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깨치고 남 편케하는 길
단양 광덕사에 도착하자마자 산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대형 크레인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아파트 20층 높이의 대불이 들어선다는 백만불전(百萬佛殿) 불사 현장에서 인부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혜인 스님을 발견했다. 근래 보기 드문 대작불사 현장을 뒤로하고 스님의 뒤를 따라 요사로 내려왔다.
인사를 올리고 근황을 여쭈니 “무고하다” 하신다. 한 말씀 듣고자 찾아뵈었다고 하니 스님은 대뜸 “불교가 무엇인지 아는가?”하고 되묻고는 게송을 읊으셨다.
원각산중생일수(圓覺山中生一樹)
개화천지미분전(開花天地未分前)
비청비백시비흑(非靑非白亦非黑)
부재춘풍부재추(不在春風不在秋)
무거무래역무주(無去無來亦無住)
무일물중무진장(無一物中無盡藏)
원각산에 한그루 나무가 살아있는데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전에 이미 꽃이 피었네.
그 색은 푸르지도 아니하고 희지도 않으면 또한 검지도 아니하되
봄이나 가을 바람에도 영향을 받지 않네.
오고 감이 없고 또한 머무른 바도 없건만
한물건도 없는 속에 무진장의 보배가 들었나니.
스님은 게송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 설명해 주셨다.
“원각산을 찾으려니 그 모양이 없습니다. 이런 산이 있기는 한 것인가 의심을 막 해요. 헌데 그 산에 한그루 나무가 있단 말입니다. 나무속에는 일체의 한 물건도 없는데, 그 속에 또 무진장 보배 창고가 있다 합니다. 온갖 금은보화, 성인(聖人), 지옥이 모두 이속에 들어있어요. 어떤 이는 이 나무를 ‘마음’이라고도 부르고, ‘우주’라고도 부르는데 다들 제 맘대로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무가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그렇게 노력하는 거죠.”
불교의 ‘무변광대(無邊廣大)’함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불교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음으로 시작해 일평생을 이 마음이란 놈과 씨름하면서 그것을 찾는 일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음을 찾지도, 알지도 못한다면 잘 사용하기라도 해야 할 것입니다.”
스님은 “불교의 근본은 마음을 찾는 종교요, 마음을 보는 종교요, 마음을 아는 종교요, 마음을 깨닫는 종교요, 마음을 잘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종교다”라고 덧붙였다.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불교를 믿는 것은 마치 ‘소리 나지 않는 북’과 같아서 아무런 쓸모가 없죠. 불교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면서 불교를 믿어야 합니다.”
혜인 스님은 불교를 믿는 사람들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일러 주었다.
“나는 불자님들을 대할 때 마다 늘 하심(下心)하는 마음을 먼저 강조하거든요. 매사에 하심할 줄 알아야 해요. 하심은 자신을 깨치고 남을 편하게 하고, 부처님 가신 길을 한 걸음씩 쫓는 수행의 기본이라고 볼 수 있어요. <금경경>에 ‘무상즉불(無相則佛)’이고 ‘유상즉중생(有相則衆生)’이라고 했습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늘 상에 얽매이기 마련이에요. 그러니 더 하심하지 않을 수 없어요. 남이 나를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내가 남을 무시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요즘 정치판이나 세상 돌아가는걸 보면 이놈, 저놈 하고 함부로 험구를 퍼붓는 일이 다반사더라구요. 면전이 아니라고 남을 낮추는 것은 더욱 잘못된 거죠. 항상 남을 높이고 나를 낮추세요. 고인(古人)의 말씀에 ‘도가 높은 자는 마음을 더욱 적게 쓰고, 벼슬이 높을 수록 항상 뜻을 낮추어야 한다’ 했습니다. 복은 손 모아서 비는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니고 마음을 낮추고 남을 존중하는 사람에게 가는 겁니다.”
혜인 스님이 이렇게 하심을 강조하는 데는 은사였던 일타 스님의 가르침이 크게 영향을 미친 까닭이다. 일타 스님은 스무 살에 대장경을 독파하고 스물여섯에 손가락 네 개를 연비해 부처님께 공양한 그야말로 ‘생이지지(生而知之)’ 한 분이었다. 제방의 대율사로 존경 받으면서도 한없이 자신을 낮추고 자비로웠던 스승은 누구에게도 모질게 이야기하는 법이 없었다. 혜인 스님은 요즘도 매일 아침저녁으로 일타 스님에게 기도를 올린다.
간혹 어떤 이들이 일타 스님과 음성이나 언행이 닮았다고 하지만 정작 본인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한다. 한없이 자비로웠던 스승에 대한 사무치는 마음은 세월이 가도 변할 줄 모른다.
세상살이가 갈수록 어렵고 힘들다며 다들 아우성인 이 시대에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까? 혜인 스님은 평소에 불자들에게 행복에 대한 법문을 자주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질병, 전쟁, 취업, 재산, 자녀문제 등 자신의 처지에서 느끼는 불행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죠. 은사 스님께서 늘 해주시던 말씀이 ‘얼음이 많으면 물이 많고, 얼음이 적으면 물도 적다’라는 말입니다. 지금 어렵고 힘든 상황을 회피하기 보다는 난관에 당당히 맞서 물리치는 사람이 성취도 큰 법입니다. 진정한 불자라면 불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신심으로 불보살의 원력을 세우고 포기하지 않는 삶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저도 어려서 출가했지만 가난으로 인한 고통이 끊이지 않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 스무 살 무렵 <관세음보살보문품>을 읽은 후 관세음보살 염불에 무섭도록 집중하다보니 일순간 그동안의 난관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뒤에 해인사 장경각에서 100만배 기도를 회향한 것도 이런 신심 때문이었습니다.”
스님의 100만배 수행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늦은 나이에 해인사 강원에서 공부하던 스님은 참선공부를 시작하면서 상기병으로 고생했다.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고 고통스러운 날을 보내던 스님에게 당시 방장이셨던 성철 스님이 100만배 수행을 권했다. 성철 스님은 ‘절하다 죽은 사람 없으니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라’는 당부만 내린 채 회향할 때까지 말없이 뒤에서 지켜봐 주셨다.
“100만 배를 하고 나니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죠. 그때가 아마 서른 살 때였나 봅니다. 성철 스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그동안 죄지은 것 모두 닦고 참회하는 마음, 그리고 불법 만나게 해준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한 겁니다. 다만 처음부터 쉽지는 않았어요. 매일 5000배를 하는데 쉬지 않고 쏟아지는 코피가 제일 문제였어요. 피가 멈추기를 기다렸다 다시 엎드리고, 그러면 다시 코피가 쏟아지곤 해서 애를 먹었어요. 무릎이 곪아 걸음조차 떼기 힘들었지만 모든 게 끝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해 지더군요. 그때 모든 것은 순간이고 육체의 고통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초인적인 수행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스님은 정작 자신의 100만배 수행을 대수롭지 않은 것인 양 했다.
“절은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하심의 표현이죠. 단 한 배를 하더라도 정성으로 살아있는 부처님을 대하듯 절해보세요. 진짜 절 수행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스님들처럼 용맹정진 하지는 못하더라도 꾸준히 참회의 절을 하다보면 어느날 문득 많이도 바뀌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중생에게 참회의 공덕만큼 수승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혜인 스님은 마지막으로 절을 하고 참회를 함에 있어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을 ‘인격의 변화’라고 말했다. 마치 스님들이 선(禪) 공부에 임하는 것처럼 내가 절을 하고 참회를 함으로써 삶의 자세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때때로 점검해야 한다.
자신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절이나 참회라면 방법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점검을 하고, 정성이 부족했다면 정성을 더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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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노력할거여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