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 연탄가스
초등학교 5학년 때 엄마의 소원대로 점촌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방 2개가 있는 집에 전세로 들어갔다. 무엇보다 마당에 수도가 있어서 좋았다. 학교도 가깝고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많았다. 왁사골의 산과 들 친구들이 그리웠지만 엄마가 매일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아했다. 우리집은 엄마만 좋으면 다 좋은 거였다. 이사하고 금방 여름방학이 되었다. 아버지와 영순강에 가는 날이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다슬기를 한 주전자 잡아 와서는 해캄을 해 삶았다. 엄마는 친구집에 가고 아버지와 마주앉아 라디오를 들으며 다슬기를 깠다. 하루 종일 바늘로 다슬기를 까는 것은 힘들지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다 보면 다 까졌다.
평화로운 여름과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그 집은 연탄으로 난방을 했기에 연탄불을 시간 맞춰 가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제 때 불을 갈지 못해 연탄불이 꺼지기라도 하면 번개탄을 사서 불을 살려야 했다. 그럴 때마다 야단을 맞았기에 연탄불 가는 것에 늘 신경을 써야했다. 왁사골에서는 아궁이가 있어 군불을 때면 나오는 숯불에 된장을 끓이거나 했지만 이 집에서는 연탄불에서 다 해야 했다. 연탄불로 난방은 물론이고 밥을 하고 생선을 굽고, 물도 끓였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에는 연탄불뚜껑 위에 찜통에 물을 부어 올려 놓았다. 그렇게 데운 물로 세수도 하고 설거지도 했다. 손님이 온다든지 해서 여러 가지 음식을 할 때는 석유곤로를 사용했다.
어느 날 외할머니와 큰외삼촌이 함께 다니러 왔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엄마와 이모를 두고 재가를 했다고 싫어했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외할머니는 20대 초반이었기에 집안의 제일 큰 어른인 할아버지가 외할머니를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나 엄마는 인정하지 않았다. 자식 버리고 시집 간 여자라고 틈만 나면 외할머니를 욕했다. 외할머니는 재가해서 외삼촌 둘과 이모 이렇게 3남매를 낳았다. 나는 외삼촌과 이모 다 좋아했다. 외할머니는 올 때마다 농사지은 잡곡이며 과일과 채소 등을 한 보따리 이고, 외삼촌 양손에도 들려서 왔다. 그렇게 외할머니가 왔다 가면 집에 곶감, 홍시, 대추, 밤, 고구마 등 먹을 게 많아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겨울이라 큰방에서 외할머니와 외삼촌까지 다섯 명이 다 같이 잠을 잤다. 나는 연탄불 때문에 벽 쪽에 붙어서 잠을 잤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꿈을 꾸다 잠에서 깼다. 연탄불을 갈아야 한다는 생각에 부엌으로 나갔다.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웠다. 벌겋게 단 연탄불뚜껑을 열다가 쓰러져 의식을 잃었다. 쓰러지면서 연탄불뚜껑에 손바닥이 닿고 뚜껑에 연결된 철사가 얼굴에 닿았지만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엄마는 우당탕 소리가 내가 실수로 그릇을 깨고 웃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다시 잠을 청하려다 너무나 조용한 느낌이 이상해서 문을 열었다고 한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부엌 천장에 떠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있었다. 이상했다. 온 가족이 다 내 몸을 흔들고 어쩔 주 몰라 했다. 아버지가 부엌문을 열었다. 외할머니가 엄마에게 뭐라고 손짓을 했다. 등 뒤에는 커다란 터널이 있고, 그곳에서는 나를 끌어당기는 강렬한 바람이 느껴졌다. 순간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 애를 썼다. 나는 부엌 바닥에서 흔들리고 있는 나를 보며 ‘저게 나잖아 나는 저기 있어야 해’ 하는 찰나였다. 갑자기 나를 부르는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고, 엄마가 입에 떠 넣어주는 동치미의 차가움이 느껴졌다.
아버지는 나를 마당 수돗가에 안아다 놓았다.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하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구토가 나고 온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한참 토하고 나니 한겨울이라 온몸이 달달 떨렸다. 내가 신음을 하자. 온 가족이 “정신이 좀 느나?”하고 동시에 물었다. 내가 고개를 끄득이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손바닥과 얼굴이 쓰라렸다. 손바닥에 얼굴에 덴 물집이 잡혔다. 그때 덴 자국이 지금까지도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연탄가스로 체험만 그날의 유체이탈이 나의 삶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라 영혼이 건너가는 다른 세상을 믿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세상에서의 행복을 위해서도 선행을 베풀며 살려고 노력하게 되었다.
그날의 후유증인지 연탄을 갈 때마다 내 몸이 먼저 반응을 했다. 속이 울렁거리고 숨이 차고 머리가 아프고 어지러웠다. 고개를 돌리고 숨을 참고 갈아도 두통과 어지러운 몸의 고통이 따랐다. 이 일로 연탄가스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어 지금까지도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연탄불 냄새다. 그리고도 몇 번을 더 연탄가스에 두통과 구토를 느끼게 되자 엄마는 사람 죽겠다며 이사를 서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