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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7일 오늘의 역사
2022년 양양에서 산불진화용 헬기 추락 승무원 등 5명 사망
2021년 코로나 신종 바이러스 오미크론 발생 전세게 전파
2021년 비행기 바퀴에 몰래 숨어든 과테말라 밀항자가 영하 50℃ 혹한을 견디고 미국으로 망명
2009년 러시아, 테러로 열차 탈선
2009년 11월 27일 오후(현지시각)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를 떠나 출발해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향하던 급행열차가 탈선해 최소 39명이 숨졌다.
오후 9시30분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350km 떨어진 노브고로드주(州)에서 승객 661명과 승무원 21명을 태운 넵스키 166호 급행열차의 후미 객차 3량이 철로를 이탈했다. 이 사고로 탈선 객차 중 2량이 완전히 전복, 파손됐다.
사건 3일후까지 러시아 당국은 39명이 숨지고 95명이 부상했으며 18명이 실종됐다고 잠정 집계했으나 중상자가 많아 사상자 수 집계에 혼선을 빚었다.
탈선은 테러범들이 설치한 TNT 7kg 위력의 사제 폭발물에 의한 테러가 원인이었다. 당초 설치한 폭발물은 2개로 알려졌으며 사건 당일에는 그 중 하나만 폭발했으며 다른 한개의 폭발물은 불발됐다.
2008년 피지서 승합차 전복 한국인 4명 숨져
2008년 11월 27일 피지에서 신혼 여행객과 가이드 등 한국인 7명이 타고 있던 승합차가 전복돼 4명이 숨지고 3명이 중태에 빠졌다.
이날 오전 11시쯤(현지시각) 피지 난디 지역의 나우존리 하일랜드 공원에서 신혼부부 세 쌍을 태우고 가이드 조모씨가 몰던 승합 차량이 전복돼 조씨와 신혼부부인 이모·김모씨, 다른 신혼부부 중 아내인 김모씨 등 4명이 사망했다. 또 김씨의 남편 김모씨와 또 다른 신혼부부가 크게 다쳐 인근 병원으로 후송됐다.
피해자들은 산악용으로 개조된 승합차를 타고 피지 니우소리 하이랜드 지역을 여행하던 중 승합차가 산악도로 아래 낭떠러지로 추락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8년 일가족 4명 살해 패륜사건 발생
2008년 11월 27일 자신의 집에서 아내(35)와 두살배기 딸을 살해한 혐의로 붙잡힌 김모(42) 씨가 진술과정에서 2년 전 부모 집에 몰래 들어가 휘발유를 뿌린 뒤 불을 질러 잠자던 부모를 숨지게 했다고 자백했다.
2008년 11월 27일 새벽 1시께 옥천군 옥천읍 자신의 아파트에서 4천만원이 넘는 카드빚을 진 아내가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수면제와 술을 먹여 반항하지 못하게 한 뒤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옆에 있던 두살배기 딸을 목졸라 죽인 혐의로 체포된 김씨는 지난 2006년 6월 10일 새벽 1시께에는 옥천군 옥천읍의 아버지(당시 85세)와 어머니(〃 75세)의 집에 담을 넘고 들어가 거실 등에 휘발유를 뿌린 뒤 달아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화재로 인해 김씨의 부모는 온 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채 소방관에게 구조돼 병원치료를 받았지만 이틀 만에 숨졌다.
범행 동기는 유산상속이 목적이었으며,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워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2005년 김연아 한국 피겨스케이팅 사상 첫 세계대회 우승
2007년 2차 남북 국방장관 회담 평양서 개최
2004년 일본 도쿄에서 배용준 사진전 열림(-11.27) 6만명 관람
2002년 부시 미 대통령, 한국 여중생 2명 사망과 관련해 사과표명
조지 W. 부시(Bush) 미국 대통령은 27일, 주한 미군 궤도차량에 의해 지난 6월 심미선(14)·신효순(14)양 등 한국 여중생 2명이 사망한 데 대한 사과의 뜻을 유가족과 한국 정부, 그리고 한국 국민에게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고, 토머스 허버드(Hubbard) 주한 미국 대사가 밝혔다.
허버드 대사는 이날 리언 라포트(LaPorte) 주한 미군사령관과 함께 주한미대사관 공보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같이 밝히고, “부시 대통령은 자신의 슬픔과 유감을 표명하고, 이같은 사태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한국과 긴밀히 협력할 것을 강조했다"고 전했다.
라포트 사령관은 “주한미군은 무죄평결에도 불구하고 사고책임을 전적으로 인정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면서 “한·미 양국은 ‘좋은 이웃’인 만큼 앞으로 주한미군의 이동로와 절차를 개선하는 노력을 하고 있으며 주한미군지위협정(SOFA)도 상황에 따라 보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사건과 관련돼 무죄평결을 받은 궤도차량 관제병 페르난도 니노(Nino) 병장과 운전병 마크 워커(Walker) 병장은 이날 오전 별도의 사죄성명을 발표, “비록 본의아닌 사고로 인한 비극일지라도 우리는 죄책감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며 “따님들을 잃은 가족의 슬픔과 고통에 진심으로 사과드린다”고 말했다.
이들 2명은 사과성명을 낸 뒤 이날 오후 2시 오산미공군기지에서 출국했다.
2000년 노르웨이 오슬로-베르겐 간의 세계최장(24.5km) 고속도로 터널 `라에르달
터널` 개통
길이 24.5km의 세계에서 가장 긴 고속도로 터널이 2000년 11월 27일 노르웨이에서 개통됐다. 오슬로와 베르겐 간을 잇는 구간에 건설된 ‘라에르달 터널’은 왕복 2차선으로 산을 관통해 건설됐다. 그동안 터널이 건설된 구간 주변을 차로 통행하거나 페리를 타고 가는데 3시간이 걸렸으나 이 터널이 개통됨으로 2시간 가량이 단축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터널은 안전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화재가 발생할 경우 연기와 유독가스는 별도로 설치된 파이프로 빠지게 했다. 동시에 32개의 환기구로 신선한 공기가 공급된다. 터널에서는 휴대전화의 사용이 가능하며 라디오를 수신할 수도 있다. 건설에는 6년간 1억5백만 달러(약 1155억원)가 소요됐다
1995년 윈도95용 인터넷 익스플로러 2.0 최종 버전 출시
1991년 최첨단 ‘신경망 칩’ 국내 첫 개발
인간의 두뇌처럼 학습하고 토론할 수 있는 신경망칩(뉴로 칩) 개발이 세계적인 관심사로 떠오르는 가운데 본격적인 신경망칩이 순수 국내기술로 개발됐다. 한국통신 연구개발단 기초기술개발팀은 거머리와 지렁이의 중간 정도 지능을 갖춘 신경망 칩 개발에 성공했다고 1991년 11월 27일 밝혔다.
인간의 두뇌가 1천억개의 뇌세포와 같은 연결고리(시냅스)를 가지고 곱셈 등이 연산을 1초에 1백조개 정도 수행하는데 비해, 한국통신이 개발한 신경망 칩은 6백40개의 연결고리로 1초간 10억개의 연산을 수행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은 칩이 아닌 웨이퍼에 3만개 정도의 연결고리를 집적시킨 신경망 칩을 개발했으며, 미국의 인텔사는 1천개 가량의 연결고리를 가진 신경망 칩을 개발했다. 연결고리 1천개까지의 신경망 칩은 문자(인쇄체) 인식이나 자연음 합성, 로봇제어 등에 응용할 수 있으며, 3천5백개 이상 5천개까지의 칩은 무인차량 음성적인 필기체 인식 등에 이용된다
1990년 존 메이저 영국 재무장관, 보수당 당수경선에서 당선
대처총리의 뒤를 이을 차기 보수당수 경선 2차 투표에서 존 메이저 영국 재무장관이 1990년 11월 27일 승리를 거두고 영국 총리에 취임했다.
메이저장관은(47)은 총3백72명의 보수당 의원들이 참가한 투표에서 당선에 필요한 과반수보다 2표가 적은 1백85표를 얻는데 그쳤으나 강력한 경쟁자인 마이클 헤슬타인 전(前)국방장관이 1백31표, 더글러스 허드 외무부장관이 56표를 얻은 뒤 즉시 3차 경선을 포기함으로써 차기 당수 겸 총리로 당선돼 20세기 들어 최연소 총리가 됐다.
퇴임하는 대처총리는 28일 버킹검궁으로 엘리자베스여왕을 방문, 사직서를 제출하고, 여왕은 곧이어 메이저총리에게 24시간내에 조각할 것을 요청했다.
1990년 싱가포르 새 총리에 오작통 취임
1989년 국어학자 이희승 선생 별세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박사가 1989년 11월 27일 노환으로 별세했다. 93세였다. 선생은 평생을 외곬으로 학문에 몸바쳐 온 국어학계의 태두였다.
일체치하 탄압으로 옥고를 치르면서도 굽히지 않고 우리말과 민족의 얼을 지킨 그는 이 시대의 `마지막 선비`이기도 했다. 문학에도 관심을 쏟았던 그의 명수필 `딸깍발이`가 그려낸 깨끗하고 지조있는 `남산골 샌님`의 모습은 바로 일석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1896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난 일석은 일찍부터 국어연구가 꿈이었으나 중학교를 졸업해도 언어학을 가르치는 곳이 없어 취직, 7년을 허송했다. 이 때문에 일석은 경성제국대학 조선어문학과를 35세에 졸업한 만학도가 됐다. 이화여전 교수가 된 일석은 훈민정음의 테두리에서 맴돌다시피하던 당시 국어학 수준에서 벗어나 언어학의 기초와 체계에 입각한 국어연구의 새로운 경지를 연 개척자였다. 그러나 일제 치하에서 그의 연구는 가시밭길이었다. 일제가 국학연구의 탄압책으로 1942년 조작한 이른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그는 3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후 그는 서울대 문리과대학 교수로 취임하여 후진을 양성하면서 학술원 원로회원, 동아일보 사장 등을 역임했다.
`국어대사전`을 비롯, 그가 남긴 `국어학 논총` `국문학연구초` 등의 저서들은 국어학 연구의 고전이 되었다.
1986년 강화도 선창 앞 해상에서 신정해운 소속 카페리 2호 전복 사망 12명 실종 16명
1984년 미국 FBI, 통일교 박보희씨 납치소동
1983년 필리핀 아키노51회 생일맞아 20만명 반정부 시위
1983년 콜롬비아 보잉747기 마드리드 근교 추락 사망 183명
1983년 나카소네 일본수상, 중의원 해산
1983년 미국 크루즈미사일 이탈리아 도착
1983년 우루과이 30만 반정부시위
1982년 독립기념관 건립예정지 충남 천원군 흑성산으로 확정
1982년 나카소네 내각 출범
1981년 경주 고분에서 구리거울 등 한 나라 유물 출토
1978년 관광객 유치 100만명 돌파
1978년 한해동안 우리나라를 찾아온 외국인 관광객이 11월 27일을 기준해 100만명을 넘어섰다. 연간 외국인 관광객 100만명 돌파는 처음이었다. 이로써 한국은 동아시아에서는 7번째(홍콩,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자유중국, 일본순), 세계에서는 39번째로 외국인관광객 100만명 유치국이 되었다. 100만번째로 우리나라에 입국, 행운을 안은 사람은 이날 오전 8시30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KAL 005편을 타고 김포에 내린 미국인 바바라 리 존슨부인이었다.
1978년 북경서 사상처음으로 자유요구 데모
1978년 게이로 미국 최초의 선출직 공직자가 된 하비 밀크 샌프란시스코 시의원 반동성애 보수당원인 댄 화이트 시의원의 총에 맞아 세상 떠남
1978년 부산 자유시장 화재. 점포 1,031개 소실, 50억 피해
1977년 홍수환 4전5기 신화
197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WBA 벤텀급 세계챔피언 대회 타이틀 매치에서 승리한 후, 홍수환이 애타게 소식을 기다리던 어머니에게 전화로 건넨 첫마디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로 장안에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홍수환은 재기를 위해 11전 11KO승을 자랑하는 파나마의 신예복서 헥토를 카라스키야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1977년 11월27일(한국시간) 파나마에서 신설된 WBA 주니어페더급 챔피언 결정전이 치러졌다.
강한 힘과 주먹을 자랑하는 그를 상대로 1라운드는 생각보다 쉽게 넘어가는 듯 했다. 하지만 2라운드가 시작되자, 좌우 연속으로 들어오는 상대의 주먹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고, 그는 2라운드에만 4번이나 링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응원하기 위해 텔레비전 앞에 모였던 사람들은 시작하자마자 쓰러지기만 하는 홍수환을 보며 좌절했다.
생명이 위험해지기 전에 기권을 하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3라운드를 알리는 공이 울리자 홍수환은 카라스키야를 로프쪽으로 몰아 양훅과 어퍼컷으로 혼을 빼놓더니 커버 없이 로프에 기댄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레프트훅을 작렬시켰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넘어지고 있는 카라스키야의 턱에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3회 48초. 그것으로 끝이었다.
프로복싱사상 단 한차례도 없었던 4전5기의 신화는 이렇게 이뤄졌다. 열광하던 2만여 파나마 관중들의 침묵 속에서 홍수환은 입심을 또 한번 과시했다. “어머니 정말 대한민국 만세입니다.”
1975년 ‘기네스북’ 창간편집인 로스 맥허터 에이레공화군에게 피격 세상 떠남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발족
1969년 공군 U-10B 항공기 도입
1964년 한국, 대만과 우호조약 체결
1962년 교통부, KNA를 취소하고 대한항공(KAL)에 취항권을 부여
1961년 유엔, 식민지 독립선언 이행상황에 관한 결의안 채택
1959년 임화수 반공예술인단장, 희극배우 김희갑 폭행
희극배우 김희갑씨가 폭력단의 거물이며 반공예술인단 단장인 임화수에게 폭행을 당해 갈비뼈가 세군데나 부러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임화수는 1959년 11월 27일 서울 충무로3가에 있는 반공예술인단 사무실에서 쇼 출연과 관련해 항의하는 김희갑씨를 구타하여 늑골 3개를 부러뜨리는 등 전치 1개월의 부상을 입혔다. 김씨는 사전에 출연을 거부했는데도 불구하고 반공예술인단에서 자신의 양해없이 국도극장에서 열릴 시민위안공연에 장기간 출연한다고 일방적으로 광고한 것을 항의하다가 폭행을 당했다.
그러나 관할 중부경찰서는 이 사건 가해자가 반공예술인단의 단원인 박호라고 발표, 사건의 진상을 숨기고 있다가 김씨가 기자들에게 내막을 폭로하자 뒤늦게 임화수를 입건했다. 동대문일대 깡패 출신이며 전과3범인 임화수는 당시 한국연예주식회사 사장,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 등의 직책을 갖고 있으면서 연예인들을 정치적인 시민위안공연 등에 강제 출연시키는 등 온갖 횡포와 폭력을 자행했으나 누구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
검찰에 구속된 임화수는 범죄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으며, 피해자인 김희갑씨에게 용서를 구하고, 약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12월31일 임화수가 3만환의 벌금을 받고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1959년 효창공원 국제축구경기장 착공
1955년 소련, 서베를린 자유시화(自由市化) 제안
1954년 제2차 개헌(초대대통령 중임제한 철폐 등) 부결
1953년 이승만 대통령 대만 방문해 장개석과 회담(28일)
1953년 극작가 유진 오닐 사망
그는 유랑극단 배우였던 아버지를 둔 덕에 뉴욕의 호텔에서 태어나 호텔방, 열차, 무대뒤에서 어린시절을 보내야 했다. 극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한 1912년부터 손이 마비돼 사실상 집필을 중단할 때까지 그는 대표작 ‘느릅나무 밑의 욕망’ 등 총 63개의 작품을 세상에 토해내며 단순한 오락거리에 불과했던 성인연극을 수준높은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고, 연극을 상업적으로도 성공시켰다. 그사이 퓰리처상을 4번이나 받고 미국 극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며 미국 최고의 극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오닐의 말년 10여년동안 글을 쓸수 없었던 무력감도 그를 괴롭혔지만 3번째 부인의 학대와 3자녀의 온전치 않은 생활도 그의 비극적 인생관에 끼어들었다. 40세에 자살한 장남과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차남, 더구나 막내딸은 오닐과 동년배였던 찰리 채플린과 결혼해 그를 분노케했다
1953년 부산 대화재. 건물2천여동 소실
1951년 휴전회담, 30일간 잠정적 군사경계선 확정 합의. 전전선(全戰線)에
공격중지령
1950년 중국군 60만 한국전 개입 (장진호 전투 시작)
장진호 전투(長津湖戰鬪), 또는 장진 저수지 전투는 한국 전쟁의 결정적 전투 중 하나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있었다면 한국 전쟁 당시에는 장진호 전투가 있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 각국은 이 전투의 지명을 장진이 아닌 "초신"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한자어인 長津을 일본식으로 읽은 것이다. 유엔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인 1945년, 한국을 점령한 이후 일본어로 작성된 지도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진이라는 단어 역시 이런 방식으로 읽히게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 전쟁에 참여한 이후, 중국인민지원군 제9병단이 북한 북동쪽으로 침투했다.
1950년 11월 27일, 중국 제9병단은 장진호 지역에서 에드워드 알몬드가 이끄는 미국 제10군단을 기습공격했다. 혹독한 겨울에 잔혹한 17일 간의 전투가 벌어졌다. 11월 27일부터 12월 13일까지 30,000명의 유엔사령부 병력이 올리버 P. 스미스 소장의 지휘를 받고 있었지만 이들은 곧 포위되었고, 마오쩌둥의 유엔군 격파 지시를 받은 쑹스룬이 이끄는 약 120,000명의 중공군이 이들을 공격했다. 유엔군은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철수를 위해 싸움을 이어나갔으며 중공군의 사상자를 늘려가며 포위를 돌파했다. 제10군단의 흥남 철수 작전이 유엔군의 북한 철수의 마지막 단계였다. 해병대가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동쪽에서 중공군의 예봉을 맡은 페이스 특수임무부대의 역할이 컸다. 페이스 특수임무부대가 희생을 치르며 포로가 되는 동안, 서쪽의 해병대는 포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 중공군은 유엔군을 북한 동북부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1950년 대한적십자사 창립
1946년 주48시간 노동제 실시 발표
1946년 제1회 미술전람회(조선미협)
1945년 강원일보 창간
1943년 카이로선언 채택 (12.1 발표)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3년 11월 27일 연합국측의 루스벨트, 처칠, 장개석이 11월 23일부터 시작된 카이로 회담의 결과로 `카이로 선언`을 채택했다. 선언은 대일전에서의 상호 협력과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의 영토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기본방침을 처음으로 공식 천명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선언의 주요내용은 3국 세 나라 모두 영토확장의 의도는 없다는 것, 제1차 세계대전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의 여러 섬을 비롯해 일본이 침탈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 세력을 구축하는 한편 만주-대만을 중국에 반환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이 선언이 특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할 결의를 가진다`는 특별 조항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언은 이상의 목적으로 `3국은 일본의 무조건항복을 촉진하기 위해 계속 싸울 것`을 천명했는데, 1945년 포츠담선언에서 조항이 재확인됐다.
1940년 홍콩 영화배우 이소룡 출생
1932년 필리핀 야당지도자 베니그노 아키노 태어남
1925년 제1차 공산당 사건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정치가 알렉산더 둡체크 출생
1921년 최초의 신문-잡지 기자단체인 무명회 결성
1921년 시인 김수영 출생
1920년 미국대통령에 하딩 당선
1919년 일본-불가리아 평화조약 조인
1910년 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 순국
독립운동가 장태수 선생이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경술국치에 항거, 단식하다 1910년 11월 27일 순국했다. 1841년 전북 김제에서 태어난 선생은 1894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자 고산현감으로서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고, 이듬해인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친일내각이 들어서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지 정책이 노골화되던 때 다시 관직에 나선 선생은 시종원 부경으로 광무황제를 측근에서 모시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개와 말까지도 주인의 은덕을 생각하는데 역적 신하들은 어찌 임금을 속이고 나라를 팔 수 있는가"라고 통곡하면서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다.
그후 선생은 일제가 회유책으로 전한 은사금을 거부하며 "나라가 망하고 임금이 없는데도 적을 토벌해 원수를 갚지 못하고, 이름이 적의 호적에 오르게 되는데도 몸을 깨끗하게 하지 못하고 선조를 욕되게 하는 죄를 지었다"며 24일간 식음을 전폐하다 이날 세상을 떠났다. 정부는 1962년 선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국가보훈처는 선생을 2000년 `11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1년 노벨상 제정
노벨상이 1901년 11월 27일 제정됐다. 노벨상이 제정된 후 12월 10일 오후 4시 30분, 스웨덴 스톡홀름에선 제1회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창시자 알프레드 노벨의 5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물리학상 뢴트겐(독일), 화학상 호프(네덜란드), 생리·의학상 베링(독일), 문학상 프뤼돔(프랑스), 평화상 앙리 뒤낭(스위스). 각 수상자들에게는 각각 메달과 함께 4만3000달러의 상금이 수여됐다. 지금은 상금 5천만엔 짜리 교토상 같은 것도 있긴 하지만, 당시로선 파격적인 액수였다.
그러나 뜻밖에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우선 시상자인 오스카르 2세 스웨덴 국왕이 시상식 참석을 거절했다. "이처럼 막대한 상금이 외국인들에게 빠져나가야 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이유에서였다. 스웨덴 학계는 "국내 연구비도 없는 판에…"라며 심사 자체를 거부했다.
노벨상의 가장 큰 역설은, 물론 폭약으로 번 돈이 인류평화를 위해 쓰인다는 그 드라마틱한 전변이다. 또 하나는 처음엔 가족과 조국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는 것. 그러나 만약 노벨이 `국적 불문` 조건을 달지 않았다면 노벨상은 스칸디나비아 조그만 나라의 집안 잔치로만 끝났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니트로글리세린과 검은 폭약을 혼합한 다이너마이트를 포함, 평생 355개의 특허를 획득한 이 거부가 노벨상을 구상한 것은 55세 때인 1888년, 형 루드비히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잘못 안 프랑스 한 신문이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이란 제목으로 오보한 데 충격을 받으면서였다.
1900년 프랑스 지엠 왕자 서울 방문
1895년 노벨이 자신의 유산을 노벨상을 위해 사용하도록 서명
알프레드 베른하르드 노벨(스웨덴어: Alfred Bernhard Nobel)은 스웨덴의 과학자이다. 그는 고체 폭탄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노벨상이 제정되었다
스톡홀름에서 발명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재주있는 건축기술자로 알려져있다. 발명하기에만 열중하는 아버지라 가정의 살림은 나날이 빈궁에 빠져 들어갔다. 1837년 노벨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기계공장을 세우고 처음에는 번창하였다. 18세(1851년)에 미국에 유학하여 4년간 기계공학과 화학을 공부하였다. 크리미아 전쟁(1853~56년)에 러시아가 패전하는 바람에 노벨의 아버지 공장도 파산하고야 말았다. 아버지는 스웨덴으로 돌아가고 노벨은 형님 두 분과 함께 그냥 러시아에 머물러서 연구를 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너마이트의 연구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후에 다시 노벨은 스톡홀름에 돌아왔다. 이때 노벨은 혼자서 연구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도 좋은 공동연구자였다
1896년 12월 10일 숨을 거두기 전 유명한 유언장을 남겼다. 자기 재산에서 생기는 이자로 해마다 물리학, 화학, 생리학 및 의학, 문학, 평화의 다섯 부문에 걸쳐 공헌이 있는 사람에 상을 주라는 유언이다. 세계의 평화와 과학의 발달을 염원해 오던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유산은 스웨덴 과학 아카데미에 기부되었다. 그 기부금으로 1901년부터 노벨상 제도를 설정하였다. 이 상은 물리학·화학·생리·의학·문학·경제학·평화의 6개 부문으로 나누어 국적 및 성별에 관계없이 그 부문에서 뚜렷한 공로자에게 매년 수여하고 있다
1894년 일본의 사업가 마쓰시타 고노스케 출생
1598년 임진왜란 종식(선조 31년)
1095년 교황 울바누스 2세, 십자군 제창
클레르몽 교회회의는 1095년 11월 18일부터 11월 28일까지 프랑스 클레르몽에서 성직자와 평신도의 합동 주재로 열렸던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회회의이다. 이 교회회의를 주재한 교황 울바누스 2세는 11월 27일 되는 날, 공의회 연설에서 제1차 십자군 원정을 호소하였다.
1095년 비잔티움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점차 세력을 확장해가는 셀주크 투르크측에 위협을 느끼고 서방측에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황제의 서신은 피아첸차 교회회의에서 교황 울바누스 2세에게 전해졌다. 그 후 11월, 울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 교회회의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하였다.
교회회의는 11월 18일부터 28일까지 열렸으며, 약 300여명의 성직자가 참석하였다. 우르바노 2세는 교회 내 클뤼니 개혁과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의 파문에 관한 문제를 놓고 논의하였다. 11월 27일, 울바누스 2세는 공의회 교부들 앞에 동방 문제를 언급하였다. 교황은 서방의 그리스도교회가 이슬람교에 의해 정복당한 성지를 해방시키고, 이슬람 제국의 공격으로 인하여 위험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을 구원해야 한다고 열변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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