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태백산맥 문학기행길
소설 속 현장에서 다가오는 현대사의 아픔
해방직후 우리 현대사의 격변기를 다룬 소설『태백산맥』은 사실상 역사서에 가깝다. 작가 조정래는
극심한 좌우대립과 친일파 중심의 지도층 형성, 여전히 고통 속에 시달려야 했던 민중의 삶을 씨줄로 하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 맞게 허구적으로 그려낸 인물들을 날줄로 삼아 흥미진진하게 옅어냈다.
나는 소설『태백산맥』이 출간되자마자 곧바로 읽기 시작했다. 한번 읽기 시작하자 책을 손에 놓을 수 없었다.
한국 현대사의 비극을 가슴 아프게 여기고 있었던 터라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분노하고 가슴아파하고 안타까워했었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캐릭터도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오늘은 소설 『태백산맥』의 주요무대인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을 찾는다.
아내와 함께 소설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을 걷기 위해서다.
소설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벌교읍내를 중심으로 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장소를 연결하는 걷기여행길이다.
소설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은 벌교버스터미널 옆 제석산 기슭에 마련된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에서 시작된다.
2008년에 문을 연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은 건축가 김원이 설계하였다. 문학관은 과거 아픈 역사를 끄집어내기 위해
벌교읍 제석산의 등줄기를 잘라내고, 전시실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형상으로 건축되었다. 통일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북쪽을 향하고 있다.
‘조정래 태백산맥문학관’이라 쓰인 커다란 글씨 밑에는 “문학은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게 기여해야 한다”는
작가의 친필 글씨가 새겨져 있다. 질곡의 우리 현대사를 다룬 소설 『태백산맥』이
우리 민족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집필 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정래는 부친이 태고종 스님을 하고 있을 당시 순천 선암사에서 태어났다. 나중에 아버지가 벌교상고 교사로 부임하자
작가는 벌교로 이사를 하여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광주서중에 입학하기 전까지 벌교상고 옆 3칸짜리 기와집에서 살았다.
문학관에 들어서니 소설『태백산맥』에 대한 갖가지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은 제1전시실과 제2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전시실에는 ‘소설을 위한 준비와 집필’, ‘소설 『태백산맥』의 탈고’, ‘소설 『태백산맥』 출간 이후’,
‘작가의 삶과 문학 소설 『태백산맥』’이란 장으로 구성되고,
1만 6천여 매 분량의 태백산맥 육필원고를 비롯한 159건 719점의 기증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소설 『태백산맥』은 4년의 준비기간과 6년의 집필기간을 거쳐 1989년 10권 전권이 역사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소설 『태백산맥』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과 함께 좌익에 의해 장악되었던 벌교가 다시 진압 세력인 군경의 수중에 들어가자
좌익 군당위원장 염상진은 하대치, 안창민 등과 산속으로 퇴각한다. 비밀당원으로 상부의 밀명을 받고
벌교로 잠입하게 되는 정하섭은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무당의 딸 소화를 이용하고, 둘 사이에는 사랑이 싹튼다.
한편 염상진의 동생 염상구가 감찰부장으로 있는 청년단은 좌익세력을 처단하는 데 앞장서고, 형 염상진과는 반대의 사상을 지닌
염상구는 빨치산 강동식의 아내 외서댁을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지른다. 무고한 사람들까지 피해를 입는 것을
보다 못한 벌교의 유지 김범우는 수습위원회 대표 최익승에게 희생을 줄이도록 호소하지만 오히려 빨갱이로 몰리게 된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벌교는 다시 염상진 등에 의해 장악되고, 좌익세력들은 인민의 해방을 감격스럽게 맞이하지만
또다시 살육의 참상을 겪는다, 이 과정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고수하던 김범우와 손승호는 빨치산의 길을 택하게 되지만,
김범우는 미군에게 붙들려 강제로 통역관이 되어 미군들의 부도덕한 행태를 목격하게 된다.
한국전쟁은 유엔군의 참전과 중국의 개입으로 교착 상태에 빠지고, 전선은 38선 부근에서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
퇴로가 막힌 인민군과 빨치산 세력이 지리산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무장 투쟁을 계속하지만,
군경의 진압 작전에 따라 이들의 투쟁은 점차 무력해지고 염상진은 퇴로가 막히자 부하들과 함께 수류탄으로 자폭한다.
그리고 그의 목이 벌교 읍내에 내걸린다. 염상진이 염원했던 '인민해방'은 실패로 끝나지만,
염상진을 추종했던 하대치 등이 살아남아 염상진의 무덤 앞에서 새로운 투쟁에의 결의를 다지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간다.
소설 『태백산맥』은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소설 『태백산맥』은
보수단체에 의해 이적성 논란까지 겪어야 했다. 갖은 협박에 시달려 혹시 모를 테러에 대비해 작성해 놓은 유서도 전시되어 있다.
작가에게 쓴 독자들의 손편지와 전권을 필사한 사람들의 정성도 볼 수 있다.
조정래는 소설 『태백산맥』이후 『아리랑』과 『한강』을 출간하여 우리의 현대사를 소재로 한
세 편의 대하소설을 마무리하여 문학사적으로 큰 탑을 세웠다.
태백산맥문학관 옆에는 ‘소화의 집’과 ‘현부자네 집’이 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소화의 집은 이렇게 묘사된다. “조그마하고 예쁜 기와집. 방 셋에 부엌 하나인 집의 구조…….
부엌과 붙은 방은 안방이었고, 그 옆방은 신을 모시는 신당이었다. 부엌에서 꺾여 붙인 것은 헛간방이었다.”
소설 속에서 정찬봉의 손자 정하섭은 현부자네 전속무당 월녀의 딸 소화와 이곳 소화의 집에서 애틋한 사랑을 나눈다.
소화의 집은 1988년 태풍으로 쓰러져 밭과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다가 2008년 보성군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소화의 집과 현부자네 집 사이에 제석산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데, 그 이름을 조정래등산길이라 부른다.
“그 자리는 더 이를 데 없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는데, 풍수를 전혀 모르는 눈으로 보더라도 그 땅은 참으로 희한하게 생긴 터였다.”
소설 속 묘사처럼 현부자네에서는 간척지인 넓은 중도들녘이 내려다보인다.
현부자네 집은 전체적으로 한옥의 틀을 갖추고 있으되 일본식 주택 형식이 가미되었다.
문간채 2층이나 본채 현관 등의 모습이 그러하다.
현부자네 집과 태백산맥문학관을 등지고 벌교버스터미널 앞으로 내려와 주택가 도로를 따라서 걷는다.
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오른쪽 산비탈에 ‘대광어린인집’이라 쓰인 회정리교회가 서 있다.
1935년 세워진 교회로 소설 속에서는 서민영이 야학을 열었던 곳으로 묘사된다.
소설에는 학교를 그만 두게 된 이지숙이 야학교사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모습도 묘사되어 있다.
부상당한 안창민을 자애병원에서 간호하고 피신하도록 도운 명목으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후의 일이다.
길은 소화다리로 이어진다. 소화다리는 소설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장소로 등장한다.
이 다리에서 여순반란사건이나 한국전쟁 때 실제로 총살이 이루어지고, 소설 속에서도 총살장소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원래 난간이 없었던 소화다리는 총을 맞고 곧바로 다리 아래로 떨어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곳을 총살장으로 이용했다고 한다.
소화다리는 1931년 철근콘크리트 다리로 건설되어 부용교라 불렀다.
완공된 해가 일제강점기 소화6년이었기에 누군가 소화다리라 불렀고, 이 이름이 부용교보다도 더 널리 불리게 되었다.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소화다리는 오늘도 말없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맞고 있다.
부용교라는 이름을 가진 기존의 소화다리는 인도로 사용되고, 그 옆으로 2차선 다리가 추가되어 차량이 다닌다.
소화다리 근처에는 꼬막요리를 하는 식당들이 유난히 많다. 옛날에는 벌교하면 떠오르는 두 단어가 주먹과 꼬막이었다.
조선시대 고읍이나 낙안으로 드나들던 작은 포구에 불과했던 벌교는 일제강점기 보성과 고흥일대의 물산을 실어내는 창구가 되면서 갑자기 커졌다.
거기에 1930년에 광주 송정리와 경상남도 삼랑진을 잇는 경전선이 이곳을 지나면서 벌교역이 생기고, 이에 따라 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교통이 발달하면서 벌교는 상업중심의 신흥도시로 번창하였고, 자연스럽게 유동인구가 많아졌다.
이 무렵부터 생긴 말이 ‘벌교에 가서 주먹자랑하지 말라’는 말이었다.
지금 벌교의 이미지는 단연 꼬막과 소설『태백산맥』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벌교에서 ‘소설태백산맥 문학기행길’을 걸으며 꼬막정식을 먹는다.
벌교꼬막이 유명한 것은 벌교 앞바다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감싸는 벌교 앞바다 여자만의 갯벌은 모래가 전혀 섞이지 않고 오염이 되지 않은
청정해안으로 꼬막의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꼬막은 요즘 같은 겨울철에 먹어야 가장 맛있다.
우리는 벌교천변을 따라 홍교로 향한다.
벌교천은 여자만에 가깝기 때문에 민물과 바닷물이 섞여 갯벌을 이룬다.
소화다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홍교가 자리잡고 있다.
벌교천 건너편에서는 부용산이 벌교읍을 감싸고 있다.
홍교를 건너지 않고 우리는 ‘김범우의 집’으로 간다.
골목을 굽이돌아 지대가 높아 전망이 좋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소설 속 김범우의 집은 원래 대지주였던 김씨 집안의 집이다.
대문 옆에 딸린 아래채에서 초등학생이던 작가가 친구인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곤 했다는 사실을 소설과 결부시켜 생각하니 흥미롭다.
이 집은 소설에서 품격 있고 양심적인 대지주 김사용의 집으로 묘사된다.
소설 속 김범우는 김사용의 아들이다. 김범우는 해방직후 좌우의 극심한 갈등과 불신 속에서 민족주의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 서서 사고하고 행동한다. 물론 당시 중도적인 입장을 가진 사람이 설 자리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이런 사람들이 남과 북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했던 안타까운 현실은 소설 속에서도 재현된다.
김범우의 집은 사랑채, 안채, 문간채 등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지만 사람이 살지 않아 쇠락해가고 있다.
한옥은 사람이 살지 않으면 금방 폐가가 된다. 주인이 살기 어렵다면 지방자치단체나 보성여관처럼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매입하거나 임대하여 게스트하우스나 민박 등의 용도로 사용하면 어떨까 싶다.
김범우의 집에서 나와 다시 홍교로 들어선다.
홍교는 소화다리 안쪽 벌교천 위에 놓인 교량으로 1728년(영조 4년)에 놓여졌다.
원래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이곳에 뗏목다리가 있었는데, 그 자리에 순천 선암사의 초안과 습성 두 선사가 지금의 홍교를 만들었다.
선암사에는 숙종 때 만들어진 유명한 승선교가 있으니, 벌교 홍교를 만드는데 선암사 승선교가 참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벌교(筏橋)라는 지명도 홍교가 놓이기 전에 있었던 뗏목다리에서 비롯되었다.
홍교는 세 칸의 기존 아치형 다리와 여섯 칸의 근래에 만든 아치형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세 칸의 벌교 홍교는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었다.
홍교에는 홍예마다 아래쪽 가운데에 이무기돌이 박혀 하천을 내려다보고 있다.
이무기는 재앙이나 잡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로 설치를 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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