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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2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 - 나는 독자들이 내가 방금 말했던 사실, 즉 선지자는 단순하고 과장없이 자기가 당했던 슬픔의 막중한 고뇌를 말하면서도 이와 동시에 그가 목적하는 것은 그 환난이 아무리 극심하다 할지라도 자기를 넘어뜨리려 하는 환난에 연약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별히 주의해 주기 바란다. 우리는 그에게서 자신의 환난의 쓰라림 때문에 조금씩 터져 나오는 뜨거운 하소연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감정이 너무 가열되어 겸손히 하나님께서 용서를 빌지 못하고 하나님을 대적하여 불평하고 비방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이 간략한 서론으로 자신을 적절하게 억제시킨다. 그는 하나님을 가리켜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에게 재갈을 물려 슬픔이 과도하게 나아가지 못하도록 억제시키고, 절망과 맞서 그 문을 당아 버리고 십자가를 질 수 있는 용기와 준비를 갖춘다. 그들 자신의 부르짖음과 불행
에 대해서 말할 때 진지하게 영혼으로 기도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실제로 그가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린 것은 아니지만, 그는 "부르짖음"이라는 말을 적절히 사용하여 자신의 기도의 간절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주야로" 계속해서 부르짖는다고 한 말씀 속에서도 똑같은 내용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주의 앞에"라는 말씀은 공연히 한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슬픔에 짓눌릴 때 탄식하는 것은 공통적인 사실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괴로움을 쏟아 놓지 못하고, 대신 하나님을 대적하여 비방하고 부당한 근엄만 부리는 분이라고 비난한다. 이것은 헛되이 허공에 대고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우리의 눈앞에 모셔 놓고 그에게 우리의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흔치 않은 미덕이라는 것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88:3-4
대저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 이 말씀은 선지자가 과도한 자신의 슬픔을 항변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자신의 계속적인 부르짖음이 영혼의 연약함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에 대한 마땅한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보여준다. 그가 당했던 막중하게 누적된 슬픔은 그로 하여금 마땅히 이러한 탄식을 일으키게 할 만한 것이었다. 또 그는 단 한 가지의 환난만을 말하지 않고 자기가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의 마음을 슬픔으로 가득 채웠던 환난의 연속을 말하고 있다. 그 다음으로 그는 자기의 생명이 음부에서 멀지 않음을 특별히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다음 귀절에서 그가 사실상 죽은 자와 같았다고 탄식하는 가운데서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비록 살아 있는 자들 가운데서 숨은 쉬고 있었을지라도 수많은 죽음이 자신을 사면으로 둘러싸고 있어서 많은 무덤들이 순간적으로 자신을 삼킬 것 같았다고 한다. 그가 단순히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말보다는 '그가 이겼다' 또는 '그가 강했다'는 뜻을 가진(가바르)에서 온 (게베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자기가 당하고 있는 괴로움이 가장 강한 사람이라도 넘어뜨리기에 충분할 만큼 매우 크고 압도적인 것이었음을 보다 강조하여 나타내려고 한 것 같다.
88:5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 살륙을 당하여 무덤에..... - 선지자는 보통 죽음 보다도 더 고통스럽고 괴로운 것을 나타내려 하고 있다. 첫째로 그가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가 인간적인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모든 일들에 어울리지 못하여 사실상 세상에서 제거된 자와 같았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 귀절이 그리스도를 묘사한다고 보고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의해 지배당하지 않기위해 특별하신 특권으로 죽음을 이기셨으므로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자유롭게 되는 것으로 묘사된다고 해석하는데, 이것은 이 문맥의 의미와 관계없다. 그러나 선지자는 이 세상의 생명의 길을 끝마침으로써 그의 마음이 모든 세상적인 염려에서 벗어나고 그의 괴로움이 모든 감정에서 사라지게 도리 것을 말한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좋다. 그 다음으로는 자신을 '부상을 당한 자들과' 비교함으로써 자기의 형편이 환난으로 말미암아
연약해져서 점점 사망에 내려가는 자보다도 더 못함을 탄식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처참한 죽음의 광경을 볼 때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께서 저희를 다시 기억지 아니하시니 저희는 주의 손에서" 또는 보호하심에서
"끊어진 자니이다"라는 말씀은 적합치 못한 억지 해석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죽은자가 산 자보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서 미치지 못함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의도가 나빴던 악한 발람이라 할지라도 "나는 의인의 죽음 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민 23:10)라고 부르짖기를 결단코 막지 않으셨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말하듯이 사람이 죽은 후에는 더 이상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이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다. 마치 성경이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말할 때 그 모습을 우리의 눈에 비치는 세상의 상태로 말하는 경우와 같이 선지자는 사람들의 보편적인 견해에 따라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은 미래 혹은 볼 수 없는 세계에 대해서는 겨우 조금씩 더듬어 올라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선지자가 무식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바라보는 눈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환난으로 인하여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혼돈과 개념을 말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영으로 감동된 사람들일지라도 슬픔이 자신을 짓누르려할 때 어리둥절하여 바보처럼 되어 지각없는 말이 입에서 나오는 것을 피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신실하신 종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보살펴 주신다는 사실을 믿는 마음이 깊이 뿌리박혀 있다 할지라도, 그들은 종종 슬픔으로 자기 마음이 가려져 하나님의 섭리를 잊어비리기도 한다. 욥의 탄식을 깊이 살펴볼때에 우리는 성도들의 마음이 슬픔에 휩싸일 때에
는 하나님의 은밀하신 섭리를 즉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자기들의 마음에 묻혀 있던 사실을 깊은 명상의 주제로 생각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선지자가 죽은 자도 역시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자기의 괴로움에 대한 첫 발작으로 그가 마땅히 해야 할 것을 깊이 생각지 못하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그에게서 믿음의 빛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곧이어 그 빛이 하다시 비추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가 어느 때에 시험을 받아 연약하게 될 경우에라도 결코 실망이나 낙심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은 특별히 매우 유익한 교훈이 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데 두셨사오며
주의 노가 나를 심히 누르시고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 (셀라)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나로 저희에게 가중
되게 하셨사오니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께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6-9).
88:6-7
주께서 나를 깊은 웅덩이.....두셨사오며..... - 시인은 이제 자신이 겪은 환난은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서부터 나온 것임을 보다 명확하게 깨닫고 있다. 진실로 자기를 때리신 것이 하나님의 손이라는 것과 우연히 일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먼저 깨닫지 않고서는 자기를 하나님께 신실하게 내맡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선지자가 하나님께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의 슬픔은 더욱 깊어졌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7절 상반절을 '주의 노가 내게 접근하시니'라고 번역한다. 히브리어 (싸마크)는 때때로 이러한 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본문의 내용으로 볼 때 이 말씀은 다른 여로 곳에서처럼 '누르다' 또는 '무겁게 누르다'라는 의미로 해
석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이 말씀이 세 겁으로 음부에 가라앉아 있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므로 단순히 '내게 접근하시니'라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말하는 것은 너무 빈약하기 때문이다. 내가 택한 번역은 특별히 본문의 전체 흐름에 잘 부합되고 있다. 선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기가 모든 하나님의 진노의 짐을 지고 있는 것을 "주의 모든 파도로 나를 괴롭게 하셨나이다"라는 말로 나타내려는 것이다. 무서운 홍수도 그의 마음을 높이 들어 하나님께 기도함을 막지 못했던 것을 볼 때 우리는 그의 본을 받아,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파선의 위험에서 하늘에 믿음의 닻을 내리고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88:8
주께서 나의 아는 자로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고..... - 그는 이제 모든 인간적인 도움이 사라지게 된 것을 사람의 마음을 겸손케 하든지 아니면 강퍅하게 하사 잔인하게 하는 권능을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의 결과로 돌리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크게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점이다. 우리가 인간적인 도움을 빼앗기게 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손을 거두시는 가서 기인했다는 사실을 마음속에 간직하지 않고서는 자신이 끝없는 또는 측량할 수 없는 소동을 일으키게 된다. 우리는 실제로 사람들이 정당한 요구로 의무 수행을 강요하면서 그 자신은 우리를 속일 때, 인간의 배은망덕함과 잔인함을 불평하고 있다. 그러나 마치 그가 기쁘게 여기실 때에는 우리에게 도움의 손을 펼치시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쾌하게 여기실 때에는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던 도움의 방편들을 거두어 가신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닫지 않고서는 이러한 요구도
우리들에게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 줄 수 없다. 선지자는 계속해서 자기를 괴롭게 만들고 있는 슬픔의 요소들에 대해 말하기를, 친구들이 '자기를 증오한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자신의 환난에서 피할 길이 전혀 없음을 "나는 갇혀서 나갈 수 없게 되었나이다"라는 말로 끝맺고 있다.
88:9
곤란으로 인하여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쇠 같은 마음이었다는 추측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다시 한 번 반복하여 자신의 환난이 매우 중하고 고통스러워서 그 고통의 흔적이 얼굴과 눈에 나타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고통은 그가 처해 있던 비참한 처지를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기가 마음속에 은밀히 불평하는 많은 사람들, 곧 격언적인 표현을 사용하자면 송곳 끝에 몸을 비 벼대면서 그의 위로를 얻으려 하지 않는 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그는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몸짓을 통한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어느 시대고 흔히 사용했던 이 의식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설명한 바 있다.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유혼이 일어나 주를 찬송하리이까(셀라)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주의 성실하심을 멸망 주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
흑암 중에서 주의 기사와 잊음의 땅에서 주의 의를 알 수 있으리이까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10-13).
88:10-12
주께서 사망한 자에게 기사를 보이시겠나이까..... - 선지자는 이 말씀을 통해서 만일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하시기 위해서 서두르지 않으신다면 너무 늦어서 자신과 죽음 사이를 거의 분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우시려는 의도가 있으시다면 지금이야말로 기회가 다시 오지 않는 아슬아슬한 시기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구원을 지연시키사 죽음이 임한 이후에 죽은 자를 이적적인 방법으로 일으키시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그는 최후의 날에 다른 모든 이적들을 능가해서 일어날 부활을 의문형식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나가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는 시기가 우리에게 속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적절하신 때에 우리가 실제로 당하는 극심한 위험을 막아 주시고 죽은자들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반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능력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성도들의 견고함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거기에는 항상 육체의 죄악이 약간씩 섞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인자하심으로 그들의 미덕 속에까지 오염되어 있는 죄악을 담당해 주시지 않으면 안된다. 시인이 '주의 인자하심을 무덤에서 선포할 수 있으리이까?'라고 물은 것은 죽은 자들에게는 의식이 없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가 앞에서 말한 것, 즉 그들이 위험 속에서 아직 부르짖고 있을 때 구원하여 주시는 것이 그들이 죽은 다음 그들의 무덤에서 일으키는 것보다 그 구원의 시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과 똑같은 감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는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죽은 자들을 그들의 무덤에서 일으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한 증언이나 선포자로 삼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흔히 사용하시는 방법이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또는 '긍휼하심'에다 그의 '진실' 즉 '성실하심'을 추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종들을 구원하실 때에는 약속에 대한 그의 신실하심을 확증해 주기 때문이다. 한편 선지자는 그 약속이 하나님의 순전하신 인자하심에서밖에 나올 곳이 없다고 말한다. 선지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 능력, 의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잊음의 땅에서 알게 하시지 않는다'고 말한 것을 어떤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치 사람이 죽음으로 말미암아 멸절 상태에 들어간다는 잘못된 견해를 지지해 주고 있는 말씀인것처럼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있다. 선지자는 단지 일상적인 표현 방식으로 이 세상을 자신의 인자하심으로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무대로 삼고 계시는 하나님에 의해서 도움이 임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88:13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 선지자의 말에는 전혀 변명할 여지가 없는 무절제함이 있다는 것을 나도 시인한다. 그러나 이 말씀 역시 보기 드문 믿음과 경건의 인내에 대한 증거로써 그는 결단코 기도중에 진실함을 잃지 않고 있다."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라는 말씀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는 이 말씀으로 마지못해 자신이 마지못해 구하지 않을 수 없게 될 때까지는 천천히, 냉담한 기도로 시간을 끌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그는 오래도록 계속되고 있는 환난에 대한 자신의 번민이 하나님께 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태함에서 기인한 것이 아님을 적절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끊임 없이 드림에도 불구하고 그 기도가 당분간 응답되지 않을 때 설마하지 않도록 하는 본 보기로서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 숨기시나이까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 주의 두려게 하심을 당할 때에 황망하였나이다
주의 진노가 내게 넘치고 주의 두렵게 하심이 나를 끊었나이다
이런 일이 물 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함께 나를 둘렀나이다
주께서 나의 사랑하는 자와 친구를 내게서 멀리 떠나게 하시며 나의
아는 자를 흑암에 두셨나이다(14-18).
내가 고통을 당하여 내 젊은 시절부터 죽음이 임박하였고 주의 공포를
의심하면서 견디었나이다(칼빈 사역).
88:14-18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 이 탄식은 언뜻 보기에 아무런 위로도 얻지 못하고 슬픔으로 가득찬 마음 상태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탄식 속에는 무언(無言)의 기도가 들어 있다. 시인은 교만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변론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환난에서 건짐 받기를 비통하게 간구한다. 이러한 종류의 탄식은 바울이 말한 "말할 수 없는 탄식"(롬 8:26)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선지자가 하나님께 배척을 당해 미움받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면 그는 분명히 계속해서 기도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그는 여기서 자기가 그토록 격렬하고 고결하게 투쟁했던 육적인 판단을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육적 판단이 결국 그가 결코 헛되게 기도하지 않았다는 결과로서 분명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시가 감사로 끝나지 않고 슬픈 탄식으로 끄을 맺어 마치 긍휼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말하고 있을지라도 이 시는 우리가 계속하여 기도의 의무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는 보다 유익한 교훈을 주고 있다. 선지자는 이 탄식의 짐을 하나님의 품에 풀어 놓음으로써 감각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무 표적도 볼 수 없는 구원에 대한 소망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이 시의 서두에서 하나님을 "내 구원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에게서부터의 모든 구원 소망에서 멀어져 버렸을 것이다.
선지자가(15점에서) 왜 "내가 소시부터 곤란을 당하여 죽게 되었사오며"라고 말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여러 가지로 극심한 취급을 당하고 있어서 그의 생명이 사실상 여러 가지 공포와 떨림 가운데 엉켜 있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16절에서 말한 "주의 진노와 두려움"이라는 말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적지 않은 동안 계속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17절에서 이것들이 '날마다' 자기를 에워 쌌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더 두려운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는 자기의 환난을 '홍수'에다 적절히 비교하고 있다. 그는 계속 자신의 '의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진노하심에대한 느낌이 자기의 마음을 뒤흔들어 쓰라린 소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 요동함이 어떻게 믿음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겨날 수있다. 마음의 의심과 혼란을 일으켜 이리저리 방황하게 될 때에는 믿음이 삼키움들 당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소란으로 동요되는 중에도 믿음은 계속해서 다시 일어나며 결코 넘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믿음은 질식할 지점에 이른다 할지라도 기필코 보호와 일깨움을 받는다. 아무리 맹렬한 폭풍우가 불어와도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믿음을 갖게 하시어 자기 자녀들이 결코 실망하거나 버림받지 않도록 해주신다는 사실, 이것이 성도들의 방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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