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의 연애가 언제 시작 됐는지는 알수 없지만 6월초에 베티나가 떠난뒤 베토벤은 항상 하던대로 여름철 숙소를 구하는 대신 빈에 남아 이따금 바덴에 다녀오곤했습니다. 그는 그때 괴테의 에그몬트를 위한 부수 음악의 초연(6월15일)준비로 몹씨 바빴습니다. 또한 바로 이때 그의 많은 작품이 인쇄중이었기 때문에 다량의 작품 복사를 감독하고 교정을 봐야했져.
10월에 그는 현악 사중주 작품 95를 완성했습니다. (출판은 1816년까지 지연되었고여....)그러나 그의 중대한 작품은 상당히 그의 신조에 맞게 느리게 진행되었는데 1811년까지 계속 되었습니다. 예외도 있져....대공 트리오 작품 97번만은 3월 3일과 26일 사이에 -비록 스케치는 1810년에 있었지만- 신속히 완성 되었답니다.
그럼에도 베토벤 스스로는 전에 없던 낙관적인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게 그의 신조였으니까여...그의 생각은 다시금 오페라로 돌아갔는데 그는파리로 편지를 보내서 "대본과 성공적인 멜로 드라마 , 코메디 등등."을 부탁했습니다....그리고 오페라 소재에서 바빌론의 왕녀를 진지히 숙고했져....
이즈음 그는 이탈리아로 여행할 계획이었지만 언제나 같이 실천에 옮기진 못했습니다.대신 그는 말파티 박사의 충고로 테플리츠로 갔는데 그의 친구이며 조력자인 프란쯔 올리바를 동반해서 1811년 8월 초순에 그곳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브라이트 코프 엔드 헤르텔사...어디서 많이 듣지 않으셨습니까???그렇져...그당시 유명한 음악 출판사 ....한예로 전에 제가 쓴 모짜르트의 영원한 미완성작에서도 나왔구여... 그 사후에 그의 레퀴엠이 여기서 출판이 되었져....암튼 다시 베토벤으로 ^^ 당시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를 개정했고 10월4일의 명명일 에 부친 공연을 위한 부수음악(아테네의 멸망 작품 113)과(스테판왕 작품 117)을 빨리 완성했습니다.
처음에 베토벤은 테플리츠에서 호젓이 지냈지만 올리바를 통해서 바른하겐 , 라켈레빈 ,크르스토프 아우구스트 티제, 엘리제 폰 데어렉케 및 아말리 제발트를 포함한 많은 시인 음악가등 지성인들과 친교....소위 베토벤 아베가 되겠져.
자유분방하게 휴일을 보내고 9월18일 베토벤은 유원지를 떠나 프라하를 거쳐 상부 시례지아의 트로파우 근처에 있는 리히노프스키의 정원에 갔습니다. 베토벤의 C장조 미사곡이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던 리히노프스키의 성에서 음악가와 후원자는 흐뭇한 재회의 기쁨을...
지루하시져...이제 곧 연애예기가 다시 나옵니다....^^
이렇게 볼때 안토니 브렌타노와 베토벤 사이에 로맨틱한 일종의 사랑의 행동이 눈에 않띈답니다.
그러나 1811년 1월 26일 클레멘스에게 보낸편지에는 안토니는 자신이 이미 베토벤을 숭배하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구여....클레멘스가 작곡을 원하면서 칸타타 대본을 부쳤을때 그녀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답니다.
저는 원본을 제가 깊이 존경하는 베토벤의 거룩한 손 안에 갖다 놓겠습니다. 그분은 인간들 가운데서 신처럼 거닌답니다. 비천하 세계를 내려다보는 그의 고원한 태도며 그의 병든 위장도 순간적으로만 그를 괴롭힐 뿐입니다. 왜냐하면 뮤즈의 여신이 그 뜨거운 가슴에 그를 품어 안고 내려누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숭배가 언제 사랑으로 변했는지는 모르지만....솔로몬은 1811년 가을 즉 베토벤이 그여 여러작품을 쓸때 (세게의 가곡 작품 83, 감람산 위의 그리스도 작품 85의 피아노 편곡) 이 작품들에게 헌정을 덧붙여 안토니에게 선물했을때를 그때로 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인에게가 안토니를 위해서 작곡되었다면 1811년 말쯤엔 둘은 연인 사이었음이 확실하다고 그는 주장합니다.
말년에 안토니는 빈의 가장 쓸쓸하던 시기에 오직 한사람만이 자신을 위로해줄수 있다고 오토에게 털어놓았습니다. 그녀는 아무도 않만났지만 오로지 베토벤만은 만났고...베토벤은 이 아리땁고 사랑스런 자신의 연인을 위해서 피아노포르테에 앉아서 탁월한 그의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한편 그녀에게 온갖 이야기로 위로를 해준채 왔던 때와 마찬가지로 아무 눈에도 띄지 않은채 말없이 방을 나오곤했습니다
또한 1819년에 안토니가 자신의 영적 지도자였던 요한 미카엘 자일러 주교에게 쓴 편지를 보면 오직 사랑의 표현이라고 밖에 생각할수 없는 문구가 가득하답니다.
그녀는 베토벤을 그편지에서 "위대하고 탁월한 사람" "예술가로서보다 인간으로서 더욱 위대한 사람." "그의 부드러운 마음, 그의 빛나는 영혼, 그의 난청, 심원한 예술가로서의 오나정성, 열렬한 의지, 깊은 신뢰감."에 대해 역설을 했으며 마지막으로 "그는 자연스럽고 단순하며 지혜롭고 순수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따라서 이 모든것과 불멸의 연인에게 부쳐진 편지를 종합해볼때 그의 체념이나 거절은 과도한 윤리의식에서 비롯된거져....즉 한 천재적인 작곡가의 열렬한 사랑이 사회의 도덕이라는것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부서져버린거랍니다.
안토니의 제의를 받아들이고 싶은 욕망은 간절하나 그가 결혼할수 없다는것뿐만 아니라 친구를 배신하게 되리라는 두려움....
브렌타노 부처가 빈을 떠난 정확한 날짜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마도 1812년 11월이었으리라는 것은 프란쯔가 10월 6일 빈에서 클레멘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추측할수 있습니다.
베토벤은 사랑하는 안토니가 출발이 확인될때까지 린츠에 머물러 있었을것이고....자신이 태어난 고장인 라인지방을 방문해 보고 싶은 욕망이 불현듯 일어났지만 브렌타노 집안의 안토니를 보면 자신은 이성을 잊고 그녀에게 달려가고싶은 마음을 주체할수 없을것같아서 차마 그러지 못했습니다.
46세에 안토니 브렌타노는 타계한 친구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긴 생애가 끝막음할 즈음은 1869년에 노란 종이철은 이름으로 꽉 차 있는데여....그 이름엔 다음의 이름이 맨 첫장에 적혀있져..
베토벤 1827년 3월 26일.....
불멸의 연인 다음에 계속 됩니다....
한 천재작곡가의 헌신적인 사랑과 정렬에 대해서 거절할 여자가 있겠냐마는.....천재들의 운명이란게 그런가 봅니다. 사회의 제약이나 자신의 불구 그리고 남다른 열정으로 그는 결국 철저히 여성들에게 버림을 받았고.....그 와중에 안토니는 그를 남자로 생각하고 아낀 첫 여성이라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