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며 듣는 네 번째 시간이다.
이번 주제는 ‘우린 배운대로 살기로 했다: 학생 때의 배움을 졸업 이후에도’ 배운바를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성혜님과 채진님을 초대한다.
캠퍼스와 세상 속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이행 전략은 공동체, 한몸살이였다. 학교에서의 배움은 마치 자기 전공처럼 활동하던 기독교 동아리에서 함께함으로 배웠다. 함께 배우고 함께 운동하며 작은 실재들을 만들어 갔으니.
그러나 세상에서의 실재는 달랐다. 세상의 이행 전략은 진로 정하고 기술과 능력을 쌓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 동아리에서의 시간과 만남은 점점 뜸해지고 소위 소명캠프(졸업 취업을 위한 활동으로)로 향한다. 졸업과 취업이라는 다음 과제? 낯선 곳으로 향하기 전이라 불안과 두려움에 지금껏 하던, 내게 너무도 중요하던 기독교 동아리에서의 시간은 줄어든다. 간절히 해오던 운동들에 대한 회의는 덤으로..
이런 상황에서 만날 수 있는 선배들이라고는 흔히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들 뿐이었다. 그 선배들 또한 이전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뒤로 하고 사회에서의 적응과 성공을 위한 삶이었고 그들의 기운은 변해있었다.
결국 각자도생하며 어떻게든 취업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지만 몸도 마음도 준비되지 않았기에 적응은 쉽지 않았다. 사회란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서로의 신앙 고민을 나누고 꿈에 대한 나눔이 있지는 않다. 결국 부동산, 돈, 결혼과 같은 질문, 나눔이 전부다. 특별히 다를 것이 없다. 할 수 있는 말이 이거 밖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만난 친구들. 다시금 어떻게 살 것인지 고민하고 나눈다. 방향은 두 갈래로 나뉜다. 지금 당장 공동체로 살아가자! 아니면 지금은 조금 더 실력을 쌓고 40-50대에 시작하자고. 결국 후자는 다시 각자의 일상으로 흩어지자는 얘기다.
공동체로 가게 된 이유는 사회에서 나답게 살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바로 살지 못하던 모습에서 다시 살고픈 마음, 생존을 바란 마음. 바라던 것은 그게 전부였다. 학생 때 배웠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이행 전략인 공동체가 다시금 떠오른다. 다만 차이라면 학생 때는 공동체라는 것이 가치와 추상이었다면 지금은 먹고 마시고 노는 일상인 실재라는 거.
다양한 실재들 만나간다. 교회인 두레, 자매 공동체방에서 서로 살피고 돌보는 관계로 만나간다. 같이 산다는 무게감 있지만 다투면서도 배우고 서로 알아가고 갈등 해결하는 방법도 배워간다.
혼인도 기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법으로. 꾸밈도 공연도 장소도 먹거리도 축하도 함께 사는 이들이 준비하고 그들과 함께 누리는 잔치가 된다. 일도 마을 중학교에 교사로 아이들 만났다. 이 삶으로 살자 초대하고 가르치는데 졸업 후 사회와 같은 똑같은 흐름, 구조 속에 살게 하는 무책임함에 부끄러움 느껴 이 문제의식 갖고 살림학 연구소도 시작한다. 함께 살아가는 밝은누리 뿐 아니라 여러 학교, 공동체와 연대 하는 연구소. 대안적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독교 동아리하며 공동체에 대해 배우고 이렇게 살아가게 됐다. 일상의 배치와 관계가 변하니 내 삶이 달라진다. 가치와 성향을 떠나서 함께 사는 삶이 평탄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하나님은 겨우겨우 견디며 살거나 세상의 거짓된 안정에 만족하며 살아가길 바라지 않으신다. 이러한 삶의 충만함으로 초대한다.
‘다른 것보다 하나님께 가라’ 예수님도 모든 일을 마치시고는 기도하러 가셨다. 내가 살고자 하는 삶을 하나님이 인도하실 테니 잠잠히 찾고 멈춰 구하길.
대학 시절 기독교 동아리 하며 꽃길에 태클이 걸렸다. 인생 항로를 바꾸게 되는 사건이었다.
잘 신앙하는 삶이라는게 그저 열심히만 살면 되는줄 알았다. 열심히만 살면 사회도 세상도 변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저 열심히만 산다는건 나 역시 그 구조를 열심히 따르며 동일한 삶을 사는 것 뿐이었다. 오히려 동조하고 그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들고있던 것이다. 구별된 삶이 아니었던 거다.
그래서 대안적인 삶을 살려고 한다. 현실을 직시하고 다르게 살고자 할 때 혼자라면 또라이가 될 수밖에 없지만 함께면 미쳐도 괜찮다. 또라이 미친놈 소리 듣더라도 함께 하는 관계가 있다면 이겨 나갈 수 있으니까.
이 삶을 살면서도 잘 몰랐지만 10년이 지나니 내 기도를 들으시며 인도하고 계심을 알게된다. 그리니 기도로 기초를 잘 쌓아 가자.
그 삶을 돌아보자면 익숙하던 관성을 벗어나 스스로 멱살 잡으면서까지도 끌고 가던 삶이다. 이전의 삶에서 탈주해 서울을 벗어나고 농촌으로 향한다. 그렇게 교육, 의료, 놀이 문화까지 기관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창조성과 주체성으로 함께 새로운 것들 만들어 간다. 중증 아토피 있어 많이 올라와 일상을 살기 어려운 때가 있었는데 아파 일어나지도 못할 때 함께 하는 이들이 나가서 뛰라고 했다. 힘들어도 땀흘려 운동하며 몸의 순환이 일어난다. 중풍병자의 친구들 같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살리는 관계다.
함께라면 월 100만원 벌더라도, 심지어 백수여도 괜찮다. 내 삶이 관심 없는 농촌이어도 사회의 흐름 속에 있지 않아도 괜찮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삶,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이면 된다.
이야기 나눔 마치고 이어진 질의응답 통해서도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더욱 분명히 드러나기도 한다.
이 삶을 아무리 전한다고 한들 낯설기에, 잘 모르는 것이라 온전히 이해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와서 보라고!! 직접 경험하고 스스로 깨달아 가길 바란다. 말로 명제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닌 변화된 우리의 모습 통하여 삶을 전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폐쇄적이지는 않은지 질문이 있었다. 인간은 터를 이루며 사는 존재이고 한계가 분명 있다. 그러나 구심과 폐쇄는 다른 것이다. 구심 없이는 한몸살이를 할 수 없다. 지금의 시대우상에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구심으로, 분명한 공통된 명을 갖고 살아가는 구심 있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공동체가 닫혀있으면 가능성은 없어진다. 그러니 명확한 구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열려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새로운 관계, 일상, 삶이다. 대안 대조 대항의 삶이지만 한 번에 전환되지는 않는다. 한 번에 변하라고 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수위대로 천천히 분명하게. 이 배움들을 하나씩 체화하여 실제 삶으로 살아가면 된다. 지금 당장은 못하더라도 해가는 이들 있기에 그 문화 속에서 비슷해져가기도 한다. 내가 어느 수위만큼 못한다고 그 누구도 정죄하지 않고 함께 하는 이들과 함께 수련해 간다. 식의주락 먹고 입고 살고 노는 것의 대안적 삶이기에 욕망의 전환을 이뤄 어떤 모습이더라도 세상의 기준과 다를지라도 비참하지 않고 즐겁게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