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리아 전쟁 7년차(BC52년 카이사르 48살)
로마의 정치적인 혼돈을 가라앉히고 갈리아로 돌아오는 ‘카이사르’에게 갈리아의 반란 움직임이 전
해졌다. 『로마인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책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수 많은 인물이 지나 갔으나
그 중 로마인이 아닌 인물 중에 기억해야 할 사람이 하나 있다. 그가 이번 반란의 지도자가 되는
“베르킨 게토릭스다. (Vercingetorix, BC82∼BC46, 베르생 제토릭스 라고도 읽는다.) 물론 ‘한니
발’이 더 강하지만 ‘게토릭스’는 남쪽 갈리아의 “아르베르니” 부족의 족장이었다.
그때까지 갈리아 인들은 수 많은 부족이 흩어져 살고 뭉칠 줄은 몰랐으며 결과적으로 로마에
대항해도 힘이 분산되었다. 더구나 한 부족 내에 親로마 파와 反로마 파가 갈려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때 선두에 나선 그는 각 부족에게 마치 왕처럼 병력징발과 서약 및 처벌을 강행했
다. 결과적으로 딱 한 번 거하게 봉기한 이 사람은 “알레지아 전투”에서 패해 스스로 포로가 되고
로마로 압송되어 감옥에 있다가 6년 후 BC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 처형되었다.
물론 자신만 포로가 되고 동료는 집으로 돌려 보내도록 했다 (카이사르가 수용). 야만인 수준
으로 보아온 갈리아 인 중 카이사르가 두려워 하고 ‘카이사르’를 궁지에 몰아넣었던 사람이다.
‘게토릭스’는 통일된 힘을 만들고 훌륭한 작전을 감행하고 후세에 남을 전투로 평가받는
“알레지아”에서 ‘카이사르’를 물리칠 수 있었으나 남의 땅에서도 장기 판 같이 작전의 묘를
터득한 영악한 ‘카이사르’의 이간책과 작전의 변화에 걸려 패했다.
‘카이사르’는 “알레지아”에서 적의 기지를 포위하고 맹공 중이었으나 그 것이 적의 계략이었
고 적의 연합군이 뒤에서 들어와 로마 군을 다시 포위하는 작전이었다. 준비 못했으면 완전히
샌드위치 먹거리가 될 판이었으나 안쪽 기지 포위 병력은 두고 밖에서 오는 적을 막을 임시
방어선(목책)을 세워 안 과 밖을 동시 에 상대한 것이다.
갈리아 인 34만 명과 로마군 5만의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이긴 것을 보면 가히 천재라고 아니
할 수가 없다. 하여튼 마지막 戰場인 “알레시아” 성채와 로마 군의 임시 성채는 세월이 많이
지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발굴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보통은 포로로 잡아온 적장들도 개선식에서 시민들에게 보여주기는 해도 죽이지 는 않는 것
이 관례였는데 ‘베르킨 게토릭스’는 워낙 위험한 인물이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 죽이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 전투가 마무리 되고 BC52년 제 7권을 끝으로 그의 “갈리아 전기”는 끝났
다. 마지막 구절은 “올해의 전과를 보고받은 로마에서는 20일 동안 감사 축제를 올리기로
결의했다.”라고 한다. 더도 덜도 없다. 그리고 이 책을 BC52년 한꺼번에 간행했다.
보고서를 보내는 것은 총독의 의무라 지금까지 모두 이행했으나 책을 발간한 사람은 ‘카이사
르’뿐이다. 민중의 지지를 감안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언론 플레이 (*콩글리쉬다. 쓰지
않는 게 좋다.)’다. 전쟁은 8년간 계속되었지만 8권 째는 비서관 ‘히르티우스’가 썼다고 한다.
곧이어 ‘內戰’이 시작되었고 내전 종식 후 반년도 안 되어 카이사르가 암살되었기 때문에 8권
을 쓸 시간도 없었다.
▩ 갈리아 전쟁 8년차(BC51년, 카이사르 49살)
이 해의 전쟁기록은 위에 말한 바와 같다. ‘히르티우스’는 8권과 카이사르가 죽기 전까지의
기록을 만들면서 “공자 앞에서 문자 쓰는 것처럼” 부담감이 엄청났다 고 썼다. 그만큼 카이사
르의 “갈리아 전기”나 ‘폼페이우스’와의 전쟁기록인 “내전기(內戰記)”가 문학적으로 역사적
으로 대단히 뛰어났다는 뜻이다. 실제로 문학가들이나 역사가들이 자신들의 전문분야를 침범
한 ‘카이사르’에게 확 눌렸다는 얘기다. 세련된 문장, 자신의 의중을 명쾌하게 전달하는 재능,
史料的 가치, 쉽고 정확하게 표현한 문장(라틴어 문법 등)이 ‘카이사르’의 두 기록물을 표현한
말이다.
이 시기는 戰後 처리의 시기다. 엄청난 “알레시아 공방전”후 약 100개의 갈리아 부족 중 대규
모의 부족들은 ‘카이사르’의 뜨거운 맛을 보았기 때문에 복종의 태도를 보였으나 중소규모의
부족들은 불온한 양상을 보였다. 그의 총독임기도 말년에 가까워지기 때문에 경상도 말로
“단디” 눌러 놓아야 했다. BC51년 여름까지 6개월 정도 全 갈리아를 상대로 소위 ‘엉까는’
부족들을 차례차례 잔인하다고 할 만큼 밟아 놓았다.
戰後 처리 과정에서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은 조치를 입안했다.
• 갈리아 경계는 남서쪽은 피레네 산맥, 서쪽은 대서양, 북쪽은 영국과의 경계인 도버
(Dover) 해협, 동쪽은 라인 강이다.
• 4대 부족을 동맹자로 삼고 이들이 갈리아의 중심이 된다.
• 모든 부족의 내정과 사회제도는 그대로 한다. (自治)
어찌 생각하면 자기들이 뭉쳐서 로마 하나를 못 막겠는가 하지만 먼저 패전의 경우를 보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가 보다. 이게 약자와 강자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카이사르’는 역사,
사회, 특질 등 모든 면에서 갈리아인이 게르만 보다 로마化 하기 쉽다고 판단했다. 갈리아 人
이 지금의 아일랜드와 영국의 웨일스 및 북부에 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갈리아의 독자성을
가진 “로만 갈리아/Roman Gallia” 즉 후세의 프랑스 문명이 이때 탄생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카이사르는 ‘불온한 놈들’을 세게 밟아주고 자치제를 인정하고 적정한 속주세를
부과한 뒤 1,200만 명이 살고 있는 갈리아를 떠났다. 그 뒤 BC49년 ‘폼페이우스’와 내전이
붙었을 때 휘하 로마 군단이 갈리아 땅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민족독립과 반란의 기회였으나
그런 일은 없었고 ‘카이사르’를 지원하는 “로마化”의 우등생이었다. 갈리아 인들은 어떤 의미
에서는 주체적인 성격이 사라지고 로마화되었다고 평한다.
< 아스테릭스 > 만화 이야기
이 얘기는 잠깐 언급한 바 있다. 갈리아의 로마화를 희화화한 얘기다. 다 항복 했으나 ‘아스테
릭스’가 사는 작은 마을은 신비한 물약을 먹고 로마 군을 두들겨 패주는 별난 곳이다. 日本人
인 ‘시오노 나나미’가 쓴 말이 다음과 같다. 그래서 삐딱하게 볼 수도 있다.
“프랑스 人은 중국의 中華思想과 비슷한 우월감을 내세우는 면은 있다. (※이 중국인의 우월감
은 다분히 작위적인 느낌이 많고 그 피해를 본 東夷族인 우리 입장에서 보면 불편하다. 중국
인들이 신화를 억지로 만들어서 제 조상이 최고라고 하며 주위 국가를 제 맘대로 아래 것
부려먹듯 한 것으로 얘기하지만 中國人들이 천하를 차지한 것은 시간적으로 그 역사에서 반
도 안 된다. 다만, 몽골이나 선비(鮮卑), 여진(女眞) 기타 북방계의 지배를 받았어도 지배민족들
이 중국 문화를 답습했다는 긍지를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아스테릭스 만화”에는 피지배 민족의 恨이나 원망 또는 피해의식을 가지면 피할 수
없는 음습함은 없다.”고 썼다. “카이사르를 웃음거리로 삼기는 했어도 존경 안 할 수 없는
정복자로 묘사하고 있다. 프랑스 사람들이 속으로 싫어하는 사람들이 게르만족인데 게르만에
게 정복되어 게르만化 되지 않은 것은 ‘카이사르’ 의 덕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는 느낌이
다.”
※ 우리는 어떤가? 중국의 宋, 明 및 그들의 철학인 性理學에 대한 무모할 정도의 존경과 편견
으로 엉뚱한 “小中華”를 자랑스럽게 내걸고 지극히 비합리적인 체계와 사상에 빠졌었다. 列强
이 팽창과 제국주의적인 軍國의 힘으로 약진하던 19~ 20세기에 식민지가 된 것이 억울하고
원통해서 지금도 앙금을 걷어내지 못할 뿐더러 어떤 학자가 말한 대로 뒤늦게 “왜 때려!民族
主義”를 외치고 있다.
어쨌든 BC58년 갈리아 총독이 되던 해 “헤르베티족(스위스 人)”의 통과 요청을 거절했을 때
부터 이 지역의 풍파를 예상하고 유럽이라는 큰 그림을 머리 속에 그린 것이 ‘카이사르’의 꿈
은 아닐까 하고 추정한다. 하여튼 8년의 전쟁을 마무리 하고 키살피나 속주(지금의 밀라노가
속해 있던 이탈리아 북부)로 돌아간 것이 BC50년 여름이었다. 한 사람의 영웅에 의해 갈리아
라는 큰 꿈이 이루어 지기도 하지만 ‘한니발’같이 못난 동포들의 비 협조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두 사람을 동등하게 비교할 수는 없다. 장, 단점이 있게 마련이니
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