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음은 왜 병에 걸리는가?
진화는 정신 장애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는가?
앤더슨 톰슨 2세(J. Anderson Thompson, Jr) 의학박사는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사십 년 가까이 정신과 의원을 운영했다. 광대뼈가 나오고 턱수염이 텁수룩한 신사다.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 마찬가지로, 톰슨은 우울증이 두뇌의 신경전달물질이 불균형해서 일어나는 질환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신경전달물질의 분비를 조절하는 항우울제를 우울증 환자들에게 흔히 처방했다.
어느 날 톰슨이 치료 중인 우울증 환자가 찾아왔다. 뜻밖에도 그 여성은 항우울제를 그만 처방해달라고 요구했다. 톰슨이 물었다. “그 항우울제가 잘 듣지 않나 보죠? 다른 종류의 항우울제를 처방해 드릴까요?” 그 여성이 답했다. “아뇨. 정말 잘 들어요.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아졌어요.” 톰슨이 지금껏 결코 잊지 못하는 말이 뒤따라 이어졌다. “그렇지만, 난 아직도 그 빌어먹을 술주정뱅이 남편과 같이 살고 있다고요! 약 때문에 그 인간을 참고 사는 거죠.”
시대는 변했다. 국정원이 자신의 휴대폰을 도청한다고 믿거나, 손을 수십 번 빡빡 씻거나, 종일 침울하게 벽만 바라보는 사람들을 옛날에는 귀신에 들렸다고 설명했다. 오늘날 정신 장애는 뇌의 오작동으로 생기는 생물학적 질병이라는 인식이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몸에 병이 나면 그 원인을 알아내서 약물로 치료하듯이, 마음에 병이 나면 약물로 치료한다는 관점이다. 문제는, 왜 마음에 병이 생기는지 그 원인을 알려주는 과학 이론이 정신의학에 없다는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마음의 병도 생물학적 질병이며,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편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일까?
이제 사람들은 마음의 병도 생물학적 질병이며, 약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편적으로 인지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의 병이 생기는 원인은 무엇일까?
<출처: 셔터스톡>
아니, 뇌의 어느 부위가 잘못되었는지 콕 찍어주는 뇌과학이 정신 장애의 원인을 밝혀주지 않을까? 이전에 이야기했듯이, 뇌과학은 사람들이 “어떻게”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근접 원인을 규명한다. 이는 물론 중요하지만, 애초에 사람들이 “왜” 이상하게 행동하는지 그 진화적 원인도 함께 밝혀내야 정신 장애를 온전하게 설명할 수 있다. 정신 장애를 오롯이 설명하는 이론이 아직 없다는 사실은 정신 장애의 분류 체계로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서적 〈정신 장애 진단 및 통계편람(DSM)〉을 펼쳐보아도 알 수 있다.
1980년에 나온 DSM 3판은 이 분류 체계가 어떠한 이론에도 기대고 있지 않다고 명시하였다. 분류 체계를 조직하는 이론이 없다는 언급은 DSM 4판과 5판에서 빠졌지만, 그 기본 틀과 접근법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진화적 시각은 정신 장애를 이해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될까? 흔한 오해와 달리, 진화적 시각은 모든 정신 장애가 나름대로 이롭기 때문에 진화했다는 대책 없는 낙관론을 설파하지 않는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는 질병을 설명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복잡 정교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왜 허구한 날 수많은 질병에 시달리게끔 어설프게(?) 설계되었는지를 설명해준다.
눈, 심장, 허파처럼 고도로 복잡한 적응을 척척 만들어 낸 자연 선택이 왜 환청과 망상을 일으키는 조현병은 제거하지 않았을까? 왜 어떤 이들은 취업 면접 같은 중요한 순간에 말을 더듬고 몸을 부들부들 떨까?
그뿐만 아니라, 진화 정신의학은 심리 기제의 고장에 따른 손상과 자연 선택에 의해 설계된 적응적인 방어를 구별해야 함을 일깨워준다. 예컨대, 병원체에 감염되면 몸에 열이 나서 끙끙 앓는다. 하지만 열은 병원체의 농간이 아니다. 열은 우리 몸이 체온을 높여 병원체를 ‘태워 죽이려는’ 정상적인 방어다.
무작정 해열제부터 먹는 태도는 집에 침입한 도둑에게 곳간 자물쇠를 활짝 열어주는 격이다. 만약 우울증의 어떤 유형은 번식에 직결된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정교하게 설계된 적응이라면, 톰슨 박사처럼 우울증 환자에게 무턱대고 항우울제를 처방하는 태도는 재고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인간이 정신 장애에 시달리게끔 진화한 이유: 해로운 돌연변이, 분포의 양극단, 설계상 절충
진화가 왜 우리의 마음이 갖가지 장애에 시달리게끔 내버려 두었는가에 대해서는 여섯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 이들은 왜 진화가 우리의 몸이 질병에 잘 걸리게 방치했는가를 설명할 때도 그대로 적용된다. 먼저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가 결코 완벽하지 않고 일정한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생기는 요인 세 가지를 알아보자.
첫째, 해로운 돌연변이다. 돌연변이는 부모의 유전정보가 자녀에게 전달될 때 생기는 무작위적인 실수다. 천체망원경을 살짝 건드리면 대부분의 경우에 상이 더 흐려지듯이, 돌연변이가 개체에 끼치는 효과는 대개 해롭다. 자연 선택은 해로운 돌연변이를 줄기차게 솎아낸다. 그러나 어떤 해로운 돌연변이가 매우 드물게 일어나거나 그 피해가 미미하다면, 돌연변이가 발생하는 속도와 자연 선택이 솎아내는 속도가 평형을 이룬다. 결국 이런 돌연변이는 없어지지 않고 매우 낮은 빈도로 계속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어, 두개골이 너무 커지는 에이퍼트 증후군(Apert’s syndrome)이나 발육이 부진한 연골무형성 왜소증(Achondroplastic dwarfism)은 단일 유전자의 해로운 돌연변이로 생긴다.
둘째, 여러 유전자가 만드는 형질이 정상분포할 때의 양극단이다. 완두콩의 둥긂/주름짐이나 노랑/초록 같은 형질은 하나의 단일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반면에 키, 지능, 성격, 정서 같은 대다수 복잡한 적응은 여러 좌위에 놓이는 수많은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 이러한 다인자 형질은 평균 근처에 개체들이 가장 몰리고 양쪽으로 갈수록 드물어지는 종형 곡선 모양으로 분포한다. 즉, 평균치보다 너무 많거나 적은 형질을 지닌 개체가 드물지만 계속 존재한다. 키가 170cm인 성인 남성은 흔하다. 키가 2m가 넘거나 140cm가 안 되는 성인 남성은 드물다.
예를 들어, 두려움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임박한 위험을 모면하게 해주는 심리적 적응임이 알려져 있다. 공포증 환자들이 어둠, 높은 곳, 낯선 사람, 뱀, 거미 등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현상은 부분적으로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셋째, 설계상의 절충이다. 자연 선택이 설계하건, 인간이 설계하건 간에 모든 면에서 완벽한 제품은 만들 수 없다. 인체의 모든 형질은 타협의 산물이다. 형질의 한 부분에 투자를 많이 할수록 그 부분은 개선되지만 다른 부분이 그만큼 희생된다. 라면에 한우 꽃등심을 듬뿍 넣어 끓여보라. 맛은 당연히 좋아지겠지만, 식자재비가 너무 많이 든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과거에 자신을 배신한 사기꾼을 다음부터는 도와주지 않는 조건적인 협력자로 진화했다.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온정을 베푸는 무조건적인 협력 전략이 인간의 본성으로 진화했다면, 사기꾼을 구별하느라 신경 쓸 필요는 줄었겠지만 무조건적인 배신자에게 속수무책으로 착취당할 위험성이 급증했을 것이다.
인간이 정신 장애에 시달리게끔 진화한 이유: 불일치, 감염, 방어
우리의 마음이 정신 장애에 시달리게끔 진화한 이유 가운데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자연 선택이 수많은 세대에 걸쳐 느리게 이루어지는 점진적인 과정이기 때문에 생긴다. 여섯 번째 이유인 방어는 사실 정상적인 반응이지만, 종종 질병이 만드는 기능부전과 혼동되기에 함께 다룬다.
넷째, 진화된 설계와 새로운 환경 사이의 불일치다. 여러 번 강조했듯이, 인간의 마음은 수백만 년 전 소규모 수렵-채집 사회에 적응되어 있다. 고작 수백 년 전에 시작된 현대 산업 사회에 맞는 마음을 자연 선택이 새로 설계할 시간은 없었다. 오늘날 현대인은 매일 익명의 낯선 대중과 부대끼고, TV와 인터넷이 부추기는 전 지구적인 경쟁에 내몰리고, 두뇌의 쾌락 회로를 미친 듯이 누르게끔 생산된 기호품을 쉽게 구매할 수 있는 낯선 환경에서 산다.
예를 들어, 니코틴, 대마초, 아편, 알코올 같은 향정신성 약물은 천연 상태의 식물에서 나오므로 우리의 진화적 조상들도 가끔 운이 좋으면(?) 약물을 즐겼을 것이다. 헤로인 같은 합성 마약, 피하 주사기, 궐련 담배, 높은 도수의 증류주가 널린 현대의 환경에서 약물 남용 및 중독은 매우 심각한 문제로 주목받고 있다.
다섯째, 병원체에 의한 감염이다. 세균이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체는 한 세대가 매우 짧다. 일례로 대장균은 20분마다 두 배로 늘어난다. 이처럼 빠르게 진화하는 병원체에 맞서 우리 인간은 면역계라는 정교한 방어벽을 진화시켰다. 병원체도 이에 대응하여 더욱 정교한 공격 무기를 진화시키게 된다. 숙주와 병원체의 이러한 진화적 군비 경쟁으로 우리 숙주는 병원체에 계속 시달릴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톡소포자충(Toxoplasma gondii)은 고양이의 장내에서만 번식할 수 있는 기생충이다. 고양이의 배설물과 함께 고양이 밖으로 배출된 다음, 쥐 같은 설치류의 몸속으로 들어간다. 쥐로 들어간 톡소포자충은 쥐의 신경계를 조종해서 쥐가 고양이의 소변 냄새를 두려워하긴커녕 오히려 끌리게끔 한다. 쥐가 고양이 앞에서 무모하게 까불다가 잡아먹히게 함으로써, 톡소포자충은 다시 고양이 안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톡소포자충에 감염된 사람도 더 무모하고 충동적으로 변한다. 과속운전으로 사망할 확률도 정상인보다 3~4배 더 높다. 톡소포자충이 쥐와 사람의 신경계에 비슷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여섯째, 적응적인 방어다. 서두에 살펴보았듯이, 우리가 겪는 정신적 괴로움 가운데 일부는 질병이나 장애에 따른 기능부전이 아니라 번식에 연관된 문제를 잘 해결하게끔 설계된 유용한 방어다. 진화의학자들은 열, 기침, 통증, 급성 염증, 구토, 설사 등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여러 위협이나 재난으로부터 지켜주는 방어 반응임을 강조한다. 예컨대, 통증은 신체 조직이 손상되고 있음을 알리는 비상경보다. 구토와 설사는 해로운 물질을 외부로 배출시킨다. 마찬가지로, 진화 정신의학자들은 불안, 슬픔, 공포, 혐오, 시기, 분노 같은 부정적 정서는 우리의 영혼을 갉아먹지만, 과거의 적응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어쨌든 유용했기 때문에 선택된 방어 반응임을 역설한다.
예를 들어, 불안은 우리를 괴롭히는 불쾌한 정서지만 태풍이나 기말시험처럼 곧 닥칠 위험에 효율적으로 대비하게 해 준다. 우리의 진화적 조상 가운데 전혀 불안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은 스트레스 없이 태평하게 살았겠지만, 태풍에 휩싸여 죽거나 호랑이의 밥이 되기에 십상이었을 것이다.
우리에게 정신 장애를 불러오는 이상의 여섯 요인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 즉, 각각의 요인마다 대표적인 예를 어쩔 수 없이 들기는 했지만, 상당수의―아마도 대부분의―정신 장애들은 여러 요인이 함께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이 점을 유념하면서 몇몇 정신 장애에 대한 진화적 설명들을 들여다보자.
우울증의 수수께끼: 왜 그토록 무서운 병이 그토록 흔한가?
우울증은 현대의 역병이라고 불린다. 옛날 맹위를 떨쳤던 흑사병, 결핵, 천연두 같은 전염병 못지않게 전 세계적으로 아주 심각하면서도 흔한 질환이란 뜻이다. 슬프고 가라앉는 기분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경험하지만, 그 강도가 심하고 오래 지속하면 ‘주요 우울장애(major depressive disorder)’라는 정신 장애로 분류된다. 통상적으로 우울증이라 불리는 질환이다. 종일 슬프고 공허하고, 식욕이 갑자기 늘거나 줄고, 잠이 갑자기 늘거나 줄고, 일, 친구, 성관계 등 거의 모든 활동에 흥미를 잃고, 어떤 생각을 곱씹어 반복하는 등의 행동이 2주 이상 이어진다.
당연히 우울증은 생활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 직장을 잃거나 이혼할 가능성을 높인다. 평생 낳는 자식 수도 감소시킨다. 유명 연예인이 우울증을 겪다 자살한 사건이 종종 보도되듯이, 치사율도 매우 높다. 세계보건기구(WHO)는 2030년이 되면 인류에게 부담을 주는 질환 가운데 우울증이 2위를 차지하리라 예측했다.
이처럼 엄청난 손해를 끼치면서도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는 점에서 우울증은 커다란 수수께끼다. 대다수 정신 장애와 달리, 병적인 우울증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미국인이 평생 주요 우울 장애에 적어도 한 번은 걸릴 가능성은 23%나 된다. 반면에 조현병에 적어도 한 번 걸릴 가능성은 0.7%에 불과하다. WHO에 따르면 2015년 기준으로 전 세계 인구 가운데 약 4%에 달하는 3억 2,200만 명이 우울증을 앓고 있다.
조절 실패 가설: 우울증은 슬픔이라는 적응이 잘 조절되지 않아 생기는 병리 상태다
평화로운 삶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심지어 목숨까지 앗아가는 우울증을 진화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화의학을 창시한 랜돌프 네스(Randolph Nesse)는 1990년대 초창기에 내놓은 가설에서 일시적으로 슬프고 가라앉는 기분과 병적인 우울증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슬픔 혹은 ‘처진 기분(low mood)’은 너무 무리한 목표를 좇느라 헛수고를 하지 않게 해주는 적응이다. 필자가 국민적 아이돌로 거듭나고자 <프로듀스 101> 남자편에 지원했다가 곧바로 탈락했다고 가정해 보자. 슬프고 축 처지는 기분이 들어 며칠 동안 괴롭겠지만, 더욱 현실적인 목표를 세우고 더 큰 망신을 당하지 않게끔 도와준다.
반면에 우울증은 슬픈 정서가 제대로 조절되지 않아서 생기는 비정상적인 병리 상태라고 네스는 제안했다. 슬픔을 느끼는 역치의 정상분포 양극단에서, 어떤 사람들은 역치가 비정상적으로 낮게 설정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혼하거나 실직했을 때뿐만 아니라 모기에 살짝 물려도 땅이 꺼져라 절망한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높아서 대학 입시에 십 년 연속 실패해도 마냥 느긋해 할 것이다. 전자가 바로 병적 우울증에 해당한다. 요컨대, 이 가설은 슬픔은 정상적인 적응이지만 우울증은 슬픔 기능이 잘 조절되지 못해서 생기는 병리적 증상이라고 주장한다.
아마 눈치채셨겠지만, 조절 실패 가설은 문제점이 있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슬픔을 느끼는 역치가 너무 높아서 만사 천하태평인 사람들도 우울증 환자들만큼 우리 주변에 많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부류의 정신 장애는 거의 보고된 바 없다.
분석-반추 가설: 우울증은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되새김질하여 분석하기 위한 적응이다
대안 가설로서, 우울증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과거의 적응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유용했기 때문에 자연 선택된 심리적 적응이라는 가설들이 제시되었다. 마치 열이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체온을 높여 병원체를 ‘태워 죽이기’ 위한 방어이듯이 말이다.
“패배의 신호” 가설은 집단 내에 우열 순위가 확립되어 을이 갑에게 공연히 대들어봤자 더 얻어맞기만 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는 을이 차라리 보란 듯이 고개를 떨구고 갑에게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는 편이 번식에 더 유리했다고 설명한다. 즉 우울증은 “제가 졌습니다. 앞으론 대들지 않을게요.”라는 신호이다. 격투기 경기의 승패가 갈린 후에 패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움 요청” 가설은 우울증이 가족이나 친구로부터 자원을 더 받아내기 위한 전략이라고 설명한다. 선천적 장애를 지닌 아기를 낳았거나, 남편 없이 혼자서 아기를 키워야 하는 엄마들이 산후 우울증에 더 잘 걸린다는 사실은 이 가설을 뒷받침한다.
서두에서 만난 정신과 개업의 톰슨 박사를 다시 소환하자. 톰슨은 90년대 후반부터 진화심리학에 빠져들었다. 2004년에 진화심리학자 폴 앤드루스(Paul Andrews)를 만난 그는 의기투합하여 우울증에 대한 공동연구를 시작했다. 이들은 우울증 환자들이 종종 자신에게 주어진 복잡한 사회적 문제―실직, 따돌림, 이혼, 사별, 배신 등등―를 골똘히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소나 양이 한번 삼킨 먹이를 다시 게워 내어 씹듯이, 한 문제를 계속 되새김질하는 이런 과정을 반추(反芻, rumination)라고 부른다. 한 문제만 워낙 강박적으로 생각하는 터라, 우울증 환자들은 다른 것을 생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이들은 한 문제를 여러 구성요소로 잘게 나눈 다음에, 하나씩 각개격파하며 해결책에 다다른다.
이를테면, 이혼으로 촉발된 우울증을 상상해보자. 우울증 환자는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후회하고 (“내가 더 좋은 남편이어야 했는데.”), 일어나지 않은 일을 상상하고 (“내가 불륜을 안 저질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앞날을 걱정하기도 한다 (“아이들은 잘 자랄까?”). 이러한 되새김질은 물론 고통스럽지만, 몇 주나 몇 달 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딜레마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을 마침내 얻게 된다면 번식의 측면에서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었을 것이다.
즉, 앤드루스와 톰슨은 우울증이 복잡한 문제를 꼼꼼히 분석하기 위한 심리적 적응이라고 제안했다. 이 가설로부터 우울증의 여러 특성은 그냥 아무렇게나 유발된 기능부전이 아니라, 우울증을 촉발한 복잡한 문제에만 온통 관심을 기울이고, 정신을 어지럽히는 다른 문제들에는 일체 신경을 끄게끔 정교하게 다듬어진 설계상의 특질을 보여주리라 예측할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사람들과 만남을 스스로 끊고서 방 안에 틀어박히거나, 성관계나 음식으로부터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되는 변화는 인지적 자원을 오직 한 문제에만 집중적으로 투자하기 위한 노력으로 해석된다.
우울증 환자들은 특정한 문제에만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뇌의 부위인 복외측 전전두엽 피질(ventrolateral prefrontal cortex)이 정상인들보다 더 활성화되어 있다는 연구도 가설이 내놓는 예측과 부합한다. 다음 회에는 우울증에 대해 못다 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조현병, 자폐증 같은 다른 정신 장애를 살펴보고자 한다.
왜 심각한 전염병이나 자가면역질환에 걸리면 종종 우울증이 생기는가?
전 세계에서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가장 많은 유명인은 가수 셀레나 고메즈다. 팔로워가 1억 4천만 명을 넘는다. 부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고메즈는 안타깝게도 면역세포가 자기 몸을 공격하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인 루푸스(lupus)를 앓고 있다. 그 때문에 친구의 신장을 이식 받기도 했다.
고메즈는 루푸스로 투병하면서 우울증에 걸렸다. 세계 순회공연 일정을 모두 취소하고 석 달간 우울증 집중 치료를 받기도 했다. 최근 그녀는 이렇게 인터뷰했다. “루푸스는 나에게 참을 수 없는 우울증을 줬어요. 제가 우울증을 완전히 극복하는 날은 오지 않을 거예요. 평생 우울증과 부딪혀 싸워야겠죠.”
간염 바이러스 감염, 호흡기 감염 같은 심각한 전염병이나 류머티즘성 관절염, 루푸스, 건선 같은 자가 면역 질환을 앓는 환자들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향이 있다. 한 연구에서는 1945년에서 1995년 사이에 태어난 덴마크인을 전수조사했다. 심한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우울증, 공황 장애 같은 기분 장애를 앓을 확률이 62% 더 높았다.
“뭐, 그거야 당연하잖아?”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중한 병에 걸리면 장기간 입원해야 한다. 식사나 목욕을 할 때 제 한 몸 가누기도 불편하다. 들어올 돈은 없고 나갈 돈은 많다.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이러니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며 우울증에 빠질 확률이 높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다른 설명도 가능하다. 우울증은 병원체가 우리 마음 깊숙이 낸 생채기가 아니라, 병원체에 맞서 우리 몸이 면역 반응을 강화하는 방어 기제의 일부일지 모른다. 즉 우울증은 감염에 따른 기능 고장이라기보다는 병원체를 박멸하려는 적응적인 행동의 하나일 수 있다. 이 가설이 맞는다면, 우울증이 평생의 적이라는 고메즈의 발언은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지난 회에 이어서 우울증을 진화적으로 설명하는 가설인 “숙주의 방어” 가설을 아래에서 살펴본 뒤 조현병에 대한 진화적 가설을 만나보자.
숙주의 방어 가설 : 우울증은 감염 시 에너지를 아끼고 비축하여 면역 능력을 높이려는 적응이다
병원체에 감염되거나 피부에 상처가 나면 우리 몸은 어떻게 대응할까? 면역계는 우선 세포 간의 의사소통을 담당하는 단백질들의 총칭인 사이토킨(cytokine)을 분비한다. 사이토킨 연락병은 적이 침입한 장소에 백혈구 군대를 호출하여 전투를 개시한다. 피를 콸콸 투입하려니 혈관이 팽창한다. 베이거나 긁힌 상처 부위가 조금만 지나면 붉게 부풀어 오르고 열이 나는 현상, 즉 염증은 면역계에 의한 방어의 일환이다.
어떤 연락병은 두뇌로 몰려가서 ‘앓기 행동(sickness behavior)’을 일으킨다.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존다.”는 표현이 있듯이, 인간을 포함한 여러 동물은 전염병에 걸리면 에너지를 되도록 아껴서 면역 반응에 에너지를 집중 투자하는 한편, 외부 스트레스에 더는 노출되지 않으려는 일련의 행동을 한다. 피곤해서 만사가 귀찮아진다. 열이 난다. 온몸이 쑤신다. 아픔을 더 예민하게 느낀다. 집중력이 떨어진다. 입맛이 없어진다. 잠이 많아진다. 이러한 ‘앓기 행동’은, 우리를 몹시 괴롭히지만, 쓸모 있는 적응적 방어로 진화했다.
임상심리학자 셰리 앤더스(Sherry Anders)와 동료들은 우울증이 앓기 행동의 일부라고 제안했다. 병원체에 더 취약한 어떤 사람들은 통상적인 앓기 행동뿐만 아니라 우울증까지 발병한다. 그리고 이때 생기는 우울증은 통상적인 앓기 행동과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아끼고 재분배하여 면역 반응을 강화하게끔 자연선택에 의해 설계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우울증과 앓기 행동은 신기할 정도로 많은 부분이 겹쳐진다. 피로하고, 식욕이나 성욕이 떨어지고, 매사가 귀찮고, 사고력이나 운동신경이 감퇴하고, 잠이 많아지는 현상이 공통으로 일어난다. 일례로 우울증을 겪은 동화작가 조제 씨(가명)는 지독한 무기력 때문에 석 달 가까이 침대에서 거의 일어나지도 못했다고 고백했다. 밥을 먹기는커녕 세수하는 일조차 너무나 어려웠다고 한다. 조금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러한 행동 변화는 에너지를 아끼고 비축하게 만든다. 물론 우울증이 통상적인 앓기 행동과 다른 점도 있다. 우울증은 남들과 어울리는 행동을 일부러 피하고 방 안에 틀어박히게 만든다. 이는 자신의 몸 안에 들어온 병원체를 가족이나 동료에게 옮기지 않기 위해서라고 연구자들은 추측한다.
우울증이 전염병에 맞서 에너지를 아끼고 비축하여 신체의 면역 반응을 촉진하기 위한 방어라는 “숙주의 방어” 가설이 황당하게 들리는가? 솔직히 필자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이 가설이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할 만하다. 우울증이 주로 사회적 상호작용에 도움을 준다고 보는 다른 가설들과 달리, 숙주의 방어 가설은 유독 우울증과 면역 반응 사이의 연관 관계에 대해 뚜렷한 예측을 제공하므로 그 타당성을 쉽게 검증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숙주의 방어 가설은 우울증을 겪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심한 면역 반응을 일으키리라 예측한다. 이 예측과 부합하게, 우울증 환자는 종양괴사인자(TNF)-α, 인터루킨(interleukin)-6 같은 사이토킨이 체내에 더 많이 분비되며 만성 염증에 더 시달린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울증 환자의 면역계가 병원체와 더 치열하게 싸우고 있음은 현대인뿐만 아니라 볼리비아의 치마네(Tsimane)족 원주민에게서도 확인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가설은 병원체에 대한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외부 요인이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도 높이리라고 예측한다. 면역력을 감소시키는 대표적인 위험 요인으로 스트레스와 만성적인 불면증이 있다. 흥미롭게도, 이 두 요인은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도 높인다. 가족과 사별하거나, 연인과 이별하거나, 친구로부터 따돌림 당하는 등 복잡한 사회적 문제에 봉착하면 흔히 우울 증상이 찾아오는 까닭은 이러한 사회적 문제가 엄청난 스트레스를 부과하여 면역력을 떨어뜨리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지금껏 살펴본 우울증에 대한 진화적 가설들이 반드시 서로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우울증의 어떤 유형은 승자에게 보내는 패배의 신호일 수 있다. 어떤 유형은 가족이나 친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신호일 수 있다. 어떤 유형은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꼼꼼히 분석하기 위한 방편일 수 있다. 어떤 유형은 병원체에 맞서서 에너지를 축적해 면역 반응을 강화하기 위한 방어일 수 있다. 우울증의 복잡다단한 특성을 포괄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도 최근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왜 대단히 해롭고 자식에게 유전되는 조현병이 상대적으로 흔하게 존재하는가?
조현병은 숱한 정신 장애 중에서도 심신에 가장 궤멸적인 타격을 주는 병이다. 헛소리가 들리거나 헛것이 보인다. 남들이 자신을 해치려 한다고 믿는다. 말이 어눌하고 엉켜서 알아듣기 힘들다. 갑자기 소리를 지르는 등 기괴하게 행동한다. 정서적으로 둔감해진다. 의욕이 없어진다. 사회적으로 고립된다.
예컨대 잘 알려진 조현병 환자로는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주인공인 수학자이자 노벨상 수상자 존 내쉬(John Nash)가 있다. 내쉬는 자신이 남극의 황제가 되리라고 믿었다. 교황, FBI, 미국대사관에 편지를 보내 자신이 국제 정부를 세우고 있다고 했다. 외계인이 〈뉴욕 타임스〉를 통해 자신에게 암호로 된 메시지를 보낸다고 확신했다. 조현병은 이처럼 지각, 인지, 정서, 동기 체계를 한꺼번에 무너뜨려 막대한 번식 상의 손실을 입힌다. 실제로 조현병 환자들이 평생 낳는 자식 수는 일반인들이 얻는 자식 수의 채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왜 누구는 조현병에 걸려 괴로워하고 누구는 조현병과 철저히 무관한 삶을 살까? 조현병에 걸리는 경향의 개인차는 환경적 요인보다 유전적 요인에서 상당 부분이 유래한다. 만약 일란성 쌍둥이 중 한 명이 조현병을 앓는다면, 다른 한 명도 조현병에 걸릴 확률이 약 48%다. 이란성 쌍둥이의 경우, 그 확률은 약 17%다. 조현병 환자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아기가 조현병 환자가 없는 가정으로 바로 입양되었을 경우, 이 아기가 자라면서 조현병에 걸릴 가능성은 다른 아기들보다 몇 배나 더 높다. 요컨대, 내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가보다 내가 부모로부터 어떤 유전자를 물려받았는가가 조현병에 걸릴 가능성에 훨씬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달리 말하면, 조현병은 약물 중독처럼 현대의 문명이 새로이 만들어낸 골칫거리가 아니라는 뜻이다.
유전될 가능성이 높고 대단히 해로운 몇몇 장애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이미 만났다. 에이퍼트 증후군이나 연골무형성 왜소증 등은 단일 유전자의 해로운 돌연변이와 이를 솎아내는 자연 선택 사이의 평형으로 인해 개체군 내에서 매우 낮은 빈도로 계속 존재한다고 했다(어찌나 그 빈도가 낮은지 필자는 이런 장애를 생전 처음 들어보았다).
문제는, 조현병의 경우 앞서 말한 매우 드문 장애들보다 훨씬 더 흔하다는 점이다. 전 세계 어느 사회에서나 인구의 약 1%의 사람들은 일생에 적어도 한 번은 조현병에 걸린다. 이 1%라는 수치는 연골무형성 왜소증처럼 단일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생기는 드문 장애들과 비교하면 무려 1,000배나 더 높다! 조현병은 인생에서 번식 가치가 가장 높은 시기인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사이에 주로 발병한다. 그 피해는 대개 죽을 때까지 이어진다. 여자들보다 남자들에게서 조금 더 많이 발병한다.
조현병을 일으키는 유전적 토대가 과거의 수렵-채집 환경에서도 우리 조상들의 번식 성공도를 크게 떨어뜨렸다면, 자연 선택이 그처럼 해로운 유전자들을 싹 제거하거나 극히 낮은 빈도로 유지했어야 한다. 왜 매우 해롭고, 유전될 가능성이 높은 조현병이 다른 드문 정신 장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주 흔할까? 진화 정신의학자인 매튜 켈러(Matthew Keller)는 이를 “흔하고, 해롭고, 유전되는 정신 장애의 역설”이라고 불렀다.
지난 시간에 말했듯이, 일생에 한 번 이상 걸릴 확률이 23%인 우울증은 아마도 모든 사람이 특정한 상황에서는 우울 증상을 보이는 심리적 적응을 보편적으로 지녔기 때문이라고 추측된다(물론 모든 우울증의 사례가 적응이라는 뜻은 아니다). 평생 유병률이 1%인 조현병은 절대적인 의미에서는 드물다. 하지만 자식에게 유전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병치고는 상대적인 의미에서 너무 흔하다. 왜 그럴까?
조현병에 걸리게 하는 유전자는 숨겨진 이득을 주기 때문에 선택되었는가?
대단히 해롭고 잘 유전되는 조현병이 왜 그토록 흔하냐는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많은 가설이 제안되었다. 크게 ‘균형 선택(balancing selection)’과 ‘다유전자 돌연변이-선택 균형(polygenic mutation-selection balance)’이라는 두 범주로 나눌 수 있다. 균형 선택에 속하는 가설부터 살펴보자.
균형 선택은 두 대립유전자가 함께 공존하도록 선택이 작동하는 경우다. 조현병에 잘 걸리게 하는 유전자가 인류의 진화사를 통해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는 오히려 번식 상의 이득을 제공했다면 기존 유전자와 함께 선택되었으리라는 것이다. 괴이하고 섬뜩한 조현병에 알고 보니 숨겨진 이득이 있었다고? 조현병 환자를 ‘미친 사람’이라며 함부로 업신여기면 안 된다는 교훈까지 덤으로 안겨주는(?) 이러한 적응적 가설들은 진화 정신의학 초창기에 큰 인기를 끌었다. 조현병은 집단이 새로 갈라져 나올 때 신이 약속한 낙원으로 백성들을 이끌겠다는 사명감을 지도자에게 심어 준다는 가설(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려 보라), 조현병 환자의 가족은 암에 걸릴 확률이 낮아진다는 가설, 조현병 환자의 가족은 뛰어난 언어 능력을 지닌다는 가설 등이 제안되었다.
그러나, 균형 선택으로 조현병을 설명하는 가설 대부분은 치명적인 문제가 있다. 균형 선택은 어떤 조건에는 매우 해로운 대립유전자가 다른 조건에는 조금이라도 이롭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한 유전자 좌위를 두고 경쟁하는 대립유전자가 두 개 있다고 하자. 각각의 대립유전자가 서로 다른 조건 A와 조건 B에서 내는 적합도 효과의 평균값이 정확히 같아야 한다.
균형 선택의 예를 성격상의 유전적 변이를 논하면서 이미 살펴본 바 있다. 알록달록한 열대어 구피를 기억하는가? 포식자가 없는 상류에는 대담한 구피들이 많다. 포식자가 있는 하류에는 소심한 구피들이 많다. 시간과 장소에 따라 최적의 형질값이 다르면, 각기 다른 형질값을 만드는 대립유전자들이 함께 공존할 수 있다. 이처럼 균형 선택이 작동하려면 언뜻 보면 해로울 듯한 유전자가 특정한 환경 조건에는 그를 상쇄할 만큼 큰 이점을 반드시 제공해야 한다.
내향적인 성격이 전염병에 걸릴 가능성을 낮추듯이, 성격 특성을 만드는 유전적 변이들은 그들이 번식 상의 이점을 줄 상황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직장을 잃고, 친구들과 멀어지고, 배우자와 이혼해 결국 자살까지 시도하게 만드는 조현병이 어떠한 번식 상의 이점을 주는가? 그런 이점이 존재한다면 진작 우리 눈에 띄어야 했지 않을까?
조현병에 걸리게 하는 유전자가 숨겨진 이득을 남몰래 주리라는 제안을 반박하는 실제 증거들이 많다. 예를 들어, 한 연구에서는 11,000명의 핀란드인 조현병 환자들이 둔 친동기 24,000명을 모두 조사했다. 조현병 환자의 친동기가 번식 상의 이득을 누릴 것이라는 예측과 달리, 친동기들이 낳은 자식 수는 전체 개체군의 평균 자식 수와 전혀 차이가 없었다. 한편, 조현병, 주요 우울증, 자폐증, 양극성 장애(조울증), 정신 지체 등 여러 정신 장애들이 한 환자에게 동시에 찾아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균형 선택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조현병이 숨겨진 이득을 주는 덕택에 선택되었다면, 굳이 주요 우울증과 함께 발병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수천 개의 유전자 좌위에서 일어날 수 있는 해로운 돌연변이들 때문에 조현병이 생긴다
다유전자 돌연변이-선택 균형 모델은 조현병에 취약하게 만드는 유전자가 위치하는 좌위는 고작 하나 혹은 몇 개가 아니라 무려 수천 개가 넘는다고 제안한다. 해로운 대립유전자들이 개별적으로 끼치는 손실은 미미하며, 자연 선택이 이들을 꾸준히 솎아낸다. 그러나 돌연변이가 생길 수 있는 곳이 워낙 많기 때문에 1%라는 상대적으로 흔한 빈도로 조현병 환자들이 꾸준히 유지된다는 설명이다.
예를 들어, 거실에 형광등이 켜지지 않는다고 가정해 보자. 왜 안 켜질까? 램프가 고장일까? 안정기가 고장일까? 스위치가 고장일까? 퓨즈가 나갔을까? 아니면 정전일까? 잘못될 수 있는 곳은 많다. 이 중 어느 하나만 잘못되어도 형광등이 안 켜지는 증상을 초래한다. 마찬가지로, 수천 개의 유전자가 촘촘한 그물망을 이루어 적응적 행동을 만드는 경로에서 어느 한 유전자만 잘못되어도 조현병 증상이 생길 수 있다.
다유전자 돌연변이-선택 균형을 뒷받침해주는 실증적 증거는 상당히 많다. 첫째, 여러 정신 장애가 한 환자에게 동시에 발병하는 경향은 균형 선택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돌연변이-선택 균형으로는 잘 설명된다. 정신 장애가 수많은 유전자 좌위에서 생길 수 있는 해로운 돌연변이에서 기인한다면, 각각의 정신 장애를 만드는 유전자들의 집합이 서로 전혀 겹치지 않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울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부모의 나이와 자식이 조현병에 걸릴 가능성 사이의 상관관계도 돌연변이-선택 균형 모델을 뒷받침한다. 여성은 23회의 세포분열을 거쳐 난자를 만들며, 이러한 복제 횟수는 평생 일정하다. 반면에 남성은 일평생 새로운 정자를 만든다. 15세 남성의 정자는 35회, 50세 남성의 정자는 840회, 75세 남성은 1,500회의 세포분열을 거친다. 이에 따라 남성은 나이가 들수록 유전자 복제 상의 오류, 곧 돌연변이 유전자를 더 많이 지닌 정자를 만들게 된다. 돌연변이-선택 균형 모델이 예측하는 대로, 나이든 아버지를 둔 자식일수록 조현병에 걸릴 가능성이 더 높았다. 대조적으로, 어머니의 나이는 자식이 조현병에 걸릴 가능성과 무관했다.
다유전자 돌연변이-선택 균형 모델이 조현병에 대한 설명으로 유력하긴 하지만, 이 가설이 다른 대안과 양립이 불가능하지는 않다. 한 흥미로운 가설은 어떤 유전자들은 한편으로는 조현병에 걸릴 위험을 높여서 적합도를 낮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창조성이나 남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을 증대시켜 적합도를 높이는 두 가지 효과를 냈으리라고 제안한다. 두 효과가 상쇄되어 이러한 유전자들은 결국 적합도에 거의 중립적인 효과를 내어 비교적 흔한 빈도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창의성 가설이 주는 예측과 부합하게, 조현병의 증상이 심하지 않게 지속적으로 나타나는 조현형 성격 장애(schizotypal personality disorder)를 겪는 사람들은 예술적 창조성이 높으며 남성의 경우 성관계 상대의 수도 많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8만 6천여 명의 아이슬란드인을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조현병 발병을 높이는 유전자를 많이 지닌 사람일수록 음악, 영화, 무용, 연극, 미술, 저술 등의 창조적인 직업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았다. 농업, 어업, 회사원, 육체 노동 등의 직업에 종사할 가능성과는 상관이 없었다. 존 내쉬 역시 22세에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27쪽짜리 학위 논문을 가지고 박사학위를 받을 정도로 천재였다. 나중에 한 페이지도 안 되는 논문으로 학술지에 발표된 이 연구는 그에게 노벨상을 가져다주었다.
마무리하자. 지난 회에 이어서 진화적 시각이 어떻게 정신 장애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지 살펴보았다. 진화적 시각은 모든 정신 장애가 나름대로 유익하기 때문에 존재했다고 억지 부리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진화적 시각은 왜 극도로 복잡한 적응을 척척 만들어 내는 자연 선택이 우리가 갖가지 정신 장애에 시달리게끔 잠자코 내버려 두었는지 설명해 준다. 다른 의학 분야와 달리, 왜 정신 장애가 생기는가에 대한 통합적인 이론 틀이 없는 정신의학 분야는 어찌 보면 진화적 시각이 가장 큰 혁신을 가져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