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울고 웃던 고려인 삶의 빛과 그림자
홍영의(국민대 박물과 학예원)
굴러 들어온 소주가 토속주를 몰아내다.
얼마전 모 국회의원과 재벌이 일반인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루이14세’인가 ‘발렌타인 30년산’인가 하는 값비싼 양주를 외국에서 사들여 와서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문득 1079년(문종33) 송나라에서 붉은 칠에 도금하고 꽃을 조각한 상자에 곱게 넣어 보내온 행인자법주 10병이 생각났다. 물론 그것은 약용으로 쓰였을 터이지만, 아마도 당대에는 가장 비싼 수입주가 아니었나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일반 서민들이 그런 고급술은 커녕 술병조차 구경하기 힘든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고급술만이 술은 아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 대개 이 두 가지가 좋으면 그 밖의 일은 자연히 알 수 있다”라고 하지 않았던가. 술이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를 말한다. 주세법에 의하면 알코올 1도 이상의 음료는 술로 정하고 있다. 술은 일부 민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민족이 즐기고 있으며, 그 용도도 다양하여 관혼상제와 같은 행사에 꼭 필요한 물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쌀로 술을 빚었다. 언제부터 곡물로 술을 빚었으며, 어떤 재료와 방법으로 술을 만들었는지는 자료가 부족해서 확인하기 어렵지만, 술 빚는 솜씨가 일찍부터 발달해 왔음은 틀림없다. 고려시대에는 통일신라 때보다 술의 종류와 이름도 많이 보인다. 우리나라의 전통 술 중에서는 막걸리와 청주가 일찍부터 빚어졌다.
고려 최고의 주성이라고 일컬어지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과 각종 문집에는 수많은 토속주가 소개되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동동주. 황금주. 춘주. 송주. 국화주. 두견주. 죽엽주. 백주. 이화주. 오가피주. 백자주. 창포주. 자주. 부의주 등이 그것이다. 이런 종류의 술들은 조선시대에도 대갓집이나 각 고을의 토속 명주가 되어 오늘날까지 이름을 떨치고 있다.
오늘날 서민층과 가장 절친한 소주는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 전래의 막걸리. 청주와 함께 3대 주종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소주는 타이나 인도네시아. 서인도에서는 ‘아라크’, 원나라에서는 ‘아라길주’, 만주어로는 ‘알키’등으로 불려져 왔으며, 우리나라 개성에서는 ‘아락주’라고도 했다. 최근 각광받는 안동소주는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계획으로 안동에 병참기지를 만들면서 전파시킨 것이다. 이 때 들어온 소주를 지금껏 우리 술이라고 자연스럽게 인정하였듯이 언젠가는 양주를 우리 술로 인정할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 때는 양주를 어떻게 부르게 될까?
이렇게 밖에서 굴러 들어온 소주가 박힌 토속주를 빼내 자리를 잡고 난 이후, 소주는 빠른 속도로 유행을 타게 된다. 1375년(우왕원년)에 소주금주령이 내려진 것이나, 그 이듬해 김진의 소주에 얽힌 일화는 자못 흥미롭다. 이 사건은 경상도 원수였던 김진이 이름난 기생을 모아 부하 장수들과 밤낮으로 소주를 마시는 바람에 ‘소주도’라는 이름까지 얻게 되었는데, 왜구가 마산에 침입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줄행랑을 쳤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에 와서는 약으로 쓰는 것 이외에는 소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할 정도였다.
무역항, 벽란도에서 질펀한 술 한 잔
대나무 숲에 둘러싸인 맑디맑은 강가엔 낮이나 밤이나 시끌벅적한 사람 소리들, 낮이면 드나드는 상선과 어선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들어오는 조운선들로 나루는 발 디딜 틈조차 없다. 만선을 하고 돌아온 어부들은 서로가 고기를 많이 잡았네 하며, 잡아온 고기를 상인에게 넘기며 옥신각신 한 푼이라도 더 받을 양 씨름하며 값 치루기에 바쁘고, 온갖 물화를 도성으로 나르는 수레꾼들은 진흙탕에 빠진 수레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한 쪽에서는 물주가 아직 오지 않았는지 송인들과 파란 눈동자를 가진 아라비아 상인들은 무슨 말인지도 모를 소리를 저희들끼지 주고받으며 노닥거리고 있다. 이들이 들여온 물건은 상류층이나 살 수 있는 약재, 비단, 그리고 도자기와 향료. 상아. 공작 등의 금은보화들... 갈매기 떼 노니는 한쪽 백사장 가에 수군들을 옹위하여 나팔 소리 요란하게 불며 나타난 조운고사관은 사공들의 굽실거림에 흐뭇한 듯 연신 거들먹거리며 아래 관원에게 삿대질하는 모양새가 가관이라.
바로 이곳이 수도 개경에서 30리 길인 예성강 포구의 벽란도이다. 신라 때부터 무역항으로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이래 광종 때 송나라와 공식 무역관계가 열린 이후부터 국제간의 무역항으로 크게 자리 잡은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우리의 금.은.인삼.면포 등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세계 곳곳에서 모여드는 대상인들이 관리를 붙잡고 무역허가를 내달라며 아우성치던 곳, 이들 때문에 오늘날 우리나라가 ‘코리아’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
여기는 밤만 되면 그야말로 불야성을 이룬다. <예성강곡>을 부르며 고기를 낚는 어선들의 불빛, ‘청기’라 불리는 등 달아 세워 둔 주막의 푸른 깃대, 포구 안쪽에 즐비한 요릿집과 긴 장대를 세워 양가와 구별한 색주가의 붉은 등불 아래 문을 기대어 비단 옷 입고 손짓하며 뭇 남정네를 유혹하는 여인들, 무뢰배와 시비가 붙은 어느 순진한 시골 장정의 우격다짐, 어디선가 시회를 여는지 기생들의 풍악소리와 술 취한 이들의 호기 어린 웃음소리, 도성에서 바람 쐬러 나왔는지 한 무리의 고관과 그 부인들을 인도하는 초롱불, 그리고 하인이 소리 지르는 벽제소리...
도성에서 두서너 시간이면 올 수 있는 곳이기에 너나 할 것 없이 모여든 벽란도의 저녁풍경에 길 가는 이나, 도회에서 바람 쐬러 나온 이들의 눈을 멈추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벽란도도 한때는 그 명성이 퇴조하기도 하였다. 몽고침입과 그로 인한 강화로의 천도는 새로운 환락가를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최자의 <삼도부>를 보면, 대몽항쟁시 항전의 수도였던 강화도의 풍경을 그린 내용이 보인다.
이 글에는 수도 천도와 함께 새로운 번화가로 등장한 13세기의 강도에는 해안과 언덕에 공경대부의 화려한 저택과 비교되는 상인. 어부. 소금 굽는 이의 집들이 즐비하게 어우러져 있는 모습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대몽항전의 본거지가 오히려 이전의 개성에서와 같은 생활을 영위하였다면, 강화로 천도한 최씨정권의 항몽자세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어쩌면 이것이 삼별초와 일부 관료들, 일반민들이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고 제주와 진도로 옮겨 가면서 그들과 대항하게 되었던 근본적인 이류가 되었을 법하다.
농민만 우롱하는 금주령
지금 이땅에 금주령이 내려진다면 1930년대 미국의 마피아 대부 알카포네처럼 밀주로 떼돈을 벌 수 있을까. 또 술과 관련된 그 많은 사업들과 그것으로 먹고사는 사람들은 어찌 될까. 미국은 경제공황 때문에 금주령을 내렸다지만, 우리는 어떤 핑계를 댈 수 있을까. 설마 1960,70년대 잘살기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던 새마을 운동 때의 밀가루 막걸리에 치기 어린 향수를 느껴가며, 한 때 남아돈다는 쌀 때문에 집집마다 담아놓은 농주와 겨우 복원한 민속주를 금주령이란 미명 아래 없앨 수 있을까 말이다. 더구나 막대한 재정수입을 포기하면서까지...
오히려 술 때문에 모진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아니면 몇 개 안되는 세계 1위 자리를 선뜻 양보하기 위해서라면 모를까. 위스키의 본고장인 영국에서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세계 1, 2위를 다투는 양주 수입국,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1인당 술 소비량, 음주운전 적발과 그로 인한 사고가 가장 많은 나라. 고려시대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실정이다. 그럼 고려정부는 술을 어떻게 정책적으로 적절히 이용했을까. 지금처럼 주세를 국가의 주요한 재정수입으로 삼았을까. 또 금주령은 무슨 이유로 내렸을까. 이에 대해 애주가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궁금하다.
고려시대에는 양온서라는 관청을 두어 행사에 필요한 술과 감주를 관장하였다. 양온서는 장례서.사온서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으며, 사온서는 조선시대까지 계속 존속하였다. 983년 (성종2)에는 성례. 낙빈. 연령. 영액. 옥장. 희빈 등 6개의 주점을 설치하였다. 사람과 물물의 유동량이 많은 개경의 번화가 등지에 주점을 설치하여 술을 판매하였던 것이다. 국가에서 주점을 설치하여 술을 관장한 이유는 다점.역원 등과 마찬가지로 효과적인 대민정책과 정보수집의 필요성 때문이었다. 아울러 주점은 화폐유통에도 활용되었다. 이것은 1002년(목종5) “차. 술. 음식 등의 점포들이 교역을 할 때에는 화폐를 사용하라”고 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숙종 때에는 해동통보를 유통시키면서 중앙과 지방에 술을 관장하는 관청을 설치하였다. 이 때 송나라처럼 술의 전매제가 시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정한 세금을 부과하였을 것이다.
한편 국가에서는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금주령은 홍수나 가뭄 등의 자연재해로 곡식이 부족하거나, 나라에 대상이 있어 자숙해야 할 때 내려졌다. 또한 절이나 승려가 술 때문에 폐단을 일으킬 때에도 금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소주를 사치 품목으로 여겨 금지한 일도 있었다. 심지어 원간섭기에는 원나라에서 금주령이 내려지자 고려 정부에서도 하는 수 없이 이를 실시한 적도 있었다. 즉 국가행사인 성절일, 팔관회, 연등회 등을 제외하고는 사사로이 술을 만들어 마시는 무리는 처벌하였고, 누룩까지도 값을 치러 거둬들여야만 했다.
이렇게 내려진 금주령은 관료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큰 불편이 아닐 수 없었다. 술에 취해 돌아오다가 야경꾼들에게 들켜 곤욕을 치룬 이규보는, ‘나라에서 농민들에게 청주와 쌀밥을 먹지 못하게 한다는 소식을 듣고’라는 시에서 이렇게 불만을 토로하였다.
장안의 부유한 집에는 술과 패물이 산같이 쌓였는데
절구로 찧어낸 구슬 같은 쌀밥을 말이나 개에게도 먹이고
기름처럼 맑은 청주를 종들도 마음껏 마시네
이 모두 농부에게서 나온 것 하늘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로세
...
희디 흰 쌀밥이나 맑디 맑은 청주는
모두 이들의 힘으로 생산한 것 하늘도 이들이 먹고 마심을 허물치 않으리
권농사에게 말하노니 법령이 혹 잘못된 것 아니요
높은 벼슬아치들은 술과 음식에 물려 썩히고
오랑캐들도 나누어 갖고는 언제나 청주를 마신다오
노는 사람들도 이와 같은데 농부들은 어찌 못 먹게 하는가
말이나 개에게 쌀밥을 먹이고, 종들에게 청주를 마음껏 마시게 하면서도 매일같이 힘들여 일하는 농민에게는 그들이 생산한 흰 쌀밥, 맑은 술 한 번 제대로 먹고 마시지 못하게 하는 현실을 개탄한 것이다. 금주령을 내렸지만, 힘없는 사람이나 피해를 당했을 뿐, 권세가들은 아무런 거리낌도 없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현실은 고려말 윤여형이 <상률가>에서 농민들의 참상을 절실하게 표현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고위 관료와 부호에게 토지를 빼앗기고, 조세를 이중 삼중으로 물리며, 그들의 집에서는 하루 먹는 것이 만전어치나 되고, 그 좋은 음식들이 모두 다 촌 늙은이 눈 밑의 피인 줄을 그들이 어찌 알기나 하랴마는 그 자리에서 묵묵히 일하던 우리네 삶은 아직도 그대로이다.
술에 얽힌 사연도 가지각색
술은 예로부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백가지 약의 으뜸’이라 하는 반면,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광약’이라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약주가 되고 위로주가 되기도 하지만, 오히려 술 때문에 몸을 해치고 가산을 탕진하는 사람도 있고,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위정자도 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 가전체 소설인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이러한 술을 모델로 삼은 것이다. <국순전>은 무인정권 때 현실에 대한 불만과 포부를 토로하며 지내다가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죽은 임춘이 지은 것이다. <국선생전>은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나는 이규보가 지은 것으로, 그는 만년에 시. 거문고와 술을 좋아하여 삼혹호 선생이라고 불린 주성이었다.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형식상 인간과 술의 관계를 통해서 임금과 신하의 관계를 조명해 보고자 한 점에서 비슷한 체제를 갖고 있으나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국순전>은 인간이 술을 좋아하게 된 것과 때로는 술 때문에 타락하고 망신하는 형편을 풍자한 것으로, 당시의 국정의 문란과 병폐, 특히 관료들의 발호와 타락상을 증언하고 고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국선생전>은 신하는 군왕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는 이상을 바르게 실현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신하가 총애를 받게 되면 자칫 방자하여 신하의 도리를 잃게 되고, 국가나 민생에 해를 끼치는 존재로 전락하기 쉽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신의 몰락까지 자초하는 경우가 허다하므로, 신하는 신하의 도리를 굳게 지켜야 하고 때를 보아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작품을 남기면서도 서로 상반된 삶을 살아간 임춘과 이규보의 행태는 지금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지식인들은 무인정변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느냐 죽느냐, 농민의 힘겨운 외침을 외면할 것인가 하는 갈등을 겪었을 것이다. 임춘이나 이규보 역시 생활고와 엘리트의식에 사로잡혀 무인정권에 순순히 젖어들었다. <국순전>과 <국선생전>은 자신들의 그러한 처리를 반영한 작품이다. 따라서 그 주인공은 바로 현실에 순응한 임춘과 이규보 자신이었고, 현실에 순응한 삶은 단술과 쓰디쓴 술, 텁텁한 술 그 자체였다.
어느 분석에 따르면, 역사의 흐름을 직. 간접적으로 변화시킨 쿠데타의 음모와 그 주위에는 항상 술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반대파의 요주의 인물을 꼬드기거나 고립시키기 위하여 주지육림의 질펀한 향락을 베풀기도 하였다. 고려시대에 국한하여 보더라도 일대사건인 무인정변의 연원이 술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다. 의종의 향락, 정중부의 수염을 태운 김돈중의 취기, 무인의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 그리고 최후 승리자의 축배를 위하여 술은 분명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술은 권력을 휘두르는 집권층과 사치를 일삼는 귀족층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오히려 술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별의 아픔을 겪어야 하는 연인들과 생활고에 지칠 대로 지친 일반민의 위안이자 벗이었다.
음주문화 소묘
고려인들은 술을 어떻게 마셨을까?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견문록인 <고려도경>에서 “고려인들은 술을 좋아하되 좋은 술은 얻기가 어렵고, 서민들이 마시는 것도 맛도 싱겁고 빛깔도 탁한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맛있게 마신다.”라고 하였다. 또 “안주로는 말린 고기와 해산물을 섞어서 내오지만 풍성하지 않고, 술을 마실 때 잔 돌리는 절도가 없으며 많이 내오는 것을 힘쓸 뿐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사람인 서긍의 눈으로 고려의 음주 습관을 표현한 것일 따름이다. 술에 얽힌 일화 가운데 주목되는 것으로, 과거 합격자 출신의 관원을 우대하며 결속을 다지는 문주회가 있었다.
옛 풍습에 문주회가 있으면 삼관의 관원들이 큰 술잔을 잡고 술을 가득히 따르며 선생을 부른다. 고관으로부터 아래로 낮은 관직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렇게 했다. 그 모임에 참여한 자는 비록 달관 귀인이라 할지라도, 홍지 위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으면,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렀다. 이 풍습은 고려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지금의 회식과 같은 절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참여할 경우, 선생이라 부르지 않고 대인이라 불러 구별하였다. 또한 충렬왕 때는 ‘구직주’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청렴하기로 소문난 이행검이 고밀의 임명장에 서명하지 않았는데도, 술 잘 빚기로 소문난 고밀의 처가 매번 술로 아첨하여 벼슬을 얻었다는 것이다.
권세가나 지체 높은 관리가 마셨을 그런 술과는 달리 서민들과 밭에 거름 주는 일꾼들은 잠시 쉬어 가며 아무런 부담없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쉽게 빚을 수 있는 막걸리를 마셨을 것이다. 계와 결사의 모임인 향도들도 남녀노소가 차례대로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결속을 다진 일도 있다. 그 힘든 생활 속에서도 잠깐의 여유를 가지고 마셨던 이 술은 분명 새로운 세계로의 동경과 함께 삶의 질을 재생산하는 활력소가 되었음직하다. 술은 바로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술의 참모습이 담겨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