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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수필문학관 아카데미 11기-9차시 과제 정리
나의 ( )는 ( )이다
▪ 나의 고향에는 비행기가 난다 /변미순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대구 K-2 공군부대와 국제공항이 함께 있는 곳 근처에서 산다. 얼마나 큰 소음과 함께 사는지는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다. 몇 년전부터 국가는 소음피해를 보상해 주는데 기준은 주거지역의 소음 세기에 따라 분류한다. 바로 위로 여객기와 전투기가 날아 다니는 우리집은 당연히 1등급이었다.
나는 목소리가 크고, 약한 난청이 있다. 그 이유가 살아온 환경에 의한 것이다. 여객기는 그나마 대화가 가능하다. 입술을 읽고 뜻을 대강 이해하는 것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전투기가 날아오르면 우리는 잠시 쉬는 시간이었다. 전화통화를 하다가도 그냥 수화기를 들고만 있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도, 학생들도 잠시 쉬어야하는 시간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는 또래보다 작고 약하여 교실에서도 제일 앞자리에 앉았었다. 대로를 걸어 500m쯤 걸어가야하는 등굣길에 머리 바로 위로 전투기가 날면 대로에 주저앉아 울기도 했었다. 그나마 최근 전투기가 일부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고도 하고, 어릴적에 비하면 그 회수가 줄어든 것 같다.
여고 때 친구가 우리 집으로 놀러 온 적이 있는데 그 친구는 우리방 찬장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다. 그때 전투기가 날아올랐고, 찬장에 있던 접시들이 달달달 흔들렸고, 비행기 소리는 엄청 컸다. 뒤돌아 찬장을 두 손으로 잡았고, 그러느라 귀를 막지 못해 전투기 소리를 오롯이 들었던 친구의 놀란 표정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모습이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나며 나를 신기하게 보았었다.
사람의 적응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는 비행기 소음으로 가늠된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전투기가 날 때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리에도 새근새근 잠을 잘 잔다. 하지만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외지에서 방문한 사람들은 거의 경기할 수준이었다. 그 소리가 무서워 방문뿐만 아니라 이사도 잘 오지 않고, 지금까지 그 일대 집 값이 가장 낮은 가격을 형성하고 있다.
공항과 공군부대의 유동인구가 많아 우리 동네의 경제활성에 도움을 주는 것 또한 사실이다. 많은 병사들, 여행객들의 식사, 주차, 유흥 등에 의한 지역 상권이 유지되고 지역 주민의 주 소득이 되기도 한다. 나의 어릴적보다 소음 피해는 월등히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방문객들의 소스라치는 표정은 그대로이다. 최근 군위군, 의성군 등으로 공항이 부대와 함께 이동하는 것을 검토 중이지만 결코 만만한 이사 계획이 아니라고 한다. 공항 타지역 이동설에 대한 이야기는 오십년전부터 거론되었기에 아직도 이곳 사람들은 가야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 나의 청력은 고도난청이다 / 서인수
청각장애인은 청취력이 80 DB이하이면 난청인이라 큰소리로 말하면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80 DB이상이면 고도난청이라 귀머거리(먹보)로 분류해볼 수 있다. 귀머거리는 입모양을 보고 짤막한 대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대화가 자주 토막 나기 때문에 불통이라 유구무언(有口無言)으로 일관하니 항상 외로운 이방인 되고 만다. 디지털 시대를 만났으니 그동안 배우지 못해 답답하던 마음은 많이 해소되고 있다.
듣는 힘은 의학적으로 90 DB 이하면 난청인이고, 이상이면 고도난청으로 구분/ 구별되니 귀머거리를 별도로 판별해볼 수 있기 때문에 귀머거리를 고도난청으로 따로 명시해주면 청각장애인들의 애로사항을 사실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이 된다. 농아인은 선천적인 청각장애와 언어장애로 중복장애를 안고 태어나 수화를 필수로 사용하니 서로 재미있게 대화를 나누면서 행사/행동하여 힘들게 지내고 있었다.
수화는 말을 못 하는 농아(聾啞)인에게는 꼭 필요한 수단이지만 고도난청은 말을 해도 듣는 힘이 어두워서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니 수화를 배워볼 필요성이 있다. 고도난청은 후천적인 청각장애라 언어장애는 없어도 청력이 미약하니 구화(口話)로 한두 토막을 알아보기 때문에 재미있게 대화를 나눌 수가 없다. 그래서 인터넷 사이트에 좋아하는 취미 방이나 사랑방에 자주 들르며 문자로 대화를 하는 것이다.
고도난청은 일반인{정청(靜聽)인}과 함께 친선모임이나 세미나를 하면서 대화를 나누어도 입모양(口話) 보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입술 움직임 뚫어지게 바라본다. 알아듣는 경우는 겨우 1%도 안 된다. 필기나 글상자에 자막을 써줘야 주제에 대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어 함께 웃고 유쾌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을 갖게 된다. 보청기 사용하면 소리를 증폭시켜주어 도움이 되지만 말소리가 왕왕거리고 있다.
고도난청은 필기나 타이핑 위주로 대화를 하기 때문에 소통이 힘들어지는 것이다. 농아인은 사실상 언어장애인이라 말소리를 잘못하고 수화로 의사소통하는 것이다. 농아인 사회로 진출하려면 수화를 필수로 배워서 구화를 병용하면 대화가 가능한 것이다. 일반인 사회로 진출하려면 스마트 폰반드시 갖고 다녀야 소통하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대화를 나누는 기회가 별로 없으니 평생 외롭게 지낼 수밖에 없다.
고도난청은 농아인과 일반인의 중간지대에 있어 농아인사회와 일반인 사회생활 모습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살펴보고 있다. 일반인들이 사업이 번창해 잘살면 사회봉사를 많이 한다. 청각장애인에게 도움이 되어주고 싶다면 이 사정을 확실히 구분/구별해서 사랑을 해야 한다. 정부는 농아인협회를 언어장애인청각장애인으로 분리해서 복지를 추진한다면 청각장애인에게도 분명히 골고루 혜택을 줄 수 있다.
▪ 생애 첫 억울한 사건 /오수미
나의 (생애 첫 억울했던 사건)은 (초등학교 1학년 때) 이다.
쉬는 시간에 화장실에 다녀오니 책상위에 자랑스레 펼쳐 놓았던 나의 100점짜리 시험지가 사라졌다. 교실의 아이들은 왁자지껄 소란스러웠고 뿌연 먼지 속에서 그저 놀고 있었다.
책상 아래에 떨어졌는지 살펴보니 뒤집어진 시험지가 보였다. 주워보니 내 것이 아니었다. 이름이 분명 쓰여 있다가 지워진 60점짜리 시험지였다. 옆 짝지에게 물으니 모른다했고 뒤 아이에게 물어도 모른다했다.
한참을 고개를 처박고 책상아래를 뒤지다 고개를 드는 순간 발견한 것은, 뒤에 아이가 갑자기 100점이 되어있었다. 100점을 받은 아이는 분명 나를 포함한 다른 분단에 있었다. 그녀석의 시험지를 보니 이름 쓰는 칸이 수상했다. 내 이름이 쓰여 있던 것을 지워 자기이름을 쓴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내 시험지라 하니 코흘리개 새까만 그 녀석이 자기 것이라고 잡아떼었다. 100점이라 쓰인, 옆에 분명 내 이름이 쓰여 있던 것을 그 녀석이 내 이름을 지우고 자기이름을 쓴 것이었다.
실랑이를 하다 선생님한테 말했다. 선생님은 60점짜리 시험지를 대충 보더니 나에게 “너는 이름 안 썼네!” 했다. 그리고는 바쁘게, 대수롭지 않게 가버리셨다.
나는 이튿날 학교에 가지 않았다. 그 다음날도 가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전학을 했다.
전학 온 학교에서 받아쓰기를 했다. 20점을 받았다.
나는 이미 5살 때 한글을 다 읽을 수 있었고 만화책까지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건 이후로 한동안 한글을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한글읽기와 쓰기에 흥미를 잃었다. 생애 첫 억울한 그 때의 사건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 녀석, 내 점수 훔쳐 먹고 잘 자랐을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까? 바늘도둑이 소도둑이라면 점수 도둑은 무엇이 되었을까? 괘씸하지만 겨우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우리의 슬픈 교육 현실에 마음이 언짢다. 우리 아이들은 점수보다는 인성을, 꿈을 중요시하는 환경에서 자유로이 살았으면 좋겠다.
▪ 나의 고향은 상주입니다 /이귀호
나의 고향은 상주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숙연해지는군요.
고향은 자부심입니다. 영남의 큰집이라는 자부심? 왜 경상도라고 했겠어요?
경주와 상주가 큰 집이기 때무입니다. 낙동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낙동강이라고 이름 붙였겠어요? 상주의 동쪽에서 물이 떨어진다 하여 낙동강이라는 말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은 초라해지고 있긴 하지요. 한 때 26만5천명이나 되는 인구가 최근 10만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얼마나 충격이었던지 그 날 상주시 공무원들은 상복을 입고 근무하였다고 하지요. 하여튼 상주는 내 삶의 출발지이지 내 삶의 원형질 입니다.
서울을 오갈 땐 내 고향을 지나지요. 내 고향이 가까워지면 똥 마려운 강아지가 되지요. 차창으로 고개를 쭉 빼고 저 멀리로 고향마을을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고향 상주가 다시 깨어나고 있습니다. 기존 중부내륙고속도로에 청원 영덕간 고속도로와 상주 영천간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통팔달 도시가 되었어요. 그래서 새로운 귀농지로 각광받고 있다고 합니다.
운이 좋게도 나는 고향을 지키는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보기 좋게도 봄 가을로 명승지로 여행도 자주 다니더라고요. 그곳엔 공직생활을 하면서 친구들의 연락 저수지 역할을 하는 친구가 있어요. "퇴직하면 내려와라, 함께 살자" 고 만날 때 마다 독려를 하지요. 그러면 '뭔 영화를 보려고 객지에서 산다는 말인가? 하는 감상에 젖곤 하지요. 그리곤 내 고향으로 돌아가리라!'고 귀거래사를 부르지요.
그 돌아갈 고향이 있어 난 행복한 사람입니다. 근대화의 물결을 타지 못해 발전에서는 다소 뒤졌지만, 그래도 내 어릴 때 뛰놀던 산천이 그대로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내 언젠가 돌아가리라. 그리하여 '살으리 살으리랐다. 청산에 살으리랐다' 노래하면서 고향을 노래하리라!!!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김영희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동요 속에서처럼 복숭아 꽃, 살구 꽃, 아기 진달래가 온 산천을 덮고 있던 곳 청도 매전면 송원동이다.
송원동에는 알마 (아랫마을)와 잰마(제일 위에 마을)가 있었는데 잰마가 내 고향이다. 알마에서 잰마까지 가려면 굽이굽이 산길로 30분정도를 더 올라가야 나오는 그야말로 하늘아래 첫 동네다. 지금은 한 가구만 살고 있지만 1980년대 초 떠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6가구가 살았다. 나랑 또래인 우물가 아래 살던 얼굴이 까맣다고 까미라 부르던 친구와 우리오빠 네명과 온 산천을 헤집으며 사계절을 누렸다.
봄이면 산소에 뽀죡히 올라온 삐삐를 뽑아먹고 초록 연가지 찔레를 꺽어 줄기의 껍질을 살살 벗겨 먹으면 연한 물기가 촉촉이 나와 아그작아그작 씹히는 그 재미로 먹었는지 진짜 배가 고파 먹었는지 그 기억은 없지만 봄이 되면 내 입은 바빴다. 그 즈음 내 입도 바빴지만 누에가 먹을 뽕 나뭇잎을 자루 채 따느라 내손도 바빠졌다. 차소리하나 들리지 않는 고요한 밤에 방문을 빼곰히 열어보면 누에가 그 뽕잎 갉아먹는 사그작 사그작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누에를 먹으면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에 넷째오빠가 3마리나 먹었는데 그걸 먹어서 그런가 형제들 중에 제일 똑똑하고 달리기도 잘했고 미꾸라지 잡기도 제일 잘했다. 봄이 끝나갈 무렵 벼 심기 전에 논 위 못 둑가에서 타고 내려온 미꾸라지들이 논에 엄청 많았는데 오빠들과 바가지,양동이를 들고 손으로 논을 푹푹 헤집다 보면 어느새 양동이 가득 미꾸라지들이 꿈틀거렸다. 함박웃음으로 좋아하실 엄마의 얼굴을 떠올리며 양동이 들고 경주라도 하듯 들춰안고 집으로 향해 뛰다가 산길에 퍽 쏟아 부은 날엔 미꾸라지가 이리 꿈틀 저리 꿈틀 미끌거려 잘 잡히지도 않았다. 미꾸라지 잡기는 넷째오빠가 제일 잘했고 소 풀 베어 지게에 짊어지고 오는 건 셋째오빠가 제일 잘했다. 아버지가 장날에 꼬리가 꼬부라졌다고 다른 소보다 돈을 덜 쥐어드리고 한 마리 사오셨는데 꼬리 꼬부라진 소가 먹을 풀은 항상 셋째오빠가 지게 가득 제일 많이 해 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지게가 터져나갈 정도로 무겁게 풀을 많이 해 온다고 내 키가 제일 작다며 형제들 만나면 지금도 우스갯소리로 그 추억을 들춰내곤 한다. 셋째오빠가 소밥을 제일 많이 해왔으니 꼬리 꼬부라진 소하고도 제일 친했다. 그 오빠가 소 눈처럼 둥그렇게 떠서
“송아지 낳았데이, 우리 소가 송아지 낳았데이”
하면서 마당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오고 뒤따라 아버지가 지게에 송아지를 짊어지고 천하를 다 얻으신 듯한 모습으로 들어오셨다. 송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발딱 서서 걷지만 워낙에 비탈 심한 산에서 어머 소가 일하다 낳은것이라 행여나 다칠세라 아버지 지게에 엎혀 오는 호강을 누렸다.
여름이면 별들이 우르르 우리 집을 향해 다 떨어질 것 같았고 겨울이면 눈만 오기를 기다렸다가 눈 내린 산을 헤저어 가며 산토끼 잡는다고 이리뛰고 저리 뛰어 한 마리 겨우 잡아 뒷다리 묶어 나뭇가지에 걸어 집으로 향하는 길 역시도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듯 선명하게 떠오르는데 고향 떠나 온지가 벌써 삼십 오년을 넘어가고 있다.
꽃피는 산골 그 속에서 뛰놀던 때가 언제나 그립다.
▪ 나의 고향은 한적한 시골이다 /김정래
한국수필문학관 수필아카데미 11기 8차 수강 숙제로 “나의 ( )는 ( )이다. 로 글을 쓰라는 과제를 받고 ( )안을 채울 단어를 궁리하다가 고향이 떠올랐다. 고향으로 떠 오른 그곳은 어린 시절 초등하교 4학년까지 7년을 보낸 곳이다. 그곳에서 보낸 시절이 애틋하게 첫사랑처럼 가슴깊이 자리하여 고향하면 떠오르는 곳이다.
나의 고향은 산을 뒤로하고 있는 마을로 앞으로는 들을 지나 강물이 흘러가는 한적한 시골이다. 봄이면 뒷골자기에서 내려오는 도랑에 얼음이 채 녹기도 전에 뒷산에는 참꽃이 살포시 꽃잎을 피워 봄을 알린다. 그즈음 돌담사이 매화가지는 꽃망울을 터뜨리고 마당가에 살구꽃이 다투어 촉을 튼다. 아직은 솜바지를 벗지 못한 아이들은 꽃가지 뒤에 무엇이 숨어있지나 않나 두려움에 가슴 조이면서도 참꽃가지를 꺾으러 산을 오른다.
아버지는 지게에 쟁기를 지고 소를 몰아 앞들에 논갈이를 하러 나서면 태어난지 석달(3개월)이 되지 않은 송아지는 종종 걸음으로 “엄매~, 매”하면서 보채고, 나도 아버지 뒤를 바쁘게 따른다.
여름이면 점심을 먹기가 바쁘게 동네 아이들 7~8명이 모여서 앞 냇물에 멱을 깜으로 간다. 좁은 들길을 일렬로 걸으면서 지금은 재목도 기억나지 않는 노래를 부르면서 미루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강가에 이른다. 옷을 벗기가 바쁘게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강물로 뛰어든다. 물놀이에 정신을 팔다가 보면 어느새 허기를 느낀다. 강가에 있는 밀밭에서 밀을 뽑아와 미루나무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피워 서리를 한다. 검정이 묻은 밀을 손바닥으로 부비서 먹다가 보면 제 얼굴에 묻은 검댕은 모르고 서로 상대방 코를 가리키며 낄낄거리고 웃어댄다. 밀서리, 로 배를 채우고 나서 다시 강물로 뛰어 들어간다. 긴긴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면 꾸구리, 꺽지 등 물고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버드나무 꾸러미를 들고서 의기양양하게 귀가 한다. 어머니는 물고기에 간을 맞추어 조려서 저녁상에 얹으면 가난한 밥상에 별미로 맛을 더한다. 마당에 깔아 놓은 멍석에 둘러 앉아 모깃불을 피워 놓고 늦은 저녁이 끝나면 뒷동산위로 솟아오른 둥근 달빛을 받은 초가지붕위의 박꽃이 시리도록 하얗다. 두런두런 나누는 어른들의 이야기 소리는 자장가가 되어 어느새 잠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앞들에 벼이삭이 황금빛으로 영글면 뒷산기슭 밤나무에는 밤송이가 벌어져서 알밤이 떨어진다. 밤나무 밑은 나의 활동무대가 된다. 밤은 줍는 것보다 돌팔매질을 하여 따는 것이 스릴이 있고 더 재미를 느낀다. 밤을 주머니마다 가득 채워서 이튿날 학교에 가지고 가서 친구들과 나누어 먹기도 한다.
나락 타작이 끝나고 가을걷이가 마무리되면 아버지는 몇 날을 두고 이엉을 엮어서 놉을 하여 지붕을 이으면 초가는 말끔하게 새집으로 단장된다. 한 해 일도 이제 마루가 된다.
친구 삼촌이 열아홉 살의 앞집 처녀에게 장가를 드는 날이다. 저녁에 신랑이 신부의 족두리를 벗기는 신방을 까치발을 뒷고 드려다 보려다 옆집 아주머니에게 밀려 쫓겨 나온 기억이 떠 오른다.
눈이 오는 겨울날은 참새를 잡아 구워먹는 것이 재미중의 으뜸이다. 마당에 삼태기를 막대기로 받쳐놓고 그 밑에 곡식을 깔아 놓는다. 막대기에 끈을 달아 방안까지 연결하여 문틈으로 내다보다가 참새가 날아와서 곡식을 쪼아 먹는데 정신이 팔렸을 때 끈을 잡아당기면 참새는 꼼짝없이 잡히고 만다.
온 세상이 눈으로 하얗게 덮이면 동네 청년들을 따라 뒷산에 올라 토끼몰이를 거든다. 무릎이 빠지도록 쌓인 눈 속을 뛰어다니다가 숨이 차고 제풀에 지쳐서 내려온다. 앞 냇물이 꽁꽁 얼면 사내아이들은 얼음판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찧으면서 스케이트 타는 재미에 손발이 어는 줄도 모른다.
거기에는 그렇게 한해가 평온하게 지나간다. 그곳이 바로 나의 고향이다.
▪ 내 마음의 고향 /곽해숙
2주 전에 부산을 가는 동해남부선 무궁화호 기차를 탔다. 무궁화호는 KTX처럼 고속이 아니어서 바깥 경치를 감상 할 수 있어 좋은 점도 있다.
하양, 영천, 신경주, 경주, 불국사를 지나서부터는 울주군이었다가 울산시 북구에 편입된 어린 시절 동해남부선 철로가 집 바로 앞으로 지나가는 곳의 그 집을 볼 수가 있다. 아버지 고향일 뿐이다.
나도 태어나기는 그 곳에서 태어났고, 첫돐을 지나고 어머니의 등에 업힌 채로 그곳을 떠나 부산에서 자랐다. 국민학교 고학년 때 다시 아버지 고향으로 가서 3년을 살았다. 아버지는 일제 점령기 시절에 형님 두분과 함께 일본으로 갔더라 했다.
첫째 형님은 결혼을 못했고, 둘째 형님은 일본에서 결혼을 했고, 아버지도 일본에서 결혼을 하셨다고.
어머니는 6살 어린 시절 만주에서도 살았고, 한국으로 나왔다 1년도 살지 않고, 온 식구가 일본으로 갔더라 했다. 일본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라서 결혼을 하고, 해방과 함께 한국으로 나오신 분이시다. 그러니 한국 농촌도 모르고, 일본 동경에 살았기에 일본 농촌도 모르고 당시 일본 동경은 전차가 있었다 했다.
한국으로 게다를 신고 나와 남편의 고향집으로 갔더니 시아버님께서 짚신을 새댁것이라고 아주 곱게 만들어 주셨는데도 발 뒷꿈치가 너무 아파서 접어 신었고, 다시 방에서 나올 때 보면 뒷꿈치가 바로 세워져 있고, 그렇게 세 번째는 시아버님의 불호령이 떨어지더라 했다.
아무리 뒤꿈치 살이 파여도 그렇지 시애비가 세워 준 것을 바로 접어서 신느냐?고 그렇게 시집살이는 짚신을 신는 것부터 시작 되었다 했다.
어머니는 어려서 일본으로 가셨기에 한국에 자신의 고향은 없었다. 그렇다고 어린시절을 지낸 일본 동경을 고향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냥 남편의 고향에서 3년째 되는 해에 부산으로 나와서 돌아가시기까지 부산에서 사셨어도 고향은 아닌 것이다.
국민학교 1학년 입학 전 신장염으로 1년 정도 병원 치료를 받았고, 허약체질로 잔병치레가 잦았다. 국민학교 3학년까지는 허약한 아이였다. 그 허약한 채로 국민학교 고학년 신학기 4월에 아버지 고향으로 갔다.
막내 삼촌은 10대였을 때, 큰엄마가 5일장을 갔고, 좀 게으런 사람이라 8살 어린아이 소 이까리 손에 쥐어서 동네 아이들과 산으로 가게 두었고, 그날 그만 늑대에게 물려 저 세상으로 갔던 것이다.
남편은 두 시동생이 일본에서 결혼해 한국으로 나올 때, 일본인 여자와 살고 있다 했고, 남편은 끝내 나오지 않았고, 아들 하나 있던 자식마저 8살에 늑대밥으로 가 버렸고, 가슴에 한이 뭉친채로 사시던 분이셨다. 내가 그곳으로 갔을 때, 신혼인 막내 시동생 부부와 한 집에서 살고 있어 심사는 고약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 였다.
그런 큰엄마와 한방에서 잠을 잤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들에 4월 꽃샘바람 추위 속에 쇠죽에 넣을 소풀 뜯으러 호미 들고 나서야 했고, 곱은 손으로 소 풀 캐어서 봇도랑 물에 소쿠리채로 일렁 거리고 씻어서 와야 했다.
소가 논으로 일을 하러 간 날은 5월 풀이 자랐을 때 낫으로 풀을 베러 가야 했다. 처음 두어 달 소 이까리 잡고 소 풀 뜯기러 가는데 송아지가 있었다. 콩 밭에 콩잎이 한창 자라 오를 때, 콩 밭 옆으로 지나가면 송아지가 그 녹색 물결 콩밭으로 들어가고, 송아지를 후쳐 내려 들어가면 에미소가 콩밭 입구에서 콩잎을 뜯어 먹고, 처음은 그렇게 소들이 콩잎을 뜯어 먹는것이 큰 일인줄도 모르고 저녁 때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소를 왜 밭에 들어 가게 했느냐고 된통 꾸지람을 들었다.
그러고도 몇일 있지 않아서 또 그런 일이 있고, 이번에는 더 꾸지람을 들었다. 친척들이 사는 마을이라도 콩 수확기에 콩 수확량이 걸린 것이라 또 찾아 와서 야단이 났던 모양이었다. 그 후는 송아지는 집에 두고 데리고 가지 않았지만, 소는 겁을 내는 어린계집아이를 얕잡아 보았다. 콩 밭 옅으로 지나가면 소 이까리를 잡고 늘어져도 콩밭 쪽으로 걸어 들어가고 어느날 약이 바짝 오른 나는, 아이들과 뒤쳐서서 외진 곳으로 소를 데리고 갔다. 소이까리를 바짝 잡고, 쳐진 소이까리로 소를 때리고 또 때리고 때리는 내가 지치도록 때렸다. 그 후부터 큰 소는 내가 소이까리에 잡은 손에 힘만 주어도 말을 잘 들었다. 굳이 이랴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십여 리 길 학교 오가는 길은 재잘 거리고 다녔고, 올 때는 신이 나면 철로 옆 산으로 올라가서 놀기도 했다. 지금 아이들 자라는 것과 비교하면 고생은 많이 한 것 같지만, 그 당시 여자아이들은 다 그렇게 자랐다. 그러면서 허약했던 나는 건강체가 되어 갔다.
아버지 고향에서 국민학교 고학년 3년을 지내다 울산시의 고래가 잡히는 항구 장생포가 가까운 그 당시 울산 배가 전국적으로 유명 했는데 배 과수원이 많은 외갓집 동네에서 중학생 3년을 살았다. 그 후 부산으로 나왔고, 결혼을 해서는 대구에서 40여년을 살아 왔다. 아버지 고향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고학년 3년을 살았지만 그곳은 내 고향이 아니다.
부산에서 초등 저학년 때까지 살았고, 고등학생 때부터 결혼 전까지 살았어도 그 곳도 내 고향은 아니다. 고향이란 어릴적 그곳에서 태어나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적어도 초등학생 졸업 때까지 살아야 고향이라 할 수 있지 싶다. 그러나 아버지 고향에서 살았던 그 3년이 내 맘의 정서의 기본이 되는 곳이다.
결혼을 대구로 와 살아 온 40여년의 세월의 대구살이도 내 고향은 아니다. 그러나 40여년을 살면서 친구들이 생겼다. 40여년 지기, 30여년지기, 20여년의 지기, 15여년의 지기들이 있다. 친구들도 술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라 술 먹고 횡설수설 어울린 적도 없다. 그러니 참 곧은 맘으로 오랜 세월을 마음의 밭이 비슷해서 친구가 된 사람들과의 정이 어쩌면, 내 맘의 고향이지 싶다. 그들과 몇 십 년을 정 나누고 살았다.
▪ 나의 남편은 이창수다 /임명희
그이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대학2학년 신학기 첫 날이었다. 강의실로 들어오는 그를 처음 본 순간 난 깜짝 놀랐다. 동화 속에서만 있는 줄 알았던 '말 탄 왕자님'이 실제로 내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기억한다. 검은색 상의 티셔츠에 하늘색 면바지를 입고 강의실로 들어오던 모습이 어제 일 처럼 눈에 선하다. 그 뒤로 비추던 후광까지도 '번쩍 번쩍'. 그렇게 그는 복학생으로 들어와 함께 수업을 받았고 둘 다 사귀던 사람이 따로있어 그저 좋은 감정으로만 지냈다.
그러던 중 난 사귀던 같은 과 남학생에게 이별을 통보받았고, 울고 불고 하던 나에게 남편과 예비역 형들은 화해 시켜주려 하고, 위로해 주었다. 잔디밭에서 노래도 불러주며...
"에라 못 된 남자야 너도 남자라더냐 믿었던 내가 바보다마는 너 그럴 줄 몰랐다"
아마도 군 생활을 하며 떠나버린 애인을 못 잊어하는 동료에게 불러주었던 노래였으리라.
남편 담배 심부름도 하고, 과 친구들과 대백근처 공주식당에서 막걸리도 한 잔하며 대학 시절을 보내다 졸업이 가까워진 가을에 남편의 데이트 신청을 받았고 이월에 졸업하고 시월에 결혼식을 올렸다. 난 행복한 신부였다
하지만 우리의 결혼 생활은 행복하지 못했다. 매일 다투느라 행복이 뭔지 사랑이 뭔지도 몰랐다. 사랑하며 산 날보다 미워하며 산 날이 더 많았다. 첫 눈에 반했고, 짧지않은 세월을 좋은 감정을가지고 있었고, 서로를 많이 알고 있기에 맞춰가며 행복하게 잘 살거라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지난 세월이 참 아깝고 안타깝다. 조금 더 참을 걸, 좀 더 현명하게 살 걸.. 이제 덜 싸운다. 지금이라도 서로 사랑하며 챙기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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