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제족의 선택 (2)
송장공(宋莊公)은 본시 탐욕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화독으로부터 제족이 승낙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탐욕이 발동했다.
그는 공자 돌(突)을 궁정의 밀실로 불러들였다.
"사실 이번에 정나라에서 밀서를 보내왔다. 내가 그대를 죽이면 정소공은 성(城) 셋을 내주겠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대도 알다시피 나는 정장공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요, 그대는 정장공이 아끼는 아들이다. 내가 어찌 성 셋을 욕심내어 은혜를 저버리고 그대를 죽일 수 있을 것인가. 특별히 알려주는 것이니, 그대는 몸 보전에 각별히 유념하라."
송장공의 말을 들은 공자 돌(突)은 감격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크게 절을 올리며 말했다.
"저의 운명이 기구하여 이렇듯 고국을 떠나 군후께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 돌(突)의 생사는 군후에게 매어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만일 군후의 덕으로 제가 정나라로 돌아가 선군의 종묘를 대할 수 있다면, 그 은덕에 대한 보답이 어찌 성 셋뿐이겠습니까. 성 셋은 물론이거니와 백옥(白玉) 1백 쌍과 황금 1만 일(鎰), 그리고 해마다 곡식 3 만석을 송나라에 바치겠습니다."
송장공(宋莊公)이 기다리던 말이었다.
그는 뛸듯이 기뻤으나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이번 일은 제족(祭足)이 아니면 성사시키기가 힘들다. 내가 제족을 군부에 가둔것도 바로 그대의 장래를 위해서이다. 화독이 이미 제족을 설득시켜 놓았으니, 그대는 제족과 함께 정나라로 돌아가 대사를 이루도록 하라."
말을 마치자 제족을 불러 공자 돌(突)과 대면시켰다.
두 사람은 어색한 인사를 나누었다.
송장공은 두 사람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조건을 강조했다.
"이번 일이 성사되면 자돌은 성 셋과 흰구슬 1백 쌍과 황금 1만 일과 곡식 3만 석을 바치기로 약속했다. 내가 자돌의 말을 믿지 않는 바 아니나, 나라와 나라 사이의 일은 매사에 확실해야 하므로 이 자리에서 서약서를 받아 놓을까 하노라."
공자 돌(突)과 제족은 하는 수 없이 서약서를 써서 송장공에게 바쳤다.
송장공의 요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 일이 성공하면 정나라 정사(政事)는 모두 제족이 맡아 처결하라. 아울러 제족에게 혼기 찬 딸이 하나 있다고 하니, 옹 대부의 아들 옹규(雍糾)와 결혼시키는 것이 좋겠다. 기왕이면 이번에 귀국할 때 옹규를 데리고 가서 혼례를 올리고, 옹규에게 대부 벼슬을 내리도록 하라."
마치 정나라 임금이라도 되는 듯한 어조였다.
하지만 제족(祭足)은 이미 가타부타 의견을 내세울 처지가 못 되었다.
그나마 딸을 송나라로 보내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이윽고 제족(祭足)은 귀국길에 올랐다.
공식사절단의 행렬이었다. 다른 관리들도 수행하고 있었다. 공자 돌(突)과 옹규(雍糾)가 그 행렬에 낄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두 사람은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제족 일행의 뒤를 멀찌감치 따랐다.
9월 초. 제족(祭足)은 신정으로 돌아왔다.
원칙대로라면 먼저 궁으로 들어가 정소공에게 복명(復命)해야 했다.
그런데 제족은 궁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 병이 나서 운신조차 못할 지경이다. 주공께 대한 복명은 병이 나은 후에 하겠다.
이렇게 말하고는 곧장 자기 집으로 향했다. 그날 밤 장사꾼 차림의 공자 돌(突)과 옹규(雍糾)가 제족의 집으로 숨어들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제족(祭足)이 귀국했으나 병이 나서 운신하지 못한다는 소문은 이내 정나라 조정에 알려졌다. 제족은 병권과 내정을 한 손에 쥐고 있는 막강 권력자이다.
모든 사람들의 우러름을 한몸에 받고 있는 존재이다.
이런 제족(祭足)이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대부들이 가만히 앉아 있을 리 없다. 앞을 다투어 제족의 집으로 문병을 갔다.
"어떻게 할까요?"
문 밖에 대부들이 와 있다는 전갈을 받은 제족(祭足)은 미리 모아둔 자객 50여 명을 집안 곳곳에 숨겨두었다.
"모두 들어오시게 하여라."
대문이 열리자 대부들은 제족(祭足)의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그들은 깜짝 놀랐다.
몸이 아파 운신도 못 한다던 제족이 멀쩡한 얼굴로 의관까지 갖추어 입고 의젓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상공(相公)께서는 몸이 아프신게 아닙니까?"
대부들의 물음에 제족이 대답했다.
"나는 몸에 병이 든 것이 아니라 마음에 병이 들었소. 그래서 궁으로 들어가지 못하는것이외다."
"그것이 무슨 소리입니까?"
"내가 이번에 송나라로 갔다가 큰 숙제를 안고 왔소."
"숙제라니요?"
성미 급한 고거미가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선군께서 공자 돌(突)을 송나라로 보낼 때 아마도 송장공에게 여러가지 부탁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오. 그것을 빌미로 송장공은 우리나라로 쳐들어와 지금 주공을 내치고 공자 돌(突)을 군위에 앉히겠다고 벼르고 있더이다. 우리 공실은 아직 안정되지 못했는데, 어찌 송나라 대군을 당해낼 수 있겠소? 이것 때문에 나는 마음에 병을 얻은 것이오."
".........................!"
"이것은 내 생각이오만.......송나라 대군을 막는 길은 주공을 폐위시키고 공자 돌(突)을 새 주공으로 맞이하는 것뿐이오. 공자 돌(突)은 지금 우리 집에와 있소이다. 여러분은 장차 어떻게 하시겠소? 나는 그대들의 결정에 따르겠소."
제족(祭足)의 말을 듣고 난 대부들은 경악했다.
임금을 바꾸자는 얘기가 아닌가.
너무나 놀랐음인지 선뜻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였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고거미였다.
"말씀해보십시오."
"단도직입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공의 말씀은 실로 우리 정나라의 복입니다. 저는 지금 당장 새로 주공이 되실 분을 뵙고 싶습니다."
제족(祭足)과 사전에 짜놓기라도 한 듯한 발언이었다.
제족조차 뜻밖이라는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고거미가 이런 말을 하는데에는 나름대로 까닭이 있었다.
그는 지난날 병권을 거머쥘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세자 홀(忽)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적이 있었다. 그 일로 인해 고거미는 늘 세자 홀(忽)을 마음속으로 증오해 왔는데, 이 때에 이르러 과감히 자신의 생각을 입 밖으로 표출해낸 것이었다.
대부들은 제족(祭足)과 고거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두 사람을 의심하는 눈빛이 여실했다.
방 안은 삽시간에 긴장된 분위기로 변했다.
바로 그때였다.
우연인가. 고의인가.
벽장 속에 숨어 있던 자객들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대부들의 귀에 또렷이 들려왔다. 대부들은 일시에 목을 음츠렸다.
"고거미 말씀이 지당하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를 시작으로 너나 할 것 없이 한마디씩 떠들어댔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소. 우리는 지금 당장 공자 돌(突)을 뵙고 싶소이다."
제족은 한고비 넘겼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밖으로 나가 후원에 숨겨두었던 공자 돌(突)을 데리고 다시 들어왔다.
공자 돌(突)이 윗자리에 앉자 제족은 고거미와 함께 큰절을 올렸다.
그뒤를 이어 모든 대부들이 공자 돌(突)앞에 무릎을 꿇었다. 공자 돌(突)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향해 한마디 던졌다.
"나를 이렇게 환영해주시니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그대들과 함께 정나라를 잘 다스리겠소."
"망극합니다."
제족(祭足)은 미리 준비한 연명장을 꺼내어 대부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쓰게 했다. 연명장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었다. 송나라가 대군을 거느리고 공자 돌(突)을 군위에 올리려하니, 여기 서명한 신하들은 더 이상 주공을 섬기지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제족(祭足)은 사람을 시켜 그 연명장을 궁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 연명장 속에 제족의 비밀편지가 끼어 있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이 송나라의 위협에 굴복한 것은 목숨이 아까워서가 아닙니다. 신의 죽음이 주공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송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로 쳐들어올 것인즉, 모든 신하는 송의 침공을 막고자 공자 돌(突)을 영접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주공께서는 이러한 대세를 따르시어 잠시만 군위를 떠나십시오. 하늘에 맹세하건대, 신이 반드시 주공을 복위시키겠습니다.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맹세합니다.
'제족이 이 말을 지키지 않으면 하늘은 제족에게 벌을 내리십시오.'
"아아....!"
제족(祭足)이 보낸 연명장과 비밀 편지를 읽어 본 정소공은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깨달았다. 비탄의 신음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공자 돌(突)의 동태를 감시하라고 보낸 제족이 오히려 공자 돌(突)을 데리고 들어올 줄이야.
제족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가슴 가득히 끓어오랐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현실은 이미 그의 편이 아니었다.
조정 신하들도 모두 공자 돌(突)에게로 돌아서지 않았는가.
'제족을 믿는수밖에'
한가닥 희망은 오로지 자신의 복위를 도모하겠노라고 밝힌 제족(祭足)의 맹세였다.
그때까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목숨을 부지해야 했다.
'더 이상 미련을 갖다가는......'
공자 돌(突)의 성격으로 정소공을 발견하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달아나야 했다. 그는 내궁으로 들어가 부인 규씨와 작별 인사를 나눈 후 궁을 빠져나가 위나라를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다시 돌아오리라!"
어둠에 잠긴 신정을 돌아보며 정소공은 중얼거렸다.
군위에 오른 지 불과 석 달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 다음에 계속........
출처 - 평설열국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