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목욕
코로나 일기
by문두Jan 19. 2023
우리 집에서 새로운 지식과 문명을 제일 빨리 접하고 있는 아들이 첨단의 문물을 들여왔다. 그것은 바로 코로나라는 유행병이었다. 아들은 대한민국의 모든 변화와 유행이 시작되는 도시 서울에서, 그것도 강남에 있는 북카페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덕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한 발 앞서 올 1월에 코로나를 영접하게 되었다. 아들이 기침을 좀 하고 있었는데 수원까지 아는 형을 만나러 갔다가 꺼림칙해 자가검사를 했다. 그 결과 양성반응이 나오자 아들은 형도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들어갔던 호텔에서 혼자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다음날 우리 부부가 새벽에 수원까지 가서 아들을 데려와 보건소에서 PCR검사를 받았고 온 가족이 양성으로 확진되어 자가격리치료에 들어갔다.
남의 일로만 여겼던 일이 우리 가족에게도 찾아왔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온 식구가 생활센터에 가지 않고 내 집에서 치료하게 된 것이었다. 혼자가 아니라 가족 전체가 코로나를 공유하게 되어 어떻게 보면 마음 편하게 열흘이라는 긴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아들 덕분에 그동안 코로나에 걸릴까 봐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나의 직업은 어르신 댁을 방문하는 재가사회복지사이기에 그 피해가 막대할 수 있었다. 늘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하며 마음을 졸이며 생활했었다. 어쩌면 걱정을 먹고 자라는 불안이라는 실체 없는 그놈이 코로나보다 더 큰 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들이 감기 기운이 살짝 있었고 나도 추운 날씨에 철인 3종 경기하듯 자전거를 무리해 타서인지 몸살 기운이 있었다. 사실 요즘 제일 신경 쓰이는 일은 어르신 댁을 방문해서나 전철이나 버스를 탔을 때 기침이 나오는 것이었다. 참으려고 진땀을 빼면 얄밉게도 더 터져 나왔다. 이렇게 기침 한 번에도, 목이 조금만 아파도 혹시나 하며 걱정이 되었지만 일상생활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오히려 확진은 당당하게 모든 사회생활을 중단할 수 있는 정당한 권리였다. 거기다 자연 면역력이라는 막강한 방패를 덤으로 얻는 일이기도 했다.
확진 후에는 일사천리로 조치가 취해졌다. 다행히 전염병에 걸렸다고 세상이 우리를 외면하지 않았다. 세금 낼 때나 실감했던 국가의 존재가 코로나를 겪으며 선명하게 느껴졌다. 국민이 어려울 때 국가로부터 보호받고 관리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었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료지원, 식료품 지원, 정서지원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이번 일로 나의 마음에 얇게나마 애국심이라는 샘이 생겼다.
한편으로 내가 접촉했던 사람들이 아무런 피해가 없기를 빌고 빌었다. 역학조사에 너무 솔직하게 응대해 접촉자 중 몇몇 사람에게는 곱지 않은 말을 들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있었을 전염의 확산방지를 위해 세세하게 숨김없이 만났던 사람들과 다녔던 장소를 다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솔직했던 나는 어쩌면 너무나 융통성이 없는,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일 수도 있겠다. 내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있었다. 조사관이 받아 적다가 나중에는 아직 더 남아있나요? 하며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코로나 환자가 되었다고 얘기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많이 달랐다. 진심으로 걱정해 주며 금방 지나갈 거라며 위로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햇살처럼 환하게 문제를 드러내놓고 뒷수습에 신경 써주었다. 자신에게 귀찮은 일을 만든다고 번거로워하며 짜증스러워하는 이들도 있었다. 솔직한 것도 좋지만 자기 이름을 이야기해 당장 일해야 먹고사는 사람의 앞길을 막는다고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접촉자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빼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사실 자가격리가 되고 나면 내가 벌려놓은 일의 뒷정리는 남은 사람들의 몫이었기에 주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부분도 있었다. 다행히 내가 만난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확진자가 나오지 않았다. 접촉한 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밝히는 바람에 눈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이로 인해 아무도 이상이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서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워졌다.
삼일 정도가 지나자 서서히 주변 사람들은 고요해졌다. 전화 통화로 집에까지 쫓아 들어와 마음을 휘저어대던 이들이 검사 후 음성 반응이 나오면서 슬슬 나를 놓아주었다. 자가격리 생활은 어떻게 보면 먹는 일이 전부였다. 사실 집안에 갇혀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아서 평소에는 뒷전이었던 요리가 제일 중요한 일이 되었다. 집에 쌓아놓은 식재료들은 마치 집에 갇힐 때를 위해 모아놓은 것 같았다. 재난지원금으로 구입해 둔 쌀 포대가 몇 개나 쌓여있었고, 달걀도 세 판, 구운 김도 한 박스 있었다. 호박, 고구마순 무말랭이, 고추부각 등 묵나물 말려놓은 것도 넉넉했다. 냉동고에 파먹을 수 있는 저장 음식들도 많았다. 가끔 소중한 인연이 대문 앞까지 찾아와 수감 생활하는 이에게 사식을 넣어주듯 추어탕이나 한라봉, 버섯 등을 대문 앞에 두고 갔다. 걱정하실까 봐 알리지 않아 우리가 코로나 중인 것을 모르는 고향의 엄마는 이 와중에 설에 먹을 가래떡과 인절미 등을 푸짐하게 택배로 보내오셨다. 작년에는 이것들을 여기저기 나눠 줄 수 있었는데 올해는 그대로 우리 몫이 되었다. 이렇게 명절보다 더 명절 같은 긴 시간과 풍성한 음식들이 준비되었다.
갇혀서 보내는 답답한 이 시간을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몸의 양식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양식도 꼭 필요했다. 이 시간을 잘 넘어가도록 도와줄 책도 두 권 준비했다. 하나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였고 다른 하나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였다. 지금 내가 가진 문제가 별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극한의 간접 경험들이 필요했다. 나의 답답함을 해결하기 위해 더 멀리 더 큰 것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할 수 있는 여행이기도 하다. 코스모스를 읽으며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가 지구조차도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확인하며 나의 문제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보았다. 죽음의 수용소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사람은 희망을 가지면 살아지는 존재라는 것을 얘기해 주었다. 창밖에는 달이 뜨고 달이 뜨고 해가 뜨고 별이 뜨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분다. 내가 회사에 안 나가도 내가 공부하는 모임에 빠져도 세상은 끄떡없이 잘도 돌아간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잠깐 세상을 떠나 있는 것일 뿐이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열흘 안에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몸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앞에서도 얘기한 먹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세끼 식사를 꼬박꼬박 도시락용 식판에 차려먹었다. 아침과 기본 반찬은 내가 해놓고 점심은 아들이 먹고 싶은 음식을 더 추가해 준비했고, 저녁 차리는 것은 남편이 맡았다. 마치 병원처럼 각각의 방으로 가져가 먹었다. 환자를 위해 영양사가 정한 식단이 그렇듯 메뉴 선택권은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있었다. 병원식이라고 이름을 붙이자 가족들은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게 되었다. 식판의 음식을 남기지 않고 싹싹 비워주어서 마음이 흐뭇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어쩔 수 없어서 그냥 견딘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는 어떻게 하면 몸에 좋고 요리법이 간단한가만 중요했다. 냉동실에 넣어둔 언니가 주었던 향어도 어죽을 끓여서 먹어봤다. 해마다 썩혀서 버리던 베란다의 엄마가 주신 호박도 죽을 끓여 먹었다. 온 식구가 덤벼 호박의 껍질을 까고 가늘게 썰어 삶았다. 찹쌀은 씻어 말린 다음 절구에 찧어 가루를 곱게 만들어 새알심을 만들었다. 팥을 삶아 함께 넣고 죽을 끓였다. 남은 팥과 찹쌀로는 찰밥을 했다. 평소에는 이런 음식들이 인기가 없었는데 본인들이 함께 만들어서인지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봄에 만든 생강꽃차, 목련꽃차, 여름에 만든 연잎차, 연자방차 가을에 사다 말려놓은 생강편 말린 것, 메리골드 꽃차 등도 넉넉했다. 식사와 식사 사이에는 계속 차를 만들어 마셨다. 특히 감기에 좋은 생강차나 목련꽃 차를 따뜻하게 준비했다. 차보다는 음료수를 가까이하던 아들도 차를 마시게 되었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웹을 다운로드하여 규칙적으로 세상에 하루 두 번의 신호를 보냈다. 아침 7시와 오후 4시에 체온과 산소포화도를 기록해 살아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아침에 한 번의 전화관리를 받았다. 갇혀 있게 되자 오히려 바깥세상이 궁금해졌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는 편인데 처음 며칠은 밤에 대문 잠그는 것을 잊어버렸다. 또 뉴스보다는 드라마를 보던 내가 오히려 세상일이 궁금해져 귀를 쫑긋 세우고 뉴스를 열심히 보게 되었다. 처음 이틀은 아무도 찾아올 리 없기에 마음 놓고 내복만 입고 있었는데 곧 그날이 그날 같은 지루함이 몰려왔다. 이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아침에는 밝은 외출옷을 꺼내 날마다 다르게 입고 저녁에는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하루하루와 밤낮이 이어져 똑같이 반복되는 밋밋함에 어떻게든 무늬를 넣으려고 애썼다. 무용지물인 현관문도 잠금장치를 밤에는 걸고 아침에는 열어놓기를 규칙적으로 했다. 할 일을 잃은 신발도 한번씩 신었다 벗어서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또 평소에 귀찮아 미루던 일들도 찾아 하게 되었다. 시험용으로 산 접이식 이동 욕조가 화장실에 바다로 가고 싶은 배처럼 세워져 있었다. 욕조라는 배는 물 위에 띄우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물을 담아야 바다로 갈 수 있었다. 욕조가 커서 보일러 온수 기능으로는 충분한 양의 물이 덥혀지지 않았다. 부족한 물을 가스 불에 끓여 보충해야 겨우 물의 온도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이 귀찮은 욕조 목욕도 주전자로 몇 번이나 끓여서 붓고 식구들이 번갈아가면서 했다.
우리들은 환자들이기에 건강 회복을 위해 약속한 규칙들을 순순히 잘 따르고 있었다. 공동의 공간에 있을 때는 모두 마스크를 끼고 있도록 했다. 하루하루 식사를 준비해 각자의 공간으로 가져가 아침을 먹고 제 때 약을 복용하기로 했다. 내가 설거지를 할 때 남편과 아들은 규칙적으로 환기를 하고 청소를 했다. 그다음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고 게임을 하는 등 자유시간을 보냈다. 남편은 거실에서 생활하기로 했고, 아들은 자기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안방을 차지했다. 나는 이렇게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밤낮으로 안방을 온전히 혼자 쓸 수 있는 자유를 처음으로 얻었다. 마음대로 누워서 뒹굴든 책을 읽든 잠을 좀 늦게 자든 상관없었다. 늘 옆에 있던 남편이 없어서 허전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점심때와 저녁식사 후에도 이런 자유시간이 반복되었다. 이때 우리는 아무도 함부로 서로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내 집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바깥공기를 쐬지 못하는 것은 치명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에 내가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었다. 평소에는 알지 못했던 나의 문제들이 평소와 다른 특별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드러나곤 한다. 아니 원래 가지고 있던 문제인지 반대로 그런 상황이 문제를 생기게 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예를 들면 작년 여름에 교통사고가 나서 응급실에 갔을 때 공포감이 몰려와 숨쉬기가 어려웠다. 그 일로 인해 내가 공황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방이 막힌 공간이나 높은 곳에 가면 가슴이 답답하고 무서워서 숨쉬기가 힘들어졌다. 이런 일을 통해 내가 폐쇄공포증이나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병적인 부분, 약한 부분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번에도 이놈들이 튀어나지 않도록 스스로를 잘 돌봐야 했다.
제일 아쉬운 것은 햇빛과 바람과 나무였다. 내가 차지한 안방에는 오후가 되면 햇볕이 잘 들어왔다. 창문을 활짝 열고 방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너무나 아까워 웃옷을 벗고 앉아서 그 햇볕으로 목욕을 했다. 먼저 앞쪽에 햇볕을 쬐어주었다.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뒤로 돌아 등으로 햇볕을 느꼈다.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어 기분이 좋았다. 눈을 감고 얼굴에도 햇볕을 쬐여 주었다. 돌아앉아 있으면 어른어른 아지랑이 같은 것이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4층 지붕에서 고드름이 녹아서 뚝뚝 떨어지는 소리도 들렸다. 추운 줄도 모르고 일광욕을 했다. 보자기만 했던 햇볕이 점점 크기가 줄어들어 나중에는 손수건만 해질 때까지 아니 아예 다 닳아져 방에 들어오지 않을 때까지 목에도 걸어보고 팔에도 다리에도 걸쳐보며 알뜰하게 썼다. 내일도 날씨가 좋아서 햇빛이랑 놀 수 있길 바랐다. 밖에 나갈 수 있는 자유의 몸이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이가 보았다면 미쳐가는 사람인 줄 알 것이었다. 내가 만약 병들고 나이가 들어 햇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방에 갇혀 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도 생각해 보게 되었다. 자유로운 사람이 보기에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누군가의 행동들이 사실은 자유를 갈구하는 간절한 몸부림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화장실에 동쪽으로 난 쪽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깥공기가 들어왔다. 평소에는 별로 관심 있게 보지 않았던 화장실에서 보이는 조각하늘도 너무 귀한 것이어서 하루 종일 아껴서 들여다봤다. 그 좁은 창문으로도 가깝고 먼 풍경이 열려있었다. 눈이 내리는 날은 눈에 쌓인 나무와 소요산이 보였다. 멀리 신천 자전거 도로에서 보던 광암동 쪽 화력발전소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구름이 되어 올라가는 것도 보였다. 가까이에는 아랫집 앞 공터에 서있는 원추형 푸르른 침엽수가 싱그럽게 보였다. 맨 꼭대기 가지들이 머리카락을 봉두난발로 묶어놓은 것 같았다. 두어 가닥은 더 삐죽이 자라서 참 자유롭게 보였다. 화장실 창문에서 보이는 하늘의 색깔이 날씨에 따라 달라지면 같은 풍경도 색다르게 보였고 기분이 달라졌다. 아침에 하늘을 가르며 나는 새들이 얼마나 부럽게 느껴지던지 한참 동안 동쪽 하늘을 바라보는데 눈이 시렸다. 이 광경을 보며 제자리에서 뛰면 마치 바깥에서 산책이나 조깅을 하는 것 같은 기분을 조금 낼 수 있었다. 이 풍경과 이 햇볕을 나만 누리기 미안해 남편에게도 가끔 빌려주었다.
아들은 “운동을 가고 싶다.”, “여행을 가고 싶다, 끝나면 제주도로 두 달 살이를 떠나겠다.” 하며 계획을 미리 세우고 있었다. 남편은 “늙어서 집안에서만 뱅뱅 돌며 지내면 얼마나 답답할까? 힘들지만 아직 일할 수 있는 것이 복이네. 나는 노는 것보다는 그냥 일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네.”라고 했다. 나는 자유를 얻으면 햇볕 좋은 날은 꼭 산책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코로나완치 후 아들은 제주도에서 두 달을 카페 알바로 숙식을 해결하며 지내고 왔다. 거기서 여자 친구도 만나게 되어 요즘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남편은 일복이 많아서 바로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이 잘못해 놓은 일까지 하자 보기 바빠 짜증이 나있다. 나는 틈만 나면 밖으로 나가 이웃동네까지 한 바퀴 크게 돌며 오백 년 된 느티나무와 사귀는 중이다. 친정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도 간병하러 가서 완치자이기에 모든 검사를 생략할 수 있는 막강한 혜택을 누렸다. 그 뒤 친정엄마를 집으로 모셔와 요양하느라 생활비가 부족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잊고 있었던 코로나재택치료 생활지원비가 나와 해결해 주었다. 남들보다 조금 먼저 코로나를 겪으며 주위의 따가운 눈총도 받았지만 덕분에 걱정을 빨리 털어버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