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제10회 오장환신인문학상 당선작] 박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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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0회 오장환신인문학상 당선작] 박은영

■셀로판지의 사색 외 4편

​셀로판지의 사색


얹어 놓으면 색이 겹쳐져요 밖이 보이긴 보여요
가운데 죽은 사람도 보이고

어제 거리에서 작은 등에 금성을 매고 다니는
소녀를 보았습니다
붉은 온도는 끓고 있지만 푸른 셀로판지가 무능화 시켜요

손부채에 성역은 날아가고
에어컨 실외기는 계속 돌아갑니다​

서울이라면 한강 쪽으로 걸어오시고
제주도라면 한라산을 향해 오세요
바르셀로나에서 기차 타고 40분 정도 가면
시체스라는 도시가 나와요

리세우역 앞에서 아침밥을 먹다가
귀가 어두운 한국인 할아버지께서 오늘은
어디 가냐고 물어보는데
시체스요! 시체스!
아무리 크게 외쳐도 모르셔요

그런데 옆에 언니가 시체, 시체!
하니까 바로 알아채시더라고요
하얀 건물 속에 둘러 싸였다면
얼른 빨강 셀로판지 뒤로 와요
노란 튤립은 주황색 꽃으로 보이기 마련이지요
이젠 바다를 향해 행진해요

신비한 종이는 파도에 노랑 안감을 덧대요
파란 튤립은 초록색 꽃으로 보이기 마련이지요

당신이 견고히 연산 작용 해온 보편적 표상들 속에서
유일하게 무너지는 법칙은 무엇이에요?
…

친애하는 명왕성에게,
얼음산에 수국을 심어서 형광 나비 성을 만들게요

청록의 셀로판지가 필요 없는 행성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더라도
널리 혜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

메인 뉴스는 저녁 그늘의 길어진
관상을 보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말을 하네요

분무기로 창문에 물을 뿌려요
셀로판지를 조각조각 붙여요
볕이 들면 한두 번 정도는 아름다운
그림자를 바라보고요
사색을 넘어선 세상을 보아요
어떤 날엔 장의사가 무지개 색 의자를 만들고 있어요




석양을 낚는 노마드


홀로 저버린 꽃을 사랑하는 것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임무 같았다. 언제나 그렇듯 서쪽은 찰나가 되어 나보다 먼저 와 있으며, 이미 죽은 어깨에 입을 맞추려 한다. 

발바닥 아치의 통증은 그대로인데 알고 보면 가만히 앉아 아무 말도 쓰지 못한 날이다. 해지는 오후는 두꺼운 방의 커튼을 열어 재낀다. 발코니에서 놀던 새들은 놀라 날아가고 붉은 노을이 안으로 쏟아진다. 다가오는 것보다 떠나가는 것이 먼저 보이는 것은 풀잎과의 일면식에 대한 그리움 때문일까. 

석양의 시간에는 호롱불 밝히던 눈망울도 싱거운 반향이 될 수 있구나. 높고 굽은 절벽 길을 지나 기억 속 캐니언 위에 자잘하게 선다. 기로의 순간마다 붉어진 저녁짐승의 하울링 보다 더 솔직한 소리를 낼 수 있는지 나는 여전히 묻고 싶었다. 

누군가와 오랜만의 만남에서 잘 지냈냐는 물음에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나는 아직 모른다. 거의 다 온 하루를 홀짝 마셔 버리는 행위를 반복하고, 이기고 지는 기분의 방식이 그저 세상과 척 질 대상을 찾는 것이다. 

역광의 실루엣에게 조차 내보이지 않는 속살을 마주하기 위하여 뜨거운 화염 아래 크레바스의 시간들을 찾아 헤매었지만… 지는 것이 완벽하다는 사실을 여태 알고도 몰랐다. 

물 위의 부평초는 속절없이 떠내려가고 나는 다시 떨어진 사랑을 찾아 떠나야만 했다. 하얀 꽃부터 검은 꽃까지, 이 길의 내면 깊숙이

잠식


파도가 계단을 밟고 올라와요. 겹겹이 쌓여 밭을 일구어요. 에어프라이기에 크루아상을 굽는 모양 같아요. 작은 생지가 풍선처럼 부풀어요. 겉은 바삭해 살짝만 건드려도 부서지지만 속은 촉촉하고, 태풍의 눈처럼 고요해요. 

한 겹씩 벗겨 먹고, 와작 물어 먹는 재미 후엔 반드시 부스러기를 털어야 해요. 급하게 삼킬수록 소화는 어렵다는 걸 알고는 있겠죠. 눈앞의 배고픔은 참지 못하는 거고요. 

이어지는 낮과 밤에는 뜨거움의 입김이 작용해요. 땀이 흥건해야 열전도율이 우수한 손이 되어요. 손톱에 짭조름한 바다 맛이 물들면 막대 사탕처럼 쪽쪽 빨아요. 속을 깨끗이 비워내요. 지금까지 채운 것 보다 많이 뱉어내야 하는 룰이에요. 

대가를 치르면 허기가 질 겁니다. 세상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겁니다. 공기를 호호 불어가며 숨을 쉽니다. 

더 이상 잡아먹을 것들이 사라져 가요. 나뭇잎과 애벌레도 옛날 옛적 다 떨어졌거든요. 거울에 비추어 본다면, 서서히 상냥하게 집어삼킨 걸까요. 누가 누구를 덮치는 줄도 모르고… 

자발적인 결정은 발자국을 남기잖아요. 불확실한 세상, 유일하게 살아남는 확실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당신은 무엇으로 낭랑한가요. 

동서남북의 방위가 보여요. 이빨과 머리카락만 남은 인간들이 즐비해요. 상승하는 해수면 위에 둥둥 뜬 채로 누워 움직이거든요.

천 년 후


괴물의 목소리는 정해져 있고 
천사의 목소리는 잘 모르겠어 
올해 년도의 맨 앞 숫자를 잘못 입력했더니 
천 년이 흘렀다 
바탕화면에 두개의 의자를 꼭 붙여 세워두었다 
바닷물이 새지 않는 집에는 돌고래가 
투명한 머리칼을 풀어 헤치고 
촛불안의 붉은 드레스를 꺼내 입는다 
생존막차는 필체가 흐려서 
돋보기로 가득한 배낭을 껴안고 각도기로 
정확히 잰 45도의 시간을 모셔 두었다 
조랑말은 시계추를 타고 달린다 
유모차 안에는 아무것도 없어 
장발의 황조롱이가 아파트 옥상에 
앉아 날개를 빗는다 
딱따구리가 버블티를 마시고 
기차가 양떼구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매질 


가벼운 왕관 구합니다
턴테이블이 돌아가는 소리와 물이 흘러가는 
힘은 잡초 같은 새벽을 통과해요 
무럭무럭 기억이 나게요 
단면들은 귀를 기울이죠 (하나하나 모아야 하나를 제대로 알 수 있어요) 
머리카락은 따라오지 말았으면 하는데 

곧 쥐어짜질 레몬 조각 알갱이들 
트램펄린 위에 레몬빛으로 던져집니다 

고인 침으로 내일 먹은 음식을 유추했어요 
혓바닥이 보랏빛이 되었으니 적양배추를 들일게요 
압생트를 마시면 초록색 혀가 자라나요? 

뭉개진 계이름을 떠먹으면 
티스푼이 방방 뛰는 발목이 되어 
앞으로 성심성의껏 취할 거라 서요 
음- 
차원은 납작한 신발을 신었답니다 

병원에서 환자의 
심장이 멈출 때 기계에서 나는 삐- 소리 
사람의 귀가 제일 잘 듣는다는 
1000 헤르츠라는데 

물고기가 비집고 들어올 자리 
8분음표가 옷을 벗고 입을 방 한 칸에 
폭포수가 떨어지지 않는 다네요 
그런 8월은 미덥고 
안개는 잘 말려 놓았다죠 

1초에 천 번의 진동이 울리는 동안 
여봄름가울겨을 
음-파의 속삭임 
별빛의 산소포화도가 높아집니다 

명王해천토목화지금수 
게양대에 걸린 
계양태 로부터- 
전화가 오고 있어요

박은영_1984 경기도 부천 출생. 가톨릭대학교 국제관계학과 졸업. 방송작가 활동. EBS 다큐프라임 △강대국의 비밀 △절망을 이기는 철학-제자백가 △한국사 오천년-생존의 길 △포스트 코로나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 등 집필, 2018 방송통신위원회 방송대상 방송작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