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찾은 봄날은 참으로 따뜻하옵니다
박기주 임채상 가정
숨을 거둔 아버지가 벌떡 일어나서 통일교회에 나가라고 유언하고 영면하셨다.
1. 아버지의 유언과 나의 입교동기
2. 짚가리속의 따뜻한 하루밤과 남편의 입교 동기
3. 나를 바꾼 한권의 책
4. 커다란 자물통 3개와 남편의 사랑
5. 내 가슴 속의 왕대나무 바람소리
6. 빗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 하이파이브
7. 눈물 젖은 미국행 비행기 티켓
8. 싸와디캅의 신부들은 사랑을 싣고
9. 내 인생의 봄날은 여기까지
10. 수호는 걱정하지 말라 나으면 되지
11. 또 하나의 아름다운 도전 (휠체어에 희망을 싣고)
12. 다시 찾은 봄날은 참으로 따뜻하옵니다.
1. 아버지의 유언과 나의 입교
나(임채상)는 탄생부터 위태로웠다. 오빠가 3명, 딸2명이었고, 그 중 장녀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40세 되던 해, 그 마저도 나는 8개월 미숙아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많이 위중하셔서 그 추운 동짓달에 임신한 몸으로 돌보시다 감기에 걸려 쇠약한 몸이 되었고, 결국 나를 조산(早産)하셨다. 나는 인큐베이터도 없는 시대에 태어나 눈도 뜨지 못하고 울지도 못하는 아이였고 보는 사람마다 “사람 노릇 못할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설상가상으로 태어난 지 10일 만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나는 보자기에 싸여진 채 사랑방 구석에 놓아졌고, 그때 나를 돌 본 사람은 7살 밖에 되지 않은 막내 오빠였다.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에 조문객들로 넘쳤고, 앉을 자리를 찾으시던 외당숙께서 사랑방에 들어오셔서 나를 보지 못하고 깔고 앉을 뻔 하셨다. 옆에 같이 있던 오빠가 “여기 우리 동생 있어요!”라며 나를 지켜주어 살 수 있었다.
젖을 빨 수도 없는 어린 생명이기에 살 가능성이 희박했지만 가족들이 지극정성으로 보살핀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오빠를 많이 따랐고 막내오빠 또한 나를 많이 보살펴 주었다. 이후 성장하여 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 오빠는 통일교회에 다니게 되었고, 나는 이종사촌 언니의 전도로 기성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오빠는 틈만 나면 메모판을 들고 나를 따라 다니며 원리강의를 해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고집이 센 나는 절대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언니를 따라 기성교회를 다녔다. 하루는 교회 학생부에서 전단지를 받았고, 그 전단지에는 혼음, 피가름, 등의 용어들이 쓰여 있었고, 통일교회를 비판을 하는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꿈 많고 순수하던 때인 나는 이런 전단지를 보고 통일교회에 다니는 오빠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하루는 오빠가 겉표지에 ‘인류의 새로운 장래’라고 쓰인 책 한권을 주고 갔다. 참아버님 사진이 크게 인쇄된 책자였다. 이 책을 버릴 수도 없고 누가 볼세라 몰래 옷장 가장 밑에 아무도 볼 수 없게 숨겨 놓았다. 통일교회에 대한 나의 생각이 이 정도였으니 내가 통일교인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고, 아버지 또한 오빠가 통일교회에 다니는 것을 매우 반대하셨다.
세월이 흘러 오빠는 1800가정 축복을 받았고, 아버지는 여전히 통일교를 반대를 하셨다. 그러나 오빠의 자녀들이 태어나고 언니가 부모님께 잘해드리자 이내 마음을 여시고 좋아해 주셨다. 축복가정인 언니가 우리 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정말 잘 해주었다. 언니 덕분에 집안에 행복의 웃음꽃이 피었다. 나는 집안에서 며느리의 역할이 아주 중요함을 체험하였다.
아버지께서 누군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는지 “나를 일찍 시집보내면 안 되고, 25세를 넘어서 생일까지 지난 뒤에 결혼을 시켜야 한다.”라고 하셨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 나이는 25살이 되었다. 25세가 되어 생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아버지는 올해 생일을 마지막으로 축하해주고, 내년에 결혼시켜야 한다면서 내가 있는 대전으로 어머니와 함께 올라오셨다.
아버지는 오빠 교회에 머무시면서 “너희 교회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장례를 치르느냐?”라는 등 여러 가지를 물어보셨다. 이에 오빠는 마음과 몸,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영계)에 대해 말씀드리고 “하늘나라에 출생신고와 같은 입회원서를 내셔야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자리에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입회원서를 쓰시고 입회비를 손수 내신 뒤 지장도 찍은 다음 터미널에서 사진을 찍은 후에야 집으로 가셨다. 아버지께서 오빠교회를 들르시고 입회원서를 적으신 것도 하늘의 인도하심이었다.
그로부터 15일 후,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부여에 있는 집으로 달려갔다. 집에는 동네에 사는 친척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아버지께서 곧 운명하실 것 같다는 이야기를 전하였다. 하루가 지나고 우리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가족 모두가 방 안에 함께 모여 있었고, 방 밖에는 많은 친척들이 와 있었다. 아버지의 맥을 짚고 있던 큰오빠가 “아버지께서 운명하셨다.”고 울면서 말했다. 우리들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보며 한없는 슬픔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런데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한 20분쯤 후 큰오빠의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께서 다시 숨을 쉬시고 맥박이 뛴다.”고 했다. 운명을 하셨던 아버지께서 다시 깨어나신 것이다! 아버지는 깨어나신 후 계속 무언가를 말씀하고 싶어 하셨다. 그러나 입만 움직이실 뿐 전혀 말소리가 들리지 않아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아버지 이런 저런 뜻이에요?” 라고 물으면 “아니 아니야!”라고 하시듯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그러면 “이런 뜻이에요?”라고 물으면 재차 고개를 가로저으시며 부정하셨다. 여러 차례 이런 일을 반복하셨다.
그러다 옆에 있던 언니의 볼에 무어라고 글을 쓰시는 듯 하셨다. 그래도 우리가 모두 알아차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손에도 글씨를 쓰셨다. 종이를 가져오란 뜻이란 걸 알게 되었고, 벽에 걸려있는 달력이 눈에 띄어 바로 사인펜과 함께 달력을 얼른 아버지 손에 쥐어 드렸다. 아버지는 달력 위에 처음에는 이응도 미음도 아닌 글을 쓰시고 점을 찍으신 뒤 ‘ㅂ’ 받침을 쓰셨다. 그래서 큰 오빠가 “아, 아버지! 묘 말씀하세요? 아무 걱정 하지 마세요. 아버지께서 당부하신대로 묘를 그 곳에 잘 모시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그게 아니라며 힘차게 목을 가로 저으셨다. 우리가 ‘묘’자로 잘못 읽자 ‘入’를 한자로 쓰시고 한글로 ‘교’자를 쓰셨다.
무슨 뜻인지 아무도 몰랐다. 그러자 목회자였던 막내 오빠가 큰 일이 났다고 소리치며 무릎을 탁치며 말했다. “아버지께서 짧은 20여분 사이에 영계에 다녀오신 것이다. 그런데 아직 아버지의 입회원서가 교회에 있고 접수하지 못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는 하늘나라에 입적이 안 되어서 조금이나마 육신이 남아 있을 때 다시 깨어나셔서 통일교회 입회원서에 대해서 물으시는 것이다.”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 순간 기성교회를 다녔던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단이고 사이비라면서 문턱조차 넘으려 하지 않았던 나였는데 삶과 죽음의 이 극한 상황에 조금이나마 실낱같은 생명의 시간이 남아 있을 때 운명하신 후 다시 급히 찾아와서 이토록 온 힘을 다해 말씀하시려고 하셨던 것이 통일교회 입교에 대한 말씀이란 말인가!
나는 그 자리에서 아버지께 “내가 부사동 통일교회를 알고 있으니 내가 입회원서 서류를 찾아 접수하고 오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오빠가 아버지께 자세히 설명을 드렸다. “저도 하나님의 일을 대신하는 사람이니 책임지고 아버지께서 직접 15일 전에 작성하고 지장을 찍은 뒤 입회비까지 내신 입회원서를 꼭 접수해 드리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아버지는 그제서야 “고맙다”라고 하시면서 안심하시고 “이제 눕고 싶다.”고 하셨다.
그리고 그 밤이 지나 아침이 되었고, 어머니와 5남매는 아버지의 주변에 둘러 앉아 있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큰 오빠의 눈동자를 바라보시며 “무상이, 교회를 다녀라. 통일교회를 다녀라.”라고 말씀하시고, 다음에는 둘째 오빠를 보시며 똑같이 말씀을 하셨고, 마지막으로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직감했다. “아!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구나!”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아버지께 효도를 하는 딸이 되고 싶었다. “아버지 힘드신데 아무말씀 하지 마세요. 저 통일교회 다니라고요? 오빠 교회 다니라고요?”라고 말씀 드리자 아버지는 고개를 크게 끄덕이셨다. “네 아버지, 아버지의 유언인데 꼭 따르겠습니다.”라며 약속을 했다. 아버지는 이렇게 우리 가족들에게 일일이 통일교회로 나가라고 지시하시고 편안한 모습으로 운명하셨다.
나는 그 후 7일 금식을 하고, 21일 수련을 받으러 수택리 수련원으로 가서 70여명과 함께 수련을 받았다. 아버지의 유언이지만 한켠으로는 뭔가 내키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기독교로부터 많이 들었던 이단이라는 글자의 여운이 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성실히 참여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아버지와의 약속은 지켜야 했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너무 이해가 안가고 받아들여지지 않는 내용이 많이 있어 늘 질문을 많이 했다. 강사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니까 개인적으로 질문을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메모를 해 두었다가 집에 가서 오빠한테 물어보리라 마음먹었다.
질문 내용이 쌓여가던 어느 날, 섭리적 동시성으로 본 복귀섭리에 대한 강의를 듣고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우리 말씀은 누구든지 듣기까지가 문제구나. 직접 들으면 다 풀리는데… 나처럼 문턱을 넘고 들어와서 들으려 조차 하지 않으니, 그게 문제구나.” 이런 결론을 내리고 수련이 끝나는 날 모든 질문이 해소되었다. 나는 그동안 쌓아왔던 질문지를 모두 찢어 없애 버렸다. 그리고 전적으로 통일교인이 되었다. 이런 사연을 배경으로 하여 나는 통일교인, 참부모를 모시는 참자녀, 자랑스런 축복가정이 되었다.
2. 짚가리속의 따뜻한 하루밤과 남편의 입교 동기
남편(박기주)은 초·중·고를 전남 장성에서 다녔다. 장성 댐 아래 황룡강 물줄기를 따라 내려가다 보면 황룡면 와룡리가 있다. 읍에서 6km쯤 떨어진 곳, 거기가 바로 고향이다. 남편은 자전거로 통학을 했다. 울퉁불퉁한 길을 통학하는 것은 보통의 수준을 넘어서 상당히 힘든 노동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배가 고팠던 시절이었다. 하루는 학교 1년 선배가 “기주야, 빵 먹고 가자.”하며 빵집으로 데려갔다. 추운 겨울, 그것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빵 한 쟁반은 반가울 수 밖에 없었다. 빵 한 쟁반을 다 먹고 문을 나서서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려는데 선배는 남편에게 자기와 함께 갈 곳이 있는데 함께 갈 수 있겠느냐고 말하였다. 빵도 얻어먹었는데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따라간 곳이 조그만 방 한 칸에 밤에는 별빛이 들어오는 함석지붕의 방이었다. 방에는 작은 칠판이 걸려 있었고, 여러명의 남녀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조금 기다리자 교회장님이 나오셔서 강의를 시작해나갔다. 그 모습이 어찌나 멋있고 훌륭한 강의였는지 훗날에 남편이 목회자로의 꿈을 간직했던 동기가 되었다. 남편은 지금도 찐 빵 집 앞을 지나거나 찐빵을 보면 “난 빵 얻어먹고 전도 되었다. 빵이 날 전도했다.”며 우스갯 소리를 하곤 한다.
교회장님은 혼자서 고생이 많으셨다. 쌀도 없고, 식사를 해결하기엔 여러 가지가 열악했다. 그래서 학생들이 의논한 결과, 도시락을 등굣길에 드리고 가기로 했다. 순번을 정하여 놓고 간 도시락으로 교회장님은 식사를 하셨다. 한창 먹을 때에 자전거를 타고 먼 거리를 통학하면서 점심을 물로 채워가며 신앙을 키워갔다. 힘들었기에 그 만큼 신앙의 뿌리가 더 깊게 내렸던 것 같다.
하루는 교회의 함석지붕이 뚫려서 비가 오면 세숫대야를 여러 곳에 받쳐 놓아야만 하는 방이었다. 학생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서 볼펜 사업을 하여서 교회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남편은 정읍쪽으로 갔다. 다방이나 가게 등을 돌면서 다니다보니 해질 무렵까지 다녔지만 볼펜은 많이 남았고, 돌아갈 버스도 끊기고, 날은 춥고, 하룻밤 신세질 만한 곳도 찾지 못하고 서성이었다. 같이 간 친구에게 “야, 저 들판에 짚가리 속에서 자자.”고 의논을 했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장난삼아 짚단 서너 개를 중간에서 빼고 들어가 놀면 따뜻했던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래서 짚가리 속에서 둘이 하룻밤을 자고 났는데 그 밤이 참으로 따뜻했고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까지 볼펜사업을 해서 목표했던 금액을 채워서 교회로 돌아왔다. 각 지역으로 갔던 학생들의 돈을 모아서 성화학생의 힘으로 함석지붕을 스레트지붕으로 바꿨다. 그 시절 우리들은 무서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다. 말 그대로 ‘성화(成和)의 용사(勇士)’가 되어 있었다.
남편은 입교 후 일요일이면 한번도 예배를 빠진 적이 없었고 은혜가 충만한 나날이었다. 시아버님께서는 소를 2~3마리를 잘 관리하셔서 장성 우시장에 내다 파셨다. 그 돈으로 자녀들을 양육하고 가용 돈으로 쓰셨다. 장성에는 상당히 큰 우시장이 형성되었다. 소를 팔고, 좀 싼 값의 빈약한 소를 사 오셔서 튼튼하게 길러서 다시 내다 파셨다. 그래서 남편과 시동생들은 방과 후에는 소꼴을 베는 담당이었다. 그런데 시동생은 “미련한 사람이나 땀 흘리며 일하고 살지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 기타를 들고 뛰쳐나갔다. 남편은 그럴 수 없어서 언제나 풀을 많이 베어야 했다.
하루는 일요일에 교회에 갈 요량으로 토요일에 풀을 한 짐 가득 넘치게 베어 왔다. 일요일까지 소가 먹는데 필요한 이틀분량의 풀이었다. 시아버님 보시기에 흡족하게 베어다 놓았다. 그런데 남편이 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놀라운 사건이 생겼다. 밤새도록 시아버님은 외양간을 오가며 그 풀을 다 먹였다. 잠을 못 주무시면서 많이 먹여서 튼튼한 소가 되게 살을 올려서 우시장에 파셔야 하셨기에 밤을 새우셨다.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받기 위해서였다. 이틀분량의 풀을 먹이셨고, 만족해 하셨다. 그러나 남편은 속상했다. 왜냐하면 교회에 가려고 풀을 많이 베어 왔는데, 시아버지께서 하루밤 사이에 다 먹이셨으니 남편이 교회에 가서 오후까지 머물고자 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편이 자녀들을 기르는 가장이 되어서야 가족 부양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애를 쓰신 시아버님의 심정을 깨닫게 되었다.
남편은 학교생활과 집안에서의 역할과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어느덧 졸업반이 되었다. 졸업을 하고 군청에 취직이 되어 출근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아버님께서 동네방네 이웃동네에 사는 친구 분들에게 아들 자랑을 많이 하셨다. 그러던 중 하루는 그 동안 고민하고 있던 내용을 결심을 하고 아버님 앞에 무릎 끓고 엎드려 앞으로의 진로에 대해서 말씀드렸다. 불호령이 떨어질 줄 알면서도 남편은 담대하게 뜻을 말씀 드렸다.
“아버지, 앞으로 3~4일 후면 통일교회에서 4차 기동대 모집이 있습니다. 저도 교회장과 같이 멋진 강사가 되어서 목회를 하는 꿈을 실현하고 싶습니다. 공무원으로 출세하는 것 보다는 이 길을 택하고 싶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 남편은 실망을 하신 시아버지로부터 불호령이 떨어질 것을 기다리면서 어떻게 처신을 해야 할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시아버님께서 허락해 주신 것이다.
남편은 마음 홀가분하게 경기도 기동대에 6개월 기간 동안 투입되었다. 기동대 후에 수원교회 학생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학생들이 많이 전도되는 시절이었다. 학생들은 예배 후, 화동회도 하고 활동계획도 세우고 했었다. 남편은 배고픈 학생들을 위해 뻥튀기나 국화빵 등을 사야만 했다. 그렇다고 자금이 궁핍한 교회에서 지원받을 수도 없었다. 호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학생들에게 화동회를 준비해줘야 하였다. 그리고 장성교회에 물난리가 났을 때, 남편은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로 교회를 수해복구 하였다. 우직하고 덤덤하던 남편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오로지 앞을 향해 전진하시며 묵묵히 인류 구원을 위해 일하시던 참아버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남편은 성북교회에 와서 더 힘차게 설교하고 자신감을 보였다. 아들 수호가 다쳐서 절망 가운데 있을 때, 바로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헤쳐 나가던 사람이었다. 수원에서 도봉교회로 왔을 때, 3층 빌라에 살아야 했고, 눈이 내려 얼어붙은 날, 아들을 업고 3층까지 가기위해 업으려 하다 미끄러져 주저앉아서도 힘을 내던 그런 사람이었다. 위기에서 더 빛나는 남자, 내 남편, 박기주 교회장을 나는 존경한다.
지금은 교회 8층 엘리베이터가 있는 집에서 너무 감사한 마음으로 우리 부부는 10년 가까이 살고 있다. 참부모님께서 맺어주신 큰 은혜의 인연 안에서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천일국 안착을 위해 전진(前進), 정진(精進)하고 있다.
3. 나를 바꾼 한권의 책
나(임채상)의 입교일은 1980년 2월 8일이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기성교회를 다니다 운명하신 아버지가 갑자기 살아나셔서 가족들이 통일교회에 나가라고 하신 아버지 유언에 따라 늦은 나이 26세에 입교하게 되었다. 나의 믿음의 부활하신 부모는 아버지가 된 셈이다. 부녀의 인연치고는 드문 사연이다.
교구장과 오빠는 이번에 축복에 못 들어가면 너무 늦어질 것을 염려하여 입교 1년 3개월 밖에 안 된 나를, 7일 금식, 21일 수련 등 축복의 조건을 갖추어 나가도록 준비시켰다. 축복을 받으려면 입교 3년 이상이 되어야 자격이 주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내 나이가 많다보니 자꾸만 나를 몰아세우셨다. 교구장의 강권으로 추천서를 제출하고, 사실상 외상으로 약혼 매칭에 참여하게 되었다. 축복에 빚은 진 입장이었다.
1981년 5월 5일 수택리에 갔다. 참아버님께서는 약혼을 해주시기 위하여 큰 강당에 오른쪽은 남자, 왼쪽은 여자를 모아 놓고 말씀을 해주시다가 가운데 통로를 왔다 갔다 하시면서 짝을 맺어 주셨다. 먼저 목회자나 공직자를 나오라고 하셨다. 한 사람씩 짝을 맺어 주시기 시작했다. 가운데 통로를 보고 남녀가 마주 앉았다. 마주 앉은 순서로는 내가 6번째 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대전에서 함께 올라 간 언니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우리는 목회자와는 축복 받을 생각이 없으니까 고개를 들지 말자.”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를 계속 숙이고 있었다. 가끔 누구와 누구를 맺어 주시나 궁금하여 가끔 고개를 들은 적은 있었다. 그러던 중, 내 앞에 참아버님께서 서 계신 모습이 보였다. 아버님께서 “너!”하시자 주변에 언니들이 “아버님 저요?”, “아니 그 옆에”, “아버님 저요?”, “아니, 그 뒤에”라고 하셨다. 내 몸이 뜨거워지는 듯 했다. 직감적으로 나를 지적하신 것을 느끼게 되었지만 공직자를 맺어주실까봐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계속 내 옆에 있는 여자들이 “아버님 저요?”라고 하니, “아니 그 앞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이상 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버님 저요?”하고 일어섰다. 그러자 아버님이 “내가 아까 한번 부르지 않았나?”라고 하셨고 그래서 나는 “아버님, 아닙니다. 처음입니다.”라고 했더니 아버님께서 “그래 참 좋다, 저 사람 만나봐라.”하셔서 나는 앞문으로 나오고 주체는 뒷문에 가까이 있어서 뒷문으로 나왔다.
집에서 올라오기 전 수요일 밤에 오빠와 언니에게 말했었다. “목회자만 아니고, 또 전라도 사람만 아니면 웬만하면 잘 하고 올게요.”라고 했더니 언니가 걱정하는 눈빛이었다. 그런데 아버님께서는 언니에게 말한 2가지 조건을 다 갖춘 전혀 반대인 사람을 “참 좋다, 만나봐라.”라고 하셨다. 이렇게 하여 내 생각과 정반대의 사람인 목회자와 짝을 맺어주셨기 때문에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자격이 없는 내가 사모의 길을 가야했다. 운명의 수레바퀴는 피해가지 않는가 보다.
바야흐로 내 삶 전체가 달라져야 했다. 감당하기 어려웠고 삶의 제약을 많이 받을 것 같아 기쁘기보다는 마음이 무거웠다. 이유 없는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다. 야속한 운명을 탓하며 남몰래 흐느끼며 살았다. 그렇게 힘든 시간이 지나고, 광양교회로 임지를 출발을 하고, 6개월 후 우리 대원들은 모두 서울에 배치되었다.
동대문교회에 24명 언니들이 배치되어 활동하던 중, 1차 사업대원으로 선발되어서 청파동 원본부 교회에서 합숙하면서 찹쌀떡, 수세미, 옷가지 등을 팔러 다녀야했다.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하루는 아침부터 흰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소장님은 눈이 오면 하늘이 더 역사 하신다고 강조하면서 우리들이 사업 가방을 들고 나가기를 원했다. 갈 곳도 없고 마음 둘 곳도 없었다. ‘정처(定處)없는 나그네 신세’라는 말이 어울리는 형색이었다. 축복가정이 가야 할 외롭고 힘든 노정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꼈다. 초창기 선배들은 얼마나 더 심하게 힘들었을까를 생각도 해 보았으나, 당장의 내 현실을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오빠를 찾아가기로 했다. 대천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서울역에 가서 장항선 열차를 타고 무작정 대천으로 향했다. 달리는 차창 밖으로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지금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약혼이라는 굴레에 묶여 죽기보다 더 싫은 물건을 팔러 다녀야 되는구나.”는 생각을 하며 은혜롭지 못하고 불만만 쌓여 갔다. 오빠한테 위로 받고 싶었고 누군가의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했다.
그렇게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에서 대천교회에 도착해보니 오빠와 언니는 심방가고 안계셨다. 방에서 기다리다가 읽을 만한 책이 있나 찾아보았고, 책꽂이에서 한 권의 책을 꺼내 들었다. <사모가 본 사모학>이란 책이었다. 그 책은 어떤 기성교회 사모가 쓴 글이었고, 일종의 자서전이었다. 그 책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몽롱한 나 자신을 화들짝 일깨웠다. 그 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내가 정작 목회자 사모의 길을 가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이것은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하면 이 길을 떠나서 평범한 평신도의 길을 갈 수 없을까? 어쩌다가 성직자인 남편을 만나서 내가 원치 않는 사모의 길을 가야만 하나?’ 하면서 늘 감사하지 못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루는 기도 중에 깨달음이 왔다. 내가 목회자를 만났기 때문에 목회자 사모의 길을 가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나를 목회자 사모로 택하셨기 때문에 나의 남편이 그 힘든 성직자의 길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성령의 벼락을 받고서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본격적으로 사모의 길에 전념하게 되었다. 내 인생이 영화로운 길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이글을 읽고 나서 “내가 가야할 사모의 길은 나에게 숙명적인 길이구나!”는 것을 깨달았다. 그 순간 복잡하고 어수선하던 모든 것들이 싹 정리되었다. 마음도 가벼워졌고 힘이 솟는 듯 했다. 더 이상 대천교회에서 오빠를 기다릴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를 만나지도 않고 다시 서울 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때 주체는 화순교회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였다. 혼자서 어려운 제단을 맡아서 얼마나 고생 할지는 안 봐도 훤히 알 것 같았다. 오히려 내가 힘을 줘야 되는데 내 자신만 위로 받기를 원했으니… 그때는 위태로운 생각을 했다. 그만큼 철이 덜 들었던 것이다.
한번은 편지가 왔는데 눈물 없이 읽을 수 없었다. “오늘은 이양면에 사는 식구 집을 심방을 갔습니다. 그런데 버스비가 없어서 그 곳까지 걸어서 왕복 심방을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달빛을 받으며 성가를 부르면서 교회 도착하니 자정이 다 되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활동하여 구두 밑창이 다 닳아서 없어질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은혜 안에서 이 길을 갑니다.”
그 편지를 읽으면서 품에 안고 흐느꼈다. 눈물이 앞을 가리고 남편이 나 때문에 그 어려운 성직의 길을 가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니까 한없이 불쌍하고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빨리 임지를 마치고 목회의 현장에서 남편을 열심히 보필하리라 다짐했다.
4. 커다란 자물통 3개와 남편의사랑
남미 4개국 순회사 발령받고 우리 가족은 장성 교회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이사를 가야 했다. 우선 가족이 살 집을 구해야했고, 남편 없이 혼자서 경제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돈을 벌어야 했다. 초등학교 1학년 큰아들과 유치원에 다니는 두자녀의 교육비와 생활비를 벌 수 있는 길이 무엇이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학교 앞에 살림집이 딸린 작은 수퍼마켓을 해 보기로 했다. 남편은 분식집을 권했지만 내가 자신이 없었다.
가게를 구하러 다니다 보니 적당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당시 전세 1,300만 원이면 살림집과 가게를 하면서 살아가면 될 것 같았다. 천만 원을 빌려야 하는데 궁리 끝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고향에 있는 둘째 오빠에게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큰오빠와 상의해 보겠다고 했다.
얼마 후 어머니의 생신날이 되어서 딸아이만 데리고 혼자서 고향에 갔는데 아침 일찍 도착한 올케 언니들이 음식을 준비하며 내가 거실에 나온 줄도 모르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글쎄 어디다 대고 손을 벌려. 자녀들 교육 문제로 복잡한 것은 알고 있지만 갚을 능력이 없어 보이는데 어떻게 돈을 빌려 줄 수 있어” 그 얘기는 마치 망치로 내 머리를 한데 쾅 치는 듯 했다. 내가 친정에서 이 정도의 푸대접을 받는 내 자신이 되었구나. 눈물이 앞을 가리고 그 자리에 더 이상 있을 수 없었다. “그래요 걱정 말아요 건강한 남편에 아들 둘에 딸 하나 있으니 나는 가장 복 받은 사람이라고요. 나는 내가 돈 벌고 살려고 했으면 얼마든지 벌 수 있었죠. 아버지 유언에 의해서 통일교회에 들어왔고 목회자를 만났기 때문에 돈 버는 직업이 아니기에 지금은 이렇지만 앞으로 잘 살겠어요. 동생이 빌려 주라고 했다면 두 말 없이 빌려 주었겠지만, 내가 갚을 능력이 없어서 못 빌려준다는 거네요.”
오빠는 잘 사는 편이었다. 통장에 돈을 넣어 놓고도 내 사정을 외면하니까 정말 섭섭했다. 교회에 돌아와서 남편에게는 말도 못 하고 한 열흘 쯤 울고 지냈다. 그 모습을 보고 어떤 권사님이 방법을 알려 주었다. 신협에 3년에 천만원 짜리 적금을 들고 3개월을 납부하면 대출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찾아가서 적금을 들고 전세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사를 나오고 가게를 운영해 가고 있던 어느 날 남편은 큰 자물통 3개를 사 왔다. 그리고 자물통 잠금 장치만으로는 마음이 안 놓였던지 잠금 쇠사슬을 묵직하게 준비하여 왔다. 완벽하게 문단속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서 선교사로 가야하는 남편의 마음은 얼마나 만감이 교차했을까? 하늘의 명을 받들어 해외 순회사의 길을 떠나야만 하는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웠을까? 감히 짐작이 가지 않았다. 아마 남편이 속으로는 닭똥 같은 눈물을 꺼이꺼이 흘렸을 것이다. 남달리 자식 사랑이 컸던 남편, 10년 동안을 누구에게도 맡겨 보지 않고 우리는 정성을 다하여 자녀들을 양육했다. 그렇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를 두고 외국으로 가야했다. 남편은 그렇게 힘든 선교사라는 무거운 굴레를 묵묵히 감당하였다. 나에게 존경스런 모습이었다.
마침내 준비한 큰 가방을 들고 송정리 비행장까지 데려다 주기 위해 택시운전을 하시는 장로께서 오셨다. 가까운 동남아도 아니고 멀고먼 남미 땅이니 더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함께 배웅 하러 가시지요?” “아닙니다. 저는 그냥 여기 있겠습니다.” 남편을 실은 택시가 공항으로 떠났다. 모퉁이를 돌아서 택시가 사라졌다. 혼자 남은 나는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되면서, 전신에 힘이 쭉 빠졌다. 털썩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한동안 아무 생각도 안 들고 그냥 멍하니 그대로 있었다.
유치원을 끝나고 온 막내아들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녀들을 책임져야 할 엄마로서의 막중한 임무를 다해야 할 시간이다. 멀리 떠난 남편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아내로서는 주저앉아서 있을 수 있지만, 엄마로서는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일어서야 했다. 눈물로 흘리지 말아야 했다. 슬픈 내색도 하지 말아야 했다. 힘차게 아들을 맞이해야 했다. 엄마라는 생각을 하며 정신을 차리니까 힘이 불끈 솟았다. “여자는 약하지만 엄마는 강하다.”는 격언이 딱 맞는 말임을 실감했다.
어린 자녀 3명을 데리고 젊은 여자 혼자서 가게를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하루는 밤늦게 가게에 들어와서 행패를 부린 사람이 다녀간 뒤로는 혼자서 아이들과 지내기가 무서웠다. 전화만 오면 울곤 했다. 그 사연을 알게 된 여자 청년 식구 한 사람이 퇴근하면 가게로 와서 좁은 방에서 함께 지내며 나를 도와주었다. 그 식구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어려울 때 같이 있어주는 것 자체가 큰 위로요 격려였다.
그렇게 저렇게 아픔과 슬픔과 고독을 싣고 와서 내 작은 등에 큰 짐을 얹어주었던 세월이 지나고, 남편이 귀국했다. 그가 우루과이, 파라과이, 아르헨티나, 칠레 4개국 순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날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아이들 셋을 데리고 풍선을 불어 장식했고, 글씨로 “환영 합니다!”를 예쁘게 꾸며 놓았다. 아이들은 집에서 기다리고, 나 혼자 모처럼 예쁜 옷도 한 벌 사 입고 송정리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한 10년 만에 만나는 기분이었다. 같이 살 때는 여러 가지 의견차이로 큰소리 난 적도 많았지만, 헤어져 있어보니 서로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알 수 있었다.
5. 내 가슴 속의 왕대나무 바람소리
남편이 남미에서 잘 적응을 한 까닭이 있었다. 남편은 축구를 사랑하고 좋아한다. 중학교 때까지 축구 선수로 뛰다가 장래성이 있어 보였는지 광주에 축구부가 있는 학교에서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다. 그러나 여러 가지 비용이 많이 들었다. 축구를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시아버님은 장성에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을 시켰다. 그로 인해 남편의 축구 선수 꿈은 좌절되었지만 언제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축구에 대한 열정이 남아 있었다.
그런 미련과 추억을 가진 남편이었기에 축구 명문 국가로 소문난 남미 4개국을 순회하는 것이 고통스럽지 않았고 무난히 넘겼다. 가는 곳마다 펼쳐진 넓은 잔디구장이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 칠레 이렇게 유명한 축구 국가들을 순회하면서 “이곳은 나에게 잘 맞는 곳이다.”라고 생각하며 잘 적응해 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남편은 인생을 살면서 자기로 인해서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는 일을 하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마음이 괴로워서 절대 못하는 성품이다. 그런 남편이기에 힘들어하는 처자식을 떼어 놓고 계속 남아 있을 수 없었던지 순회를 마치고 바로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뜻길의 순회사로서 외국 식구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힘을 주면서도 정작 자기 가족에게는 그러지 못한 현실이 얼마나 속으로 고통스러웠을까?
남편이 돌아왔으니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환경을 바꿔 주고 싶었다. 남편을 설득하고 내가 주장을 강하게 하여서 전라도 하남에서 첨단 단지로 조성되고 있는 신도시에 임대아파트를 계약하고 입주하게 되었다. 가구들과 살림살이들을 정리하고 친가와 친정 가족들의 도움으로 그럴 듯하게 꾸며 놓고 생활하게 되었다. 1층이어서 앞 베란다에 나가면 아파트 앞 화단 전체가 우리의 정원이 되었다. 행복해하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크게 울렸다. 지금도 그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 하고, 그럴 때면 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달빛이 유난히 밝게 비치던 어느 날 베란다에 나갔다. 달빛에 나부끼는 왕대나무 나뭇가지들이 너무도 멋있었다. 나는 혼자서 남편 몰래 한동안 웃고 있었고, 그 창가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에덴동산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이제 더 이상 바라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도 잘 적응하고 행복해하였다. 가을이면 앞 화단에서 단풍잎을 주워 와서 “엄마 이것 봐요. 참 빛깔이 예쁘지. 엄마께 드릴게요.” 하던 딸아이의 앙증맞은 손길이 너무나 예뻤다. 겨울이면 눈이 많이 쌓인 언덕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삼 남매가 눈싸움도 하고 눈사람도 만들었다. 소박하지만 세상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자연 친화적인 추억을 많이 만들었다. 지금도 그 곳이 그리워진다.
남편은 아침 일찍 나가서 물탱크 청소를 하고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한번은 커다란 두 팔로 아이에게 주려고 사과상자를 차에서 내려 번쩍 들고 집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에서 나는 더할 수 없는 행복을 발견했다. “성실한 남편과 사랑스런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보금자리를 주셔서 감사합니다.”하며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또 일요일이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남편과 함께 예배드리러 교회로 갔다. 그 모습은 내가 처녀 시절에 그토록 꿈꾸던 모습이었다. 나는 너무나 행복하였고 더 이상을 바라면 지나친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이 똑딱똑딱 흘러가던 어느 날, 남편이 박스 서 너 개를 구해 와서 옷장 문을 열고 사계절 양복을 하나 하나 꺼내서 박스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깜짝 놀라며 “아니 왜 구겨지게 양복들을 다 박스에 담는 거예요?” 라고 물었다. 남편은 단호한 어조로 “당신이 내가 양복을 입을 수 있게 해줬어? 작업복이면 돼. 양복 필요 없어. 난 이제 일 벌레야. 기계처럼 아침에 일어나서 일하러 가고 하루 종일 일하다 집에 오면 또 하루가 지나가고, 그런 날들의 연속이잖아…”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띵! 현기증이 일었고 눈앞에 작은 별빛 같은 것들이 떠다녔다.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남편이 외국으로 떠날 때 주저앉았는데, 이제 두 번째로 힘없이 주저앉는 상황이 발생했다. 나는 내가 행복한 것처럼, 남편도 행복한 줄 알았다. 비록 내가 느끼는 행복 보다는 좀 못하지만, 그래도 남편 역시 행복해서 웃고 노래를 부르며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을 줄 알았다.
정신을 차리고 사태를 정리해 보았다. “여자는 사랑, 남자는 일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고 만족한다.”말이 떠올랐다. 목회자로서 삶의 보람을 만족하고 싶은데, 차마 내게 말을 못 했던 남편의 속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교회에서 식구들을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인가? 가족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얼마나 아름다운 희생이며 존경스러운 일인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부 대화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서 속으로 삼켰다. 그런 일이 있은 후 나는 이유 없이 소화도 안 되고 시름시름 몸이 아프게 되었다. 바람 빠지는 풍선처럼 점점 전신에서 힘이 빠져 나갔다.
어느 영통인이 6000가정 언니 집에 기도하러 오셨다.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나보고 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 곳에 갔다. 그 권사님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큰일을 해야 할 사람이 그러고 있으니까 아프지!”라고 호통을 쳤다. 그 말을 듣고 와서 나는 곧장 청평에 갔다. 청평 역사가 처음 시작되고 있을 때였다. 온 맘과 육신을 다하여 간절히 정성을 드렸다. 귀가 후에도 간절히 기도를 드렸다. “참부모님, 하나님, 어디든지 가라하시면 아무 말 없이 가겠사옵니다. 제 건강을 지켜 주시옵소서!”
며칠 후, 갑자기 남편이 교구장님을 만나고 와서는 콧노래를 부르며 기뻐하였다. 가족 모두를 불러 놓고 신나는 모습으로 말했다. “이제 아빠는 다시 목회로 출발할 거야 우리 가족 모두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바래요.” 역시 아내와 남편이 생각하는 행복과 갈 길은 달랐다.
거기서 일 년쯤 살고, 선교사 파송으로 인하여 생긴 사랑의 아픔을 충분히 치유하지도 못 한 채 우리 가족은 다시 하늘이 정해 주신 임지를 향해서 출발해야 했다. 모세 시대에 히브리인들이 가나안 땅으로 출애굽했듯이, 우리 가족은 하나님이 안내해 주시는 안주할 가나안 땅을 찾아서 다시 짐을 챙겨야 했다. 아이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차마 물어 보지 못했다. 물으면 애들도 울 것 같았다. 행복한 추억, 재미있게 놀던 친구들과 헤어져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싫고 고통스러웠을까? 자녀들도 달 밝은 가을밤이면, 전라도 하남 땅 아파트에서 들리던 왕대나무 바람소리가 사르륵 사르륵 그리워질 것이다.
6. 빗소리와 함께 울려 퍼진 하이파이브
무안교회로 갔다. 36만쌍 일본 대원 10명과 함께 생활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짐들은 고향집 사랑방에 옮겨 놓고 책과 옷가지들과 아이들의 필수 물건들만 챙겨서 이사를 왔다. 방랑자 생활, 나그네 생활, 떠내기 생활은 아닌데… 초기 기독교 시대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떠돌이 전도사 생활을 하였던 것에 대한 탕감이었던가? 생각하기에 따라서 하루하루가 힘들고 불평을 할 수도 있지만, 그저 하늘의 명령에 따라서 살아야 하는 것이 축복가정의 운명인지라 담담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와 가족은 힘들었어도 자기 일을 찾은 남편은 행복했을 것이다.
A타입 교회이고, 큰방은 대원들이 사용하고 있었고, 부모님 방 기도실은 대원들의 짐들로 가득 차 있었다. 우리 5인 가족은 안방 한 칸에서 이층침대를 놓고 첫째와 둘째를 재우고 막내와 우리 부부는 방바닥에서 짐도 풀어 놓지 못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하남에서 잠시 맛 본 행복이 아스라이 먼 옛날처럼 여겨졌다. 바닷가에서 밀려왔다가 사라지는 썰물처럼, 나의 행복 추억은 저 멀리 사라졌다. 그 행복의 밀물은 언제 다시 오려나? 알 수 없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우리 아이들은 한 마디 불평도 없이 언제나처럼 그런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던 탓인지 잘 적응해 주었고 학교생활도 잘 해 나갔다. 하늘이 아이들을 양육해 주신다는 선배들의 말씀을 생각났다. 우리 애들을 하늘이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시는 것을 실감했다. 활기차게 새 생활을 하는 애들을 보면서 힘을 내었다. 힘을 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행복한 가정은 스스로 노력해서 만들고자 할 때에 다가오는 선물이다.
남편은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목사로서 한껏 신이 나 있었다. 특유의 웃음과 넉넉함으로 바쁘게 살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의 생체구조가 다르듯이, 심리구조가 다르고, 그래서 관심있는 분야가 다르고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을 씁쓸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주어진 사명을 완수해야 하였다. 그때는 160가정 전도의 첫 시작으로 참가정 가입 신청서를 한창 받는 때였다. 가가호호 방문하며 부부의 사진을 받아서 붙이고 주소와 주민번호를 적는 활동이었다. 무안교회에는 선두에 서서 항상 열심히 앞서가시는 여러분의 장로•권사님들이 계셨다. 이미 160가정을 승리하신 분도 여러분 있었고, 막 시작하고 계신 분도 있었다. 활동을 나가서 받아 온 참가정 가입 신청서를 동참자들이 똑같이 나누어 갖게 되었다.
좀처럼 능률이 오르지 않고, 지역도 낯선 곳인데다가 힘이 빠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그게 내 운명이었다. 활동 멤버가 아무도 없는 날에 나 혼자서 활동을 용기를 내서 나가 보기로 했다. 처음에는 혼자 나가서 5장, 그 다음은 8장, 그 다음날에는 10장, 15장, 20장… 점점 자신감과 속도가 붙는 것을 깨달았다. 가속도를 확인하면서 나는 최선을 다하다 보면 불가능할 것 같은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하늘이 역사하실 것을 굳게 믿었다. 생각 이상의 몇 배의 실적을 올릴 수 있게 인도해 주실 것을 확신했다.
160가정에 승리한 사람은 부곡으로 불러서 시상도 하고 축하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보고하라는 협회공문이 왔다. 아직 그 날까지는 기간이 7일이 남아 있었다. 나는 목사님께 부탁을 드렸다. “우리 가정을 승리자 명단에 보고해 주세요. 나는 그 기간까지 꼭 승리하겠습니다.” 필승하려는 독한 마음으로 금식을 하면서 한 집 한 집 방문하면서 바인더 북을 채워갔다. 이미 완료한 가입신청서를 보여 주면서 설명을 하면 옆집에 가서 홍보 효과가 있었다. “내가 아는 아무개도 가입했네.”하면서 작성을 해 주었다. 건넛마을 아무개도 아랫마을 아무에게도 알고 있는 사람들의 가입신청서를 보면서 의심 없이 너도나도 가입 신청서를 받을 수가 있었다. 대중 심리를 잘 활용하는 것이 전도에 큰 효과가 있음을 깨달았다. 전도를 위해 심리학도 공부를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제 내일은 부곡에 가는 날이고, 오늘 마지막 20매를 추가로 다 받아야 하늘과의 약속대로 160가정의 참가정가입신청서 완료 승리하게 된다. 나에게 그 날은 결전의 날이었다. 아침부터 날씨는 흐리고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한 날씨였다. 금식을 하면서 동분서주하고 다닌 결과 오후 3시쯤 되어서야 20매를 다 받아서 승리할 수 있었다. 승리자의 자세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봉고차가 어디에 있나 둘러보았다. 마을 어귀에 반가운 교회차가 눈에 들어왔다. 웃으면서 승리자만이 갖는 특유의 힘찬 발걸음으로 남편을 향해서 뚜벅 뚜벅 걸어갔다. 나를 반기는 남편의 얼굴에도 파안대소가 일었다.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를 아랑곳 하지 않고 우리는 큰 소리로 하이파이브를 외치며 승리를 자축했다.
7. 눈물 젖은 미국행 비행기 티켓
무안교회는 160가정을 일찍부터 시작하여 전남에서는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참부모님께서 제주도에서 부르실 때도 3명이 완료하여 참석하였다. 10명 정도가 팀을 이루어서 마을회관마다 다니면서 축복활동을 신나고 정신없이 바쁘게 하였다. 면면촌촌, 구석구석을 다니면서 식구들과 함께 활동하였다. 우리 가정도 160가정을 완료했고, 무안에 온지 1년이 되어갔다. 그런데 어느 날 교구장께서 남편에게 여러 차례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다고 한다. 왜 이미 다 알고 계신 고향 장성을 뜬금없이 물어보셨을까?
알고 보니까 그 이유는 우리를 장성으로 보내기 위해서였다. 즉 이제 무안은 누가 오더라도 열심히 승리를 향하여 달려갈 수 있게 안정되었으니 장성으로 가서 새롭게 승리하라는 것이었다. 장성은 외부에 살고 있는 한 가정만 160가정을 완료하였고, 다른 식구들은 엄두도 못 내었고,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곳이다. 그러한 실정을 파악하고 나서야 교구장께서 “이제 고향인 장성에 가서 무안에서 승리한 노하우를 적용하여 승리하세요.”라고 권면하신 이유를 확실히 알았다.
우리는 갑자기 바빠졌다. 무안에서 이임 예배도 수요일에 드리고, 허둥지둥 1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는 고향 장성교회였다. 아이들도 자기가 다니다 전학 간 학교로 달려갔다. 친구들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남편의 고향은 아이들의 고향이기도 했다. 장성은 부모 형제가 있고 사랑스런 자녀들을 낳고 기른 곳이다. 황룡강 냇가에서 물고기 잡던 곳, 친구들과의 추억이 있는 곳이다. 이미 7년을 시무했던 정든 고향교회였다.
예배 후에 은행나무 아래서 단풍잎 비를 뿌리며 놀았던 곳, 빛바랜 사진들이 추억을 더욱 새롭게 떠올리게 했다. 여름이면 잔디밭 앞마당에 커다란 대야에 물을 받아 놓으면 물이 따뜻해졌다. 그 물로 큰 아이를 씻겨놓고 둘째 아이를 씻기는 동안 자기가 또 씻겠다며 눈 깜빡할 사이에 비누를 머리에 칠하면서 개구쟁이 모습을 보이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곳이었다. 그렇게 우리 가족이 사랑하는 장성 고향에 돌아온 것이다.
남편은 고향에 오자마자 무안에서의 노하우를 가지고 긴급회의를 열었다. 돈이 없어 160가정을 엄두도 내지 못했던 식구들에게 “300만원만 있으면 접수비까지 자신 있게 160가정을 다 해 드리겠다.”고 선포했다. 그러자 일주일 만에 작은 시골 교회에서 5천만 원이 넘는 돈이 입금되었다.
소를 팔거나 대출을 받아서 서로 먼저 하고 싶어서 20여명이 등록을 했다. 식구들의 가슴에는 전도를 향한 열정이 불타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일단 중고 시장에 가서 봉고차를 한대 사 가지고 왔다. 성전에 그래프를 그려 놓고 활동을 시작했다. 면면촌촌 마을마다 이장님들을 만나 시간과 장소를 섭외하는 일을 전개했다. 세 팀으로 나누어서 오전, 오후, 밤으로 식구들이 총동원되어 활동을 했다. 시간과 형편이 되는대로 최대한 참가하도록 종용했다.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다고 했다. 160가정을 향한 기지개를 켜는 식구들에게 채찍으로 몰아쳐야 하는 것이 목회자의 사명이었다.
마침 협회에서는 40특별활동 기간이 시작되었다. 활동을 나온 사람만 그래프에 그날의 실적을 나누어서 공평하게 올려줬다. 놀랍게도 40이 끝나는 날에는 4,000쌍이 넘는 기성 축복을 달성할 수 있었다. 고향에서 사랑하는 선배 후배 식구들과 함께 하나가 되어 이룩한 160가정의 승리이기에 더 뜻이 깊었다. 40일 기간에 전국에서 우수한 실적을 올려 협회 본부로부터 장성 교회가 우수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가정연합 마크가 새겨진 반지를 받았다.
그 후 뒤늦게 160가정을 하겠다고 통보해 온 두세명의 식구가 있어서 우리는 이제 활동을 캠페인처럼 실시하게 되었다. 백양사 휴게소 또는 백양사에 테이블을 펴고 서명을 받고 성주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활동을 하였다. 3명이 팀으로 활동을 나갔다. 목사님은 그만한 효자 장소가 없다며 꼭 백양사 제일 가까운 곳,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에 테이블을 펴고 준비하였다.
어느 날, 기존에 하던 대로 우리팀은 열심히 목청 높여 활동을 하였다. 그때 절에서 스님이 내려와서 절에 들어오는 불자들에게 왜 술을 주느냐면서 다른 곳으로 가라고 화를 내고 테이블을 걷어차고 쫓아내려고 했다. 우리는 취지를 설명하면서 술이 아니고 성주라고 했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스님은 우리를 밀어내려고 했다. 그래서 너무 서러워서 펑펑 울고 있는데, 언제 오셨는지 김석진 교구장께서 서울에서 회의하고 내려오시다 우리가 활동하는 곳으로 격려차 오셨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였다. 우리팀에게 큰 격려를 해 주셨다. 천복을 공짜로 주는 것도 이리 힘들 줄 몰랐다.
이렇듯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160가정을 승리하고 1997년 수택리에서 거행된 7•8절 안식권 선포 행사에 교회 식구들과 함께 참석했다. 160가정의 승리 기대 위에서 마침내 하늘부모님께서 쉬실 수 있는 안식 터전이 확립된 것이었다. 참부모님께서 통곡하시면서 안식권을 하늘부모님께 봉헌하시는 그 장면과 감격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협회로부터 640가정을 완료한 사람은 미국에서의 워싱턴 D•C 축복 행사에 50만 원만 내면 참여할 수 있다고 연락이 왔다. 꼭 한 사람씩은 교회마다 참여를 권유하였다. 미국에서 아들의 축복식이 있는 권사님과 함께 내가 참여하면 좋을 것이라고 목사님이 권유하였다. 목사님은 이미 21일 동안 미국을 다녀왔다. 참부모님 특별 초청이었다. 그래서 수고한 나에게 미국 티켓을 선물하고 싶은데, 마음뿐이었고, 경비를 마련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기적의 도움 손길이 생겼다.
북하면에 6000가정 누나가 있고, 삼형제가 한일가정 축복을 받은 가정이 있다. 해마다 장인 장모님을 찾아뵙고 극진히 모시는 장로님이 계시다. 목사님과 4차기동대를 같이 활동한 금천교회 최원기 장로께서 처가 고향을 방문하였다. 장인 장모, 처남 처남댁들과 고창 횟집에서 모임을 갖는데 우리 부부를 초청하였다. 모처럼 맛있는 식사를 대접받고 감사한 마음으로 서로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는데 최장로께서 “처남들을 통해서 고향교회에 오셔서 아주 열심히 수고 많이 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고 격려하면서 봉투를 주셨다. 식사 대접을 아주 잘 받았는데 봉투가지 받으니까 너무 황송하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교회에 도착하여 보니 수표 다섯 장 50만원이 들어 있었다. 너무도 깜짝 놀랐다. 간절히 원했던 미국행 티켓을 구할 수 있었다.
하늘이 최장로를 통해서 나에게 주신 큰 선물이었다. 얼마나 큰 은혜이고 감사한지 눈물이 나왔다. 미국으로 떠나기 위해서 공항에 여행사 직원과 모여 있는데 김석진 교구장께서도 오셨다. 내게로 다가오시더니 나의 비행기 티켓을 높이 들고 흔들면서 많은 식구들 앞에서 “이것은 눈물 젖은 비행기 티켓입니다!”고 하셨다. 박수를 받았다. 그때의 감동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8. 싸왓디캅의 신부들은 사랑을 싣고
정이 많이 든 고향인 장성교회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렸다. 160가정을 승리하고 이제는 우리도 자립 교회가 되어야겠다고 계획을 세우고 2차 특별 활동을 시작했다. “총각 있어요?” 면면촌촌을 다니면서 선교사들과 미혼 축복 활동을 하게 되었다. 아이들을 데리고, 또 임신 중이어서 몸이 무거운 식구까지 봉고차를 타고 점심식사를 마을 어귀에 있는 정자에서 활동하였다. 그 결과 한해에 40명이 넘는 미혼축복후보자 서류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때 활동으로 지금의 고향 장성교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축복받은 한•일 가정들이 교회의 중심이 되어 있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고 축복받은 가정들만 잘 정착시키면 그 어느 곳도 부러울 것이 없는 자립교회가 될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우리는 또 다시 목포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출발하였다. 하늘은 우리를 1년 만에 새로운 목회지인 목포로 인사 발령을 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딸은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당돌하게 교구장께 “우리 아빠 안 가시면 안 돼요? 자꾸 학교 옮기는 거 정말 싫어요!”라고 질문하였다. 딸의 심정이 어땠을까? 정든 친구들과 또 헤어져야 한다는 현실이 참으로 미안했다. 어린 가슴에 상처가 남을까 걱정이 되었다. 모든 것을 하늘 앞에 맡길 수밖에 없었다. 뾰로통한 딸을 달래어서 목포로 갔다.
그동안 사생결단의 자세로 너무 열심히 활동하여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 있었다. 몸을 좀 쉬면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또 다시 새로운 임지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안식할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하늘은 축복가정을 찾기 위해 바쁘신데 우리가 쉴 수는 없었다. 우리 부부는 쉴 시간도 없이 일본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스티커 활동을 시작하였다. 목포에서 유명한 2호 광장에 축복 상담 사무실이 있었기 때문에 축복 설명회와 미혼자 확보하는데 유리한 여건이었다. 목포는 다른 지역에서 농촌총각을 찾아 나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일흥조선을 비롯한 한라조선 등 조선소가 몰려 있는 곳이기에 미혼 총각들이 많았다. 학력이나 직업들이 최소한 갖춰진 좋은 후보자들이었다. 식구들은 축복활동만 하면 되지만 나는 활동과 축복 설명회를 동시에 맡게 되었다. 힘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해야 했다. 나 스스로를 몰아부쳤다.
한번은 김치를 담그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상담자의 전화가 왔다. 나는 무엇엔가 홀린 듯 정신없이 외출 준비를 하고 2호 광장에 있는 상담 사무실로 달려갔다. 마늘 파 생강 고춧가루 새우젓 찹쌀 풀 통깨 등을 주방에 가득히 늘어놓고 광장으로 갔다. 상담을 할 때에 장성교회와 무안교회에서 활동한 매칭에 성공한 실적으로써 가족사진과 편지를 모아서 앨범을 만들었던 것을 활용하였다. 그 앨범이 축복 설명회 자료로 중요하게 쓰였다. 특히 목포는 40명에 가까운 일본 선교사 가정이 있다. 그들은 잘 정착하여 참가정을 이루고 사는 행복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그들을 모델로 설명하면서 40명이 넘는 축복 대상자들의 서류 접수를 완료하게 되었다.
어느 날 우리는 큰 근심에 빠졌다. 일본과 축복결혼을 할 수 있게 해준다고 설명하고 서류를 다 받아 놓았는데, 일본과의 축복이 보류된 상태가 생겼다. 이에 그들의 원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위기를 돌파할지를 고민했다. 그런데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일본 대신에 태국여성들과 축복의 문이 열렸다. 태국인에게 3개월간 한국에 머물 수 있는 비자가 발급되기 때문에 태국 여성들이 한국에 머물면서 약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리 부부는 후보자들을 설득하여 금•토•일이 되면 봉고차로 5명을 데리고 수택리에 가서 2 ~3명 약혼을 하고 내려왔다. 일요일 예배도 원로장로께 맡기고 갔다.
이들을 본보기로 하여 매주 두달 가까이 수택리를 오르내리며 24명의 태국 신부들과 약혼이 이루어졌고, 9명의 한•한 커플과 한•일 커플이 성사되었다. 그리하여 1999년도 축복식에 단일교회로 33명이 축복 식에 참여할 수 있었다. 축복식이 끝나고 3개월 비자로 왔기 때문에 태국으로 바로 돌아가지 않고 전부 목포 교회로 오게 되었다. 신랑신부 46명을 태운 관광버스가 교회 문 앞에 도착하고, 큰 여행용가방과 예식물품이든 가방을 들고 신부들이 대거 들이닥쳤다. 난생 처음 들어보는 태국 말로 사왓디카, 사왓디캅라고 떠들면서 우르르 교회 대문을 들어섰다. 그 광경은 참으로 가슴 벅찬 장면이었다. 감동적이고 드라마틱한 잊혀지지 않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함께 합숙을 하면서 신부들이 임지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매일같이 신랑들과 부모님들이 찾아와서 신부와 며느리를 만나느라 북새통을 이루었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당장 통역자가 필요했다. 목사님께서는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한•태 가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태국부인 식구는 임신 중으로 몸이 무거웠다. 그러나 정말 절박했기에 그런 상황에 있는 식구에게 통역을 부탁해야 했다. 다행히 그 태국부인은 같은 심정권을 공유하기에 임신 중임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아니면 태국어 통역을 맡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협조했다. 그 부인의 남편을 설득하여 허락을 받고, 아이와 함께 두 달 가까이 우리와 합숙하면서 통역을 맡아 주었다. 그 식구에게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린다. 이런 모습을 보시는 하늘부모님께서는 얼마나 좋으시기도 하고 또 안타까워 하셨을까?
한•태가정 부인들의 40일 임지기간이 끝나고 가정 출발을 해야 되었다. 주체와 서로 잘 지내는 가정들은 하나둘 가정으로 들어가고 몇 몇 언니들은 3개월까지 임지 기간을 연장하면서 가정으로 들어가는 것을 고민하였다. 그런 언니들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목포교회를 그만두고 또다시 1년만에 서울로 인사가 되어 왔다.
9. 내 인생의 봄날은 여기까지
전남에서 15년의 목회 생활을 끝으로 우리 가족은 낯선 서울에서의 생활이 출발되었다. 다행히도 우리가 떠나온 목포 교회는 성전이 부족하여 바닥에 방석을 깔고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식구가 차고 넘쳤다. 남편이 순회사를 다녀온 후, 하늘은 우리 가족을 무안, 장성, 목포 교회를 거쳐서 서울까지 오는 동안 1년마다 이동을 시키셨다. 하늘이 함께하시면서 휘몰아치는 기간이었다. 축복 활동 중 40명의 후보자를 접수함으로써 교구장으로 부터 두 번이나 시상으로 양복 티켓을 받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에 가까운 실적이었다.
하늘 앞에 목표를 세우고 정성 드리면서 뚜벅 뚜벅 꾸준히 하다 보면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늘이 더 염려 하시며 역사하시므로 실적에 가속도가 붙는다는 사실을 나는 매번 느끼고 지금도 믿고 있다. 어느 곳을 가도 하늘이 함께 하시기에 우리는 걱정이 없었다.
성북이 교구 본부인 시절이었다. 취임예배 때는 지교회에서 모두 함께 예배 드렸기 때문에 성전이 꽉 차서 예배를 드렸다. 그러나 그 다음 주부터는 식구들이 적어서 가운데 줄만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다단계로 인해서 많은 식구가 상처를 입고 떠나기도 했고, 지교회로 식구들을 분배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옛날에는 식구들이 늦게 오면 성전 문을 잠글 정도로 명성이 있는 교회였는데, 현실은 좀 초라했고 썰렁했다.
한달 정도 지난 어느 날 그날은 목사님이 원고를 쓰고 설교 준비를 하고 힘차게 읽어 보고 또 읽어보면서 열심히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식구들은 더 적게 예배에 참석해서 가운데 줄에 25명 정도가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하지만 목사님은 그날따라 더 웃으면서 “지난날의 성북교회의 명성을 되찾겠다.” “기필코 발전시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발표하면서 더 힘차게 설교하였다. 나는 뒷줄에 앉아서 너무나 힘이 빠져 있었다. 나라면 너무 실망하여 설교할 기분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바로 제단에서 내려와서 성전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목사님은 더 힘차게, 더 자신있게 성북의 명성을 기필코 되찾고 목표를 이루는 날 이곳을 떠나겠다고 큰소리로 외쳤다. 그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그 후 3년 쯤 지나면서 조금씩 발전하였다. 처음에는 일본 선교사도 딱 두 가정 밖에 없었으니 매우 열악했다. 그러나 해마다 축복식을 통하여 새 식구들도 늘어나고, 국민연합을 조직하여 대외 활동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교회에 숙원인 봉고차가 추첨으로 당첨이 되는 등 경사가 이어졌다. 하늘은 우리 성북교회를 무한히 축복을 해 주시고 계셨다. 너무 행복한 시간이었다. 교회는 날로 발전되어 가고 한 곳에 3년 넘게 있다 보니 아이들도 안정을 찾았다. 청소년기에 들어선 아이들에게는 참 다행한 일이었고 좋은 기간이었다. 성실한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보면서 난 정말 행복하였다. 더 이상 바랄게 없었다. 하늘의 사랑과 은혜를 듬뿍 받으며 감사한 생활을 하였다. 우리가 노력하는 것 이상으로 성북에서도 역시 하늘이 역사해 주심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은 청평에서 40일간 새해 정성 기간을 마치고 참아버님께서 지시하신 제비를 뽑았는데 빨간색 카드를 뽑아서 왔다. 빨간색 카드는 고향으로 가서 활동하라고 하는 카드였다. 파란색 카드는 제자리에서 활동하면 되었다. 가족을 모아 놓고 함께 고향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하였지만 고 2에 올라가는 큰 아들은 “나는 절대 안 가요. 방 얻어 주시고 동생들만 데리고 가세요.” 하였다. 둘째 딸아이와 막내아들은 가고 싶지 않지만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것은 싫다며 따라가겠다고 했다. 명령에는 곧장 복종하고 실천해야 하는데, 6개월간 서울에 머물기로 했다. 성북교회는 목회자 없이 6개월간은 책임자 제도를 두어서 관리하게 했다. 지금 돌아보면 하늘은 우리가 받을 곤경을 피해 갈 수 있는 길을 예비해 주셨는데, 미처 그런 폭넓은 하늘의 계획을 모른 채, 인간의 생각으로 서울에 머뭇거리고 있었다. 실수였다.
마침내 고향으로 갈 때에 남편은 삼정톤을 박스로 사 가지고 갔다. 동창들과 이장들을 방문할 때 사용할 것이라며 짐을 꾸려 고향으로 내려갔다. 일단 비어 있는 고향 집에 짐을 풀고 사무실을 구해보려고 동분서주하고 있었다. 한번은 서울에 다니러 왔는데 목사님 얼굴에 긁힌 상처가 있었다. 어찌 된 거냐고 물으니까, “TV로 뉴스라도 보려고 지붕 위에 올라가 안테나를 고치고 내려오다 그만 미끄러지면서 뒤뜰에 있는 돌 뿌리에 부딪쳤다.”고 했다. 그렇게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이 일어나서 늘 긴장을 놓지 않고 조심하면서 활동을 했다.
힘든 환경이지만 계획을 세우고 훈독가정교회를 정착시키고자 고향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에 큰아들이 학교에서 철봉에서 떨어져 응급실로 실려 갔다. 그 연락을 받고 아빠는 전라도에서 올라오고, 나는 의정부에 갔다가 연락 받고 놀란 가슴으로 병원에 도착하였다. 응급실에 도착하여 아들을 만났는데 의사 한분이 긴 바늘 같은 것으로 아이의 몸 이곳저곳을 찔러 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는 “아무 느낌이 없어요.”라고 했다. 아들은 꼼짝도 못 하고 누워 있으면서 “엄마 죄송해요”하고 눈물만 주르르 흘리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극심한 고통을 공유해야 하는 심히 곤혹스런 상황이었다.
“괜찮아 수호야, 괜찮아 목뼈를 다쳤는데 수술하면 잘 될 거야.” 아들은 경추 5•6번 목뼈가 부러지면서 신경이 손상되어 가슴 밑으로는 마비가 되어 감각도 없고 하루 아침에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믿을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어 절망의 나날을 보내게 되었고, “내 인생에 있어서 지금부터는 웃을 일은 영원히 없겠구나.”는 생각이 들었다. 내 나이 49세, 아직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이라고 느끼며 살고 있을 때에 느닷없이 추락하여 날개가 꺾이고 힘없이 날개를 퍼덕이다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도저히 절망에서 헤어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빛나던 시절 봄날은 여기까지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긴 투병생활을 하였다. 재활병원들을 전전하며 힘든 시간이 흘렀다.
현실이 너무 힘들어서 한강에서 아들과 함께 뛰어내린다면 영계의 세계에서는 더 자유롭게 더 건강한 다리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리는 상처하나 없이 멀쩡한데 왜 걸을 수 없단 말인가? 목을 다쳤는데 왜 마비가 되어 저 육중한 몸이 꿈쩍도 할 수 없단 말인가? 척수가 끊어져서 할 수 없는 걸까?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데 척수가 끊어져 두뇌 명령을 받을 수 없으니까 사지백체가 움직일 수 없는 것이었다. 누워있는 아들을 보면서 불쌍하고 안타깝고 답답하고 부모로서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것을 바라보아야 하는 이 답답한 심정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고통의 시간을 지내고 있는 가운데 하늘은 내게 큰 깨달음을 주셨다. 깨달음은 그냥 오지 않는 법인가 보다.
우리 인간은 두뇌의 명령에 의해서 척수를 통하여 사지백체를 움직인다. 그러나 척수가 끊어지면 두뇌 명령을 받을 수 없어 움직일 수 없다. “그처럼 내가 아무리 축복 가정이요 권사 장로 목회자라 할지라도 하늘과의 관계가 끊어지면, 하늘부모님을 부모를 모시지 않고 하늘의 뜻대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하늘이 바라보실 때 심히 슬픈 것이다. 내가 내 아들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심정을 하늘부모님과 참부모님께서 겪으실 것이다.”는 깨달음이 있었다. 그래서 인간은 항상 하늘 부모님과 참부모님께 늘 일문일답 하면서 살아가야 된다.
기쁨의 대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하늘부모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수많은 인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한(限)의 심정을 나는 아들을 통하여 더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잃어버린 자녀를 찾아드리기 위해서 전도자의 사명을 더욱 더 충실히 할 것을 다짐하였다.
10. 수호는 걱정하지 말라 나으면 되지
사고 후 초기에는 간병과 재활을 돕기가 혼자서는 어려웠다. 낮에는 아들 수호와 같이 있었고, 밤 9시면 집으로 들어와서 학교 갔다 온 딸 아들 두 아이를 돌봐야 했다. 날이 밝으면 또 다시 병원으로 달려갔다. 내 신세가 너무 기가 막히고 처량해서 수시로 울고 다니니까 하루는 아들이 말했다. “엄마 울지 마세요. 엄마가 울면 하나님이 더 슬프잖아요. 나보다 더 심한 사람도 있는데 엄마 이제 그만 우세요.” 그 말을 듣고서 내가 울면 아들이 불안해하고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울음 뚝 했다.
다행히 아들 병세에 차도가 있어서 금요일부터 외출이 가능해서 금•토•일은 집으로 돌아와서 교회 업무를 돕다가 월요일에 다시 병원에 가서 재활훈련을 하게 되었다. 병원에서 외출을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기적이었다. 그러나 하늘 앞에도 교회 식구께도 너무도 죄송한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2년여 동안의 재활 병원 생활을 마치고 아무리 훈련해도 더 이상 좋아지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자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
하루는 집에서 아들을 보살펴 주다가 한 2시간 정도 외출할 일이 있어서 혼자 두고 남편과 같이 밖으로 나왔다. 그날따라 길이 많이 막혔고, 볼 일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들한테 전화가 왔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차는 막히고 아들은 위급함을 알렸고, 차 안에서 조바심을 내면서 집에 도착하여 문제를 해결해 줘야 했던 일이 있었다.
하루는 심방을 가야 하는데 지난번과 같은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아들 수호를 차에 태우고 심방을 가야 했다. 지하주차장에 앉혀 놓고 둘이서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둘이서 할 말을 잃었다. 한창 뛰어놀면서 힘차게 자라야 할 나이에 어두컴컴한 주차장에서 아들 혼자 있는 시간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의 눈에서도 나의 눈에서도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는 가운데 우리 부부는 기도실에서 기도를 끝내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남편은 결론을 내렸다. “더 이상 신세지는 목회를 할 수는 없다. 기생충 같은 목회자는 되기 싫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그날 밤 결심했다. 남편은 목회를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사표 써서 책상 위에 놓고 내일 날이 밝으면 제출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에 나는 꿈속에서 참아버님을 만났다. 큰 집회가 열리고 많은 사람들이 단상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그런데 참아버님께서는 남편에게 “단상에서 말씀하고 있는 분을 도와서 큰일을 맡아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남편은 “아버님 저는 그렇게 큰일을 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들을 보살펴야 하니까 아들을 보살피면서 할 수 있는 작은 교회나 섬이나 오지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로 보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자 참아버님께서 너무도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수호는 걱정하지 말라. 나으면 되지!”
그날 새벽에 꿈에서 깨어나 남편을 불렀다. 어젯밤 꾼 꿈을 설명했다. 우리 부부는 “참아버님께서 부족한 우리 가정을 염려하고 계시는구나! 목회를 그만두지 말고 계속하라는 뜻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40년이 넘게 공직의 길을 가고 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사회복지제도가 갈수록 좋아져서 지금은 380시간을 활동 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 있어서 교회 활동이나 어떤 일에도 아들이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이런 제도의 변화를 미리 하시고 아버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라고 믿고 있다.
11. 또 하나의 아름다운 도전 (휠체어에 희망을 싫고)
삼육재활병원에서의 재활치료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부모 마음은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치료를 끝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들이 스스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더 열심히 하다 보면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늘 심어주었다. 의학적으로 척수를 다친 순간 걷는 것이 안 된다는 것을 상식으로 알고 있었지만 아들한테는 차마 말해 줄 수 없었다.
그 병원은 삼육재활학교가 같이 있는 병원이어서 점심시간에 많은 유형의 장애학생들을 볼 수가 있었다. 아들은 그 광경을 보고 너무 실망이 컸고, 나도 저 학생들처럼 저렇게 살아가야 된다고 본인 스스로 깨닫고 더 이상1 재활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부모의 말도 의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막무가내였다.
다른 사람의 경우 3년 정도까지는 재활 치료를 하는데 우리는 2년도 채 안 되는 기간을 끝으로 병원 생활을 끝냈다.
집에서 휠체어를 타고 생활하는 아들을 보면서 한숨만 나왔다. 그러나 부모가 먼저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들이 집에서 무료하게 지내던 어느 날 선문대학으로부터 대학 모집요강이 도착하였다. 자신 없어하는 아들과 함께 모집요강을 보면서 입학원서를 쓰고 면접을 보면서 대학에 대한 희망을 가졌다. 새 도전이 시작된 것이다. 휠체어를 타고 입학식을 하고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선문대학교 통일신학과에 첫 수업이 시작되었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아서 적응하기 위해서는 매사에 조심해야 했다. 휠체어 바퀴가 아주 낮은 턱에도 걸리면 우당탕 넘어졌다. 내가 잠시 방심하면 잠깐 사이에 아들은 휠체어 채로 넘어져서 버둥거리게 되었다. 장애자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었다.
그런 사건이 생기면 나는 너무 놀라고 막막했다. 이 노릇을 어쩌면 좋아? 4년 동안 어떻게 해야만 하나? 내가 혼잣말로 신세타령을 하면서 하는 푸념 섞인 말을 듣고 아들이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엄마 그만한 각오도 없이 저를 학교에 보내려고 했어요. 이 정도쯤이야 괜찮아요. 아무런 문제 되지 않아요.” 아들이 강한 의지를 보였다 .
이렇듯 힘들게 하루하루를 적응해가고 있을 때 양연실 실장과 함께 서울에 올라 온 적이 있다. 실장님도 우리아이와 같은 2007학번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참아버님을 모시느라고 바쁜 일정이지만, 만학도로서 학교를 다니고 계셨다. 입학식을 다녀 온 뒤 참어머님께서 여러 가지를 물어 보셨다고 한다. 그래서 “휠체어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온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은 저를 보고 자녀분의 입학식에 오셨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아닙니다 내가 입학한 학생이에요.’”라고 말했다고 보고를 드렸다. 이 내용을 들으신 참어머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시다가 “엄마가 많이 힘들겠구나! 힘내라고 옷을 전해 주라.”고 지시하셨다. 위로의 말씀과 옷을 받고서 나는 너무 감사하고 황송하여 몸 둘 바를 몰랐다. 참어머님께서 이 부족한 엄마의 고통과 사정을 다 아시고 힘내라고 응원해 주시고 관심 가져주신 큰 사랑을 평생토록 간직할 것이다. 내가 힘들 때마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주신 귀한 하사품을 가슴에 안고 기도하면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 나가기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다.
남편이 매번 월요일에 승용차로 선문대에 데려다 주고, 목요일에 데리러 오는 고달픈 그런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차가 많이 밀려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서 학교에 도착하면 9시가 넘었다. 남편은 매번 왕복 6시간을 길 위에서 보내는 셈이다. 하루는 아들이 제안했다. “엄마 우리 KTX로 다녀요. 서울역까지만 데려다 주면 45분이면 아산에 도착해요. 아빠도 너무 힘드시고 시간 낭비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휠체어 탄 모습을 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지만 사람이 많은 곳에는 내놓기가 싫었다. 그러나 아들이 먼저 세상 밖으로 나갔다. 아들은 사람이 가장 많이 붐비는 서울역을 아랑곳 하지 않고 거침없이 휠체어를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아들은 장애 극복을 잘해 가고 있었다. 나는 눈물을 삼키면서 그런 장한 아들을 응원하는 엄마로 변해가고 있었다.
KTX 역에서 선문대까지는 콜밴으로 이동하는데 아주 좋은 운전기사가 있어서 예약하여 이용하게 되었다. 하루는 기사가 이렇게 말씀했다. “어머니 학생은 장애자가 아닙니다. 몸이 불편 할 뿐이지 정신은 건강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잖아요. 정말 더 심각한 장애자는 집에서 나오려고도 하지 않고 게임만 하고 세상과 소통할지 않고 은둔 상태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내 지인의 자녀가 있는데 그런 상태입니다. 그것이 더 큰 장애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는 너무 걱정하기 마세요.” 그 분은 지친 내 모습을 위로해 주려고 애를 써 주셨다. 너무 감사한 분이다.
한번은 금요일에 KTX로 천안아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와서 집에 도착하여 보니 이상한 증상이 발견되었다. 전날에 멀쩡하던 아들이 갑자기 욕창에 걸려서 왔다. 주말을 지내고 월요일이면 기말고사 시험인데 걱정이었다. 휠체어에 앉을 수가 없으니 난감한 일이 생겼다. 아빠랑 아들은 이번 학기는 포기하고 다시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가 포기할 수 없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어떻게 다닌 한 학기 수업이었는데… 나는 무조건 아들을 봉고차에 엎드려 태우고 기숙사에 도착하였다. 모질고 강한 엄마가 되어야 하는 순간이었다.
시험 과목이 있는 교수님을 내가 만나러 다녔다. 엄마이기에 솟아나는 용기가 있었다. “우리 아들이 지금 이런 상황입니다 기숙사에서 시험 볼 수 없을까요? 시험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아 그래요. 욕창이 참 고통스런 것인데… 참 걱정이 크시겠습니다. 힘내세요.” 하면서 위로해 주시는 교수님도 계셨다. 교수님들의 응원을 받으면서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 이때가 4년 재학 기간 중 가장 위기에 처했었던 기간이었다.
그리고 과목마다 레포트 작성이 문제였다. 독수리 타법으로 아들은 보조기를 끼고 한 손으로 워드를 쳐야 했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를 해야 하기 때문에 아들 혼자서 밤늦게까지 워드를 치고 있었다. 나는 피곤해서 얼핏 잠이 들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들리듯, 아들의 워드 치는 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한 손으로만 치던 워드를 두 손으로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동안 한 손은 중심을 잡아야 해서 한손만 사용했었는데, 그런 상황을 극복하여 두 손으로 좀 더 빨리 과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감사했다.
졸업 후에도 도전은 계속되었다. 장애발생 예방 강사로 활동 하다가 지금은 사회 복지를 공부하여 사회 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하고 장애인 자립 생활 센터에서 동료 상담가 겸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더 큰 꿈을 향해 아름다운 도전은 계속될 것이다.
12. 다시 찾은 봄날은 참으로 따뜻하옵니다
청평 월드센터 행사에 식구들과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런데 앞줄에 삼위기대 동서가 먼저 와서 앉아 있으면서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형님 안녕하세요? 형님만 보면 너무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우리 아이들만 축복 받아서요. 저는 빚을 내서 조상 축복을 했습니다. 조상님들께 빚을 내서 다 축복해 드릴 테니 함께 빚을 갚자고 기도했는데, 지금은 빚도 다 갚고 집안일도 잘 풀리고, 자녀들도 순조롭게 축복 받았습니다. 3남 2녀인데 2남 2녀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내게는 반가운 인사이기도 하고, 또 씁쓸한 말이기도 했다. 우리는 세 명의 자녀가 한 명도 축복을 안 받은 상태였다. 괜히 부끄러웠다. 그런데 왜 자기가 죄송하다는 건가? 그래 맞아 조상 축복이 중요하구나.
나는 조상축복 상태를 확인했다. 그때 우리 친정 쪽은 오빠께서 다 완료하셨고, 시댁 쪽은 부계 모계만 430대 까지 끝난 상태였다. 그래서 청평에 1박 2일 수련회 갈 때 접수비를 다 준비해 드렸다. 430대 조상 축복을 완료하고, 이번에는 남편이 100일도 못 넘기고 홍역으로 영계로 간 동생들이 둘이 있다고 해서 해원을 해 줬다. 그리고 100일이 지난 뒤 월드센터에서 축복식이 있었다. 그때 참석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는 내가 꿈을 꾸었다. 돌아가신 시부모님께 잔칫상을 차려놓고 며느리 셋이서 절을 하기 위해 나란히 서서 “아버님 어머님 절 받으세요. 며느리 셋이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왜 셋이냐?” 하셨다. 일찍 젊은 나이에 먼저 간 형님이 생각나서 다시 “며느리 넷이서 인사드리겠습니다. 절 받으세요.” 하였더니 “아니 왜 넷이냐?” 하셨다. 꿈 이야기를 했더니 남편은 무릎을 탁 치면서 “내일이 축복식인데 영계에서는 이미 다섯째 며느리를 보셨나 보다.”고 하였다. 너무도 신기한 꿈 이었다.
내일은 월드 센터에서 미혼 축복식과 조상 축복식이 함께 있는 날이다. 먼저 간 동생들은 남동생 하나 여동생 하나였다. 이름을 지어 주고 해원을 해 주고 해서 축복식 날이 온 것이다. 남편은 축복을 위해서 청평에 먼저 갔고 나는 내일 참석할 예정이었다. 영계를 잘 모르지만 시동생 둘이서 축복을 받는데 뭔가 축하를 해 주고 싶었다. 많은 사람들은 자녀 축복을 위해서 꽃다발을 준비하는데 나는 꽃다발을 줄 자녀들이 아직도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대신에 나는 시동생들에게 줄 꽃다발을 정성껏 만들었다. 꽃다발을 만들면서 나는 기도했다. “축복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번에는 꽃다발을 당신들을 위해서 준비했으니 내년에는 우리 자녀들 세 명을 위에서 꽃다발 세 개를 만들게 도와주세요.” 축복식에 참여하여 꽃다발을 남편에게 시동생들을 대신해서 전해 주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을까?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축복 반지를 잃어버렸다. 박수를 치다가 빠졌는지?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축복 반지는 본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 몇 년도인지 모르지만 믿음의 자녀를 축복시킨 사람에게 시상으로 협회로부터 축복 반지를 받은 적이 있는데 그 반지였다. 영계에서도 축복식에 반지가 필요해서 반지를 가져갔나보다.
드디어 2020년 2월에는 막내아들이, 10월에는 딸이 축복을 받게 되었다. 자녀를 축하하기 위해 정성껏 꽃다발을 준비하던 그 때가 내생애에서 가장 기쁘고 행복한 날로써 잊을 수 없다. 축복받은 두자녀들이 가족 모임에 올 때 서로 다정하게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기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아직 짝을 찾지 못한 큰아들을 생각하면서 참으로 안타까웠다.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 아들에게 맞는 상대를 찾을 수 있기를 소망하며 교회 천심원에서 100일 특별정성을 드렸다. ‘하늘이 준비하신 상대가 어딘가 꼭 있을 것이다.’는 믿음과 확신을 갖고 블레싱 포유 사이트를 통해서 교류희망 후보자를 찾았다. 한 사람이 발견되었다. 소속 교회를 보니 일본에서 목회하고 있는 조카가 전에 교회장으로 있던 교회였다. 나는 그 어머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연락을 했더니, 상대쪽에서도 우리아들과 교류를 희망하고 있어서 연락을 취해보려고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차제에 우리의 교류신청을 받게 된 것이었다. 나는 전율을 느꼈다. 하늘이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느꼈다. 교류를 이어오다가 약혼서약식을 하고 2023년 5월에 있을 축복식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는 나날이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먹구름이 지나고 나서 밝은 햇살이 비치듯이, 우리 가정에는 안정과 희망과 행복의 웃음꽃이 가득하다. 특히 내 가슴에는 그 동안 묻혀 있던 행복의 웃음꽃이 다시 활짝 피어났다. 그저 모든 것에 감사한다.
이미 지난 과거이지만, 꼭 기록하고 싶은 내용이 있다. 큰 아들이 사고를 당하여 가족 전체가 고통을 당할 당시, 나는 너무나 무거운 시련을 정말 감당할 수 없어서 차라리 한강에 뛰어내리고 싶었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 수가 없었다. 2천년 전,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고, 머리에는 피가 줄줄 흘렀다. 그처럼 내 머리와 등에는 고통의 가시가 박힌 짐덩어리가 털썩 씌워졌고, 피가 흘렀다. 피눈물이 난다는 말대로 내 눈에는 피눈물이 흘렸다. 내 가냘픈 어깨와 등에는 가시가 찌르고 파고들어서 심히 고통스러웠다. 예수님은 인류를 위한 십자가 순교의 짐을 지셨지만, 나는 우리 가정의 짐을 졌고, 견디는 것이 너무나 벅찼다.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고, 현실을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하루는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를 붙들고 펑펑 울면서 “엄마는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워 차라리 정신이 나간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딸이 나를 격려했다. “엄마 제발 이러지 마세요. 엄마가 이러시면 나와 동생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세요? 우리들도 오빠 때문에 너무나 슬프고 힘들지만 참고 있어요.” 그래. 맞다. 애들도 말은 안 하지만 얼마나 오빠와 형 때문에 슬픔을 담고 살고 있었을까? 엄마가 미안하였다. 그래, 나는 다시 일어서야 했다. 누구도 도와 줄 수 없는 나만의 십자가였다.
어떤 영통인 권사님이 위로해 주던 말씀이 생각났다. “아들은 아빠가 잘못 될 운명이었는데 대신해서 다친 것입니다. 그래도 이 시련이 감당하기 나아요. 서까래가 튼튼히 받쳐 주고 있으니까. 네 기둥 중에 한 기둥이 부러졌어도 불안전하지만 지탱할 수 있잖아요? 만약 아빠가 다쳐봐요. 어떻게 되겠어요? 가족 모두는 아들한테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대해 줘야 해요.”
그렇다. 우리 가족은 절망에서 희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고 있다. 이제는 웃을 수 있고, 우리 가족 모두 행복하다. 하늘 앞에 효정의 도리를 다하는 축복가정이 될 것이다. 다시 찾은 봄날은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자만이 그 따뜻함을 진정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첫댓글 정혁순님 댓글
박기주.임채상가정의 자서전...아주~~
은혜로운 내용 잘 읽었습니다.
김교원님 댓글
임채상 사모님 자서전 무척 은혜롭고 반갑습니다 사모님 친정아버님의 영적역사는 대단했지요 충남교구내의 믿기지않는 엄청난 하나의 사건이었어요 당시에는 3가지의 영적역사라고 했었는데요 목사님께서도 평안하시지요 자서전을 통해 새로움을 느꼈네요 감사합니다
이의규님 댓글
박귀주:임채상 가정의 파란
만장한 한 생애를 진솔하게
기록해주신 자서전 감동으
로 잘 보았기에
사랑茶와 꽃다발 올리오니
작은 기쁨과 위안얻으시기
바랍니다 💙
임채상님 답글
사랑차와 예쁜 꽃다발 오랫도록
간직 하겠습니다.
위로와 격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