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시인을 만나다-시집속 대표시-이창수
봄의 동력 외 4편
매화나무에서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가 난다
매화나무 울타리에
벌들이 구름 화물에서 날라 온 석탄 퍼붓고 있다
겨울에 어머니는 고운 옷 입고 화장하고
외할아버지 곁으로 아주 떠났다
겨울에서 봄까지 나는 쓸쓸해져서
어머니 없는 골목에 오래 서 있었지만
매화나무 공장에서 야근하는 일벌들
봄 울타리 여느라 분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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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
명순 씨가 울고 있다
화장하고 일 나가는 명순 씨에게
왜 이렇게 이뻐졌어! 농담 던지면
부끄러워 얼굴 붉히는 명순 씨는
올해 쉰 살 넘겼다
누구에게도 나이 가르쳐 주지 않던 명순 씨는
서울은 몇 살에 올라왔냐?
올라온 지 얼마나 됐느냐는 질문에 나이 들키고 말았다
캔맥주나 사과 같은 걸로 내 입 막으려는 명순 씨는
화장하면 스무 살로 보인다
며칠 전 몸이 아파 일 나가지 못했던 명순 씨가
큰맘 먹고 인터넷으로 사슴피 구했다며
북간도 농장이라는 상표가 붙은
파아란 사슴피가 담긴 비닐봉지 주고 갔다
북간도 농장 사슴피 먹고 일 나갔다 무리에서 쫓겨난
명순 씨가 운다
사슴보다 슬피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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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천橫川
시냇물이 옆으로 흘렀네
마을에 식자가 있어 횡천이라 불렀네
시냇물 따라 버드나무가 자라고
버드나무는 새와 구름 불러왔네
냇가에 작은 술집도 생겼다네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옆으로 걸었네
횡천 거슬러 올라가면
푸른 학 날아다니는 청학동이 나온다네
시절이 하 수상해지면
순한 사람들이 청학동에 들어와 살았네
사나운 도적들 찾아왔지만
나무꾼이 되거나 더 깊은 산으로 갔다네
횡천에 다리가 놓이고 시장이 섰네
길이 포장되고 자동차가 다니기 시작했네
사람들도 앞만 보고 걸었네
구불구불 길도 직선으로 바뀌고
논도 밭도 바둑판 되었다네
사람들은 직선을 숭배했다네
그러든 말든 횡천은 옆으로만 흘렀다네
횡천 가로질러 그물이 쳐 있었으나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네
밤 강물에 일월성신 희미하게 보였지만
그건 누구도 잡을 수 없는 물고기라서
마을 사람들 본체만체 지나갔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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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아버지 참나무 베어다
어머니 목욕물 데운다
더운물에 찬물 붓는 소리
더운물에 손 담그는 소리
다시 한 바가지 찬물 붓는 소리
손으로 물 휘젓는 소리
치매 앓는 어머니 안아다
아버지가 목욕시키는데
머리 감기는 소리
물 끼얹는 소리
침묵은 참나무보다 무겁고
산불 지나간 자리
연둣빛 고사리 돋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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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벌
허리 다친 형님 대신 벌초하러 갔다
증조부 손들은 여자와 미혼 남자 제외하고
벌초에 참여해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가지 않아도 되는데
늙은 형님들은 너만 예외라며 갈퀴와 낫 쥐여 주었다
속으로 씨벌씨벌 갈퀴질하다가 벌집 건드렸다
땅벌들이 달려들었다
물 한 잔 마셔도 위아래가 엄하던 질서가
땅벌 앞에서 무너졌다
장조카와 사촌 형님이 고조부 증조부 산소 지나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밟고 도망쳤다
씨벌씨벌 갈퀴와 낫 팽개치고
비탈길 지나 개울 건너 아버지의 낡은 옷 걸친
허수아비 아래 엎드렸다
고을 원님이 와도 함부로 일어서지 않는다는
집안 위계가 무너지고
내년부터는 시집간 딸들도 벌초하러 와야 한다고
퉁퉁 부은 얼굴로 입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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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수
*1970년 전남 보성군 복내면 출생.
*광주대 문예창작과 및 대학원,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과 박사과정
*2000년 《시안》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물오리 사냥』, 『귓속에서 운다』, 『횡천橫川』
*광주 남구청 홍보팀장 재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