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8 장. 江湖女人의 첫날밤.
남궁수가 안으로 들어섰을 때, 백검운은 곽씨 자매와 아향과 함께 저녁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면서 담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남궁수를 보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반겨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가주."
남궁수는 소청안을 둘러보며 다소 의아한 표정이었다. 느닷없이 이곳 별채에 사람이 많아진 것도 이상하지만, 그는 무엇 때문에 백검운이 자신을 불렀는지 잘 알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남궁수의 뒤에는 남궁호가 역시 궁금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백검운은 그런 남궁수를 탁자 앞의 의자로 인도하고는 자신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곽씨자매와 아향은 이것을 보고 모두다 아향의 방으로 물러가 자리를 피해주었다. 소청 안은 조용해졌고, 다만 현관 쪽에서 하철수 등만이 빼꼼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남궁수는 천천히 실내를 둘러보다가 백검운을 향해 물었다.
"선생께서 나를 보자고한 용건은 무엇이오?"
그는 아마 이미 남궁룡에게 백검운이 무공을 지니고 있고 또한 그 경지가 가히 추측이 불가능한 정도라는 말을 들었는지 다소 수상쩍은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검운은 그를 향해 말했다.
"가주께서 그간 소생을 깍듯이 잘 받들어 주신데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모신 것은 그만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남궁수는 일시 눈을 크게 떴다.
"작별인사라니요?"
백검운은 웃으며 남궁호를 가리켰다.
"호아는 이제 학문에 취미를 들여서 다른 사람이 없어도 능히 스스로 배울만 합니다. 그러니 저는 더 이상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말에, 비단 남궁수 뿐만 아니라 남궁호가 가장 크게 놀라서 소리쳐 말했다.
"그런 안돼요, 사부님. 저는 이제 겨우 마악 시작을 하려고 하는데 사부님께서 가신다면........ 가신다면 저는 아마도, 아마도 학문과는 다시 멀어질 거예요."
남궁호의 눈빛에는 경악과 애절한 간구가 실려 있었다.
사실, 남궁호는 그간 백검운의 지도를 받으면서 날이 갈수록 그를 더욱 따르게 되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이 들어서 평생 그의 밑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일으켰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지금 이렇게 경악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허나, 백검운은 담담하게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사람의 성품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가 않는 것이다. 네가 다시 학문과 담을 쌓으려고 해도 이제는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미 깨우쳤으니 그것으로 되었다."
이어, 백검운은 남궁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호아는 천생의 무골이기 때문에 역시 학문보다는 무예에 전념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학문 분야는 이제 스스로 배우게 될 터이니 가주께서는 굳이 염려하실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실, 백검운의 말은 옳았다.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수는 이미 그러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원래 그가 백검운을 초빙해온 것은 남궁호가 학문과는 아예 담을 쌓으려고 했기 때문이었으며 지금은 오히려 학문 때문에 무공연마를 등한시할 정도이니, 거기에도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무림세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남궁호가 학문의 길로 나아갈 목적이 아니라면 굳이 백검운과 같은 유명한 학문사부를 더 이상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게다가, 요즘은 영웅대회의 일 때문에 정신없이 바쁘고 신경이 쓰이는 일이 많은데다, 이미 백검운이 그저 평범한 서생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로 더 이상은 부담스러웠다.
헌데 지금 백검운이 먼저 나가겠다는 말을 꺼내주니 그로서는 심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만면에 서운한 기색을 담고 말했다.
"선생께서 이런 곳에 오래 머무르실 분이 아니라는 것은 저도 이미 알고 있었소이다. 하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오리라고는 전혀 짐작을 못했군요. 사실, 황금 따위로 선생같은 분을 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백검운은 그가 허락의 뜻을 비추자 즉시 품속에서 백냥짜리 은원보 하나를 꺼내서 그에게 건네주었다.
"이것은 전에 빌린 것이니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남궁수는 웃으며 사양했다.
"선생께 아직 변변한 사례도 못했는데 이런 것을 어찌 돌려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그간의 수고비라고 생각하시고 도로 넣어주십시오."
백검운은 미소하며 은원보를 품속에 다시 넣었다.
"그럼 좋습니다.
사실, 이 은원보는 아까 아향에게 말해서 열개의 황금 백냥 짜리 금원보중 하나를 미리 은원보로 바꾸어 놓으라고 지시를 내렸기 때문에 그녀가 바꾸어온 것 중의 하나였다.
아향은 멀리 나갈 것도 없이 남궁세가의 총관인 금반산 등백천에게 달려가서 백냥 짜리 은자 스무개로 바꾸어 왔다.
그녀는 보기와는 달리 총명하고 이재에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스스로 백검운의 부인임을 자처하는 곽소봉도 이미 역시 재산을 아향에게 일임해 두었을 정도였다.
백검운이 은원보를 갈무리하자, 남궁수는 물었다.
"그럼 선생께서는 언제 떠나시겠습니까?"
백검운은 대답했다.
"오늘은 이미 저물었으니 내일 아침 떠나도록 하지요."
남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그럼 다시 운남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가시더라도 거처를 일러주시면 나중에 찾아가 뵙도록 하지요."
백검운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저는 당분간은 금릉성내에 머무를 것 같습니다. 나중에 가주께서 박대를 하지 않는다면 다행이지요."
"박대라니, 별말씀을 다 하시는군요."
남궁수는 대답을 하며 눈빛을 기이하게 빛냈다. 원래 그는 얼마 전에 사람을 운남으로 보내서 백검운이 정말로 만박서생인가를 알아보게 했으나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백검운이 단순한 서생이 아니라 일신에 무공을 지닌 신비막측한 고수라는 생각이 들어서 닷새 후에 열리는 영웅대회에 뭔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우려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그런 것을 내색할 수가 없어서 그저 웃으며 말했다.
"그럼, 선생께서 하시는 일에 만사가 형통하기를 빕니다."
남궁수는 축수의 말을 한 후에 몸을 일으켰다. 백검운은 웃으며 답례했다.
"가주께서도 모쪼록 일이 잘 되시기를 바랍니다."
남궁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가 마악 밖으로 걸어 나가려고 할 때, 남궁호가 아직 자리에서 떠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보고 백검운이 물었다.
"너는 왜 가지 않느냐?"
남궁호는 이미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있었다. 그러다가 백검운이 묻자 다소 울먹이며 대답했다.
"사부님같은 분을 영원히 모실 수가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것은 그 시기가 너무도 빠른 것 같습니다. 저는 도저히, 도저히 사부님을 보내드릴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남궁호는 결코 보내드릴 수가 없다고 하려다가 남궁수의 눈빛이 다소 침중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말을 바꾼 것이다. 그것을 보고 백검운이 다소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란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고 헤어지면 또 다시 만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회자정리라고 말하는 바, 너는 굳이 나에게 연연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나에게 놀러오면 되지 않느냐?"
남궁호는 백검운이 금릉성내에 머물겠다는 얘기를 상기하고는 그제서야 안색을 폈다. 남궁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남궁수는 그를 데리고 밖으로 걸어 나갔다.
백검운은 그를 현관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그럼 안녕히 계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영웅대회에는 다시 한번 들르겠습니다."
그는 내일 해야 할 인사를 지금 미리한 것이다. 남궁수는 그가 영웅대회에 들르겠다는 말을 듣고는 다소 기이하게 눈빛을 굴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례했다.
"예, 물론 그때에는 환영을 하지요."
이어, 그는 남궁호와 함께 정중히 인사를 하고는 나가버렸다.
그때였다. 남궁수와 남궁호가 사라지기가 무섭게 문 밖에서 돌연 하철수 등 삼인이 안으로 들이닥치며 소리쳐 묻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일 남궁세가를 나간다는 것이 정말입니까?"
백검운은 웃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왜 그래서 불만들인가?"
허나, 삼살의 표정을 결코 불만스런 것이 아니었다. 하철수는 입이 벌어져서 고개를 연신 휘두르고 있었고, 여지껏 거의 말이 없던 저수량도 입을 열어서 말했다.
"우리는 모두 찬성입니다. 사실 주인께서 이곳에 머무르신다는 것은 그다지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파천석도 이에 동조하는 눈빛이었다.
하철수가 고개를 휘두르며 대답했다.
"나는 사실 주인님이 그까짓 돈 몇 푼 때문에 이런 곳에서 썩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았었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백검운은 그 말에 그저 담담히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가 남궁세가로 온 것은 결코 황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만 장래를 위한 하나의 포석일 뿐이었다. 하면 대체 어떠한 포석일까? 그것은 오직 백검운 자신만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때, 안쪽에서 곽씨 자매와 아향이 걸어 나오면서 이에 동조했다.
"우리도 이곳을 나가는 것은 찬성이예요."
그것은 곽소봉의 말이었다.
원래, 중주삼살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아무래도 밖에 나가면 그들의 자유가 그만큼 보장되고 또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지낼 수가 있겠기 때문이었다.
허나, 이들 여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조금 다르다고 할 수가 있었다. 그녀들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백검운의 위상에 있었다.
곽소봉 본인만 해도 천하의 뭇 사내들을 발가락의 때만큼도 여기지 않는 절대고수의 위치에 있었으므로, 그녀의 남편이 이런 곳에서 훈장노릇이나 하는 것을 답답하게 생각했다.
황금이라면 그녀도 스스로 얼마든지 조달할 수가 있었고, 또한 아향의 말을 들어보니 백검운은 그저 잠깐 나가서 황금 일만냥이나 벌었었다고 하지 않았는가?
지금 비록 아향에게는 황금 일천 냥이 있을 뿐이지만, 그 액수만 해도 은자로 치면 무려 수억냥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아무리 값비싼 객점에 묵는다고 해도 앞으로 몇 년간은 은자 걱정이 없을 것이다.
백검운은 그녀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자, 우리 안으로 들어가서 의논하도록 합시다."
"예,"
곽소봉은 아주 고분고분해졌다. 그녀는 즉시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앞장서서 소청의 탁자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삼살까지 자리에 모두 앉고나자 곽소봉은 백검운에게 물었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서 묵을 거지요?"
백검운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직 그런 것은 결정하지 않았으니 당신이 한번 생각해 보시오."
곽소봉은 백검운이 그런 결정을 자신에게 미루자, 그녀는 일시 절로 달콤한 기분이 들어서 안색이 발그레하니 상기되었다.
그러자, 가뜩이나 아름다운 그녀의 옥용이 화사하게 피어나는 것 같았다. 곽소봉은 잠시 생각하다가 곧 말했다.
"우리는 일단 금릉성내에 있는 일류객점의 별채 하나를 빌려서 묵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요. 그 자세한 점에 있어서는 아향에게 맡기면 될 거예요."
이어, 그녀는 아향에게 물었다.
"어때? 가능하겠지?"
아향은 마침 자신의 생각도 그러하던 참이라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그녀는 곽소봉에게 마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일시 그것이 잘 되지 않아서 말끝을 다소 흐렸다.
이때, 하철수가 나서서 말했다.
"우리, 우리에게도 방을 주어야 하오."
그 말에, 아향은 웃으며 대답했다.
"걱정말아요. 아마 우리가 빌리는 별채는 이곳보다는 훨씬 큰 곳일 테니까요."
이어, 그녀는 백검운에게 물었다.
"나으리, 지금 나가서 예약을 해놓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백검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너는 삼살과 함께 지금 곧장 금릉성에 다녀오도록 해라."
그러자, 아향은 다소 곤혹한 눈빛으로 물었다.
"참, 그 노새는 대체 어디에 있죠?"
그녀는 갑자기 노새가 사라져버려서 궁금하던 참이었다. 백검운은 웃으며 대답했다.
"그 녀석은 가까운 곳에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라."
그 말은 즉, 그가 부르면 곧 달려올 수 있는 거리에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아향은 그 말이 풍기는 의미가 다소 기이하다고 여겨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삼살 역시 얼른 자신들이 기거할 곳을 보고 싶은지라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돌연 곽소유가 웃으며 나섰다.
"저도 함께 다녀오겠어요."
백검운은 그녀가 다소 적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잠깐 바람을 쏘이는 것도 괜찮지. 언니도 함께 다녀올 생각이오?"
그런데, 당연히 함께 가겠다고 할 것 같았던 곽소봉은 고개를 흔드는 것이 아닌가?
"아니에요, 저는 ...... 가지 않겠어요."
백검운은 다소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밖에 갔다 오겠다고 하는데 어째서 그녀만은 유독 이곳에 남겠다고 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곽소유와 곽소봉의 눈길에는 어딘가 서로 은밀한 교감이 일고 있지 않은가?
아마 그녀들은 이 순간 뭔가 꾸미는 것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백검운은 그것이 별로 신경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럼 모두들 일찍 다녀오도록 하시오."
이어, 백검운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 * *
곽소유가 굳이 곽소봉만을 별채에 남겨둔 것은 무슨 뜻이 있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곽소봉이 혼자 남아서 백검운과 정담을 나눌 수가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사실, 곽소봉은 스스로의 고집에 의해 그의 아내를 자처하고 있을 뿐이지 그들 사이에 그렇도록 다정한 애정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곽소유는 언니에게 그러한 기회를 부여해 주려는 것이다.
물론 곽소봉은 그러한 동생의 뜻을 알았기에 즉시 수락한 것이다.
이윽고, 곽소유와 아향등이 밖으로 나가버리자, 곽소봉은 스스로 욕실에 들어가서 한참동안을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그리고는 간편한 나삼으로 갈아입고는 백검운의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누구요?"
안에서 즉시 백검운의 담담한 음성이 들려왔다. 곽소봉은 다소 흥분되는 마음을 느끼며 대답했다.
"저예요."
잠시 후, 백검운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다.
"들어오시오."
곽소봉은 방문을 열었다. 순간 그녀의 시야에 등을 돌리고 앉아서 좌정하고 있는 백검운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핏 보기에도 그 모습은 신비하도록 고아해 보였다.
가볍게 나삼자락 스치는 소리가 들려오자, 백검운은 물었다.
"무슨 일이오?"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리지도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상태였다. 곽소봉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가슴이 심하게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여태 무수한 사람을 죽여보기도 했었는데, 그 냉철하도록 차가운 그녀의 내심에 이렇게 여린 구석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곽소봉은 천천히 방문을 닫고 몸을 돌려 대답했다.
"전 당신과 할 얘기가 있어서 왔어요."
그녀의 음성도 다른 때와는 달리 다소 떨리고 있었다. 백검운은 그 말에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 백검운의 얼굴에 가벼운 홍조가 어리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곽소봉의 전신은 거의 투명한 백색의 나삼을 걸쳐서 속에 입은 작은 젖가리개와 아랫쪽의 삼각고의가 눈에 훤하게 비쳐들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니 당연히 그녀의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백옥 같은 몸매와 앙증맞은 배꼽 따위가 한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여인의 몸은 완전히 벗은 것보다는 이렇듯 절반쯤 가린 듯한 것이 더욱 육감적인 법이다. 특히, 곽소봉의 몸은 너무도 뇌살적인 데가 있었다.
황홀하도록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지극히 요염한 구석이 있어서 결코 철의여인 같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백검운은 곽소봉이 이렇듯 대담하게 나오자 절로 안색이 붉어졌으나 곧 웃으며 물었다.
"내일하면 안될 얘기라도 있소?"
곽소봉은 막상 그의 부드러운 시선을 맞이하자 절로 용기가 생기는 것을 느끼고 정색하며 대답했다.
"예, 그래요."
백검운은 그 말에 일어서서 침상의 한쪽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그래, 내게 할 얘기란 대체 뭐요?"
곽소봉은 다소 주저하다가 자신 역시 백검운의 침상의 한쪽에 나란히 앉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미 당신의 아내나 다름이 없으니 우선 우리의 혼인문제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 하겠어요."
곽소봉의 이 말은 실로 당연하다고 할 수가 있었다. 백검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보고 곽소봉은 문득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어....... 혹시 당신은 제가 싫지는 않은가요?"
그녀의 이 질문은 여자로서는 매우 어렵게 꺼낸 것이라고 할 수가 있었다. 상대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그녀는 즉시 수치감을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가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백검운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마 당신을 보고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오."
곽소봉은 그 말에 안면에 다소 홍조를 띠었다. 허나, 그녀는 다시 물었다.
"제 말은, 제가 당신의 아내로서 적합하겠느냐를 묻고 있는 거예요."
백검운은 그 말에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곽소봉은 이에 자신도 그 강한 신광이 번쩍이는 눈길로 백검운의 두 눈을 마주 보았다. 이 백검운의 두 눈은 전혀 아무런 신광도 보이지 않았고 처음에는 매우 평범하게만 보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매우 깊은 느낌이 있었고 자애로움이 가득 담겨있는 것 같았다.
원래, 곽소봉은 기질이 강해서 자신의 시선을 받고도 여태 시선을 돌리지 않는 남자를 만나보지를 못했었다.
그러나, 비단 이 백검운은 그녀의 칼날처럼 예리한 시선을 받고도 전혀 시선을 돌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부드럽게 그녀의 눈빛을 감싸주었다. 곽소봉은 점차 그 온화한 눈빛을 받자 전신이 마치 바늘방석위에 올라앉은 듯 부끄러워지고 달아오름을 느꼈다. 그리하여 그녀는 절로 시선을 피해서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목에까지 홍조로 물들였다.
그런 그녀를 향해 백검운은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혼인이라는 것은 예로부터 말해왔듯이, 그야말로 인륜지대사요 두 사람의 일생이 걸려있는 일이라고 할 수가 있소. 거기에는 당연히 서로간의 애정이 깃들어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오. 소봉, 당신은 정말로 내게 애정을 느끼고 있소? 단지 그대의 맹세를 실천하기 위함은 아니오?"
곽소봉은 갑자기 백검운이 소봉이라는 애칭으로 불러주자 전신이 마치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것 같은 달콤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허나, 그녀는 지금이 아주 중대한 시기라는 것을 상기하고는 눈빛을 맑게 빛내며 대답했다.
"저는 사실, 처음에는 절대로 시집을 가지 않으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만약 나를 이기는 남자가 있다면 그를 죽여버리려고........ 하지만 당신은 제가 생각했던 그런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것 같아요. 뭐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저는.......... 저는 당신을 본 순간부터 다른 일들이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어요."
그것은 이른바 그녀식의 아주 격렬한 애정고백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직접 그런 말을 하고서도 전신이 불같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어, 그녀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당신은 절 좋아하시나요?"
백검운은 담담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그야말로 완벽한 매력을 지니고 있는 사랑스런 여자요. 내 어찌 당신을 마다할 수가 있겠소? 만일 그런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내 욕을 할 것이오."
그것은 비록 은근하지만 분명한 애정의 표현이었다. 곽소봉은 그 말을 듣자 일순 갑자기 두 눈에서 눈물이 치솟아 올랐다. 그녀는 원래 백검운에게서 다정한 애정표현을 듣는 것을 기대하지는 않았었다. 그저 그가 자신을 거절하지만 않고 성실하게 대해준다면 능히 그를 믿고 한평생을 보낼 수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막상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말을 해주자 일시 전신이 황홀한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을 느꼈다. 다만 그녀는 백검운에게서 아주 달콤한 말을 듣지 못한 것이 다소 섭섭하기는 했으나, 그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다시 말했다.
"저는 이 일이 저의 집에 알리고 난 다음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을 했지만, 사람의 앞일은 알 수가 없는 것이어서........ 그리고 강호인은 굳이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들었기 때문에 저는 오늘부터 당신의 아내노릇을 하고 싶어요."
그 말은 바로 그녀다운 발상이었다. 그것은 즉, 오늘 그녀는 백검운의 방에서 함께 자겠다는 말과도 같으며, 그녀가 아니라면 여인으로서 어떻게 감히 그러한 말을 할 수가 있을까?
다만, 곽소봉도 내심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안색을 짙게 붉혔다.
사실 그녀가 수치심을 무릅쓰고 이런 말을 한 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백검운은 만난 이후에 그의 주위에는 실로 많은 여인들이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으며, 기왕에 마음을 먹은 바에야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백검운은 다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것은 그리 급한 일이 아니니, 서로가 약속을 어기지 않고 서로를 존중해주면 되지 않겠소?"
곽소봉도 내심의 생각을 그러했다. 그녀 역시 집에 이러한 대사를 알리고 정식으로 혼인식의 절차를 밟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다가는 자칫 다른 여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라 그녀는 순간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하지만, 오늘밤은......... 오늘밤은 당신과 자고 싶어요."
백검운은 그녀의 얼굴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문득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하지만 우리는 서로간의 예의를 지키도록 합시다."
이어, 백검운은 침상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것을 보고 곽소봉은 스스로 침상위에 올라서 조용히 누웠다. 그녀는 백검운이 알아서 자신을 취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한참을 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것을 느꼈다. 그리하여 고개를 돌려보니, 백검운은 다시 아까처럼 방바닥에 정좌를 하고 앉아서 깊은 묵상에 젖어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곽소봉은 일순 더할 수 없는 설움이 치밀어서 눈물이 마구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비록 그녀의 성격이 강인하기는 해도 그녀는 역시 여자인 것이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파격적으로 나오기는 했어도 자신의 소중한 첫날밤마저 이런 식으로 보내기는 그야말로 죽기처럼 싫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어떤가?
이 일은 백검운이 원한 것이 아니어서 그녀가 백검운의 행동을 억지로 바랄 수야 없지 않은가?
곽소봉은 내심 심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면서 눈물을 계속 흘렸으나 그렇다고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서 내려오지는 않았다.
그녀는 내심 이런 상처쯤은 스스로 감내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강호의 여인은 강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중에서도 특히 더욱 강한 여자였다. 따라서, 그녀는 고통을 이기는 일에 습관이 되어 있었다.
* *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백검운은 묵상에서 깨어나 문득 침상위로 시선을 던지다가 곽소봉이 아직 잠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가볍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게다가, 그녀의 두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샘솟듯이 흘러나오고 있으며 그녀의 얼굴이 아주 처연하게 변했다는 사실을 보고는 다소 흠칫했다.
이미 그녀의 베갯머리는 흘러내린 눈물로 인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것을 보고 백검운은 웃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소봉,"
곽소봉은 눈을 감고 있다가 그 말을 듣고 천천히 눈을 떠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은 비록 여전히 웃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깊은 온화함이 끊임없이 일고 있었다. 곽소봉은 그 눈빛을 보자 일순 그간 마음에 가득 쌓여있던 가슴을 에이는 상처가 모조리 가셔지는 것을 느꼈다.
첫댓글 r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