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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柳格의 비명(碑銘) 유근(柳根)
나의 백씨(伯氏) 정언공(正言公)이 만력(萬曆)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에 세상을 떠나 괴산(槐山) 선영(先塋)에 장사지낸 지 34년이 지난 정사년(丁巳年, 1617년 광해군 9년)에 아우인 나, 유근(柳根)이 비로소 비석에 명(銘)을 새기게 되었다. 이는 감히 늦추려 했던 것이 아니라 대체로 기다릴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력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백씨를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추증하였는데 이는 둘째 아들 유시행(柳時行)이 선무 공신(宣武功臣) 원종(原從) 1등에 참록(參錄)되고, 불초 동생 유근이 외람되고 분에 넘치게 호성 공신(扈聖功臣) 2등을 받으면서 호성 원종(扈聖原從) 2등에 추록(追錄)되어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으며, 장남 유시회(柳時會)가 선무 원종 1등에 참여하면서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에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ㆍ홍문관ㆍ예문관ㆍ춘추관ㆍ관상감사 세자사(世子師)에 여러 차례에 걸쳐 추증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유시회가 위사 공신(衛社功臣) 및 형난 공신(亨難功臣) 원종 1등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아! 태평 성대의 조정에서 내린 벼슬이 여기에 이르렀고 보면, 이것이 어찌 두 아들과 한 아우가 이룰 수 있는 일이겠는가? 실로 백씨가 선을 행한 보답이 별세한 뒤에 드러난 것이다.
백씨의 휘(諱)는 격(格)이요 자(字)는 정부(正夫)이다. 진주 유씨(晉州柳氏)는 좌우위 상호군(左右衛上護軍) 유정(柳挺)부터 비로소 저명해졌는데, 두어 대(代)를 거쳐 금자 광록 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판리사(判理司)에 추봉(追封)되고, 행직(行職)으로 은자 광록 대부(銀紫光祿大夫)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를 지낸 유홍림(柳洪林)과 광정 대부(匡靖大夫)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 판민부사(判民部事) 상호군(上護軍) 양화공(良和公) 유유(柳栯)란 분이 있었고, 그 후에도 저명한 인물이 있었다. 그 후 5대 뒤에 휘 종식(宗植)이란 분이 있어 가정 대부(嘉靖大夫)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지냈는데, 이분이 바로 휘 영정(永貞)을 낳았다. 유영정은 바로 나의 고조(高祖)로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백부(伯父) 형조 참판공 휘 창문(昌門)이 가정 을축년(乙丑年, 1565년 명종 20년)에 전라도 관찰사에 임명되어서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고, 고조비(高祖妣)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숙인(淑人)에 추증되었다. 증조 휘 팽수(彭壽)는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을 지냈는데 백부가 귀하게 되어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불초한 증손 나, 유근이 비천한 재주로 진원군(晉原君)에 훈봉(勳封)됨으로 인하여 여러 차례에 걸쳐 이조 참판ㆍ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증조비 권씨(權氏)는 좌사간(左司諫)을 지낸 권기(權技)의 딸이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낸 권우(權遇)의 손녀인데, 정부인(貞夫人)에 추증되었다. 사간 권기의 묘소는 괴산(槐山) 영진촌(永津村)에 있었는데, 증조와 증조비는 처음에 같은 군 몽촌(夢村)의 영등산(永登山)에 장사지냈다가 그 후에 영진촌으로 이장하였다. 할아버지 휘 윤(潤)은 예빈시 별제(禮賓寺別提)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할머니 진산 강씨(晉山姜氏)는 정부인에 추증되었는데, 이는 백부의 추은(推恩)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강세홍(姜世弘)의 딸이며 동북면 순문사(東北面巡問使)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伯)의 후손이다.
아버지 휘 영문(榮門)은 자(字)가 흥숙(興叔)으로 성균 진사(成均進士)를 지냈는데, 증손 유적(柳頔)이 정정 옹주(貞正翁主)를 아내로 맞아 들여 진안위(晉安尉)가 되자 통훈 대부(通訓大夫)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불초 유근이 출계(出系)하여 아버지의 종제(從弟)에게 양자로 간 것은 곧 유명(遺命)이었다. 그러나 추증하는 은전은 직접 낳아 준 부모와 조부모에게는 미치지 못하므로 나로 인한 추증은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죽산 안씨(竹山安氏)로 숙인(淑人)에 추증되었는데, 아버지는 휘 세언(世彦)으로 이조 정랑(吏曹正郞)을 지냈으며 삼중 대광(三重大匡) 문하 찬성사(門下贊成事) 판호조사(判戶曹事)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을 지내고 시호가 양양공(襄良公)인 안한평(安漢平)의 후손이고, 어머니는 진주 유씨(晉州柳氏)로 성균 사성(成均司成)을 지낸 유의신(柳義臣)의 딸이다.
백부와 아버지는 일찍이 조성(趙晟) 선생의 문하에서 유학하였는데, 상공(相公) 청천(聽天) 심수경(沈守慶)과는 동학(同學)이다. 아버지는 지극한 행실과 두터운 덕을 지녀 효성스럽고 우애로웠으며 돈독하고 화목하여 벗에겐 신의가 있었으므로 종족과 친구들이 날마다 벼슬로 현달하기를 바라서 그 은택에 의지할 것을 생각하였다. 어머니는 부인 중에 사군자의 식견이 있어서 경사(經史)에 박학하고 통달하였으니 사리에 밝은 외할머니의 가르침에서 얻은 것이 많았다. 어머니 나이 9세에 정랑공이 별세하였는데, 두 아들 모두 똑똑하였으나 3년 봉제(奉祭)하는 일을 외할머니가 명하여 어머니가 주관토록 하였으니, ≪시경(詩經)≫에 이른바 ‘공손한 막내딸이로다.’ 한 것이 이에 해당될 터인데, 이런 경우란 참으로 세상에 드물다. 우리 가문에 시집을 오게 되자 대부인(大夫人)이 가장 사랑을 쏟았으므로 백부가 항상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대부인이 제부(弟婦)를 매우 마땅하게 여기니, 우리 일가의 행운이다.” 하였다. 어머니가 가정(嘉靖) 을사년(乙巳年, 1545년 인종 원년) 2월 9일에 백씨를 낳자, 대부인이 매우 기뻐하면서 항상 “이 아이가 마침내 반드시 우리 가문을 일으킬 것이다.” 하였다.
백부 참판공이 을사 사화의 여화(餘禍)를 입어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탄핵과 삭출을 당하였고, 계축년(癸丑年, 1553년 명종 8년)에 다시 서용되어 우봉 현령(牛峯縣令)으로 나갔다가 온양 군수(溫陽郡守)로 옮겼다. 병진년(丙辰年, 1556년 명종 11년)에 대부인이 군(郡)에 있다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가 백부를 따라 영등산 묘도(墓道)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아버지가 집상(執喪)함이 예제(禮制)를 넘어섰는데 다음 해 6월 14일에 마침내 상제(喪制)를 감당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때는 나의 어머니가 서울에 있었는데, 부음이 들리자 어머니가 가슴을 치며 통곡하다가 기절하기까지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백부가 아버지를 선영의 서쪽 줄기 계좌 정향(癸坐丁向)의 묘원(墓原)에 장사를 지내고 서울 집으로 반혼(返魂)하였는데, 그 당시 백씨의 나이 겨우 13세였고, 나는 9세였으며, 남경철(南景哲)에게 출가한 막내 누이는 3세였다. 어머니가 억지로 목숨을 부지한 것은 다만 슬하에 우리 3남매가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고통을 참고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면서 우리들을 기르고 가르쳤다. 백씨는 상복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조석(朝夕)으로 곡하고 제수(祭需)를 올렸는데 한결같이 성인 같았다. 우리 형제는 어머니의 보호에 의지하여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융경(隆慶) 무진년(戊辰年, 1568년 선조 원년) 증광시(增廣試)에서 백씨가 진사에 합격하고, 경오년(庚午年, 1570년 선조 3년)에는 내가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임신년(壬申年, 1572년 선조 5년) 봄에는 내가 대과(大科)에서 장원 급제하였고,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 2월에 있었던 알성시(謁聖試)에서 백씨가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내가 다리가 마비되는 병을 앓아 정언(正言)으로 있다가 휴가를 내어 녹초가 된 몸으로 자리에 누워 지냈는데, 돌연 좋은 소식을 듣고서 저도 모르게 일어나 문을 나서 말을 타고 어머니를 찾아뵈었다. 어머니는 밤새 한편으론 슬퍼하고 한편으론 기뻐하면서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게 곡진하게 말하기를, “네가 이미 다행히도 성년의 나이에 벼슬길에 나섰고 이제 너의 형이 또 급제하였다. 미망인인 내가 즉시 죽지 않아 너희 형제들의 입신양명을 보게 되었으니, 이제 비록 죽는다해도 무슨 유감이 있겠느냐?” 하였다. 내가 이튿날 새벽에 병을 무릅쓰고 가서 사례를 드렸는데, 이날은 창방(唱榜)하던 날로 은영연(恩榮宴)이 있어 어머니를 위하여 경사스러운 자리를 베풀어드렸다. 얼마 후에 어머니가 병에 걸려 4월 2일에 마침내 세상을 떠나셨다. 백씨는 마음 속으로 마침내 벼슬하여 녹봉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여 원하던 뜻을 다할 수 있으리라 거의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망극한 슬픔을 품게 되었으므로, 시체를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울부짖어 쓰러지도록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였다. 백씨는 초상(初喪) 때부터 마실 것을 입에 대지 않아 지팡이를 짚고도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계빈(啓殯)할 때에는 배를 끌어 선영(先塋)의 묘도에 도달하여 선묘의 왼편에 어머니를 합장하였다. 그리고 불초한 아우를 이끌고 묘 옆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백씨는 혈기가 완성되지 못했던 전상(前喪) 때에 입은 상처가 이미 깊었지만 지금의 상에 더욱 성심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죽을 먹어 기력에 부쳤으나 쉬거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았다. 처음에는 졸곡(卒哭) 후에 당연히 현미밥을 올려야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소상(小祥)이 지나도 변하지 않았으므로, 친족과 벗들이 말렸으나 백씨의 뜻을 되돌릴 수 없었고 그리하여 어느덧 3년이 지났다.
불초 아우인 나는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 13년) 겨울에 양아버지의 병이 중하다는 소식을 듣고서 아픈 몸을 이끌고 가서 뵈었는데, 12월 7일에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신미년(辛未年, 1581년 선조 14년) 봄에 얼음이 녹자 물길을 따라 길한 곳을 점쳐 몽촌(夢村) 석정(石頂)의 선영에 장사지냈고, 양어머니가 집에 있기 때문에 만리현(萬里縣)의 선려(先廬)로 반혼(返魂)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의 궤연(几筵)은 백씨 혼자서 받들었고, 불초한 아우인 나는 실낱같은 야윈 몸을 이끌고 분주히 오고 갔는데, 날로 매우 몸이 쇠약해져서 거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백씨가 매일 밤마다 아우가 지탱하지 못할까 걱정하여 몸을 돌보지 않아 목숨을 잃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면려하면서 (나의 병간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백씨 스스로는 원기가 안으로 삭아지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하여 마침내 치료하기 힘든 병이 되고 말았다. 임오년(壬午年, 1582년 선조 15년) 여름에 상에서 벗어나게 되면서부터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까지 약을 복용하고 침을 써 보았지만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해 5월 2일에 끝내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享年) 겨우 마흔이었으니,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차마 무슨 말을 하겠는가?
백씨는 성품이 순후(醇厚)하였고 어려서부터 조숙하였다. 집에 들어가서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받들었고, 나가서는 유익한 벗을 사귀었다. 반포(反哺)하려는 효성스러운 마음에서 진실로 과거에 응시하는 일을 급하게 여겼으나, 일찍부터 의리를 밝히고 몸가짐을 단속하는 학문이 있음을 알아서 말하는 데는 어눌하되 선을 실천하는 데는 민첩하였다. 그리하여 태학에서 유학할 때 화려한 명성이 자자하였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모두 충신(忠信)한 장자(長者)라고 추앙하여 더불어 사귀기를 원하는 이들이 날마다 문에 끊임없이 이어졌다. 백씨는 포의(布衣) 때부터 이미 기대를 한 몸에 받아 학행(學行)으로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천거되어 임명되었다. 처음에 승문원에 뽑혀 들어갔다가 3년 상을 마치고 나서는 천거에 의해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었으며, 그 후 대교(待敎)로 전직되었다. 그해 가을에 천거에 의해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가 되었다. 당시 마침 황홍헌(黃洪憲)ㆍ왕경민(王敬民) 두 조사(詔使)가 왔는데, 승정원의 주서로서 응접하는 사무가 매우 많았다. 그러나 백씨가 평소에 글을 잘 쓰고 운필(運筆)이 나는 듯 하였으므로 조금도 멈칫거리거나 빠뜨리는 일이 없었다. 이에 지신사(知申事) 상공(相公)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같이 있다가 탄복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조사가 돌아가자 병으로 사직하니, 체직시키고 대교에 임명하였다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봄에 다시 주서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 사례하지 못하자 다시 봉교에 임명하였고, 가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옮겼다.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자, 체직시키고 인의(引儀) 겸 한성부 참군에 임명하였다. 가을과 겨울 이래로 두 번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 사례하지 못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584년 선조 17년) 봄에 또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일을 논하는 데에 구차하게 영합하지 않아 자못 간쟁하는 신하의 풍도가 있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그러자 체직시키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임명하였는데, 병이 위독해져 갔다. 다섯 번 정언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병장(病狀)을 올렸다. 그러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서로 의지하며 살아왔다. 아우인 내가 곁에 있지 않으면 백씨는 하루도 편치 못하였는데, 내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임명되었을 때 정사(呈辭)하고 백씨를 시병했었다. 백씨는 항상 혼자 거처하였는데, 하루는 부인을 불러 말하기를, “목숨의 길고 짧음은 운명이다. 내 비록 죽는다 해도 아우가 있어 근심이 없다.” 하였고, 자식들에게 말하기를, “너의 숙부가 있으므로 내가 오히려 살아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였으며,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내 기력은 너처럼 허약한 데는 이르지 않아 비록 죽을 먹더라도 오히려 지낼 수 있다 여겼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니, 매우 잘못이었다. 여러 자식 중에 유시회(柳時會)는 이미 장가들었으나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유시행(柳時行)은 가장 오랫동안 나를 시병하여 그 기력이 역시 매우 허약해졌을 터이므로, 내가 죽은 후에 반드시 나를 깊이 경계로 삼아 몸을 잘 건사할 방도를 지시해 주게.” 하였다. 사생(死生)의 즈음에도 죽음을 마치 낮과 밤이 매양 바뀌듯 예사롭게 여겼으니, 종용하여 동요치 않음이 이와 같았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조 참의에 추증된 이희천(李希天)의 딸이자 종실(宗室)인 정국 공신(靖國功臣) 운수군(雲水君) 이효성(李孝誠)의 현손녀(玄孫女)이다. 시집 온 뒤로 시어머니의 뜻에 어긋남이 없이 모셨고, 손님을 대하듯 공손히 남편 백씨를 섬겼으며, 친척과 비복(婢僕)을 대할 때도 모두 은의(恩意)가 있었다. 혼자 몸이 되고 나서 자식들을 의로운 방법으로써 가르쳐 8, 9읍(邑)의 수령이 된 아들들의 봉양을 받았고, 또 진안위(晉安尉)의 길례(吉禮)를 보았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정경 부인에 봉해졌으므로, 세상에선 이를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백씨보다 31년 후에 향년 일흔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갑인년(甲寅年, 1614년 광해군 6년) 9월 29일이었다.
슬하에 5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유시회는 품계가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여러 번 군수(郡守)를 지냈으며, 지금은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있다. 차남 유시행은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이조 참판에 추증되었으며, 3남 유시형(柳時亨)은 고령 현감(高靈縣監)이고, 4남 유시보(柳時輔)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인데, 나의 아들이 요절했으므로 유시보의 아들로 후사를 삼았으며, 5남 유시민(柳時敏)은 장가들지 못한 채 요절하였다. 딸은 정읍 현감(井邑縣監) 김출(金秫)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모두 6명인데, 유석(柳碩)은 유시회의 소생이고, 유적(柳頔)ㆍ유영(柳穎)은 유시행의 소생인데 유적이 곧 진안위이며, 유수(柳須)는 유시형의 소생이고, 유구(柳)와 유경(柳熲)은 유시보의 소생이다. 손녀는 10명이고 외손녀는 3명이다. 사인(士人) 민성청(閔聖淸)ㆍ진사 오준(吳竣)은 유시회의 사위이고, 사인 목성선(睦性善)은 유시행의 사위이며, 사인 김정(金鼎)은 유시형의 전처의 사위이고, 사인 경이후(慶貽後)ㆍ이기현(李耆賢)은 유시형의 후처의 사위이며, 유시형의 막내딸은 아직 어리며, 유시보의 세 딸도 모두 어리다. 사인 홍선(洪銑)ㆍ김종필(金宗泌)은 김출의 사위이다. 유석은 1남 1녀를 낳았고 유구는 2남을 낳았는데, 내외 증손은 남녀 16명인데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옛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물을 품고 덕(德)을 심었으나 그 빛남 민망히 여겼다네. 기다림 있어 발휘되니 백씨에게서였는데 성취는 참으로 더디고 빼앗아 감은 어찌 그리 쉬웠던가? 하늘이 어짊을 주었으나 수명은 겨우 불혹이었는데, 인망(人望)이 바야흐로 높을 때에 잠시 대간(臺諫)을 맡았다네. 선행은 보답이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은 떳떳한 이치이거늘, 신(神)이 이를 들어줌은 한결같이 어찌 이리 아득한가? 자신이 누리다가 때때로 거두어 갔으나 후손에게 열어줌은 끝이 없었네. 추은(推恩)과 사작(賜爵)이 황천에 미쳤으니, (선(善)을 쌓은 집안에) 반드시 넉넉한 경사가 있다는 말 지금에 이르러 어그러짐이 없네. 아들 넷이 모두 벼슬길에 올랐고, 불초한 아우인 나는 외람되게 공신(功臣)에 참여하였으며, 우뚝한 손자도 역시 부마(駙馬)가 되었다네. 부인은 혼자 몸이 된 후 31년 동안 여러 읍의 수령을 맡은 아들들의 봉양을 받으며 학발(鶴髮)의 고희(古稀)까지 살았고, 지란(芝蘭)과 옥수(玉樹)같은 뛰어난 자손이 앞에 늘어섰도다. 아마도 대대로 자손들이 이를 보존하리니, 이곳을 살피매 게으르지 말지어다. 비석(碑石)이 묘도에 있으니.
伯氏贈領議政碑銘 柳根 西坰
惟我伯氏正言公。卒於萬曆甲申。葬于槐山先墓之後。丁巳距甲申。三十四年。其弟根始克刻銘于石。非敢緩也。蓋有待也。萬曆乙巳。追贈伯氏承政院都承旨。以第二男時行參宣武功臣原從一等故也。不肖弟根猥忝扈聖功臣二等。追錄伯氏扈聖原從二等。仍贈吏曹參判。長男時會參宣武原從一等。加贈吏曹判書。甲寅。累贈議政府左贊成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蓋以特會叅衛社及享難原從一等故也。噫。聖朝錫命及此。是豈二男一弟所能致㦲。實伯氏爲善之報發於身後也。伯氏諱格。字正夫。晋州之柳氏。自左右衛上護軍挺始著。歷數世。有追封金紫光祿大夫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判理司。行銀紫光祿大夫樞密院副使洪林。匡靖大夫都僉議贊成事,判民部事,上護軍,艮和公栯。其後有聞人。五世有諱宗植。嘉靖大夫工曹參判。是生諱永貞。卽我高祖考。早卒。伯父刑曹參判公諱昌門。嘉靖乙丑。拜全羅道觀察使。贈司㒒寺正。高祖妃泗川睦氏。贈淑人。曾祖諱彭壽。漢城府參軍。用伯父貴。贈吏曹叅議。不肖曾孫根以非才。勳封晉原君。累贈吏曹參判吏曹判書。曾祖妃權氏。左司諫技之女。藝文提學梅軒遇之孫女也。贈貞夫人也。司諫墓在槐山永津村。曾祖考若妣。始葬同郡夢村之永登山。祖諱潤。禮賓寺別提。贈吏曹參判。祖妃晉山姜氏。贈貞夫人。以伯父推恩也。司憲府監察世弘之女。兼東北面都巡問使通亭淮伯之後。先君諱榮門。字興叔。成均進士。以曾孫頔尙貞正翁主爲晉安尉。贈通訓大夫司僕寺正。不肖子根出爲先君之從弟後。卽遺命也。追贈之典。不及於本生父母及本生祖父母。慈闈竹山安氏。贈淑人。考諱世彦。吏曹正郞。三重大匡門下贊成事。判户曹事。延興府院君諡襄良公漢平之後。妣晉州柳氏。成均館司成義臣之女也。伯父與先君。早逰趙先生晟之門。與聽天沈相公守慶諸公同學。先君有至行厚德。孝友敦睦。信于友朋。宗族親舊。日冀其宦達。擬資其價澤。慈闈。婦人中有土君子識見。母夫人博通經史。洞曉事理。得於慈敎者爲多。九歲。正郞公見背。有二男。皆賢哲。三年奉祭一事。母夫人命慈闈户之。詩所謂有齋季女。誠世素罕有者也。及爲婦入門。大夫人最鍾愛而敬之。伯父公常語先君曰。大夫人甚宜弟婦。一家之幸也。以嘉靖乙巳二月九日。生伯氏。大夫人喜極。常以爲此兒終必立吾門戶。伯父參判公。被乙巳餘禍。以吏曹正郞遭彈削黜。癸丑。起廢出宰牛峯縣。移守温陽郡。歲丙辰五月一日。大夫人在郡棄榮養。先君隨伯父廬墓于永登阡。先君執喪踰制。越明年六月十四日。竟不勝喪。我慈闈方在京。訃至。慈闈哭擗呼天。至於氣絶者數矣。伯父葬先君于先隴之西支癸坐丁向之原。返魂于京家。是時伯氏生纔十三歲。根九齡。季妹叅奉南景哲妻三歲。慈闈勉存視息。徒以膝下吾三人在耳。忍痛安貧。以鞠以敎。伯氏衰麻疏食。朝夕哭奠。一如成人。吾兄弟仰慈庇護爲人。隆慶戊辰增廣。伯氏中進士。庚午。根中司馬。壬申春。根忝魁大科。萬曆庚辰二月謁聖。伯氏登乙科。根患脚痺。以正言在告。委頓床席。忽聞吉語。不覺起立出門。跨馬謁慈闈。慈闈竟夜悲且喜不能寐。諄諄語根曰。汝旣幸而盛年通籍。今汝兄又擢第。未亡人不卽死滅。見汝兄弟立揚。今雖死何憾。根翌曉力疾出謝。是日唱榜。有恩榮宴。爲慈闈設慶席。未幾。慈闈遘疾。於四月二日遂不救。伯氏自恃於心。庶遂祿養以畢志願。遽抱罔極之痛。攀號隕絶。不自節抑。自初喪。水漿不入口。杖亦不能起。啓殯挐舡以達先阡。祔奬先墓之左。卒不肖弟廬于墓側。伯氏於前喪血氣未成時。受傷已深。今喪益自盡。常啜粥。氣息筋力之不逮。有不暇顧。初謂卒哭浚當進糲飯。過小祥猶不變。親戚交遊爭之莫能回。忽已三年矣。不肖弟於庚辰冬。聞所後父病重。扶曳來覲。十二月七日。不幸至於大故。辛巳春氷泮。孑孑隨濱。由水路卜吉于夢村之石頂先隴。以所後母在堂。返哭于萬里峴先廬。慈闈几筵。伯氏獨祗奉。不肖弟以如絲之殘喘。奔走往來。悴削日甚。幾乎顚仆。伯氏日夜憂弟不能支。勉之以毁不滅性。無所不用其極。不自知元眞內鑠。遂成難醫之疾。自壬牛夏免於喪。至甲申藥餌鍼砭。終不見效。乃於是歲五月二日。竟以是疾終。壽僅四十。尙忍言哉。尙忍言哉。伯氏賦禀醇厚。自幼夙成。入承慈訓。出取益友。反哺之誠。固以應擧爲急。而早知有明理飭躬之學。訥於言語。敏於從善。游于太學。華問藹如。人咸推爲忠信長者。願與之交者。日踵門墻。布衣時已負望。以學行薦除宣陵參奉。釋褐選入槐院。服闋。薦授藝文館檢閱。轉待敬。是年秋。薦爲銀臺堂后。適遇黃,王詔使之來。喉舌之地。接應之際。事務甚殷。伯氏素善書。運筆如飛。小無滯漏。知申事西厓柳相公成龍與同席。歎服不已。詔使回程。以病辭。遞授待敎。陞奉敎癸未春。再授堂后。病未出謝。還拜奉敎。秋。遷成均館典籍。拜司諫院正言。病辭。遞拜引儀兼漢城府參軍。秋冬以來。再授正言。皆未出謝。甲申春。又拜正言。論事不苟合。頗有爭臣風。以病辭。遞授工曹佐郞。疾革。五拜正言。呈病未及解劇。吾兄弟自少相依爲命。弟不在傍。伯氏一日不能安。根方忝玉堂校理。呈辭侍病。伯氏常獨處。一日。招天人語曰。脩短有命。我雖奄忽。有弟在。我無憂矣。語諸子曰。汝叔父在。我猶在也。謂根曰。我自料氣力。不至如弟之弱。雖啜粥猶可過。到今思之。誠錯矣。諸子中時會已有室。餘皆幼穉。時行侍病最久。其氣力亦頗虛。我死後須以我爲深戒。指示生道云。死生之際視若晝夜之常。從容不動如此。夫人李氏。贈吏曹參議希天之女。宗室靖國功臣雲水君孝誠之玄孫女。自始歸也。奉慈闈無違。事伯氏如賓。待親戚婢僕。皆有恩意。旣寡。敎諸子以義方。連享八九邑專城之眷又見晉安尉吉禮。累封貞敬夫人。世以爲榮。浚伯氏三十一年。年七十終。甲寅之九月二十九日也。子男五人女一人。男長時會。階通政。累宰郡府。今爲善山府使。次時行。弘文校理。贈吏曹參判。次時亨。高靈縣監。次時輔。橫城縣監。根生男輒夭。以時輔爲後。時敏未娶卒。女適井邑縣監金秫。孫男六。碩。進士。時會出。頔潁。時行出。頔卽晉安尉。須。時亨出。䪷熲。時輔出。女孫十。外孫女三。士人閔聖淸進士吳竣。時會女壻。士人睦性善。時行女壻。士人金鼎。時亨前妻女壻。士人慶貽後李耆賢。時亨後妻女壻。季女幼。時輔三女。皆幼。士人洪銑金宗泌。金秫女壻也。碩生一男一女。䪷生二男。內外曾孫男女十六。皆幼。銘曰。昔我先君。與我慈闈。懷寶種德。閟其光輝。有俟而發。是在伯氏。成也固遲。奪之何易。天賦以仁。壽纔不惑。人望方隆。暫試諫掖。善無不報。此理之常。神之聽之。一何杳茫。享于厥躬。有時而輟。啓之於後。垂裕無極。推恩錫爵。及於泉壤。必有餘慶。于今不爽。有子四人。俱躋仕路。不肖弟根。猥參帶礪。嶷嶷有孫。亦備儀賓。夫人寡居。三十一春。列鼎專城。鶴髮稀年。芝蘭玉樹。並列于前。庶幾世世。子孫是保。視此無怠。碑在墓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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