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가 아니어도 바라보는 풍경만으로도 명산, 영취산
1. 일자: 2024. 4. 6 (토)
2. 산: 영취산 진례봉(510m)
3. 행로와 시간
[당내마을(11:25) ~ 골명치(11:49) ~ 주능선(12:06) ~ (진달래 군락) ~ 가마봉(12:48) ~ 진례봉(13:10) ~ 봉우재(13:31) ~ 시루봉(13:48) ~ 영취봉(14:10) ~ (거친 너덜길 40분) ~ 흥국사(15:05) ~ 주차장(15:20) / 8.19km]
< 영취산 산행을 준비하며 >
진달래 보는 목적으로 등산을 가는 건 아마도 강화도 고려산 이후로 처음이다. 이번엔 여수 영취산에 간다. 사진으로 보기엔 마냥 화려해 보이는 진달래군락지는 공해가 빚어낸 풍광이라 한다. 여수공단이 뿜어내는 오염물질로 다른 수종은 고사하고 진달래가 무성해졌다는 것이다. 화려함 뒤의 숨은 슬픈 사연이다. 영취산의 진달래는 3월 말~4월 초에 만발한다. 산 전체에 봄 분위기가 가득하다. 흥국사 사천왕문부터 일주문에 이르는 길옆에 줄을 이은 벚나무 고목이 하얗게 빛나는 모습 또한 장관이라 한다.
영취산의 명물인 진달래와 흥국사를 모두 보려면 진달래축제 행사장~개구리바위~정상~봉우재~시루봉~봉우재~흥국사 순으로 이어가는 것이 가장 무난한데, 오늘 들머리는 인적이 드문 상암초교 인근이다. 괜찮다 주능선까지는 인파에 휩싸이지 않을 것이니 더 낫다. 경치는 시루봉이 가장 좋다 한다. 봉우재~흥국사가 아닌 능선을 조금 더 타야 하는 이유이다. 초반 오름만 이겨내면 크게 힘들이지 않는 10km 안쪽의 여유 있는 산행이 예상된다.
오늘은 결코 서두르지 말자고 다짐한다.
<희망사항 >
대개 봄꽃은 동백 - 산수유 - 매화 - 개나리 - 벚꽃 - 진달래 - 철쭉 순서로 핀다. 올 봄은 일찍일거라 예상되던 개화가 늦어진다. 덕분에 3월말이 최적이라 여겼던 영취산 진달해는 이번 주에 절정을 맞을 듯하다. 계절은 영악한 인간의 바람대로 오지 않고, 꽃도 그러하다. 참고 기다리는 게 조바심보다 현명하다. 어느덧 4월이다. 진달래 그 붉은 향연에 푹 빠져들고 싶다. 날머리 흥국사와 주변 벚꽃은 산에서의 화려한 진달래에 버금가는 덤이리라.
(여기까지는 산행 준비 과정의 기록이다.)
< 여수 가는 길 >
낡은 버스와 독선적 운영과 무시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싫어 옮겨온 반더룽은 버스의 질은 확실히 달랐다. 차 밖 모습에서 지난 주와는 또다른 봄이 느껴진다. 공기의 감촉도 훨씬 부드럽다.
유튜브에 '학전과 김민기' 영상이 있어 연이어 보았다. 손석희 앵커와 김민기 대표의 대담 그리고 가수와 배우들이 전하는 추억과 미담 화면에 빠져든다. 아침이슬이라는 언제들어도 가슴뭉쿨한 노래만으로도 영웅인 그가 대학로에서 30년 넘게 소극장을 운영하며 수많은 무명가수와 배우를 키우고 특히 아동과 청소년을 위한 연극활동에 매진했다는 사실은 감동이었다. 무엇보다 스스로를 '뒷것'이라 칭하는 영웅이 시대의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을 낮은 목소리로 과장없이 담담하게 전하는 모습은 큰 울림을 주었다. 그는 진정한 실력자이자 인격자다. 버스가 임실을 지난다. 대장이 코스 안내를 한다. 말에 보탬이 없다. 신뢰가 간다. 당초 봉우재에서 영취봉 지나 길게 능선을 타려했는데, 여유있게 꽃구경하고 하산하는 것도 고려해야겠다. 벚꽃이 만발한 광양과 이순신대교, 묘도를 지나 바다 건너 여수에 들어선다. 들머리에는 11시 반쯤 도착했다.
<당내마을~ 가마봉>
당내마을 고샅길을 따라 산을 향해 올라간다. 동백도 보이고 매화도 눈에 들어온다. 멀리 산등성이가 온통 하얗다. 저게 뭐지 잘못 본 게 아닌가 하는데 분명 벚꽃 군락이다. 온 산이 어찌 저럴 수 있을까 하고 걷는데 이번엔 영취산 가마봉 부근으로 붉은 진달래가 무리지어 있는 게 목격된다. 이래서 들머리를 변경했다면 신의 한수다. 끌리듯 꽃을 향해 올라 간다. 20분 넘게 치고 오르니 골명치다. 포장도로와 만난다. 벚꽃 군락이 부근에 있다. 무덤 옆 길로 치고 오르자 새하얀 벚꽃 밭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낸다. 예상치 못한 호사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시간도 여유가 있는데 그 속에 들어가 볼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일었다. 비탈은 계속되지만 눈맛이 좋아서 그런지 힘든지도 모르게 주능선 갈림에 선다. 정상까지 0.9km가 남았음을 이정목이 알려온다. 순식간에 고도 300대 후반에 선다. 비로서 걸음에 여유가 생긴다.
이제부터는 진달래가 주인공이다. 붉은 꽃들이 무리지어 길가 사면에 도열해 있다. 풍요로운 분홍빛에 빠져든다. 안되겠다 싶어 삼각대를 세운다. 걷다 멈추고 찍고 다시 멈춘다. 올려다보는 눈에 온통 진달래만 들어온다. 자세히 보니 아직 만개하진 않았는데도 충분히 화려하다. 과유불급, 꽃이 만개했다면 아마 이 산은 인파로 몸살을 앓을 게다. 돌아보는 눈에는 산단의 석유화학 시설들이 보이고 그 뒤로 바다의 기별도 느껴진다. 진달래의 붉은색이 한 프레임에 잡혀 공단의 모습은 덜 흉물스러웠다. 계단을 오르면 바라보는 풍광은 흐린 날씨임에도 멋짐을 뽐낸다. 곳곳에 전망 데크가 있어 잠시 쉬어 간다.
가마봉에 서서 보니 정상 진례봉으로 향하는 길이 한 눈에 들어온다.
<가마봉 ~ 영취봉>
구불구불 뱀처럼 굽어지는 길을 따라 산객들이 행진한다. 긴 계단을 내려서고 올라서고 붉은 색의 마법에 이끌려 앞으로 나아간다. 곳곳에 전망 좋은 바위가 산재해 있다. 멈추고 찍고 걷고를 반복한다. 산세와 풍광을 보니 영취산은 진달래가 아니어도 명산이다. 봉우리도 여럿이고 산세도 암릉이 대세지만 그 안 길을 부드럽다. 다이나믹한 남도 특유의 산이다.
13:10 영취산 정상에 선다. 정상석에 새겨진 한자가 무척 매력적이다. 흘려쓴 글씨는 한마디로 '있어 보인다.' 한참을 서성이다
정상을 뒤로 하고 나아간다. 저 멀리 시루봉이 눈에 들어오고 봉우재와 인근 벚꽃 군락도 새하얗게 선명하다. 긴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도솔암은 굳이 들르지 않았다. 다녀온 이의 별거 없다는 말을 들어서다. 봉우재는 너른 공터였다. 간이식당도 있다. 필도 사투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많이 걸었구나 하는 생각과 이제 끝이 멀지 않았구나 하는 안도감과 함께 어수선함이 공존한다. 사람 사는 모습이다.
평상에 잠시 앉아 본다. 사진을 본다. 일종의 중간점검이다. 꽤 괜찮다.
많은 이들이 봉우재에서 흥국사로 내려간다. 시간은 아직 3시간쯤 남아 있다. 쉴만큼 쉬었다. 망설이지 않고 시루봉으로 향하는 비탈을 치고 오른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진달래는 뜸하다. 그러나 바위 틈으로 살포시 모습을 드러낸 무리가 있어 얼른 사진에 담는다. 그 생명력에 경의를 표한다. 시루봉 인근 바위에 흰 옷을 입은 여인이 등지고 앉아 있다. 그 뒷모습이 근사해 사진에 담는다. 앞 모습을 찍는데는 더 용기가 필요한데, 일단 멈춘다. 충분하다.
계단을 더 치고 오르자 영취봉 최고의 조망터 시루봉이 나타난다. 사방이 확 트여 풍광이 시원하다. 지나온 봉우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 산은 생각보다 암릉이 많은데 크게 위험하지는 않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다. 시루봉 정상석에는 눈길만 주고 길을 이어간다. 계단이 꽤 길더니 마지막 봉우리인 영취봉 가는 등로는 의외로 순했다.
<가마봉 ~ 영취봉>
영취봉은 누군가 정성스레 쌓아 올린 돌탑에 쌓여 있었다. 길 우측으로 내려선다. 초반 가파르긴해도 갈만하던 등로는 이내 끝이나고 거친 너덜이 길게 이어진다. 트랭글의 길 표시 색이 파란색이다. 그 색의 의미를 알기에 마음 단단히 먹고 내려선다. 잠시 쉬며 올려다 본 하늘 끝에는 초록의 나뭇잎이 색을 하늘로 틔우고
있다. 봄이 오고 있구나. 계곡과 만날 때까지 험로의 연속이었다. 조심 또 조심하며 희미한 등로의 흔적을 찾아 내려온다. 마침내 계곡에서 평지와 만나다. 물기로 내려서 세수를 하고 나니 몸이 한결 개운하다. 돌이켜보니 영취봉 정상에서의 돌 무덤은 내림길의 너덜과 내려서서 보게 될 화려한 돌탑의 서막이었나 보다. 수미쌍관, 그 시작과 끝이 잘 맞아 떨어진다.
흥국사로 이어지는 길, 유난히 돌탑이 많다. 이제껏 한번도 본 적이 없는 특히하고도 다야한 돌탑들이 길을 따라 빼곡히 이어진다. 누군가의 열정과 예술 감각이 느껴진다. 이 정도면 돌탑 자체가 문화재가 되겠다.
흥국사는 고즈넉한 산사 그대로의 모습으로 먼 길 걸어온 나그네를 맞는다. 경내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다. 천천히 느리게 절 구경을 한다. 우리네 산사의 이 고요함은 명품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느낌이 편하게 다가온다. 일주문을 지나며 등산은 끝이 난다. 주차장 한 켠에 선 트럭에서 어묵을 먹으며 트
렝글의 종료 버튼을 누른다. 꽤 근사한 꽃구경 산행이었다.
< 에필로그 >
버스는 예정대로 16:30 서울로 출발했다. 봄날,남녘 여수에서 행복한 경험을 했다. 영취산 진달래는 만개하진 않았지만 충분히 화려했고, 산에서의 조망도 훌륭했고, 여수를 오가며 창밖으로 본 바다 풍경도 색달랐다. 여수와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다. 어떤 사안에 대한 판단은 기대값을 드러내며, 그 기대값은 결국 경험에 기반한다. 따라서 앞일을 예측할 때 우리는 많은 것을 드러내는 셈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세상과 자신의 과거에 관한 것들을 말이다. 아는 만큼 경험한 만큼 보이는 법이다. 내가 새로운 먼 곳을 가려는 이유이다. 버스가 질주한다. 음악을 들으며 잠깐 눈을 부치고 나니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기분이다. 3월과 4월초는 너무 먼 거리를 당일에 이동하고 산까지 타는 무리한 산행의 연속이었다. 변산, 순천, 진해로 3월초부터 이어진 원거리 산행은 오늘 여수를 끝으로 당분간 쉬어갈 생각이다. 산악회 버스를 타도 이동거리가 2시간 안쪽으로 가야겠다. 무리하면 탈이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