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너머 함께 공부하는 다혜님이 에너지너머 함께 공부하는 이들에게 이야기 펼칠 장을 마련하셨네요. 다혜님이 일하시는 <복음과 상황>에서 에너지란 주제를 지난 8월호에 특집으로 다루었어요. 그 일환으로 쓴 글을 공유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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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작년 여름날 둘째 아이를 낳았다. 한 해 동안 아이를 돌보며 내 삶을 진지하게 돌아보고 내다보는 시간을 가졌다. 지난 인생의 변곡점을 들여다보면서 받았던 은총을 떠올려보았다. 은총에 대한 기억은 이후 내 딛을 걸음을 선택하는 데 고요한 확신을 주었다. 이렇듯 누구에게나 역사가 있고 그 역사를 바탕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내일의 선택에 필요한 지혜를 얻는다.
기후위기 라는 말을 어느 때보다 자주 듣는 요즘이다. 기후위기가 지금 당장 나타난 현상은 아닐텐데 그렇다면 위기를 있게 한 역사를 살피는 일이 우선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금의 지구적 위기와 관련된 다양한 역사가 있겠지만 그중 우리나라 온실가스 배출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에너지의 역사를 톺아보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에너지의 아주 짤막한 역사
근대적 의미에서 에너지의 시초는 석탄이다. 석탄을 에너지원으로 한 증기기관의 발명은 근대 산업혁명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석탄이 상품의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 물질의 풍요를 이루었다. 그러나 산업혁명 시기의 노동조건은 열악했고, 심지어 예닐곱 살 아이들까지 노동현장으로 몰아넣는 기행을 발휘했다. 더 많이 더 빨리 생산해 경제성장을 이룩하는 것이 사회 최고의 미덕이 되었고, 이 정신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또한 중앙집중형 석탄발전 시설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다양한 곳에서 지역 간 에너지 불평등 문제를 낳았다. 온실가스 대기오염 및 미세먼지로 인한 각종 질환 역시 석탄 발전에 책임을 물을 수 있다.
19세기 말엽 인류는 석유를 발견했다. 석유는 자동차, 항공, 화학 등 다양한 산업을 낳으며 눈부신 과학기술 과 경제성장을 일으켰다. 그러나 유정(油井)이 발견된 이래 세계 곳곳에서는 제국주의가 확장되었고 식민지 지배가 일어났으며 전쟁이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석유가 육해공군의 기동성을 향상시켰고 이로 인해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전쟁의 파괴력이 커졌다. 석유 확보는 전쟁의 이유가 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이유 역시 바로 석유 때문이었다. 1945년 5월에 있었던 전범 재판에서 독일의 군수 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는 석유를 얻는 것이 러시아 침공의 주 동기였다고 진술했다. 석유를 둘러싼 전쟁이 일어나고 식민지 정책으로 제3세계가 수탈당했으며 정부와 자본의 유착이 본격화되었다.
한때 청정에너지로 손꼽힌 핵발전은 주요 국가의 안정적인 전력 생산에 공을 세웠지만 여전히 안전 관리 문제가 남아있다. 현재 지구상에는 핵폐기물을 영구적으로 폐기할 수 있는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국가 가 핵폐기물의 지하 매장 처분 계획을 추진하고 있지만 난항을 겪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의 경우 핵발전소 작업자의 옷가지나 장갑 등 위험수위가 상대적으로 낮은 중저준위 방사선 폐기물 처리장이 경주에 있을 뿐이다. 사용 후 핵연료 고준위 방사성 폐기물 등은 44년간 부지 선정도 하지 못한 채 기존 핵발전소에 임시로 저장하고 있다. 울산 중구, 부산 해운대구, 대전 유성구, 강원 삼척시 등 원전 인근 지역 16개 지자체 300만 명 이상의 국민들 머리에 시한폭탄을 이고 있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재생에너지는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많은 이들이 각종 에너지원에 대한 환경과 안전 및 위험을 문제 삼고 더 나은 에너지원으로의 전환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많은 발전소가 과연 필요한건지에 대해선 묻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근 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재생에너지는 인류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태양, 물, 바람 등 자연을 이용한 재생에너지가 주력 에너지원이 되었을 때 나타날 사회적 현상이 아름다울 것이라고 내다보는 건 순진한 생각이다. 기후위기라는 전 지구적 앓이에 단순히 에너지원의 전환이라는 처방만을 떠올려서는 안된다. 더 나은 에너지믹스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전체 에너지 파이 크기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멈추지 않는 성장이라는 환상을 품고 착취를 서슴지 않는 사회구조와 쉽게 쓰고 버리는 삶의 양식에 적극적인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농지를 밀고 산을 깎아 내려 태양광이나 풍력발전소를 세우는 반생태적 선택을 전환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전국에 태양광 설치로 몸살을 앓는 지역이 많다. 현재 우리나라 태양광 설비 중 농촌 지역의 설치량은 약 63%로 알려져 있다. 전기 수요의 절반 이상은 수도권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전남, 경북, 충남 세 지 역에서 생산하는 신재생에너지 발전량 비중은 전체의 47% (2018년 기준) 이다. 농촌 지역에서 태양광이 투기와 갈등의 상징이 되어버린 슬픈 현실을 마주한다. 태양광을 비롯한 수많은 재생에너지가 농촌 지역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보통 지역에서 에너지 갈등이 벌어지는 이유로 정교하지 못한 국가정책 대기업과 자본가 위주의 에너지 사업구조, 공정하고 투명하지 못한 보상체계를 꼽는다. 이런 문제도 해결책을 마련 해야겠지만 이런 접근 방법만으로 갈등의 근본적인 요소를 해소하긴 어렵다고 본다.
해외에서는 어떻게 지역 에너지 자립을 이루었는지 물으며 덴마크 사례를 소개해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덴마크 국부라 불리는 니콜라이 그룬트비 (Nikolaj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 -1872)는 농부를 비롯한 평민들을 하나님 앞에 평등한 이로 교육하고 깨어있는 시민으로 조직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에 따라 덴마크 내 자발적인 시민 조직과 공동체성은 덴마크 문화와 교육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그래서일까? 덴마크 어딜 가나 크고 작은 주민들의 모임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러한 모임들이 마을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마을 공동체는 삶의 다양한 필요를 주체적으로 선택하여 스스로 채워간다. 에너지를 예로 들면 국가 목표 또는 외지인에 의한 에너지 자립이 아닌 나, 우리, 마을의 필요에 따른 해법을 스스로 마련해간다. 그리고 필요에 따라 다양한 사회적 주체들 ―이웃, 학교, 기업, 국가 등― 과 연대한다. 다름 아닌 마을공동체라는 근원적 삶의 관계적 구조에서 지역 에너지 갈등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덴마크와는 달리 한국은 일제강점기 산업화 시기를 지나며 촘촘했던 마을공동체가 와해되어버린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예전에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여러 문제를 마을에서 해결했다면 지금은 국가와 개인의 차원으로만 접근하고 있는 형편이다. 기후위기와 에너지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가정책을 바꾸라는 요청이 아니면 ‘일회용기 대신 텀블러를 들라’는 개인 차원의 운동을 펼쳐가고 있다. 이 역시 소중하고 필요한 운동이다. 그러나 그게 정말 다일까?
마을공동체를 통해 얻는 소박한 삶
이제 갓 돌을 맞은 아이를 포함해 네 식구가 사는 우리 집 지난달 전기요금은 4,310원이 나왔다. 특별히 더웠던 해의 몇 번을 제외하곤 지난 몇 년째 3천 원에서 5천 원 수준이다. 우리 집 전기요금을 이야기하면 태양광을 설치했냐고 묻거나 혹은 전등은 켜고 사냐고 묻는다. 그러나 개인이 무척이나 애를 쓴 노력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 가정은 서울 북한산 아래 자락에서 마을공동체로 어울려 살고 있다. 마을에는 마을밥상, 마을찻집, 마을도서관, 마을창작소 등 공적으로 마을 벗들이 함께 이용하는 공간이 있다. 마을밥상은 우리집 부엌살림을 단출하게 해주었다. 각 가정마다 흔히 있는 김치냉장고, 전기밥솥, 전기레인지 등이 우리 집엔 없다. 마을밥상에서 함께 밥을 먹으니 웬만한 주방용품은 다 마을밥상에 있다. 더운 여름날 무더위를 피하고 손님을 초대해 맞이하는 사랑방 역할은 마을찻집이 한다. 우리집 거실 역할을 마을찻집이 톡톡히 하고 있는 셈이다. 각자 집에서 보던 책을 모아 도서관을 만들어 함께 책을 읽는다. 마을 도서관이 우리 집 서재인 셈이다. 그러니 널찍한 거실, 쾌적한 서재가 딸린 넓은 집에 대한 필요를 크게 느끼지 않는다. 개인의 결단보다 함께 만들어 가는 삶의 구조를 통해 소박한 삶이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서의 삶은 어떻게 해도 착한 소비 이상의 해법을 마련하기 어렵다. 큰 틀에서 아껴 쓰고 (절약) 되돌려 쓰고 (재활용), 좀 더 나은 제품 (친환경 대체품)을 사는 것 이상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도시는 무언가를 스스로 생산해낼 줄 모른다. 소비로만 점철된 도시 문명은 지금의 위기를 발생시켰다. 생명과 멀어지고 생명의 자연스러운 어울림과 서로 돌봄은 어느새 상품과 경쟁으로 대체되었다. 도시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며 새롭고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농(農)이 지닌 소중함이다. 농은 하늘땅에서 이뤄지는 모든 일 중 근본이다. (농자천하지대본 農者天下之大本) 생명을 살리는 모든 일이 농이다. 일례로 자녀를 돌보고 키우고 가르치는 것을 자식 농사라 했으니 나를 포함한 육아와 살림하는 이들 모두 농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으로 마을공동체는 강원도 홍천으로 분화 개척해 농촌과 도시에 있는 마을이 긴밀하게 일상을 공유하며 서로를 살리는 농도상생마을공동체를 이뤘다. 홍천으로 걸음한 후 농사짓기에 앞서 생태 뒷간을 함께 만들었다. 똥오줌을 수세식 변기에서 흘려보내는 대신 거름으로 만들어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다 각. 마을에 마을 밥상 및 가정에서 나오는 밥상 부산물 역시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는 대신, 한데 모아 흙으로 돌려보낸다. 그 흙이 키워낸 생명은 다시 우리 몸에 들어와 우리를 살린다. 생명이 서로 먹고 살리며 생명 순환을 이루고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정하수 처리장과 음식물 처리 시설이 얼마나 에너지와 자원을 낭비하는가를 떠올릴 때 온 생명 순환하는 생명살림은 기후위기 시대에 만들어갈 오래되었지만 새로운 삶의 양식이다.
욕망의 전환이 절실하다.
끊임없는 성장의 유혹에 멈춰 서서 성장이 왜 필요한지, 성장은 무엇을 낳았으며 그 성장은 우리를 어디로 가게 하는지 물어보자. 성서는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1:15) 라고 했으며 노자 역시 “만족할 줄 모르는 것만큼 큰 화가 없고 욕심을 내어 얻고자 하는 것만큼 큰 허물이 없다. 그런 까닭에 넉넉함을 넉넉함으로 알면 언제나 넉넉하다.” (도덕경 제46장)라고 한 바 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임을 자각하여 자연 이치를 따라 순환하며 서로 살리는 삶을 일구라는 외침이다. 생명과 어울려 평화로운 삶, 주어진 것에 만족할 줄 아는 자족 자립하는 삶을 위한 구체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에너지를 포함해 물, 공기, 먹을거리, 똥·오줌, 자원, 시간과 공간, 그 밖에 어떠한 것에도 낭비없는, 소박하고 품격 있는 삶에 대한 욕망의 전환이 절실하다.
기후위기 대응, 에너지전환이라는 주제 앞에서 근본적 해결책을 찾는다면 결국 인간 욕망의 변화이다. 라캉은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다. 결국 욕망은 관계적이고 구조적인 것이다. 달리 말해 관계를 새롭게 맺는다면 그 욕망 역시 새로워질 수 있지 않을까?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기 위해 예수도 제자 공동체라는 새로운 관계를 가장 먼저 만들지 않았나? 좀처럼 변하지 않는 내 욕망 앞에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무기력한 국가정책 앞에 체념하지 말자. 바로 내 옆에 있는 이들과 서로 깨어 비추고 살리는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지속가능한 삶의 구조를 정직하게 하나씩 만들어야 한다.
관계의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마을공동체가 될 수도 있고, 동아리가 될 수도 있고, 공부 모임이 될 수도 있다. 지금 함께하는 마을공동체도 청년들의 공부 모임에서 시작했다. 지긋한 관계 가운데 자유로운 연대와 창조적인 모색으로 인류가 당면한 문제를 지금 이 자리에서 풀어갈 수 있다. 직장 생활을 한 지 어느덧 16년이 되었다. 일하며 느끼는 답답함과 한계를 함께 고민하고 풀어가고자 <꿈꾸는 일터> 라는 모임에 함께했다. 이후 에너지라는 분야에 관심 있는 이들이 모여 지난 2020년부터 <에너지너머>를 시작했다. <에너지너머>는 에너지와 기후위기 주제와 관련해 직장인, 시민단체 활동가, 연구원, 학생까지 다양한 주체들이 어울려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이다. 우리 몸이 밥을 통해 에너지를 얻는 일상 속 경험에서부터 인류가 기후위기를 맞으며 고민하는 에너지전환에 이르기까지 삶과 담론을 연관시켜 통찰하고 새로움을 창출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기후위기에 대응할 시간이 좀처럼 없다고들 한다. 그러나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던가? 더없이 급박하고 중요한 문제에 있어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앞에 정직하게 성찰하고 신중한 걸음을 내디뎌야 할 것이다. 새로운 관계 맺음을 통한 욕망의 전환은 먹고 입고 살고 노는 삶의 전 영역에 펼쳐지며 새로운 일상으로 확인된다. 온 생명 더불어 아름답게 사는 삶을 꿈꾸며 오늘 하루 넘치거나 부족함 없이 살자.
지연/ 밝은누리에서 농도상생마을공동체를 일구고 자식농사, 텃밭농사하며 생명살림을 배워가는 청년. 서울 북한산 아래 자락에 살고 있고 주한 덴마크 대사관에서 에너지·환경 분야를 맡아 일하고 있다.
http://www.gosc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09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