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포
제5차 정기 합평회
(2016.2.04)
1. 기꺼이 - 엄옥례
2. 주름살 - 박동조
3. 오지랖 외1 - 이지원
4. 세 살 버릇 - 조현태
5. 어제와 오늘 - 백금태
6. 손잡이 - 신성애
7.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 - 이혜경
8. 고사리 분교 - 김주남
수필의 자존심 한국수필문학관
부설 한국에포
기꺼이/엄옥례
예정대로 소년원 수업을 새로 시작했다. 지난 봄 수업에는 소수의 모범생이 참여했지만 이번에는 학생들의 수도 서너 배 되고 그때 학생들에 비해 성격이 거칠다고 관계자가 귀띔해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덩치도 코끼리만하고 팔에 문신이 가득한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뚱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있는 학생들에게 수업에 대한 전반적인 것을 알려주었다. 책에는 배울 것이 다양하고 많이 읽으면 사람도 책이 될 수 있다고 실마리를 풀었다. 세상이라는 도서관에서 사람들이 나를 열람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한권의 책이 되어 보자고 했다. '사람책'이 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학생들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흥미를 일으켜 보려고 영상도 보여주고 넌센스 퀴즈에 마술도 보태보지만 그 순간뿐이었다.
수업의 분위기 전환을 위해 강화물이 필요했다. 다음 수업 부터 주머니 속에 쵸콜릿과 젤리, 사탕을 가득 담아 갔다. 발표를 하거나 대답을 잘하는 사람에게 주겠다고 했더니 반응이 솔솔 일기 시작했다. 마침내 불쑥불쑥 튀어 오르는 두더지잡기 게임기의 두더지들처럼 학생들도 여기저기서 발표를 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발표를 한 학생이 사탕을 받아 제 자리로 들어갈 때였다. 순간, 덩치가 크고 팔에 구렁이 문신을 한 학생이 사탕을 낚아채는 게 아닌가. 사탕을 빼앗긴 학생은 되찾으려다가 밀려 넘어지고 말았다. 넘어진 학생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뒤에서 지켜보던 담당선생님이 달려왔다. 밀친 학생에게 혼을 내자 그냥 장난치려고 했을 뿐이라고 했다. 사탕을 낚아챌 때 모습을 떠올려보면 장난치려고 했다는 말이 맞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잘못을 저질러서 입소했겠지만 수업 중 학생들의 모습은 왜 왔을까 의문이 들 만큼 순수하게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이곳은 작년까지 독서와 관련된 수업이 제대로 진행 되지 않았다고 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로 독서토론을 시작했으나 학생들의 참여가 점점 줄어들어 프로그램을 진행할 수 없었고 '시낭송'도 반응이 일어나지 않아 중단되었기에 독서 프로그램은 운영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곳이었다. 그런데 내가 몸담고 있는 단체에서 한 달 만이라도 해보자고 부탁하다시피 해서 겨우 연결이 되었다.
이곳에 오기 전, 다소 부담스러운 대상자들이라 고개를 저었지만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졌다. 아들 나이 쯤 되는 학생들이니 엄마 같은 마음으로 대하면 별일 있겠나 싶은 마음에서 시작했다. 수업을 받을 학생들이 있는 곳에 가려고 첫 번째 철문을 통과하니 여느 학교처럼 넓은 운동장이 있었다. 노란체육복을 입은 학생들이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추어 체조를 하고 있었다. 운동장을 지나 안팎으로 잠겨있는 문 몇 개를 통과하니 수업을 하기로 한 교실이 보였다.
첫 시간인지라 대상자들을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간단한 검사지를 시킨 후 결과를 보니 선입관과는 달리 책을 여러 권 읽은 학생도 있었다. 평범하게 사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는 학생이 대부분이라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차츰 이해할 수 있었다. 일찌감치 경험한 평범하지 않은 삶이 준 깨달음이리라. 학생들은 굳은 표정이었지만 생각을 진지하게 표현했다.
다음 만남은 가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뮤직영상 '가족사진' 으로 애틋한 분위기에 젖게 했다. '언제 까지나 너를 사랑해'라는 그림책을 읽어 주니 학생들은 저마다 가족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 중에 눈물이 그렁한 학생은 아버지가 많이 보고 싶다고 했다. 아버지가 다쳐서 돈을 벌지 못했을 때, 김밥 한 줄로 아버지와 아침을 때웠던 일이 떠오른다는 말에 가슴이 저릿했다. 독후 활동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함께 먹고 싶은 사람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마침 가정의 달이어서 편지를 완성해서 부치도록 했다.
그 다음 수업 날 이었다. 학생들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복도에는 이 수업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도 몰려와 함께 하고 싶다고 했다. 다음 기회에 같이 하자며 돌려보내고 교실로 들어섰다. 초여름이라 에어컨을 틀 계절은 아니었지만 작은 공간이라 교실 안은 후텁지근했다. 학생들은 창문을 열어 공기를 상쾌하게 해 주었다. 레이져 빔을 켜주는 학생도 있고 컴퓨터를 잘 다루는 학생은 내가 들고 간 휴대용 메모리를 컴퓨터에 꽂아주기도 했다.
프로그램 진행순서에 따라 세상을 향한 학생들의 화를 해소하는 시간을 가지고 다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활동을 했다. 꿈을 심어주고 미래설계를 지도하며 수업을 갈무리했다. 학생들이 세상에 나가 튼튼하게 뿌리를 내려 꿈꾸는 대로 살기를 바라며 한 달 간의 수업을 모두 마쳤다. 그 후, 기관으로 부터 학생들을 계속 지도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런데 새로 시작한 수업 중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수업을 멈추었다. 당사자인 학생들은 교무실로 불려가고 숨을 깊이 몰아쉰 뒤 수업을 마저 했다. 가방을 챙겨서 나오는데 등 뒤에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생님, 다음 시간에도 계속 오실 거지요?”
학생들의 목소리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멈추어 섰다. 양손에 든 가방을 한쪽으로 옮기며 그들을 향해 높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주름살 / 박동조
남편이 뚫어져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왜, 뭐 묻었어?”
“아니. 근데 당신 웬 주름이 그리 많노!”
“......!”
“주름살이 하도 많아 얼굴에 보리 심으면 한 말은 거두겠다.”
“......!”
“이마에다 고구마 심으면 한 가마는 캐겠고.”
내가 열이 나서 소리쳤다.
“이거 다 당신이 만든 주름살이다.”
".......!"
오지랖/이지원
좋은 뜻으로, 상대를 아끼는 심정으로 마음을 보탰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있다.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면 당황스럽다 못해 곤혹스럽다. 뜻하지 않게 내게도 그런 일이 생겼다.
같은 글쓰기 모임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한 후배의 모습이 예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눈여겨 보던 중이었다. 그런 후베가 한 날,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엇박자가 난 일을 털어놓았다. 그다지 큰 문제는 아니었지만 후배 입장이 애매해진 것 같아 그 일을 바로 잡아 주었다. 덕분에 일이 잘 해결 되었다고 전화가 왔다.
결실의 계절 가을이었다. 이제 막 문단에 들어 치열하게 공부를 하고 있는 후배에게 통화를 끝낼 무렵, 가을인데 좋은 소식은 없는지 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낭보를 알려 주어 축하의 말을 건넸다. 아직 공식 발표를 하지 않았으니 선배만 알고 있으라고 했다.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 공모전은 등단한 사람이 참가할 수 없는 곳이었다.
후배는 그런 규정이 없었다고 했다. 그동안 자격요건이 바뀐 줄 알고 통화를 끝냈다. 내 말에 찜찜힌 기분이 들어 후배가 다시 꼼꼼히 살펴 본 모양이었다. 기타사항에 등단자는 응모할 수 없다는 내용이 들어 있더라며 무척 당황스러워했다. 듣는 나도 같은 기분이었지만 알아서 잘 판단하라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본인도 인정했지만, 제대로 살피지 않고 글을 내버린 것이 가장 큰 실수였다. 어떤 일을 행할 때는 기준과 자격이 있고 규정도 뒤따른다. 그것을 간과해 버리면 다 된 밥에 코가 빠지고 생각지도 못한 낭패를 당할 수도 있지 않던가. 이런 경우에 그녀를 아끼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
그 공모전은 이 지역 신인들에게만 열려있다는 것을 나만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설사 모르고 한 일이라도 알고 난 뒤에는 바로 잡아야 하고 먼 길을 함께 걸어 가야할 후배를 위해서도 그것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에 밖에서 통화를 했던 일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손전화기를 들었다 놨다 한참을 망설였다. 어둠살이 내릴 무렵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등단을 했다하나 아직 문단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모르고 있는 후배를 위해, 그녀의 앞날을 위해 마음을 담아 이야기를 했다. 모르고 한 일이지만 상을 받고도 기쁜 마음보다 꺼림칙한 마음이 된다면 지금이라도 바로 잡는게 순리가 아니겠는가 라며 조언을 하고 말았다. 앞으로 더 좋은 일로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후배였기에 진지하게 말을 해 주었다. 영민한 후배도 선배 말이 맞겠다며 날이 밝으면 주최측에 알리겠다고 했다.
다음 날, 늦은 오후에 후배로부터 문자가 날아왔다. 주최측에 등단 사실을 알렸더니 논의 끝에 원칙대로 해야 한다며 취소가 결정되었다고 했다. 문자 말미에 “저 잘했죠?”라는 문구가 밤새도록, 그리고 다음 날 사실을 알릴 때까지 얼마나 곤혹스러웠을까 미루어 짐작이 되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선배의 말을 듣고 용기를 낸 후배가 고마웠고 앞으로 그녀가 걸어갈 길에 미약하나마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위로와 격려의 말을 문자로 담기에 충분치 않을 것 같아서 전화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이 잘 마무리 된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모임의 회장에게 알려지게 되었고 문집 발간을 앞두고 있어 편집진들도 알게 되었다. 공식발표도 나지 않은 상태에서 몇몇 사람들이 미리 알게 된 것이다. 후배는 발표 전에 취소를 할 생각이었는데 바람결에 소식을 접한 문우들이 축하 문자를 보냈다는 것이다. 일은 이렇게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난감해진 후배가 아니라고, 이러저러 해서 취소할 거라고 했더니,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럴 필요까지 있냐며 잠자코 있으라 했다는 것이다. 열에 아홉은 그렇게 말을 했다니 그러면 아니 된다고 말한 사람은 나 혼자인 셈이었다. 뒷 감당은 오롯이 후배의 몫이겠지만 나만 가만히 있었다면 어쨌든 후배는 상을 받을 수 있었다. 요즘 말로 멘붕이 왔다. 내가 후배에게 몹쓸 짓을 한 꼴이 되고 말았다.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깊은 갈등에 빠졌을 후배를 생각하니 갑자기 내가 죄인이라도 된 것 같았다.
오히려 후배가 나를 위로했다. 모두가 가만히 있어도 된다고 했지만 한 사람이라도 아니라고 한 말이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고 했다. 그 말 때문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고, 기쁘게 받을 수 없는 상이라면 물리는 것이 맞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몹시 혼란스러웠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있어도 된다고 해야했나? 아니면 처음부터 모른 척 해야 했나? 뒤에서 수군대다 말아야 했나?
우리가 그날 통화를 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같이 웃었지만, 가만하 있으리고 말하는 다수가 있어 후배도 마음이 썩 편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나대로 그녀 주변의 사람들이 잠자코 있으라고 했다는 말이 몹시 충격이었다. 가감없이 전해 준 말 속에 후배도 상에 대한 일말의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내 열 두폭 넓은 오지랖이 문제였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고지식한 나를 다시 본다. 다들 나와 같이 생각하면서도 아니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별로 없다. 속내를 감추고 잠자코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도. 어쩌면 제 일도 아닌 일에 발 벗고 나서서 마음을 쓰는 이런 나를 비웃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오지랖의 원래 뜻은 겉옷의 앞자락을 말하지만 주제 넘게 행동하는 사람을 두고도 하는 말이다. 나와는 크게 상관도 없는 일에 감 놔라 대추 놔라고 하는 일은 앞으로 두 번 다시 하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게 다진다.
히잡/이지원
잘 알지 못했던 문화를 이해하거나 편견을 깨는 데에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또 있을까. 낯선 곳에서 보고 겪은 일은 사람의 시야를 넓혀줄 뿐 아니라, 새로운 시각까지 가질 수 있게 만들어 준다. 가까이 접하지 않아서 혹은 딱히 알 필요가 없어서 관심 밖에 있던 것들이 여행을 통해 나의 관심 영역으로 들어올 때면 그간 살아오면서 내가 제대로 알고 있는 것들은 대체 얼마나 되는지 가늠해 보게 된다.
말레이시아 여행길에서 인상 깊게 본 풍경 중 하나는 히잡을 입은 여인들의 모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간혹 무슬림 여성들을 보면 무척 생소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흔한 모습이라 생경함보다는 더운 나라에서 얼마나 불편할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히잡은 무슬림 여성들이 입는 옷을 말한다. 무슬림 여성들은 가족 이외의 사람을 만날 때는 반드시 이 옷을 입는다. 히잡은 초경이 시작되면 정식으로 입어야 하지만 어린 여자 아이들도 입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어차피 평생 입어야 할 것이라 미리 입히는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내가 묵었던 집이 무슬림의 집이라 그들의 생활을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이슬람 국가의 대부분은 법률로써 여성에게 공공장소에서는 손과 얼굴을 제외한 모든 신체를 가리도록 하고 있다. 처음에는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게 감싸는 것이 히잡인 줄 알았다. 우리와 같은 일반적인 복장에 머리에만 쓰고 있어서 그렇게 생각을 했다. 그래서 히잡을 쓴다고 여겼으나 머리에 쓰는 것만이 아니었다. 긴 치마에 긴 소매 윗도리가 무릎까지 내려오는 전통 복장은 목둘레와 소매 끝, 윗도리 하단에 보석을 촘촘히 박아 놓아 무척 화려했다. 거기에 같거나 비슷한 색의 천으로 머리에 쓰는 것까지가 히잡이었다.
전통 복장은 보기에는 좋으나 한복처럼 일상생활을 할 때는 불편하다고 했다. 요즘은 결혼식이나 예를 갖추는 특별한 날에만 입는다고 한다. 나도 그 옷을 입어 보았는데 역시 활동하기에 편하지는 않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평상복으로 긴 소매, 긴 바지, 긴 치마라면 머리에 두르는 것만으로 허용이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중년 부인들은 대체적으로 좀 편해 보이는 정식 히잡을 입고 다녔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머리에 히잡을 두른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 왠지 어색하고 조화롭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예쁠 나이에 세련미라고는 없는, 히잡으로 젊음을 속박당하는 느낌이었다. 민낯에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 그 어떤 장식도 없었다. 히잡에 구속되어 그들의 삶도 무척 소극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곳에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처음에 가졌던 피상적인 나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며칠 지나자 않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무척 활기차고 매사에 적극적이었다. 평생을 써야 하는 머리의 히잡은 멋을 부릴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했다. 머플러 가게로 보이는 상점들은 거의가 히잡을 파는 곳이었고 다양한 색상과 보석이 박힌 화려한 것들도 있었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멋을 내고 있었다.
히잡 속에 감추어진 모습과 그들의 생각은 일방적인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그곳에서는 히잡이 사회적으로 대접을 받고 보호받는다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얼굴과 손만 내놓고 온몸을 가린 것이 피부를 보호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뜨거움을 견디지 못해 달라붙는 반바지를 벗고 얇고 헐렁한 긴 바지를 나도 사서 입었다.
환경은 생활양식을 만들고 문화를 만든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한다는 것이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일부 아랍국가에서는 지금도 남편 한 명에 아내를 네 명까지 둘 수 있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고 있다. 그것은 원래 종교 전쟁으로 과도하게 발생한 과부와 고아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편이었지만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한다.
여러 명의 아내들은 한 집에 살면서 요리도 같이 하고 각자 낳은 아이들도 함께 키우며 산다고 했다. 그런데 밖에서는 차도르로 눈만 내놓고 다니는 여인들이 집안에서는 몸매가 드러나는 화려한 옷을 입고 장식품으로 치장을 하며 문신에다 짙은 화장도 한다는 것이다. 아내들끼리 경쟁심도 있겠지만 외출을 할 때 매무새에 더 신경을 쓰는 우리의 문화와 비교가 되었다. .
여행 중 함께 다닌 슈하이다는 서른 중반의 여성인데 그녀의 아버지도 자신의 어머니와 또 다른 작은 어머니가 있다고 했다. 두 어머니는 사이가 좋지 않단다. 우리 속담에 부처도 시앗을 보면 돌아앉는다고 하지 않던가. 만약 슈하이다의 남편이 다른 아내를 취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물었더니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지식인답게 여성의 권리에 대해서도 생각하는 것 같았다.
종교적 관습과 율법에 따라 히잡을 입지만 그들에겐 갑갑하거나 그것이 자신을 구속한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들에겐 종교는 곧 생활이었다. 이슬람 국가가 아닌 나라에서는 히잡을 남녀평등을 저해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반면, 이슬람에서는 이러한 의견에 대해 종교적 차별이라고 여긴다니 다른 문화를 바라보는 것에 차이가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된다. 설득하여 바꿀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서로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러면 세상은 좀 더 여유롭고 갈등도 줄어들 것 같다. .
문화의 차이는 생각의 차이를 낳는다. 어쩌면 나를 둘러싼 주변의 많은 것들이 나와 같지 않다는 이유로 배척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둘러보게 된다. 차이를 좁히려면, 세상을 이해하려면 그 속으로 들어가 볼 일이다. 기회를 만들어 떠나 볼 일이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세상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넉넉한 마음이 되기 때문이다..
세 살 버릇/조현태
이제 겨우 12살 소년이 네일아트에 푹 빠져있다. 틈만 나면 모형 손톱에 그림을 그리고, 스티커도 붙이고, 지우고 바르고, 지우고 바르고…. 소년의 부모는 이러한 아들의 행동을 보고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장차 남자가 할 수 있는 일과 거리감이 있어 보였다. 또 한 가지는 적어도 네일아트에 관한 지식이나 개념을 확립하기도 전에 너무 덤비는 것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우선 당면 과제인 공부부터 하고 그 후에 네일아트를 해도 된다는 쪽으로 설득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소년은 이미 작심을 한 대답이었다. 학교 공부를 내팽개치고 네일아트만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더군다나 소년이 결심을 하게 된 동기는 엄마의 행복이었다.
어느 날, 소년이 엄마를 따라 간 곳이 네일아트 가게였다. 네일아트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소년이 강하게 느낀 바가 있었다. 그것은 어머니가 매우 흡족하고 기쁨에 찬 얼굴로 행복해하는 모습이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밝은 표정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처음 본 것이다. 그 가게 주인이 어머니에게 손톱을 장식해 준 것이 어머니를 행복하게 하였다면, 소년도 어머니를 행복하게 할 수 있겠다는 기대가 꿈틀거렸던 것이다.
1평방 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손톱에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그것으로 엄마가 기쁠 수 있다면 소년도 엄마의 행복에 일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소년은 네일아트에 필요한 정보를 찾으면서 재료와 방법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본다. 모형 손톱에 갖가지 장식을 하면서 엄마가 좋아하는 모양이나 색깔이 어떤 것인지 관찰하게 되었을 것이다. 소년이 워낙 진지하게 몰입하니 그의 부모는 좀 더 지켜보기로 하였다고 한다.
결과는 소년 자신이 만족하고 행복해 하는 것을 부모가 확인하였으므로 소년의 뜻에 따르기로 하였다. 결국 어머니의 손톱이 소년의 실습에 동참하게 되었고 네일아트에 필요한 재료도 지원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관심을 많이 가졌던 분야가 그 사람의 예능이나 직업에 관계가 깊다는 뜻이 아닐까 한다.
어릴 적의 각별한 관심이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흔하다. 맹인이면서도 ‘명장’이라는 호칭을 쟁취하게 된 鼓手 조경곤 선생도 그 예가 아닌가 한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명창들의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때로는 명창들을 찾아다니며 ‘심청가’, ‘춘향가’ 등을 부모 몰래 배우기도 하였다. 아마도 귀에 익숙한 소리여서 친숙한 음악적 감정이 그의 정신에 잘 축적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16세 때에 뜻하지 않은 사고로 눈의 망막이 파열되는 고충에 빠진다. 수술을 6차례나 했지만 결국 실명을 하고 말았다.
그가 심취했던 것은 창(소리)이었다. 눈을 완전히 잃었으니 연습하는 대본을 볼 수가 없었고 목 상태마저 극도로 나빠졌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어 차선으로 북을 선택한 것이다. 따지고 보면 고수도 소리꾼의 동작이나 입을 바라보면서 그에 맞도록 북의 장단이나 강약을 취해야 한다. 그렇건만 보지 못하여 못한다는 것보다 들을 수 있으니 할 수 있다는 결심을 한다. 어쩌면 이미 익숙하게 들어온 명창과 고수의 묘한 합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어릴 적부터 터득한 그만의 예능이기도 하지 않겠는가.
나도 어린 시절에 별난 장난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쯤이었을 때는 시계나 라디오도 흔하지 않았다. 둘째 형님 신혼 방에는 사발시계가 있었는데 갑자기 요란한 종소리를 울리는 것이 아닌가. 형수가 얼른 시계 꼭지(알람정지 버튼)를 눌러 소리를 멈추게 했는데 그것이 신기하였다. 어떻게 저 혼자서 소리를 내고 단추를 누르면 멈추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루는 아무도 없을 때 그 방에 들어가 시계를 요리조리 살피다가 안에 어떤 장치가 있는지 알고 싶었다. 사발시계 뒷면을 풀어놓고 보니 온갖 톱니바퀴와 부속들이 가득 있고 작은 바퀴가 가느다란 철사에 달려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동안이나 그 움직이는 모양을 들여다보다가 태엽에서나온 힘이 어떻게 바늘을 일정하게 움직이게 하는지 점점 더 궁금해졌다. 하나둘 뜯어내다 보니 부속품들이 방바닥에 순서대로 도열해 있었다. 대충 궁금증을 풀기는 했으나 덜컹 겁이 났다. 불과 몇 시간 후면 들에 나갔던 형님이 돌아 올 것이다. 그 때까지 다시 조립을 해 두어야 했다. 풀어냈던 마지막 부품부터 역순으로 조립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간단치 않았다.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하면서 겨우 조립은 하였지만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다. 태엽을 잔뜩 감아놓아도 한참 돌아가다가 멈추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흔들고 두드리면 동작하다가 또 잠잠했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완전범죄를 모색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발시계에 대해서 아무런 관련이 없기로 작정하였다. 결국 읍내 시계방에 가져가서 수리했는데 일 년가량 사용하다가 버린 것으로 안다.
중요한 것은 지금도 각종 가전제품이나 농기계 엔진 등을 분해하고 조립한다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백금태
고속도로를 달린다. 정년퇴임을 맞은 선배님을 떠나보낸 후 집으로 가는 길이다.
어제도 이 길을 지나갔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석양은 어제나 오늘이나 비슷하다. 하지만 해의 빛깔도 해의 생기도 어제와 오늘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어제는 석양이 이글거리며 불탔다. 사십 여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며 정년퇴임식을 맞으신 어느 교장선생님의 상기된 얼굴 같았다. 많은 손님을 맞이하느라 이마는 땀으로 번질거렸다. 운동장은 중고차 가게 마당처럼 축하하러온 손님들의 차로 가득 찼다.
드디어 학생들의 사물놀이패가 왁자지껄하게 분위기를 띄우며 퇴임식이 막을 올렸다. 식순에 의해 내빈소개가 있었다. 교육청에서도 오고 지역기관에서도 오고 대전에서, 서울에서, 동창모임, 제자모임, 가족 등 내빈소개는 숨 가쁘게 이어졌다. 지역 국회의원 보좌관까지 참석했다며 교장선생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지루한 내빈소개에 이어 축사가 이어졌다. 한 사람, 두 사람……. 이제 축사가 끝났나 생각하기가 바쁘게 또 새 인물이 단상에 오르기를 쉴 새 없이 반복했다. 축사내용은 그 말이 그 말이다. 똑 같은 축사 본을 복사하여 한 장씩 쭉 나눠 가지고 읽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축하 패, 꽃다발, 선물꾸러미가 책상에 수북하게 쌓여갔다.
식장 벽에는 교장선생님께 보내는 아이들의 편지와 그림이 빈틈없이 붙어있고, 풍선이 꽃을 피우며 풍성하게 달려있었다. 몇 안 되는 직원들은 손님들을 맞이하느라 발뒤꿈치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십여 년 전에 보던 풍경이, 십년 전에 보던 풍경이 오늘도 그대로 펼쳐졌다. 쏜살같이 달려가는 세월에 이 풍경만은 액자 속에 갇힌 듯 세월을 비껴 정지되어 있는 듯했다. 학부모의 축하공연, 동기생들의 합창, 밴드부의 악기공연이 퇴임식을 절정으로 몰고 갔다. 교장선생님의 상기된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넘쳐흘렀다.
오늘은 교장도 교감도 아닌 선배교사가 40여년의 교직생활을 마감하는 날이다. 정년퇴임식은 학교 회의실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다. 교직원들만 참석한 자리였다. 화려한 식장 치장도, 시끌벅적한 연주도, 지루한 축사도 없었다.
선배님의 퇴임사가 바람 한 점 없는 호수의 수면처럼 잔잔하다. 초임시절부터 사십여 년의 재임기간을 거치면서 가슴에 새겨온 현장에서의 생생한 체험은 후배교사들에게 하나의 교과서로 다가온다. 거창한 실적도 승승장구했던 승진도 없었지만 후배교사들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뭘까? 선배의 얼굴은 편안했다. 욕심이라곤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다.
퇴임식에 이어 자리를 식당으로 옮겨 조촐한 송별회를 열었다. 폐를 끼칠까 염려하는 선배의 완강한 거부에 후배들이 몰래 마련한 자리였다. 오리 수육 한 접시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이별의 아쉬움은 더해만 갔다. 후배들의 기타와 하모니카 연주에, 그리고 합창에 선배는 눈시울을 붉히며 덕담으로 화답했다. 어제와 오늘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선배를 생각하며 고속도로를 달린다. 똑같은 태양이건만 석양이 어제처럼 이글거리
손잡이-신성
짧은 겨울 해가 산등성이로 넘어가며 어둠이 깔리고 있다. 오후 내내 방안에서 정담을 나누던 한 무리의 손님이 황토방을 나선다. 아직도 할 말이 많은지 맞잡은 손을 놓지 못하고 있다. 손을 잡는다는 건 서로 끈끈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 믿는다는 무언의 몸짓인 게다.
굳게 닫힌 출입문의 손잡이가 엉망이 되어있다. 손잡이가 망가졌으니 어떻게 방문을 열랴. 드라이브를 갖고 와 나사를 돌려도 홈이 뭉개져 돌아가지 않는다. 문설주의 잠글 쇠를 눌러도 열릴 기미가 없으니 새 손잡이로 갈아야 될까 보다. 망치와 끌을 갖고 힘껏 내리쳐 고장 난 것을 강제로 떼어낸다. 집에 사놓은 것이 없으니 시내까지 부품을 사러 갈 일이 걱정이다.
동그랗게 구멍 난 것을 보자니 은근히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몇 번이나 부서져 바꾸었는데도 번번이 이지경이니, 오늘도 손잡이에 매달리고 비틀며 장난감 삼아 놀아도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시 새것으로 갈아봤자 얼마 못 갈 것은 불을 보 듯 뻔하다. 어차피 손잡이란 문을 여닫는데 필요한 것이니 뚫린 곳에 손을 넣어 문을 열면 어떨까. 부서질 염려도 없고 바깥 동정도 살필 수 있으니 일거양득이 될 것 아닌가.
집안 식구 모두 기계치라 무엇이든 고장이 났다하면 고칠 방도가 없다. 손님이 잠시 머물렀다 가는 곳이니 손잡이가 없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잠을 자는 곳이 아니니 굳이 잠금 장치도 필요치 않을 터 그대로 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막무가내로 우겨보지만 남의 편은 수긍을 하지 않는다. 바늘구멍으로 황소바람이 드는데 어림없는 소리라며 도리질하고 있다.
어린 시절 방문을 열고 닫을 땐 둥근 문고리를 잡아 당겼다. 삐거덕 소리 에 바깥바람이 몰려가고 고였던 방안공기는 밖으로 내달았다. 손쉽게 당겼다 밀고 나오는 문고리는 창호지 너머 작은 인기척에도 닫힌 문을 열어 젖혔다. 무시로 드나드는 익숙한 발걸음에 자물통은 애초부터 달지 않았다. 세찬 겨울바람에 왈강달강 거리면 그제야 앞섶 여미듯 숟가락으로 빗장을 걸었다.
문이 있기 전 사람들에겐 손잡이라는 게 없었다. 아주 보잘 것 없어 보이는 문손잡이의 역사가 바로 사적인 삶의 역사와 깊은 연관을 갖는다. 공동체 생활이 무너지며 벽이 세워지고 담장이 쳐지고 문을 달기 시작했다. 문손잡이는 너와 나를 구분 지우는 경계지점에 버티고 선 만남의 꼭짓점이다. 사생활이 은밀해지고 감출 것과 지킬 것이 많아지자 자연스레 열쇠와 자물쇠가 등장했다.
가옥의 형태가 변함에 따라 도어라는 이름의 여닫이문이 생겨났다. 도어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단단한 또 하나의 벽처럼 보였다. 틈이 없는 벽에는 바람도 쉬이 넘나들지 못하는데 어찌 사람이 드나들 수 있으랴. 숨구멍을 달 듯 문 한 켠 에 구멍을 뚫고 손잡이를 달아야 했다. 단순하고 밋밋한 손잡이에는 애초부터 잠금장치가 되어 있었다. 손잡이를 돌리면 튀어 나왔다 들어가는 단추식으로 누구나 열쇠만 돌리면 간단히 열고 닫혔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도어의 변화도 빠르게 이어져 열쇠를 꽂아 여는 손잡이에서 여러 가지 기능이 추가되며 나날이 발전했다. 복잡한 환경 속에서 편리함이 가미된 도어는 유행에 따라 정교하고 아름다워졌다. 이제는 디지털 도어 록까지 생겨났지만 편리함속에 숨겨진 복잡한 기능은 성질 급한 사람에게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때가 있나보다.
손 만 대면 알아서 열리는 손잡이가 있는 세상에서 구형 손잡이는 애물단지가 되는 건 한순간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쉬이 열리는 문인데도 금방 열리지 않으면 쉽게 포기하고 막무가내가 되고 있다. 어떻게 하고 들고 나는지 망가뜨리기를 예사로 한다. 아이는 산에 들면 얼른 어른이 되고 싶고 어른은 아이로 뒷걸음치는 걸까. 그들은 문이 없는 세상을 꿈꾸고 않는 듯 느껴짐은 왜일까.
가지 않은 길, 가지 못한 길/ 이혜경
아침부터 뉴스는 수능시험장의 풍경을 전하느라 야단법석이었다. 도돌이표처럼 비슷한 화면이 반복되었지만 리모컨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텔레비전 앞을 떠나지 못했다. 지금쯤 어느 시험장에서 답안을 채우고 있을 조카의 얼굴이 떠올라 손을 모았다가 폈다가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제 삼자인 나도 이런데 십 년 넘게 공들여 쌓아온 탑을 단 한 번의 시험으로 평가받아야 하는 당사자의 심정은 오죽하랴.
나에게 처음으로 ‘이모’라는 호칭을 안겨준 조카는 언니의 딸이다. 내가 스무 살 때 조카가 태어났다. 귀하지 않은 생명이 있겠느냐마는 임신이 되지 않아 몇 년간 속을 태우다가 찾아온 아이였기에 각별했다. 조카와 놀아주기 위해 이따금씩 수업까지 빼먹고 달려갈 정도로 유별나게 정을 냈다. 까만 눈동자가 유난히 빛나서 똑똑하게 생겼다는 소리를 자주 듣더니 그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어릴 때부터 공부에 똑 소리가 났다. 친구들이 과외를 받고 지름길로 뛰어 갈 때, 조카는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을 생각해 혼자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책을 파고들었다. 엄마가 당뇨를 앓으며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고 꼭 의사가 되어 엄마를 챙겨 주겠다며 꿈을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일주일처럼 길었던 하루가 저물고 드디어 시험이 끝났다. 바로 전화를 걸 수가 없어 언니에게 문자를 보냈더니 묵묵부답이었다. 문자를 읽었다는 표시가 뜨는데 답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불길한 징조였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시험을 망쳤다는 짧은 문자 한 줄이 도착했다. 그토록 열심히 준비했는데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으니 이모인 나도 속상해서 밥이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다.
얼마 후 성적표가 나왔다. 시험을 망쳤다고는 하나 제법 알려진 대학교에 붙을 정도의 점수가 나왔다. 하지만 오랫동안 꿈꾸어 온 의사의 길을 가기에는 점수가 모자랐다. 성적표를 건네는 선생님의 첫 마디가 ‘넌 재수해라’였으니 평소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결과였다. 주변에서는 입을 모아 일 년만 더 고생하라고 축 처진 어깨를 다독였다. 나도 조카를 붙들고 멀리 보면 지금 일 년 더 투자해서 원하는 길로 가는 것이 제대로 가는 길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설득했다.
온 가족이 나서서 재수를 권했지만 조카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재수생이 되어 그 지긋지긋한 입시 공부를 또 하기가 싫다는 것이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음 편히 쉬지 못하고 공부에 매달렸는데도 시험을 망쳤으니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했다. 일 년 더 공부해서 시험을 친다 한들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도 없다며 왼고개를 했다. 의사가 못 되더라도 더 넓은 세상에 가서 새로운 길을 찾겠다며 짐을 싸서 떠났다.
조금만 더 가면 결승점이 눈앞인데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주저앉는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선택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몫이었다. 나도 오래 전에 전력을 다 했던 시험에서 아슬아슬하게 고배를 마신 경험이 있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과 허탈감이 짐작이 되었기에 더는 붙잡을 수가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하던 해, 교단에 서고 싶다는 꿈을 안고 컴컴한 독서실에서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른 채 책상 앞에 앉아 지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낙방소식을 듣는 순간 치열하게 책을 붙잡고 지냈던 시간들이 나를 배반한 것 같아서 가슴에서 피시식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시험에 통과한 친구도, 통과하지 못해 재수를 결심한 친구도 나를 말렸지만 책상을 가득 메웠던 두꺼운 책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차라리 그동안 요령을 피웠으면 조금 더 노력하면 붙을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라도 가졌을 텐데 한눈팔지 않고 땀을 쏟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대도, 미련도 없었다. 도저히 같은 책을 다시 펴고 싶지가 않아서 시험 대신 직장이라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미련 없이 서울로 떠나 가족들을 놀래게 했던 조카가 여름 방학을 맞아 집으로 돌아왔다. 엄청난 양의 짐을 꾸려 와서 하는 첫 마디가 다시 수능시험을 보겠다는 것이었다. 기어이 손을 뿌리치고 갈 때는 언제고 시험이 몇 달 안 남은 상황에서 한 마디 의논도 없이 휴학을 했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막상 서울에 올라가서 대학 생활을 해 보니 곳곳에서 현실의 벽이 느껴졌다고 했다. 무엇보다 실패가 두려워서 자기의 꿈을 향해 다시 도전하지 않는다면 두고두고 후회할 것 같아서 더 늦기 전에 용기를 냈다고 한다.
두 번째 수능 시험을 코앞에 두고 고비가 찾아왔다. 디데이가 다가오면서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공부하다가 폐렴에 걸려 열이 펄펄 끓었다. 막판 스퍼트를 해도 모자랄 시기에 병원 침대에 누웠으니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다행히 시험 이틀 전에 퇴원을 해 가까스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오늘은 합격자 발표가 나는 날이다. 오후에 발표가 난다고 해서 하루 종일 시계만 쳐다보고 있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고 답을 기다릴 때도 지금보다 시간이 빨리 갔던 것 같은데 오늘따라 시계바늘이 느리기만 하다. 발표 시간이 지났는데도 전화기가 잠잠해 점점 불안해지던 때에 벨이 울린다. 가고 싶어 하던 학교의 의대에 합격했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인생길을 걷다 보면 크고 작은 갈림길을 수없이 만난다. 가끔씩 그 때 내가 만약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하기도 한다. 교직의 길을 가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 아니라 한 번 더 도전하지 않았던 선택에 대한 아쉬움이라고 하는 편이 맞다. 반대로 한 번 더 공부에 매달렸더라면 꽃 같은 청춘을 갑갑한 독서실에서만 보냈다고 아쉬워했을지도 모른다. 가지 않았든 가지 못했든 간에 선택하지 않은 반대편 길이 궁금하기는 누구나 매한가지 아닐까.
한 번 더 용기를 내 자기가 원하는 길을 걸어가는 조카에게 박수를 보낸다. 나는 이제야 깨닫는다. 그 때 내가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 실패가 아니라 넘어지는 것이 두려워 다시 용기를 내지 못한 자체가 더 큰 실패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고사리분교/김주남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지금은 없어진 고향집 뒤란 감나무아래 감꽃이나, 마당에 깔린 멍석에 누워 바라보던 별이나, 만국기 휘날리던 초등학교 운동회 같은, 어느 한 시절 입력되어 지워지지 않는 그리운 것들. 그런 것들은 거기 그냥 그대로 있어주었으면 좋겠다. 현실 속의 부재와 기억 속의 존재사이 간극이 애틋해서 찾아 나선 길이 훗날 다시 추억이 되고, 후미진 산자락에 낙엽 쌓이듯 켜켜이 추억이 쌓여가기도 한다. 재약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봐도 지금은 없는 고사리학교도 내겐 그런 곳이다.
막내가 여섯 살, 아이들이 좀 자라면서 내 운신의 폭이 조금씩 커질 무렵이었다. 빨래를 널다가 베란다까지 들어온 햇살에 홀려 하늘을 쳐다보다가 아, 꼭 이런 하늘 이런 기분이 들었던 때가 언제였더라, 더듬다가 불현듯이 고사리학교가 그리워졌다. 일상에 묶여 마음만 훨훨 길 떠나고 싶던 때에도 가을이 오고 억새가 일렁이면 가장 먼저 마음을 잡아끌던 곳, 그곳에 가면 내 젊은 날이 그대로 박제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어디에 사진이 있을 거야’, 한참을 뒤져 고사리분교에서 찍은 사진을 찾아냈다. 그나마 사진이 하나 남아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파릇파릇한 시절이었다. 직장초년병 시절 젊은 여남은 명이 스스로 소장파라 칭하며 등산을 다녔다. 듣고 보는 모든 것이 반짝거리던 시절, 세상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가득 찼고 우리 앞엔 어떤 황금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던 때였다.
하늘아래 첫 동네. 그 높은 곳에 마을이 있고 학교가 있다는 것은 감동이었다. 하늘에 자꾸 눈이 가던 그날의 하늘빛까지 들어앉은 사진 속의, 젊었던 한 시절을 함께 했던, 이제는 중년이 되었을 이 사람들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남편을 부추겼다.
“재약산에 가자. 지금.”
“지금? 지금 나서긴 너무 늦지 않을까?”
“안되면 근처까지라도….”
내 안 어디에선가 숨죽이고 있던 역마살이 더는 참을 수 없었던지 맹렬하게 요동을 쳤다.
이 어디쯤에 학교가 있었는데…. 주변은 너무 변했고 내 기억과는 너무 달라져 있었다. 고사리학교가 폐교되었다는 소식을 텔레비전을 통해 듣기는 했다. 그래서 더욱 가보고 싶었지 싶다. 사람의 발길이 끊어진 곳은 금방 수풀이 울창하기 마련이라, 내 키만큼 자란 수풀이 무성한 벌판에서 학교터가 어디쯤인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근처에서 묵을 팔던 서른 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저 쪽으로 가라고 방향을 일러주었다. 그 방향을 따라 수풀 속을 한참 가니 조금 넓은 공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좀 낯이 익은 곳 같기도 했다. 고사리분교 터에 남긴 교적비가 내 기억 속의 장면이 실재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수십 년간 화전민들이 자리 잡고 살던 사자평의 고사리 재배 밭 부근에 학교가 있어 고사리분교라 불렸다하나 정확한 명칭은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이다.
<교적비 - 산동초등학교 사자평분교터. 1966년 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36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1일 폐교되었음. 1997.3.1. 경상남도교육감>
고사리분교 터 근처에 도토리묵과 동동주 등을 파는 간이음식점이 서너 개 있었다. 그 중 고사리분교를 묻던 내게 나만큼이나 반가운 표정으로 자기가 바로 고사리분교 졸업생이라 했던 남자를 찾아갔다. 마침 다람쥐 한마리가 쪼르르 달려오더니 묵이 놓인 대야옆 구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쟤는 여기가 집이거든요.” 다람쥐도 그도 그대로 자연이었다. 반가웠다. 산에서 아무나 사람만 만나도 반가운 터에 고사리분교 졸업생 36명 중 한 명이라는 그가 어찌 아니 반갑겠는가. 그에게서 고사리분교의 내력과 한 명뿐이었을 선생님과 졸업생과… 고사리분교에 관한 뭐라도 듣고 싶었다. 그 높은 지대에서 만나는 묵도 반가웠고, 팔아주고 싶기도 했다. 사진 속 화단가에서 놀고 있는 아이가 혹시 이 청년인지도 몰랐다.
"묵 먹고 가요."
"안 돼, 지금 가도 늦어."
“먹고 가요ㅡㅡ.”
어린 날, 아버지에게 떼를 쓰듯 떼를 써 보았지만 남편은 벌써 저만치 휘적휘적 내려가고 있었다. 여섯 살짜리 막내를 데려온 터라 너무 늦어도 안 될 일이긴 했다. 어느새 해가 설핏해지고 있었다. 늦가을 산 속의 해는 짧다. 느지막이 출발한데다 길가의 도토리도 몰래 몇 개씩 주워가며 가자니 걸음이 자꾸 더뎌졌다. 아닌 게 아니라 평지가 가까워질 때쯤에는 이미 어두워진 길을 후레쉬도 없이 더듬더듬 내려와야 했다.
더러 머리와 가슴이 다른 곳을 향하는 때가 있다.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가슴까지 수긍하는 것은 아니어서인지 일주일 내내 골이 났다. 허전함과 아쉬움을 뭉뚱그려 묵에다 덤터기를 씌웠다.
"거기까지 가서 꼴란 묵도 안 사 주는 데 뭐."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더니 참다못한 남편이 말했다.
"아따 참, 되게 캐쌓네. 다시 가자, 묵 사줄게."
보름 후에 다시 올라 도토리묵을 먹고 왔지만 그 사이 김빠진 맥주처럼 감동에도 김이 빠져 버렸는지 손이라도 잡고 흔들고 싶던 반가움이나 묵 맛이 처음마음 같지 않았다.
그리고 또 십 년 쯤이 흐르고, 막내가 고등학생이 된 가을, 다시 사자평을 찾았다. 이젠 어느덧 마음속에서 고사리분교가 되어버린 그 청년을 만나고 싶었으나 고사리분교 근처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습지보호 공사를 위한 덤프트럭만이 먼지를 잔뜩 일으키며 연방 지나다닐 뿐, 드넓은 사자평에는 황량한 바람소리만 윙윙거렸다.
첫댓글 파일 미리 출력하신 샘님들 죄송해요.
이 파일로 다시 뽑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편집하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잘 보겠습니다^^
사무국장님, 고생 많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