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의술]
제1차 세계대전과 머리 얼굴 외상의 치료
 
1만1000건 얼굴 수술…
전쟁이 ‘성형외과학’ 초석 마련
 
참호 속의 군인들. 삽화=김성욱 |
늦가을의 낭만은 바바리코트(Burberry coat)에 있다고 말한다. 코트에서 담담한 듯 차갑고, 낭만적이면서도 이지적인 분위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바바리코트는 런던의 버버리 부자에 의해 개발된 트렌치코트가 그 시조다. 능직의 질긴 천으로 만들어서 방수 효과가 좋고 실용적인 면이 두드러지며 군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트렌치코트, 비 피하던 야전복에서 유래
그중에서도 장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것은 ‘애수’나 ‘카사블랑카’를 비롯한 많은 영화에서 주연 배우들이 체형에 잘 어울리는 트렌치코트를 입고 장교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트렌치(trench)’는 ‘참호’를 이르는 단어다.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영국군이 참호에서 비를 피하려고 입었던 야전복을 뜻한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은 끝없는 소모전이었다. 기관총이 처음으로 등장해 살상력이 커지자 참호를 파고 대치하는 참호전(Trench war)이 대두했다. 당시 후방에서는 이를 두고 ‘안락한 참호’로 불렀으나, 참호 속에는 전사자의 시체와 이것을 먹는 쥐, 이에 따른 전염병과 참호족(Trench foot: 썩어 들어가는 다리)이 빈발했다. 땅속에 구멍을 판 참호가 살아있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할 리 없었다.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6000만 명 중 10%가 넘는 700만 명이 사망했고 1900만 명이 부상했으며, 50만 명이 절단술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성형의학의 아버지’ 길리스가 수술한 얼굴 손상 환자들. |
참호전, 얼굴·머리 외상 많아
참호전의 특성상 군인들은 머리만 내놓은 채 진지를 방어했으므로, 얼굴과 머리에 외상을 입기 십상이었다. 또한 지뢰가 많이 매설돼 다리에 손상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이후 조기 수술과 외과 기술의 발달로 목숨을 구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재활과 의족 등이 필요해졌다.
머리 외상 치료에 크게 공헌한 사람은 미국의 외과 의사 쿠싱(Harvey Cushing, 1869∼1939)이다. 그는 쿠싱증후군(Cushing syndrome: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양의 당류코르티코이드라는 호르몬에 노출될 때 생기는 질환)을 처음 기술한 의사로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4개월간 133명의 경막관통 총상 환자를 포함한 219명의 부상병을 수술한 기록을 남겨 의학 발전에 이바지했다. 그는 현재까지도 이용되는 음압을 이용한 죽은 조직 절제술과 방수 봉합, 넓은 근막을 이용한 경막 복구술 등을 개발하고 시행했다. 또한 철저한 의무기록으로 머리 손상 치료를 체계화했다. 이 같은 치료 방법으로 머리 외상 환자의 사망률이 획기적으로 낮아졌다.
길리스는 ‘성형외과학의 아버지’
1차대전에서 얼굴 외상의 치료를 크게 발전시킨 의사는 오늘날 ‘성형외과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길리스(Harold Gillies, 1882∼1960)다.
그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한 이비인후과 의사로 프랑스에서 복무하던 중 치과의사 발라디에(Charles Valadier)를 만나 뼈 이식을 비롯한 턱 손상 치료의 기본을 익혔다. 영국에 돌아와 1917년부터 1925년까지 5000명 이상의 얼굴 손상 환자에게 1만1000건 이상의 수술을 하면서 재건성형외과 수술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환자들에 대한 자세한 병상 기록과 함께, 화가 통크스(Henry Tonks)와 린지(Daryl Lindsay)에게 환자 상태에 대한 그림 자료를 남기게 함으로써 의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머리 얼굴 외상에 대한 치료 경험은 머리얼굴외과학(Craniofacial surgery) 발전의 토대가 됐고 입술갈림증 등 머리 얼굴 선천기형에도 적용돼 커다란 발전이 가능하게 됐다.
망가진 얼굴 치료, 미용성형수술로 발전
‘망가진 얼굴(broken faces)’의 치료는 본의 아니게 얼굴에 대한 집중적인 수술 경험을 축적하게 했고 미용수술이 따라서 발전했다. 외과는 전쟁에서 부상한 이들을 살리고 빨리 회복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전쟁 후 이들을 사회로 복귀시키기 위한 재활 영역까지 담당하고 있다. 오늘날 시행되는 얼굴미용수술의 기본 원칙들은 대부분 1차대전에서 2차대전까지 20년 동안 개발된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성형외과학’은 전쟁이 꽃피운 것이다. 세간의 선입견과는 달리 성형수술이란 아름다움을 추구하기 이전에 인간다움을 이루려는 데 그 목표가 있다.
<황건 인하대 성형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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