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무장공비 침투 사건은 북한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상어급 잠수함이 동해안 일대에 침투하여 정찰 공작 활동을 벌이고 복귀를 시도 하던 중, 잠수함이 좌초되어 해상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육상로를 통한 복귀를 위해 해안에 상륙하면서 일어난 사건이다.
1996년 9월 18일 경, 강릉시 강동면 안안진리 해상에서 68사단 초병과 택시기사가 50m 해상에서 좌초한 북한 잠수함을 발견하면서 시작되었고, 11월 5일 인제군 연화동에서 잔존한 정찰조 2명을 사살할 때까지 총 49일 간 이어졌다.
침투 무장공비 25명[1] 중 총 13명 사살, 11명 피살(함께 침투한 공비에 의한 처형), 1명 생포. 아군 피해는 전사 11명, 부상 27명에 민간인 피해 4명, 예비군 사망 1명[2].
인근 육군 보병사단과 해당 지역 동원예비군은 물론 최정예 특수전 전력인 특전사 병력도 상당수 투입되었으며, 해군 1함대와 해군작전사령부에서 함정 23척 지원, 공군 18전투비행단과 공군작전사령부에서 항공기 76소티 지원 등이 있었다. 일일 지상작전투입병력 평균 43000여명, 연인원 총 150만명에 달하는 육/해/공 대규모 작전.
침투한 무장공비는 북한인민무력부 정찰국 직속 정찰조 3명과 동 소속 해상처 승조원과 안내조로 총 25명이 상어급 잠수함으로 침투하였다.
당시 침투 경위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해안경계태세의 문제를 지적하였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택시기사가 단독 발견하여 신고된 것으로 알고 있으나 비슷한 시기에 68사단 초소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발견하여 감시하고 있었다. 다만 무장공비의 잠수함 상륙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믿을 수 없어 재차 현장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초동조치가 늦어졌을 따름이다.[3]
1996년 9월 14일 5시, 해당 잠수함은 침투 작전을 위하여 함남 퇴조항을 출항 공해로 우회 이동함.
9월 15일 1시, 대포동 해안가에 도착하여 잠수함을 해저 정박함.
같은 날 21시, 안내조 2명과 함께 인민무력부 소속 정찰조 3명이 침투 상륙, 안내조는 다시 잠수함으로 복귀했으며 정찰조는 군 비행장 및 레이더 기지, 항만, 화력발전소를 정찰/촬영하였다.
9월 16일 21시, 잠수함은 사전 침투한 정찰조의 복귀를 위해 대포동 해안가에 다시 침투하여 연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공해상 해저에서 대기.
9월 17일 23시, 재연결을 시도하다가 좌초되었으며 함장의 명령으로 보안 물품과 서류 등을 파기하고 강릉 안안진리 해안에 상륙.
9월 18일 1시 30분, 잠수함 폭파/자침을 시도 이후, 공작원들과 승조원들이 잠수함에서 이탈, 상륙함으로서 사건은 시작되었다.
잠수함은 근처 68사단 해안 경계 초소에 의해 관측되어 선보고되었다. 이후 택시기사와 경찰에 의해 발견신고가 접수되었으나 반신반의와 정보불신으로 진위여부 확인에 많은 시간이 소모되었고 곧 초동조치 지연으로 이어진다. 결국 소초장과 택시기사, 경찰이 확인하여 상황보고, 이후 연대장과 사단 정보과장까지 출동하여 현장 감수한 후에야 적 잠수함 침투 사실을 인정하고 사단 지역에, 그리고 1 야전군 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된다.
9월 18일 16시 40분, 강릉시 강동면에서 주민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 2명이 정찰국 해상처 소속 이광수를 체포함.
같은 날 17시, 68사단 수색대대의 항공 수색 정찰 중 정찰조에 의해 처형(청학산 정상에서 잠수함 좌초의 책임을 물음)당한 공비 시신 11구를 발견한다.
이후 9월 18일~9월 30일에 걸쳐 차단선을 구축한 아군의 수색/섬멸 작전이 전개되었다.
9월 19일 10시 경, 단경골 일대에서 특공연대에 의해 20여분간 교전 중 공비 3명 사살.
같은 날 14시 경, 칠성산 일대에서 특전사 3공수여단 병력이 적 3명과 접촉, 투항유도에 불응하여 전원 사살.[4]
같은 날 16시 경, 오이골 일대에서 X사단 병력과 교전하여 적 1명 사살. 아군 수류탄 파편상 1명.
9월 21일 9시 30분, 칠성산 일대에 특전사 X여단 병력이 레펠로 투입되어 하향식 수색을 실시하던 중, 최선두에 선 병력이 적(정찰조 2명)을 선발견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실탄 미장전으로 응사가 제한되자 "적이다!"라 외치며 몸을 굴려 절벽 아래로 수 미터 추락하였으며, 뒤이어 오던 이병희 중사가 즉각 응사하였으나 적에게 두부관통상[5], 최후미 병력이 즉각 엄폐하여 응사를 실시했으나 적은 상호 엄호하며 도주한다. 전과 없음. 아군 1명 전사.[6]
같은 날 20시 경, X사단 X연대와 예하 수색중대가 적과 접촉하여 수하하자, 적 수류탄 공격으로 1차 교전 시작. 1차 교전 시 아군 1명 전사 1명 부상. 적의 대화소리에 2차 교전, 적을 다시 발견하여 3차 교전 결과 적 1명 사살, 아군 2명 부상, 최종적으로 적 1명 사살. 아군 1명 전사, 3명 부상.
9월 22일 6시 경, 칠성산 일대에서 X사단 X연대가 차단 작전 중, 적 1명 발견. 지근거리까지 유도에 성공하나, 적이 도주하는 것을 보고 교전을 벌여 적 1명 사살. 아군 1명 전사.
9월 28일 6시 30분 경, 보광리 일대 무명고지에서 X여단 X대대 병력이 매복 중 적 1명을 발견하여 생포를 목적으로 유인 후 수하 도중, 적이 권총을 뽑으려고 하자 사살. 이 적 병력은 안내조장이었다.
9월 30일 16시 경, 목계리 일대에서 특전사 X여단 병력이 하향 수색 중, 1명이 옥수수 단에 손을 집어넣자 사람의 감촉을 느끼고 옥수수단을 헤치자 은거 하던 적을 발견, 서로 놀라 대응하지 못하고 있던 사이에 옆에 있던 병력이 적의 손에 묶인 권총을 보고 방아쇠를 당겨 사살하였고, 주변의 옥수수 단에도 집중 사격을 가했다.[7][8]
특전사/특공연대/사단/여단 병력과의 교전으로 공비 11명을 사살한다.
한편 적 병력 중 정찰조 2명은 독자적으로 행동하였다.
10월 3일~7일까지 용평 스키장과 월정사 일대를 통과.
10월 8일 14시 경, 평창군 탑동리 일대에서 산나물을 채취하기 위해 산을 오르던 민간인 3명을 살해.
10월 9일 21시, 오대산 일대에서 아군 매복조와 30여분간 대치 상황을 벌이다 이탈하였다.
10월 12일, X군단 사령부를 촬영 및 감시.
10월 14일 20시 경, 인제 지역 일대의 민가와 자동차에서 식량 등을 절취해 취식.
10월 16일, 신남에서 인제 방면으로 차량 이동 중이던 학교 교사에 의해 도로 통과 중 발견. 아군 5분대기조가 출동하나 합동신문조는 인부나 주민으로 판단하여 대공 용의점이 없는 것으로 분석하여 접촉 기회를 상실하였다. 정찰조는 이때 도주로를 바꿔 남쪽으로 도주 후 다시 북상.
10월 20일, 소양호를 수영으로 도하.
10월 22일, 양구와 인제 일대 모 사격장 근처에서 싸리나무 작업을 하던 표종욱 일병을 살해 후 전투복 등을 절취.
10월 25일, X사단 X연대를 촬영한다.
아군은 이들을 한동안 접촉하지 못해 전전긍긍하고 있었으나 마침내 11월 4일 15시 경, 산머리곡산 일대에서 동계작전 준비 중이던 아군 X사단 X연대 병력에 의해 발견되어 접촉.
11월 5일 4시 20분 경, 연하교 매표소 통나무집에서 매복하고 있던 아군 매복조와 교전하여 적 부상 1명, 아군 부상 1명.[9]
같은 날 7시 경, 정보분석조와 합동신문조가 현장 일대에 도착하여 작전을 토의하던 중, 적이 있을 만한 곳을 살피던 군단 기무부대장[10]을 향해 적의 저격이 있었다. 기무대장을 포함한 아군 전사 2명, 부상 8명 발생.
같은 날 8시 경, 특공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압박 작전을 펼쳤으나 계속 된 적의 조준 사격으로 1명 전사, 6명 부상.
같은 날 10시 경, 특전사 X여단 병력이 후방에서 접근하여 무장공비 2명을 사살.
이로써 길었던 대간첩작전은 개시 49일만에 종료된다.
1996년 당시 군에 복무했던 현역 장병이나 작전에 투입되었던 예비군들의 생생한 체험담을 찾아볼 수 있다. 체험수기1체험수기2
사건 당시 해당 해안지역을 책임지던 부대는 68동원사단이었다. 흔히들 파라다이스 사단이라고 하여, 8시에 출근해서 6시에 칼퇴근이라는 별명이 있었으나 이 사건후 섹터의 지휘관들은 당연히 거시기 되어 버렸고, 해안경비에 사각지대의 문제점, 수색작전의 미비점 개편을 위해 기존 동원사단을 해체하고 상비사단으로 새롭게 창설하였으니 현재의 23사단 철벽부대가 바로 이 부대이다.
사건이 발생한 시기가 오면 매년 사건을 잊지않기 위해 해당지역 군부대는 침투사건을 재현하는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이 작전에서 가장 전 국민의 분노를 샀던 사건은 10월 22일 전사한 표종욱 일병의 경우였다. 표종욱 일병은 숙영 준비를 위해 싸리나무를 준비하다가, 국군 전투복으로 위장할 필요가 있었던 적군의 습격을 받아 전사했다. 그런데 군 당국은 제대로 된 주변수색 없이 평소 여자관계가 안 좋았다며 애정문제에 따른 탈영으로 처리하고, 표 일병의 집에 가 아들 내놓으라며 난리를 쳤다.(…)해냈다 해냈어 국빵부가 해냈어 이후 표 일병의 시신이 발견되어, 그제서야 표 일병이 탈영한 것이 아니라 적의 공격으로 전사한 것임이 확인되었고 군은 데꿀멍.[11]
사실 시신이 발견된 것도 우연이어서, 표 일병을 공격한 적군이 자신의 노트에 일일이 전투내용을 기록했고, 이 적군이 사살되고 노획한 노트에서 군 작전내역에 기록되지 않은 아군 전사자가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표 일병의 유가족들은 TV에서 방영된 적군의 유류품에서 표 일병의 시계를 확인할 수도 있었다고. 그리고 TV에 표 일병의 전사가 방송되고있는 시점에서도 헌병대에서 아들이 탈영했다고 전화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제서야 아차 싶었던 군이 뒤늦게 기록을 토대로 수색작업을 개시, 숨겨져있던 표 일병의 시신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신은 표 일병이 작업하던 곳에서 불과 50m 떨어진 곳 낙엽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12] 애시당초 표 일병 실종 직후 수색만 제대로 했으면 발견이 가능했던 것. 이후 군은 유가족들에게 그야말로 무릎끓고 싹싹 빌었고 그와 별개로 여론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다. 표 일병도 만약 친절한 적군이 꼼꼼한 기록을 남겨 주지 않았다면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작전 중 탈영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 쓴 채 유가족들은 평생 생사조차 모른 채 살았을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니까.
대간첩작전중의 군수와 보급문제가 두드러졌다. 병사들을 쪼개서 매복지로 보낼것만 생각했지, 매복지에서 식사와 식수보급을 어떻게 할것인지, 전투가 벌어지면 이후 탄약보급은 어떻게 할것인지, 그리고 해당 병사들을 교체해야될 경우 어떻게 교체해야될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취사반에서 만든 식사를 추진 보급을 하려했으나,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이 어디어디있는지도 모르고, 차량도 들어가기 힘든 험지에 매복하여 사실상 보급이 불가능하고, 최악의 경우 보급하러 들어가다가 아군에게 오사당할 가능성까지 있었기에 난장판이 벌어졌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식수 부족이 극심했는데, 수통하나에 들어가는 페트병 반병 분량의 물로는 하루종일 숲과 산속에서 매복하고 있는 병사들이 갈증에 심하게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전투식량을 주고, 월남전 당시에 국군이 정글에서 수통을 2~3개씩 매고다녔다는걸 기억하고 그대로 실행했으면 그나마 나았을 문제.
아군에 대한 수하 및 오인사격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었다. 위의 전투 기록에는 생략되었지만, 수 명의 장교를 포함해서 상당수의 아군 병력이 매복이나 수색 도중 다른 아군의 오인사격에 사망하였다. 또한 적 정찰조가 국군 복장을 하고 국군의 수하 방식을 흉내내서 포위망을 벗어난 문제 역시 심각하게 인식되었다.
장교는 흰색, 부사관과 병사는 노란색이었던 육군 계급장과 명찰(글자색)이 현재의 검은색으로 바뀌었다. 특히 군단 기무부대장이 계급장을 통해 노출되어 저격당해 전사한 사건이 국군 수뇌부에 큰 충격이었다 한다. 현재는 부대마크도 전투복과 동일하게 저채도 색상으로 바뀌었다.
기존까지는 보병분대의 화력을 소총수의 숫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이후 화력강화를 위해 유탄수가 분대당 두명씩 배치된다. 확인되지 않은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군에서는 미국에서 진행중인 OICW 개발에 착수하여, K11 복합소총을 만들어내는 절박감을 제공하였을 것이다. 한국전쟁에서도 크기만 큰 소총을 기관총으로 분류하여, 중공군에게 화력이 밀려, 패배한 경우도 있지만, 재래식 군사력으로 열등한 쪽에게서 이렇게 밀렸다는 점에서 이 침투 사건이 한국군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을 것이다.
현 Dcinside의 대표이사인 김유식은 당시 하이텔에 '잠수함이 수상하다'라는 내용으로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이 이상하다면서 혹시 자작극이 아니냐는 식의 글을 썼다가 남산의 대공분실로 끌려가 코렁탕을 먹은 적이 있다. 그때 뇌개조도 당했나
국방홍보원에서 이 사건을 바탕으로 '얼룩진 산하'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 간략하게나마 당시의 전투 진행을 볼 수 있다. 물론 국방홍보원에서 만들었다는건 감안하고 보도록 하자. 링크
작전 당시 강릉은 그야말로 전쟁 분위기였다고 한다. 육/해/공의 거대한 대간첩 작전 수행을 위해 거의 계엄령 수준으로 군/경의 민간 이동 통제가 이루어짐은 물론 시내에는 온갖 군용차량들이 가득했고, 인근 강릉공항[13]에서는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이착륙으로 소음이 심했다 한다. 또한 멀지 않은 서쪽의 산들에서는 5분이 멀다 하고 수류탄 폭음과 사격소리가 끊임없이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고…. 사진은 전투경찰과 함께 버스를 검문하는 국군 병사.
당시 모 특공연대의 사진. 후일 영화 '아저씨'에서 정보사 공작원들의 사진으로 둔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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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군에서는 승조원 11명을 사살할 때까지 승선인원을 26명으로 판단하였으나, 이후 1명은 승선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하여 25명으로 수정하였다. 이는 이광수 체포 직후 그의 증언을 토대로 판단한 사안이었는데 잠수정 내 유류품 수색 중에 남은 1명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이광수 증언에서도 정확한 이름과 탑승 여부를 지속적으로 혼동하는 양상을 보여 최종 1명은 탑승하지 않은 것으로 제외한다. [2] 경계근무 중 옆에 있던 동료 예비군의 실탄 오발로 숨진 것이라고 한다. 확인바람. [3] 23사단으로 입대하면 아주 잘 확인할 수 있다. 소대장에서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급까지는 보고가 거의 1시간 단위로 이루어지는 데 비해 그 위부터는 일사천리로 쭉쭉 보고된다. [4] 투항 유도 중 사살에 이르기까지는 여러가지 설이 존재하나 대체적으로 인터넷의 설과 일치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특전사 3공수여단 모 지역대는 칠성산 9부 능선 일대에서 은신한 3명의 공비를 먼저 발견하여 지근거리까지 포위를 완료하고, 대대장에게 무전 교신을 한 결과, 지역대장은 공비에 대한 생포/사살에 대한 권한을 위임받았다. 곧 지역대장이 "자수하라, 옷을 벗으면 살려주겠다."고 외쳤으나 대답이 없었고 공비 중 한 명이 "지역대장 동지 들어오시오"라고 소리쳤다. 이에 지역대장이 "상의를 벗으면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상의를 벗고 자수할 것을 권유하여 열부터 하나까지 숫자를 세기 시작하였는데 셋까지 세었을 때 누군가 사격을 개시하였고, 이는 지역대원들의 동시 집중사격이 되었다. [5] 이후 국군 헬멧도 미국식의 프릿츠 타입으로 바꿔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6] 당시 사건에 대해서 언론에서는 헬기 레펠 실시 중 200m 이상 떨어진 거리에서 공작원의 보통 M-16 소총에 저격을 당하여 사망한 것으로 보도되어 이들의 사격능력이 초인적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사실과는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 [7] 투항 권고를 3회 하였다는 설이 존재하나, 사건 정황으로 보아 그럴 겨를이 없었다는 것으로 판단한다는 기록을 우선하였다. [8] 해당 사건보도 mbc뉴스 동영상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1828_6172.html [9] 특공연대 소속 매복조 2명이 거수자를 확인하고 수하하였으나, 거수자는 수하에 응답하지 않고 "70X냐? 3대대 선임하사다. 몇 대대냐?"라 대답했고, "3대대 선임하사인데 어두우니 나와서 얘기해라."라고 하면서 계속 접근했다. 매복조는 3대대는 이미 부대 이동을 마친 후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상하게 여겼으나 확인을 위하여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접근하는 거수자가 방탄모를 착용하지 않았고 아군의 K-2소총보다 총신이 더 긴 것을 발견하여 직감적으로 공비라는 것을 확신, 노리쇠를 전진시키며 쏘라고 외쳤다. 공비도 동시에 장전하면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진다. 사격은 통나무 집에 있던 아군 매복조에 의해 선 실시 되었으며 공비 2명도 수류탄과 소총 사격으로 맞선다. 교전 과정에서 매복조 1명이 총상을 입었으나 공비들도 부상을 입어 숲으로 도주한다. 이후 부상당하지 않은 적 1명이 보복 공격으로 근접하여 초소 창문을 향해 난사하였으나 중간벽에 의해 뒤에 있던 아군은 무사하였다. [10] 육군 대령으로, 이 사건에서 아군측 최고위 전사자가 되었다. 전사 후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11] 상식적으로 대간첩작전중에 병사가 실종되었다면 적의 공격이 아닐까 예상은 한번 해봐야할 것인데, 그마저도 없이 '병사가 사라졌다=탈영'이라고 바로 보고하는 추태를 벌인 것이다. [12] 국군의 배치 상황을 캐내기 위해 잔인한 고문을 당한 흔적이 역력했다 한다. [13] 당시에는 민간항공기가 취항하던 군민 겸용 공항이었으나, 현재는 공군 전용 공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