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관한 시모음 53)
이 가을에 /양현근
이 가을에는 젖은 음표들을 말려야지
지난여름 욕망의 이깔나무 숲을 건너오는 동안
무심코 자라난 귀를 맑게 씻어야지
노역의 상처들을 말리는 동안
아다지오의 여백 속은 참 넉넉하리라
때때로 쉼표를 찍어가며
촉촉한 노래들을 오랫동안 흥얼대리라
지상의 세간들이 따로 노래가 될 수 있다면
산다는 것은 얼마나 신나는 일일 것인가
물빛만 출렁이는
내 발자국 길어 올리는 이 없어도
이 가을에는 당당하게 웃어야지
깊은 뿌리내림으로 당당하게 일어서야지
곱지는 않아도 넉넉한 음색으로
내게 주어진 것들을
흔들림 없이 사랑할 수 있다면
열꽃의 아열대
아, 그 아득함을 건널 수 있다면
이 가을에
가을 하늘 /이호율
하늘 참 이쁘다
파란천에 흩뿌리듯 그려진
하얀 구름
어쩜 이리 고울쏘냐
유명한 화가는 아닐지라도
무심한 듯 그려진 그림은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담은 듯
아니 유난히도 내 마음을 담았나보다
지금의 이 기쁨을……
듬성듬성
여운을 남기고
살그머니 이는 바람에
어느새 또 새로운 그림이
아! 전 그림이
지금이 더 좋은데
다음. 다음. 다음 그림은
호기심에 눈을 돌리지 못하네
가을 들녘에서 /김재덕
굽이치는 가을이 내려앉은 들녘에서
아파하는 잡초와 들꽃을 밟아보고
메뚜기와 같이 논두렁을 타고 넘는다
어쩌랴 너희는 아팠을 테고
가을을 걷고 싶은 나그네의 욕구는
이리 멋을 부리는데 너희가 참아야지
소슬바람이 가슴을 뚫고
넉넉한 가을 향기가 마음 녹이며
파란 희망을 새기는 날
아, 이 좋은 가을에
사랑으로 불타오를 단풍은 설렘을 안았고
벼 이삭은 황금알을 낳는 풍요가 좋다
세속에 찌든 얼룩진 육신을
고추잠자리에 물들여 높이 날아오르고
종다리와 지지배배 벌써 부산하다
이 좋은 날도 때가 되면 가겠지만
이 순간의 행복을 즐기는 넉넉한
나의 영혼은 말간 하늘을 닮았다
아뿔싸
시선 끄트머리 어둠별 동으로 간다
가을이 /변영교
나뭇잎을 밟으며 자박자박 오고 있다
풀대궁을 흔들며 건들건들 오고 있다
앙가슴 솔솔 적시며 추적추적 오고 있다.
온 산을 불태우며 검실검실 가고 있다
가랑잎을 뒤적이며 건중건중 가고 있다
앙가슴 벅벅 긁으며 터벅터벅 가고 있다.
가을 사랑 /장종섭
가을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며 나에게는
눈길 질만 해대고
산과 들로 갔습니다
여린 잎새와
피우려 애쓰는
꽃망울의 비틀거림이
위험에 처할 것을
알아차린 배려였습니다
울긋불긋한 단풍과
화려하게 피어난 꽃들을
키우며 애를 써준
가을을 사랑합니다
꽃들과 단풍은 의심 없이
그대를 닮았으며
그대는 가을입니다.
누님의 가을 /신동호
별러오던 지붕을 손질하던 날
가을볕 아껴 받으며 흙장난하던 오후
누님, 마지막 살을 찌우는 벼이삭을 닮은 누님이
문득 왔다 마을의 개들은 짖지 않고
또 비가 오면 어쩌나 누님의 표정이 어둡다
해질 무렵 벼를 세우던 사람들이
개울물에 하나둘 발을 씻을 때 여전히
사립문 밖에 조카녀석 손 잡고 선 누님
아버지의 싸한 등, 어머니의 한숨만 듣고 있고
괜히 담벼락 밑에서 꼼지락대는 내게
눈길을 준다 막둥아 잘 있었니
고 따스한 눈동자 와락 안겨보고 싶지만
자꾸 내게 오려는 조카녀석
어린것 어쩌냐고 어머니 손을 먼저 이끈다
추석 지나 데리러 올 거예요 죄송해요
김서방 건강해요 걱정 마세요
요놈의 개들 싸우는 소리 들리고 꿈쩍 않던 아버지
돌아앉는다 달이 가려 보이지 않는다
내 빨갱이 사위 둔 일 없다
썩 가그라 동네 소문 쫘 하니 어찌 살꼬
누님의 눈에서 먼저 비 내린다 또 비 오면
추수할 때도 다 됐는데 벼이삭이 썩어버리면
추석은 언제 지나려나
조카녀석의 손을 잡고
누님의 늦은 걸음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가
어머니 작은 보퉁이 내민다
잘 가그라 애 걱정 말고 쌀이랑 꼬추 빻아 보내주마
이거 네 애비가 애써 빚낸 돈으로 읍내서 솜 사다 기운 거다
김서방 갖다 주그레
멀리 밤구름 사이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요란하게 버스가 다가오고 있다.
가을의 햇볕 /고운 허기숙
바람을 안으며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또 걷는다
흔들리는 나뭇가지엔
오색단풍 꽃비가 내리고
가을 여자가 돼 본다
햇살이 눈부시게 안기며
동행을 하고 오색잎의 낙엽은
먼 길 떠나고 있다
바람이 동행하며
쓸쓸히 미소를 보낸다
이별은 너무 아픈거니까
가을 /김백기
가을이 오면
만산에 단풍 들 때
검은 머리 백발 되고
무성하던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 질 때
무성하던 머리카락 우수수 떨어진다
싸늘한 가을바람 불어올 때
쓸쓸한 황혼이 찾아온다
가을이 물들면 /김나현
단풍이 물들면
우린 첫 만남을 약속했어요
난 손톱 끝 만큼씩
물드는 가을을 바라보며
날마다 간절히 기도해요
우리 사랑도 가을처럼
빠알갛게 물들기를요
우린 천국 같은 섬에서
정말 예쁜 가을동화를
그릴 거예요
천사가 밤새 마법처럼 짜잔!
온 세상 곱게 색칠했으면 좋겠어요
하나 둘 밤하늘
별을 지우며 손꼽아온 날
우리 서른 밤만 자면
이제 만날 수 있어요
열둘
열하나
여얼
ㆍ
ㆍ
.
.
.
.
일곱
여섯
이제 세 밤만 자면........
가을 풍경 /김영길
맑고 푸른 하늘에는
하얀 백옥 같은
목화 꽃 흰 구름꽃이
뭉게뭉게 떠돌고
바람친구동행하며
여유로운 하늘 여행을
즐기고 있네
구름꽃은 바람을 타고
바람은 꽃을 앉고
서로 사랑하듯
귀속 말로 주고받으며
우리 영원한 친구가
되자고 약속하는가 보다.
바람은 구름꽃의
발이 되어 주고
꽃은 바람의
말벗이 되어주고
서로 상통 자유 하는
순리의 자연의 풍경을
만천하에 알리며
지상 인간들에게
아름다운 가을 풍경을
자랑하고 싶은가 보다.
가을 반나절 /정촌 김동기
(Good day)
계절의
모퉁이에 서서
이쪽 보면 가을이고
저쪽 보면 겨울 같은 풍경
손등 비벼서 온기를 돋우며
여기가 어디냐고
지는 낙엽에게 물어도 모른다 하고
오는 바람에게 물어봐도 모른다 한다
모르는 게 자랑은 아니지만은
우린 수염을 깎지 않아도 되고
넥타이 매지 않아도 좋고
향수 뿌리지 않아도 괜찮은
편안한 대로
또 만났네
금정역에서 만난
국화꽃처럼 희끗하게 생긴 그 칭구들
장대수 중서기 환처니 그리고 나
만나자 해놓고 코로나가 무섭다며
겁먹은 말투로 쭈그리고 앉아서
미루고 거푸 미루고서야
그대들이 말하니
또 우린 세월이야기다
꽃마차
따로 없다
바다의 갓길을 달리면서
묘한 로맨스에 빠져든 듯
만감의 생각들과 낭만이 수평선
잔챙이 파도에 싸여서
눈 안으로 철썩철썩 댄다
이왕지사 항구에 왔으니
어쩌겠나 항구의 찐한 소문과
전설은 듣고 가야지
꽃게랑
바닷고기 맛도 봐야지
조개구이랑 먹어봐야겠지
꾸역꾸역 어시장
골목을 비집고 들어갔다
미끈한 혹은 도톰한 아가씨
허벅지 같은 살점을 핥고 나서야
떡하니 오라버니처럼 폼 잡고 머금은
커피 향으로
입가에 번진 립스틱을 지우는데
지나던 사람들이 눈 반쯤
내리깔고 쳐다보면서
외국인 관광객인가 봐 ㅋㅋㅋ
수군댄다
그런들 우린 상관없다
오목한 U자 모형의 오이도 항구
빨간 등대 옆에서
우리들의 걸쭉한 이야기가
시골장날 난전처럼 펼쳐진다
아
그랬던가
흐르는 세월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지
지금이 그 세월 뒤에 숨어서
평생 가슴에 꽃 달고
꽃무늬 셔츠에
뽀뿌라나무처럼 더벅머리 흔들면서
사는 청춘인 줄만 알았지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진짜로 인생이
이리될 줄은 몰랐네
하지만
어쩔 것인가
해는 내일 다시 솟는데
해가 지면 달도 별도 뜨겠지
우리도 잠에서 깨어날 테지만
조금은 온기가 식어질 것이고
고움마저 예전 같지 않을 것이네
사과 하나쯤이야 와자작
와자작 갉아서 삼키던 우리가
쪼개서 나누어 먹고
자막 없이는
그마저도 돋보기가 없으면
불편한 세상 살아야 하는
우린 청춘을 놓아버린
고독한 인생이네
칭구야
울지 마시라
매일 카톡이 하는 말들대로
우리가 보약으로 그리 살 순 없지마는
몸에서 조금은 이상한
냄새가 나더라도
세월이 뿌려주는 향수라고 생각하시라
칭구야 살아온 것을 후회하지 마시라
너나 나나 몸이 기우러진
처지이기는 하나 어쩌다가
장수노인이 되었네
But
today
is beautiful
배달된 가을 /서영택
먼저 도착한 편지가 푸르다
기다리다 펼쳐보는 볕이 깊어지는 날들
창가에 푸른 하늘이 배달되었다
국화가 국화 속으로 들어갈 때
가을에서 가을까지의 거리를 생각한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에 대하여
구름이 내려앉은 산의 이마
계절은 깃발을 흔들며 손 내밀고
너에게로 가는
꽃들의 무릎은 온통 가시덤불 투성이다
갈색으로 군림하는 굴참나무 숲을 지나
낙엽 부대가 행진한다
바람의 휘파람 소리가
숲의 심장 한가운데 붉은 낙관을 찍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어디로 가는가
가시덤불을 뚫고 계속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
가을 약속 /이정애
의중에
품은 정이
틈새를 기다리다
무언의
약속 지키겠다며
내밀어 본 하얀 구슬 속엔
널 사랑해!
영원히!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