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조남준 편집부국장이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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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숙하게 보이지만 계산 속은 빠삭, 속는 척하면서 실속 확보
속내 감춰 여론조사 맞지 않는 대표적인 지역
名分있을 때는 私利 돌보지 않고 大義에 앞장, 抗日독립운동은 「충청도 사람의 투쟁」
同鄕 결속력은 약해, 자존심 건드리면 똘똘 뭉쳐 「몽니」부리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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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적 환경이 인격 형성에 큰 영향
사람이란 태어난 지리적 환경과 부모, 친척, 친구를 포함, 성장기 주변의 인문적 영향에 따라 하나의 인격을 형성해간다. 이같은 여건이 國家를 단위로 할 때는 민족성, 또는 국민성으로 나타나며, 지역으로 좁혀 보면 지방의 특성있는 氣質로 發顯(발현)하는 것이다.
지역색을 말할 때의 대 전제는 민족성이나 국민성에 비하면 副次的(부차적)인 것이란 점이다. 「대개 그렇다」는 차원이지, 칼로 무자르듯 명백한 선을 긋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민족성이나 국민성도 일률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것인데, 항차 지역색이겠는가. 하지만 나라나 민족마다 국민성이나 민족성이 분명히 존재하듯, 지역색도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다.
충청도는 본래 충주와 청주의 머릿말을 따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三韓(삼한)시대에는 馬韓(마한)의 영토였고 삼국시대에는 百濟(백제)의 판도에 속했다가 신라 진흥왕이 漢江유역으로 진출한 후에는 지금의 충북지역이 신라 세력권에 들었다.
공주-부여가 百濟의 수도가 되면서 충청도는 百濟의 중심지가 되었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통일신라 한 가운데에 위치한 충주에 中原(중원) 小京(소경)이 설치돼, 中原이라는 이름의 시발이 됐다. 고려 성종(995년)때, 전국을 10도로 구분하면서 中原道(중원도)라 했고, 예종1년(1106년) 처음으로 충청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후에 楊廣(양광ㆍ양주, 광주)로 바뀌었다가 공민왕 5년(1356년) 다시 충청도의 이름을 되찾았으며, 역적이 나왔을 때, 公洪道(공홍도ㆍ공주, 홍주), 公忠道(공충도ㆍ공주, 충주)로 잠시 바뀐 적도 있으나 충청도라는 이름이 계속 이어졌다. 1896년 갑오경장 이후, 전국을 13도로 개편하면서 비로소충청북도와 충청남도로 나눠졌다. 조선조 태종때 여흥(여주), 안성, 음죽, 양성, 양지가 경기도에 移屬(이속)되고 경상도에서 옥천, 황간, 영동, 청산, 보은 등을 넘겨받았다.
전국이 8도로 나뉜 조선조 이후 만들어져, 민중 사이에 口傳(구전)돼 내려 온 四字成語(사자성어)는 한번쯤 음미해볼 만하다. 이 成語는 각 지역 사람들의 성향을 네글자로 비유해 놓고 있다. 함경도인을 泥田鬪牛(이전투우), 평안도인을 猛虎出林(맹호출림), 황해도인을 石田耕牛(석전경우), 경기도인을 鏡中美人(경중미인), 강원도인을 岩下老佛(암하노불), 경상도인을 雲天高鶴(운천고학), 전라도인을 風前細柳(풍전세류), 충청도인을 淸風明月(청풍명월)이라고 했다.
충청인 가리킨 淸風明月이 상징하는 것
조선조 숙종때 사람 李重煥은 擇里志(택리지)의 人心條(인심조)에서 충청도 인심을 『권세와 이익에 쏠리는 경향이 짙다(專趨勢利ㆍ전추세리)』고 했다. 또 『산과 강이 평탄하고 아름다우며 서울의 남쪽 가까이 있어서 士大夫(사대부)가 모여 사는 곳이 되었다』는 지리적 여건과 함께 『서울의 世家(세가)들이 이곳에다 전답과 집을 두는 등 생활의 근거지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 풍습이 서울과 가까워서 별로 큰 차이가 없으므로 살 곳을 택하기에 가장 적당하다』고 인문적 여건을 덧붙이고 있다.
헌종때 실학자 李圭景(이규경)은 「五洲衍文長箋散稿(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 충청도 사람의 특징을 『湖西(호서ㆍ충청)는 이익과 권세를 노린다(勢利장학ㆍ세리장학)』고 평했다. 李重煥과 비슷한 견해다.
이같은 평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우리 조상들이 누천년을 두고 겪어온 경험의 소산이라는 점에서 완전히 무시할 수 없고, 어느 정도 공감이 가는 부분이 없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충청인을 「專趨勢利」나 「勢利장학」이라 한 것은 이 지역이 조선조 후기 사회를 專橫(전횡)하다시피 할 정도로 많은 벼슬아치를 배출한 데에 대한 부정적인 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오히려 충청인의 특징은 「淸風明月」이라는 成語 속에 비슷하게 녹아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淸風明月이 상징하는 이미지는 「여유로움」과 「한가로움」이다. 충청도 사람들은 언행이 젊잖다. 공손하다. 급하지 않다. 서두르지 않는다. 날카로운 면이 적다. 모나지 않다. 두루뭉술하게 아무하고나 잘 어울린다. 무덤덤하고 싱겁다. 미온적이고 소극적이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는다. 그래서 온건 보수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혹자는 이 지역이 처했던 역사적 상황에서 中立, 無色 성향의 논거를 대기도 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三國 鼎立(정립)시기에는 이 지역이 삼국의 이해가 첨예하게 부딪친 곳이었다. 예컨대 충북 청주 上黨山城(상당산성)의 북쪽은 고구려였고 서쪽은 백제, 동쪽은 신라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남 북부를 포함한 한강 일대의 경우, 백제 초기에는 백제 땅이었고, 고구려 전성기에는 고구려 땅, 신라 전성기에는 신라 땅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누구의 편임을 쉽게 드러냈다가는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속으로는 어떤 생각을 가졌든, 겉으로는 어느 쪽에도 고개를 숙이고 順應(순응)하는 척이라도 해야 생존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順應 잘 하는 기질 때문에 조선조 이후 최근까지 정부에서 어떤 정책을 시행하려면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실시해보는 곳이 충청도였다.
계산은 다 돼 있으면서 속을 보이지 않는다
충청인의 기질을 논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있다. 충청도 어느 시골의 오일장 장터에서 시금치, 고구마순 몇 다발, 고추 몇 무더기, 옥수수 몇 개를 길가에 늘어놓고 팔고 있는 사람과 이것을 구입하는 사람 간에 오간다는 대화다.
『이거 팔거유?』
『그럼 구경시킬라고 갖고 나왔겄슈?』(예, 하면 될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월매래유』
『알아서 주세유』(절대로 얼마라고 먼저 말하지 않는다.)
『1000원 드리쥬』(여기서부터가 중요하다. 만일 값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훽 돌아앉으며)
『갖다 돼지나 멕일래유』
이 대화를 보면 팔려고 애쓸 것 없다는 느긋한 태도와 함께 속내를 쉽게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잘 나타내고 있다. 마음 속에는 계산이 다 돼 있고, 이 계산에 맞지 않으면 거래하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미리부터 1000원 받으면 될 것을 1200원이나 1300원으로 에누리해서 값을 부르지 않는다는 점을 이 대화는 간접으로 말하고 있다. 에누리를 하면 깎아서 산 사람은 처음엔 싸게 샀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시간이 지나면 속아서 사지 않았나 의심할 수도 있다. 충청도 사람들은 그런 후유증을 남기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전국의 어느 시장엘 가도 「충청상회」나 「충남상회」라는 상호가 붙은 가게가 많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물건값을 속여 팔지 않는다는 신뢰를 줄 수 있다는 인상을 노린 것이리라.
무덤덤하고 속내를 잘 드러내 보이지 않는 충청인의 例話(예화)는 수없이 많다. 서울 관악구에서만 4선을 올린 민주당의 李海瓚(이해찬ㆍ충남 청양 출신) 의원이 趙淳씨 밑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할 때 그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관악구에는 전라도와 충청도 사람들만 찍어주면 당선은 떼어논 당상이다. 두 지역 출신 유권자가 과반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전라도 사람들이 밀집해서 사는 곳에 가서는 『선생님(金大中 대통령을 지칭)을 따라다니는 이해찬입니다』하면 『와-』하는 함성과 함께 『당신 찍어줄테니 걱정말라』는 격려의 말이 쏟아진다. 자연히 마음이 느긋해진다. 다음 충청도 사람들이 사는 곳에 가서는 『충남 청양 출신, 이해찬입니다』 그래 봐야 반응이 없이 조용하다. 지지한다는 것인지, 아니라는 것인지, 되게 불안해진다. 그런데 개표를 한 후에 분석해 보면 시끌시끌하게 지지한다고 한 지역에서는 과반수를 갓 넘는 지지표가 나왔고, 반응이 조용해서 불안하게 생각했던 지역에서는 70% 내외의 지지표가 쏟아졌음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충청도 기질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멍청」한 것 같지만 절대로 손해는 안봐
충청도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어리숙하게 보이는 점이다. 옛날부터 「서울 깍쟁이」가 충청도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이 있었다. 잘 속아주는 어리숙한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충청도 사람들이 항상 계산하지 않고 밑지는 장사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을 사귈 때도, 처음부터 이익을 보려 하기보다 몇 번은 손해인 줄 알면서도 짐짓 모르는 체 한다. 인간이란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보다 손해를 보는 사람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미안한 마음도 갖는다.
상대방이 미안한 마음을 가질 때쯤 해서 기회를 보아가며 이쪽의 실속도 차린다. 그것도 큰 이익을 본다. 작은 손해를 여러 번 보고 결정적인 순간에 큰 이익을 봄으로써 前의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는 지혜를 발휘한다. 「속도 창자도 없다」고 얕보다가 뒤통수를 맞는 셈이다. 충청도 사람을 겪어보고는 「속에 구렁이가 열 마리는 들었다」고 할 정도로 혀를 내두르는 외지인도 많다. 하지만 대체로 상대방은 손해보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더라도 종전에 속아 준 것을 감안해서 지나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잘 속아주는 기질 때문인지 충청도를 가리켜 흔히 「멍청도」라고 한다. 他稱(타칭)일 뿐 아니라 自稱(자칭)도 「멍청도」다. 하지만 「멍청도」소리를 하면서, 그리고 들으면서 결코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멍청한 사람에게 「멍청이」라고 하면 기분이 나쁜 법이지만, 멍청하지 않은 사람에게 「멍청이」라고 해서 기분 나쁠 일이 없는 것이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양쪽 다 진짜 멍청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大義名分(대의명분)을 잘 따지는 것도 이 지역의 뚜렷한 특징이다. 이익을 전혀 도외시하지는 않지만 명분과 이익이 부딪칠 때는 주저없이 명분을 택한다. 명분을 따지다 보면 대체로 실속을 차리기 힘들다. 당장의 불이익도 감수해야 할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실속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것도 「멍청한」 기질에서 기인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 됨됨이가 돼먹지 않았다는 의미의 「못된 놈」이라는 욕을 가장 듣기 싫어한다. 자존심과 자부심을 훼손하는 내용이기 때문일 것이다.
충청도는 백제때 수도였던 공주와 부여를 품에 안고 있고, 조선조 후반기엔 권력을 독점했던 畿湖(기호)세력의 축을 이룬 선비들을 많이 배출한 고장이다. 지금도 노인들은 젊은이를 야단칠 때, 「주리(주뢰)틀 놈」, 「우라(오라)질 놈」이라는 욕을 자주 쓴다. 周牢(주뢰)는 두 다리를 한데 묶고 다리 사이에 두개의 막대기를 끼워넣고 비트는 형벌이다. 오라는 죄인을 묶는 붉고 굵은 줄을 말한다. 모두 상민들을 붙잡아다 私刑(사형)을 가했던 兩班(양반)시대의 잔재 같은 단어다. 그런 만큼 자부심과 자존심이 강하다.
栗谷(율곡) 李珥(이이)로부터 시작된 조선조 중기 주자학의 學脈(학맥)은 율곡의 제자이자 조선 禮學(예학)의 鼻祖(비조)로 꼽히는 沙溪(사계) 金長生(김장생ㆍ충남 논산)과 그의 아들 愼獨齋(신독재) 金集(김집)으로 이어졌다. 沙溪와 愼獨齋의 제자가 조선 후반기를 지배한 노론의 영수 尤庵(우암) 宋時烈(송시열ㆍ충남 연기)이었다. 尤庵의 추종자와 그의 제자들이 대원군이 집권할 때까지 수백년간 代를 이어 권력을 독점했다.
충청인들이 大義名分을 잘 따지는 것은 정권을 담당했던 兩班, 즉 선비로서 勤王(근왕ㆍ임금을 받드는 행위)정신이 강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옛날에는 왕이 곧 국가였으니까, 지금 말로 하면 국가에 대한 책임의식이 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日帝때 독립운동사는 忠淸人의 항쟁사
그래서 평소엔 조용한 것 같지만 국가가 위태롭거나 國權(국권)이 유린당하는 상황을 맞으면 가만히 앉아있지 못하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 허다한 忠信, 烈士, 義人들이 배출된 것도 私利보다 名分을 더 앞세우는 이 지역 사람들의 성향 때문일 것이다.
백제말기의 成忠(성충), 興首(흥수), 階伯(계백) 등을 필두로, 艱難辛苦(간난신고)끝에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룩한 金庾信(김유신) 장군(충북 진천), 충주성 抗蒙(항몽)전쟁을 승리로 이끈 고려의 金允侯(김윤후) 장군(충북 충주), 쓰러져가는 고려를 지탱해보려다 李成桂(이성계)에게 죽임을 당한 「붉은 무덤」의 崔瑩(최영) 장군(충남 홍성), 不事二君(불사이군)을 실천한 고려말의 대학자 李穡(이색) 선생(충남 서천), 사육신 成三問(성삼문) 선생(충남 홍성), 朴彭年 선생(대전)과 사육신에 버금가는 金文起(김문기) 선생(충북 영동),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성웅 李舜臣(이순신) 장군(충남 아산), 진주대첩의 주인공 진주목사 金時敏(김시민) 장군(충북 괴산), 병자호란 때 유일하게 청에 대항한 林慶業(임경업) 장군(충북 충주) 등이 이름난 충청인이다.
특히 일본의 침략이 시작된 19세기 후반부터 해방이 될 때까지 다른 어떤 지역보다 많은 독립투사를 배출했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으로 일어난 의병운동 초기, 일본군과 싸우다 홍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閔宗植(민종식) 선생(충남 청양), 을사보호조약에 반대, 73세의 고령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일본군에 붙잡혀 대마도로 끌려갔으나, 敵國(적국)의 식량을 먹지 않겠다며 斷食(단식)끝에 순국한 崔益鉉(최익현) 선생(충남 청양), 일본의 국권 침탈에 항의하다 父子가 나란히 일본군에게 참살당한 李南珪(이남규) 선생(충남 서천), 헤이그 밀사사건의 李相卨(이상설) 선생(충북 진천), 평생을 항일운동으로 일관한 유학자 의병장 柳麟錫(유인석) 선생(충북 제천) 등은 비교적 勤王의식이 강했던 독립투사였다.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 1개사단을 무찌른 武裝(무장) 독립운동사의 금자탑 金佐鎭(김좌진) 장군(충남 홍성), 金佐鎭 장군을 도와 청산리 대첩을 이룬 초대 국무총리 李範奭(이범석) 장군(충남 천안), 3ㆍ1만세운동의 꽃 柳寬順(유관순) 열사(충남 천안), 3ㆍ1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孫秉熙(손병희) 선생(충북 청주), 끝까지 日帝(일제)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킨 3ㆍ1 독립선언 민족대표 韓龍雲(한용운) 선생(충남 홍성),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군 시라가와 대장 등을 폭살함으로써 蔣介石 총통으로부터 『중국군 몇개 사단이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는 칭송을 들은 尹奉吉(윤봉길) 의사(충남 예산), 항일 독립단체인 신간회 초대 회장과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한 李商在(이상재) 선생(충남 서천), 상해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李東寧(이동녕) 선생(충남 천안), 꼿꼿한 선비정신의 표상이자, 민족주의 史學을 정립한 申采浩(신채호) 선생(충북 청주), 상해임정의 국무총리 대리를 지내다 임정내에 內紛(내분)이 생기자 단식끝에 순국한 申圭植(신규식) 선생(충북 청주) 등 꼽자면 한이 없다.
비록 공산주의자이긴 하지만 해방 전까지 일제를 상대로 독립운동을 벌인 朴憲永(박헌영)과 洪命熹(홍명희)도 충남 예산, 충북 괴산 출신이다. 그들의 면면을 보면 20세기 우리 나라 독립운동사는 충청인의 투쟁사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同鄕人 봐주기는 커녕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
大義名分은 先公後私(선공후사)와 통한다. 先公後私의 경향이 어느 지역 사람들보다 강한 충청인들은 同鄕(동향)이라고 해서 뚜렷한 명분이 없는 한 무조건 봐주지 않는다. 예컨대 어느 도 사람들은 드러내놓고 잘 나가는 후배들을 돌봐주고, 어느 도 사람들은 은근히 동향인끼리 뭉치지만, 충청도 사람들은 가까이에 있는 후배들을 돌봐주기는 커녕 閑職(한직)으로 쫓아내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남들에게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제3공화국 시절, 충남 출신 金鍾泌씨가 오랫동안 제2인자 자리에 있었지만, 『JP의 덕을 봤다』는 사람을 본 기억이 별로 없다. 오히려 『JP때문에 피를 봤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가 막강한 권세를 자랑하던 중앙정보부장을 지냈고, 국무총리 두번, 집권당의 총재, 대표 등을 역임했지만 「자기 사람」을 심었다는 얘기를 들어본 바 없다. 현 정부에 들어와 공동정부를 구성한 JP가 국무총리가 되어 총리실에 入城(입성)하며 달랑 혼자서 취임, 화제가 된 적이 있다. 「바지 사장」도 아니고 막강한 힘을 지닌 實勢(실세) 총리로서 쉽게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물론 과거에 「JP부대」라고 칭할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3공화국 시절, 그가 다음 大權(대권)에 가장 근접해 있을 때, 육사 8기 동기생, 서울사대 동창 등 JP 편에 섰던 3선 개헌 반대그룹이 있었다. 그러나, DJ나 YS같이 끈끈한 동지애로 뭉친 조직은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도 없다는 그런 얘기다.
필자가 건설부를 출입하던 때(1982~1984년), 충남 부여가 고향인 고참 서기관 두 명이 있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JP때문에 진급 인사 때마다 미끌어졌다』고 울분을 토하곤 했다. 그들은 오히려 5共 정권이 들어선 후에야 부이사관, 이사관으로 승진했고, 건설부 산하 주요 단체의 長을 역임하기도 했다.
필자가 금융단 출입기자로 있을 때, 은행감독원 부원장으로 있던 朴鍾奭씨(현 한화그룹 부회장)에게서 들은 얘기다. 충남 보령 토박이인 朴씨는 충청인의 기질을 『동향인이라고 절대 봐주지 않는다』는 점을 들었다. 홍성고, 고려대 법과를 나온 그가 1960년 재무부에 들어가 1974년 막 서기관으로 승진, 이재3과장을 맡고 있을 때, 보령 출신 金龍煥씨가 재무부장관으로 부임했다.
최근 한나라당에 입당한 金龍煥 의원은 정치인답지 않게 차갑기로 이름난 사람. 행동도 그렇고 말투도 무뚝뚝하다. 기자와의 약속도 바쁜 일이 있으면 사전 양해를 구하지 않고 파기해 버리는 그런 인물이다. 金龍煥씨는 취임한 지 얼마 안돼 朴씨를 부르더니 『한국은행으로 나가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朴씨가 『고향 후배라고 봐주지는 못할 망정, 왜 쫓아내는 거냐』고 항의하자, 『남들에게 오해를 받기 쉽다』는 것이 그의 대꾸였다고 한다.
『동창회란 너무 잘 되면 안됩니다』
충북 청원 출신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閔耭植(민기식) 장군은 남의 눈치 안 보고 할 말을 하는 剛骨(강골)이었다. 그런 만큼 逸話(일화)도 많이 남긴 사람이다. 그가 30여년 전, 초대 在京청주고동창회장으로 선출되어 메디컬 센터 옆에 있는 스칸디나비아 클럽에서 첫 모임을 가졌을 때의 일이다. 閔장군은 취임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창회란 너무 잘되면 안 되는 겁니다. 내가 만주, 일본 등지를 돌아다녀 봐서 아는데, 우리나라는 좁은 땅덩이에요. 손바닥 만한 나라에서 이 고등학교, 저 고등학교로 갈라져서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동창회란 명부나 만들고 누가 어디에 있겠거니 하는 정도나 알면 되는 겁니다』
동창회장 취임사에 어울리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너무 썰렁하기까지 한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너무 멋진 말이 아닐 수 없다.
10ㆍ26 직후, 3金씨가 차기 대권을 노리고 열심히 뛰고 있을 무렵이다. 金鍾泌 공화당 총재가 충북 출신 노조지도자 200여명을 모아놓고 모임을 가졌다.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이 단상에 올라가 『앞으로 충청도 사람끼리 똘똘 뭉쳐 金鍾泌 총재를 대통령으로 밀어주자』고 연설했다. 이때 동석했던 南載熙(남재희) 의원이 마이크를 빼앗더니 『金鍾泌 총재가 노조를 잘 이해하고 노선이 같으니까 지지하자고 하면 몰라도 충청도니까 밀어주자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소리쳐 주위를 어색하게 하더라는 것이다. 南載熙씨는 충북 청주 사람이다. 그는 당시 공화당 공천으로 서울 강서구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돼 노동청을 관할하는 국회 보사위 소속이었다.
2년전, 충남도에서 고위직에 있는 모 간부는 같은 郡(군) 출신 선배가 충남부지사로 부임해서 찾아가 인사하니까, 『앞으로 자신이 재직하는 동안, 아는 척하지말라』고 경고하더라는 것이다. 남들에게 오해를 살 일은 하지 말자는 취지에서였겠지만 듣는 사람은 무척 섭섭했다는 것이다. 최근 충북도 한 고위직을 놓고 두 사람이 경쟁을 했는데, 능력이 대등한데도 도지사와 동향이라는 이유로 한 사람이 탈락했다고 한다.
同鄕이라고 무조건 지지하지 않는 경향은 작년 10ㆍ25 補選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서울 구로구 을에 출마한 자민련 후보는 겨우 700여표를 얻어 민주노동당 후보에게조차 뒤졌다. 이곳이 호남 출신 다음으로 충청도 출신이 많은 인구를 차지하는 지역임을 감안할 때, 타 지역 출신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독특한 부분이다.
도리에 어긋나면 형제도 소용없다
同鄕안봐주기는 과거 大選, 總選에서도 웬만큼 나타난 바 있다. 16대 總選의 결과를 보자. 6개 선거구인 대전에서 JP의 자유민주연합은 절반인 3석밖에 얻지 못했다. 민주당이 2석, 한나라당이 1석이었다. 한나라당이 17석과 11석을 싹쓸이한 부산, 대구, 민주당이 6석을 싹쓸이한 광주와 확연히 다른 점이다. JP의 영향력이 비교적 크다는 충남에서도 11석 가운데 과반수인 6석을 건지는 데 그쳤고, 민주당이 4석이나 차지했다. 충북에서는 더욱 비참했다. 7석 중 한나라당이 3석으로 1위를 차지했고, 自民聯(자민련)은 2석으로 민주당과 공동 2위에 그쳤을 뿐이다.
이런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도리에 어긋날 때는 형제간이라도 소용없다. 대번에 비판의 칼날을 바짝 세운다. 그러니 학연, 지연에 얽매여 무조건 지지할 리가 없다. 沈大平 충남지사, 洪善基 전 대전시장, 李元鐘 충북지사 등 충청도 지역의 민선 道伯(도백)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던 말이 중앙정부의 도움이 절실한 중요 사업을 시행하려 할 때, 중앙 정치권의 도움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同鄕의 유력한 실력자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주위에서 힘을 쓸 만한 사람도 『나몰라라』하며 외면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지역사업이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똘똘 뭉쳐서 나서는 타 지역과 구별되는 점이다.
사귀기기는 어렵지만 사귀면 오래간다
과거 3~6공화국, 문민정부 등 영남 정권 시절, 영남 사람들은 선후배간에 끌어주고 당겨주는 모습을 흔히 보여왔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지 않아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래서 「??마피아」라는 신조어가 생겨날 정도였다. 「국민의 정부」라고 자칭한 현 정권에서도 호남인들끼리 요직을 주고받는 人事獨占(인사독점) 현상이 전보다 심하면 심했지 못하지 않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충청도 정권이 들어설 경우, 종전같이 지나친 人事獨占으로 인한 폐해는 적을 것이라는 것이 충청인의 기질을 잘 아는 사람들의 한결같은 얘기다. 동향인끼리 배척하는 相避(상피ㆍ특수관계인끼리 서로 피하는 것) 전통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학연, 지연에 비교적 얽매이지 않는 충청인의 특성은 지역발전을 저해하고 큰 인물을 키우지 못한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국정 운영과 지역감정 해소 차원에서 국민성으로 권장, 발전시켜야 할 장점이라 볼 수도 있다.
충청인들은 쉽게 속을 보이지는 않지만, 마음에 든다고 생각하면 許交(허교)를 하고 일단 許交한 이상 그 親交(친교) 관계가 오래 간다. 許交를 하면서는 출신 지역이나 성분을 가리지 않는다. 그래선지 충청도 출신은 어느 지역에 가서도 잘 어울리고 잘 뿌리를 내린다.
필자가 2001년 10월호 月刊朝鮮에도 쓴 바 있지만, 5共 말기인, 1987년 6월부터 6共 초기인 1988년 7월까지 13개월 동안 光州에서 근무할 때, 전남-광주의 주요 기관장 가운데 충청도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전남도지사, 광주직할시장, 광주지방검찰청장과 안기부(국정원 前身) 전남도지부장만 빼고, 전남부지사, 광주부시장, 전남도경국장, 전남체신청장, 전남보훈청장, 보안부대장 등 공무원과 토지공사 전남지사장, 한전 전남지사장, 주택공사 전남지사장 등 정부 투자기관의 長들이 충청도 사람이었다.
그들은 「忠友會(충우회)」라는 모임을 결성,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을 정도였다. 충청도 사람들이 잘 나서가 아니라, 호남 출신의 공직자 숫자가 적다 보니까 어디서고 잘 어울리는 충청도 출신을 뽑아 보낸 결과였다.
앞에서 말한 朴鍾奭씨의 경우도 충청인 특유의 친화력으로 새로운 풍토에서 성공적으로 着根(착근)한 예로 꼽힌다. 한국은행 직원들은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남에게 곁을 잘 주지 않는 배타적 집단으로 유명하다. 朴씨는 재무부에서 쫓겨나 텃세 심한 한국은행에서 잘 버텨, 이사, 은행감독원부원장, 국민은행장, 상업은행장을 거쳐 은행감독원장, 증권감독원장을 역임했고, 1995년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한화그룹에 영입돼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頂上에 오르면 내려와야 하지만?
JP가 출중한 역량이나 경륜, 풍부한 경험을 갖춘 인문적 교양인임에도 불구하고 3金 중 유일하게 大權(대권)을 차지하지 못한 것을 본인은 표가 적은 충청도 출신의 한계라고 생각할지 몰라도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JP는 『너도 옳고 너도 옳다』는 黃喜(황희) 정승式의 전형적인 충청인 기질 때문에 길고 긴 40여년의 정치생명을 이어오고 있다고 본다.
頂上에 오르면 언젠가는 내려와야 한다. 내려오지 않으려고 하면 비정상적인 「내려끌림」을 당한다. 李承晩 전 대통령과 朴正熙 전 대통령의 예가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목숨을 걸고」 12ㆍ12를 단행한 全斗煥 전 대통령 이래, 그의 후계자 盧泰愚 전 대통령, 수십년 동안 목숨을 건 민주화투쟁 끝에 정상에 오른 金泳三 전 대통령이 單任(단임)끝에 하는 수 없이 頂上에서 내려와야 했다. 또 한명의 민주투사 金大中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곧 그 좋다는 권좌에서 자퇴해야 한다.
하지만 8부 능선 쯤 있으면 누구도 내려오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전쟁터에서도 8부 능선은 가장 안전한 지점으로 꼽힌다. 적에게 관측되지 않고 총알을 맞을 위험도 없다. 그래서 戰時(전시) 행군요령 가운데 「8부능선을 택하라」는 지침이 있을 정도다.
JP는 1961년 5월16일 이후, 지금까지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꼭대기에는 올라가 보지 못했지만 권력의 8부능선 쯤에 서서 권력을 향유해 온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朴正熙 시대에는 중앙정보부장, 당의장, 국무총리 등을 역임했고, 顯職(현직)에 있지 않을 때도 그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사실상 제2인자 노릇을 했다. 朴대통령 사망 후, 이론의 여지가 없이 즉각 공화당 총재로 선출된 것이 그런 정황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5공화국 때는 일시적으로 핍박을 받았지만, 결국은 정치적으로 복권되어 공화당을 창당했고, 대통령 후보로 나왔으며, 盧泰愚 시절, 여소야대의 한 축을 이뤘다. 그러더니 3당 합당에 앞장 서서 민자당 최고위원, 대표 최고위원으로 2인자 역할을 계속했으며, 金泳三 시대에는 신민주공화당을 창당, 충청지역 맹주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金大中 시대에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공동정부의 실질적 제2인자로서 지난 3년여를 군림했다. 골프를 좋아하는 JP는 자신의 처지를 『항상 세컨드 샷만 쳤다』고 自嘲(자조)하지만, 그보다 더 해피한 사람이 어디 있었나 가만히 생각해 볼 일이다.
『40년 정치사의 진정한 勝者는 JP』
李會昌 후보 李仁濟 의원이 집권했다면 동향인을 봐주지 않는 충청도 기질 때문에 어려움에 처했을 지 모르지만 盧武鉉씨가 차기 대통령이 된 만큼 정치생명이 어느 정도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아무튼 그는 경상도 정권 시절, 전라도 정권 시대, 어느 정권과도 사이좋게 지내왔다. 어느 지역, 어디 출신과도 잘 어울리는 충청도 사람의 기질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박정희 시대 이후, 지난 40년간의 정치사에서 「진정한 勝者(승자)」는 JP』라고 하는 말이 수긍이 가기도 한다.
충청도 말에「용한 사람이 성내면 무섭다」는 속언이 있다. 평소에는 평범한 것 같지만, 한번 화가 났다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누가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하면 「불뚝 성질」이 폭발한다. 제 새끼가 밉다고 해서 남이 제 새끼를 때리는 것을 좋아할 피붙이가 어디 있겠는가.
1995년 6ㆍ27지방선거때, 「핫바지」소리를 들은 충청도 사람들이 평소와 다르게 똘똘 뭉쳐 金鍾泌씨의 신민주공화당 돌풍을 일으킨 것은 그 때문이다. 자존심을 건드려 「몽니」를 부리게 한 결과다. 오래 갈 것 같던 DJP연합이 林東源씨 해임을 둘러싸고 와해된 것도 JP의 자존심을 DJ가 살피지 않았던 데서 연유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李會昌 후보가 盧武鉉 당선자에게 진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JP를 붙잡지 않은 것도 꼽힐 수 있을 것이라고 필자는 확신한다. JP는 자신이 대통령은 될 수 없는 인물이지만, 남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는 아직까지 최대 1백만표, 최소 50만표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만일 李會昌 후보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JP를 찾아가 『한번 도와주십시오』하며 허리를 숙이는 모습을 충청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면, 그리고 JP를 끌어내 『이회창이는 밉다, 하지만 어떻게 하겠느냐, 나라가 더 중요하지 않으냐, 미워도 한번만 밀어주자』하는 방송연설도 시키고 遊說(유세)를 다니게 했다면 이번 大選에서 무조건 승리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