 건너편 방파제의
다른 끝과 마주보고 있었다. 끝은 언제나 또 다른 시작이었다.
아지초라는 작은 시골 마을을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던 아키와 사쿠의 사랑은 기껏해야 중심에서 외치고 싶었던
변두리의 사랑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른 사랑들도 그리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사랑은 병 때문에 끊기고,
어떤 사랑은 권태 때문에 스러지며, 또 어떤 사랑은 아예 인연을 빚지 못한 채 안타까움을 남긴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랑은 생의 한 가운데에 머묾으로써 주변부를 중심으로 바꾸어낸다. 어쩌면 세상의 끝 따위는 없
는 것인지도 모른다. 울룰루가 세상의 중심일 수 있다면, 그건 아지초도 마찬가지다. 결국 중심을 만들어내는 것은
시선을 소유한 자의 입지일 테니까.
아지초에서 숙소가 있는 다카마츠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나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던가. 숙소로 터벅터벅 걸어들어
갈 때 잠시 눈을 들어 어둠 속 빛나는 별들의 존재를 확인했던가. 그러나 아쉬움은 없었다. 오스트레일리아 울룰루
의 압도적인 별빛조차 의도적으로 살펴봤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내게 잠시라도 행복감을 전해주는 것은 ‘마침내 꾼
꿈’이 아니라 ‘그런 게 있었는지도 모르는 채 꾸는 꿈’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여행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은 기억을 자물쇠로 잠그는 것이 아니라 종이 비행기에 실어 가볍게 날리는 일이니까.
오늘 밤 나는 모처럼 어머니 뱃속의 태아처럼 편히 잠들 것이다.
태어나는 것은 먼먼 후일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