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덕 교무--만덕산 성지 6-- 모악산 대원사 치성공부
원불교신문 [1663호] 2013년 06월 07일 (금) 박용덕 교무(군북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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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 광곡저수지 위의 자동차전용도로
모악산 대원사에서 내려오면 완주군 구이면. 너부실(廣谷里)에서 고덕산 줄기 왜목재를 넘으면
상관면 신리가 나온다. 지금은 자동차전용도로가 생겨 광곡터널과 고덕터널을 뚫고
신리에 전주와 임실로 가는 도로를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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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주군 상관면 마치리 정수사 앞길을 곧장 가면 만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다.
정수사는 진묵대사가 중창했다.
도군은 아무도 없을 때 혼자 잠자기 전이나 일찍 잠에서 깨었을 적에
〈정정요론〉을 꺼내어 읽어보곤 했다.
이순이가 말했다.
"도통공부를 하는데 그 닦는 바에 따라
상질은 이레, 중질은 열나흘, 하질은 스물하루면 통한대여.
아부지는 대원사에서 도통하셨대여."
비서를 입수한 도군은 사뭇 가슴이 설레었다.
"우리 아부지는 신축년 칠월 초이레 한밤중에 대통하셨더래요. 막 뇌성벽력이 치고…."
그날 이후 그를 바라보는 이순의 안타까운 눈길은
뭔가 재촉하는 것임을 도군은 느끼곤 했다.
4년 전의 일이었다.
이른 아침, 손바래기 앞으로 안개 자욱한 넓은 들판이 펼쳐졌다.
덕천들 한복판에 서 둘러보니 아득히 북쪽으로 모악산이 보이고,
동쪽으로 칠보산과 내장산이, 남쪽으로는 고창 방장산이 그 위세를 자랑했다.
정산은 덕천들을 40분 정도 걸어 정읍천을 건너 호남선 철로를 만났다.
초강역이었다.
몇 개의 나지막한 구릉을 넘으면 화해리 김해운의 집이 있건만
정산은 태인으로 발길을 돌렸다.
사부님 만나기 전 일곱 달을 머물렀던 그리운 인연이지만
한번 가면 쉽게 떠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초강에서 등멀을 넘어 곧장 구릉지대 밭 사이로 난 우마차길을 따라 윗녘을 향했다.
덕천 마을, 지경터 앞들을 가로질러 동진강을 건너면 태인이다.
초강에서 태인까지 시간 반 거리다.
태인에서 신작로를 타고 한나절을 곧장 웃녁을 향해 가면 모악산 동구 밖에
구월리, 계룡리, 성계리, 원평리, 쌍룡리 동네가 나온다.
이들 마을에는 상제의 재림을 믿고 각처에서 모여든 도꾼들이 살았다.
정산은 처음 전라도로 와 이 지역의 도꾼들을 찾아 돌아다니던 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정산은 원평 송적벽의 엿집에서 여장을 풀었다.
"대선생님이 보내서 왔는가?"
송적벽은 희색이 만면하여 정산을 맞이했다.
"예, 사부님께서 가보라고 그라데요."
"황감한 일이네."
"사부님께서 안부를 묻데요."
웬일인지 엿집은 전과 같은 활기를 잃고 있었다.
적벽이 변명했다.
"상제님 계실 때가 한창 좋았지."
원평서부터 김제군의 경계에 속한다.
금산사 가던 중에 쌍룡리에 증산이 후일 이곳에 낚시를 드리울 것이라 예언한
오리알터 명당자리(현 금산저수지),
그리고 구릿골 약방, 증산의 초분이 있었던 구릿골 장텟날 아래를 지나게 된다.
지금도 주변의 각처에 도꾼들이 박혀 치성을 드리며 개벽 선경을 꿈꾸고 있었다.
여기서 청도리 귀신사로 하여 낮은 재를 넘어 중인리로 가면 전주 가는 길이고
금산사 뒷길로 하여 상봉을 넘어가면 대원사가 나온다.
정산은 사부주의 당부를 명념하여 당연히 금산사로 향했다.
사부주께서 죽은 중을 회생시킨 미륵전을 참배하고 숨이 차게 가파른 산길을 올랐다.
상봉고지를 넘어서 20분 정도 내려가면 수왕사와 대원사다.
마침 사시 마지불공 목탁이 울려 정산은 다행이다 싶었다.
진묵과 증산이 도통을 했고 도군이 석달간 치성을 들였던 대원사에 정산은 4년만에 다시 왔다.
도군이 처음 왔을 때 대원사에는 아흔아홉 살 먹은 노승을
그의 상좌인 예순이 넘은 주지승이 모시고 살고 있었다.
주지는 나무하고 불 때고 밭일하는 일에 이력이 나
나이보다 훨씬 더 늙어 보이나 아직도 청년 못지않은 근력으로 절 살림을 꾸렸다.
어려서부터 절집에서 자란 열 서너 살 먹은 사미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천진한 중이었다.
노승은 이슬을 받아먹고 천년을 사는 신선처럼 정정했으며
주지 또한 목 빼고 불공 손님을 기다리거나 불사를 벌리는 일에 초연하여
손님이 오면 죽 솥에 물 몇 사발 더 부어 먹는 것으로써 자족하며 지냈다.
"절집이 와 이렇게 썰렁하노?"
도군이 묻자 사미가 말했다.
"진묵대사가 벌 준거라요."
진묵이 대원사에 머물 때 제대로 대접을 하지 않아
3백년간 빈천보를 받는다는 것이었다.
"아직도?" "이제 5년만 남았대유."
진묵의 일화가 어려 있고 증산이 도통을 한 대원사에서
송도군은 태을주를 정성껏 독송하여 일심의 공력은 어느 정도 얻었다.
그는 인도 대의의 도덕 공부보다 신통 묘술의 주문 공부에 주력하여
금빛 은빛 기운을 보는 등등 흔적이 있으나
공부 방향이 진리 탐구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도군은 대원사에서 석달간 치성들이는 중에 김해운을 만나고
만국에 없는 양반으로 떠받들어져 정읍 북면 화해리로 가 7개월간 머물게 되고
영광에서 찾아온 대종사를 만나게 된다.
4년 전의 일이었다.
나중에 큰일 이루거든 대원사를 잊지 말거라고 하던 노승은 입적하고
낯선 중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가난하기는 예나 다를 바 없어 죽 한 그릇으로 허기진 배를 달래고 정산은 하산하였다.
원기리로 내려와 전주로 가는 길과 왜목재로 가는 갈림길을 만나
"아차" 정산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주는 돌아보지 말랐던 사부님 말이 생각났다.
"스님은 어디 가시오?"
돌아보니 늙수그레한 중이었다.
"녜에, 가긴 합니다만……"
"워디서 온다요?"
"대원사에서 내려옵니더."
"하, 진묵대사께서 주석하신 절이지요.
소승도 진묵대사께서 중창하신 데서 살지라.
스님은 대원사에서 얼마동안 계셨는게라?"
"점심묵고 내려옵니더. 엊그제께 월명암에서 나왔심더."
"호, 변산 월명암? 진묵대사께서 중창하신 절이 아닌게라?"
"예, 학명 스님 문하에 있었지예."
"학명선사! 큰스님 상좌시구만요. 반갑그만이라."
"스님께선 어느 절에 계신교?"
"만덕산 미륵사지라.
시주 나왔다가 돌아가는 길이그만이라."
늙은 중의 걸망이 꽤 묵직해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동행이 되었고
정산은 하릴없이 노루목을 넘어 너부실 앞을 걸어가고 있었다.
"여기가 원광곡인디
소승은 엊저녁에 쩌그 경각산 정각사(正覺寺)에서 하룻밤 유했지라오."
고래등에 뿔난 것처럼 산세가 자못 웅장한 경각산(鯨角山),
멀리서 보이는 절의 규모는 그리 커보이지 않았다.
"원래 너부실이란 동명을 한자로 원광곡(元廣谷)이라고 하는가 보지요."
너부실에서 임진란 때 왜병들의 목을 무수히 짤라 통쾌히 이겼다는 왜목재를 넘어
신리까지 가는데 1시간 40분 걸렸다.
이 신리에서 정산은 또 전주로 가는 큰길을 만났다.
늙은 중이 물었다.
"전주 가실라요?"
"아입니더! 아입니더!"
정산이 두 손을 내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디 우리 절에 하루 유하고 가시오."
"아이고 스님, 고맙심더."
갈 길을 몰라 망설이던 참이라 정산은 그 말에 고마워 고개를 숙였다.
신리에서 전주 가는 길을 외면하고 발길을 돌리면 물길이 좋은 상관리 계곡이다.
1시간 남짓 계류를 거슬러 올라가니 만덕산 자락에 접어드는 초입에 절 하나가 보였다.
"저그 정수사(淨水寺)도 진묵대사께서 중창하셨지라.
가서 물 한 바가지 마시고 산을 오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