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탐진안씨(耽津安氏) 오성군파(鼇城君派)의 초기 계보는
안우(安祐) - 안현(安顯) - 안윤기(安允基) - 안사종(安士宗) - 안기(安起), 안지(安止)
와 같이 알려져 있다. 이러한 계보가 어떻게 전해져 왔는지를 확인하기 어려우나, 황윤석(黃胤錫, 1729~1791)이 지은 아래 글들에 처음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
頤齋遺藁卷之十七 / 行狀 有明朝鮮國故宣敎郞活人署別提勿齋安公行狀 : 안의(安義,1529~1596)의 행장(行狀) : 숭정3을유(1765) 4월
頤齋遺藁卷之十五 / 墓表三槐堂安公墓表 丁酉 : 안전(安壂, 1627~ ?)의 묘표 - 天啓 丁卯(1627) 생.: 정유 1777년
안지(安止, 1384~1464)가 안우 장군의 후손이라면 1362년에 10여세였다는 안우 장군의 아들이 안지의 부친이 되어야 연대상으로 무리가 없어보인다. 안지가 위의 계보처럼 안우 장군의 현손이 되기에는 연대상으로 상당한 무리가 있다.
위 계보에서 안현(安顯)과 안윤기(安允基)는 이전 기록에서 확인하기 어려우나, 안사종(安士宗)이 안지(安止)의 부친이라는 것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 문과방목인 1414년 방목에서 확인이 된다. (이 실물 문과방목이 아닌 전해오는 다른 필사본 문과방목에는 안지(安止)의 부친이 나오지 않는다.)
보물 "권벌 종가 고문서 - 방목 (權橃 宗家 古文書 - 榜目)"
: 태종 14년(1414) 황보인(皇甫仁, ? ∼1453) 에게 지급된 『영락갑오친시문과방(永樂甲午親試文科榜)』
황보인(皇甫仁, ? ∼1453)은 황보림(皇甫琳)의 둘째 아들로 안우장군의 외손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으며, 안지(安止)와는 1414년 문과 동년이라서 두 사람이 같은 방목에 나온다.
위 방목의 원본 이미지를 확대하면 아래 글들이 희미하게 보인다.
成均生員 安止 本耽津
父 從事郞 門下錄事 士宗
보물로 지정된 이 방목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실물 방목으로, 황보인의 사위 윤당(尹塘)의 외손자인 충재(沖齋) 권벌(權橃, 1478~1548)의 종손가에 전해온 권벌 종가 전적(權橃 宗家 典籍)에 포함되어 있다.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 ∼1453)과 아들들은 1453년 계유정난에 화를 당했으므로 관련문서들은 친손가가 아닌 외손가에 전해진 것 같다.
방목의 실제 내용은 황보인(皇甫仁, ? ∼1453)의 사적을 기록한 1836년 간행된 『지봉선생실기(芝峯先生實記)』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여기에 실린 1414년 문과방목은 황보인의 외8대손이자 권벌의 5대손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이 숙종 38년(1712년)에 위의 실물 방목을보고 판독한 것이라고 맨 뒤의 지(識)에 나와 있다.
종사랑(從事郞)은 고려시대 7품 문관, 종사랑(從仕郞)은 조선시대 정9품 문관의 품계이다. 보물 방목 원본에는 안사종의 품계가 종사랑(從事郞)으로 나와 있으나, 조선의 품계에 익숙한 권두인이 종사랑(從仕郞)으로 잘못 판독한 것같다. 문하녹사 (門下錄事)는 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7품 관직이므로 종사랑(從事郞)이 맞다.
아래 한국학중앙연구원의 방목의 "원문이미지보기"에서 "국립중앙도서관"본을 선택하면 지봉선생실기에 첨부된 방목 전체 이미지와 맨 뒤 권두인의 지(識) 까지 볼 수 있다.
황보인(皇甫仁, ? ∼1453)의 1414년 문과방목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14_000314&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안지(安止, 1384~1464)의 1414년 문과방목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14_000309&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안지(安止)의 1416년 중시문과방목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416_000347&curSetPos=1&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연안차씨 족보에 차종로(車宗老)의 사위이자 차원부(車原頫, 1320∼1398)의 매부로 나오는 안정(安定)의 부친이 안우(安祐) 장군, 아들이 안지(安止)라 했다. 그러나 위에서 보듯이 안지(安止)의 부친은 안사종(安士宗)이 확실하고, 1362년에 10여세였던 안우(安祐) 장군의 아들이 차원부(車原頫, 1320∼1398)의 매부가 되기에도 연대가 맞지 않고, 안지(安止, 1384~1464)가 차원부의 생질이 되기에도 연대가 맞지 않는다. 따라서 연안차씨 족보의 기록은 믿기 힘들다.
안정(安定)은 순흥안씨 안향(安珦)의 증손 안원숭(安元崇)의 장남 안원(安瑗, 1346~1411)의 초명(初名)이다. 안원(安瑗)이 1374년 문과에 급제할 당시 방목에는 초명 안정(安定)으로 되어 있다.
안원(安瑗, 1346~1411)의 1374년 문과 방목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KM_5COc_1374_001147&curSetPos=1&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P
방목의 원문 이미지를 보면 초명 안정(安定)으로 나오므로, 안원(安瑗)으로 개명한 것은 문과 급제 이후이다..
비슷한 시기에 안정(安定)이란 인물이 두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안지(安止)의 부친은 안사종(安士宗)이 확실하므로 연안차씨 족보의 기록은 믿기 어렵다.
안원(安瑗)과 동생 안조동(安祖同), 안수(安垂)도 문과에 급제하였고, 이 때문에 목은 이색이 지은 하죽계안씨3자등과시서에 문성공의 (증)손자 정당공(안원숭)의 아들 삼형제도 역시 급제했다는 말이 들어가게 된 것이다.
첫댓글 안우(1 305년생 추정), 안현 (1350년생 추정),안기 (1380년 생), 안우 (1384년생).
안지 문집에는 그 어디에도 안우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안우의 직계가 아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안지는 ' 내 고향은 탐진'이라고 시문에 나와 있습니다. 이후 안지의 후손들은 탐진안씨라고 사용했을 것입니다.
탐진안씨 1777년 족보 서문을를 보면, 안우는 탐진현인이고 오성군( 탐진군)을 봉군 받았습니다. 족보에 시조는 유명인을 모시는게 일반적이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안우를 시조로 모셨다고 나옵니다.
위 자료는 족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됩니다. 안현(추정 1350년생)과 안지(1384년생)를 혈연으로 연결해 볼까 고민도 해 보았는데 아닌 것 같네요. 안병태 안우장군기념사업회
문헌의 부족으로 지금에와서 고려말 조선초의 선계를 정확히 밝히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래도 오늘날에는 이전에 비해 옛문헌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져 가끔씩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어 과거에 몰랐거나 애매했던 부분들이 명확해지는 경우도 더러 있으니 다행이라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