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낫 후손으로서 한 가문의, 기계유씨의 특징을 단정지어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아무리 하나의 성씨가문이라 하나 사람이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 사료를 통해 가문의 내력과 선조의 업적을 통해 비교적 객관적으로
서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카페지기인 본인이 수많은 족보내용을 이리저리 뒤적여 보고
사견식으로 적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근거를 정확히 제시하려 노력하였다.
2. 兪씨 가문의 정통성
기계유씨는 兪氏(유씨)성을 쓰는 32개의 가문중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실제로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에서 178,209명중 기계兪氏가 113,430명을로 64%를 차지하였다.
나머지 30%가 분포상 경주兪.인동兪.장사兪.강진兪, 무안兪,고령兪씨등 여러본(本)관이
차지하고 있지만 기계유씨가 대종임을, 즉, 兪씨의 본 뿌리는 기계유씨임을 조선시대부터
문헌에서 정확히 밝히고 있다. 兪씨 중에서도 중심인 것이다.
이를 더욱 뒷받침 하는 것은, 경주兪씨등의 족보를 살펴본 결과 선대가 같음이 증명되었다.
2000년대 들어 실시한 인구조사 기록을 보건데, 지금의 많은 兪(유)씨 성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현대에 들면서 자신이 기계유씨인지 모른채, 새로운 집성촌을 중심으로 새로운 본관을
만든것이다. 兪씨 성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경우 그 가구수와 인구수가 대부분 100~200가구의
400~500여명인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지역적으로도 당시 아찬공 유삼재의 후손 유의신이 고려태조(왕건)와 관련해 기계호장이 되었던
것 또한 그 정통성과 가문의 역사성을 증거하고 있다. 지금의 기계는 신라당시 '경주'였다. 경주
기계고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본관을 따질때 신라의 대 재상출신이며 고려초 그 가문의 힘이
인정되었던 명망있는 6두품 집안임이 인정되는 것이다. 고려정부에 있어서 기계유씨는 '신라의
대대를 이은 충신가문이자 지방호족'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통성과 3000여년의 역사성을 입
증해 주고 있다.
분명한 것은 신라말~고려초 '성씨와 족보를 갖고 있는' 몇 안되는 유력한 가문이었던 것이다. 한
국의 족보사를 볼때, 기계유씨는 몇 안되는 초기 '족보를 형성한' 가문에 속함이 기록되어 있다.
3. 역사의 중심에 섰던 기계유씨
본래 모든 가문과 사람은 한뿌리요, 한 민족인 것은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자명한 것이다.
그러나, 사회가 발달하며 공동체가 생겨나고 특히,가문의 개념과 보학이 발달하며 일개 가문은 그
나름의 전통과 기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역사에 있어 나라를 다스린 임금뿐 아니라 모든 민초가 역사의 주인공이 되겠으나, 중요한
역사적 장면마다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하고 더욱이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면 '역사의 중심에 섰다'라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계유씨에 대한 일반적인 평은 '역사를 통털어 중도를 지켜왔고 중용을 취하여 대체로 조촐한,
그러면서도 충직한 선비의 모습을 넘지 않은것' 이란 것이다.
그렇지만, 본인이 살펴본 바로는 그러한 면 뿐만 아니라, 강한 지조와 시대의식속에 역사의 중심
에 서서 최선을 다한 가문이었음을 발견했다.
확실한 그 근거들을 살펴보자.
기계유씨는 고려 전기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여러대에 걸쳐 은인자중하였다.이유는 무엇일까 ?
신라의 명망높은 충신집안이어서였다. 시조께서는 신라6두품이 오를 수 있는 최고관직인 아찬 (기계에 내려가 직접 전해들은 바로는 좌아찬이셨다 함. 조선의 좌의정)이었다.
왕족조차도 쉽게 될수없는 6두품만이 주로 오를 수 있는 자리였다. 문헌에도 기록되었듯이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세우면서 시조(아찬공 휘 삼재님)의 후손인 휘 의신님이 왕건의 유화, 인정책에 호응하지 않고 관직을 받지 않자 세대를 이은 신라의 신하라 하며 기계지방의 호장으로 강속시키고 다스리도록 한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는 태조왕건에게는 괘씸하게 보였을 터이며 한편으로는 신라에 대한 절의였던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일관되게 오래된 비석문과 문헌에 고증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방을 중심으로 시조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왕조아래에서 은인자중하였을 것이어서 자연스럽게 고려초기에 관직에 나가는일이 드물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조후기에 이르러 일족이 경기도와 충청도 일원에 이주하였다.
이에 대한 근거를 보면, 문중의 가장 큰 파들 중의 하나인 충목공파가 경기 하남과 강원도에, 자산공파가 남양주 화도에, 단성공파가 경기 고양에, 그리고 충남 서산,연기등지에 여타 파가 자리잡은 것등이다.
더욱더 명확히 뒷받침 하는 것은 기계유씨 문중의 15개파(이 파를 형성케 하신 분을 중시조라 한다) 형성시기를 보면(일부 그 시기가 다른 것도 있으나) 대부분 중시조가 항렬로 따져 볼때 시조로 부터 9대조~13,4대조(참고로, 2004년 현재 기계유씨는 그 세가 28대~31대까지 형성되어 있다. 주로 근(根),병(炳),재(在),선(善)자 돌림자가 그것이다)로서 이분들이 당상관에 올라(그렇기 때문에 파를 형성할 정도로 높은 관직에 오른 것이다. 중시조 되기가 어찌 그리 쉬운 일이던가?) 기계유문을 떨치던 시기는 조선 초기이다.
그렇다면, 조선초기가 포항기계에서 중부지방으로의 이주시기란 말인가?
아니다.(이걸 분석해 냈을땐 정말 짜맀했어요!^^*).
이주를 하고 노비를 부리고 가세를 확장하고 가문을 정비하고 마을을 다스리고 서당등을 통해 벼슬로 나아가게 하는 등 '토착화기간'을 고려하면 3~4대 앞선 7~10대조시기에 이주한 것을 어렵지 않게 추정해 볼 수 있다. 바로 고려후기인 것이다.
확고히 뒷받침 하는 것으로서 영토의 확장과 통일조국, 외국과의 무역성립, 평화시기의 도래 등으로 역사적으로 인구이동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점이다. 정확히 맞아 떨어진다.
아무튼,고려 말기에 이르러 다시 벼슬에 뜻을 두어 6대조인 유득선이 좌복사(지금의 장관)를, 그 아들 7대조 유선이 봉익대부 판도판서(차관보)를, 그 아들 8대조 유승계가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지내 시기상으로 신진 사대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에 조선 세종때 직제학을 지내며~연산군~중종대에 이르는 조선중기이전까지 정치의 중앙에 있었으며, 사림정치가 시작되는 연산군이후에는 조광조계의 기호학파를 이루었다.
(작금의 현실로 비춰본다면, 열린우리당 정도라고나 할까?) 조광조의 개혁정치의 핵심자리였던 기묘현랑직이 우리 기계유씨 선조였다. 서인(기호학파임)세력의 핵심 이었다. 더군다나 노소론붕당의 발화재가 된 가례원류의 저자가 우리 선조 '유계'라는 분이다.
이는 지역적으로도 정확히 일치하는데, 하남,남양주,고양,충남의 기계유씨들이 서인세력(기호학파)의 중심을 이뤘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서인이 그렇듯 왕(王)보다는 대신(臣)이 주도하는 부국강병에 관심이 많았고 상업과 기술발전에 호의적이었다.(국사교과서 참조했음)
이러한 기계유씨 가문은 대체적으로 조선 후기와 근대에 걸치면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이게 된다. 국한문 혼용체,최초의 미국유학생이고 서유견문의 저자이신, 그리고 최근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신 구당 유길준님과 제헌헌법초안자이자 고대총장이셨던, 더군다나 일제의 사법고시를 거부하며 독립운동에 임하셨던 현민 유진오님(그 아버지 되시는 분도 우리나라 법학의 아버지로 불리우시는 유치형님이시다)이 근대사의 큰 획을 그은것은 조선 서인,기호학파의 대를 이은점 이다.
하남시의 충목공파 인 유성근님(기계유씨28대)이 국회의원으로 배출되었던 것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최근들어 문화재청장으로 유홍준님(기계유씨 27대)이 관직에 오른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4. 마치며
비록 조사하고 살펴본 내용이 부족하고 조잡하기 그지 없으나 부단히 찾아보고 연구하여
기계유씨로서의 자긍심을 고취시키고 선조들의 얼을 되살리는데 노력해야 할 것이다.
과거 선조들의 뜻을 이어받아 올바른, 개혁있는 길을 걸어야겠다.
1991년 (신미보) 족보가 새로 만들어 졌으니 30년쯤 후인 2020년께 족보가 만들어 질 것이다.
청양(靑陽)에서 29번 국도를 달려 홍성읍을 지나 예산(禮山) 쪽으로 20여리 쯤 가다보면 너른 내포(內浦)들을 지나 홍북면 노은동에 이르게 된다. 마을에 들어서면 내포로 빠지는 서남쪽을 제외하고 삼면이 아담한 산으로 둘러싸여있어 별다른 정감이 묻어난다. 600여 년 전 조선 초까지 만해도 대토지와 사병을 거느린 토호세력들이 전국에 산재해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너른 내포들을 기반으로 한 세력가였던 박첨공이 살았던 곳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우리가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찾아본 선조 참판공[휘 해(解)]께서는 당시에 박첨공의 넷째 사위였다고 한다.
참판공의 선대의 묘소가 경기도 평택과 안성인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출생하신 것으로 생각되지만, 박첨공의 넷째 따님인 죽산박씨 할머니와 혼인을 하면서 이곳으로 이주해 오신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처가살이는 당시의 습속상 그리 흉 될 것이 없는 흔한 일이기도 하였다. 임진왜란 이전의 사대부가의 분재기(分財記:재산분배 문서)를 살펴보면, ‘출가외인’이라 하여 출가한 딸에게는 재산을 분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왔다.그러나 이러한 조선시대의 통념적 인식관행을 깨는 자료가 최근에 발견됨으로써 재산분배에서 있어서 남녀가 평등했음을 입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중자녀균분상속제(衆子女均分相續制)를 실시한 조선 초기까지는 혼인에 의해서 얻은 처가편의 토지나 조상의 관직이나 공로로 점유한 사전(賜田)·직전(職田) 등에 따라서 그곳에 자손이 모여 성립된 동성촌락의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 이곳 박첨공의 집에서 함께 살았던 참판공과 성승장군과는 동서 간이었지만 참판공이 20살 연하여서 그의 아들인 매죽헌 성삼문 선생과 함께 좋은 환경에서 학업을 닦아서 세종18년(1436년)에 함께 초시(初試)를 보아 참판공은 ‘진사과(進士科)’에 성삼문 선생은 ‘생원과(生員科)’에 각각 합격하셨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공은 24세 되는 여름날 냇가에 목욕을 하다 알 수 없는 독충에 물려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세종19년 서호공[휘 기창(起昌)]은 유복자로 태어나시게 되었다.
평소에 손아래 동서인 참판공을 아꼈던 성승장군은 같은 가문의 동지중추원사 충목공[휘 응부(應孚)]을 가까이 지내고 있었음을 세조2년에 단종복위운동 단종복위운동1[ 端宗復位運動 ]를 모의할 때 함께 거사하기로 한 사실로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변절자의 밀고로 세조는 관련자들을 색출에 혈안이 되어 처참한 도륙을 자행하였다. 이러한 ‘단종복위운동(세조)’은 이성계 위화도 회군, 왕자의 난(태종), 중종반정(연산군), 인조반정(광해군), 소론의 반정(영조 4년), 갑신정변, 경복궁 민비시해사건 등과 함께 조선왕조를 얼룩지게 한 쿠데타의 하나로 기록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학적인 대의명분을 무기로 수양대군의 불의에 저항하며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산화한 일군의 의절신(義節臣)들이 세칭 ‘사육신과 생육신’들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참판공의 유일한 혈육인 첨추공의 생활 근거지였던 노은동 박첨공의 집은 하루아침에 쑥밭이 되어버렸다. 그것은 박공가가 성승장군의 처가이자 성삼문선생의 외가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서호공은 20세로 장성해 있었는데 어머니 죽산박씨 할머니를 모시고 처가인 능성구씨의 연고가 있는 비인 통박골로 피신하여 간신히 화를 모면하게 되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이후로 이곳 비인이 500여 년래의 기계유씨 세거지가 되었던 까닭이다.
일반적으로 집성촌은 그 조상의 연고지 근처에 촌락을 형성하고, 또 될 수 있으면 그곳에서 가까운 거리에 사는 대등한 사회적 신분을 가진 타성의 씨족성원과 통혼하는 경향(혼반)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동성촌락들의 거주형태적인 특성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문은 ‘죽산박씨’를 시작으로 ‘창녕성씨’,‘능성구씨’, ‘의령남씨’가문과 세대를 내려가면서 혼반관계가 중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는데 모두가 당시에 이 일대의 명문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서호공의 넷째 자제이신 경안공[휘 여림(汝霖)]은 성삼문 선생의 당숙(堂叔)인 성희공의 손녀와 혼인 하게 되었는데, 이 창녕성씨 할머니의 친정 백부(伯父)가 생육신의 한분인 문두 성담수 선생이다. 이러한 연줄이 빌미가 되어 첨추공은 사돈가의 성준공(영의정)이 광해군 때 갑자사화(甲子士禍)에 화를 입게 되면서 그의 당인으로 지목되어 진도에 유배생활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경안공의 맏 자제이신 기계부원군[휘 관(?)]과 생육신 추강 남효온 선생의 손녀로 유일한 혈육으로 살아남은 의령남씨와 혼인을 하면서 생육신 가문과 두 번째로 연줄을 맺게 되었다. 남효온 선생은 생전에 소릉(단종의 어머니 능)의 복위를 상소했다고 하여 연산조 때 부관참시를 당하고 그의 아들에게도 연좌되어 집안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었다. 이러한 와중에도 이 의령남씨 할머니는 추강선생이 남긴 저술을 잘 간직하여 우리가문으로 모두 가지고 오셨다. 이 저술들은 금서(禁書)가 되어 오랫동안 출판되지 못하고 가문 내에 비장되어오다가 ‘육신전(六臣傳)’은 암암리에 필사되어 전국방방곡으로 번져나가 세조 당시 육신들의 처참한 최후가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이상이 개략적으로나마 살펴본 우리 기계유씨 가문이 사육신의 가문이면서 4대에 걸쳐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가문과 얽히고 설켰던 고난에 찬 집안내력이다. 말하자면 사육신의 ‘충목공 유응부장군’과 ‘충문공 성삼문선생’, 생육신의 ‘문두 성담수선생’과 ‘추강 남효온선생’과의 직간접적인 관련성으로 인하여 그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으로 선대이래의 정신적인 자양분으로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사실은 참판공께서 선대의 세거지인 안성에서 혼반으로 홍성에 정착하신 이후로 첨추공께서도 역시 혼반으로 비인으로 이주하신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한 부득이한 사정으로 정부인 죽산박씨의 묘소를 비인에 모시게 되자, 양위를 한곳으로 모셔서 합장하려고 부단히 애쓴 흔적과 결국에는 홍성과 비인에 그대로 모시게 된 당위성을 전래의 가전을 통해서 상세하게 밝히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동성촌락과 동성집단의 분포와 그들의 선조의 묘지 분포, 그리고 동성성원의 지역적 통혼권은 종파·종가가 위치하는 동성촌락을 중심으로 거의 동심원적 확산의 양상을 보이고 있으면서 동성집단은 지연적(地緣的) 응집성을 보이고 있는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참판공(휘 해)은 24세의 애석하게 세상을 떠나셨지만, 아들 첨추공 후로 손자 경안공과 증손 숙민공이 정경의 자리에 오르고 현손 충목공이 정승에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로자손들은 번창하여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명문사족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니, 사후 400여년간 3정승과 14판서에 100여명의 문과 급제자(사마급제:284명)를 배출하였고, 외손으로는 5명의 왕비가 났다.
1930년대만 하더라도 동성촌락의 수가 전국촌락의 약 반 정도에 달하고, 그 성립연대도 300년에서 500년 이상의 것이 그 태반을 차지하였다. 조선 중기 이후 종법사상(宗法思想)과 씨족조직(氏族組織)의 광범한 보급은 16세기와 17세기에 다수의 동성촌락이 출현하고 있는 사실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따라서 우리 가문에서도 15세기 중반에 첨추공께서 입신하신 이래로 비인에 정착하게 되면서 비로소 이 시기부터는 종법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우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문중재산인 족전(族田)을 형성하며, 종중조직을 체계화하여 동성촌락이 출현하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에서 사대봉사(四代奉祀)를 함께 하는 동고조8촌(同高祖八寸)의 당내친(堂內親)들은 강한 결속력을 가지고 있게 되었는데, 특히 후손들이 중앙의 정계에 진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명문사족으로 그 관직에서 얻은 공신전(功臣田) 등의 사전(賜田)이나 직전(職田)이 있는 지역으로 보이는 경기? 충청 ? 경상일대로 분가, 분촌하여 육파(六派)를 이루고 동성촌락을 형성해 나간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그 자손이 직계선조 가운데서 관작이나 학문에 뛰어난 사람을 세워서 그가 씨족성원들에 의하여 인정되고, 또 그 거주지역에서도 유림(儒林)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이 그 명성을 인정하였을 때, 그를 파시조·중시조(中始祖) 또는 입향조(入鄕祖)로 삼아 새로운 파를 형성한 경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를 입증하고 있는 사실은 서천군 비인면 남당리(통박골)에 소재하고 있는 청절사는 나라에서 사액한 사우로서, 숙종 38년(임진:1712)에 건립되어 숙종46년(경자:1720)에 서호유림과 예관의 추천에 이 해 서호공과 경안공이 배향되었으며, 배향일에 국왕이 친히 예관을 보내어 치제문을 내렸다는 것이다. 이 사우에는 그 후 기계유씨 명현중에 충목공(휘 홍), 충간공(휘 황), 문충공(휘 계) 등 오위를 배향하는 기계유씨 세덕지사가 되었다. 이로써 비인이야말로 그 후손들이 시대의 상황과 연고에 따라서 전국으로 산재하여 살고 있다하더라도, 절의의 가문전통을 언제나 간직할 수 있게 하는 마음속의 귀의처로, 문중의 영원한 정신적인 구심점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 전기 단종의복위를 위해 일으켰던 거사를 이르는 말.
1453년(단종1) 10월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영의정황보 인(皇甫仁),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을 제거하고 스스로 영의정이 되어 조정의
실권을 잡았다. 1455년 윤6월에는 자신의 추종세력인 정인지(鄭麟趾) ·신숙주(申叔舟)등에 의해 국왕으로 추대되었으며, 단종은 상왕(上王)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계유정난 직후에는 김종서의 당여(黨與)로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로 있던 이징옥(李澄玉)이난을 일으켰다가 실패하였으나 민심을 크게 자극하였다.
한편 세조의왕위찬탈은 과거 세종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집현전의 일부 학사 출신으로부터심각한 저항을 받았다.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 등의 유신(儒臣)들은 무관인 유응부(兪應孚) ·성승(成勝) 등과함께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하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1455년 10월(세조1) 명(明)나라의 책명사가 조선에 오겠다는 통보를 계기로 56년 6월 1일 창덕궁(昌德宮)에서 명나라 사신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 때 거사할 것을 계획하였는데, 마침 이날 세조 제거의 행동책을 맡은 별운검(別雲劍)이 갑자기 폐해져서 거사는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거사계획이 탄로되었음을 두려워한 김질이 장인 정창손(鄭昌孫)에게 거사계획을 누설하고,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고변함으로써 거사 주동자인 사육신(死六臣)과 그외 연루자 70여 명이 모두 처형되면서 단종복위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조는 이 사건 직후 유신들의 중심기관인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經筵)을 중지하였으며 새로운 유신들을 발탁하여 이들을 중심으로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다.
2.<사육신(死六臣)>: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악형에도 굴하지 않고 순사한 조선 전기의 6충신. 곧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을 말한다.
이들은 전에 집현전 학사로서 세종의 신임을 받고, 문종으로부터는 나이 어린 세자(단종)를 잘 보필하여 달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로서,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을 통하여 안평대군과 황보 인 ·김종서 등 3공을을 숙청하여 권력을 독차지한 끝에 1455년에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하자, 동조자를 규합하여 단종을 다시 왕위에 앉힐 것을 결의하고 그 기회를 살피고 있었다.
이들은 1456년 6월 본국으로 떠나는 명나라 사신의 환송연에서 성삼문의 아버지 성승과 유응부가 국왕 양쪽으로 칼을 들고 지켜서는 운검이란 것을 하게 됨을 기화로 세조(수양대군) 일파를 처치하기로 결정하였으나 이 사실이 사전에 누설되어 계획은 좌절되었다.
3.<생육신(生六臣)>:
조선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탈취하자 세상에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절개를 지킨 여섯 사람. 사육신의 대칭으로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원호·이맹전·조려·성담수·남효온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