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
현무전(玄武殿) 밖 어둠 속에 세 사람이 숨어 있었는데, 때때로 예리한 안광을 발하며 사방을 둘러보는 모습이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두 유령 같은 인영이 세 사람이 숨어 있는 곳으로 스며들더니 그들 중 하나가 낮게 속삭였다.
"당가 놈은 이미 깊이 잠들었고 두 계집은 등불 아래에서 바둑을 두고 있으니, 지금이 바로 좋은 기회요."
"그나저나 자전검(紫电剑)은 현무전 어디에 숨겨져 있을까? 찾는다고 장님처럼 더듬기만 하다가 빈손으로 돌아갈까 두렵소!"
"시간이 많지 않소. 다른 사람은 전혀 모르고 오직 현령궁 할망구만이 알고 있을 것이니, 우리는 그저 장님 코끼리 다리 만지듯 더듬어 찾는 수밖에 없고, 결과는 오직 운에 맡길 뿐이오."
"문주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을까?"
"먼 곳의 물로는 가까운 불을 끄기 어렵듯 문주께선 지금 탁천기(卓天奇)를 추적하시느라 바쁘기 때문에, 우리가 소식을 전해도 제때 전해 받으시기 어려울 것이오."
이윽고 다섯 명의 유령 같은 인영들은 현무전으로 날아갔다.
현무전(玄武殿)의 문은 열려 있었고 실내는 칠흑 같이 깜깜해 손을 뻗으면 손가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람들로 하여금 오싹한 기분이 들게 만들고 있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이 조심스럽게 대전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뼛속을 파고드는 한기가 온몸을 덮치자, 모골이 송연해진 그는 즉시 송진으로 만든 야행화절(夜行火折)을 꺼내들어 불을 붙였고, '착!' 하는 소리와 함께 세찬 불꽃이 일었다.
살펴보니 전각 안 신감(神龛) 위에 금박을 입힌 현무진군(玄武真君) 조각이 세워져 있었고, 양옆으로 늘어서서 거북이와 뱀을 비롯한 이십팔수(二十八宿)의 형상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워낙 정교하게 만들어져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는 듯 보였다.
곧이어 나머지 네 사람도 뒤를 따라 뛰어 들어왔다.
손에 야행화절을 든 사람의 얼굴색은 생강처럼 노랬는데 음랭한 눈빛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부가 살펴봤지만 전내에 설치된 금제(禁制)를 아직 발견하지 못했으니, 네 분도 조심해 관찰하면서 자전검이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알아봅시다."
그때 다른 흑의노인 하나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금박(金箔)을 입힌 현무진군(玄武真君) 조각상을 주시하더니 갑자기 소리쳤다.
"진군이 손에 들고 있는 검이 바로 자전검이 아닐까?"
이 말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든 네 사람은 천천히 신감 앞으로 다가갔고, 열 개의 시선이 일제히 현무진군의 손에 들린 검에 집중되었다.
흑의노인은 갑자기 몸을 날려 신감 위로 내려앉더니 현무진군이 들고 있는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갑자기 전내에 광풍이 일며 불빛이 순식간에 꺼지고 칠흑처럼 캄캄한 어둠 속에서 눈부신 자줏빛 무지개가 한 차례 번쩍였다.
누군가 경악하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자전(紫电)......"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색 섬광이 휘감듯 번쩍했고, 다섯 사람의 몸과 머리가 따로따로 분리되어 바닥에 나뒹굴었다.
눈부신 자줏빛 무지개도 즉시 사라지며 현무전은 다시 깊은 어둠에 휩싸였다.
거의 같은 시각, 현령궁(玄灵宫) 밖 어느 산길에 자의신룡(紫衣神龙) 탁천기(卓天奇)가 돌연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의 뒤에는 독목노자(独目老者)와 검을 등에 멘 회의인이 바짝 따르고 있었다.
갑자기 하늘을 찌를 듯한 고목 위에서 매처럼 빠른 속도로 쉰 살 안팎의 노도고(老道姑)가 떨어져 내리더니 탁천기를 향해 예를 올렸다.
"문주를 뵙습니다!"
탁천기가 입을 열었다.
"무슨 전갈이라도 있는 것이냐?"
노도고가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자전검은 현무전 안에 숨겨져 있는 건 확실한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합니다. 속하가 문주님을 안내하겠습니다."
탁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앞장서거라!"
현령궁의 노도고가 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탁천기 일행은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고 현령궁 앞에 이르렀다.
탁천기가 노도고에게 물었다.
"자전검이 현무전(玄武殿) 안 어디에 숨겨져 있는지 아직 모른단 말인가?"
노도파는 고개를 흔들었다.
"속하는 알지 못합니다."
탁천기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독목노자 등을 이끌고 현무전 안으로 들어섰는데, 뜻밖에도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는 것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좋지 않다. 누군가 먼저 선수를 친 게다!'
독목노인이 급히 야행화절에 불을 붙이자, 대전 안에 나뒹굴어져 있는 다섯 구의 끔찍한 시체가 비쳐지며 모두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탁천기의 등뒤에서 별안간 낮게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탁천기, 아쉽게도 한 발 늦었구려!"
탁천기가 고개를 돌려보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눈에서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며 마운신조 손도원(孙道元)이 어깨에 검을 메고 서 있었다.
탁천기는 손도원이 마운신조(摩云神爪)라는 별호로 무림에서 이름을 알린 이래, 지금까지 한 쌍의 신조(神爪) 이외의 무기를 들고 다닌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었는데, 그가 지금 어깨에 검을 메고 있다면 이는 틀림없이 자전검일 거란 생각이 들면서 안색이 급변했다.
"손 대협이 이미 신선이 되셨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여기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소이다."
손도원이 냉소를 터뜨렸다.
"염왕(阎王)께서 이 늙은이의 수명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고 환생시켜 주시면서, 이승에서 반드시 몇 가지 공덕을 쌓고 다시 오라 하셨소. 그렇지 않으면 이 늙은이의 두 손이 피에 잔뜩 젖어 있기 때문에, 18층 지옥에 처박혀 영원히 용서 받지 못할 거라 말씀하셨소."
탁천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손 대협께선 탁모가 안계(眼界)를 넓힐 수 있게끔 자전검을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요? "
손도원이 소리쳤다..
"그리 못 할 것도 없지만 자전검은 검집에서 나오면 반드시 피를 봐야 하는데, 흥, 당신들은 자전검의 일격을 감당할 자신이 있단 말인가?"
말 떨어지기 무섭게 전광석화처럼 검을 뽑으니 눈부신 자줏빛 무지개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탁천기가 안색이 급변해 크게 외쳤다.
"속히 물러나라!"
하지만 그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검풍이 휘몰아치며 자주빛 물결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곧바로 처절한 비명소리가 줄이어 들리며 독목노자를 비롯한 여섯 명의 회의인들 모두가 일검지하(一剑之下)에 시신으로 변하여 바닥에 뒹굴었다.
자의신룡 탁천기는 경황(惊慌) 중에서도 즉시 쌍장을 뻗쳐 벽공장(劈空掌)을 쏟아냈고, 산을 흔들어 댈 듯한 거센 장력이 자전검이 몰고 온 거센 물결을 저지하는 짧은 틈을 이용해 재빠르게 전각 문을 뚫고 공중으로 날아갔다.
손도원이,
"도망갈 수 있을까?"
하고 소리치며 뒤를 이어 일학충전(一鹤冲天), 하늘로 몸을 솟구치더니 높고 맑은 장소(长啸)를 발하며 탁천기의 뒤를 쫓았다.
탁천기의 신법은 기이할 정도로 빨랐지만, 손도원의 신법도 탁천기에게 뒤지지 않는 듯 전후 10여 장 거리를 계속 유지한 채 뒤를 쫓았다.
현령궁을 빠져나온 후에도 손도원이 끈질기게 따라붙는 것을 깨달은 탁천기는 속으로 매우 분노해 몸을 돌려 맞닥뜨리고 싶었지만, 피와 살로 만들어진 몸뚱이로는 아무리 높은 무공을 발휘해도 자전검의 예리함은 이겨낼 수 없다는 것을 상기하고, 경공의 수위를 더욱 높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현령궁 밖 어느 산길에서 백의인(白衣人)과 염윤(阎尹)이 모습을 숨긴 채 두 사람이 앞뒤로 달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백의인이 입을 열었다.
"손에 자전검을 든 사람은 마운신조 손도원처럼 보이는군."
염윤이 대답했다.
"문주님의 예리한 안목은 한 치도 틀림이 없습니다. 바로 손도원입니다."
백의인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우리가 한 발 늦은 것 같소. 손도원의 종적을 놓치지 않게 어서 쫓아갑시다."
두 그림자가 공중을 가로질러 날아갔다.
사경(四更)이 거의 지날 무렵, 달은 지고 별도 드문드문해졌다.
객사 안에 다시 촛불이 켜지고 맥여란(麦如兰)과 엄미미(严薇薇)는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밖에서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어지러운 발소리와 함께 현령성모(玄灵圣母)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란, 아직 자지 않느냐?"
맥여란이 급히 뛰어나가더니 현령성모(玄灵圣母)와 스무 명 남짓한 동문들이 와 있는 것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당 공자께서 요즘 하룻밤도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고 피곤함이 극에 달하신 것 같아 저희 둘이 번갈아 가며 밖을 지키고 있습니다만, 당 공자를 깨워야 할 일이 있으신지요?"
현령성모의 안색이 숙연해졌다.
"삼경 무렵 자의신룡(紫衣神龙) 탁천기(卓天奇)와 백의흉사(白衣凶邪)가 본문의 간세(奸细)를 앞세워 잇따라 현무전에 잠입해 자전검을 탈취하려 했는데, 다행히 마운신조 손도원 선배님이 한 발 앞서 나타나셔서 자전검으로 적을 물리친 다음, 탁천기와 백의흉사를 추격하러 떠나면서 서찰 한 통을 남기셨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몽주가 이미 빠른 걸음으로 방을 나서고 있었다.
"손 노선배님이 이미 가버리셨단 말입니까? 한 번 뵙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는데 안타깝습니다."
현령성모는 손도원이 남긴 서찰을 꺼내 당몽주에게 건넸다.
당몽주는 받아들고 대충 훑어보더니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손 선배님은 실로 성정(性情)이 올곧고 도의(道义)를 행함에 변함이 없으시니, 현령궁이 누란지위(累卵之危)에 처해 있더라도 성모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리고 소생이 주제넘게 나서서, 해가 뜰 무렵 관병(官兵) 일개 부대가 현령궁을 지키게끔 미리 조처했으니, 강호의 어떤 고수라 해도 감히 조정에 맞서려고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현령성모는 합장을 하며 사례했다.
"그렇다면 노신은 진정 안심이 되는군요."
날이 밝자 관병(官兵)은 이미 현령궁 밖에 주둔을 완료했고, 당몽주(唐梦周)는 맥여란과 엄미미 두 여인과 네 명의 종복을 거느리고 전지(滇池)의 수면을 가르는 배 위에 있었다.
흰 돛을 밀어주는 부드러운 바람과 햇빛에 빛나는 하얀 모래알이 구르는 소리, 끝없이 펼쳐진 만경창파의 호숫물, 이 모든 정경은 사람들을 저도 모르게 취한 듯 시정화의(诗情画意)에 빠져들게 만들고 있었다.
맥, 엄 두 여인은 인피면구을 착용하여 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촌부의 용속함으로 역용하고 있었다.
당몽주가 손에 술잔을 들고 창밖의 경치에 넋을 잃은 듯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맥여란이 탄식하듯 입을 열었다.
"배에 탄 후부터 계속 말이 없으시니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 걸까요?"
엄미미가 애교스럽게 웃으며 당몽주가 들으라는 듯 소리를 높였다.
"백월하(柏月霞) 낭자를 생각하고 계신 거겠지!"
당몽주가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백 아가씨를 구하는 일이 급박하긴 하지만 누가 납치했는지도 모르니 서두른다고 될 일은 아니오. 백 아가씨는 요절할 상이 아니므로 일시 흉함은 있을지라도 곧 길함으로 바뀔 것이니, 우리는 스스로 마음을 어지럽힐 필요가 없소. 지금 코앞에 닥친 일들 중 첫째는 삼번(三藩)을 압박하여 그들이 지닌 반역의 마음을 거두게 하는 것이오. 그리함으로써 흉사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만든 후, 하나하나 개별적으로 다스리면 무림은 다시 맑은 날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엄미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어떻게 삼번을 제지할 수 있을까요? 제 생각에 전번(滇藩=운남)의 왕은 천성적으로 야심이 크고 영민하며 용맹스러운데, 비록 당장은 노골적으로 반역지심을 드러내지 않고 충성을 다하는 척하고 있지만, 암암리에 병마(兵马)를 증강하여 군사력을 강화하는 한편 강호(江湖)의 고인(高人)들을 휘하에 모으고 있으니, 훗날 변고가 생기면 반드시 전번이 주도할 것 같아요."
당몽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지극히 옳은 말이오!"
맥여란이 물었다.
"그럼 전번을 어떻게 제지해야 할까요?"
당몽주가 대답했다.
"기회를 봐서 행동하겠지만, 내가 그들을 찾지 않더라도 그들이 스스로 나를 찾아올 것이오."
배 기슭에 정박하자 당몽주는 한 명의 청의(青衣) 시종을 데리고 배에서 내려 대관루(大观楼)를 향해 걸어갔다.
전지(滇池)를 마주하고 있는 대관루는 곤명성(昆明城)에서 가깝고, 주변에 꽃과 나무가 무성하고 호수와 산의 경치를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호수는 맑고 푸르며 수양버들이 길게 늘어져 있었고, 정자와 누각들은 여기저기 어우러져 있었으며, 햇살에 반짝이는 물결과 수면에 비친 다리의 그림자... 누각의 붉은 난간 너머로 펼쳐진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치는 마치 이곳이 강남의 어느 명승지가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당몽주가 표연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대관루 앞으로 다가가더니, 천하제일장련(天下第一长联) 또는 해내제일련(海内第一联)로 불리며 명성이 자자한 대관루장련(大观楼长联)을 응시하며 입으로 읊조리기 시작했다.
五百里滇池,奔来眼底,披襟岸帻,喜茫茫空阔无边。
看东骥神骏,西翥灵仪,北走蜿蜒,南翔缟素。
高人韵士,何妨选胜登临,趁蟹屿螺洲,梳裹就风鬟雾鬓;
更萍天苇地,点缀些翠羽丹霞,莫辜负四围香稻,万顷晴沙,
九夏芙蓉,三春杨柳;
数千年往事,注到心头,把洒临虚,叹滚滚英雄谁在?
想汉习接航,唐标铁柱,宋挥玉斧,元跨革囊,
伟烈丰功,费尽移山心力,
尽珠帘画栋,暮雨朝云,使断碣残碑,都付与苍烟落照,
只赢得几杆疎钟,半江渔火,两行秋雁,一枕青霜。
<오백 리 전지(滇池)가 눈앞에 펼쳐지니 옷깃을 풀어헤치고 머리의 관마저 벗어던진 후,
끝없이 펼쳐진 푸른 물결을 바라보니 치솟는 기쁜 마음 주체할 수 없구나!
동쪽(金马山)에서 준마(骏马)가 달려 나가고, 서쪽(碧鸡山)에선 봉황(凤凰)이 날아오르며,
북쪽(蛇山)에는 영험한 뱀이 구불거리고, 남쪽 끝(鹤山)에서는 백학(白鹤)이 비상하는구나!
좋은 날 높은 누각에 오르니 발 아래로 게가 기어가는 듯한 작은 섬들과 소라 같은 모래톱이 내려다 보이고,
옅은 안개 속의 푸른 나무와 수양버들은 부드러운 바람에 소녀가 머리를 빗는 듯 한들거리는구나!
수면 가득한 수초와 우거진 갈대숲, 그 사이로 점점이 보이는 물총새의 날갯짓 너머로 불타는 저녁 노을,
전지를 감싼 황금빛 벌판의 벼 향기와 햇살이 내려앉는 만경 백사장, 한여름의 우아한 연꽃과 봄날의 휘늘어진 버드나무를 기억하라!
수천 년 옛일이 마음속에서 솟아올라 술잔을 들고 빈 하늘을 바라보며 탄식하니,
굽이쳐 흘러온 역사의 수많은 영웅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한(汉)의 습루선(习楼船)과 당(唐)의 철주(铁柱), 그리고 송(宋)의 옥부(玉斧)와 원(元)의 혁낭(革囊),
산이라도 옮길 듯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이룩했던 제왕의 위대한 업적은 더이상 찾을 수 없도다!
웅장함과 화려함을 뽐내던 구중궁궐도 저녁 비와 아침 구름보다 못하여 사라졌고,
허무한 공적을 노래하던 비석들은 부서지고 깨진 채 푸른 안개와 석양 아래 누워 있구나!
남은 것은 드문드문 울리는 종소리와 강 위를 비추는 어부의 불빛,
그리고 두 줄로 날아가는 가을 기러기와 귀밑에 내려앉는 맑은 서리뿐이로다!">
만균(万钧)의 필력(笔力)으로 쓴 무게 있고 웅위(雄伟)한 시였다.
당몽주는 의미를 거듭 되새기며 찬탄을 금하지 못했다.
"'奔来眼底' 네 글자만 봐도 경지가 남다르게 깊고 절묘하여 명사(名士)의 필치임이 분명하다!"
그때 갑자기 한 중년의 거지가 다가와 손을 내밀며 구걸을 하는데 걱정이 많은 듯 얼굴 표정이 어두웠다.
당몽주가 품에서 은자 부스러기를 꺼내 거지에게 주려는데, 거지의 내밀은 손바닥에 아주 작은 종이 두루마리가 놓인 모습이 언뜻 눈에 들어오자, 은자 조각을 거지의 손에 쥐어줌과 동시에 재빨리 종이를 집었다.
중년 거지는 허리를 굽혀 감사의 인사를 하며 당몽주에게만 들릴 수 있는 낮은 음성으로,
"남쪽으로 약 5리쯤 가면 있는 연자교(燕子桥)에서 이 거지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몸을 돌려 떠났다.
당몽주는 태연한 표정으로 천천히 걸어 대관루(大观楼)를 떠나 인적이 없는 곳에서 종이 두루마리를 펼쳐보고는 얼굴색이 급변했다.
그는 뒤를 따르는 하인에게 배로 돌아가라고 이른 다음 혼자 연자교로 향했다.
그 중년거지는 다리 끝 부분에 주저앉아 술 주전자를 기울이며 홀로 유유자적하고 있었는데, 당몽주가 오는 것을 보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몽주가 즉시 말을 꺼냈다.
"사공(司空) 선배님이 어떻게 흉사의 수중에 떨어졌는지 좀 더 자세히 말해 주실 수 있소이까?"
중년거지가 대답했다.
"사공 장로께서 전번왕저(滇藩王邸)에 잠입했을 때, 전번(滇藩)과 진번(晋藩) 그리고 월번(粤藩)이 밀약을 맺고 모든 관서(官署)가 쉬는 정월 초하루에 군사를 동원해 반란을 일으키고, 강호 고수들을 앞장세워 관원들을 죽이고 관아(官衙)를 점거한다는 말을 우연히 들었습니다."
당몽주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냉소적으로 말했다.
"삼번(三藩)은 원래 각자 도모하는 바가 달라 함께 가기가 쉽지 않을 텐데... 진월(晋粤) 이번(二藩)이 전번(滇藩)의 명령을 쉽게 따를 리 없을 거란 얘기입니다."
중년거지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진월 이번(二藩)은 전번에게 약점을 잡혀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당몽주가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원래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중년거지가 말을 이었다.
"사공 장로께서 그 자리를 떠날 때 부주의로 행적이 드러났지만 장로께서는 깨닫지 못하셨고, 결국 흉사들에게 흑룡관(黑龙观)으로 유인되어 사로잡힌 것입니다."
당몽주는 놀랍고 의아해,
"귀하는 어찌 그런 내막을 잘 아시오? 게다가 소생과 사공 선배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안 것입니까?"
라고 물었다.
중년거지는 당몽주의 의심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즉시 대답했다.
"본문의 제자들 여럿이 이미 전번부(滇藩府)와 번왕저(藩王邸)에 침투해 암약하고 있고, 사실 사공 장로께서 번저(滇邸)에 잠입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으며, 이 거지는 본문의 고수인 용형팔장(龙形八掌) 금대덕(金大德)의 지시로 공자께 도움을 청하러 찾아온 것입니다."
당몽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사공 선배님은 아직 흑룡관(黑龙观) 안에 계신가요?"
하고 물었다.
중년거지가 대답했다.
"그 노인네는 흑룡담(黑龙潭) 안의 수뢰(水牢)에 갇혀 있는데, 전번왕은 그들의 밀약이 이미 누설된 것은 모른 채 개방(丐帮)이 그의 명령을 따르게 하라고 사공 장로에게 강요하고 있고, 그 노인네는 짐짓 말을 들을 듯 가장하며 시간을 끌고 있기 때문에 아직 몸도 상한 곳은 없다고 합니다."
당몽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당장 위급한 상황은 아니라니, 이따 밤이 되면 소생이 번저(藩邸)에 들어가 보겠소이다."
중년거지는 그 말에 안색이 크게 변했다.
"지금 번저의 경비는 더욱 삼엄해졌고 고수들이 구름처럼 몰려 있으니 공자가 잠입하면 ......"
"흉(凶)이 많고 길(吉)이 적다, 그런 말이시오?"
당몽주는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괜찮을 겁니다. 귀하는 이미 개방의 제자들이 다수 왕저(王邸)에 잠입해 활동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잠입해 있는 제자들들 중 저와 체격이 비슷한 사람 하나를 골라 제게 보내주시오. 제가 그 사람 모습으로 역용을 하고 잠입하면, 어목혼주(鱼目混珠=물고기 눈알과 진주가 혼동됨)이듯 쉽게 발각되지 않을 것이외다."
중년거지는 그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말했다.
"공자께서는 어디서 저를 기다리시겠습니까!"
당몽주가 대답했다.
"저는 태순상(泰顺祥) 포장(布庄=포목점)에 손님으로 가장하고 묵고 있는데, 그렇다고 정문으로 들어오지는 마시오."
중년거지는 명을 받고 바람처럼 빠른 걸음으로 달려갔다.
당몽주가 태순상포장(泰顺祥布庄)으로 돌아와 안으로 들어서자, 맥여란, 엄미미 두 여인 맞이하여 내실로 안내하였다.
그가 그녀들과 무언가를 은밀히 상의하고 있는데, 갑자기 하인이 달려와 고했다.
"번저(藩邸)의 양송령(杨松龄) 부통령(副统领)께서 오셨습니다."
당몽주가 낮은 음성으로 하인에게 지시했다.
"개방(丐帮) 제자가 나를 찾아 오면 밀실에서 나를 기다리게 하라!"
당몽주가 내실을 나와 전청(前厅)으로 들어서니 호랑이 등에 곰 허리를 한 우람한 체격의 금포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몽주가 반갑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양(杨) 부통령은 역시 이목이 영통(灵通)하십니다. 제가 이곳에 온 것을 어찌 아셨습니까?"
양송령(杨松龄)이 눈썹을 크게 펴고 웃으며 말했다.
"경중(京中)에서 작별한 지 어느덧 일 년이 지났는데, 공자의 풍채는 전보다 더욱 뛰어나니 부러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형제가 한가로이 거리에서 물건을 사다가 공자께서 이곳 포장(布庄)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우연히 보았습니다만, 늙어서 눈이 침침해진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워 감히 아는 체를 즉시 하지 못하고, 나중 포목점 점원에게 물어 보니 과연 공자였습니다."
이어서 이것저것 안부를 묻는데 친절함이 매우 극진했다.
당몽주가 웃으며 말했다.
"양 부통령께는 숨길 수 있는 게 없군요. 사실 제가 기남(冀南=河北省 남부 지역)에서 홍분지기(红粉知己)를 사귀게 되어 일단 혼약을 맺었고, 후에 집안 어른들의 윤허를 받아 첩(妾)으로 맞아들이려 합니다."
양송령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공자의 높은 안목으로 짐작건대 부인께선 필시 용속지분(庸俗脂粉=평범한 여인)이 아닌 국색천향(国色天香)임이 분명할 텐데, 대체 어느 댁의 천금(千金)인지 궁금합니다."
당몽주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강호(江湖)에 몸 담고 있는 사람으로, 용모나 집안은 특별히 언급할 것도 없습니다."
양송령이 정색하며 입을 열었다.
"강호에도 절세 미인들이 많지 않습니까? 내일 정오에 형제는 한사(寒舍)에 환영의 자리를 마련하고, 가마를 보내 공자와 부인을 맞이하고자 하오니 부디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당몽주가 대답했다.
"공경하는 마음으로 명을 따르겠으나 지나친 폐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양송령은 계속하여 한담(闲淡)을 이어갔지만 현령궁(玄灵宫)에 관한 일은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당몽주는 전번부(滇藩府)의 이목이 워낙 밝기 때문에 양송령이 모를 리가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지만, 그가 묻지 않는 이상 자신도 일체 언급을 삼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얼마 후 양송령은 일어나 작별을 고했고, 당몽주는 점포 밖으로 배웅을 나갔다가 곧바로 내실로 들어왔다.
맥여란이 문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당몽주를 보자마자 입을 열었다.
"개방 제자가 이미 도착하여 밀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당몽주가 급히 밀실로 들어가니 중년거지와 젊은 거지 한 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사(大事)가 걸린 일이므로 당몽주는 인사치레를 생략하고 즉시 젊은 거지에게 번저의 상황을 물었다.
젊은 거지는 즉시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소인 이통(李通)이 번왕저에서 일 년을 지내며 그린 그림으로, 내부를 매우 상세하게 묘사해 작은 물건 하나까지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당몽주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곤 이통이 번저에서 어떻게 일하고 생활하는지 물었고, 이통은 상세하게 설명했다.
당몽주가 거울을 보며 얼굴을 역용하기 시작하니 반 시진이 경과할 무렵 그는 영락없는 이통의 용모로 변했고, 또한 이통의 의복과 신발을 착용한 후 말투마저 흉내 내니, 그 닮은 모습은 정말 신묘하기 그지없었다.
이경(二更)을 알리는 경고(更鼓)가 울리자, 당몽주는 술을 많이 마셔 얼근하게 취한 모습으로 점포의 뒷문으로 나오더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듯 비틀거리며 번저(藩邸)를 향해 걸어갔다.
당몽주는 만취한 척하며 문을 지키는 호위들의 눈을 속이고 번저로 들어갔고, 계속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이통이 거주하는 가옥으로 향했다.
(18-2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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