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굴지의 대기업 임원인 50� 중반 A상무는 한때 부인과 실랑이를 자주 벌였다. 임시직원의 준말이라는 임원인 만큼 언제라도 회사를 그만둬야할지 모르기 때문에 은퇴 후 어디에서 살지 부인과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언성이 높아졌다.
A씨는 경남 바닷가에 위치한 따뜻하고 인심 좋은 고향으로 가고 싶지만 부인이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A씨 생각에는 고향으로 내려가는 순간 노후준비는 완벽하게 마무리되는데 부인은 서울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서울에 있는 아파트 한 채 팔고 그동안 모아 놓은 은퇴자금을 갖고 고향에 내려가 조그만 아파트 한 채 마련하고 나머지를 안전한 금융자산으로 굴리기만 해도 ‘게임 오버’라는게 A씨의 생각. 그동안 모아 놓은 돈과 아파트 차액을 은행에만 맡겨놓아도 월 300만원은 충분하고 60세가 넘으면 국민연금까지 나오니 시골에서는 가끔 골프도 치면서 살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고 있다.
A씨와 부인은 수차례 술자리 토론을 벌였고 마침내 부인이 결단을 내렸다. 부인이 남편의 성화에 못 이겨서인지 “고향인 시골까지는 내려가지 않더라도 고향 인근 도시까지는 내려가겠다.”고 양보를 했다.
#2
신문사 국장을 지내고 아직 현직에 있는 50대 중반의 B씨는 얼마 전 큰 결단을 내렸다. 주말 골프를 적당히 줄이고 캠핑에 탐닉했던 B씨는 강원도 홍천군 내린천 인근에 상당한 자금을 투자해 아주 그럴듯하고 고풍스러운 산장을 구입한 것.
캠핑을 다니다 보니 물 좋고 공기 맑은 지역에 캠핑장을 설치하면 자신의 취미도 즐길 수 있을 뿐 아니라 노후 생활까지 가능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산악인 사이에서는 아주 유명한 산장을 구입해 리모델링을 하고 있는데 내린천을 끼고 소나무 숲까지 산장 바로 옆에 위치해 그야말로 캠핑장으로는 천혜의 입지요건을 갖추고 있다.
산장 주변에 샤워장과 식당을 완공하느랴 주말마다 그 곳으로 내려가는 B씨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하다. 친구들을 산장으로 초대해 저녁에 별빛을 헤아리며 소주도 한잔하고 현지의 마을 주민들과 새로 사귀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는 것.
B씨는 이곳으로 내려와 책도 보고 글도 쓰면서 심마니들과 함께 산에도 올라 약초도 뜯으면서 살게 될 그날이 기다려지기도 한다며 빙그레 웃는다.
#3
서울에서 작은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50대의 C씨. 그는 2년 전, 양평군 서종면에 대지 200여 평, 건평 70여 평의 전원주택을 지었다. 하지만 금융위기 여파로 회사의 납품물량이 급감하자 지난 4월 약 9억 원에 전원주택을 매물로 내놨지만 찾는 이가 없다. 그는 결국 7억 5천만 원, 6억 3천만 원 2차례에 걸쳐 가격을 낮췄지만 마땅한 구매자를 찾지 못하고 있다.
또 60대의 D씨는 평소 꿈꾸던 전원생활을 위해 3년 전 은퇴 후 부인과 둘이서 서울과 가까운 북한강 조망이 근사한 양평에 정말 그림 같은 집을 장만했다. 기존 집을 리모델링하고 텃밭까지 딸렸다. 하지만 1년 전에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 매물로 내놨다. D씨는 "생각했던 것만큼 전원생활이 쉽지가 않더군요. 너무 적적하고 풀 뽑기도 만만찮은 노동이더군요." 라고 밝혔다.
은퇴 후에 어디에 살 것인지 이야기 하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그저 막연하게 전원주택이나 고향 농촌 등을 꼽는다. 농가주택을 사고 텃밭을 가꾸면서 어느 정도 자급자족하는 생활을 꿈꾸면서 TV에 소개되는 귀농 프로그램에 눈을 고정시킨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실제로 국토연구원에서 얼마 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은퇴 후에 전원생활을 희망하는 비율이 45%로 도시생활을 희망하는 비율(45%)보다 높게 나타났다.
베이비 부머 세대는 이르면 대학시절에 서울로 유학을 왔거나 늦더라도 대학 졸업 후 도시에서 북적거리면서 30여년을 살다보니 어린시절 마음껏 뛰어놀던 농촌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는 듯 싶다.
하지만 은퇴 이후의 주거지는 비용은 물론 가족이나 친구와의 사회적 관계, 기후나 의료서비스 여건을 고려해야 한다.
노후에 살기 좋은 곳은 어디일까?
보건복지부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노후 희망 거주지역은 남자와 여자, 성별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앞서 말한 사례의 A상무가 부인과 티격태격했던 것이 특별한 케이스가 아니라 대부분 그렇다는 이야기다.
남성의 노후 희망거주지역은 농어촌이 49.5%로 압도적으로 높다. 이어 중소도시(예컨대 전주 마산 진주 청주 등등)가 29%, 마지막으로 대도시가 21.6%로 가장 낮다. 남자들은 대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기를 원하는 ‘야생본능’을 갖고 있다.
반면 여성을 중소도시가 36.5%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농어촌과 대도시가 각각 32%, 31.1%로 엇비슷한 수준이다. 여성들도 생활고에 치여서 인지 대도시를 그렇게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으나 농어촌으로 귀향하는 것도 어쩐지 꺼리는 분위기다.
또 다른 은퇴후 거주방법으로는 실버타운이 많이 거론되고 있으나 아직은 다소 생소한 느낌이다. 실버타운은 시설규모와 수준에 따라 여러 가지이지만 노후 생활을 하는데 필요한 의료시설이나 오락시설을 갖추고 있는데다 식사와 각종 생활편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편리하다.
그러나 만족할만한 수준의 시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특히 편리성에도 불구하고 노인끼리 살다보니 오히려 소외감이나 무료함을 더 심하게 느낄 수 있다는 단점도 있다.
어느 고급 실버타운에 입주한 돈 많은 노인이 며느리나 손자들이 시설을 방문할 때마다 수십만 원의 용돈을 줘 자주 찾아오도록 유혹한다는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만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여유 있는 계층에서 선호하는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전원주택은 어떨까? 얼마 전 매일경제에 소개된 기사를 보면 수도권 전원주택지로 각광받는 경기도 양평에만 1,000여건이 넘는 매물이 쏟아지고 있다.
양평읍을 포함해 청평 서종 가평 대성리등 일대 중개업소에도 전원주택 매물 2000~2500여건이 홍수처럼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베이비부머들의 은퇴와 귀농등의 수요로 불던 전원주택 열풍이 사그라들고 있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전반적 경기불황에 수도권 주택시장의 장기 침체, 전원생활의 회의 등이 겹친 현상으로 진단한다.
실제 최근 전원주택시장도 아파트시장과 유사한 경기 흐름을 보이고 있다. 중대형 아파트시장의 매매부진과 가격하락이 중대형 전원주택시장까지 여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양평군 옥천면의 전원과 사람 구자철 대표는 “하루 평균 2~3팀이 전원주택을 알아보러 사무실을 찾고 있다”며“하지만 마음에 드는 전원주택을 선택해도 기존 주택이 팔리지 않아 계약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구 대표는 또 “요즘 거래되고 있는 전원주택은 건평 15~25평형의 중소형 전원주택이고, 매매보다는 전세를 찾는 30~40대가 많다”덧붙였다.
은퇴 후 거주지를 고르는 것은 쉽지 않다. 전문가들은 첫째, 교통이 편리한 곳. 둘째로 의료시설이나 여가시설 등 각종 복지시설에 대한 접근이 용이한 곳, 셋째로 은퇴 이후 발생하는 생활단계의 변화(연령에 따라 활동 기에서 간병기로 변화)를 충분히 고려한 주거 선택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아무튼 뭐 하나 결정하는데 쉬운 게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