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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시88:1]
내 구원의 하나님 - 이는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사 그들을 당신의 백성으로 구원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언약적 호칭이다(85:4). 저자가 서두에서 하나님께 이와 같은 호칭으로 부르짖는 것은 그가 처한 깊은 어려움과 비통함을 엿보게 해주며, 아울러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고자 하는 그의 마음을 잘 나타내 준다. 한편, 영역본 RSV는 본문을 후문과 연관시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 도움을 요청하나이다(my God, I call for help by day)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후문을 내가 당신 앞에서 밤에도 부르짖나이다(I cry out in night before thee)라고 개역하여, 전문과 이 후문이 상호 병행 구절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본다. 그리고 NEB도 이와 유사하게 번역한다. 그러나 이는 그 근거가 명확하지 않다. 아마 저자는 맛소라 사본 그대로 본문에서는 구원의 근원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짖음으로 구원의 빛을 갈망하는 내용으로 본시의 서두를 시작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주야로...부르짖었사오니(욤차크티 발릴라 네그데카). - 이를 맛소라 사본 그대로 직역하면 낮에 내가 부르짖고, 밤에 당신앞에(있나이다)이다. 일부 영역본(RSV, NEB)은 앞에서 본 것처럼 본문을 개역하여 전․후문이 상호 병행 구절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기도 한다. 어떻게 번역하든지 간에 본문은 저자가 그를 구원하실 하나님께 대하여 끈질기게 지속적으로, 간절히 부르짖는 것을 나타낸다(느 1:6; 눅 18:7; 딤후 1:3). 그는 현재 당하고 있는 어려움으로 인해 끊임없이 부르짖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성 경: [시88:2]
나의 기도로...달하게 하시며 - 달하게 (보)란 오다(또는 가다)의 뜻이며, 본문은 저자의 간구가 하나님의 관심을 끌게 해 달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하반절은 마치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소리에 귀기울이기 위해 몸을 굽히시는 모습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서, 보다 적극적으로 청취해 주십사 하는 소원을 피력한다(Alex- ander).
성 경: [시88:3]
대저 - 히브리어 원문에 의하면 본절 서두에는 원인 불변사 키 (왜냐하면; For, KJV, RSV)가 언급되어 있다. 따라서 기자는 본절(이하)의 원인을 들어 하나님께 기도를 들어달라고 호소하고 있다.
나의 영혼에 곤란이 가득하며 - 영혼 (네페쉬)이란 저자 자신의 자아를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된다(84:2). 또한 곤란 이란 히브리어로 라 로서 악(한) (신 19:15, 19; 왕상 16:7,19,25), 해(로운) (23:4;35:26; 전 2:21)등의 뜻인데, 특히 유익을 주지 못하고 해악을 끼치는 것을 암시한다. 이로 볼 때 본문은 저자의 자아 곧 존재 자체가 큰 파멸에 처해진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졌음을 나타낸다.
나의 생명은...가까왔사오니 - 음부란 죽은 자들이 가는 지하 세계를 뜻한다(86:13). 이런 연유로 볼 때 기자는 자신에게 닥친 곤경으로 인해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해 있음을 암시한다.
성 경: [시88:4]
나는 무덤에 내려가는 자 - 여기서 무덤 이란 히브리어로 보르 로서 구덩이 (창 37:20,22,24; 출 21:33,34) 또는 웅덩이 (레 11:36)를 뜻하며 5절에서와 같이 흔히 말하는 무덤 (케베르, 민 19:16; 겔 37:12)과는 어휘적으로 다르다. 이는 사 14:15에서는 음부와 같은 뜻으로 쓰였고, 30:3; 잠 1:12 등에서는 음부의 병행구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도 역시 지하 세계로서의 음부와 같은 의미로 묘사되었거나 아니면 음부로 내려가는 입구의 뜻으로 사용되어졌을 수도 있다(Anderson). 힘이 없는 사람과 같으며-전문과 병행 구절로서 특히 생명력을 상실한 자 곧 죽은 자와 방불하다는 뜻이다.
성 경: [시88:5]
사망자 중에 던지운 바 되었으며(바메팀 하페쉬). - 직역하면 사망자들 가운데 자유로운 (Free among the dead, KJV)이다. 여기서 자유로운 (하페쉬)이란 흔히 구약 율법에서 종이 6년 동안 주인을 섬기다가 7년째에는 자유롭게 된다는 뜻의 말로 사용되었다(출 21:2,5). 그러나 이는 어떤 고통이나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귀하고 가치있는 것들로부터 자유롭게 된다는 뜻도 나타낸다고 한다(Anderson). 이런 점에서 볼 때 본문은 죽은 자들 가운데 방치되어 살아 있었을 때 누리던 어떤 축복, 은총등으로부터 단절된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성 경: [시88:6]
깊은 웅덩이...두셨사오며 - 깊은 웅덩이나 어두운 곳, 음침한데란 3절의 음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이다. 음부를 이와 같이 표현한 것은 일반적으로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곳이 땅 깊은 지하 세계에 있으며(86:13), 햇빛이 통하지 않는 어두운 곳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88:12;143:3; 욥 10:21,22; 애 3:6). 한편 본문의 음침한데 (비므촐로트)란 명사로서 깊은 데 (in the deeps, KJV)를 뜻하며, 바다의 깊은 데를 암시하는 것 같다(출 15:5, Anderson).
성 경: [시88:7]
주의 모든 파도로...하셨나이다 - 여기서 파도란 하나님의 분노 또는 그 분노로 인한 시련을 상징하는 비유적인 말이며, 어원학적으로 산산이 부서지다, 파괴하다는 뜻과 관계 있다. 그리고 괴롭게 하셨나이다 (아나)의 원래 뜻은 누르다(압박하다) , 또는 (압박함으로) 괴롭히다 (overwhelm, NIV, RSV)의 뜻이다. 이 동사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겪은 억압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 바 있다(창 15:13; 출 1:12).
성 경: [시88:8]
나의 아는 자로...떠나게 하시고 - 나의 아는 자 란 그 기본어가 야다 로서 알다 또는 아는 자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피상적으로 아는 자를 말하지 않고 아주 가까운 친구를 뜻한다(Anderson). 성경에서는 친구들이 떠나는 이런 일은 어떤 자가 큰 비통함, 시련을 당한 결과 발생되어지는 것으로 묘사된다(31:11;38:11;69:8). 이런 사실은 저자가 커다란 비통함, 어려움을 당한 사실을 엿보게 해준다.
나로...하셨사오니 - 가증되게 란 히브리어로 토에바 로서 혐오스러운 (것), 미워하는 (것) 등을 뜻한다(abomination, KJV). 따라서 본문은 시인이 가까운 친구들로부터조차 마치 혐오스러운 물건처럼 기피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음을 뜻한다(욥 4:1-11:8:1-6). 어쩌면 시인은 이스라엘이 애굽 체류시에 애굽인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역사적 암시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창 43:32;46:34, Alexander).
나는 갇혀서...되었나이다 - 이는 저자가 어떤 환경에 격리된 것(레 13:4, 46) 또는 감옥에 감금된 것(렘 32:2)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하나의 비유적인 표현으로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련 등으로 감싸여 헤어날 수 없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는 게 타당한 듯하다(Calvin).
성 경: [시88:9]
곤란으로...쇠하였나이다 - 여기서 곤란(오니)이 란 3절의 곤란과는 달리 아나(누르다, 괴롭히다)에서 유래된 말로서 억압, 괴롭힘, 고통 등을 뜻한다. 그리고 눈 이란 흔히 사람의 마음 또는 몸의 상태의 창구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으로서(마 6:22), 혹자는 행복과 불행을 나타내는 거울로서 이해하기도 한다(6:7;31:9; 욥17:7, Anderson).이로 볼 때 본문은 저자가 심각한 억압과 고통 등으로 인하여 그의 상태가 심히 피폐해져 있음을 암시한다. 이는 3-8절의 상태와 일맥 상통한다.
주를 향하여...들었나이다 - 들었나이다 란 기본어가 솨타흐 로서 뻗다, 뻗치다 의 뜻이며, 히브리어 원문상 이 문구는 구약 성경에서 단지 이곳에만 나온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일반적으로 기도의 한 형태로서 손을 드는(솰라흐, 내놓다, 뻗다)것과 같다(Anderson). 흔히 히브리인들은 간절한 기도의 유형으로서 하늘을 향해서(왕상 8:22; 애 2:19), 또는 하나님의 상징적 처소인 성전을 향해서(5:7;134:2; 왕상 8:35,38,42) 그 손을 들고 기도했는데 본문도 같은 형태이다. 특히 여기서는 고통의 심저(深低)에서 높으신 하나님께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2절).
성 경: [시88:10]
주께서...보이시겠나이까 - 본절로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은 질문 형식을 띠기는 하지만 차라리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간구로 볼 수 있다. 즉 하나님이 곧 죽을 것같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진 기자를 구원하시지 않을 경우, 기자는 죽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 후에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셔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유혼이...찬송하리이까 - 유혼(레파임)이란 그 어원이 불분명하다, 혹자는 가라앉다, 풀어지다 에서 유래된 말로 그 명사는 가라앉은 힘없는 존재를 뜻하는 것으로 보고(BOB), 또 다른 사람은 고치다, 연합되다에서 유래된 말로 지하 세계에 존재하는 거대한 집단으로서의 죽은 자들을 암시한다고 한다(R. C. Driver). 또 아무튼 그 어원이 어쨌든 본문에서는 문맥적으로 볼 때 음부에 사는 자들을 뜻한다. 한편, 이 말은 성경에서 가나안이 옛 종족 중 한 족속(르바 족속)을 가리키는 말과 같다(창 14:5;15:20; 신 3:11; 수 12:4). 알렉산더(Alexander)는 이와 관련하여 유혼은 가나안의 한 거인 족속의 이름인데, 이는 시적으로 죽은 자들의 거대한 무덤 또는 영혼들을 암시한다고 보기도 한다.
성 경: [시88:11]
주의 인자하심을...있으리이까 - 하나님의 은혜로우심 또는 그 속성들을 살아 생전에 증거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로서 곧 저자로 하여금 소생, 회복할 수 있도록 구원해 달라는 간구의 뜻을 암시한다. 본문의 성실하심 이란 그 기본어가 에무나 로서 아만 (세우다, 신실하게 하다, 신뢰하다)에서 유래된 말로 확고함, 신실함, 진실함 등을 뜻한다. 한편 아만은 85:10,11의 진리의 어원이기도 하다.
성 경: [시88:12]
흑암 중에서...알 수 있으리이까 - 사람이 죽어서 가는 음부에서는 하나님과 단절된 곳으로서 하나님의 의로우신 행위를 경험할 수 없다는 이스라엘의 사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여기에는 11절의 의미와 같이 이 세상에서 삶을 영위할 때 하나님의 역사와 의로우신 행위를 체험할 수 있게 해달라는 간구의 뜻이 함축되어 있다. 한편, 흑암 중 이나 잊음의 땅 이란 음부를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인데 이는 음부의 특성 즉 그곳이 어두운 곳이며(욥 10:21,22;29:3), 그곳에 사는 자들이 곧 잊어버림을 당하고 그들 자신도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는(31:12; 전9:5) 히브리인들의 사상에 기인된 것이다.
성 경: [시88:13]
어휘 면에서는 다르다. 그러나 그 의미 면에서는 앞서다, 앞에 오다(가다)의 뜻으로서 어떤 사람 앞에 나아오게 하는 것을 암시하는 말로서(Alexander) 유사하다. 또한 본문은 하나님께서 아침 일찍부터 정성을 모아 드리는 기로를 더욱 귀하게 여기사 잘 응답하여 주신다는 생각에 기인한 고백으로 보인다. 성경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아침에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는 간구의 내용이 많이 언급되어 있다(5:3;17:15;46:5;9: 14;143:8). 혹자에 의하면 히브리인들의 기도 습성처럼 아침에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기대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 즉 아침에 (1) 태양이 떠오름, (2) 어두움이 빛으로 변화됨, (3) 공의가 실행되어짐(삼하 15:2), (4) 새벽여명에 큰 구원을 경험함(출 14:30; 사 37:36)등에 의해 영향받은 것이라고 한다(J.Ziegler). 아침(또는 새벽)은 밤에 잠을 자고, 안식하고 난 후 일어나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처음 시간이라는 점에서 귀한 의미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성 경: [시88:14]
여호와여...버리시며 - 버리시며 (자나흐)란 밀어 젖히다, 거절하다의 뜻을 함축하는 말로서 단순히 지나쳐 포기하는 것 이상의 의미, 즉 거절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런 점에서 알렉산더(Alexander)는 혐오감으로 거절하는 것을 뜻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여기서 그 원인릉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비탄과 고난, 슬픔 가운데 방치하사 보살피지 않으심을 탄원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저자가 자신의 구원을 강력히 청원하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영혼 (네페쉬)이란 저자 자신의 전 인격과 존재를 대변하는 의미에서 언급되어진 말로 볼 수 있다(84:2).
주의 얼굴을...숨기시나이까 - 흔히 성경에서 하나님이 얼굴을 향하신다는 것은 긍정적으로는 그분의 은혜, 도우심, 호의, 구원, 능력 등을 부여해 주심을(27:9;31:16;42: 5;105:4; 대상 16:11; 대하 6:42), 부정적으로는 그 분의 공의, 분노 등을(34:16;51:9 ;90:8; 벧전 3:12) 암시한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의미는 전자를 뜻한다. 기자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감추시사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심을 탄원하고 있다.
성 경: [시88:15]
소시부터(미노아르) - 이는 젊었을 때부터, 어렸을 때부터의 뜻이다. 아마 기자는 젊었을 때 이후부터 오랜 세월 동안 비탄과 고통 가운데 지내왔던 것 같다. 기자가 어렸을 때부터 압박으로 인한 고통을 당한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기도가 그만큼 더욱 간절하였음은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혹자는 본문이 저자 개인에게 적용되는 말일 수 있으며 또는 한 국가로서 이스라엘(호 11:1)에게 적용되는 말일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Alexander).
곤란을 당하여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기본어는 아니 로서 아나 (누르다, 괴롭히다)에서 유래된 말로 억압받는, 고통받는의 뜻이다(9절). 황망하였나이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그 기본어가 푼 으로서
성 경: [시88:16]
주의 진노(하로네카) - 이는 당신의 진노들 이라는 복수적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심각성을 나타내는 강조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VanGem- eren, Anderson). 특히 진노에 해당하는 하론 의 근본 뜻은 열, 타오름 이며, 이에서 격렬함, 분노, 진노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 이것은 78:21에서 하나님의 노를 불 (에쉬)로서 표현한 것과 유사한 묘사이며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히 12:29)는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공의, 질투의 불을 발하시며 심판하시고 태우신다는 뜻을 나타낸다.
성 경: [시88:17]
물같이 종일 나를 에우며 - 이는 16절과 연관시켜볼 때 7절과 유사한 표현이며, 거대한 양의 물이 넘쳐 흐를 때 모든 존재를 덮치며 휩쓸어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물의 막강한 파괴력은 노아의 홍수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 바 있다(창 7:10-8:13). 그리고 성경에서는 종종 물의 이런 특성상 이 물이 사람(의 영혼)을 사망케 하는 존재 또는 곤란하게 하고 압박하는 존재로서 비유적으로 종종 묘사되고 있다(18:4;32:6;69:1,2,1 4,15;90:5).
성 경: [시88:18]
주께서...떠나게 하시며 - 이는 8절 전반절을 반복하는 내용으로 보인다(Anderson,Al exander). 다시 말하면 현재 고난과 비통함을 당하는 저자에게서 사랑하는 자와 친구들마저 떠나 그를 위로하는 자가 없게 되었고 그 결과 그 자신이 더욱 처량하고 비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의 아는 자를...두셨나이다(메유디아 마호솨크) - 히브리어 원문 그대로 직역하면 나의 아는 자를(는) 흑암(에) 라는 뜻이다. 이는 본시 중에서 해석하기 가장 어려운 구절 중의 하나이다. 이에 대해 혹자는 이를 나의 아는 자가 흑암 중에 사라져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며, 다른 사람들은 나의 아는 자가 흑암, 즉 음부라는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주석가 알렌(Allen)은 어두움이 나의 남아있는 한 동료이다 (Darkness is my one companion left)라고 번역할 수 있다고 하며 후자를 지지한다. 영역본 중에서 KJV는 가능한 원문 그대로 번역하려 하여 나의 아는 자가 흑암 속으로 (mine acquaintance into darkness)로 했으나, NIV는 어두움이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이다 (the darkness in my closest friend)로 옮겨 후자를, 그리고 RSV는 나의 동료들이 어두움 속에 있다 (my companions are in dark ness)로 번역하여 전자를 각각 지지하고 있다. 만약 전자를 취할 경우 본문은 저자의 아는 자들이 흑암 중에 사라져가고 혈혈 단신으로 겪게 되는 가중된 고통과 외로움을 강조하는 의미가 되며, 후자를 취할 경우는 자신이 처한 암담한 좌절 상태 자체에 주안점을 둔 표현이 된다. 그러나 이중 어느 것을 취하든 간에, 저자는 그의 막중한 고난의 처지를 언급하면서 한편으로 그 이면에는 구원을 요청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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