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3월 멕시코에서 발생한 신종플루는 몇 주 후 미국으로 건너가더니 곧 유럽과 아시아 등 전 세계로 무섭게 퍼져나 갔다. 그해 11월 전 세계에서 1천여명이 사망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는 끔찍한 소식이 매일 매스컴의 일단 뉴스를 장식하고 있었다. 우리 병원 직원들도 한 둘 감염되더니 나와 함께 일하는 흉부외과 의사들도 2명이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사실 이런 전염병의 경우엔 환자가 몰려오는 병원이 오히려 더 취약지대이다. 나는 덜컥 겁이 났지만, 살균액으로 손을 문지르고 부지런히 물로 씻어내는 등 스스로 조심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이라 우리 병원에서 심장 수술을 받은 사람들의 건강이 나의 큰 걱정거리가 됐다. 특히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고 있는 심장이식 환자들은 더욱 그랬다. 거부반응을 예방하기 위해 투여하는 면역억제제는 전염병에 대한 면역을 감소시키기 마련이다. 그들은 감염되기 쉬울 뿐더러 일단 감염되면 잘 낫지도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하지? 한동안 걱정하다 나는 결국 이식수술 받은 환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신종플루 조심하세요!”
“교수님도 조심하세요!”
그렇게 전화라도 대충 한 바퀴 돌고 나니 조금 안심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해가 바뀌어도 치솟는 신종플루의 기세는 좀체 꺾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 어느 날 오후 나는 갑자기 목이 따끔따끔 아프고 한기가 들었다. ‘아이고 추워라, 나에게도 올 것이 왔나 보다.’ 나는 일순 긴장했다. 치료 약인 타미플루를 먹고 집에서 며칠 쉬어야 하나? 그런데 집에는 3살배기 외손녀가 와 있었다. 군의관인 사위가 전방에서 근무하는 중이라 시집간 딸이 아이를 데리고 잠시 친정살이 하는 중이었다. 어린아이에게 감염이라도 된다면 예삿일이 아닐 것이다. 나는 퇴근할 엄두를 못내고, 그날 밤을 의과대학 연구실에서 보내기로 했다. 응급수술이 있을 때 으레 있던 일이라 아내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을 것이다. ‘에이, 신종플루 때문에 이 늙은이 고생하네!’ 갑자기 두렵고 혼란스러워졌다. 중환자라도 된듯 마음이 심란했다. 그날 밤 감기약을 잔뜩 삼키고 막 잠들려 하는데 휴대전화기가 세차게 울렸다. 이 시간대의 전화에 나는 항상 긴장한다. 응급환자라도 있다는 것인가?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켜니 집에서 온 전화였다. 손녀가 날 찾는다고 했다.
“혜린이 저녁 먹었어?”
“응. 하버지 언제 와?”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우리 혜린이 보러 갈게. 혜린이 잘 자.”
“응, 하버지 신조퍼 조찜해.”
“그래, 혜린이도 조심해.”
하! 어린것이 신종플루를 어떻게 알았을까? 어른들의 말을 따라 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아내가 한술 더 떴다.
“혜린이가 잠도 안 자고 할아버지를 기다리네, 어떻게 알았는지 신종플루 조심하래요. 애가 천재인가 봐!”
“뭐, 천재? 그럴 수도 있지. 하하.”
통화를 마치니 휴대전화기 배경 화면에 아이가 활짝 웃고 있다. 이놈 참! 나는 자꾸 웃음이 나왔다. 부모의 눈높이라면 어디 천재 아닌 아이가 있겠는가만, 참 영특하기도 하지. 아이를 생각하며 우울한 마음이 많이 치유된 듯 나는 곧 잠이 들었다.
갑자기 밖이 소란해졌다. 연구동(硏究棟)에 아침이 온 것이다. 내가 늦잠을 잤나 보다. 어때? 나는 소파에 기댄 채 가만히 컨디션을 점검해 보았다.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머리를 짚어 보고 침을 꿀꺽 삼켜 본다. 특별한 이상은 없다. ‘내가 지레 겁을 먹었나? 아차 벌써 8시구나. 회진 시간이다.’ 나는 서둘러 병실로 내려갔다. 그런데 아주 엉뚱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N 씨가 신종플루 감염된 것 같습니다. 지금 응급실에 있습니다.”
“뭐라고? 이 친구 온갖 말썽을 부리더니 이번엔 신종플루라니. 이놈 참, 별걸 다 하네!”
나는 응급실로 뛰어 내려갔다.
N 씨는 1998년 우리 병원에서 두 번째 심장이식 수술을 받은 사람이다. 당시 선천성 심근증을 앓고 있던 21세의 청년을 살리려면 이식수술 외는 방법이 없었다. 그를 곧 심장이식 대기자에 올리긴 했지만, 장기를 기증 받는 일이 여러모로 녹록지 않았다. 그는 수시로 실신하거나 숨을 헐떡이며 하루하루 상태가 나빠졌고, 우리는 혈액형 A, 체중 64kg인 그에게 맞는 심장을 기증할 뇌사자를 초조하게 기다려야만 했다.
뇌사(腦死) 판정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있다가 어느 날 홀연히 깨어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식물인간이다. 그러나 뇌사자는 뇌의 중요 부분(뇌간)의 손상으로 자발 호흡이 없고 곧 사망에 이른다. 단, 인공호흡을 시키면 일시적으로 심장을 포함한 각 장기의 기능을 유지할 수 있다. 이때 장기를 떼어내 다른 사람에게 이식할 수 있다. 따라서 식물인간 상태와 명확하게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뇌사는 한때 찬반이 팽팽하게 대립해 논란의 대상이었다. 아직도 심장이 뛰고 있는 상태라면 죽음으로 볼 수 없다는 관습적인 주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심장이식을 위하여 뇌사자의 출현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항상 혼란스럽고 아이러니하다.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또 다른 생명에게 불어닥칠 엄청난 재앙을 마치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늘 마음 한구석이 찜찜하다. 그러나 위안도 있었다. 2002년 12월 24일, 우리 병원에서 뇌 악성종양 치료를 받던 한 여고생이 안타깝게 뇌사에 빠지고 말았다. 그날 밤, 이 젊은 여성의 여러 장기(심장, 간, 콩팥, 안구 등)가 적출되어 전국 각 병원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6명의 환자에게 성공적으로 이식됐다. 심장과 간은 한 사람씩 이지만 좌우 콩팥과 안구는 따로따로 이식되었기 때문이다. 다음날 여러 신문에 “6명에게 새 생명을 준 성탄절 큰 선물!”이라는 기사가 떴다. 몹시도 추웠던 그해 겨울, 한 생명은 떠났지만, 그녀의 사랑과 희생이 온 세상을 따뜻하게 데워 주는 것 같았다.
6개월의 초조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N에게 맞는 뇌사자가 나타났다. 1998년 8월 4일 밤, 대구 모 병원에서 발생한 뇌사자의 심장을 적출하기 위해, 다음 날 아침 우리 병원에서 2명의 의사(심장 적출팀)를 태우고 구급차가 출발했다. 심장은 적출이 시작된 순간부터 4시간 안에 이식을 끝내야 한다. 그 이상 보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이동 시간을 포함해서 2시간은 잡아야 하니, 이식수술에 허용되는 시간은 고작 2시간이다. 나는 그들을 기다리며 N의 수술 준비도 착착 진행했다. 그러나 저쪽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정오경에야 적출을 시작했다는 연락이 왔다.
이제 4시까지는 이 수술이 완료되어야 했다. 재깍재깍,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우리(심장 이식팀)는 환자 위에 수술포를 덮었지만, 그의 몸에 바로 메스를 댈 수는 없었다. 혹 배달 사고라도 나면 수술을 중단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적출팀이 병원 입구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고 수술을 시작했다. 이제 초를 다투는 긴박감이 수술실에 감돌았다. 환자의 병든 심장을 적출하고 제공자의 건강한 심장을 갖다 붙이며 한 바늘 한 바늘 완벽한 봉합을 위해 나는 바짝 긴장했다. 봉합의 순서, 방향, 간격, 견고성 그리고 시간. 모든 것이 고려되어야 했다. 심장의 뒷부분은 한 번 지나가고 나면 그만이다. 혹 봉합 부위가 느슨해지거나 찢어져 출혈이 생기면 치명적이다. 엄청난 시간의 제약을 받지만 서두르다 돌아가는 일이 생겨서도 안 된다. ‘많은 동물실험을 하지 않았는가. 그래 잘 할 수 있어.’ 나는 스스로 자신감을 불어넣으며 계속 봉합사를 당기고 깁고 매었다. 차츰차츰 이식 심장이 제자리를 잡아갔다. 모든 봉합을 마무리하니 3시 50분경이었다. 이제 내 심장이 쿵쿵 더 뛰기 시작했다. 성공이냐, 실패냐! 한 사람의 생과 사를 가르는 긴박한 순간이었다. 나는 제세동기를 심장에 갖다 대고 스위치를 눌렀다. 꾸무럭,꾸무럭하기를 약 1분, 드디어 이식된 심장이 정상 박동을 시작했다. 아, 성공이구나! 수술실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고양됐다. 쿵쿵대던 내 심장도 안정을 되찾았다. 지켜보던 사람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듯했다.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있었다. 일단 수술은 성공했다. 그러나 또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요즘은 중환자실에 유리 벽으로 차단된 별도의 격리실이 따로 있다. 하지만 당시의 병원시설은 열악했다. 궁리 끝에 6층 병동 복도 끝에 있는 1인실을 차단하여 임시 중환자실을 만들었다. 이 방에 인공호흡기를 비롯한 각종 장비와 상비 약품을 들여놓고 환자를 철저히 격리하기로 했다. 병실엔 간호사와 의사가 돌아가며 24시간 당직을 섰다.
다음 날 아침 의식을 회복한 환자가 인공호흡기를 떼고 기운을 차리는가 싶더니 오후 들어 소변량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비상사태다. 심장 기능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면역억제제의 부작용? 확신은 없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면역억제제 투약을 일단 중단했다. 다른 환자라면 당장 복막투석을 실시해 소변을 빼내겠지만 그것은 또 하나의 치명적 감염원이 될 수 있다. 나의 판단이 결코 무모한 판단이 아니길 빌며, 투석을 보류한 채 환자 상태를 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초조하게 기다리길 한나절, 저녁 6시경에야 환자의 소변이 터졌다.
“내 판단이 맞았지!”
당직 의사에게 보란 듯이 말하고 나는 가벼운 기분으로 병실을 벗어났다. 이제는 순조로운 회복을 기대하며….
그리고 일주일째,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이번엔 환자의 심리 상태가 문제였다. 장기간 격리가 견디기 힘들었는지, 그는 투약을 거부하고 고함을 지르는 등 정서적 불안으로 안절부절못했다. 항우울제를 투여하고 가족과 친구를 면회 시키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야간엔 수면제를 주사해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일반 병실로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지만 동의할 수 없었다. 거부반응과 감염의 가능성 때문에 최소한 3주 동안 격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나의 잘못된 판단이었다. 그는 환자이기에 앞서 참을성 없는 한 젊은이란 것을 고려하지 않았었다. 어느 날 새벽, 병실을 지키던 간호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환자가 6층 병실 창문을 부수고 아래로 뛰어내렸다. 마침 3층에 베란다 같은 돌출부가 있었기 망정이지 맨땅으로 떨어졌다면 정말 어쩔뻔했나? 생각하면 섬뜩했다. 척추뼈 2곳에 압박 골절상을 입은 환자는 일어서지 못했다. 다른 부위에 손상이 없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정형외과 의사는 혀를 끌끌 차며 걱정했다.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하반신 마비가 올 가능성이 있지만, 단단히 고정한 후 절대 안정을 시키면 수술 없이 치유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이식수술을 받은 환자에게 또 다른 수술은 매우 위험하다. 그런데 저렇게 날뛰는 사람을 장기간 묶어두는 것이 가능할까?
“에이, 나쁜 사람! 왜 이렇게 사람 애를 태우나? 그래, 이번에도 그냥 기다려보자.”
어려운 결정을 해야 했다. 이제 환자를 격리실에 둘 수가 없어 중환자실로 옮겼다. 일반 중환자실은 이런 환자에게 안전지대가 아니다. 오히려 독한 병원 감염이라도 된다면 치명적일 것이다. 한바탕 난리를 치고 나니,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쁜 놈! 뺨이라도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꼼짝 못하게 단단히 묶어요!”
“너, 이제 말 안 들으면 하반신 마비가 올지도 몰라. 꼼짝 말고 누워있어야 해. 알겠어?”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지 환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미안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는 의외로 잘 순응했다. 그렇게 누워서도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오히려 즐겨 보는 듯했다.
많은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수술 후 두 달여 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허리 보호대를 차긴 했지만 그래도 스스로 걸어 나가는 환자가 대견스럽기도 했다. 약 3년 후에 그는 피자를 배달 시키며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또 수년 후에는 결혼 청첩장을 보내 주기도 했다. 나쁜 소식도 있었다. 한때 피자집을 직접 운영하다 실패하기도 했고, 급성충수염으로 큰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후 심기일전하여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 그에게 얼마 전 신종플루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는데, 결국 감염되고 말았다니 한심했다. 응급실로 내려갔더니, 당직 의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 고열과 기침이 있는 사람은 십중팔구 신종플루 감염이었다. 그러니 속히 격리실로 보내자는 그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다. 격리 공포증이 있던 사람이 아닌가. 응급 검사에서 양성 반응이 나오긴 했지만, 최종 결과가 나오기 전이기도 했다. 오히려 병원감염으로 확실한 환자로 만들 위험성도 있었다. 응급실 격리구역에서 하루만 기다려 보기로 했다. 한편 N의 초췌한 몰골을 보니 안쓰럽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 조심하지 않고 싸돌아다녔어!”
“그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야. 자네 부인은 어디 갔어?”
응급실에 환자를 두고 가족이 없는 게 이상해서 물었더니, 그는 눈물을 죽 흘리고 돌아누웠다. 말도 하기 싫다는 표정이었다. 부부간에 무슨 문제가 생겼나? 그렇다고 이놈이! 나는 버럭 화가 났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언제까지 나에게 걱정을 끼치려나? 나는 홱 돌아서고 말았다. 최종 결과가 다음날 오전에야 나왔다.
“뭐, 음성이라고!”
다행이었다. 나는 전날보다 더 빨리 응급실로 내려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너 신종플루 아니란다. 이 친구야, 정말 다행이다.”
잡은 손을 꼭 쥐며 그가 화답했다.
“교수님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
“뭐야? 빨리 말해봐.”
“며칠 전 아기 아빠가 됐어요!”
“뭐? 아기 아빠?”
“집사람이랑 애가 아직 병원에 있어요.”
그래서 몸살이 났구나. 이 사람이 정말! 순간 어떤 짠한 감정이 나의 전신을 타고 흘렀다. 생각해 보니, 그는 이미 병실에서 뛰어내렸던 그 철부지가 아니었다. 오히려 숱한 역경을 극복한 훌륭한 사람으로 보였다. 청소년기 젊은 나이에 타고난 질병을 자각하고 얼마나 암울했을까. 분명 죽고 싶도록 마음 아픈 세월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아픔을 진정 이해하려 애썼던가.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 할 그런 일들을 나는 했던가. 지난날 환자들로 인해 내가 때로 기뻐하고 때로는 그렇게 속상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치료하던 환자가 사망하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사람을 다시 살려내고 싶은 간절함에 울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오직 내 환자가 좋아져야 한다는 나의 공명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뭔가 좀 달랐다. “저, 아기 아빠 됐어요!” 하며 그가 내 손을 잡았을 때 내 심장은 감격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자칫 놓칠뻔했던 그의 생명이 대를 이었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다가왔다. 정말 기뻤다. 비로소 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고 그의 기쁨이 나의 큰 기쁨이 됨을 느꼈다.
(2012년 에세이스트 올해의 작품상 수상작)
첫댓글 감동입니다.
마치 한 편의 연속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긴박감 감도는 수술실,선생님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다시 태어나면 조광현 선생님과 같은 의사가 되어야겠습니다.
결미가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