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고 아름다운 밥벌이의 경제학
류동민 지음, 빚은책들 2022.
진짜 노동자의 현실은 어디에 있을까
한때 고용노동부(이 명칭의 문제점은 잠시 뒤에 생각해보자)가 중학교 사회 교과서 내용을 문제 삼은 적이 있다. 문제의 교과서에는 공장 노동자가 그려져 있고 “한 달 급여가 최저생계비라니, 역시 난 너무 가난해”라는 말풍선이 달려 있었다. 이 부분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비판적 지적은 “모든 공장 노동자가 낮은 임금을 받는 게 아닌데도 학생들에게 ‘공장 노동자는 가난하다’는 편견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해석 될 수 있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공장 노동자라는 말에서 ‘공장’이라는 단어에 강조점을 두고 특정 직업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막으려는 선의가 작용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최저생계비에 못 미치는 수준의 돈을 버는 ‘노동자’가 수도 없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기에, 왠지 노동자는 가난하다는 비참한 현실 자체를 덮으려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기도 한다.
흔히 동화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모험으로 가득 찬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도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서양의 많은 고전 동화들, 예컨대 한국에서도 유명한 그림 형제의 동화는 매우 잔혹하고 엽기적이기조차 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어느 영문학자는 내게 어린이도 악의 존재를 알아야 하고, 악이 없는 세계는 도덕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며, 악의 잔혹한 처단이 도덕을 의미하기 때문에 오히려 잔혹 동화를 봐야 한다고 설명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동화는 이데올로기적 목적에 따라 현실의 어려운 삶, 비극적 음모를 미화하는 용도로 바뀌기도 한다.
미국 매사추세츠주에 애머스트라는 곳이 있다. 유명한 사립대학인 애머스트 칼리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뿐 아니라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이 미국 곳곳에 여럿 있을 정도로 제프리 애머스트 경은 유명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존경받는 애머스트 경은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친선의 표시로 병균이 든 담요를 선물하는 식으로, 일종의 세균전을 기획한 인물이기도 하다. 누군가에게는 존경받는 인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죄 없는 죽음을 가져다준 인물이다. 나에게 이 일화를 들려준 백인 교육학자는 자신의 전공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존재하는, 미국의 식민지 정복을 미화하는 이데올로기적 조작을 파헤치는 것이라고 했다. 학자가 전공으로 삼아 파헤쳐야 할 만큼 많은 부분에서 은밀하게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혹시 노동이나 노동자에 대해서도 우리는 비슷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원주민 추장의 딸과 백인 청년의 사랑이라는 모티프를 이용해 아메리카 정복을 낭만주의적으로 정당화하는 <포카혼타스>처럼, 하지만 현실의 비정함을 감추기보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 드러낼 때 비로소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문제점과 모순이 밝혀지고 이를 해결하려고 노력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어린이가 잔혹 동화를 봐야 하는 것처럼.
아이돌도 노동자일까
K팝을 이끄는 아이돌 그룹은 철저한 매니지먼트 시스템의 산물이다. 기획사는 예쁘고 춤 잘 추고 노래 잘하면서 기본적으로 유명해지고 싶은 욕망에 가득 찬 아이들을 모아 성형수술까지 시키며 몇 년씩 교육한다. 연습생은 한 숙소에 대여섯 명 이상이 함께 기거하면서 먹는 것, 입는 것, 만나는 사람까지 엄격하게 통제당한 채 훈련받는다. 아동노동은 금지한다는 문명사회의 원칙조차 무력해진다.
이런 연예 매니지먼트회사는 금융투자의 원리, 즉 ‘포트폴리오 분산투자의 원리’를 치밀하게 따른다. 금융투자의 원리는 간단하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않는다. 몇몇 달걀은 깨지더라도 모조리 깨지는 건 막기 위함이다. 노래 잘하는 소녀 A와 춤 잘 추는 소녀 B를 묶은 한 꾸러미에서 나오는 기대수익률을 극대화하면서 실패할 때의 위험을 극소화하려면 댄스 그룹 하나를 만들고 발라드 그룹도 하나 만들어두어야 한다. 이제 A와 B는 모두 고유의 개별성을 잃어버린다. 이미 그들은 기획 상품의 한 부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큰 성공을 거둔 아이돌은 실제로 매니지먼트회사의 지분을 갖는 ‘파트너’가 되기도 한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금융투자의 대상에서 주체로 변화하는 셈이다.
흔히 언론에서 연예기획사의 매니지먼트 시스템을 일컬어 ‘노예계약’이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프로야구를 노예제 생산양식이라고 주장했던 예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가 이를 들었다면 자신이 말한 노예제 생산양식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느냐고 쾌재를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그의 이론에 수긍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설사 로또에 당첨될 확률로 많은 인기를 얻어 천문학적 소득을 벌어들인다 하더라도 멤버 하나하나는 결국엔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품격 있는 일을 하면 노동자가 아닐까
그럼 노동자가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 그들은 무슨 일을 할까? 많은 경우 ‘품격이 낮은(또는 높은) 일’이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학습된 편견이 작용한 결과다. 화려한 초현대식 건물에서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돈놀이’를 하는 펀드매니저의 노동이 품격이 높은 것인가, 산에 길을 내고 물에 다리를 놓아 사람이 오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육체노동자의 노동이 품격이 높은 것인가?
복잡노동과 단순노동,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이라는 경제학적 개념도 적어도 어느 정도는 사회적 편견에 기초하고 있다. 나는 학창 시절, 명문 대학 교수인 문학평론가가 쓴 책에서 빈 원고지를 채우기 위해 밤새워야 하는 지식인의 ‘노동’이 얼마나 힘겨운지 토로하는 글을 읽으면서 매우 거북했다. 그래 봐야 편하게 방에 앉아 잔머리나 굴리는 일일 텐데 그가 뜨거운 여름, 추운 겨울에 현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를 떠올려보았다면 차마 그런 글은 쓰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노동을 하고 있는 지금에야 나는 그의 말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그 일이 사회경제적으로 어떻게 평가되는지, 그 일을 하려면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자격을 갖추어야 하는지 따위에 상관없이 일하는 그 순간만큼은 공통된 속성이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암 수술을 하는 외과의사에게 수술이란 그저 밥벌이를 위해 단순하게 반복하는 일상적이고 의례화한 절차의 하나일 따름이다. 물론 하고 싶다거나 해야 한다고 해서 아무나 암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아무나 공장에서 단순노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먹고살기 위한 절박함이나 타고난 육체적 강건함, 지루함을 견디는 능력 등 일정한 자질(과 조건)을 갖춘 사람이 아니면 힘든 노동을 버텨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 쓸 수 있는 자는 글 쓰는 능력으로, 춤출 줄 아는 자는 춤추는 능력으로, 근육을 움직일 수 있는 자는 육체노동으로, 정상적이라면 그 노동의 대가로 지불되는 돈은 ‘임금’이라고 불린다. 이름은 아무거나 상관이 없다. 때로 ‘사업소득’이 될 수도 있고 ‘출연료’가 될 수도 있으며 ‘원고료’가 될 수도 있다. 무엇이라 불리건 일의 대가로 돈을 받을 때 그는 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고 노동을 하고 있다면 그는 노동자다.40-45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노동은 어떤 모습일까
그렇다면 경제학 교과서에서 노동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대표적인 것 몇 가지만 추려보도록 하자.
먼저 노동은 노동 공급자가 ‘소득’과 ‘여가’라는 두 마리 토끼 사이에서 최적의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발생한 ‘부산물’ 또는 ‘잔여항’으로만 다루어진다. 하루 24시간 중 여가로 사용할 시간을 결정하고 나면 그 나머지가 자동으로 노동 시간이 된다. 이렇게 설명하는 까닭은 바로 노동을 그 자체로는 만족을 가져다줄 수 없으며 피하고 싶은 불편함만 가져다주는 활동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경제학 용어로 표현하자면 노동은 ‘비효용’이다. 그러므로 이 정의에 따르면 노동하지 않는다고 해서 발생하는 기회비용은 없다. 하기 싫은 것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잃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노동자는 기본적으로 ‘땡땡이’를 치려는 태만 욕구를 갖고 있다고 확신하는 셈이다. 누구나 비효용을 줄이려고 행동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른바 ‘한계생산력설’에 따르면 노동자는 자신이 공급하는 생산요소인 노동이 생산에 기여한 만큼 보수를 받는다(다른 모든 조건이 같고 오직 노동만 한 단위 늘렸을 때 증가하는 생산물의 양을 그 노동의 한계생산력이라 부른다).
이러한 묘사는 경제학 이론의 관점에서도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계생산력설이 아주 제한적인 가정하에서만 논리정합적으로 성립한다는 것은 경제학설사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굳이 경제학까지 탐구하지 않더라도 직관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도 많이 있다. 과연 사람들은 노동을 비효용으로만 보는 걸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라는 반대 사례는 일상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기프티콘 하나 얻지 못하더라도 누군가가 올린 질문에 장문의 답변을 달아주는 이들이 없다면, 인터넷은 결코 ‘정보의 바다’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아무리 단순해 보이는 일에도 일 자체가 가져다주는 성취감이 어느 정도 존재한다. 문제는 그 일이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조직되는가다. 성취감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 등이 결합할 때 노동자가 ‘땡땡이’를 치지 않고 열성적으로 일하는 사례도 얼마든지 있다. 사람들이 경제적 인센티브에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도 아니다. 일자리를 잃었을 때 발생하는 기회비용이 반드시 돈을 벌지 못한다는 사실과 연관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은 사회적 존재이므로 자신이 속한 집단 안에서 아무런 역할도 부여받을 수 없다는, 그 상실감을 더욱 견디지 못하기도 한다. 실업자에게는 먹고살 길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할 일이 없다는 처지에서 발생하는 자존감 저하도 때로는 생계 못지않게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경제학 교과서가 노동을 묘사하는 방식은 때로는 현실과 동떨어진 환상을 불어넣고 때로는 지저분한 현실을 미화한다.가격차별 이론이 그러했듯이, 사람들이 노동을 바라보는 방식을 특정한 방향으로 이끄는 역할도 한다. 마치 표준어가 보통사람들이 실제로 쓰는 말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써야 할 올바른 말을 규범적으로 정의하는 것이라는 말과도 같다.
최악은 경제학 교과서가 침묵하는 전략을 사용하는 경우다. 침묵은 말해야 할 것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문제를 드러내지 않고 덮어버린다. 졸업하면 대부분 노동자가 되어야 할 학생들에게 교과서는 노동의 권리에 관해, 노동 강도에 관해, 노동과 자본의 대립에 관해, 결국 노동 그 자체에 관해 말하지 않는다. 때로 침묵 뒤에는 악다구니보다 더 많은 것이 있는 법이다.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노동자’는 어떤 모습일까
실제로 경제학원론이나 미시경제학 교과서를 들추어 보면 노동은 보이지만 노동자는 그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현대 미시경제학에서는 경제 주체를 크게 ‘소비자’와 ‘생산자’ 둘로만 구분한다. 교과서의 배열 순서도 먼저 소비자 행동에 관한 이론이 나오고, 그 다음에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똑같은 논리 구조를 갖춘 생산자 이론이 나온다. 생산자는 주어진 비용으로 생산량을 극대화하거나 (같은 말이지만) 주어진 생산량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생산하려고 생산요소를 구입하고 배치하며 기술을 선택하는 주체로 묘사된다. 눈치챘겠지만 이때 말하는 생산자는 노동자가 아니다. 구상 기능과 실행 기능이 분리돼 단순 반복적인 업무만 담당하는 노동자가 아니더라도 기업에서 노동자가 생산요소의 구입, 기술의 선택, 자금 조달과 같은 최종 결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러한 결정을 하는 이들을 굳이 현실에서 찾아보자면 이사회 정도일 것이다. 또 한국의 재벌처럼 오너 경영이 일반화돼 있고 총수와 그의 일가가 확실한 지배력을 가진 곳이라면 자본의 실질적 소유자인 ‘자본가’일 것이다. 조금 범위를 확장해보면 한국의 사립학교나 교회 등 종교기관에서조차 ‘경영’상의 중요한 결정은 오너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몇 명에게 집중된다.
마르크스경제학에서처럼 모든 가치를 노동자가 생산한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더라도 경제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생산자에 이른바 직접생산자인 노동자가 빠져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4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