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일기 쓰는 기쁨
오동춘<마천출신 문학박사,시인,짚신문학회 회장>
나는 여든 고개 중반 넘은 지금도 날마다 일기를 쓰고 있다 하루의 삶을
반성하며 일기 쓰는 기쁨에 젖어 살고 있다 6.25 무렵 함양중학교 박홍관<2020.12. 30 별세> 국어 선생님 가르침 따라 중2때부터 일기쓰기를 시작했다 두달 정도 쓰다가 작심삼일이 되어 중단했다 나는 스스로 나를 반성하면서
중3이 되면서부터는 일생동안 일기를 꼭 쓰고 말리라 결심했다 서부 경남 명문 함양중학교 3의 2반으로 올라가면서 1952년 그해 3월 1일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전지 한 장을 사서 16절지로 접어 공책을 만들어 연필로 잉크 펜으로 꼬박꼬박 일기를 써 나갔다 당시 함중 한중환 교장선생님 훈화, 백질갑 교감 선생님 지도말씀, 이상복 담임선생님의 수학수업 이야기,김학곤 영어선생님 이야기 등 사춘기 함중생활이 내 일기에 다 담겼다 정말 일기는 생활의 기록이 되고 사색력,문장력을 길러 주는 훌륭한 국어공부였다 나는 또 국어를 좋아해서 중1때 국어 첫시험에 99점을 받았다 우리 반에 오신 박홍관 국어 선생님이 나의 국어 성적이 4개반에서 으뜸이라고 많이 칭찬해 주셨다 이상복 수학 선생님은 병곡에서 자전거로 출근하시며 <진리와 도덕> 급훈을 우리 교실에 걸어 두고 우리 인성교육에 열중하셨다 수학시간에는 “겸해서 고로 성립되었다”는 수학풀이 설명으로 같은 말씀을 50분 수업에 어느 학생이 세어 보니 49번까지 하셨다고 했다 병곡 사는 친구가 선생님 별명이 “겸해서”라고 말씀 드려 그 이후에는 단 한번도 “겸해서”라는 말씀은 안 하셨다 당연히 “겸해서”별명도 중단되었다 3의1반 남녀공학반과 우리 3의2반이 합반 수업을 하면 30명정도 여학생들을 바라보는 사춘기 우리 남학생들의 마음이 조금은 설레이기도 했다 함중 운동장에서 선생님들의 배구시합 경기 모습,함양 상림운동장 축구경기 관람,6.25 전쟁 중이라 군용 추럭이 줄지어 함양 읍내로 들어오던 모습,내가 3년 개근하며 살던 인당 옆 걸문이<거면>에서 일요일날 선부재 산에 아우 오동해와 형제가 나무하러 다닌 이야기,호주 전투기가 하루 2번씩 읍내 폭격을 오는데도 나와 아우는 냇물에 물고기만 잡던 이야기,함양 장날 이야기 등 나의 중3 일기에 함양 고향 이야기가 다 담겨 있었다 서울 강문고교<현 용문고교> 수석 합격으로 고교진학을 서울로 하면서 고교생활부터 서울의 생활기록이 내 일기에 담겼다 일기장도 중학생 인기잡지 학원사가 발행하는 <학원일기>.책에 나의 생활을 기록했다 일기장 공간이 한정되어 쓸 말을 다 못 쓰는 한계도 있었다 고3때까지 동대문 창신동 고갯길을 오르내리며 등교 하교때 만나게 되던 미지의 한성여고생 하나가 괜히 맘에 들어 짝사랑만 하던 고교생 나의 사춘기 정서가 고3일기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 그런데 이일을 어쩌랴! 그처럼 알뜰이 꼬박꼬박 썼던 중3,고1,고2 일기책이 그만 1956년 9월 27일 용산 숙부댁 화재로 다 잿가루가 되고 말았다 내겐 너무 아깝고 슬픈 충격이었다 대입준비 참고서, 애독하던 학원잡지, 입던 옷 모두가 숙부댁 이웃 제재소 화재로 숙부댁도 다 타고 용산 쌀 창고까지 다 타는 큰 화재를 당해 나와 숙부댁과 여러집이 큰 피해를 입었다 화재 무렵 책가방에 고3일기책은 가지고 부산집에 내려가 있었기에 고3일기는 다행히 화재를 면했다 연세대 국문과로 진학하여 4.19를 겪으며 고3때 가을부터 출석했던 아현동 산7번지 산칠교회에서 주일학교 어린이지도를 열심히 했다 교회에서 만난 여자청년 안송희와 조용히 연애하며 당인리 발전소 근처 한강 둑에 자주 가서 밀어를 속삭이던 이야기가 나의 대학 일기에 담겼다 여러 교수 중에 우리 국어를 지키다가 함흥 감옥 옥살이를 하신 애국지사 외솔 최현배<1894-1970>,한결 김윤경<1894-1969> 두 스승을 만나 한글사랑 나라사랑을 대학 재학 중에 잘 배웠다 5.16 직후 군사정부 때 나는 해병대에 입대하여 훈련중에도 해병군사훈련 일기를 썼다 이순신<1545-1599>은 선조 25년<1592> 5월부터 선조31년<1598> 9월까지 충효사상과 그의 인간성이 담긴 난중일기를 남겼다 지금 국보76호로 아산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 백범 김구<1876-1949>는 백범일지를 남겨 그의 소원이 완전 자주통일임을 밝히고 있다
문인 이광수나 모윤숙도 일기를 남겼다 한때 민족주의자였으나 105인 사건 이후 친일로 변절한 윤치호<1865-1945>는 60년간의 일기를 남겨 역사적 사료 가치로 인정받고 있다 애국가를 작사한 도산 안창호<1878-1938> 독립운동가도 일기를 일부나마 남겼다 연세대 총장서리를 지낸 한결 김윤경 박사는 한평생 쓰신 그의 일기가 지금 연세중앙도서관에 보관 되어 있다 나치독일의 유태인 잔학상을 일기로 폭로한 15세 소녀 안네의 일기는 그가 옥사한 뒤 그의 아버지의 노력으로 안네의 일기가 출간되어 세계적 일기가 되었다 한때 우리 나라 대학 영문과 교재로 쓰기도 했다 스위스의 문학가 아미엘<1821-1881>은 1만 7쪽에 달하는 “아미엘의 일기”를 썼다 그는 일기가 기도와 명상이라 했다 고독을 이기고 마음의 위안과 치유를 얻기 원한다면 일기를 써 보라고 권유하고 있다 이렇듯 기쁜 일기 쓰기를 나는 지금 70년간 쓰고 있다 내 중학 일기에는 물론 근래 나의 일기에 자주 오른 중학 단짝 고향 친구 하원현이 2022년도 초에 작고해 마음이 참 서럽다 고교시절 장수영<포항공대 2대 총장> 이증모<한양공고 교사>와 함께 절친하여 삼각형 친구로 별명까지 들었는데 1990년도 여름 50대에 이증모 친구가 별세하여 삼각형 친구 한 모서리가 무너졌다 그러나 마음의 삼각형 친구의 우정은 지금도 펄펄 살아 있다 서상면 대남리 자택에서 몇 년전 찾아뵌 함중 박홍관 국어선생님도 제자 나를 보고 90대 연세에 “이 사람아 내가 자네보다 더 젊네”하시더니 2020년도 12월 30일 하늘나라로 가셔서 참 서럽고 아쉽기만하다 이런 나의 생활이 나의 일기,송골松骨일기에 다 기록되어 있다 중앙여고 대신고교 재직시에 일기쓰기 공부를 열심히 지도하여 학생들의 국어공부에 크게 도움이 되게했다 일기쓰기 기쁨에 빠져 날마다 일기 쓰는 문필 실력으로 나는 오늘의 시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학창일기 교단일기 문필일기 한글운동일기,신앙일기, 짚신일기 등이 나 송골의 70년의 일기 역사다 아흔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나는 기쁘게 나의 일기를 쓰고 있다 일기가 나의 생명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일기쓰기를 권장해마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