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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교무실에 온 그 여선생님 이야기
이재원(2021.2.7.일, 맑음)
우리 인간은 원래부터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유연비연(有然非然)의 한 형태다.
다음은 그에 대한 일면(一面)의 실제적인 이야기이다. 시기는 2011년 쌀쌀한 12월경. 일에 밀리어 퇴근도 못하고 4층 교무실에 혼자 남아 일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시각은 아마 저녁 8시경이다. 이리저리 밀린 일들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게 스스로 눈이 감겼다. 그리고 의자에 기댄 채로 잠이 들었다. 깊고도 아튼 잠이었다. 나는 종종 퇴근을 늦게 했다. 도덕교육이 나의 주임무다보니 늦게 남아 조용히 도덕 철학이나 사상관련 독서를 하기도 하지만, 주로 남은 일들을 조용한 교무실에서 홀로 마무리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집중도 잘 되고, 실수도 적다. 또 수업 도중에 바쁘게 일하기보단 여유가 있어 더 좋았다. 보통의 교사 분들은 수업하는 짬짬이 쉬는 시간에 일을 마무리하고 퇴근시각이 되면 가뿐하게 사라지지만, 난 그게 오히려 더 힘이 들었다. 그래서 4시30분 퇴근 시각보다 한 두 시간 더 학교에 있다가 귀가를 자주 했다. 홀로 교무실에 남아서 일을 보는 것도 습관이 되면 즐겁다. 교사에게 독서는 중요하다. 가령 '자유'를 전달할 적에 '자유에도 속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혹시 아는 사람? (책임?) 예, 그렇습니다. 교과서에도 자유 다음에 책임이 전제조건으로 나오는 이유와 연유입니다.' 이처럼 같은 낱말이라도 입으로만 하는 거와 머리로 하는 거와 가슴으로 하는 것에 학생들이 느끼는 강도(强度)는 숙연히 달라진다. 밀린 업무를 하든 교재용 독서를 하든, 조용한 교무실이 마치 나의 연구실 같다. 그때가 그 학교 4년차이다. 다음 학년도에는 다른 학교로 가야 한다.그런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늦다. 창문 밖이 상당히 깜깜했다. 잠깐의 꿈속에서도 그걸 느낀다. 사념(思念)에 잠긴다. 공립에 오기 전 사립에 오래 근무했다. 사립에서는 퇴근시각에 맞추어 제때 퇴근을 했다. 늦게 남아서 할 만한 일들이 없었다. 학교생활이 시끄러운 가운데서도 매일매일 즐거웠다. 두 학교에 걸쳐 통산 21년간 근무했는데, 사립에서는 교무실에 꼴 보기 싫은 녀석이 있더라도 같이 근무를 해야 한다. 그런데 공립학교는 근무기간이 정해져 있어 그런 녀석이 생겨도 다행히 알아서 척척 잘도 다른 학교로 가 주었다. 고마운 일이다.
한국인들의 비(非)매너는 국제적으로도 악명이 높다. 제법 예의가 있어보여도, 버릇없는 교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남녀노소불문이다. 교원대학교대학원 다닐 적에 지도교수는 누누이 말했다. ‘한국인과는 진리를 논하지 말라.’였다. 심지어 '성경도 같이 논하지 말라.'였다. 한국인들은 단체로 매국(賣國)도 한 적이 있는 본질적으로 비겁(卑怯)한 종족(種族)이라 하였다. 이 모두를 미국유학 시에 느낀 것이라 했다. 한국인들의 매너는 그 누구라도 법치국가 최하급이라 했다. 서구인들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등급이 낮다고 했다. 경험자가 뭔지 모르지만 원한에 맺혀 말하니 자주 들어도 내용도 모르겠고 할 말도 없었다. 사념으로 더 깊이 잠이 든 것 같다. 바로 그때 교무실 창가에 어떤 분이 깜깜한 가운데 홀로 흰 모습으로 나를 주시(注視)하면서 느낌상 몇 분 전부터 서 계셨다. 바로 1년 전에 사고로 돌아가신 여선생님이었다. 너무나 훌륭하신 분이었다. 미모에다가 격조가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높은 분이었다. 미술교사로서 학생들에게 인기도 상당했다. 그렇게 강하고 매력적인 몸매임에도 불구하고 안으로는 아픈 데가 많았다. 임신이 잘 안되고 수술도 이미 여러 번 했고 하혈도 몇 번 있었다. 하혈이야기는 앞전의 여(女)학교장이 다른 여교사들과 복도에서 하는 이야기를 내가 옆에서 듣고 알고 있는 정도이다. 임신 후 유산(流産)이야기도 들었다. 훌륭하신 분인데도 그런 슬픔이 있었다. 모두 옆에서 남들끼리 하는 이야기로 들은 내용이지만 사실이다. 바로 그분이 창가에서 홀로 지금 나를 보고, 주시(注視)하고 있는 것이다.
성함은 황○정이시다. 나는 희미한 꿈속에서 황○정, 그분을 아무 생각 없이 보고 있었다. 창가에 비친 그분의 모습, 단정하고도 경이로웠다. 나는 말했다. ‘아니 작년에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오셨습니까?’ ‘그냥요. 학교가 궁금해서 왔습니다.’ ‘그럼 들어오셔서 저랑 이야기하다가 가시죠.’ ‘아니에요. 바쁘기도 하고, 1층에서 보니 4층에 홀로 불이 켜져 있어 왔습니다.’ 창가의 어디선가 오는 전깃불에 희미하게 비친 그분의 모습이 더 경이로웠다. 나는 계속 돌아가신 분이 어떻게 이렇게 올 수가 있나? 나는 꿈속에서 그게 더 궁금했다. 그분은 나를 잠시 보다가 교무실에 들어 올 시간이 없다며, 이제 가 보겠다하면서 가려고 하였다. 나는 꿈속에서 하나뿐인 출입문을 열고 사라지는 그분의 뒷모습을 죽 봤다. 4층 교무실의 복도모서리를 돌아 조용히 뒷모습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보니 작년에도 내가 그분의 마지막 본교모습을 본 것이다. 장례식 날 마지막으로 그분의 영정이 장례차를 타고 본교의 교문 안까지 들어와서 잠깐 지체 후 가셨다. 불교신자로 여(女)스님들도 두 분 동승해서 같이 왔다. 두 분의 염불경속에서 교직원과 슬픔을 교문 안에서 나누고 애도 속에서 가셨다. 겨울방학 중이라 학생들에겐 아무도 알리지 않았다. 학부모도 안 보였다. 오직 몇 분의 교사들과 나만 있었다. 이상하게 남교사들이 전혀 안 보였다. 교감도 안 보였다. 하루 전에 어떤 남교사는 장례식장에서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도 하직인사를 못했다면서 내일은 올 생각이 없다고 했다. 용감하게 이야기를 해서 어이가 없었다. 장례 마지막 날 돌아가신 그분의 영정 차량이 몇 분 교사들의 애도 속에 교문 밖으로 빠져나가 멀리 북쪽으로 길을 몰아 미끄러져 빠르게 나아갔다. 그리고는 먼발치 모퉁이에서 영락공원 쪽의 길로 사라졌다. 슬프고도 슬픈 모습이다. 그런데 장의 차량이 교문 밖을 나서 큰길로 오르자마자 슬퍼한다는 교사들이 차가 아직 멀쩡히 시야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학교 안으로 바로 다 들어가 버렸다. 결국 나 혼자 그분의 영정차량이 길을 따라 사라지는 모습을 마지막까지 홀로 끝까지 본 셈이다. 이래서 교원대학원 그 지도교수님이 한국인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법치국가 최하급이라고 하셨나. 슬퍼하는 것인지 놀러 온 것인지 헷갈린다.
그날, 화장(火葬)하는 영락공원을 거쳐 부산추모공원으로 모셔졌다. 먼저 영락공원에 차를 몰고 갔다. 길을 잘 몰라 큰길로 돌아가는 통에 혼자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앞의 교장과 현재의 교장과 몇 분의 여교사님들이 먼저 와 있었다. 나 빼고는 모두 여교사님들이다. 화장하는 동안 그분들은 식사하려 식당에 갔다. 화장하는 모습 내내 유족들의 슬픔이 있었다. 동료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일엔 식사를 미루거나 우유 등으로 간편하게 들면 좋으려만, 참을 성 없게 밥을 먹는 일은 의례엔 맞지 않게 보인다. 그래도 유족과 달리 단체로 식사를 하려 갔다. 여동생 2분이 있었는데 당일 먼저 하루 전에도 봤지만 언니 못지않게 나름 무척 미인이었다. 그런데 바로 밑의 여동생 되는 분의 말씀이 여전히 생각난다. 장례 마지막 하루 전 성모병원 식장에서 건너들은 이야기로, 언니의 결혼 전 그 동생의 꿈속에 언니가 이마에 선혈이 낭자한 채 서 있었다는 것이다. 너무나 위험한 꿈이라 결혼을 파기하라고 몇 번인가 말하려고 하다가 차마 못했고 이제야 한다고 하였다. 선혈이 낭자한 언니의 모습!!! 이를 차마 말 못한 동생의 고뇌!!!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담소하는 여(女)교장 두 분과 여교사들에게 다가가서 제가 본의 아니게 조금 늦게 왔다며 인사 겸 알려주니 늦게라도 와 준 것이 고맙다며 식사를 시켜 주었다. 그 밥을 먹는 도중에 여교사 한 분이 화장이 끝나고 추모공원으로 유족들이 갈려고 장례버스가 떠난다고 하니, 출발하는 모습을 보려고 다 가버렸다. 홀로 식사를 마저 하고 가니 이미 차들은 추모공원으로 다 떠난 후였다. 이래저래 홀로 민폐만 당한 꼴이다. 그래도 내차로 추모공원까지 갔다. 동편 1층의 맨가 쪽 한 칸에 그분의 영정이 모셔졌다. 들어가는 1층 동편 안의 영안실 입구엔 반(反)부식용 미니공원이 빨갛게 잘 꾸며져 있었고, 떠난 이에게 보내는 작은 우체통도 빨갛게 칠해져 있었다. 유족들이 보관 수속을 밟은 도중에 도착하여 마지막의 모습은 온전히 볼 수 있었다. 유족 후 교사들의 차례 때 서열에 따라 맨 나중에 내가 추모를 하였다. 교장 두 분을 빼고는 내가 나이가 약간 연장자이지만 당일 추모의 서열은 내가 마지막이었다. 추모를 남들보다 약간 길게 20초간 했는데 그래도 교사 분들이 참고 기다려주었다. 그분들은 모두 담소도 할 겸 해운대쪽으로 장소를 정해 자기들 차로 가고, 나는 혼자 집으로 왔다.
그런데 교사들의 대화에서 작년 학교장은 그런 말이 없었는데, 그해 온 학교장은 거짓말인지 진짜인지 그분이 사고로 돌아가신 그날 밤, 자기 꿈속에 나타나서 ‘교장선생님 덕분에 잘 있다가 갑니다.’하면서 하직인사를 했다고 했다.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가족도 아니고 그냥 동료교사에 불과한데 뭐가 아쉽다고 하직인사까지 하나? 사실이라도 실로 웃기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자기는 자다가 일어나 염주를 막막 돌리면서 부처님께 살려주라고 빌었다고 하였다.
다른 분에게 들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그날의 이야기도 피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돌아가신 그분이 저녁에 홀로 TV를 보는데 바로 밑의 동생의 전화가 왔다. 동생들이 근처 노래방에서 송년회(送年會)로 가족들과 몇이 놀고 있으니 맥주 마시러 오라고 하였다. 그 전갈을 듣고 동생들에게 가는 중에 바람이 너무 심하였다. 그 바람에 큰길가에서 손수레에 종이상자를 싣고 가는 여자노인 한분이 바람에 날린 종이상자를 줍느라고 힘들어 할 때 그분을 도와 끝까지 종이상자를 모아 수레에 실어 주고 왔다. 그리고는 동생들에게 와서 같이 맥주 마시고는, 화장실에 가서 원래 방으로 돌아오는 길에, 바로 철(鐵)계단으로 내려가는 깜깜한 지하실을 방으로 오인하여 그냥 그대로 들어가다가 추락사로 돌아가셨다. 발견 당시에 계단 옆에서 앉은 채로 머리에 선혈이 낭자했단다. 깜깜한 지하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CCTV에 실려 있었다고 하였다. 성모병원 중환자실에 며칠 있다가 도저히 회복불가로 장례를 치른 것이다. 바로 그분이 방금 나의 교무실을 다녀간 것이다. 스르륵 잠이 깼다. 깰 때는 비몽사몽간이었지만 나는 정신이 번쩍했다. 머리끝이 곤두섰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작년에 돌아가신 분이 아닌가. 나는 바로 가방을 챙겨 1층 행정실로 갔다. 당일 경비하는 분이 혼자 TV를 열심히 보고 계셨다. 사실을 말하기 어렵다. 늦게 퇴근하는 것도 미안한데 다른 별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영감님, 먼저 갑니다.’하고 인사하고 나왔다. 그리고는 나의 차로 귀가를 했다.
그 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다음 학교를 거쳐 마지막 나의 근무교가 추모공원근처이고 출퇴근길이라서 일찍 마치는 날에 몇 번 그분의 안식처에 가 보았다. 봉안함 영정사진이 처음엔 하얀 결혼 드레스차림이었는데, 그 뒤엔 다른 수수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실제 모습보다는 덜 예뻤지만 그래도 창백하고 불안한 느낌으로 내가 느끼는 드레스보다는 안정이 되었다. 몇 번 보니 나보다 19년 연하로 표기된 명패(冥牌)가 보인다. 그분이 돌아가신 2년 후 그 학교에서 그분과 같이 근무한 또 한분의 여교사님이 바다의 연꽃처럼 다른 학교에 가서 돌아가신다. 성함은 이O련이시다. 먼저 돌아가신 4년 후 다음 학교에서 전출을 앞둔 행정실장님이 나에게 바로 앞에 근무한 학교의 분위기를 물어 보았다. 다소 걱정하는 느낌의 분위기라서 난 이렇게 답했다. ‘그 학교는 학생들은 괜찮은데 교사들은 2년 주기로 자주 죽습니다.’ 나도 모르게 나온 답이다. 내가 그 학교에 가기 전에도 어떤 여교사님이 그 학교에서 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이 말 때문인지 그 행정실장님은 그 학교로 가지 않고 이웃의 다른 학교로 전출을 갔다. 모두가 승진가산점이 있는 외곽의 학교이다. 애석하게도 그런 일들은 교사(校史)에 전혀 남아있지 않다. 그냥 당시의 교사와 행정실의 직원들만 겨우 잠시 그때만 알뿐이다. 먼지처럼 공중에 몇 번 돌다가 사라진다. 2003년 3월에 개교한 학교로 개교한지 10년도 안 되는 학교에서 연이어 일어난 일들이다.
-. 참고로 그 학교는 교사들이 아파트 등에서 많이 거주하는 해운대 신도시에서 승용차로 20분 이내 편도(片道) 10km로 벽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외곽근무 승진가산점도 있고, 그것을 보고 온 직원들이 태반이기 때문에 서로 모두들 열심히 하는 학교다. 나는 금정구에서 편도가 20km이었다. 그분이나 나나 또 한 분 더, 승진을 위하여서도 장학용보고서도 몇 번 쓰고 열심히 했다. 지나고 나서보니 그것도 나쁜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사립에서 그런 것 없이 수업에만 크게 신경 쓰는 것이 더 교사다운 것이 아닐까 여겨지기도 한다. 덕분에 보고서 쓰는 기술이 늘어 전국적으로 두 번 개인 입상도 했다. 학교연구주제로 청렴교육을 2년간 맡아 해당부문 전국 1위로 국무총리훈장도 받았다. 사고학교에서도 4년차에 교육청 주제연구 보고서 대회에 해운대지구 1위를 하여 학교단체상으로 교육감표창도 받아 학교장의 학교경영점수에 조금 보탬이 되었다.
-. 돌아가신 두 분 다 명문 국립대 출신으로 너무나 아까운 엘리트 분이었다. 나는 공립학교경력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아 승진가산점만 쌓다가 지원도 못하고 평교사로 정년을 했다. 2010년경 교육부 소리함에 승진한 어떤 교감이 교육부에 문의를 했다. 교감과 어찌 평교사가 같은가? 직급이 다르지 않는가? 교육부의 답변이 걸작이다. ‘교장이나 교감이나 평교사나 다 같은 교사입니다. 직급은 동일하고, 직위만 다릅니다. 그래서 동일호봉입니다.’ 사실 법만 바꾸면 교감과 교장, 평교사가 순환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교원들 훈장수여에 경력만 참조한다. 자라나는 세대들을 위하여 기본적인 내용의 수업에만 전념해야하다 보니, 나를 비롯하여 행정기초가 너무나 부실하다. 이런 교사가 한둘이 아니다.
-. 여담으로 한번은 내 앞에 계신 여선생님께 나는 임씨 여자분들 등살에 요즘 진짜 피곤하다고 하였다. 그분도 임씨인데 고집이 있어 같은 4층 교무실에 근무하는 다른 2분과 호흡이 가끔 잘 안 맞았다. 그분이 왜 그런가 물었다. 나의 답은 이렇다. 현재 교육감도 임○경, 앞전의 교장도 임○희, 현재 교장도 임○복, 내 앞의 분도 임○희로 모두 다 임씨 가문 출신입니다.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어 주었다. 그리고 보니 네 분 다 여걸이다. 모두 국립명문대 출신이다. 교육감은 국립교대출신이라 전공은 모르겠고, 앞의 교장이하 모두 국립명문사대출신의 동문으로 영어와 수학, 국어이다. 인문계 반에서 1등급 이상으로 반에서 적어도 1,2등은 해야 합격이 가능한 사대 안에서도 공동 최우수 명문학과이다. 그 임씨 선생님은 그 해에 의원면직으로 학교를 그만 두고 가셨다. 경력이 20년이 넘어 나이가 예순이 되면 연금이 나온다고 하였다. 가끔 하시는 말이 이 학교 관리자들의 정신 수준이 교육자치고는 상당히 낮다고 하셨다. 부문부문 과락으로 결격사유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이분도 교원대학원 지도교수님처럼 말한다. 아마도 한국인들의 정신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유에 대한 철학적 정신과 종교에 대한 무한한 믿음, 도덕에 대한 끝없는 신뢰 등에서 크게 미흡한 점을 본능적으로 느껴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사실 한국인들은 누구나 다 언행에서 그렇다. 원초적으로 그런 것이 구비되어 있지 않다. 처음부터 끝까지 언행에서 개인별 차이가 별로 안 난다. 특히 결정적인 순간에는 똑 같다. 너나 구별없이 숭고한 인간정신이 결여되어 있거나, 있어도 필요한 만큼 충분하지 못 하다. 문명국치곤 미흡한 예들이 무수히 많다.
-. 이유는 이렇다. 한국인들은 뇌과학적 측면에서 보면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에 돋아 나야할 자생적 질서의 초석인 자유정신을 놓치기 때문에 자유를 초석으로 하는 근대정신이 선험적으로 결핍된 이들이 절대 다수로 무진장 여기저기 떼거리로 매우 많다. 그래서 자신이 교사라도 교사인줄 모르고, 군인이라도 군인인 줄 모르고, 학생이라도 자신이 이제 겨우 걸음마나 하는 애송이로 공부만 해야하는 학생인줄 모르고, 더우기 더 어려운 것은 자신이 자본사업가라도 자본주의가 뭔지 모르고, 노조를 해도 노동의 자유가 어디서 오는지 관심이 없고 그냥 모두들 돈만 보고 사는 것이다. 아무리 좋아보여도 시대성이나 그 무엇과도 타협해서는 안되는 자기 직분의 originalism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교사들은 교단에 매일매일 서기 때문에 평소엔 조금은 나아 보인다. 신 앞에서 인식론적 회의론까지는 미치지 못하지만, 하고자하는데 힘이 부치니 역지사지는 가끔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원대학원 지도교수가 한국인들의 본질적 비겁성(卑怯性)을 논한 것이고, 비침해성(非侵害性)의 공리(公理)에서 능동적으로 연역(演繹)하는 자유정신적인 면에서는 진화가 덜 된 종족(種族)으로 여기저기에서 단체로 수준들이 낮게 점철(點綴)되어 보이는 것이다. 자유에 대한 기초와 기본은 물론이고 국제정치 철학적 이해가 부족하니 억지(抑止)를 부리게 되고, 이 억지가 국내에선 통하지만 국제사회에서는 커다란 손실로 부단(不斷)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지적인 면에서 사상이나 정신, 철학 등에서 세계적 거인이 여태 없는 것이다.
-. 교사다운 교사가 되려면 정신수준이 최소한 동유럽의 그리스정교의 고독한 수도승 정도는 되어야 한다. 교재연구를 충분히 하고 오로지 학생하나하나만 보고 수업과 교무일에만 전념해야 정상이다. 또 교사는 교사이지 대학교수가 아니다. 학자인연 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그의 방에서 자기가 대하는 학생하나하나를 엄밀분석연구하면서 그 학생을 신으로 대하듯이 대해야 한다. 수업을 할 때 농담하거나 웃어서도 안 된다.(원래 웃음이란 악마들이나 하는 짓이다. 잘 봐라. 극중의 광대도 웃지 않는다.) 물론 인자한 모습이나 엄격한 모습도 금물이다. 그냥 있는 그대로 학생이 전혀 부담조차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격려도 필요 없다. 그냥 수업하면서 오작동하는 부분만 같이 수선하면 되는 것이더. 하지만 기생충(寄生蟲)처럼 장학금을 노리거나 공짜를 좋아하는 대한민국 안에서는 불능적으로 불가능하다. 학생들도 성장하는 과정이라 산만하고 학교 전체 분위기가 정말 시끄럽다. 세상에 공짜는 무조건 없는 법이다. 엄청난 학비로 움직이는 미국 동부에서나 보는 아이비리그급 숲속 교정의 정숙한 학교는 한국에는 없다. 또 교사를 하면 회식도 생각보다 많은데 그것도 해서는 안 된다. 헛돈도 쓰지만 단체로 앉아서 밥이나 먹는 회식은 교사들이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다. 오로지 교사는 홀로 생각하고 홀로 자기 수업 하나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정상대로 다 큰다.
-. 학생하나하나를 보는 한국의 교사!!! 과연 가능할까? 레밍쥐 같은 한국인들에겐 꿈같은 이야기이다. 첫째 한국인 교사들은 진짜 말들이 많다. 교무실에서 교감부터 이리저리 시끄럽다. 조용한게 비정상이다. 그래서 교사 스스로도 교육자로 보는 이가 드물다. 스스로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런 한국수준에 맞춰 정신수준에 제법 결격사유가 보여도 승진경쟁 등에서 이겨 교장교감이 된 분들이라 그런지, 경쟁에 자주 밀린 나보다는 다들 나아 보였다. 20년 채우고 의원면직을 한 그분은 평소 출퇴근을 할 적에 교사로 타기가 만만찮은 최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셨다. 사대보다는 인문대를 나왔으면 더 좋았을 분이다. 사범대는 명실상부 목적대학이다 보니 명문대라도 4년간 계속 높은 수준의 연구주제에만 몰두하기는 힘들다. 교생실습도 나가야 되고 말이다.
-. 사범대학의 교과(敎科)란 교육학을 뿌리로 하여 도구과목을 접목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노력하고 보충하면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아탑의 순수학문이라고 하기엔 이미 출발선이 다른 것이다. 여유가 있는 부유한 분이라면 목적대학인 사대를 굳이 갈 필요가 없는데 말이다. 정확히 보면 수업(授業≠受業)은 글자그대로 미성년자(未成年者)를 대하는 일종의 시중(personal attention)이기 때문에 교사는 귀족이나 상류층에서 할 만한 직업은 분명 아니다. 똑똑한 학생들이 교사가 되고자 많이 지원은 하지만, 사범대학 자체가 이미 명칭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듯이 자유정신의 인문대가 아닌 것이다. 이는 영국 잉글랜드 버크셔주 이튼에 위치한 이튼 칼리지(Eton College)에 근무해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이론을 말하는 교수가 아니라 표본(標本)을 전하는 교관이다. 넘으면 안 되는 선(線)이 있다. 하급(下級) 코미디 극중(劇中)에서 가끔 보는 사부(師父)흉내도 금물이다. 그래서 James Hilton의 'Goodbye, Mr. Chips'처럼 오로지 자기가 만나는 학생하나하나만 바라 봐야 정상이다. 후천 자생적 문화에서 이미 자유스럽지 못하다는 것이다. 교성(敎聖) 페스탈로치(1746.1.12.~1827.2.17.)라 하더라도 교직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사범(師範)이기 때문에 자생적 질서의 자유를 수반하는 자기만의 개인적 학문의 목적에서 정신적으로 그만큼 귀찮고 피곤한 것이다. 자신의 욕구를 추구하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다면 이미 그만큼 자유가 아니다. 그래서 진학지도를 하다보면 자기 개인의 무한한 자유를 꿈꾸는 상당수의 학생들은 갈 실력이 충분히 되어도 사범대학 같은 목적대학을 본능적으로 꺼리거나 싫어하며 기피(忌避)하는 것이다.
-. 끝으로 작품하나를 자료로 붙인다. 이 작품은 사고로 그분이 돌아가시는 그해에 교내 학예제 리플렛으로 만든 것이다. 그림으로 내가 필요한 부분이 있어 파일로 주십사하니 남들에겐 주지마라 하면서 주신 것이다. 이제는 돌아가셨으니 그분의 영혼을 위하여 모든 나라의 모든 분들에게 free file로 참조가 될 수 있게끔 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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