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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박사님
조우석
노란 햇빛이 거실 마룻바닥을 흥건히 적시고 있습니다. 재봉틀이 돌아가는 소리가 축축한 공기를 울립니다. 짧은 복도를 지나 거실로 나가면 당신이 있습니다. 빨간 돋보기 안경을 쓰고, 파란 옷감을 팽팽히 잡아당겨 박음질을 하고 있는 당신이. 나는 배가 고프다는 말을 하러 당신에게 다가갑니다. 내 발소리는 재봉틀이 내는 소리에 묻혀버립니다. 적어도 당신에게는 배고파, 라는 나의 말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왔을 겁니다. 당신이 화들짝 놀랍니다. 자로 잰 듯이 깔끔하게 박음질되어 있던 바늘 땀이 초크 선에서 빗나갑니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된 마음으로 밥을 달라 합니다.
올 거면 발소리를 좀 내면서 오던가. 엄마 놀래켜서 죽일 일 있냐?
당신이 투덜거리며 말합니다. 나는, 겨우 밥을 달라 말하는 것에 누군가를 죽이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잠시나마 재고합니다. 당신은 엇나가버린 바늘 땀을 만지작거리다가 일어섭니다. 바늘 땀은 옷감에 그어진 분홍빛 초크 자국을 따라 군더더기 없이 늘어져 있지만, 나의 말 한 마디 때문에 끝이 비뚤어져 있습니다. 나 때문에 비뚤어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어쩐지 서글퍼집니다. 바늘 땀의 모습은 바늘 땀을 새겨넣은 당신과 여러모로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식탁 위로 오꼬노미야끼 한 접시가 올라옵니다. 가츠오부시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입니다. 당신은 무심한 듯 수저를 챙겨준 뒤 다시 재봉틀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엇나가버린 바늘 땀을 조심스럽게 훌어갑니다. 나는, 당신에게 잘못 박힌 바늘 땀도 저렇게 간단히 풀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초크 자국을 벗어나버린 당신의 바늘 땀은 어느덧 9년 째 방치되어 있습니다. 그 위에 시간이 쌓인만큼 단단히 굳어져 풀어낼 방법이 없어 보입니다.
당신은 연필꽂이에서 펜 초크를 하나 꺼내듭니다. 내 눈은 연필 꽂이로 향합니다. 유약을 바르고 구워낸 퍼런 도자기. 밑동에는 검은 글씨가 적혀 있습니다. 모 대학의 이름과, 졸업을 축하한다는 상투적인 내용입니다. 마지막에는 당신의 이름이 커다랗게 적혀 있습니다. 유독 맨 뒤에 써진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옵니다. 박사. 나는 그 단어를 혀끝으로 조심스럽게 굴리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낡은 재봉틀 앞에 앉아 홀로 옷을 만드는 당신이, 한때는 존경받는 박사였다는 사실은 기시감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당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을 말해볼까 합니다. 정확히 16년 전, 내가 세 살이었을 무렵입니다. 세 살 때의 일을 어떻게 기억하냐고 당신이 물으신다면, 나 역시 알 수는 없습니다. 그만큼 인상적이고 강렬했던 기억이기 때문 아닐까, 라는 추상적인 답변을 내놓을 뿐입니다. 나는 늦봄의 햇살을 쬐며 홀로 기차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중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작은 방에서 코를 골며 주무셨습니다. 세 살이었던 나는 코고는 소리에 맞춰 움직이는 할아버지의 배가 너무나 푸근해 보였습니다. 그 위에 올라타고 싶었지만, 할머니가 자꾸만 나를 끌어내셔서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거실로 데려오신 뒤 주방에서 점심을 준비하셨습니다. 지금 병상에 누워 움직이지 못하는 할머니와는 달리, 흰 머리가 한 올도 없고 허리가 곧게 세워져 있습니다. 당시의 내게 할머니는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기야 이 생각도 이제 와서 돌이켜봤을 때 드는 생각입니다. 당시의 나는 ‘엄마’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엄마’가 무엇인지 알 길도 없었고요. 젊었던 아버지는 아침 일찍 어디론가 나가서 보이지 않았습니다. 눈을 비비며 아버지를 찾던 내게, 할머니는 밝게 웃으시며 대답해주셨습니다.
아빠는, 친구 만나러 갔어. 친구.
친구. 그 단어도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습니다. ‘엄마’라는 단어와는 달리 그 뜻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습니다. 매일 밤 잠에 들기 전, 할머니가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실 때 간간이 들을 수 있던 단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내게 ‘엄마’가 나오는 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없었습니다. 왜일까요. 내가 안쓰러웠던 탓이었을까요.
느끼한 부침개 냄새에 젖어들어가며, 기차 놀이도 싫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철로를 따라가던 파란 꼬마 기차를 넘어뜨리고 할머니에게 다가가 연을 날리자며 졸랐습니다. 할머니는 내가 잡아당기는 바짓춤을 움켜잡으시며 어쩔 줄 몰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옷장 위에 올려져 있던 연을 꺼내실 수도 없을뿐더러, 꺼낸다 하더라도 할머니는 달리실 수 없었기 때문에 연을 날릴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현관문 쪽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내게는 마냥 무거웠던 현관문이 열리며 날카로운 햇빛이 눈에 박혔습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할머니의 바짓단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떼고 현관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지만, 나는 얼마 못 가서 우뚝 멈춰섰습니다. 아버지 뒤에 서 있던 한 여자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그때, 나는 난생 처음으로 이질감이란 감정을 겪었을 겁니다. 처음 보는 여자가 활짝 웃으며 내게 다가왔고, 나는 무서워서 검지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았습니다. 불안한 마음이 들 때면 나는 손가락을 빠는 버릇이 있었고, 지금도 간간이 그렇습니다. 갓난 아기가 모유를 찾듯이, 나는 손가락을 빨며 엉성하게 뒷걸음질치다가 바닥에 주저앉아버립니다. 자꾸만 다가오는 여자 때문에, 나는 확 울어버렸습니다. 축축한 기저귀만큼 내 얼굴도 젖어갔습니다. 할머니는 깔깔 웃으시더니, 나와 눈높이를 맞추시곤 그 여자를 가리키며 말씀하셨습니다.
네 엄마야. 엄, 마.
엄, 마. 적어도 당시의 나는 처음 듣는 단어였습니다. 뭐, 태어나고 나서 돌잔치를 할 때까지는 당신과 함께 지내기야 했었습니다만 당시의 나도, 지금의 나도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라는 사람은 꿇어앉아 내게 두 팔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엄마가 무엇인지 몰랐던 저는 쉽사리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가 어서 가보라고 재촉했지만, 엄마라는 사람은 제겐 외지인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마냥 손가락을 빨고 있었습니다. 그걸 본 여자는 자신의 은색 캐리어를 열더니, 일본에서 사온 젤리와 빨간 울트라맨 피규어를 꺼내어 내게 건넸습니다. 여자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신발장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나를 바라보고 기다릴 뿐이었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빨며 일어나 조심스럽게 여자에게 다가갔습니다. 나는 여자에게서 젤리와 피규어를 받았고, 여자는 내게서 나를 받았습니다. 여자는 나를 꼭 끌어안은 채 한참을 그러고 있었습니다. 나는 여자가 뜯어 준 포도맛 젤리를 입에 굴리고, 울트라맨 피규어를 눈앞에서 흔들어봤습니다. 마냥 멋있어 보이던 피규어와 달짝지근한 포도맛 젤리, 그리고 여자에게서 풍기는 살냄새. 지금까지도 생생히 기억 나는.
그것이 바로 당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입니다.
당신이 해준 오꼬노미야끼를 먹다가, 그 기억이 되살아나 나는 책장 앞으로 다가갑니다. 그곳에서 가장 오래된 사진첩을 꺼냅니다. 사진첩과 함께 덩어리진 먼지가 딸려나옵니다. 청소할 것도 아니면서 왜 꺼내는 거야. 라고 당신이 툴툴거립니다. 나는 못 들은 척 사진첩을 열어봅니다. 20년 정도의 세월을 머금은 자신들이 붙어 있습니다. 많은 세월을 품을수록 옅어진 색태. 사진들은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또 보지 못했던 순간들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양수라는 바닷속에서 헤엄치고 있을 무렵, 당신이 웃으며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2002년 월드컵 16강 경기. 사진 밑에는 그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당신은 웃으며 당신의 배를 쓰다듬었습니다. 사진첩이 넘어갑니다. 마냥 어렸던 내가 당신이 만들어 준 옷을 입고, 당신에게 안겨 있는 모습들이 스쳐지나갑니다. 간간이 당신만 나온 사진도 눈에 띕니다. 그곳에서 당신은 꽃다발을 안고, 검은 박사학위복을 입은 채 웃고 있습니다. 그때 나는 바다 건너에서 무얼 하고 있었을까요. 당신이 나를 두고 일본에서 보낸 시간만큼, 일본에서 배워온 것들을 내게 입혀주고 먹여주었습니다. 지금 식탁에 올려져 있는 오꼬노미야끼도, 재봉틀에 올려진 파란 옷감도 다 그런 것들입니다.
똑똑 박사님에게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당신을 만나기 전, 내가 습관처럼 하던 말버릇입니다. 나는 내다 정말 똑똑한 박사님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나에게, 진짜 박사님이 바다를 건너온 것입니다. 박사님, 패션과 박사님. 그것은 당신을 부르는 또다른 호칭입니다. 지금도 농담삼아 부르는.
재봉틀 소리가 멎어듭니다. 당신은 완성된 파란 원피스를 들어 여기저기 살펴보더니, 나를 부릅니다. 그리고는 내게 당신의 핸드폰을 건넵니다. 당신은 철사로 만들어진 옷걸이에 원피스를 걸고, 창문 옆 피아노에 걸칩니다. 3년 째 열리지 않는 피아노는 나에겐 서랍이 되었고, 당신에게는 포토존이 되었습니다. 나는 카메라를 열어 파란 원피스를 찍습니다. 당신은 내가 찍은 사진을 보더니, 마음에 안 들었는지 창가에 암막 커튼을 칩니다. 햇빛이 반쯤 사라집니다. 노란 햇빛은 암막 커튼을 타고 뚝뚝 흘러내려 창가에 고입니다. 당신은 거실의 조명을 킨 뒤, 다시 찍어보라고 말합니다. 나는 투덜거리며 다시 사진을 찍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마음에 든다며 핸드폰을 되가져가고, 원피스를 안방의 장롱 속에 집어넣습니다. 곧 있으면 내가 찍은 사진은 당신의 SNS에 올라가겠지요. 기껏해야 300명 정도가 보게 될. 아마도, 당신은 여전히 예술가로서의 고집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에 바늘 땀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이고, 사진의 채도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프랑스의 오트꾸튀르 패션쇼에 참석해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겠지요.
현관문이 열리고, 동생이 집안으로 들어옵니다. 이제 막 사춘기가 시작된 동생에게서 퀴퀴한 땀냄새가 풍깁니다. 동생이 다섯 살일 때, 폐렴을 앓아 중환자실가지 들어갔던 것이 문득 떠오릅니다. 지금 이 땀냄새를 풍기는 것만으로도, 나는 다행이라 여겨야 했습니다.
너, 농구하다 왔니?
당신이 묻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미쳤어, 얘가. 요즘 미세먼지 때문에 난리인데, 엄마가 농구하지 말랬지!
동생은 당신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구레나룻에 맺힌 땀을 닦습니다. 당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동생에게 천식흡입제를 건넵니다. 동생은 그것을 입에 물고, 가스가 들어 있는 캔을 꾹꾹 누릅니다. 하지만 바람이 힘없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동생은 몇 번 더 눌러보더니, 약이 다 떨어졌다며 식탁 위에 올려놓습니다.
큰일이네. 내일까지는 병원 갈 시간이 없는데...
당신이 말끝을 흐립니다. 그리고는 동생의 등에 대고 당분간 농구를 하지 말라 소리칩니다. 동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방으로 들어갑니다. 반항이 시작되려는 걸까요.
요즘 당신은, 고등학교 3학년인 저만큼이나 바빠 보입니다. 당신은 꾸준히 작업을 해서 SNS에 올려야 했고, 이모와 함께 차릴 공방도 준비해야 합니다. 요즘따라 당신에게 작업에 관한 컨택이 자주 오는 듯합니다. 그럴 때마다 당신은 손뼉을 치며 기뻐하고, 곧바로 작업에 몰두합니다. 방금 당신이 만든 파란 원피스도 어느 대학생의 주문을 받아 만든 것이지요. 그런 와중에 동생의 천식흡입제를 처방받을 시간은 없어 보입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나도, 당신도,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입니다.
암막 커튼을 걷어도 여전히 어두운 시간, 당신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공방을 차릴 자리가 생겨서, 오늘 이모와 함께 부동산에 다녀왔을 텐데. 이상하게 당신의 얼굴에 무거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나의 말을, 당신은 무시하고 식탁에 털썩 주저앉습니다. 당신의 눈화장이 번져 있습니다. 곧이어 마스카라가 스며든 검은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당신이 눈물을 흘릴 때면 꼭 맥주를 찾는다는 사실이 떠오릅니다. 나는 냉장고 문을 열어 노란 캔맥주 두 캔을 꺼내 당신의 팔 앞에 내려놓습니다. 당신은 속삭이듯이 고맙다고 말하며 맥주를 들이킵니다. 당신의 목울대가 위태롭게 흔들립니다.
얼마 전에, 엄마가 팔았던 스카프 기억나?
기억하죠, 당연히. 스카프 천에 색색의 양모를 찢어 펠팅 작업을 했던. 당신은 말버릇처럼 펠트에는 자신이 없다 했지만, 막상 꽤나 비싼 가격에 팔리자 시골 소녀처럼 펄쩍 뛰면서 좋아했었잖아요. 그 돈으로 제가 그토록 먹고 싶던 초밥 세트도 사주셨고, 나는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릴 뿐,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합니다. 당신은 씁쓸하게 웃으며 맥주를 들이킵니다.
글쎄, 그 스카프를 사간 아줌마가 환불해달라고 메세지를 보낸 거야. 양모가 전부 떨어져버렸대. 그래서 물어봤지, 세탁기로 세탁했냐고. 난 분명히 손세탁을 조심스럽게 하라 했는데. 당연히 환불 못해준다고 했지. 그러니까 이 아줌마가 여기저기다가 내 욕을 하고 다니는 거야. 학력도, 실력도 없는 년이 돈만 밝힌다고.
당신은 눈물을 흘려보내며 말합니다. 검은 눈물, 그것을 보면 당신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눈물이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검은 눈물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뻔히 보이지 않습니까.
엄마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됐을까.
당신이 입술을 달싹이며 중얼거립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합니다. 당신에 비하면 패션에 문외한인 사람들에게, 온갖 핀잔과 근거 없는 비난을 들으며 옷을 판다는 것을, 나는 위로해줄 수 없습니다. 때로 침묵은 좋은 대답이 되어주었기에, 나는 잠자코 앉아 당신을 바라봅니다. 당신은 두 번째 맥주캔을 비운 뒤 안방으로 들어갑니다. 안방에 가득한 어둠이 당신의 어깨 위로 내려앉습니다. 마치 당신의 눈물처럼, 하릴없이.
무더은 여름입니다. 노란 햇살은 열기를 품고 집안으로 기어들어옵니다. 당신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오늘은 당신이 십 년간 바라오던 공방을 차리기 위해 계약을 하는 날입니다. 분주했던 당신과는 달리, 집안은 차분합니다. 아버지는 밀린 드라마를 보며 아침밥을 먹고, 나는 방에서 조용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동생의 목소리가 방문을 넘어 들려옵니다.
나 농구하러 갔다올게.
아버지는 동생이 언제까지 돌아올 것인지 물어보고는,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을 합니다. 이어서 현관문이 벌컥 열리고, 묵직하게 닫힙니다. 오늘 미세먼지 농도가 어떻더라. 나는 잠시 생각하지만 이내 관둡니다. 괜찮겠지, 괜찮을 거야. 그렇게 짧게나마 생각한 뒤 다시 공부에 몰두합니다. 문득, 아버지는 동생의 천식흡입기가 떨어진 지 이틀이나 되었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그럼에도 나는, 괜찮을 거라며 잡념을 떨쳐버립니다. 그리고는 CD 드라이브의 작동 원리에 관한 글을 찬찬히 읽어내려갑니다.
아버지가 출근하신 지 얼마 안되서,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농구공이 바닥에 힘없이 떨궈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나는 동생에게 몸은 어떤 지 물어보려 동생의 방문을 엽니다. 동생은 침대에 엎드려 누워 있습니다. 농구공이 침대 옆에서 굴러다닙니다.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내 고막을 긁습니다. 나는 괜찮냐고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습니다. 나는 동생의 등에 귀를 가까이 댑니다. 동생이 숨을 들이쉬고 내뱉을 때마다 거친 숨소리가 울립니다. 다 죽어가는 야생동물이나 낼 법한, 그릉거리는 숨소리. 동생이 숨을 헐떡입니다. 나는 다급하게 괜찮은 거냐고 묻지만, 동생은 대답할 힘조차 없는 걸까요.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집어듭니다. 그리고는 멍청하게도, 119에 전화를 해야 할지 당신에게 전화를 해야 할지 고민합니다. 그렇게 의미없는 시간을 흘려보내고, 동생의 숨소리가 한층 탁해져서야 나는 119에 전화를 겁니다 핸드폰 너머에 있는 상대방이 건조한 목소리로 동생의 상태를 묻습니다. 아래 입술이 바들바들 떨립니다. 나는 같은 말만 반복할 뿐입니다. 천식이에요, 숨을 못 쉬고 있어요. 상대방이 천식흡입제가 없냐고 묻자, 나는 뒤늦게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전화가 끊긴 후, 나는 구급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동생 곁에 어정쩡하게 서 있었습니다. 꺼진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당신은 뒤늦게 병원으로 찾아왔습니다. 당신은 동생에게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누런 호스들이 동생의 몸을 칭칭 휘감았고, 작은 산소마스크에 입김이 서리다 사라지길 반복합니다. 오늘 아침, 정갈하게 빗었던 당신의 머리는 산발되어 있습니다. 얼굴에 땀과 화장이 섞여 허연 물방울이 맺혀 있습니다. 아버지는 당신을 보자마자 대뜸 소리칩니다.
엄마라는 사람이 어떻게 애 천식흡입제 하나를 못 사줘, 어? 네가 그렇게 바빠? 애가 쓰러지는데도 신경 못 쓸만큼?
당신은 아버지의 목소리에 짓눌려 주저앉습니다. 또다시, 당신의 뺨 위로 검은 눈물이 흘러내립니다. 아버지는 묵직한 한숨을 당신의 발끝에 떨구고 응급실을 나섭니다. 나는 이번에도 별다른 말을 해주지 못합니다. 차라리 맥주라도 있다면 좀 나을 텐데. 나는 속으로 중얼거립니다.
공방, 접자.
보호자 침대에 누워 뒤척이고 있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잠은 확 달아나버리고, 나의 온 신경이 귀로 향합니다.
애를 볼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지. 용규를 시킬 수는 없잖아. 게다가 입원비만 해도 얼만데, 공방을 차릴 돈을 여기다 써야지. 안 그래?
아버지가 낮은 목소리로 말합니다. 나는 속으로 그러지 말라고, 당신이 공방을 차릴 수 있게 해 달라고, 속으로 빕니다. 당신은 대답하지 않습니다. 묽은 어둠 속에서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진동합니다. 지금 이 상황이 너무나 익숙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손으로 당신의 것들을 부숴버린 때가 떠오릅니다. 모자를 떠올리지 말라 하면 모자가 떠오르는 것처럼, 필연적으로.
그러니까, 9년 전이었죠. 당신은 수도권의 한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를 나왔다는 사실만으로 거만을 떨었던 키 큰 여자와 함께, 그 대학의 패션학과를 만들고 있었죠. 9년 전은 여러모로 당신에게 힘든 한 해였을 겁니다. 첫 번째, 당신이 부친상을 겪었던 때였죠. 부친상을 치룬 뒤 몇주 후, 당신에게 또 다른 악재가 겹쳐집니다. 지금쯤 방에서 게임을 하고 있을 동생에게 폐렴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동생이 응급실로 갔던 날이 선명히 기억납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주말을 시작하는 아침이었습니다. 잠에 들 때만 해도 안방에 전부 모여 있던 가족들이, 눈을 뜨자 모두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이질적인 적막에 짓눌린 채 깨어났습니다. 집안에는 옅은 소독약 냄새가 떠다녔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 선풍기가 있었습니다. 내 시야 속에서 움직이는 것은 선풍기뿐이었습니다. 엄마를 찾으며 방을 나선 열 살짜리 꼬마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준 것은 다 식은 오꼬노미야끼와 쪽지 한 장이었습니다.
용규야, 용진이가 너무 아파서 아빠랑 같이 응급실로 갔어. 오꼬노미야끼 먹고 있으면 네째 이모가 용규 봐주시러 올 거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엄마 금방 갈게.
쪽지에는 급하게 휘갈겨 써진 검은 글씨가 있었습니다. 그것만으론 처음 겪는 집안의 적막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다 식은 오꼬노미야끼는 잘 찢어지지 않았고, 가츠오부시가 먼지처럼 흩날렸습니다. 난생 처음 집안에 버려졌던 나는, 당신이 만들다 만 담요를 뒤집어쓴 채 울었습니다. 나 버리지 말아요. 무서워요. 당신이 듣지 못할 말들을 울먹이며 내뱉었습니다.
그날 오후, 나는 네째 이모와 함께 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눈가가 퉁퉁 부어 있던 당신이 나를 꼭 안아주었습니다.아버지는 회사 일 때문에 면회를 하지 못하고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당신의 품은 편안했지만, 당신의 등 뒤에 써진 글자가 자꾸만 마음에 걸렸습니다. 중환자실. 그 밑에 있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동그랗게 난 창문은 흐릿했습니다. 문 앞을 둘러싼 사람들은 저마다 몸 어딘가를 떠며 면회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중환자실. 열 살짜리 꼬마도, 그 단어가 어쩐지 무거워 보였습니다.
정해진 면회시간이 다가왔고, 나는 당신과 함께 중환자실로 들어갔습니다. 문을 열자마자, 축축한 곰팡이 냄새가 풍겨왔습니다. 냄새 때문인지, 중환자실은 축 처진 듯했습니다. 젖은 곰팡이 냄개, 그것이 죽음의 냄새였을까요. 70년 묵은 폐가 뱉어내는 날숨들은 그런 냄새를 풍기는 걸까요. 나는 손가락을 빨며 당신의 손에 이끌려 중환자실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동생의 병상 앞에 섰습니다. 동생은 죽어가는 노인들 틈에 섞여서 쌔근쌔근 숨을 이어갔습니다. 산소마스크에 규칙적으로 김이 서렸다 사라지길 반복했습니다. 수많은 호스가 동생의 몸을 넝쿨처럼 휘감았고, 수많은 바늘 때문에 동생의 몸 곳곳에 퍼런 멍이 들어 있었습니다. 더이상 링거를 꽂을 자리가 없어서 링거 바늘은 동생의 목에 꽂혀 있었습니다. 이미 링거가 파고들었던 손등과 팔뚝에는 검붉은 피멍이 낙인처럼 찍혀 있었고요. 그때, 당신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물기 어린 목소리를 전화를 받았습니다. 중후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터져나왔고, 당신은 하얀 벽에 대고 고개를 연신 숙이며 죄송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모와 외할머니는, 애써 당신을 모른체하며 동생의 이마를 쓰다듬었습니다.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던 다섯 살짜리 아기의 이마. 동생의 발은 병상의 끝과 한참 떨어져 있었습니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 틈에 누워 있는 동생. 그것만큼 이질적이라 생각되는 것은 없습니다. 당신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며 전화를 마쳤습니다.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날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직접 부쉈습니다. 더이상 아침마다 출근하지도 않았고, 재봉틀이 붙박이장에 처박혔습니다. 겨우 열 살이었던 나도 느낄 수 있을 만큼, 순식간에 부서져 내렸습니다.
다행히도 동생은 며칠 만에 퇴원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우리 가족의 일상도 돌아왔습니다. 다만, 당신의 꿈만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지금 제 곁에 앉아 있습니다. 피부는 한층 노래졌고, 머릿결은 푸석푸석해진 채. 아무도 당신이 버린 것들을 돌아봐주지 않습니다. 당신이 만들었던 수도권 대학의 패션학과는 당신을 기억하지 않고, 당신이 꿈을 버리면서까지 곁을 지켰던 자식은 다시 농구를 하러 다니느라 바쁩니다.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것들을, 당신은 힘겹게 내려놓았던 걸까요. 이제 당신은 돋보기 안경을 고쳐쓰고 낡은 재봉틀 앞에 앉습니다. 그리고 당신에 비하면 패션을 한참이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갖 핀잔과 근거없는 평가를 들으며 옷을 팝니다. 결국, 제자리입니다. 당신이 바라던 교수직, 파리의 오트꾸튀르 패션쇼, 그리고 공방을 거쳐 다시 제자리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꿈을 거쳐봤지만, 그 문턱에 발 한 쪽을 살포시 올려놓았을 뿐입니다.
당신의 핸드폰으로 메세지 하나가 도착합니다. 나는 곁눈질로 메세지의 내용을 읽어봅니다. 회색 마이 자켓을 주문한다는 메세지입니다. 평소의 당신이라면 활짝 웃으며 내게 자랑했을 테지만, 당신의 표정은 조금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어디론가 전화를 겁니다. 당신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섞어가며 원단이 있는지 물어봅니다. 당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메모를 해나갑니다.
엄마 동대문 갔다 올게, 라면 끓여먹고 있어.
당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합니다. 동대문, 이라는 단어를 듣자 당신이 정말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것이 새삼 느껴집니다. 낡은 재봉틀 앞이 당신의 제자리가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숙연해집니다. 한때는 최고였던 유학파 박사님이, 이제는 동대문 시장을 돌아다니며 조금 더 싸고 조금 더 좋은 원단을 찾아다닙니다. 자식된 마음으로, 마냥 서글퍼집니다. 이럴 거면 나 버리지 말지. 자식된 마음에 그런 불평도 합니다. 어린 나를 두고 따온 당신의 박사학위가, 이제는 누구도 알아봐주지 않는 종이쪼가리가 되어버렸으니까요.
가끔, 당신과 함께 내 옷을 사러 가면 나는 아무말고 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옷을 가리키면 당신은 그 옷을 만져보고는 직원조차 알아들을 수 없는 용어들을 써 가며 옷에 대해 물어봅니다. 직원은 멍한 표정으로 당신의 말을 듣고는, 조금 쉽게 말해달라며 무안한 웃음을 짓곤 했습니다. 그렇게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은 뒤, 당신은 내 손목을 붙잡고 가게를 빠져나갔습니다. 그런 원단은 쓰는 게 아니다, 라며. 그럴 때면 당신이 잠시나마 박사라고 느껴졌습니다.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박사님.
당신이 집을 떠나자, 집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습니다. 나는 소파에 드러누워 별 생각 없이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늬조차 없는 천장은, 온갖 생각을 떠올리기에도 적합했고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데에도 적합했습니다. 나는 오른손을 이마에 걸치고 한참을 누워 있었습니다. 문득, 당신이 만들던 것이 떠올라 낡은 재봉틀로 다가갑니다. 재봉틀 옆에는 곤색 반바지가 놓여 있습니다. 여름이 시작되려던 때 즈음, 나는 반바지 하나만 사달라고 당신에게 졸랐습니다. 그런 내게 당신은 반바지를 만들어주겠다고 대답했었습니다. 나는, 이상하게도 브랜드가 있는 옷에 집착했습니다. 그럴 거면 됐다고, 필요없다고 말했던 나 자신을 짧게나마 자책합니다. 그리고는 당신이 만든 반바지를 집어듭니다. 솔직히 말해, 생각보다 마음에 들었습니다. 근처 쇼핑몰에서 파는 반바지와 견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당신이 만든 반바지로 갈아입습니다. 좋은 원단인 것 같습니다. 움직이는데 불편하지고 않고, 그렇다고 핏이 망가지지도 않습니다. 나는 그 반바지를 입은 채 독서실로 갈 준비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대답이었습니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해왔던 당신의 마음에게, 이렇게나마 대답하고자 합니다. 집을 나서기 전, 재봉틀 옆에 놓인 당신의 돋보기 안경을 바라봅니다. 노란 햇살이 안경알을 지나가며 일곱 가지 색으로 쪼개집니다. 어쩐지, 그 무지개 밑에 당신의 눈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당신의 눈이 반짝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지금쯤 좌석버스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을 당신을 떠올리며 현관을 나섭니다.
나는 자식된 마음으로 당신의 이야기를 두서없이 써내려갑니다. 당신에게는 보여줄 수 없는, 당신의 이야기.
나의 똑똑 박사님에게.
[ 당선소감 ]
미숙하게나마 이야기를 짓는 사람으로서,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지 고민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좋은 이야기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십대의 끝자락에 서 있는 소년이 답하기엔 너무나도 어려운 질문이었습니다. 저의 생각이 정답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저는 당당하게 답을 써보고자 했습니다. 나를 위한 이야기. 나에게 필요한 이야기. 그것이, 좋은 이야기라고 줄곧 여겨왔습니다.
그렇게 쓴, 저와 제 어머니를 위한 이야기가 수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출품한 작품은, 어찌보면 소설이라 할 수 없을만큼 사실적인 내용입니다. 평소 부모님에게 제 마음을 쉽사리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소설이 제게는 꼭 필요했습니다. 어머니에게 보여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써내려갔던 소설을, 이제는 조금 당당하게 바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족한 소설을 좋게 봐주신 강원문인협회 관계자분들께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어머니에게 이 소설을 드릴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저는 행복합니다.
저와 함께 이 소설을 두고 고민해주신 배정원 선생님과 김남숙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감사 인사를 올려드려야 할 분들이 너무 많아, 이만 줄이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에게 소설을 접할 기회를 주신 부모님과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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