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강을 넘어 눈앞에서 폭풍우를 바라보다 5
운교인은 긴장감으로 몸을 떨었다. 그러나 그 긴장감은 칼과 칼이 맞부딪치고 몸과 몸이 뒤엉키게 될 시간이 임박한 까닭이 아니었다. 눈 돌려 십여 장. 그곳에 나라연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피투성이 되는 영상이 자꾸만 떠올라 전신이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는 것이었다.
당장이라도 운가가 이룬 대열을 이탈하고 싶었다. 그녀의 옆에서 나란히 올라가며 지켜주고 싶었다. 운교인은 당명인이 그녀의 곁에 없다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절실하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운교인은 십 장 앞쪽에 선 당유연의 손이 허공으로 올리려는 순간 다시 나라연을 바라보았다.
먼지 묻은 검은 장포에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채 검은 장창을 들고 있어도 그 모습은 결코 강하게 와 닿지 않았다. 산들바람에도 휘청거릴 것처럼 한없이 여리게만 느껴졌다. 당장 달려가서 이마에 맺힌 땀방울부터 닦아주고 싶었다.
얼마나 가슴 사무치도록 그리웠던가. 불일장에서도 동서로 갈라져 자주 보지 못했었다. 먼발치에서 망연히 바라보기만 했었다. 이제야 겨우 두어 번 몸을 날리면 닿을 거리에 있는데도 가지 못하니 차라리 보지 않은 것만 못했다.
운교인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처지기 시작했다.
“뭐해! 정신 차려!”
동료 중에 누군가가 운교인의 어깨를 후려쳤다. 그 충격이면 누구라도 정신을 차릴 것인데 운교인은 여전히 나라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발을 더 내딛는 순간, 운교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안돼!”
운교인은 나라연의 바로 밑에서 솟구쳐 오르는 흙더미를 보고서 바로 땅을 박찼다. 바로 그 순간 방금 전 그가 내딛으려던 그 자리에서도 흙더미가 치솟더니 날카로운 도 한 자루가 솟아올랐다.
그 순간 운교인의 시간이 세상의 그것보다 훨씬 느리게 흐르기 시작했다. 운교인은 허공에 정지된 채로 나라연을 베려는 도객을 보고 또 방금 자신의 자리에서 솟구친 도객이 그의 등을 치고 갔던 동료의 목을 향해 도를 휘두르는 것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운교인은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멀리 있는 나라연을 구하러 가야 할지, 지금 당장 도울 수 있는 동료를 구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갑자기 세상의 시간이 돌아왔다. 운교인은 어쩔 수 없이 몸을 날리던 방향으로 내려앉았다. 나라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장창을 휘돌려 상대의 도기를 퉁겨버리는 순간, 동료의 목이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운교인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로 그때 그의 발밑에서 또 다른 흙더미가 튀어 오르고 연이어 사방에서 도객들이 솟구쳐 올랐다.
“큭!”
불의의 기습을 왼팔로 퉁겨낸 운교인은 그 자리에서 휘돌아 상대를 베어버렸다. 그 순간 그의 오른쪽 발바닥 밑에서 예기가 솟구쳤다.
“컥!”
운교인은 극렬한 통증을 느끼면서 본능적으로 허공으로 솟구쳤다. 왼팔과 오른쪽 발바닥에서 동시에 피 흘리며 땅에 내려선 운교인은 왼발에 공력을 실어 세차게 바닥을 찍었다. 솟구쳐 오르려던 예기는 사라지고 땅이 내려앉았다.
땅이 꺼져 탄력을 받을 수 없자 운교인은 검으로 바닥을 찍어 앞으로 뒹굴었다. 그의 신형은 나라연에게 다가가기는커녕 관음사 비구니들의 꽁무니로 처졌다.
운교인은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도기를 피해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나라연을 돌아보며 자신도 모르게 오른발로 바닥을 찍었다.
운교인은 나라연에게 몸을 날리기도 전에 뼛속까지 파고드는 고통에 신음하며 자세를 허물고 말았다. 그때 그의 위쪽에서 튀어 오른 백의도객이 도를 휘돌렸다. 도가 꿈틀대는 순간 도기는 이미 그의 등에 이르러 있었다. 자세를 잡지 못한 채 등을 내보이고 있던 운교인은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바로 그때 그의 머리 위로 예리한 경풍이 스쳐지나가고 그의 목을 향해 날아오던 도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운교인은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 순간 한 사람이 옆을 스쳐가고 그 다음 사람이 그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운교인은 그를 일으켜 세운 사람을 확인하고 눈을 치떴다.
“너는?”
그러나 상대는 그를 일별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를 부축한 채로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걸을 수 있겠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입술을 깨물고 있던 운교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행십자진이오. 전방을 맡으시오.”
운청산은 말을 하는 동시에 운교인을 바로 종길의 옆으로 집어던졌다. 운교인은 조금 전의 교훈을 잊지 않고 왼발로 바닥을 내딛으며 본능적으로 전방을 살폈다.
사방에서 백의인들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선두에서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쇠뇌와 암기는 물론 바위와 통나무가 굴러 진로를 막았다. 그의 앞으로도 통나무가 굴러 내려왔다.
무의식 중에 통나무를 훌쩍 뛰어넘으니 그 뒤로 백의도객이 갑자기 나타났다. 흠칫 사이에 종길이 한 발 나서며 도기를 일으켜 베어버리고 소리쳤다.
“이봐! 당신 뒤까지 닦아줄 여력은 없어. 정신 차려!”
낭인 나부랭이에게까지 정신 차리라는 소릴 들을 줄은 몰랐던 운교인은 눈을 치떴다가 자신의 처지를 이해했다. 작지 않은 외상을 입은 상태에서 사방의 적들을 헤치고 본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운교인은 분노를 삭이고 대신 오행십자진의 대강을 확인한 후 그 즉시 종길과 보조를 맞추었다.
한편 운청산은 발을 내딛을 때마다 바닥을 찍으며 좌우를 살폈다. 이정까지 살펴 줄 필요는 없었다. 매복하고 있는 백의도객들의 실력은 대체로 종길을 상회하고 강정부부에 근접했다. 그러니 이정은 여유를 부려도 어렵지 않은 처지였다.
운청산이 무엇보다도 크게 신경 쓰는 것은 보이지 않는 발밑이었다. 주변과 보조를 맞추어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예기를 살피며 감지되는 순간순간마다 공력을 돋우어 상대를 내리 누르고 있었다.
그러한 경지는 천근추와는 달라서 아무나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경력을 쏟아내되 바닥을 건드리지 않고 그 밑의 사람이 있는 빈 공간만을 진동시켜야 하니, 발로 행하는 격산타우(隔山打牛)라 할 수 있으리라.
운청산은 시야를 넓혀 전장을 두루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파도처럼 연속해서 솟구치는 백의도객들의 수가 적어도 이백은 넘을 것 같았다. 공격에 실패하는 자들은 그 즉시 다시 땅 속으로 파고들고 금새 다른 곳에서 솟아올랐다.
그 뜻은 그들이 정상에서 백 여 장 아래쪽까지를 미로처럼 뚫어놓았다는 것을 뜻하리라.
운청산이 감탄하는 그 순간에도 뒤에서 그리고 좌우에서 계속적으로 백의도객들이 튀어나왔다. 운청산은 문취옥의 왼쪽으로 육양수의 절초인 항룡유회를 내뻗었다.
파란 그림자가 문취옥의 몸을 휘돌아 그녀의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백의도객의 도기를 퉁겨냈다. 그 순간 문취옥이 한발 크게 내딛고서 도를 내리찍어 상대를 베어버리고 게걸음으로 진세에 복귀했다.
항룡유회!
엉뚱한 곳으로 날아간 장력이 허공을 휘돌아 상대의 등을 노림으로써 혼자서 상대를 합공하는 효과를 낼 수 있는 수법이었다. 오늘 운청산은 그 수법을 오행십자진에 적절하게 응용하고 있었다.
운청산 등이 쉬지 않고 전진했다. 그 사이에 그들은 세 명의 비구니들을 구해냈고 다섯 명의 백의인들을 베었다.
또 다시 피를 뿌리고 널브러지는 백의인을 확인한 후, 운청산은 바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었다. 살린 사람 세 명에 죽인 사람 여섯. 이정의 말 그대로였다. 가급적이면 살생을 피하기 위해 육장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강정 부부와 종길에 의해 베어지고 말았다. 자신이 손을 쓰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렇게 쉽게 백의도객들을 죽이지는 못했으리라. 결국 문취옥 말처럼 살인의 책임을 전가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때 뒤쪽에서 이정의 기색이 멀어져가고 있었다.
“이 대협! 처지지 말고 그냥 흘려보내세요. 뒤에 우리 측 사람들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운청산은 돌아보지도 않고 소리쳤다. 그들이 올라온 것은 어느새 오십여 장! 상대의 집중공격과 매복에 걸려 속도를 늦출 수밖에 없었던 선두로부터 불과 오 장 뒤쪽에 있었다.
운청산은 종길의 왼쪽으로 왼손을 내뻗었다. 항룡유회의 기운이 허공을 휘돌아 종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던 백의인을 후려쳤다.
“아길! 멈추지 마.”
종길이 주춤거리는 백의인의 팔을 베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종길은 더 나아가지 못했다. 바로 오 장 앞에서 화살이 쏟아져 내리고, 반대로 수십 줄기 은광들이 때론 직선으로 때론 휘어서 정상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운청산 일행이 전부 멈춰 섰다. 주변에서 솟아오르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정상 사십여 장 밑까지 이르러서야 매복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운종인과 운화인은 어딨습니까?’
운청산은 생각을 떠올리며 아래를 주시했다. 바닥에는 청의인과 백의인들이 뒤섞여 널브러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싸움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운청산이 눈살을 찌푸리는 순간 우측 머리에 느낌이 왔다. 시선을 돌려보니 운가의 금의대가 혼란에서 벗어나서 정연한 태을구성진의 대형를 유지하며 매복을 거의 벗어나고 있었다.
운청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순간,
“아! 나 소저?”
등 뒤에서 운교인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들렸다. 운청산도 움찔하여 눈길을 돌렸다. 동벽 쪽에 근접하여 무탈하게 선봉에 이른 나라연이 뒤로 쳐진 관음사의 비구니들을 구하기 위해 다시 아래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당우리!’
운청산은 나라연의 모습을 보는 순간 떠오른 이름을 뇌까리다가 즉시 생각을 끊어버리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이 대협! 뒤를 부탁합니다.”
“크헉!”
철패를 휘돌아 날아온 당가의 회선표에 적중된 백의인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사지를 뻗었다. 그들은 거의 비슷한 증상을 일으켰다. 경련을 일으키다가 칠공에서 검은 피를 토하고 널브러졌다. 그 순간 또 다른 백의인들이 나서서 죽은 이들이 놓은 철패를 들고 빈 자리를 채웠다.
눈앞에서 두 명의 백의인들이 죽고 다시 새로운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 있던 백영담이 다시 전장으로 눈길을 돌렸다가 입을 쩍 벌렸다.
“뭐야? 저 놈은?”
청의인 하나가 단 걸음에 이십여 장의 공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렸으니 놀라지 않을 도리가 없으리라.
백영담을 향해 휘어져 날아오는 당가의 암기들을 전신으로 퉁겨 막아내던 칠 척의 철탑거한이 묵직하고 차분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곤륜의 신법 같구먼.”
백영담이 활을 들어 청의인 운청산을 겨누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그럼 저건 운룡대팔식?”
백영담이 눈 옆으로 시위를 가져와 눈을 가늘게 뜨는 순간 운청산이 백의도객들과 비구니 사이를 스며들었다.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회룡산형이 펼쳐지는 순간 운청산의 신형은 아홉으로 흩어져 비구니들이 휘두르는 장창과 백의인들의 도풍 사이사이를 스며들었다. 그 순간 아홉 명의 백의인들이 구룡십팔뇌격에 격중되어 널브러졌다.
백영담이 겨누었던 활을 다시 내리며 혀를 내둘렀다.
“흐아! 어떤 놈이 진짜야?”
“아홉이 무너졌으니 모두 실체란 소리지. 견아소향(見我所向), 이른 곳에서 찰라 전의 나를 본다 하던가?”
그때 잠깐 멈춘 운청산의 입에서 계속 올라가라는 외침이 흘러나왔다. 백영담이 기회다 싶어 다시 활을 들어올리는 순간 그의 신형은 또 다시 휘돌아 비구니들을 피하고 백의인들을 두드리며 창영에 가려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나라연 근처로 이동했다.
“제기랄! 정말 지랄 같은 신법이네.”
제대로 겨누지를 못한 백영담은 입술을 깨물고 세 차례 호흡을 끊어 뱉은 후에 다시 시위를 눈앞으로 가져갔다. 마침내 운청산이 고군분투하던 나라연의 옆에 이르러 그 움직임을 둔화시킨 순간 백영담은 손끝을 부르르 떨며 숨을 멈췄다. 지금이라면 창영에 가린 여자와 운청산을 동시에 잡을 수도 있으리라.
바로 그때였다. 운청산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두 개의 철패 사이에 비쭉 튀어나와 있는 백영담의 화살을 노려보았다. 아직 시위를 놓지도 않은 상황, 기세를 느낄 수도 없을 텐데도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백영담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운청산이 마치 표적이라도 되겠다는 듯 허공으로 솟구쳐 사지를 활짝 열었다. 백영담은 활대를 쥐고 있는 오른손을 살짝 치켜 올리면서 바로 시위를 놓았다.
백영담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일사이살(一射二殺)은 무산되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지금의 느낌이라면 오호신전은 아귀가 되어 운청산의 심장을 확실하게 씹어 먹으리라.
백영담의 호위 역을 행하고 있던 철탑거한 철혈신전주 백철후의 입가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운청산의 신형은 나라연의 앞으로 튀어나와 허공에 정지한 것처럼 보였고 화살은 호곡성을 뒤로 남겨놓고 정확히 그의 가슴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화살이 운청산을 훑고 지나쳤다.
미소 짓던 백영담과 백철후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며 눈을 치떴다. 분명히 꿰뚫어야 했다. 지금껏 백영담이 노린 그 어떤 사냥감보다 쉽게 잡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꿰뚫은 것 같았다. 그러나 잠깐 흐릿하게 보였던 운청산은 부드럽게 내려앉아 아무렇지도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것이 도가의 금강부동신법이라는 용정태극인가?”
백철후가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다.
“용정태극? 제길! 환장하겠구만. 나보다 어린 놈인 것 같은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네.”
그때 백철후가 백영담의 머리 위로 한 아름 통나무 굵기의 구리 빛 팔을 뻗어 살짝 비틀었다. 철근 같은 근육과 핏줄들이 꿈틀하는 순간 당가의 비전 회선표가 퉁겨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순간 피부 위에서 검은 물방울이 솟았다가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백철후가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낭우! 매복의 역할은 끝났네. 당가 놈들도 전열을 정비한 것 같고. 이제 본격적으로 한바탕 해야 할 것 같은데.”
순간 백영담의 사형 백환도가 빳빳한 수염을 쓸며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
“젠장!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손 안대고 코풀 수 있는데 왜 이런 희생을 치러야 합니까? 결계는 그렇다 쳐도 완성된 십면매복진조차 제대로 쓰지도 못하게 하다니---.”
백철후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제들이 죽어 나가니 나 또한 원통하네만, 어쩔 것인가? 모든 것이 좌상의 심원모려. 우리는 다만 따르면 될 것이네. 자, 낭우! 이제 시작해 보세.”
우측에 서있던 혈랑신전주 백낭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늘어뜨리고 있던 낭아도를 허공으로 치켜세웠다. 그것이 마치 신호기라도 한 것처럼 산등성이를 빽빽하게 메우고 있던 철패수들이 좌우로 물러서서 오 장 정도의 공간을 틔워주었다.
백낭우가 고개를 쳐들고 산을 울리는 괴성을 지르는 순간 철커덕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그리고 백낭우의 뒤쪽에서 강한 살기가 일어났다. 그 순간 앞뒤에서 적을 맞아 수세에 몰렸으면서도 악착같이 도를 휘돌리던 백의도객들이 갑자기 도를 거두고 땅속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상대를 잃은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상을 살피는 순간 둥그런 산등성이를 빼곡 채웠던 철패들 가운데서 중앙에 위치한 수십 개의 철패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뒤쪽에서 철커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살기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정상을 겨우 삼십여 장 남짓 남겨두고 있던 선두의 군룡전 고수들마저 나아가기를 멈추고 산의 기세를 살폈다. 전선 전체로 퍼져나가는 긴장감에 사람들은 즉시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본대를 찾아가 대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 뒤로 나중에 산을 올라 합공했던 노호단과 천우단이 합세했다.
그 순간 철커덕 소리만 들리던 것은 실체가 드러났다. 동인이었다. 황금빛 갑주로 전신을 감싼 채 언월도를 든 오십여 명의 칠척동인들이 철패 사이를 지나자마자 산등성이를 따라 퍼졌다가 서서히 산을 내려오고 있었다.
이정의 인도로 운청산 쪽으로 이동한 강정 부부 등이 모두 놀라 눈을 부릅떴다.
“저것들 뭐야?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사백 명뿐이라며? 여기만 오백은 되겠다.”
종길이 괴성을 내질렀으나 아무도 호응해주지 않았다. 대신 이정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저건 첩동갑인(疊銅鉀人)?”
“무엇입니까?”
운청산의 물음에 이정이 고개를 꺄웃거리며 말했다.
“첩동갑은 청동을 얇게 펴 갑주로 만든 것이네. 한 겹이면 문제될 것이 없으나 세 겹으로 겹치고 그 틈새를 수십 장의 면포를 압축하여 채운 것이네. 공명하기 때문에 격산타우의 기력도 쉽게 뚫지 못하니 호신강기를 입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다가 전면이 둥그렇게 마감되었기 때문에 어떠한 힘이라도 빗겨 맞히면 퉁기고 말 것이야. 그들이 첩동갑인을 앞세웠다는 것은 결국 당가가 선봉을 선다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것이겠지. 허나 첩동갑은 그 무게가 백육십 근에 이르는 중갑(重鉀)이라 이런 경사진 곳에서는 사용할 만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저리 편하게 움직이는지 알 수가 없구먼.”
비구니들과 함께 근동에 서있던 나라연이 첩동갑인을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가 이정과 운청산 등을 바라보며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 운청산이 생각했다.
‘알아봐 주십시오.’
운청산은 네 개의 눈과 네 개의 귀를 더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깨달았다. 그 스스로가 방비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동안, 사목사이는 멀리서 닥칠 수 있는 위협들을 미리미리 확인하여 알려주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경고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검은 화살도 그토록 여유 있게 피해낼 수 없었으리라.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 두 줄기 하얀 빛이 산에 이르렀다가 첩동갑인의 전신을 휘돈 후에 돌아왔다. 운청산은 눈앞까지 다가 온 운경산의 입을 주시했다. 그리고 곧 모두에게 말했다.
“바닥에 징을 붙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중갑의 무게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을 테니, 무리해서 베려하지 중심을 무너뜨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진형을 바꾸겠습니다. 이 대협과 제가 선두, 대형과 형수님 그리고 아길은 뒤에 섭니다.”
아무도 운청산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금세 자리를 뒤바꿨다. 그러자 나라연도 비구니들을 살피며 고수를 추려 앞으로 내세웠다. 운교인이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좌우를 둘러보다가 비구니들 옆으로 섰다.
그때 당유연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가주의 권위로 독령과 암혼의 봉인을 푸나니, 당가인은 가문의 비전을 사유로이 사용하라!”
순간 당가 사람들이 들고 있던 회선표들을 품속에 넣으며 하나같이 주문을 외우듯 소리쳤다.
“이제 나 선령들의 피땀을 사용하리니, 하늘은 이 죄업을 용서하소서.”
그들이 하나같이 품속에서 꺼낸 것은 두 개의 긴 철통, 이십 장 안이라면 호신강기마저도 꿰뚫는다는 당가의 삼대암기 가운데 하나인 무형뇌전이었다.
“쳐라!”
당유연이 다시 소리치는 순간, 산정에서도 사자후가 터져나왔다.
“공격!”
“끼이야오!”
그 순간 열린 철패들 사이에서 괴성이 터져 나오면서, 전신을 피로 칠한 채 낭아도를 든 사람들이 맨발로 쏟아져 나왔다. 야수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낭아도객들은 모두 일백을 넘을 것 같았다.
그들의 괴성이 산을 뒤엎는 순간 신수사태가 차갑게 소리쳤다.
“갑인들은 당가에 맡기고 야인들을 쳐라.”
그 순간 낭아도객들이 단 걸음에 십여 장을 뛰어 첩동갑인들의 머리를 넘어서고 다시 도약했고 또 한 번 몸을 날렸다. 경사로를 뛰는 것이라 하나 한 번에 십여 장씩 뛴다면 평지에서도 족히 사오 장 이상을 뛸 수 있으리라. 그 정도라면 능히 지급무인들 넘어 천급무인의 수준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쳐라!”
신수사태가 당유연을 옆을 스쳐지나가며 소리치자 사천무림련 사람들도 파도처럼 앞으로 나아갔다. 그 순간 첩동갑인들도 언월도를 바닥에 찍어 허공으로 솟구쳤다. 칠척이 넘는 언월도를 지지대 삼아 뛰니 무겁게만 보이던 첩동갑인들이 단 번에 삼 장을 내리 뛰었다.
쿠쿠쿠쿠쿵!
산이 울부짖는 소리를 신호로 하여 사백 명이 넘는 양측 사람들이 동시에 부딪쳤다.
낭아도객들이 십여 장을 뛴 탄력을 이용하여 바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내려 꽂혔다. 운청산 등에게도 두 명의 낭아도객들이 머리를 쪼갤 듯 붉은 도기가 뿜어져 나오는 낭아도를 내리찍었다.
운청산이 잠룡출곡의 신법으로 먼저 허공으로 튀어 올랐다. 그의 신형이 용유운상의 신법으로 돌변하면서 도기 사이를 파고드는 순간 그의 두 손에 감돌던 태허구전선공의 기운이 천호만격의 기력을 담아냈다.
파란 수기가 오직 두 사람에게 집중되자 싸늘한 눈빛으로 공격해오던 두 낭아도객의 눈이 부릅떠졌다.
퍼퍼퍼퍼퍼퍼퍼퍼벅!
운청산의 신형이 가라앉는 동안 파란 수기에 연달아 타격받은 두 사람들은 땅으로 내려서지 못하고 허공에서 연신 꺼떡거렸다. 그때 뒤이어 몸을 날린 이정의 미첨도가 반월을 그렸고 낭아도객들이 수급과 따로 떨어져 내렸다.
“이슬 같은 그대인생 슬픔모두 사라졌다.
고달팠던 그대영혼 극락정토 이르리라.
아미타불!”
운청산은 이정이 뇌까리는 불호를 들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때 가까이서 보니 더 엄청난 체구를 지닌 첩동갑인이 언월도로 연신 땅을 찍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엄청나구나.”
이정이 놀라는 순간 운청산은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앞으로 튀어나갔다.
츠즈즛!
운청산의 발가락 끝에서 세 번 흙이 튕기는 순간 그의 신형은 어느새 삼 장을 이동하여 첩동갑인의 도세 안으로 들어섰다.
휑!
언월도가 그의 머리 위를 스치는 순간 미꾸라지처럼 도세를 흘린 운청산의 두 손은 그의 다리 밑으로 파고들었다.
따당!
두 정강이를 격타당한 첩동갑인은 중심을 잡지 못하고 운청산의 머리 위로 쓰러졌다. 그 순간 운청산은 사량발천근의 수법으로 첩동갑인을 뒤로 날려버렸다.
첩동갑인이 뒹굴며 이정을 지나고 강정 부부를 지나 밑으로 구르다가 바위에 부딪쳐 겨우 멈춰 섰다.
운청산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이들이 없자 전황을 살폈다. 당가의 무형뇌전은 말 그대로 위력적이었다. 정면에서 한 대 맞으면 그 자리에서 고꾸라져 꿈틀거리지도 못했다. 그러나 정면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비켜 맞으면 요란한 접촉음만 내고 튕겨나가서 무형뇌전을 쏜 사람은 언월도의 도기에 그 즉시 분시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잠시 후 사천무림련 사람들을 스쳐지나간 낭아도객들이 다시 되돌아와 첩동갑인들의 주변을 휘돌았다. 이미 수천 번 연습을 행한 듯 첩동낭인들의 도세를 절묘하게 벗어나 오로지 사천무림련 사람들만 공격하고 있었다.
“청산! 저쪽일세.”
이정의 소리에 돌아보니 비구니들이 현저하게 약세를 보이고 있었다. 운청산은 이정과 나란히 비구니들을 향해 움직였다.
백환도는 입술을 깨물며 도를 뽑아들었다.
“내 저놈은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는 즉시 백철후의 옆을 떠나 산을 몸을 퉁겼다.
“사형!”
백영담이 살펴보니 백환도는 단 두 걸음 만에 이십여 장을 움직여 운청산에게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다시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그 순간 그의 도에서 붉은 장막 같은 기운이 줄기줄기 뻗어 나왔다.
“혈라삼도를?”
백영담이 눈을 부릅뜨는 순간, 운청산이 처음으로 검을 들고 앞으로 내뻗고 있었다.
쾅!
단번에 뻗어낸 검기가 칠 장에 이르렀을 때 붉은 장막같은 기운은 비단폭처럼 찢어졌고 백환도는 주르륵 뒤로 물러났다.
“이놈! 흐아합!”
백환도는 왼발을 찍어 다시 허공으로 튀어올라 운청산의 정도리를 향해 도를 내리찍었다. 붉은 장막이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연달아 일어나더니 어느새 하나가 되어 오 장의 공간을 뒤덮었다.
쿠릉!
허공으로 치솟은 운청산의 검이 휘돌면서 십자로 교차되는 순간 뇌성이 일면서 검풍이 먼저 붉은 장막을 구겨버리고 뒤이어 오 장에 이르는 검강이 붉은 장막들을 산산이 흩어버렸다. 처음으로 사우팔절검의 절초 풍뢰교연이 펼쳐진 것이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태악 도인과의 비무 때처럼 운청산은 허공에서 한 바퀴 휘돌아 두 기운이 부딪쳐 폐허가 된 공간에 유성분천의 절초를 찔러 넣었다. 한 바퀴 휘돌아 펼쳐진 유성분천은 검끝에서 사출되어 조그만 청환이 되어 다시 도를 세우는 백환도의 가슴에 가닿았다.
핏방울이 주륵 흘렀다가 피분수가 솟구쳤다. 백환도는 입술을 악다물고 떨어져 내리는 운청산의 다리 밑으로 붉은 도막을 펼쳤다.
운청산은 그 즉시 검을 두 발밑으로 넣어 검신의 탄력을 이용해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바로 그 순간 운청산의 이마가 따끔거렸다. 그리고 가슴이 관통당한 듯한 통증을 느꼈다.
운청산은 볼 것도 없이 그 기운을 향해 검을 내뻗었다.
쾅!
급하게 일으킨 이 장의 검강과 검은 화살이 정면으로 부딪쳤다. 땅이었다면 일 장 정도 뒤로 밀렸으리라. 그러나 운청산은 허공에 떠 있었다.
“청사안!”
밑에서 이정 등이 소리쳤다. 내려다보니 그의 신형은 뒤로 밀려 어느새 단애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젠 떨어져도 발 디딜 곳이 없었다.
운청산은 몸을 비틀어 왼손으로 허공을 향해 격공장을 내뻗었다. 폭음과 함께 뒤로 밀리는 힘이 약화되는 순간 어깨에 걸치고 있던 밧줄을 풀어 단애 끝 바위를 향해 내던졌다. 그러나 바위를 겨우 다섯 치 앞에 두고 밧줄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했다.
운청산은 애타게 소리치는 종길의 모습과 조금 전 그가 싸웠던 그 백의인이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쓰러지는 광경을 바라보다가 아래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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