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도교 및 기타 신앙
* 신화적 우주관 /天地관념
<金石文>
1)天王 /地神 /千秋
(天王地神塚 ;금석문1권 p.105)
2) 千秋萬歲永固 <(무덤이) 천추 만세토록 영구히 튼튼하소서.>
保固乾坤相畢 <(무덤이) 하늘과 땅처럼 튼튼히 보존되소서.>
(千秋塚塼銘文 ;금석문1권 p.143)
<日本六國史>
3) 三年春三月 新羅王子天日槍來歸焉 將來物 羽太玉一箇 足高玉一箇 鵜鹿鹿赤石玉一箇 出石小刀一口 出모(木+牟)一枝 日鏡一面 熊神籬一具 幷七物 則藏于但馬國 常爲神物也 [一云 初天日槍 乘艇泊于播磨國 在於육(宀+六)粟邑 是天皇遣三輪君祖大友主 與倭直祖長尾市於播磨 而問天日槍曰 汝也誰人 且何國人也 天日槍對曰 僕新羅國主之子也 然聞日本國有聖皇 則以己國授弟知古而化歸之 仍貢獻物 葉細珠 足高珠 鵜鹿鹿赤石珠 出石刀子 出石槍 日鏡 熊神籬 謄狹淺大刀 幷八物. ··· 故天日槍娶但馬國出嶋人 太耳女麻多烏 生丹馬諸助也 諸助生但馬日楢杵 日楢杵生淸彦 淸彦生田道間守之]
(<日本書紀> 권6 垂仁天皇)
<3년 봄 3월, 신라 왕자 天日槍(<古事記>에는 天之日矛라 함)이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羽太玉 1개, 足高玉 1개, 鵜鹿鹿赤石玉 1개, 出石小刀 1자루, 出石鉾 1자루, 日鏡 1개, 熊神籬 1개 등 七物이었는데, 但馬國에 보관하여 항상 神物로 삼았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天日槍이 작은 배를 타고 와서 播磨國에 정박하여 육(宀+六)粟國에 있었다. 그때 천황이 三輪君의 시조 大友主와 倭直의 시조 長尾市를 播磨에 보내어 天日槍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天日槍이 ‘나는 신라 국왕인데, 日本國에 聖皇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知古에게 주고 귀화하였다’라고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葉細珠, 足高珠, 鵜鹿鹿赤石珠, 出石小刀, 出石槍, 日鏡, 熊神籬, 瞻狹淺大刀 등 8가지였다. ······ 그러므로 天日槍은 但馬國 出嶋의 사람 太耳의 딸 麻多烏와 결혼하여 但馬諸助를 낳았다. 諸助는 但馬日楢杵를 낳고, 日楢杵는 淸彦을 낳았으며, 淸彦은 田道間守를 낳았다.]
4) 一書曰 素戔鳴尊所行無狀 故諸神 科以千座置戶 而遂逐之 是時 素戔鳴尊 帥其子五十猛神 降到於新羅國 居曾尸茂梨之處 乃興言曰 此地吾不欲居 遂以埴土作舟 乘之東渡 到出雲國簸川上所在 鳥上之峰 時彼處有呑人大蛇 素戔鳴尊 乃以天蠅근(石+斤)之劒 斬彼大蛇 時斬蛇尾而刃缺 卽擘而視之 尾中有一神劒 素戔鳴尊曰 此不可以吾私用也 乃遣五世孫天之葺根神 上奉於天 此今所謂草薙劒矣 初五十猛神 天降之時 多將樹種而下 然不殖韓地 盡以持歸 遂始自筑紫 凡大八洲國之內 莫不播殖而成靑山焉 所以 稱五十猛命 爲有功之神 卽紀伊國所坐大神是也
(<日本書紀> 권1 神代 上)
<素戔鳴尊의 하는 짓이 매우 버릇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千座置戶의 벌을 내리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때 素戔鳴尊은 그의 아들 五十猛神을 데리고 新羅國에 내려가 曾尸茂梨(경주 혹은 춘천)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싶지 않다.’ 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出雲國 簸川가에 있는 鳥上峰에 도착했다. 그때 그곳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큰 뱀이 있었다. 素戔鳴尊이 天蠅근(石+斤)劍으로 그 큰 뱀을 베어 죽였다. 뱀의 꼬리를 베었을 때 칼날이 이지러졌으므로 꼬리를 쪼개어 보니 꼬리 가운데 한자루의 神靈스러운 말이 있었다. 素戔鳴尊이 ‘이것은 내가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다’하고는 五世孫 天之葺根神(천지즙근신)을 보내어 하늘에 바쳤다. 이것이 지금의 이른바 草薙劍이다. 처음에 五十猛神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나무의 種子를 많이 가지고 왔다. 그러나 韓地에는 심지않고 모두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筑紫(축자, 지금의 大阪)로부터 大八洲國(일본의 8개 큰 섬) 안에 심어 푸른 산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五十猛命을 일컬어 공이 있는 神이라 하는데, 紀伊國에 모셔진 신이 바로 이것이다.>
5) 一書曰 素戔鳴尊曰 韓鄕之嶋 是有金銀 若使吾兒所御之國 不有浮寶者 未是佳也 乃拔鬚髥散之 卽成杉 又拔散胸毛 是成檜 尻毛是成柀 眉毛是成楊樟 已而定其當用 乃稱之曰 杉及예(木+豫)樟 此兩樹者 可以爲浮寶 檜可以爲瑞宮之材 柀可以爲顯見蒼生奧津棄戶將臥之具 未須噉八十木種 皆能播生 于時 素戔鳴尊之子 號曰五十猛命 妹大屋津姬命 次柧津姬命 凡此三神 亦能分布木種 卽奉渡於紀伊國也 然後 素戔鳴尊 居熊成峰 而遂入於根國者矣 棄戶此云須多杯 柀 此云磨紀
(<日本書紀> 권1 神代 上)
<素戔鳴尊이 ‘韓鄕의 섬에는 金銀이 있다. 만약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좋지 않다’ 하고는 수염을 뽑아 뿌리니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서 뿌리니 이것이 전나무가 되었고 꽁무니의 털은 비자나무가 되었으며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의 쓰임새를 정하여 이르기를 ‘삼나무와 녹나무 이 두가지 나무는 배 만드는 데 쓸만하고, 전나무는 상서로운 궁전을 짓는 재목으로 쓰며, 비자나무는 천하 백성들이 장사지낼 때 죽은 이를 눕히는 도구로 쓸 만하다. 또 모름지기 먹을 수 있는 80종의 나무를 모두 심어라’ 하였다. 이때 素戔鳴尊의 아들 五十猛命과 그의 누이 大屋津姬命, 그 다음인 柧津姬命 등 무릇 3명의 神 역시 나무종자를 널리 퍼드릴 수 있었으므로 명을 받들어 紀伊國으로 건너갔다. 그 후 素戔鳴尊은 熊成峰에 살다가 마침내 根國으로 들어갔다. 棄戶는 우리말로 須多杯(すたへ)라 하고 彼는 磨紀(まき)라 한다.>
**神仙 관념 /도가
<金石文>
6)仙覓 (梅山里四神塚(狩獵塚) ;금석문1권 p.104)
*覓은 찾을 멱字. 5C말 정도.
7) 尙方作1)竟眞大好 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飢食棗 壽如金石兮.
(武寧王陵 出土 銅鏡銘 ;금석문1권 p.186)
<상방에서 거울을 만든 것이 진실로 좋아서 옛날 仙人들은 늙지 않았고(늙음을 알지 못했고) 목마르면 玉泉의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어도 金石같이 긴 생명을 누리셨도다.>
*무녕왕릉 현실 내부에서 출토되었는데, 후한대에 유행한 형식중의 하나인 方格規矩鏡을 본떴으나, 거기에 走獸文을 양각하여 독특한 鏡背文을 표현하고 있다. 이 명문에 등장하는 仙人, 玉泉, 食棗(대추 조) 등은 神仙사상을 표현하는 것으로 백제의 도가적 면모를 읽을 수 있게 한다.
8) 永平 12年銘 神仙畵象 漆盤 (평양 石巖里 王盱墓 출토 ;금석문1권 p.295)
*안쪽면 가장자리부분 가까운 곳에 神仙象이 그려져 있는데, 西王母를 묘사한 것으로 생각된다.
9) 尙方佳竟眞大好 上有仙人不知老 渴飮玉泉飢食棗 浮游天下敖四海 徘回名山采神草 壽如金石國之保 (外)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內)
(尙方佳竟 四神鏡 :평양 石巖里 194호분 출토. ;금석문1권 p.430)
<상방에서 만든 거울은 참으로 좋도다. 위로는 仙人이 있어 늙을 줄 모르고 목마르면 玉泉에서 물을 마시고 배고프면 대추를 먹으며, 천하를 유람하고 四海에 노닐며, 명산을 배회하며 神草를 캐도다. 금석과 같이 수를 누리고 나라를 보지하도다.(外)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內)>
*方格規矩四神鏡은 鏡背의 內區를 方格의 規矩文으로 나누고, 그 안에 細線의 표현으로 四神이나 禽獸를 배치한 형식이다. 그 중에는 鈕座 주위의 方格 내에 12支를 刻銘한 예도 있다. 內行花文鏡과 더불어 후한대에 크게 유행하였다. 위의 尙方佳竟 四神鏡에는 仙人, 不老, 玉泉, 棗, 神草 등 불로장생의 신선사상이 그대로 표출되어 있어 주목된다. 이와 유사하거나 동일한 구절의 내용을 지닌 四神鏡이 위의 평양 석암리 194호분외에도 대동강면 6호분, 정오동 1호분, 정오동 7호분, 정오동 10호분, 정백리 127호분(王光墓), 황해도 봉산군 송산리 1호분, 오야리 25호분 등에서 출토되었다. 神草가 芝草로 표현된 것도 있으며, 仙人이 山人으로 된 곳도 있으며, 東王父 西王母가 들어간 것도 있어, 중국 신선사상의 영향이 농후했음을 보여준다. 12支가 함께 새겨진 것도 많아 12지와 신선사상과의 연관성을 말해주는 듯하다.
10) 吾作明鏡 幽凍三商 周刻典祉 配像萬疆 天禽四守 銜持維□ 大吉興師 命長服者 敬奉賢良 曾年延壽 富貴昇始 壽如東王父西王母 子孫番昌
(吾作明鏡 四神鏡 :梧野里 19호분 출토, ;금석문1권 p.434)
<내가 맑은 거울을 만드니 강하게 단련하고 복을 비는 말을 새기고 만강함의 형상을 배치하니 天禽이 사방을 지키고 크게 길함이 일어나도다. 이를 지니는 사람은 현량함을 받들고, 해마다 수를 더하고 부귀가 커지니 수명은 東王父 西王母와 같이 장수하고 자손은 번창하리라.>
11) 上大山見仙人 食玉英飮澧泉 駕交龍乘浮雲 白虎引道上天 宜官秩 保子孫
(上大山 神獸鏡 :평양 石巖里 200호분 출토. ;금석문1권 p.443)
<위로 大山에 仙人을 보니 玉英을 먹고 澧泉을 마시며, 용을 타고 구름을 타며 白虎가 끌어 하늘에 오르도다. 官이 높아지고 자손을 보존하리라.>
12) 上大山見神人 食玉英飮澧泉 駕蜚龍乘浮雲 宜官秩兮 保子孫□□天
(梅原末治, 1924 ;後藤守一, 1925, ;금석문1권 p.443)
*仙人을 神人으로 표현한 점이 흥미롭다.
13) <전면>(2행) ···通三彳?兵殊□□辶?匡□ 配天統物 畵野經圻 積德 匡時濟難 應神靈命··· (3행) 派鯨津氏 映三山之闕 東拒開梧之境 南鄰□桂之··· 接黃龍駕朱蒙 ··· 承白武 仰··· (4행) 問 盡善其能名實兩濟 德位兼隆 地跨八夤 勳超三··· 巍蕩蕩不可得而稱者 ···我新 (5행) ···君靈源自夐 繼昌基於火官之后 峻構方隆 由是克枝載生英異 秺侯 祭天之胤 傳七葉 以··· (6행) ···焉 十五代祖 星漢王 降質圓穹 誕靈仙岳肇 臨對玉欄 始蔭祥林 如觀石紐坐金輿而··· (10행) ···□□□峯 而束幹 契半千 而誕命 居得一 以照惟幾於丹府 義符性興洞 精鑒··· (15행)···著 □□□而光 九列掌天府 以··· (16행)···感通天使 息其眚蘋 安然利涉··· <후면>(5행)···燒葬 卽以其月十日 火··· (6행)···妣···天皇大帝··· (13행)···卽入昻忘歸 射熊莫返 太子雞··· (14행)···丹靑洽於麟閣 竹帛毁於芸臺··· (19행)···欽風 丹甑屢出 黃□鎭空···雄赤烏呈灾 黃熊表崇 俄隨風燭忽··· (20행)···命凝眞 貴道賤身 欽味釋典 葬以積薪 ···滅粉骨鯨津 嗣王允恭 因心孝友罓···
(신라 문무왕릉비 ;금석문2권 p.125)
<전면; (2행)···하늘을 짝하여 사물을 잘 다스리고, 땅의 경계를 구분하며, 덕을 쌓아 ···시대의 어려움을 구제하고, 神에 응하여··· (3행)···鯨津氏를 파견하여, 三山(<삼국사기> 祭祀志에 大祀로 나오는 奈歷·骨火·穴禮의 三山인 듯)의 闕을 비추고, 東으로는 開梧의 지경을 막고, 南으로는 □桂의 □과 이웃하고, (북으로는) 黃龍을 맞아 朱蒙을 태우고, ···白武를 이어받아 ···을 우러르며··· (4행)···그 능한 바를 다 잘하여 이름과 실제가 다 이루어지고, 덕과 지위가 겸하여 융성해지니, 땅은 八方 먼 곳까지 결쳐 있고, 그 훈공은 三(韓)에 뛰어나, 그 높고 넓음을 다 일컬을 수가 없는 분이 우리 신(라)··· (5행)···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火官之后에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枝가 英異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秺侯 祭天之胤이 7대를 전하여 ···하였다. (6행)···15대조 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靈이 仙岳에서 나와, □□을 개창하여 玉欄을 대하니, 비로소 조상의 복이 상서로운 수풀처럼 많아 石紐를 보고 金輿에 앉아 ···하는 것 같았다.··· (10행)···□峯을 □하여 □幹하고, 5백년을 기약하여 큰 命을 내려주시니, 居하면 모두 ···함을 얻었고, ···비춤은 丹府에 거의 가까웠다. 義는 性에 부합하여 일어나고, 깊은 精은 ···을 살펴··· (15행)···빛나고, 九列은 天府를 관장하여··· (16행)···天使도 감통시켜 그 재앙을 그치게 하니, 편안하고 쉽게 건너···>
<후면; (5행)···燒葬(火葬)을 하라 하니, 그달 초열흘에 화장하여 ··· (6행)···天皇大帝께서··· (13행)···昻에 들어가서는 돌아감을 잊으시고, 熊을 맞추시고도 돌아가지 않으셨다. 太子 雞··· (14행)···丹靑은 麒麟閣에 흡족하고, 竹帛(서책)은 芸臺에서 닳고 헤어졌다.··· (19행)···風敎를 흠모하여(欽風), 丹甑이 여러번 나오고, 黃□이 하늘을 진호하였도다. ···赤烏가 재앙을 나타내고, 黃熊이 우러름을 표시하니, 갑자기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홀연히 ··· (20행)···참됨으로 응집하게 하시고, 道는 귀하게 몸은 천하게 여기셨네. 부처의 가르침(釋典)을 欽味하여, 장작을 쌓아 장사를 지내니··· 鯨津에 뼈가루를 날리셨네. 대를 이은 임금은 진실로 공손하여, 마음에서 우러난 효성과 우애가 ···>
*이 비의 건립연대는 신문왕 1년(681) 혹은 2년(682)으로 추정되며, 그 성격으로 陵碑 혹은 墓誌로 본다. <사기>나 <유사>에 문무왕 유언에 따라 봉분을 쓰지 않고 화장하여 동해에 산골하였다는 기사가 있어 능비로 보기에 어렵지만, 四天王寺 부근에서 화장하고 근처에 擬陵을 만든 것이거나, 문무왕이 사천왕사를 창립하였으므로 능비만을 절에 건립한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한편 이 비의 내용이 死者의 유덕을 기리고 있는 점, 형식상 찬자·書者가 명기된 점, 銘이 있다는 점, 井間이 있다는 점, 문무왕이 당에서 받은 관작명이 나열되어 있다는 점에서 墓誌로 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비명에서 통일신라 직후의 종교관념을 반영하는 구절이 많이 등장하고 있어 흥미롭다. 첫째, 5행의 火官은 중국 신화상 인물인 炎帝神農을 뜻하는 바 신라의 유래를 三皇五帝說과 결부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둘째, 秺侯(투후)는 한무제의 총애를 받았던 金日磾(B.C 134-86)를 말하는데, 흉노 休屠王의 태자로서 霍去病(곽거병)의 흉노 침략시 포로가 되었다. 그 뒤 莽何羅 亂 때 무제를 구한 공으로 투후에 봉해졌다. 그리고 休屠王이 金人을 만들어 祭天했다는 고사에 따라 한무제로부터 ‘金’姓을 하사받았고, 그 자손 7대가 內侍로 혁혁한 번영을 전승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5행의 秺侯 祭天之胤 傳七葉은 金氏왕실이 그 유래를 김일제와 연관시켜 이해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셋째, 仙岳, 玉欄, 丹府, 天府, 天使, 天皇大帝, 丹靑, 欽風, 丹甑(풍년에 나타나는 瑞物) 등 도가적인 용어가 많이 등장되어 있는 것 주목된다. 특히 風流를 欽慕한다(欽風)는 문맥의 구절은 화랑·國仙 혹은 소위 風流道와 관련되는 당시의 관념을 반영하는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天皇大帝는 당의 고종(649-683)이 674년(문무왕 14년)에 황제의 칭호를 天皇으로 고친 것과 관련지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보다는 중국 도가에서 말하는 북두칠성의 천황대제를 의미할 개연성이 짙다. 넷째, 장작을 쌓아 문무왕을 火葬하고 그 뼛가루를 鯨津(고래가 살 만한 깊은 바다 곧 동해바다)에 뿌리는 과정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어 당시 불교식 火葬法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14) 新羅僊人永」 郞鍊丹石臼」 (「永郞」銘 石臼 ;금석문2권 p.216)
<신라의 仙人 永郞이 鍊丹한 돌절구이다.>
*이것은 강원도 명주군 강동면 하시동리에 있는 절구로 삼국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소위 신라의 四仙주 하나인 永郞과 관련된 것이 흥미롭다.
15) 述郞徒」 南石行 (「述郞」銘 石片 ;금석문2권 p.216)
<述郞의 무리들이 남석으로 가다.>
*강원도 고성군 三日浦에 있는 石片으로, 통일전 신라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四仙 중의 하나인 述郞의 이름이 등장되어 있다.
16) 其詞曰, 紫極懸象 黃輿啓方 山河鎭列 區宇分張 東海之上 衆仙所藏 地居桃壑 界接扶桑 爰有我國 合爲一鄕 (聖德大王神鍾銘 ;금석문3 p.387)
<······그 詞에 이르되, 하늘에 천문이 걸리고 대지에 방위가 열렸으며, 산과 물이 나란히 자리잡고 천하가 나뉘어 뻗쳤다. 동해 가에 뭇 神仙이 숨은 곳, 땅은 복숭아 골짜기에 머물고 경계는 해뜨는 곳에 닿았다. 이에 우리나라가 합하여 한 고을이 되었다.······>
*일명 봉덕사종 혹은 에밀레종이라고도 하는 이 성덕대왕신종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고 중대 왕실과 국가의 번영을 기원하려는 목적에서 경덕왕 때 계획되었다가 혜공왕 7년(771)에 완성되었다. 이 鐘銘에는 당시 成典寺院의 실제 운영을 파악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 있다.
<三國史記>
17) 十二年 秋八月 雲起狼山 望之如樓閣 香氣郁然 久而不歇 王謂是必仙靈降遊 應是福地 從此後 禁人斬伐樹木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실성이사금)
<12년(413) 8월에 구름이 낭산(경주)에 일어났는데, 누각과 같이 보이고 향기가 매우 성하게 펴지며 오랫동안이나 없어지지 아니하였다. 왕은 군신들에게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에서 仙靈이 내려와서 노는 것이니 그 곳은 응당 복지일 것이다.’하고, 그 뒤부터는 누구나 그 곳에서 나무를 베지 않도록 금하였다.>
18) 九年 秋七月 大世仇柒二人適海 大世 奈勿王七世孫 伊飡冬臺之子也 資俊逸 少有方外志 與交遊僧淡水曰 在此新羅山谷之間 以終一生 則何異池魚籠鳥Ḁ不知滄海之浩大 山林之寬閑乎 吾將乘桴泛海 以至吳越 侵尋追師 訪道於名山 若凡骨可換 神仙可學 則飄然乘風於泬寥之表 此天下之奇遊壯觀也 子能從我乎 淡水不肯 大世退而求友 適遇仇柒者 耿介有奇節 遂與之遊南山之寺 忽風雨 落葉泛於庭潦 大世與仇柒言曰 吾有與君西遊之志 今各取一葉爲之舟 以觀其行之先後 俄而大世之葉在前 大世笑曰 吾其行乎 仇柒勃然曰 予亦南兒也 豈獨不能乎 大世知其可與 密言其志 仇柒曰 此吾願也 遂相與爲友 自南海乘舟而去 後不知其所往.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
<9년(587) 7월에 대세와 구칠 2명이 바다로 달아났다. ······ 내 장차 떼를 타고 넓은 바다로 떠서 오·월에 이르러 훌륭한 스승을 찾고 또 명산을 찾아 도를 닦으려 한다. 이렇게하여 만약 범인의 신세를 벗어나서 神仙의 도를 배울 것 같으면, 표연히 바람을 타고 저 훤한 하늘 밖으로 날아갈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천하의 기이한 유람이며 장관일 것이다. 그대는 능히 나의 뜻을 좇겠는가 ······>
19) 論曰 新羅朴氏昔氏 皆自卵生 金氏從天入金귀而降 或云乘金車 此尤詭怪 不可信 然世俗相傳 爲之實事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 以文翰之 任輔行 詣佑神館 見一堂設女仙像 館伴學士王보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 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乃핍海 지辰韓生子 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其 子王於何時 今但原厥初 在上者 其爲己也 儉 其爲人也寬 其設官也略 其行事也簡 以至誠事中國 梯航朝聘之使 相續不絶 常遣子弟 造朝而宿衛 入學而講習 于以襲盛賢之風化 革鴻荒之俗 爲禮義之邦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경순왕)
<논하건대, 신라의 박씨와 석씨는 모두 알에서 낳았다 하고, 김씨는 하늘에서 금궤에 넣어 내려보냈다 하고, 혹은 금차에 실어 보냈다고 하니 이는 더욱 괴이하여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세속이 서로 전하여 實事로 되고 말았다. 송나라의 政和년간에 우리(고려) 조정에서 상서 李資諒을 송나라로 파견하여 조공하게 되었다. 이 때 신 부식이 文翰의 소임을 맡고 수행하여 祐神館이란 곳에 가서 女仙의 像을 모신 一堂을 보았는데, 관반학사 王黼(왕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 등은 이를 아는지’ 하며 말을 이어, ‘옛날에 어떤 제왕의 집에 한 딸이 있었는데 남편이 없이 아이를 배어 사람들이 의심하는 바 되자, 곧 배를 타고 辰韓에 이르러서 아들을 낳았다. 그는 해동의 첫 임금이 되고, 帝女는 地仙이 되어 오래도록 仙桃山에 있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곧 그 像이다’라고 하였다. 나는 또 송나라의 사신 王襄이 지은 東神聖母祭文에 ‘어진 사람을 낳아 나라를 처음으로 세웠다’라는 구절을 보았는데, 이 동신이 곧 仙桃山神의 성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아들이 왕이 되었다는 것이 어느 때의 일인지 알지 못하겠다. 지금 다만 그 古事를 생각하여 보면 왕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를 위함에는 검소하고, 남을 위하여는 관후하고, 관제를 마련함에는 간략하고, 행정을 함에는 간편하여야 하며, 지성으로써 중국을 섬겨 육로와 바다로 사신이 서로 이어 끊어지지 않으며, 항상 자제들을 파견하여 숙위하며, 국학에 입학시켜 강습하게 하였다. 이로써 성현의 풍속과 교화를 이어받고, 거친 풍속을 개혁하여 예의의 나라로 만들었다.>
20) 論曰 ······ 又憑王師之威靈 平百濟 高句麗 取其地郡縣之 可謂盛矣 而奉浮屠之法 不知其弊 至使閭里此其塔廟 齊民逃於緇褐 兵農浸小 而國家日衰 則幾何其不亂且亡也哉
(<삼국사기> 권12 「신라본기」 경순왕)
<논하건대 ······ 또한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그 지역의 군현을 취하였으니 가히 융성한 시대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신라는 불법을 숭상하여 그 폐해를 알지 못하고 마을에는 탑과 절이 벌여서고, 평민들은 절로 도망하여 중이 되어 군사와 농민은 점점 줄어들고 국가는 날로 쇠약하여 졌으니, 어찌 어지럽지 않고 또한 망하지 아니하랴.>
21) 三十五年 三月 穿也於宮南 引水二十餘里 四岸植以楊柳 水中築島 擬方丈仙山.
(<삼국사기> 권27 「백제본기」 무왕)
<35년(634) 3월에는 궁성의 남쪽에 연못을 파고 20여리에서 물을 이끌어 들이고 사방의 언덕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속에 섬을 만들었는데, 方丈仙山을 모방하였다.>
<三國遺事>
22) 又郡中有三山. 曰日山, 吳山, 浮山. 國家全盛之時, 各有神人居其上. 飛相往來. 朝夕不絶(<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남부여·前백제·북부여)
<또 郡中에는 日山·吳山·浮山이라고 하는 三山이 있는데, 백제 전성시대에 그 산위에 神人이 각각 있어 서로 朝夕으로 늘 날아다니었다 한다.>
<日本六國史>
23) 九十年春二月庚子朔 天皇命田道間守 遣常世國 令求非時香菓[香菓 此云 箇俱能未] 今謂橘是也. 明年春三月辛未朔壬午 田道間守 至自常世國 則제(齊+貝)物也 非時香菓八竿八縵焉 田道間守 於是 泣悲歎之曰 受命天朝 遠往絶域 萬里蹈浪 遙度弱水 是常世國 則神仙秘區 俗非所臻 是以往來之間自經十年 豈期獨凌峻瀾 更向本土乎 然賴聖帝之神靈 僅得還來 今天皇旣崩 不得復命 臣雖生之 亦何益矣 乃向天皇之陵 叫哭而自死之 群臣聞皆流淚也 田道間守 是三宅連之始祖也
(<日本書紀> 권6 垂仁天皇)
<90년 봄 2월 경자 초하루, 천황이 田道間守를 常世國에 보내어 사시사철 나는 香菓(우리말로 かくのみ라고 한다)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천황이 죽은) 다음 해 (景行천황 2년) 봄 3월 신미 초하루 임오 田道間守가 常世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것은 사시사철 나는 香菓 8竿 8縵이었다. 田道間守가 이에 슬피 울며 탄식하여 ‘天朝의 명을 받들어 먼 이국땅에 가서, 만리의 파도를 넘고 멀리 弱水(신선이 살고 있는 곳에 있다는 강)를 건넜다. 이 常世國은 神仙이 사는 신비한 구역으로서 俗人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로써 왕래하는 가운데 10년이 지났는데, 어찌 홀로 큰 파도를 넘어 다시 본토로 돌아올 줄을 기약했으리오. 그러나 聖帝의 神靈에 힘입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 천황이 이미 돌아가셔서 다녀왔음을 보고할 수 없으니 臣이 비록 살았다고 하나 또한 무엇이 보탬이 되리오’라 말하고, 천황의 능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뭇 신하들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 田道間守는 三宅連의 시조이다.>
*** 일상·월상 및 신화적 靈物
<金石文>
24)덕흥리고분 벽화설명문에 나타난 신화적 靈物 (덕흥리고분 묵서명 ;금석문1권 p.74)
ꠐ ꠐ天井ꠐ 北側 ꠐ ① 地軸一身兩頭 ꠐ
ꠐ ꠐ ꠐ ꠐ ② 天馬之象 ꠐ
ꠐ ꠐ ꠐ ꠐ ③ (宀+文)雀之象 ꠐ
前 ꠐ ꠐ ꠐ ④ 辟毒之象 ꠐ
ꠐ ꠐ ꠐ ꠐ ⑤ 博位之猗頭生四」耳⃞有[得]自明在於右 (2행 16자) ꠐ
ꠐ ꠐ ꠐ ꠐ ⑥ 賀鳥之象學道」不成背負藥⃞ (2행 12자) ꠐ
ꠐ ꠐ ꠐ ꠐ ⑦ 零陽之象學道」不成頭生七⃞ (2행 12자) ꠐ
ꠐ ꠐ ꠐ ꠐ ⑧ 喙遠之象 ꠐ
ꠐ ꠐ 西側 ꠐ ① 千秋之象 ꠐ
ꠐ ꠐ ꠐ ꠐ ② 萬歲之象 ꠐ
ꠐ ꠐ ꠐ ꠐ ③ 玉女之幡 ꠐ
ꠐ ꠐ ꠐ ꠐ ④ 玉女之槩 ꠐ
ꠐ ꠐ ꠐ ꠐ ⑤ 仙人持幢 ꠐ
室 ꠐ ꠐ 南側 ꠐ ① 仙人持蓮 ꠐ
ꠐ ꠐ ꠐ ꠐ ② 吉利之象 ꠐ
ꠐ ꠐ ꠐ ꠐ ③ 牽牛之象 ꠐ
ꠐ ꠐ ꠐ ꠐ ④ ⃞⃞之象 ꠐ
ꠐ ꠐ ꠐ ꠐ ⑤ 富貴之象 ꠐ
ꠐ ꠐ ꠐ ꠐ ⑥ 猩猩之象 ꠐ
ꠐ ꠐ ꠐ 東側 ꠐ ① 飛魚⃞象 ꠐ
ꠐ ꠐ ꠐ ꠐ ② 靑陽之鳥一」身兩頭 (2행 8자) ꠐ
ꠐ ꠐ ꠐ ꠐ ③ 陽 之鳥」履火而行 (2행 8자) ꠐ
ꠐ ꠐ 東 壁 ꠐ ① 此人爲中裏都督典知 ꠐ
ꠐ ꠐ ꠐ 七寶自然音樂自然 ꠐ
ꠐ ꠐ ꠐ 飮食有⃞之燔⃞⃞⃞⃞ (3행 27자) ꠐ
玄 ꠐ ꠐ ② 此人與七寶」俱生是故」儉喫知之 (3행 13자) ꠐ
ꠐ ꠐ ③ 此二人大廟作食人也 ꠐ
ꠐ ꠐ ꠐ ④ 此二人持刀侍[衛]七寶⃞時 ꠐ
ꠐ ꠐ ꠐ ⑤ 此二人持菓⃞食時 ꠐ
室 ꠐ 西 壁 ꠐ ① 此爲西薗中馬射戱人 ꠐ
ꠐ ꠐ ꠐ ② 射戱注記人 ꠐ
ꠐ 南 壁 ꠐ 此是⃞前廐養馬子 ꠐ
羨 ꠐ 西 壁 ꠐ 太歲在己酉二月二日辛酉成關此 戶大吉吏 ꠐ
道 ꠐ 東 壁 ꠐ 童⃞⃞端亓⃞道者⃞⃞⃞笑 ꠐ
<三國史記>
25) 二十一年 秋七月 夫沙郡進一角鹿 大有年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내물이사금)
<21년(376) 7월에 부사군에서 뿔이 한 개만 있는 사슴을 바쳤다. 이해에 큰 풍년이 들었다.>
26) 十年 夏六月 東陽獻六眼龜 腹下有文字 (<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10년(488) 6월에 동양에서 눈이 여섯 있는 거북을 왕에게 바쳤는데, 배 아래에 글자가 있었다.>
27) 十三年 夏六月 于山國歸服 歲以土宜爲貢 于山國 在溟州正東海島 或名鬱陵島 地方一百里 恃嶮不服 伊飡異斯夫爲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愚悍 難以威來 可以計服 乃多造木偶師子 分載戰船 抵其國海岸 誑告曰 汝若不服 則放此猛獸踏殺之 國人恐懼則降.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13년(512) ······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으면서도 사나우므로 이들을 위세로서는 굴복시키기 어려우나 좋은 계교로써 복속시킬 수 있다고 말하고, 곧 많은 木偶師子를 만들어서 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해안에 이르러서 거짓말로 알리기를, ‘너희들이 만약에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놓아 모조리 짓밟아 죽일 것이다’고 하니, 우산국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28) 論曰 臣聞之 古有女媧氏 非正是天子 佐伏羲理九州耳 至若呂雉武조 値幼弱之主 臨朝稱制 史書不得公然稱王 但書高皇后呂氏則天王后武氏者 以天言之 則陽剛而陰柔 以人言之 則男尊而女卑 豈可許로구出閨房 斷國家之政事乎 新羅扶起女子 處之王位 誠亂世之事 國之不亡 幸也 書云 牝雞之晨 易云 羸豕孚蹢躅 其可不爲之戒哉.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선덕왕)
<논하건대, 내가 듣기에는 옛날에 女媧氏가 있었으나, 그는 바로 천자는 아니고 伏羲로 보좌하여 九州를 다스렸을 따름이고, 呂雉·武曌(무조)와 같은 사람에 이르러서는 유약한 임금을 맞아 조정에 임하여 정사를 대신 행하였으나, 공공연하게 왕이라 칭하지는 아니하고 다만 고황후 여씨니, 측천황후 무씨니 하고 기록한다. 이를 천리로써 말한다면 곧 양은 강하고 음은 유하고, 사름으로써 말하면 곧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니, 어찌 가히 모구가 안방을 나와서 국가의 정사를 결단하랴. 신라가 여자를 세워 왕위에 처하게 한 것은 실로 난세의 일로서,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서경>에 말하기를, ‘암탉이 새벽 때를 알린다’하고, <역경>에 말하기를, ‘약한 돼지(암돼지)가 껑충거리며 날뛴다.’하였으니, 가히 경계할 일이 아니겠는가.
29) 二年 冬十月 牛首州獻白鹿 屈弗郡進白猪 一首二身八足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2년(655) 10월에 우두주(춘천)에서 흰 사슴을 바치고, 굴불군(안동)에서 흰 돼지를 바쳤는데, 머리는 하나, 몸은 둘, 발은 여덟이었다.>
30) 二十四年 秋九月 王田于箕山之野 得異人 兩腋有羽 登之朝 賜姓羽氏 俾尙王女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 유리명왕)
<24년(5) 9월에 왕은 箕山의 들로 사냥을 나갔다가 이상한 사람을 구하였는데, 양쪽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려 있었다. 왕은 그를 조정에 등용하고 羽씨 성을 주고 왕녀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三國遺事>
31) 又阿瑟羅州(今溟州) 東海中便風二日程 有于陵島(今作羽陵) 周廻二萬六千七百三十步 島夷恃其水深 驕傲不臣 王命伊喰朴伊宗 將兵討之 宗作木偶師子 載於大艦之上 威之云 不降則放此獸 島夷畏而降 賞伊宗爲州伯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智哲老王)
<또 阿瑟羅州 동해중에 順風 二日程에 于陵島(지금은 羽陵이라 쓴다)가 있으니 주위가 2만6천130步이다. 島夷가 그 海水의 깊음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하지 않거늘 왕이 이찬 朴伊宗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치게 하였다. 伊宗이 나무로 獅子를 만들어 큰 배에 싣고 威脅해 말하되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으리라 하니, 島夷가 두려워서 항복하였다. 이종을 포상하여 그 주의 장관을 삼았다.>
32) 又古記云. 昔一富人居光州北村. 有一女子. 姿容端正. 謂父曰. 每有一紫衣男到寢交婚. 父謂曰. 汝以長絲貫針刺其衣. 從之. 至明尋絲於北墻下. 針刺於大蚯蚓之腰. 因姙生一男. 年十五. 自稱甄萱.
(<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후백제 견훤)
<또 古記에는 옛날에 한 富者가 光州 北村에 살았는데 一女가 있어 모양이 단정하였다. 그의 부친에게 이르되 매양 紫色衣服을 입은 남자가 침실에 와서 交婚한다 하였다. 그의 부친이 ‘네가 긴 실을 바늘에 꿰어 그 옷에 찔러두라’고 하였다. 그리하였던 바 날이 밝아 실을 찾아보니 바늘이 북쪽 담아래의 큰 지렁이 허리에 찔려있었다. 그 후 임신이 되어 한 사내아이를 낳으니 나이 15세에 자칭 甄萱이라고 하였다.>
<中國正史朝鮮傳>
33) 風俗 刑政 衣服 略與高麗·百濟同. 每月旦相賀, 王說宴會, 班賚群官. 其日, 拜日月神主. 八月十五日說樂, 令官人射, 賞以馬布. (<北史> 列傳 신라)
<풍속·刑政·衣服은 대략 고구려·백제와 같다. 매달 초하룻날에는 서로 賀禮를 하는데, 왕은 연회를 베풀어 뭇 관원의 노고를 치하한다. 이날에는 日神과 月神에게 祭를 올린다. 8월 15일에는 풍악을 베풀고 官人들로 하여금 활을 쏘게 하여 말과 베를 상으로 준다.>
*** 귀면·벽사 관념
<三國遺事>
34) 浹旬忽夜中 王如平昔 來於女房曰 汝昔有諾 今無汝夫 可乎 女不輕諾 告於父母 父母曰 君王之敎 何以避之 以其女入於房 留御七日 常有五色雲覆屋 香氣滿室 七日後忽然無蹤 女因而有娠 月滿將産 天地振動 産得一男 名曰鼻荊 眞平大王聞其殊異 收養宮中 年至十五 授差執事 每夜逃去遠遊 王使勇士五十人守之 每飛過月城 西去荒川岸上(在京城西) 率鬼衆遊 勇士伏林中窺伺 鬼衆 聞諸寺曉鍾各散 郎亦歸矣 勇士以事來奏 王召鼻荊曰 汝領鬼遊 信乎 郎曰然 王曰 然則汝使鬼衆 成嬌於神元寺北渠 (一作 神衆寺 誤 一云荒川東深渠) 荊奉勅 使其徒鍊石 成大橋於一夜 故名鬼橋 王又問 鬼衆之中 有出現人間 輔朝政者乎 曰有吉達者 可輔國政 王曰與來 翌日荊與俱見 賜爵執事 果忠直無雙 時角干林宗無子 王勅爲嗣子 林宗命吉達 創樓門於興輪寺南 每夜去宿其門上 故名吉達門 一日吉達變狐而遁去 荊使鬼捉而殺之 故其衆聞鼻荊之名 怖畏而走 時人作詞曰 聖帝魂生子 鼻荊郎室亭 飛馳諸鬼衆 此處莫留停 鄕俗帖此詞以辟鬼
(<三國遺事> 권1 「紀異 제1」 桃花女와 鼻荊郞)
<그후 十日에 갑자기 밤중에 왕이 生時와 같이 여자의 방에 나타나 이르되 ‘네가 이전에 허락이 있었는데 지금 네 남편이 없으니 좋겠느냐’ 하였다. 여자가 가벼이 허락치 않고 부모에게 고하니, 가로되 ‘임금님의 말씀을 어찌 어기랴’ 하고 그 딸로 하여금 방에 들어가게 하였다. 七日동안 머무를 때 항상 오색 구름이 집을 덮고 향기가 방에 가득하더니 칠일후에 갑자기 왕의 자취가 없어졌다. 여자는 이내 태기가 있다가 달이 차서 해산하려 할 때에 천지가 진동하더니 한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름을 鼻荊이라 하였다. 진평대왕이 그 이상함을 듣고 궁중에 들여다가 길렀다. 나이 15세에 이르러 執事를 제수하니 밤마다 멀리 도망가서 노는지라, 왕이 勇士 50인을 시켜 지키게 하니 매양 月城을 날아 넘어 西로 荒川 언덕 위에 가서 鬼神의 무리를 데리고 노는 것을 용사가 수풀 속에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의 새벽 종소리를 듣고 각각 흩어지고 낭도 또한 돌아왔다. 군사가 사실대로 아뢰니 왕이 비형을 불러 이르되 ‘그러면 네가 귀신들을 부리어 神元寺 북쪽 개천에 다리를 놓으라’ 하였다. 비형이 칙명을 받들고 그 무리를 시켜서 돌을 다듬어 하룻밤에 큰 다리를 놓았으므로 그 다리를 鬼橋라 하였다. 왕이 또 묻되 ‘귀신들 가운데 인간에 출현하여 정사를 도울 자가 있느냐’ 가로되 ‘吉達이라는 자가 있으니 정사를 도울만 하나이다.’ 왕이 데리고 오라 하였다. 이튿날 비형이 데리고 와서 보이었다. 집사의 직을 주니 과연 충직함이 짝이 없었다. 이때에 각간 林宗이 아들이 없으므로 왕이 명하여 아들을 삼게 하였다. 임종이 길달을 시켜 흥륜사 남쪽에 門樓를 세우게 하고 밤마다 그 문위에 가서 자게 하였으므로 吉達門이라 하였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변하여 도망하니 비형이 귀신을 시켜 잡아 죽였다. 그러므로 그 무리가 비형의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하여 달아나니 그때 사람들이 글을 지어 이르되 ‘聖帝의 魂이 나으신 아들, 鼻荊의 집이 여기로구나. 날고뛰는 雜鬼들아 행여 이곳에 머물지말라’라 하였다. 鄕俗에 이글을 붙여서 귀신을 물리쳤다.>
35) 誓今已後. 見畵公之形容. 不入其門矣. 因此, 國人門巾占處容之形. 以僻邪進慶
(<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처용랑과 망해사)
<금후로는 맹세코 공의 형용을 그린 것만 보아도 그 문에 들어가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로 인하여 국인은 처용의 형상을 문에 붙여서 邪鬼를 물리치고 경사를 맞아들였다.>
36) 每見一大鬼率群小鬼來. 家中궤有盤肴 皆啖嘗之. 巫覡來祭. 則군聚而爭侮之. 難欲命撒. 而口不能言. 家親請法流寺僧亡名來轉經. 大鬼命小鬼. 以鐵槌打僧頭부地. 嘔血而死. 隔數日. 遣使邀本. 使還言, 本法師受我請將來矣. 衆鬼聞之. 皆失色. 小鬼曰. 法師至將不利. 避之何幸. 大鬼侮慢自若曰. 何害之有. 俄而有四方大力神, 皆屬金甲長戟. 來捉群鬼而縛去. 次有無數天神. 環拱而待. 須臾本至. 不待開經. 其疾乃治. 語通身解. 具設件事. 良圖因此篤信釋氏. 一生無怠. 塑成興輪寺吳堂主, 彌勒尊像, 佐佑善薩. 竝滿金畵其堂. 本嘗住金谷寺
(<三國遺事> 권5 「神呪 제6」 密本携邪)
<매양 보매 한 大鬼가 小鬼를 거느리고 와서 家中의 모든 음식물을 맛보는데 무당이 와서 祭祀지내면 귀신 무리가 모이어 다투어 悔辱하였다. 金良圖가 그 무리를 물러가도록 명령하려 하였으나 입이 붙어말을 할 수 없었다. 家親이 法流寺의 僧을 그의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청하여 경을 轉讀케 하니 대귀가 소귀를 명하여 철퇴로 중의 머리를 처 땅에 넘어뜨리니 피를 토하고 죽었다. 며칠 후에 사환을 보내어 密本을 맞아오게 하였다. 사환이 돌아와 말하되 밀본법사가 우리 청을 들어 장차 올 것이라 하니, 衆鬼가 듣고 모두 실색하였다. 小鬼가 말하되 ‘법사가 오면 피하는 것이 좋다’ 하였다. 大鬼는 悔慢自若하여 ‘무슨 해가 있으랴’ 하였다. 조금 있더니 사방에서 金甲과 長戟으로 무장한 大力神이 나타나 群鬼를 잡아 결박하여가고 다음엔 무수한 天神이 둘러서서 기다렸다. 얼마 안되어 밀본이 와서 경을 펴기도 전에 양도는 병이 나서 말이 통하고 몸도 풀리어 사실을 자세히 말하였다. 양도가 이로 인하여 부처를 독신하여 일생토록 게을리하지 아니하였다. 흥륜사 吳堂의 主佛인 彌勒尊像과 좌우보살을 塑成하고 아울어 금색으로 堂의 벽화를 그렸다. 밀본은 일찌기 金谷寺에 거주하였다.>
<日本六國史>
37) 一書曰 素戔鳴尊 欲幸奇稻田媛而乞之 脚摩乳 手摩乳 對曰 請先殺彼蛇 然後幸者宜也. 彼大蛇 每頭各有石松 兩脇有山 甚可畏矣 將何以殺之 素戔鳴尊 乃計釀毒酒以飮之 蛇醉以睡 素戔鳴尊 乃以蛇韓鋤之劒 斬頭斬腹 其斬尾之時 劒刃少缺 故裂尾而看 卽別有一劒焉. 名爲草薙劒 此劒昔在素戔鳴尊許 今在於尾張國也 其素戔鳴尊 斷蛇之劒 今在吉備神部許也 出雲簸之川上山是也. (<日本書紀> 권1 神代 上)
<어떤 책에서 말하였다. 素戔鳴尊이 奇稻田媛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脚摩乳와 手摩乳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石松이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山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素戔鳴尊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素戔鳴尊이 뱀을 韓鋤劍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그 꼬리를 잘랐을 때 칼날이 조금 이지러졌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가르고 들여다 보니 따로이 칼 한자루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草薙劍이라 하였다. 이 칼은 옛날에 素戔鳴尊이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尾張國에 있다. 소전명존이 뱀을 베었던 칼은 지금 吉備神部에 있는데 出雲國의 簸川(파천)가의 산이 바로 이곳이다.>
***)용 관념
<三國史記>
38) 六十年 秋九月 二龍見於金城井中 暴雷雨 震城南門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 거서간)
<60년(3) 9월에 두 龍이 금성의 우물 가운데 나타났는데, 우뢰가 울고 폭우가 쏟아지며 궁성의 남문에 벼락이 쳤다.>
39) 脫解尼師今立(一云吐解) 時年六十二 姓昔 妃阿孝夫人 脫解 本多婆那國所生也 其國在倭國東北一千里 初其國王娶女國王女爲妻 有娠七年 乃生大卵 王曰 人而生卵不祥也 宜棄之 其女不忍 以帛裹卵並寶物 置於櫝中 浮於海 任其所往 初至金官國海邊 金官人怪之不取 又至辰韓阿珍浦口 是始祖赫居世在位三十九年也 時海邊老母 以繩引繫海岸 開櫝見之 有一小兒在焉 其母取養之 及壯身長九尺 風神秀朗 智識過人 或曰 此兒不知姓氏 初櫝來時 有一鵲飛鳴而隨之 宜省鵲字 以昔爲氏 又解韞櫝而出 宜名脫解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탈해이사금)
<탈해이사금이 즉위하였다(57). (혹은 吐解라고도 한다.) 왕은 이때 나이 62세였는데 성은 昔씨요, 왕비는 아효부인이다. 탈해왕은 본래 다파나국(탐라국) 출생으로, 그 나라는 女國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아이를 밴 지 7년 만에 큰 알을 낳으므로, 왕은 말하기를, ‘사람으로서 알을 낳는다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니 마땅히 버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여자는 차마 버릴 수 없어서 비단으로 알을 싸고 보물과 함께 궤 속에 넣어 바다에 띄워 떠가는 대로 내버려 두게 하였다. 그런데 그 궤짝은 처음에는 금관국(김해 가야)의 해변에 이르렀는데, 금관국 사람들은 괴이하게 여겨 이를 거두지 않으므로, 궤짝은 다시 바다에 떠서 辰韓의 아진포(영일)에 이르렀는데, 이 때는 시조 혁거세가 재위한 지 39년(B.C 19)이었다. 그때 해변에 있던 한 노모가 이것을 보고 밧줄을 매어서 해안으로 이끌어 올려 놓고 궤짝을 열어보니 그 속에 한 어린아이가 있으므로, 그 노모는 이를 거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길렀는데, 아이는 자라서 키가 9척이나 되고 용모가 준수하고 성품이 너그럽고 지식이 남달리 뛰어났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 아이의 성씨를 알지 못하니, 처음 궤짝이 바다에 떠올 때 한 마리의 까치가 울면서 따라왔으므로 까지 鵲 자의 한쪽 부분인 새 鳥를 떼어 버리고 昔씨로써 성을 정하고, 또한 궤짝을 풀고 나왔으니 이름을 탈해로 정하는 것이 옳을 것이라’하여, 성명을 석탈해라고 하였다.>
40) 二十一年 夏四月 二龍見漢江.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기루왕)
<21년(97) 4월에 두 龍이 漢江에 나타났다.>
41) 五年 夏四月 震王宮門柱 黃龍自基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고이왕)
<5년(238) 4월에 왕궁의 문기둥이 진동하더니, 황룡이 그 문으로부터 날아갔다.>
42) 二十九年 秋九月 黑龍見漢江 須臾 雲霧晦冥 飛去 王薨.
(<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비유왕)
<29년(455) 9월에 검은 용이 한강에 나타나자 감깐 동안에 운무가 끼고 어두워졌는데, 용이 날아가자 왕이 돌아가셨다.>
43) 三年 五月 黑龍見熊津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문주왕)
<3년(477) 5월에 黑龍이 웅진에 나타났다.>
<三國遺事>
44) 第三十, 武王名璋. 母寡居. 築室於京師南池邊. 池龍交通而生. 小名薯童. 器量難測. 常掘薯蕷. 賣爲活業. 國人因以爲名
(<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무왕)
<제30대 무왕의 이름은 璋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南池邊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龍과 교통하여 장을 낳고 아명을 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薯蕷(서여;마)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국인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 귀신 관념
<三國史記>
45) 五年 秋八月 慕容廆來侵 至故國原 見西川王墓 使人發之 役者有暴死者 亦聞壙內有樂聲 恐有神乃引退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봉상왕)
<5년(296) 8월에 모용외가 침입하여 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능묘를 보고 사람을 시켜 파다가, 役夫 중에 폭사한 사람이 있고, 또한 광내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므로, 모용외는 귀신이 있는 것이라고 두려워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도망하였다.>
46) 八年 秋九月 鬼哭于烽山 客星犯月 冬十二月 雷 地震
(<삼국사기> 권17 「고구려본기」 봉상왕)
<8년(299) 9월에 귀신이 봉산에서 울고 객성이 달을 범하였다. 12월에 우뢰가 울고 지진이 일어났다.>
47)중국 민간도교·방사
<金石文>
낙2-7) 天帝黃神印 (天帝黃神印 封泥, ;금석문1권 p.355)
*평양지역에서 여러개 발견되었는데, 대개 모조품이고 1점만이 진품으로 인정된다. 이와 유사한 封泥가 <封泥攷略>에 소개되어 있는데, 「天帝之印」 「天閭四通」 「黃神越章」 「黃神」 「天帝煞鬼」 등의 예가 보인다. 이것들은 도교의 方士들이 사용한 것이라고 하는데, 낙랑지역에 도교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藤田亮策은 낙랑지역에 方士가 배치되어 있었거나 혹은 方士들과 문서를 왕복한 결과로 추측하였다.
48) 吾作明竟 幽凍三商 配像萬疆 統德序道 敬奉賢良 配刻典祀 百身擧樂 衆事主陽 福祿神明 富貴安樂 子孫番昌 擧□喜□1) 士至公卿 見師命長
(吾作明竟 神獸鏡 :평양 大同江面 3호분 출토, ;금석문1권 p.441)
<내가 맑은 거울을 만드니 강하게 단련하고 만강함의 형상을 배치하였다. (이 경을 지니면) 德을 다스리고 道를 펴서 현량함을 받들고, 典祀를 配刻하니 百身이 안락하고 많은 일이 陽으로 주관하고 福祿이 神明하여 부귀 안락하고 자손이 번창하며 벼슬이 공경에 이르고 장수하리라.>
*鈕를 둘러싸고 方格을 배치하거나 혹은 원을 둘렀으며, 鈕와 緣 사이에 龍虎 男女의 像(東王父 西王母), 神仙像 등을 배치한 것으로, 후한대의 신선사상이 가장 짙게 반영된 형식이다.
49)豈□門承鼎, 乃□兼□, 姻姬蟬聯, 雅度稟乎天姿, 詩禮聞於庭」訓, 加以講學請益, 休譽日新. 韜鈐遁甲之書, 風角鳥情之術, 莫不」硏幽, 洞奧精蹟, 探微方將, [步]天衢以高驤, 登太階而論道. 何知百」齡, 儵忽五福之驗, 無徵一代. 英靈九泉之悲, ······高墳岺岩, 望二室於雲端, 茂栢蕭」森, 俯三川於掌內. 將恐風移鬱島, 海變桑田, 式昭貞士之名, 用表」藤公之室. 乃爲銘曰.」 天之蒼蒼兮, 其色正耶. 人之悠悠兮, 其能久耶. 蠢玆萬類兮, 生老」病死, 悟彼百齡兮. 今也已矣. 生於氣兮, 立於空, 儵而見兮, 忽而終,」何賦命之飄索, 知造化之無窮.
(泉毖 墓誌銘 ;금석문1권 p.537)
<···인척이 우수한 태도를 연이었고, 天賦의 자질을 받았으니 시와 예가 정훈에 들리고, 아울러 강학을 더욱 힘쓰니 명예가 날로 새로워졌다. 六韜와 玉鈐(옥검)의 兵書와 遁甲의 書와 風角(바람을 보아 吉凶을 점치는 것), 鳥情(새로서 점치는 것)의 術에 대해서는 幽玄한 것까지 연마하고, 오묘한 것을 통찰하고, 괴기로운 일에 정통하여 작은 것을 찾아, 帝都에 올라가서 높은 지위에 오르고 三公의 位에 올라 道를 논하지 않음이 없었다. ······분토가 높아서 구름 끝에 두 개의 석실(崇山의 太室, 少室)을 바라보면, 무성한 잣나무와 고요한 숲이 보이고, 삼천(河, 洛, 伊水)이 손안같이 내려다 보인다. 장차 바람이 鬱島(울릉도?)를 옮기고, 바다가 桑田으로 변할까 두려워하여 곧은 선비의 이름을 삼가 밝힘으로서 등공의 실에 표하고자 하노라. 이에 (다음과 같은) 명을 지었노라. 하늘의 푸르고 푸르름이여 그 색깔은 바르구나. 사람의 한없음이여. 그 능력은 오래구나. 꿈틀거리는 이 萬類여. 生하면 老하고, 病들면 죽는 저 천수의 깨달음이여. 이제 끝났구나. 氣에서 나서 空으로 돌아가니, 문득 보였다가 갑자기 끝나니 어찌 타고난 운명이 회오리처럼 없어짐을 가지고 造化의 無窮함을 알겠는가.>
*泉毖(708-729)의 묘지명은 그의 父인 泉隱의 찬으로 되어 있는데, 22세에 요절한 아들을 기리는 글이다. 泉隱은 부가 천헌성, 조부가 천남생, 증조부가 연개소문이다. 이 글에서 당나라에서 살아가는 고구려인들의 도교적, 불교적 생활모습을 읽을 수 있다.
<三國遺事>
50) 第五十一, 眞聖女王. 臨朝有年. 乳母鳧好夫人, 與其夫魏弘匝干等三四寵臣, 擅權撓政. 盜賊蜂起. 國人患之. 乃作陁羅尼隱語, 書投路上. 王與權臣等得之. 謂曰此非王居仁, 誰作此文. 乃囚居仁於獄. 居仁作詩言斥于天. 天乃震其獄囚以免之. 詩曰. 燕丹泣血虹穿日. 鄒衍含悲夏落霜. 今我失途還似舊. 皇天何事不垂祥. 陁羅尼曰.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于于三阿干. 鳧伊裟婆言可. 說者云. 刹尼那帝者, 言女主也. 判尼判尼蘇判尼者, 言二蘇判也. 蘇判爵名. 于于三阿十也. 鳧伊者, 言鳧好也.
(<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진성여왕과 居陁知)
<제51대 진성여왕이 임금된 지 몇해만에 유모 鳧好(부호)부인과 그의 남편 魏弘匣干 등 三四 寵臣이 더불어 권세를 잡고 정사를 휘두르니, 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났다. 국인이 근심하여 다라니의 隱語를 지어 써서 路上에 던지었다. 왕과 권신들이 얻어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이 글을 지으랴 하고 거인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 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니 하늘이 그 옥에 벼락을 쳐서 면하게 하였다. 그 詩에 ‘燕丹의 피어린 눈물, 무지개가 해를 뚫고, 鄒衍의 먹음은 슬픔, 여름에도 서리를 나린다, 지금 이내 시름 그와 같도다, 아 皇天아 어찌해 아무 표시도 없는가’라 하였고, 다라니에는 ‘南無亡國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于于三阿干 鳧伊娑婆訶’라 하였다. 해설자가 말하기를 刹尼那帝는 女主를 지칭한 것이고 판니판니소판니는 두 蘇判을 말한 것이니 , 蘇判은 직명으로 우우사아간이었고, 鳧伊는 鳧好를 말함이다.>
<日本六國史>
51) 高麗學問僧等言 同學鞍作得志 以虎爲友學取其術 或使枯山變爲靑山 或使黃地變爲白水 種種奇術 不可殫究 又虎授其針曰 愼矣愼矣 勿令人知 以此治之 病無不愈 果如所言 治無不差 得志 와(忄+瓦)以其針隱置柱中 於後 虎折其柱 取針走去 高麗國 知得志欲歸之意 與毒殺之
(<日本書紀> 권24 皇極천황)
<4년(645) 여름 4월 무술 초하루, 고려에서 학문을 배우던 승려 등이 ‘같이 공부하던 鞍作得志가 호랑이와 친구가 되어 그 술법을 배웠습니다. 메마른 산을 푸른 산으로 만들기도 하고 혹은 누런 땅을 흰 물로 만들기도 하는 등 각종 기이한 술법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또 호랑이가 그에게 針을 주며 “삼가하고 삼가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하라. 이것으로 치료하면 낫지 않는 병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과연 말한 바와 같이 치료하면 낫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得志는 항상 그 針을 기둥 안에 숨겨놓았습니다. 후에 호랑이가 그 기둥을 부러뜨리고 그 針을 가지고 달아나 버렸습니다. 고려국은 得志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 마음이 있음을 알고 毒을 써서 죽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 四神圖
<金石文>
52) 靑盖作竟大毋傷 巧工刻之成文章 左龍右虎辟不羊 朱鳥玄武順陰陽 子孫備具居中央 長保二[親][樂]富昌 壽敝金石如侯王
(靑蓋作 四神鏡 :평양 정백리 2호분 출토. ;금석문1권 p.429)
<靑盖이 만든 거울은 흠이 없다. 공교로운 기예로 명각하니 훌륭하게 되었도다. 左龍右虎가 사악함을 물리치고 朱鳥玄武가 陰陽에 순응하도다. (이 경을 지니면) 자손들이 갖추어 중앙에 거주하고 양친을 잘 모시고 번창하여 금석같이 장수하며 후왕의 지위를 누리리라.>
*이와같이 左龍右虎辟不羊 朱鳥玄武順陰陽의 四神관념이 표현된 거울은 이곳 외에도 정도동 1호, 정오동 10호분, 정오동 11호분, 평양 석암리 등에서도 발견된다.
53) 孚氏作之竟誠淸□ 服之富貴壽命長 左龍右虎扶本□ 朱爵玄武赴陰陽 單于來臣至漢廷 子孫番息樂未央
(孚氏作 盤龍鏡 :傳 大同江面 土城里 출토. ;금석문1권 p.438)
<부씨가 만든 거울은 참으로 청명하도다. 이 경을 지닌 자는 부귀를 누리고 장수할 것이며, 좌룡·우호가 本을 붙들며, 주작·현무가 음양을 타도다. 선우가 칭신하고 漢의 조정에 올 것이며, 자손은 번창하고 즐거움은 다함이 없어라.>
54)新有善銅出丹陽 凍治銀錫淸而明 尙方御竟大毋傷 巧工刻之成文章 左龍右虎辟不羊 朱鳥玄武順陰陽 子孫備具居中央 長保二親樂富 壽敝金石如危王
(新有善銅 神獸鏡평양 부근 출토. <朝鮮古文化綜鑑>, ;금석문1권 p.444)
<新나라에는 좋은 동이 단양에서 나오니 은석과 섞어 청명하게 만들었도다. 상방이 만든 임금의 거울은 흠이 없고 공교로운 기예로 문장을 이루어 새겼도다. 左龍右虎가 해로움을 막고 朱鳥玄武가 음양에 순응하도다. 자손은 모든 것을 갖추어 중앙에 거주하고 양친을 모시고 부유안락하고 수는 금석과 같이 후왕이 되도록 누리리라.>
*** 노장자 사상
<金石文>
55) 禪師諱慧徹, 字體空, 俗姓朴氏, 京師人也. 其先少耽洙泗之迹, 長習老莊之言, 得喪不關於心, 名利全忘於世, 或憑高眺遠, 或染翰吟懷而已.
(大安寺 寂忍禪師塔碑 ;금석문3 p.41)
<선사의 이름은 혜철, 자는 체공, 속성은 朴氏이고 서울 사람이다. 그 선조는 젊어서는 공자의 발자취를 찾았고, 장년에는 老莊의 말을 익혔으며, 얻고 잃음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명리를 세상에서 떨쳐버려, 어떤 때는 높은데 올라 멀리 바라보고 어떤 때는 붓으로 회포를 읊을 따름이었다.>
*이 탑비는 경문왕 12년(872)에 경문왕의 윤지에 따라 세워졌는데, 현재 전남 곡성군 태안사 경내에 있다. 비문에는 동리산문의 개창자인 慧徹의 출가 후 화엄 및 경전 공부와 계율을 중시한 수행과정, 입당하여 西堂智藏의 선법을 얻고 귀국하여 동리산 태안사에서 산문을 이룩한 사적이 기록되어 있다. 태안사에 도량을 열자 문성왕이 우대하여 절의 사방에 幢을 세우게 하는 등 신라 하대 왕실의 후원 관계를 보여준다. 그런데 당시 유학을 배우다가 노장학으로 옮겨가는 것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어 흥미롭다.
56) 矧乎末法之世, 象敎紛紜, 罕契眞宗, 互持偏見, 如擘水求」月, 若搓繩繫風, 徒有勞於六情, 豈可得其至理. 其於衆生爲舍那, 舍那爲衆生, 衆生不知在舍那法界之中, 縱橫造業, 舍那亦不知衆生在苞含之內, 湛然常寂, 豈非迷耶.」 知此迷者, 大不迷矣. 知其迷者, 惟我禪師乎. 或謂此說爲濩落之言, 吁道經云, 上士聞道, 崇而奉之, 中士聞道, 如存若亡, 下士聞道, 撫掌而笑, 不笑不足, 以爲」道也, 此之謂矣.
(寶林寺 普照禪師塔碑 ;금석문3 p.56)
<하물며 말법 세상에서는 像敎가 분분하나 부처의 가르침에 맞는 것은 드물고, 서로 편벽된 견해를 가지고 있어 물을 치고 들어가 달을 구하는 것과 같고, 노끈을 비벼서 바람을 잡아 매려는 것과 같으니, 헛되이 육정을 수고롭게 한들 어찌 그 지극한 이치를 얻을 수 있으리오. 그것은 중생에게는 로사나불이 되고 로사나불에게는 중생이 되는 것인데 중생은 로사나불의 법계 가운데 있음을 알지 못하고 잠연하여 항상 고요하니 어찌 미혹되지 않으랴. 이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크게 미혹되지 아니한다. 그 미혹함을 아는 사람은 우리 선사뿐이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허황한 이야기라고 하지만, <道德經>에 이르기를, “上士는 도를 들으면 그것을 숭상하여 받들고 中士는 도를 들으면 간직하기도 하고 버리기도 한다. 下士는 도를 들으면 손바닥을 비비고 웃으며 웃지 아니하면 족히 도라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것을 말함이다.>
*전남 장흥군 보림사 경내에 있는 이 탑비는 왕명으로 헌강왕 10년(884)에 건립되었는데, 道義의 손제자 體澄에 의한 迦智山門 개창과 그에 대한 헌안왕 및 왕실 귀족의 후원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하대 도의에 의해 최초로 남종선이 전래되었을 때 남종선을 배척하였던 분위기를 전해주고 있다. 내용 중 보조선사의 공적을 칭송하는 논리로 노자 道德經의 구절을 인용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아울러 말법 관념이 이 때 짙게 나타남도 볼 수 있다. 또한 찬자인 김영은 이 비문 외에도 제천의 월광사 원랑선사탑비문도 지었는데, 유불도 三敎에 관한 사상을 두루 섭렵한 것으로 보여 당시 사상의 흐름을 엿보게 해준다.
57) 大師 諱審希 俗姓新金氏, 其先 任那王族 ······考盃相 道高莊老 志慕松喬 ······ 大師 天資惠悟 嶽降精靈 懸慈鏡於靈臺 掛戒珠於識宇
(鳳林寺 眞鏡大師塔碑 ;금석문3 p.214)
<대사의 이름은 심회요, 속성은 김씨이니, 그 선조는 임나의 왕족이다. ······ 아버지 배상은 道는 노장사상을 높였고, 뜻은 松喬(神仙으로 알려진 赤松子와 王之喬)를 흠모하였으며, ······ 대사는 타고난 자질로 지혜로이 깨닫고 산악이 精靈을 내려서, 자비의 거울을 靈臺에 걸고 계율의 구슬을 認識의 집에 걸었다.
*창원시 봉림사터에 있는 이 탑비는 용덕 4년(924)에 건립된 것으로, 찬자는 경명왕(박승영)이다. 김유신의 후손인 진경대사의 父 盃相이 노장사상에 심취하고 신선사사을 희구하였다는 구절과 精靈이라는 용어의 쓰임법이 주목된다.
<三國史記>
58) 二年 夏四月 唐使臣邢璹 以老子道德經等文書 獻優王 白虹貫日 所夫里郡河水變血.
(<삼국사기> 권9 「신라본기」 효성왕)
<4월에 당사 형숙이 <노자도덕경> 등 문서를 왕에게 바쳤다. 이 때 흰 무지개가 해를 꿰고 소부리군(부여)의 물빛이 핏빛으로 변하였다.>
59) 七年 春二月 王遣使如唐 請班曆 遣刑部尙書沈叔安 策王爲上柱國遼東郡公高句麗國王 命道士 以天尊像及道法 住爲之講老子 王及國人聽之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7년(624) 2월에 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달력을 나누어 줄 것을 청하였다. 당고조는 형부상서 심숙안을 파견하여 왕을 책봉하여 상주국 요동군공 고구려왕으로 삼고, 道士에게 명하여 天尊像 및 도법을 가져와서 老子를 강론하게 하므로, 왕과 나라 사람들이 이를 청강하였다.>
60) 八年 王遣人入唐 求學佛老敎法 帝許之
(<삼국사기> 권20 「고구려본기」 영류왕)
<8년(625)에 왕은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의 가르치는 법을 배우겠다고 청하니, 당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
61) 八年 夏四月 唐太宗崩 遺詔罷遼東之役 論曰 初 太宗有事於遼東也 諫者非一 又自安市旋軍之後 自以不能成功 深悔之歎曰 若使魏徵在 不使我有此行也 及其將復伐也 司空房玄齡 病中上表諫 以爲老子曰 知足不辱 知止不殆 陛下威名功德 旣云足矣 拓地開疆 亦可止矣
(<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 보장왕)
<8년(649) 4월에 당태종이 죽었는데, 그 유조로 요동 정벌을 파하게 하였다. 논하건대, 처음 당태종이 요동 정벌군을 일으킬 때 간하는 사람이 하나뿐만이 아니고, 또 안시성으로부터 군사를 돌이킨 후에 스스로 성공하지 못하였음을 깊이 후회하며 탄식하기를, ‘만약 위징이 살아있으면 나로 하여금 이러한 걸음걸이를 하지 않게 하였을 것이다’ 하였고, 그가 다시 정벌군을 일으키려고 할 때 사공 방현령은 병중에서 글을 올려 노자설로써 간하기를, ‘만족할 줄 알면 욕됨이 없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은 것입니다. 폐하의 위명과 공덕은 이미 만족하다 말할 것이오니, 땅을 개척하고 강토를 넓히고자 함은 이를 그만둠이 옳습니다. ······>
62) 近仇首王(一云諱須) 近肖古王之子 先是 高句麗國岡王斯由親來侵 近肖古王遣太者拒之 至半乞壤將戰 高句麗人斯紀本百濟人 誤傷國馬蹄 懼罪奔於彼 至是環來 告太子曰 彼師雖多 皆備數疑兵而已 其驍勇喩赤旗 苦先破之 其餘不攻自潰 太子從之 進擊大敗之 追奔逐北 至於水谷城之西北 將軍莫古解諫曰 嘗聞道家之言 知足不辱 知止不殆 今所得多矣 何必求多 太子善之止焉 乃積石爲表 登基上顧左右曰 今日之後 疇克再至於比乎 其地有嚴石 하苦馬분者 他人至今呼爲太子馬철 近肖古在位三十年횡 卽位.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근구수왕)
<근구수왕은 근초고왕의 아들이다. 이보다 먼저 고구려 국강왕 사유(고국원왕)가 친히 군사를 끌고 침입하므로, 근초고왕은 태자를 파견하여 이를 막게 하였는데 반걸양에 이르러 싸우려 하였다. ······ 태자는 그 말을 좇아 진격하여 크게 격파하고,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북으로 쫓아 수곡성의 서북에 이르렀는데, 장군 莫古解는 간하기를, ‘일찍 道家의 말을 들으면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소득도 많은데 어찌 더 많은 것을 구하려 합니까’하므로 태자는 이 말을 옳다하여 그만두고 곧 돌을 쌓아 전승을 표하고, 그 위에 올라서서 좌우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오늘 이후에 이 땅을 밟을 것인지’하였는데, 이 땅엔 암석이 있어 말발굽과 같은 홈이 있으므로, 사람들은 지금까지도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 근초고왕이 재위 30년(375)에 돌아가시므로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63) 後智炤夫人落髮 衣褐爲比丘尼 ······ 允中庶孫巖 性聰敏 好習方術 少壯爲伊湌 入唐宿衛 問就師 學陰陽家法 聞一隅 則反之以三隅 自述遁甲立成之法 呈於其師 師憮然曰 不圖吾子之明達 至於此也 從是而後 不敢以弟子待之 大曆中 還國 爲司天大博士 歷良康漢三州太守 復爲執事侍郎-浿江鎭頭上 所至盡心撫字 三務之餘 敎之以六陣兵法 人皆便之 嘗有蝗蟲 自西入浿江之界 蠢然蔽野 百姓憂懼 巖登山頂 焚香祈天 忽風雨大作 蝗蟲盡死 大曆十四年己未 受命聘日本國 其國王知其賢 欲勒留之 會大唐使臣高鶴林來 相見甚懽 倭人認巖爲大國所知 故不敢留 乃還 夏四月 旋風坌起 自庾信墓至始祖大王之陵 塵霧暗冥 不辨人物 守陵人聞 其中若有哭泣悲嘆之聲 惠恭大王聞之恐懼 遺大臣致祭謝過 仍於鷲仙寺納田三十結 以資冥福 是寺庾信平麗濟二國 所營立也
(<삼국사기> 권43 「열전」 김유신(下))
<(하) 김유신이 돌아간 뒤로 지소부인은 머리를 깎고 褐衣를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 윤증의 서손 巖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方術을 좋아하였다. 그는 젋었을 때 이찬이 되어 당나라로 들어가서 숙위하였는데, 그동안 틈틈이 스승에게 나아가서 陰陽家의 술법을 배웠다. 그는 한 모서리를 들으면 세 모서리를 깨달았다. 그는 스스로 遁甲立成法을 지어 스승에게 보이니, 스승은 놀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그대의 명석하고 통달함이 이와같은데 이런 줄을 헤아리지 못하였다’하며, 그 뒤로부터는 감히 제자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그는 혜공왕 때에 귀국하여 司天大博士가 되었다. ······김암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향불을 피우고 하늘에 기도를 올리니, 갑자기 폭풍우가 크게 일어나며 황충들이 모조리 죽어버렸다. ······ 능을 지키던 사람이 들으니, 그 능 속에서 울면서 슬피 탄식하는 소리가 났다. 혜공대왕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대신을 유신의 묘로 파견하여 제사를 올리며 사과하고, 곧 鷲仙寺에 밭 30결을 바쳐 유신의 명복을 빌게 했는데, 그 절은 유신이 고구려, 백제 두 나라를 평정하고 세운 것이다.······>
64) 文德遺仲文詩曰 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 仲文答書諭之
(<삼국사기> 권44 「열전」 을지문덕)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시를 지어 보내 말하기를, ‘귀신과 같은 재주는 천문을 궁구하였고, 현묘한 계산은 지리를 통달하였구나. 싸움마다 이겨서 공이 이미 높았으니, 만족함을 알았으면 이젠 그만 그치기를 바라노라.’ ······>
65) 大王頗好田獵 后稷諫曰 ······ 老子曰 馳騁田獵 令人心狂 書曰 ······
(<삼국사기> 권45 「열전」 김후직)
<그런데 진평대왕은 늘 사냥하기를 즐기므로 후직은 간하기를, ······ 노자는 말하기를, ‘산을 달려 사냥을 하러 돌아다니면 사람의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하였사옵고, <書傳>에는 말하기를, ······>
<三國遺事>
66) 幼沖故. 太后臨朝. 政條不理. 盜賊蜂起. 不遑備禦. 訓師之說驗矣. 小帝旣女爲男, 故自期晬至於登位, 常爲婦女之戱. 好佩錦囊. 與道流爲戱. 故國有大亂. (終) 修爲宣德與金良(敬信)相所弑. 自表訓後. 聖人不生於新羅云
(<三國遺事> 권2 「紀異 제2」 찬기파랑가)
<왕(혜공왕)이 어린 까닭에 태후가 섭정하였는데 정사가 다스려지지 못하고 도적이 벌떼와 같이 일어나 이루 막을 수 없었으니, 표훈의 말이 맞았다. 왕이 女子로서 男子가 되었으므로, 돌날로부터 王位에 오를 때까지 항상 婦女의 짓을 하여 비단주머니 차기를 좋아하고, 道流(道士)와 함께 희롱하므로, 나라가 크게 어지러졌다. 마침내 왕은 宣德과 金良相의 죽인 바가 되었고, 표훈이후에는 신라에 성인이 나지 아니하였다 한다.>
<中國正史朝鮮傳>
67) 扶桑國, 在昔未聞也. 普通中, 有道人稱自彼而至, 其言元本尤悉, 故幷錄焉.
(<梁書> 諸夷列傳 東夷)
<扶桑國이란 옛날에는 듣지 못하던 나라이다. 普通 연간(A.D 520-26=고구려 안장왕 2-8)에 그곳에서 왔다는 道人이 있었는데, 그의 말이 사리에 매우 합당하므로 함께 기록한다.>
68) 七年 遣前刑部尙書沈叔安 往冊建武爲上柱國 遼東郡王 高麗王, 仍將天尊像及道士往彼, 爲之講老子, 其王及道俗等觀聽者數千人.
(<舊唐書> 東夷列傳 고려)
<武德 7년(고구려 영류왕 7=624)에 前刑部상서 沈叔安을 보내어 建武를 上柱國 遼東郡王 高麗王에 책봉하고, 아울러 天尊像 및 道士를 대동하고 가서 <老子>를 강의하도록 하였다. 왕 및 道家, 俗人 등 보고 듣는 자가 수천명이나 되었다.>
69) 後三年 遣使者拜爲上柱國 遼東郡王 高麗王, 命道士以像法往, 爲講老子, 建武大悅, 率國人共聽之. 日數千人.
(<新唐書> 東夷列傳 高麗)
<3년 뒤(영류왕 때)에 使臣을 보내어 建武를 상주국 요동군왕 고려왕에 배수하였다. 道士에게 명하여 像法을 가지고 가서 <老子>를 강의시켰더니, 建武가 크게 기뻐하여 나라 사람들을 이끌고 함께 들었다. 그 수효는 날마다 1천명에 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