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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6일 오늘의 역사
2020년 법원 텔레그램에서 디지털 성착취물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 징역 40년 선고
2020년 인도농민 2억5천만명 친기업적 농업개혁법안에 반대해 24시간 상경시위,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 시위로 기네스북에 오름
2018년 씨름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남북 공동등재
2011년 미 항공우주국(NASA) 화성탐사로봇 큐리오 시티(길이 3m 무게 1t 25억$) 발사
2010년 인도네시아 메라피화산(2,914m) 폭발 사망 304명 이재민 30만 명
2009년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별세
2009년 11월 26일 오후 10시 30분(현지 시각) 이경성(李慶成·91)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미국 뉴저지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1919년 인천에서 태어난 이 전 관장은 일본 와세다대에서 법학과 미술사를 공부했고, 귀국한 뒤에는 국내 전업 미술비평가 1호를 기록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이화여대와 홍익대 등에서 가르친 뒤 1982년 미술 전문가로서는 처음으로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했다. 이전까지는 관료 출신이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맡았다. 이 전 관장은 국립현대미술관장을 두 차례(9대와 11대) 맡으면서 작품 소장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등 기틀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 전 관장은 워커힐미술관장과 서울올림픽미술관장 등도 역임했다. 고인은 자신의 아호를 딴 '석남(石南)미술상'을 만들어 젊은 작가들을 배출하는 데 앞장섰다.
2008년 인도 뭄바이 연쇄 테러로 최소 172명 사망·239명 부상
인도 경제.금융 중심지인 뭄바이 시내에서 2008년 11월 26일 10인조 청년 테러집단에 의해 동시다발 총격과 폭발 등의 연쇄 테러사건가 발생했다.
테러범들은 뭄바이 시내 최고급 호텔인 타지마할 호텔과 오베로이 호텔, 카페,기차역, 경찰서, 병원, 유태인 거주지 등 10여 곳을 습격하여 171명(정부 발표)이 사망하고 327명이 부상을 입히는 피해를 입혔다.
이번 테러는 29일 오전 8시30분에 막을 내렸다.
이 테러는 경제중심지에서 외국인 목표물을 노렸다는 점에서 ‘인도판 9·11’로도 불린다.
3박 4일간 계속된 테러는 인도 국가안보경호국(NSG) 특수부대의 진압작전으로 범인 9명이 현장에서 사살되고 파키스탄 출신 21세 터러범 한명만이 유일하게 생포됐다.
테러범들은 26일 뭄바이 남부에 위치한 차하트라파티 시바지 철도역 대합실, 최대 번화가인 콜라바-나리만 포인트 지구에 위치한 타지, 오베로이, 트라이덴트 등 호텔과 마즈가온 지하철 역사, 크로퍼드 시장, 서부 고속도로 등 최소 9곳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자동화기와 수류탄 등을 사용테러를 감행했다.
테러 직후 만모한 싱(singh) 총리 등 인도 수뇌부는 생포된 테러범의 신변 조사를 토대로 파키스탄에 책임을 물었으며, 파키스탄은 이에 강하게 반발하여 탈레반 진압 임무를 맡은 병력 10만명을 인도 국경으로 이동시키려 하는 등 양국 관계가 악화되었다. 생포된 테러범 아지말 모하메드 아미르 카사브(Kasab)는 파키스탄 펀자브주 출신으로 파키스탄의 이슬람 테러조직 ‘라시카르이 타이바(경건한 자들의 군대)’ 소속으로 알려졌다.
2004년 강화도 가릉과 곤릉에서 최상급 고려청자 비롯 유물 100여점 출토
2002년 “직장성희롱 회사도 책임” 롯데호텔 여직원 19명 일부승소 판결
서울지법 민사18부는 2002년 11월 26일 서울 롯데호텔 여직원 40명이 ”성희롱을 당했다”며 호텔측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회사는 송모씨 등 피해자 9명에게 100만∼300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와 별개로 최모씨 등 가해자 4명에 대해선 또 다른 피해자 10명에게 100만∼2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이사급 이상 회사 임원이 주재하지 않은 회식 등에서 성희롱을 당했다고 주장한 나머지 21명의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성희롱 사실은 대부분 인정되지만 회사 책임까지 묻기는 어렵다”며 원고 패소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성희롱에 대해 직접적인 가해자 외에 회사측에도 일부 책임을 인정한 점과 회사 임원이 여직원을 성추행하는 현장에 동석했던 다른 여직원들에 대해서도 간접적인 성희롱 피해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주목됐다. 재판부는 성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언행이더라도 무의식중에 한 것이거나,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고 볼 수 있는 경우는 성희롱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회사의 책임은 직장 내 근무시간은 물론 회사가 비용을 지원한 공식적인 회식이나 야유회, 체육대회, 회사 임원이 공식적으로 주재한 회식 등에도 미친다”며 “성희롱 위험이 늘 있는 사업장을 경영하는 호텔측으로서는 단순한 성희롱 예방 교육보다 한층 높은 수준의 주의 의무가 있다”고 밝혔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출범
1999년 지리산 실상사서 국내 최대 목탑터 발견
1998년 대도 조세형 15년 만에 석방
1996년 전북 부안 앞바다서 매머드 어금니 발견
1996년 월북 사학자 김석형 사망
경북 대구에서 출생한 김석형은 대구공립보통학교를 나와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했다. 양정중 교사로 재직중이던 1945년 반일지하조직 사건에 연루돼 광복때까지 함흥형무소에서 영어의 나날을 보냈다. 선배학자 김광진의 권유로 1946년 월북한 그는 북한측의 배려로 김일성종합대학 교수가 됐다.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김석형의 역할이 두드러진 것은 1956년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소장을 맡으면서부터였다. 그의 성과가 내외에 크게 부각된 것은 ‘력사과학’ 1963년 1호에 ‘삼한-삼국의 일본열도내 분국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하고 1966년 이를 보완한 ‘초기조일관계연구’라는 책을 내놓으면서였다. ‘분국론’으로 불리는 그의 학설은 메이지(明治) 이후 일본 학자들의 한국사연구 100년사의 총화라고 일컬어지던 ‘임나일본부설’을 완전히 뒤엎는 획기적인 연구로 내외의 비상한 관심을 불러모았다.
김석형은 1960년대초 제3기부터 1990년대의 제9기까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역임했고 1991년부터는 사회과학원 원장도 맡아 이날 사망할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교수-박사(62), 과학원 원사(64)가 됐으며 김일성상과 국가훈장 1급도 받았다. 대표적인 연구성과로는 ‘리조병제사’(52)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57) 등이 있다.
1994년 엘살바도르 내전종식에 공헌한 리베라 대주교 별세
엘살바도르 내전을 종식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아르투로 리베라 다마스(72)대주교가 1994년 11월 26일 별세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리베라 대주교는 지난 1984년 엘살바도르 좌파게릴라 세력인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과 정부간의 평화협상을 중재, 1991년 12년 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엘살바도르에 평화를 정착시키는데 크게 기여했다. 지난 1980년 3월 미사 집전 중 무장괴한에 의해 암살된 오스카르 로메로 대주교의 뒤를 이어 대주교가 됐던 그는 엘살바도르 정부군의 인권침해에 맞서 지속적인 투쟁을 벌여온 인권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우익 독재정권은 물론, 무력을 동원한 좌파 게릴라 세력에 대해서도 비난을 서슴지 않아 결국 양측의 양보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엘살바도르는 1979년 10월 우익 장교들의 쿠데타로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좌익 게릴라들이 FMLN을 발족시켜 결사항전,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내란이 계속됐다. 11월 20일 마지막으로 집전한 미사에서 리베라 대주교는 다시 한번 평화적 방법에 의한 좌우 대립 종식을 촉구했는데 결국 그것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1992년 원측대사의 `해심밀경소` 진본 발견
신라시대의 고승 원측대사(613∼696년)가 당나라에서 저술한 `해심밀경소` 진본이 1992년 11월 26일 중국 하남성 하남대 도서관에서 최초로 발견됐다.
원측대사의 `해심밀경소`는 `팔만대장경` 중에서 `해심밀경` 부분을 풀이하고, 해설한 것으로 그동안 원효의 `대승기신론소`,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등과 함께 신라고승 3대 명저의 하나로 손꼽혀왔으나, 중국에서도 영인본(원본을 사진 제판으로 복사하여 만든 책)만 전해져 왔을 뿐 진본의 존재여부는 파악되지 않았다.
이날 발견된 `해심밀경소` 진본은 중국 고대 판각인쇄로 찍은 선장서(실로 꿰맨 것)이며, 크기는 16절지보다 약간 크고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마모가 심한 상태다. `해심밀경소`는 중국 법상종의 유식론에 이론적 기초를 두고 있다.
1986년 국방,건설,문공,통일원 4부장관이 합동담화 발표,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에 대응할 `평화의댐` 건설 발표
1984년 미국-이라크, 17년 만에 외교관계 재개
1984년 소련-북한, 국경협정 가조인
1982년 일본외상에 아베 신타로 임명
1979년 IOC(국제올림픽위원회), 중국의 올림픽 복귀 결정
1979년 파키스탄 보잉707기 사우디아라비아의 지다 부근 추락 사망 156명
1978년 일본-중국 무역협정 체결
1977년 한국, 제3회 슈퍼월드컵 야구대회 우승
1974년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수상 사임
1974년 11월 26일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수상이 자민당 총재직과 수상직 사임서를 당 간부들에게 수교하고, 정식으로 사임했다.
그는 얼마전 대지진으로 일본 열도를 뒤흔들었던 니가타(新潟)현 출신으로 2차 세계대전 후인 1947년 총선거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중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특히 1962∼65년 재무장관으로 있는 동안 고도성장정책을 추진했다. 다나카 가쿠에이 자신이 직접 저술, 1972년 6월 발표한 ‘일본열도개조론’은 글자 그대로 일본 열도의 북쪽 끝에서 남쪽 끝에 이르기까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해 7월 총리에 취임해 같은 해 9월 중·일간의 복교(復交)를 성사시켰지만 다음해 경제정책의 실패로 심한 물가앙등과 1974년 1월 정치자금 부정 문제로 사임하기에 이른다. 1976년 7월 ‘록히드사건’으로 체포돼 1983년 징역 4년·추징금 5억엔의 1심판결을 받고 항소를 제기했으나 1987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1993년 몰(沒).
1965년 프랑스 최초의 인공위성 `A1` 발사
1963년 한국전기연구소 조연옥 김광화 박사팀 고출력 탄산가스레이저 발진기 첫 개발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962년 12월 17일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된 대통령중심제와 단원제를 골자로 한 제5차 개헌안에 따라 혁명정부는 1963년 11월 26일 제6대 국회의원선거를 실시했다. 투표율은 72.1%였다.
선거결과 민주공화당은 33.5%의 득표율에 그쳤으나 헌정 사상 최초의 전국구제(비례대표제)를 도입해 전체의석 175석의 62.8%에 해당하는 110석(전국구 22석)을 획득했다. 민주공화당 외 정당별로는 민정당 41석(전국구 14석) 민주당 13석(전국구 5석) 자유민주당 9석(전국구 3석) 국민의당이 2석을 각각 차지했다.
1959년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자지명대회(조병옥-장면)
1958년 일본, 재일동포 북송 검토
1955년 영국, 키프러스에 비상사태 선언
1955년 소련 100만톤 TNT급의 수소폭탄 실험
1952년 스웨덴의 탐험가 겸 지리학자 헤딘 사망
1951년 석탄공사에 부정
1950년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회(UNCURK) 일행 12명 서울 도착
1950년 장진호전투시작
장진호전투(長津湖戰鬪)는 한국전쟁 중인 1950년 11월26일부터 12월13일 까지 개마고원의 장진호에서 치루어진 전투이다
당시 미 1해병사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임시수도인 강계를 점령하려다가 오히려 장진호 근처의 산속에서 숨어있던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7개 사단 병력 12만명 규모)에 포위되어 전멸 위기를 겪다가 후퇴에 성공한 작전이다
이 전투로 미군은 4500명의 전사와 7500여명의 부상자가 발생하였으며 중공군은 7개 사단이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장진호 전투는 미 1해병사단외 미 육군 7사단 병력 일부도 함께 참가하였으며 이 전투로 인하여 12만명의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켰으며 중공군 포위를 뚫고 흥남에 도착 흥남 철수를 통해 남쪽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미 해병 1사단의 이 퇴각작전으로 중공군을 저지함으로써 흥남지역에서 20여 만명의 군인 및 민간인이 남쪽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며 서부전선에서 미8군이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장진호 전투로 인해 중공군의 함흥 지역 진출은 2주간 지연됐고 중공군 7개 사단은 궤멸적 타격을 입었다.
본 전투의 이름의 장진(長津)은 영어로는 일본어 독음을 따서 Chosin(ちょうしん)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당시 한국어 지도가 없고 일본어 지도뿐이었기 때문이다. 1950년도 사건 당시, 미국의 뉴스위크지는 "진주만 피습 이후 미군 역사상 최악의 패전"이라고 혹평하였다.
한편 당시 미군을 기다리던 미지막 배 메러디스 빅토리아호는 1950년 12월23일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워 12월25일 거제도에 도착해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렸다
빅토리아호는 2004년에는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생명을 구출한 배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특히 2017년 미국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은 전진호전투가 없었다면 자신이 남한에서 태어날 수 없었다면서 미국 장진호 기념탑을 방문해 한미안보동맹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각인시켜 주었다
1949년 중고 분리교육법 국회통과(6.4.2.4학제 12월31일 공포)
1948년 반민법개정안 국회통과
1941년 헐 미국무장관, 일본에 중국침략에서 손을 떼도록 최후통첩
1941년 미국, 추수감사절 확정
1941년 11월 26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11월 넷째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규정한 법안에 서명했다. 미국인들은 1939년 이전까지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기념해 오고 있었다.
루즈벨트는 2년전 추수감사절이 끝나고 바로 시작되는 크리스마스 대목기간을 늘리기 위해 상인들이 맹렬하게 로비하자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주 목요일로 바꾼다고 발표했었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어 주(州)마다 추수감사절을 다르게 기념해 통일성이 없어지자 의회가 넷째주 목요일로 절충안을 낸 것이다.
미국의 추수감사절은 1620년 대륙으로 건너간 필그림들이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그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이듬해 풍성한 수확을 한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인디언들을 초대해 함께 3일간 축제를 벌인 데서 유래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다른 설들도 존재한다. 이후 불규칙적으로 이뤄지던 추수감사절은 1777년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이 영국에 대한 승전을 축하나는 추수감사절 축제를 개최하고 1789년 전국적인 추수감사절을 선포하면서 그 명맥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이후 1862년 10월, 링컨은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선포했다. 여기에는 '고디스 레디스 북'의 부편집장인 사라 헤일의 역할이 컸는데, 그녀는 독자들에게 11월 마지막주 목요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자고 호소하고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과 종교계 인사 등에게 수백 통의 호소편지를 보내 추수감사절이 부활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38년 조선일보 제1회 영화제 부민관 개최
1938년 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 경신
1935년 3․1운동 민족대표 33인 길선주 목사 세상 떠남
1925년 전남 나주서 동척 소작인 1만여명 일본경찰과 충돌
1924년 몽고인민공화국 중국으로부터 독립
1906년 全인도 이슬람교도연맹 결성
1906년 일본, 남만주철도주식회사(약칭 만철) 설립
1906년 11월 26일 일본 정부가 자본금 2억 엔 가운데 반을 출자한 반관반민 회사 '만철(滿鐵)'이 도쿄에서 창립총회를 열었다. 초대 총재는 대만 총독부 민정장관 고토 신페이가 선출됐다.
만철은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약자로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러시아로부터 넘겨받은 동청(東淸) 철도 구간 중 남쪽 지역인 다롄(大連)에서부터 창춘(長春)까지의 철도관리를 위해 설립된 회사였다.
1907년 영업을 시작한 만철은 안산제철소, 다롄 기계제작소 등 대형계열사를 설립하고 만주 구석구석에 지선을 만들며 만철을 아시아 대륙 침략의 첨병으로 발전시켰다.
철도산업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 1910년부터는 시베리아 철도를 경유해 유럽까지 가는 국제열차를 운행했고 1934년에는 다롄과 창춘의 700km를 시속 100km로 달리는 초특급열차 '아시아호'를 선보이기도 했다.
1894년 사이버네틱스 창시자 노버트 위너 출생
1883년 조선, 영국-독일과 수호통상조약 조인
1878(조선 고종15) 의병장 신돌석
1857년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 출생
1504년 스페인 이사벨라 여왕 사망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에 비견되는 스페인의 이사벨라 여왕이 태어났을 무렵, 스페인은 최대 왕국 카스티야와 아라곤, 그라나다, 나라바 이렇게 네 왕국으로 분열돼 있었다. 때문에 각각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 후계자였던 이사벨라와 페르디난드의 결혼은 스페인 통합을 향한 중대한 첫 걸음이었다.
곧 왕이 된 이사벨라는 강력한 스페인 왕국을 꿈꿨다. 먼저 카스티야 귀족들의 권력을 무력화시킨 뒤 유일하게 이슬람 지배 하에 있는 그라나다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13세기 초부터 불붙기 시작한 기독교 세력의 국토회복운동(레콘키스타)의 일환이기도 했다. 12년 만인 1492년 그라나다마저 이사벨라 수중에 떨어짐으로써 스페인은 비로소 정치ㆍ종교적 통일국가를 이룰 수 있었다.
1492년은 이사벨라가 자금을 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해이자 스페인에 거주하는 20만 유대인들에게는 죽음의 해이기도 했다. 이사벨라는 종교재판을 통해 비(非) 가톨릭을 스페인에서 추방 또는 개종시켰으나 그 방식이 너무 가혹해 2000여명이나 불에 타 죽어야했다.
1504년 11월 26일, 이사벨라는 스페인만을 통일한 채 죽었으나 그가 꿈꿔온 유럽 통일제국은 그의 외손자인 합스부르크가(家)의 카를 5세에 의해 비로소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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