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같은 자수, 김인숙 ‹다람쥐›
전시정보김인숙, ‹다람쥐›(1949) 섬유에 자수, 101×11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AI가 들려주는 박혜성 학예사의 명화이야기그림 같은 자수, 김인숙 ‹다람쥐› 한국 현대자수의 길을 개척하다
작은 말 한마디 넘쳐흘러 듣는 이는 누구나 추측했다 열정이라고, 또는 눈물이라고,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흘러, 전통이 성숙하여 쇠퇴하니, 웅변인 듯하다. -에밀리 디킨슨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묵직한 소나무 가지의 거친 표면이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바탕천과 유사한 톤에 반짝이고 매끄러운 질감을 잘 살린 대나무, 소나무 가지를 느슨하게 감고 있는 단풍 든 담쟁이덩굴 왼쪽으로 시선을 천천히 돌리면, 그제야 작은 다람쥐 두 마리가 눈에 띈다. 풍요로운 가을을 만끽하고 있는 다람쥐들은 통통하게 살지고 그 털은 광택이 흐른다. 다람쥐 털의 결, 나무껍질, 햇빛에 반짝이듯 빛나는 단풍잎, 탱글탱글한 검은 열매, 날카로운 솔잎 등 다양한 모티프 각각의 질감과 입체감이 극사실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은 비단천에 바늘과 실로 제작된 자수 작품이다.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졸업사진(1949)
앞줄 오른쪽에서 세 번째가 김인숙, 왼쪽에서 두 번째 엄정윤, 세 번째 김혜경 유족 제공.
김인숙이 교편을 잡았을 당시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수업 광경(1970년대 중반)
이 섬세한 작품의 작가는 1945년 해방 직후 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예림원)에 서양화과, 동양화과와 함께 설치된 자수과에 최초로 입학한 김인숙(金仁淑, 1926~2020)이다. ‹다람쥐› (1949)는 김인숙의 졸업작품인데, 작가가 자수의 밑그림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마츠바야시 게이게츠(松林桂月, 1876~1963)의 ‹가을 풍경(秋晴)›(1933)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고암 이응노의 스승이기도 한 마츠바야시 게이게츠는 일본의 전통적인 남화(南畫)에 사생(寫生)을 기반으로 한 화면 구성과 묘사를 절충시킨 근대적 화풍으로 유명한 인물로, 그의 ‹가을 풍경›은 일제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 일본의 근대화된 미술을 소개하려는 의도로 이왕가미술관에 수집된 작품 중 한 점이다. 김인숙은 기본적인 구도와 소재를 ‹가을 풍경›에서 빌리되 이 회화의 주요 모티프인 새를 다람쥐 한 쌍으로 바꾸고 대나무 위치도 변경하는 등 원화의 복잡한 구도를 간소화시켰다. 그리고 전통자수에서 솔잎 표현에 주로 사용되는 기하학적인 솔잎수 대신 땀을 길게 뽑아 솔잎의 실재감을 높이고 소나무의 외피는 속수와 깔깔수로 입체감 있게 수놓았다. 물기를 머금은 듯한 원화의 나뭇가지와 단풍이 비단실로 촘촘하게 메우는 자수로 재탄생할 때 발생하는 매체적 차이가 흥미롭다.
마츠바야시 게이게츠, ‹가을 풍경›(1933) 비단에 채색, 121×144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김인숙, ‹산수›(1947)비단에 자수, 43.5×56.8cm, 유족 소장.
사실주의적 회화 같은 자수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의 일이다.(참고로 자수가 일상용품이나 복식을 장식하는 용도가 아니라 회화처럼 감상용으로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조선시대 숙종 연간이지만, 계층을 불문하고 자수품 사용이 저변화된 19세기 이후 영모화조, 십장생, 산수, 감계, 기물 등 회화의 소재가 자수로 즐겨 제작되었다.) 도쿄, 특히 여자미술전문학교(현 여자미술대학)에 자수를 배우러 건너간 신여성들에 의해 일본 메이지유신 이래 서구화된 일본식 근대자수, 즉 사실주의적 또는 인상주의적 회화 같은 자수(일본에서는 ‘자수회화’라고 불린다)가 유입되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한 장선희(長善禧, 1893~1970), 조정호(趙正鎬, 1914~1980) 등이 이화여대에 자수과를 창설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몇 년간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화여대 자수과 출신 작가들의 초기 작품에서 이들의 영향을 읽어낼 수 있다. 김인숙이 대학 재학 중 제작한 ‹산수›(1947)도 그 한 예로, 일견 수묵 담채로 그린 서정적인 분위기의 근대적인 산수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전경과 중경의 바위와 나무, 강, 섬, 그리고 원경의 운무에 둘러싸인 풍경을 바늘땀의 밀도와 섬세하게 조절해 가며 제작한 자수 작품이다.
김인숙, ‹정(靜)›(1962) 마직에 자수, 43.8×83.8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후 김인숙은 당시 시대의 조형언어로 떠오른 추상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이러한 움직임은 김인숙뿐만 아니라 이화여대 자수과 출신의 작품, 그리고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상공미술전람회 등에 참여한 많은 자수 작가들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정(靜)›(1962)은 ‹다람쥐›와 유사한 소재를 사용하고 있지만 재료와 기법, 화면 구성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구상적, 추상적 요소를 조화롭게 섞어 단순하면서도 조형미 뛰어난 자수로 가을 정취를 전한다.
김인숙, ‹장생도›(1960) 섬유에 자수, 112×12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장생도› 밑그림(1960년 경) 30.5×50.8cm, 유족 제공.
김인숙과 남편 고화흠 작업실, 부부 뒤로 ‹장생도›가 보인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넘어가는 김인숙의 대표적인 과도기 작품으로 ‹장생도›(1960)를 들 수 있다. 작가는 전통적인 소재인 장승도를 현대적인 디자인과 콜라주 같은 아플리케 등 새로운 자수 기법을 활용해 개성적인 자수로 제작했다. 제9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1960) 공예부에서 입선을 받은 이 작품은 다양한 재료, 굵기, 색감의 실을 다양하게 사용하고 전체적인 구성과 디테일에 변화를 주어 완성했다. 유족이 소장하고 있는 밑그림은 디자인적이면서 동시에 사실적으로 대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밑그림에서 음영처럼 표현된 부분을 다양한 기법으로 수놓으니 추상적 (특히 화면을 분할하는 큐비즘적) 효과가 더욱 두드러진다. 한편 밑그림과 작품이 실린 사진에는 화면 왼편에 장승 하나와 그 위에 부엉이가 있어, 어떤 연유에서인지 이 부분이 잘려나가고 화면에 변형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
이 밑그림은 김인숙이 남편 고화흠(1923~1999)과 함께 작업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인숙의 1970년대 이후 추상 자수는 당시 미술계의 추상 열풍은 물론 남편의 추상화에서도 큰 영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고화흠은 서정적인 작업세계를 보여준 서양화가로, 1940~50년대 구상에서 1960년대 반(半)추상 시대를 거쳐 1970년대 완전 추상세계로 들어섰다. 자수과 동기이자 교수를 지낸 김혜경(金惠卿, 1928~2006)이나 엄정윤(嚴丁潤, b.1927)과 비교하면 김인숙은 좀 더 과감하고 즉흥적인 추상 세계로 발을 들였다. 1975년에 제작한 ‹계절 II›와 ‹구성›에서 작가는 다양한 촉감과 굵기, 비슷한 톤의 색실을 엮고 겹치고 매듭지고 자유롭게 수놓아 실이라는 재료의 물질적 특징과 매력을 충분히 살리고 물감으로 표현하기 힘든 풍성한 입체감과 질감을 만들어냈다. 특히 후자는 실의 점, 선, 면이 만들어내는 리드미컬한 움직임과 다채로운 배치가 돋보인다. 부부가 비슷한 시기에 이화여대 미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제자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본인의 작업뿐만 아니라 교육에도 열심이었던 부부의 추상 회화와 추상 자수의 형식, 색감, 분위기 등이 이화여대 자수과의 추상자수 작품 경향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
김인숙, ‹계절 II›(1975) 섬유에 자수, 87.2×39.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인숙, ‹구성›(1975) 섬유에 자수, 89×57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김인숙이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1981년, 자수과는 섬유예술과로 명칭이 바뀌고 자수는 섬유예술의 일부로 편입된다. 이는 장르 간 경계가 허물어지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를 암시하면서 동시에 자수가 더 이상 독립적인 장르로 남을 수 없었음을 말해준다. 김인숙은 1995년 이화여대 자수과 출신을 중심으로 현수회(現繡會)를 조직해 활발하게 활동했고, 생의 말년까지 실과 바늘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이화여대 자수과가 해방 후 최초, 유일하게 미술대학 내에 만들어진 자수과였을 뿐만 아니라 공예과, 응용미술과, 장식미술과 등이 개설되기 전 만들어진 학과임을 고려한다면 이미 사라진 이화여대 자수과의 의미는 꽤 중층적이다. 김인숙은 자수가 단지 있는 집 여식들의 교양, 취미 또는 가계에 보탬이 되는 여성들의 부업으로 간주되던 시절에 자수과에 입학해 이후 후학을 양성하고 한평생 작업하면서, 침묵 속에서 몸소 자수가 예술임을 보여주었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는 김인숙을 비롯한 많은 자수 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추상 자수 작품이 전시(2024.5.1.~8.4.)되고 있다. 부디 놓치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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