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낙(ANAK)과 소낙비
ㅡ프레디 아길라의 [아낙( ANAK)]과
이연실의 [소낙비]에 얽힌 유년시절의 기억ㅡ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잊혀지지 않는 유년의 한순간이 있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다.
흔히 말하는 고생, 은 식상해서 그만두자.
시골 출신의 63년생 안팍이면 누구나 가난을 생활처럼 끼고 살아 그런 기억이 남다를게 없다.
따라서 고생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고백하자면 특별할 게 없는 평범한 아이였다.
그냥 그렇게 남들처럼 무난한 유년시절을 보냈지 싶다.
굳이 기억에 남는 것이라면 학교 가는길 비포장 신작로 옆으로 우람하게 뻗어오른 미루나무 가로수 정도다.
어린 눈에도 나이를 많이 먹었을 거같은 아름드리 미루나무의 도열은 꽤나 장엄하기까지 해보였다.
거기에 여름이면 차먼지 뽀얗게 뒤집어 썼음에도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의 유난한 푸르름으로 볼 때마다 외경심이 일었던 기억이 꽤나 강하다.
지금 그 나무들은 다 베어지고 시원스레 왕복 4차선 아스팔트가 깔려 편하긴 하나
어쩌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 행사가 있어 걸어가보면 너무 밋밋하고 특징이 없어 오히려 그 때가 더 좋았지 싶다.
바다가 훤히 보이는,
그러나 고기잡이는 남의 얘기고 농사를 전업으르 하는 강원도 북쪽 고성군 벽지에 살던 내게 도시는 언감생심.
늘 멀기만 해서 그저 나가봐야 인근의 속초시가 전부였다.
그것도 한번 가자면 여간 공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물며 서울이라니!
서울은 나와는 다른, 그야말로 '눈뜨고 코베어'가는 특별한 사람들이 사는 머나먼 곳이었다.
실제로 내 사는 곳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촌놈이었다.
다행히 '큰 도시' 춘천에 이모님 집이 있었다.
춘천은 강원도청이 있는 행정의 중심도시.
벽지의 어린 눈에는 춘천이 얼마나 큰 도시였겠는가.
고성군은 수복 지역이다.
현재 고성군 북쪽 깊숙히 있는 삼팔선은
6.25 이전엔 지금보다 한참 남쪽 양양군 현남면 기사문리에 있었다고 했다.
따라서 6.25 이전까지는 지금의 양양군 대부분과 속초, 고성군은 북한 치하였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해방의 산물이었다.
전쟁이 나자 아직 한참 어린 내 어머니는 어쩔수없이 전쟁의 소용돌이를 그대로 겪었고 이산가족이 되었다.
어른들은 아직 어린것들은 할머니에게 맡기고 우선 피해야 했다고 했다.
피한 곳이 삼팔 이북지역이라고 했다.
어머니와 여동생 (지금 춘천 사시는이모님) 둘은 아직 어려 할머니에게 맡기고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은 원산쯤을 목표로 피난을 떠났다고 했다.
해방 전에는 양양에서 원산까지 기차가 있어 몸이 아프거나 하면 큰 의원이 있는 원산까지 다녀오곤 해서 원산이 낯선 곳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집 건너 다들 그런저런 사연들을 안고 있어 특별할것도 없는 일이었다.
전쟁의 상흔은 현재도 우리 삶에 상존해 여전히 아프다.
아프다, 라고 말하는건
지금도 내 어머니와 이야기해보면 시간이 갈수록 아픔의 강도가 더 강해짐을 볼수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겪은 죽음의 공포는 지금도 생생해 여기저기 아프고, 세월을 이기지 못해 주위에서 한분 또 한분 세상을 뜨는것을 보면,
그때의 죽음의 공포가 떠올라 더 고통스럽다고 했다.
세월이 약이라고 하지만,
너무나 큰 고통은 세월이 흘러도 잊혀지지 않는 모양이다.
갈수록 얼마 남지않은 생애,
그리운 혈육의 상봉은 언제나 가능할런가?
이젠 늙어 자주 아픈 어머니는
아직도 6.25 때 헤어진 당신의 엄마와 아버지, 형제 자매들을 선명히 기억한다고 한다.
언제 한번 만날수 있을런지,
아니면 전쟁통 피난길에 모두들 사망했는지 소식조차 알 길 없는 그들에 대한 그리움이 더 깊어만 간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기대는 요원할 뿐이다.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휴머니즘보다 우선하는가?
아무것도 할수없는 자식은 그저 답답할 뿐이다.
그렇게
어머니는 더 어린 여동생과 둘이 할머니 손에 맡겨졌던 것이다.
잠깐이면 다시 만날줄 알았던 이별은 영영 헤어짐이 되었고 어린 소녀였던 자매는 자라서 결혼을 하게됐다.
어머니는 자라던 마을의 이웃 청년과 결혼했고
동생은 직장을 다니던 청년과 결혼해 이곳저곳을 옮겨다니며 살다 춘천에 정착했다.
그런 사연으로 나에겐 도회지로 갈 기회가 생긴것이다.
자매의 사이는 각별해서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고아가 되버린 엄마는 동생을 끔직히 생각했고
동생은 언니를 친정집으르 여겼다고 했다.
지금도 두분은 각별하게 지내신다.
그 영향으로 내 형제들도 이모님을 각별히 생각하고 챙겨드리려 한다.
하마터면 외가쪽 일가붙이 하나 없을 뻔한 내게 이모님이 계신다는건 큰 행운이었다.
덕분에 가끔 춘천을 갈수 있었고 도시의 사람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구나,
서울도 실상 별것 아닐수도 있겠구나, 건방져(?)질수 있었다.
벽지의 어린것은 그렇게 몸과 마음이 성장해갔다.
오늘 프레디 아길라의 음악을 얘기할수 있음도 그 때의 행운, 춘천 가는 길에 얻어진 수확이다.
아니, 정확히는 프레디 아길라의 '아낙' ㅡ실은 국내 여가수가 부른 번안곡이다ㅡ 이라고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노래가 실상은 전혀 몰랐던 이연실의 '소낙비' 라는 사실도.
사연은 이렇다.
아마도 국민학교 5학년인가 6학년 겨울 방학이었다.
아버지와 춘천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당시 내가 살던 고성군 죽왕면에서 춘천을 갈수 있는 방법은 크게 세가지였다.
가까이는 고성군청 소재지 간성읍에 가서 춘천행 버스를 타고 '진부령'을 넘어 가거나,
속초 버스터미널로 가서 양양을 지나 '한계령'을 넘거나,
그도 아니면 강릉 버스터미널로 가서 '대관령'을 넘거나 해야 했다.
어느 길을 택하던 영(嶺)을 넘어야 한다.
강원도는 동과 서 사이에 백두대간이 길게 누워 있는 곳이다.
이 높고 험한 산맥으로 바다를 끼고 있는 영의 동쪽,
영동(嶺東)사람들과
영의 서쪽 영서(嶺西) 사람들은
기질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영동 사람들의 속담에 ''영 넘어 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말의 속뜻은 이미 영을 넘어 손쓸수 없는 일이 되버렸으니 포기해라,
또는 다른 세상으로 가버렸으니 이젠 우리와는 다르다, 라는 의미를 갖고있다.
참고로 영동은 강릉, 양양, 속초, 고성등이고
영서는 홍천, 원주, 춘천 등이다.
갈은 강원도지만 정선 영월쪽은 영동 영서와는 또다른 문화권이다.
산악을 끼고 사는 강원도에는 이처럼 지역에 따라 삶의 방식과 기질이 확연히 다르다.
바다를 옆에두고 있는 영동 사람들은 아무래도 삶이 거칠어 보이고
그래도 평지를 깔고 있는 영서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여유로워 보였다.
그만큼 영(嶺)이 가지는 의미가 크다.
영을 넘는다는 것은 다른 세상으로 진출한다는 뜻이다.
영동에서는 제 살던 곳을 떠나 큰 도시로 나가려면 반드시 영을 넘어야 했다.
북쪽은 삼팔선으로 원천봉쇄 돼있고
해안길을 따라 가는 남쪽도 있지만 부산은 왠지 낯설었다.
그렇게 벽지의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해 영을 넘어 춘천으로 경기도로, 또 어딘가로...서울로 진출했다.
물론 누군가는 일찌감치 공부를 접고
먹고 살 방도를 찾아 어린 나이에 저 길을 넘기도 했다.
그렇게 출세(出世)를 위해 영을 넘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갔다.
나가서 그들중 누군가는 그야말로 '출세' 를
해서 금의환향 했고
누군가는 출세한 도시에 주저앉아 자리를 잡았고
누군가는 상처만 가득안고 쓸쓸히 낙향하기도 했을 것이다.
청운의 꿈을 안고 떠났던 영 넘어 길은
그 끝이 다양할 것이나 공통점은 모두들 영을 넘어 다른 세상으로 진출 했다는 것다.
영동 사람들에게 영은 그렇게 큰 난관이었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영내(嶺內)에 편안히 살던 이들이 더 크게 성공(?)해 있기도 하나,
궁핍했던 시절 영을 떠남은 고난이이긴 하나 꿈을 찾는 즐거운 길이었다.
그러할지니 춘천으로 가는 길은 언제나 설레었다.
다정다감한 이모가 있는 도시 춘천은 방학이면 한번씩 꼭 가고픈 도시였다.
그렇게 그해 겨울 어린 소년은 간성에서 진부령을 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겨울이었고 날이 포근했는지 비가 내렸다.
그것도 많이.
양간지풍, 통고지설ㅡ양양, 간성은 바람이 많이 불고, 통천(삼팔선 북쪽 지역)과 고성은 눈이 많이 내린다ㅡ말이 있을 만큼 고성은 눈이 많이 내리는 곳이다.
다행히 날이 포근해 눈으로 넘지 못할 일은 없을것이다.
버스는 비포장 길을 달려 진부령으로 진입했다.
당시 진부령은 단선 도로였다, 고 했다.
단선 도로 였다! 고 단언할수 없는 것은 내 기억이 정확치 않기 때문이다.
노래 제목 조차 헷갈려 이글을 쓰게된 주제에 어찌 단선이었다고 확정할수 있겠는가.
그러나 분명한 건 버스는 지금의 간성읍 장신리, 즉 진부령 시작점에서 하염없이 대기를 했다.
기억에 의하면 진부령은 단일 도로라 영 저쪽,
지금의 원통면 용대리에서 출발한 차량이 이쪽에 도착해야만 우리가 탄 버스가 출발할수 있다고 했다.
아니면 혹시 갑작스런 겨울비로,
그것도 꽤 많이 내리는 비로 도로가 유실 됐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버스는 비 내리는 길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운전기사 옆에 배 불뚝 솟은 엔진룸에서 기름 냄새가 퍼져나와 히터 열과 뒤섞여 버스안은 조금은 몽롱한 분위기였다.
비로인해 창문을 열수도 없고 습기는 차고 습기를 제거하려 기사는 히타를 더 세게 틀었을 것이다.
감수성이 조금 발달한 어린 소년은 그 분위가 너무 좋아 빨리 가야한다는 생각도 잊고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내리는 비와 기사가 틀어둔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차는 언제 넘어올려나?
가기는 갈것인가?
한계령을 넘었을땐 이러지 않았는데 진부령은 이랬다.
춘천 가는 길도 도로에 따라 이렇게 다르구나.
한계령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모르는 노래는 계속 나왔고 그 노래들은 그냥 꿈결처럼 아득하게 들렸다.
설핏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미리 먹어 둔 멀미약에 취해 비몽사몽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몽롱한 중에 한 노래 가사가 귓속에 파고들었고 가슴을 울렸다.
비가 내렸고, 비 노래 였다.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처음엔 그소리만 들렸다.
조금은 날카로운 듯한 목소리의 여가수 노래였다.
날카로움 때문인지 가사가 명확하게 들렸다.
미리 얘기하자면 지금에서야 제대로 알은 이연실의 '소낙비'였다.
귀 기울여 다시 들으니
'어디에 있었느냐 내 아들아
어디에 있었느냐 내 딸들아
.
ㆍ
ㆍ
ㆍ
.
.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
하는 내용의 노래였던것 같다.
차창엔 계속 겨울비가 여름 비처럼 내리는데
생전 처음 듣는 노래는 자꾸 가슴을 흔들어 댔다.
나는 노래에 빠져 몽롱해졌고,
아 저런 노래도 있구나,
노래가 사람을 취하게 할수도 있구나, 했었던 것같다.
기다림 끝에 저쪽에서 차는 넘어왔고 우리가 탔던 버스는 비탈길을 힘겹게 올라 영을 넘었다.
그렇게 진부령을 넘었다.
나는 이제 다른 세상으로 온것이다.
이번 길은 예전의 영 넘어 가는 길과 달랐다.
특이한 노래 하나를 얻은것이다.
가슴을 흔들었던 노래 하나.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그 겨울 진부령길에서 대기하며 소낙비를 만난것이다.
그러나 감수성이란 환경에 따라 쉬이 변하는 법.
춘천에 도착한 나는 번화한 도시를 구경하느라 그 노래는 까맣게 잊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이십대 무렵
나는 우연히 한 노래를 듣게 된다.
나중에 알았지만 필리핀 출신의 가수 프레디 아길라의 노래 '아낙'이 그것이다
물론 원곡은 아닌 우리말로 바꾼 노래다.
어느 여가수가 부른 노래의
우리말 제목은 '아들아'였다.
나에게 이 노래는 강렬히 다가왔다.
오래전 겨울비 내리던 진부령 초입에서 기약없이 영을 넘어오는 차를 기다리며 들었던 노래가 떠오른 것이다.
어딘가 조금은 다른듯 하지만 가사도 아들아,
어쩌고 하며 노래를 부른 여가수의 목소리가 비슷해서
나는 아, 그날 들은 노래가 이것이구나! 하고 확정해 버렸다.
그리고 아낙을 들을때마다
나는 유년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어린 소년의 예민한 감수성을 상기했다.
그 감수성이 지금 이만한 글이라도 쓸수 있는 원동력이 됐을것이다.
그러나, 착오였다.
오랫동안 그렇게 알고 있던 노래는 완전히 다른 노래였다.
기억은 이렇게 확신할 일이 못된다.
뭔가 조금은 다른 느낌이었지만 확실히 '아낙' 이라고 믿었던 노래는,
그러나 잘못된 주입이었다.
지난 주말 연휴를 맞아
무릎 수술을 한 장인 어른 병문안차
처가인 춘천(춘천과의 인연이 이렇게 질기다)을 찾은 나는 저녁 식사후 인근에 사는 처제 내외의 집을 방문했다.
처가 가까이 사는 처제는 춘천의 한 초등학교에 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늦은 밤 식탁에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완전히 서울내기인 동서와
''영을 넘는다'' 의 의미를 설명하다
이노래에 얽힌 추억에 이른것이다.
나는 몇잔 술에 흥이 넘처 열심히 어린 소년이 그날 영을 넘으며 겨울비 내리는 버스안에서 들었던 노래와 의미를 떠들어대다 나도 모르게 노래를,
정말 까마득한 기억속에서 끄집어 올린 노래를 흉내냈다.
아낙에 얽힌 노래라 주장하며.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어쩌구...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
하고.
동서는 재빨리 자신도 아낙을 안다며 인터넷을 찾아 틀어줬다.
그런데 다들 내가 흉내 내는 노래와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자세히 듣고보니 그랬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알고 있던 노래는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혼란에 빠졌다.
분명 그렇다고 알고 있던 확신에 대한 흔들림.
그러나 다른 이야기로 주제가 넘어가 노래는 잊혀졌다.
맥주 몇병에 취해 나는 깊이 잠들었고
일찍 잠이 깬 나는 여전히 어젯밤에 부른 노래가 귓가에 쟁쟁했다.
혹시나 하고 유튜브를 찾아봤다.
아낙을 치니 원곡과 우리말 여가수의 노래가 있었다.
번안곡을 가만히 들어보니 아들아,
어쩌구 하는 내용과 음색은 비슷한데 리듬이 달랐다.
그해 겨울 어린 가슴에 파고들었던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하는 강렬한 울림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소낙비 라고 찾아봤다
익숙한 가수의 노래가 떴다.
'잃어버린 우산'과 '목로주점' 등을 부른 이연실의 소낙비 였다.
1973년 발표곡이었다.
년도도 얼추 비슷했다.
63년생인 내가 열두셋 무렵이면
75~76년 무렵일 것이었다.
묘한 흥분이 일었다. 급히 눌렀다.
그리고 아하,
내 오랜 의문은 한번에 풀렸다.
유레카!
술이 덜 깬 몽롱한 의식속으로 그 옛날 수십년 저쪽의 소년이 또렷이 되살아났다.
겨울비 내리는 영 넘어 가는 버스 안,
히터와 휘발유 냄새가 뒤엉킨 몽롱한 의식속으로 파고들었던 그 노래였다.
조금은 날카로운 듯한 음성과 철학적인 노랫말.
그리고 여전히 가슴을 흔드는 강렬한 구절.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소낙비!
내 유년의 희미한 사진 한장을 확연한 새깔로 찾은 기분이었다.
반복해서 듣는 철지난 노래는
아주 각별했다.
노곤한 몸 속으로 노래는 편안히 젖어들었다.
오랜 세월 길을 헤매다 이제서야 제 집에 든 듯 편안했다.
기억은 이제 확신하지 않기로 한다.
내가 확실하다 믿었던 기억은 때론 그저 어느 한순간 강렬한 느낌이 이미지로 화(化)해 남아 있을수 있다.
다시 찾은 노래
소낙비!
그해 겨울 열두세살이였을 소년은 이제 육순이 되었고,
찾아보니 이연실은 1950년 육이오 난리통에 태어났고 어느새 고희가 넘었다.
세월이 흐른것이다.
흘러도 강렬했던 유년의 기억은 쇠퇴하지 않고 더 또렷해진다.
내 어머니의 전쟁통 아픈 기억이 세월 갈수록 더 또렷해 지듯이.
'소낙비'는 이제 '아낙'과 혼재해 그 해 겨울 진부령을 넘던 내 기억속에 있다.
올바르게 잡았으나 뒤섞인 기억도 나를 즐겁게 한다.
소낙비와 아낙은 내 과거속에서 이제 이음동의어가 된것이다.
https://youtu.be/qwVWk71tr8o
https://youtu.be/WgWxsh6RsbA
https://youtu.be/yJ-ko7jGiQw
https://youtu.be/JG5APMTwxFI
https://youtu.be/qwVWk71tr8o
첫댓글 오랜 혹한 뒤에 모처럼 날이 포근해지자 비가 내린다.
겨울비가 내리자 오래전 써 둔 이 글이 생각났다.
그때 꽤 강렬한 느낌이 들어 썼었는데 지금도 그 느낌이 되살아난다.
기록해둘일이다.
기록해두면 이렇게 다시 끄집어 내 회고할수 있구나....
다만 이 긴 글을 누가 읽을까?
게시하면서도 한심한 생각이 든다.
혜량하소서.
그저 제 좋아서 하는 일이라^^
삭제된 댓글 입니다.
감사합니다 ^^
이상하게 그게 잘안되네요^^
@육자로.. 다른 곳에선 잘 되는데 유독 골싱에선 잘 안되네요 ~^ㅎ
지금 다시 해보니 됩니다.
수정해서 올렸습니다~^ㅎ
감사합니다
박사님 덕에 옛날 생각이
77년 원통 어두리에서 소대장 시절이 주마등 처럼 지나 갑니다
비포장 도로에 왜 그렇게 돌은 많은지 겨울에 속초로 연결되는 도로 제설작업
서울 마장동까지 5시간 걸리는 버스 ...... 먹을것이 부족해서 병사들도 참 힘들었조
그래서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라고
원통에서 소대장으로 계셨군요.
엄청 고생하셨을거 같습니다.
특히 겨울이면 제설작업으로 겨울이 더 힘들었을거 같습니다ㅜ
인제가면 언제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하던 곳 저도 생각납니다.
춘천가는 버스가 원통터미널에 섰었는데 어느해 겨울 그곳에서 마신 사이다의 시원한 맛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한계령 단풍은 최고죠^^
어제 날씨가 풀려 오랫만에 연습장 가서 갈켜주신 숏게임 스킬 많이 하고 왔습니다.
요즘 숏게임으로 근근히 버티고 있습니다 ^^ㅎ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어주셔서 기쁨니다.
어린 소년의 가슴에 남았던 노래와 세월에 대해 주절거려봤습니다.
지루하진 않았는지요?
잠시 시공을 초월하는 고성촌놈의 추억속의 영화 한편을 보았구먼...
난 기억이 읍다
미아리고개로 넘어 오던 매케한 매연 뿐...
잘 생각해보세요
형님 한테도 요정도의 추억은 꼭 있을 겁니다.
그걸 주제로 씨리즈 그림을 그리면 꽤 괜찮지 싶은데요....
인생을 꽤 살아낸 사람들은
기억의 곳간에 쟁여둔 노래들이 꽤들 있지요
노래들은 노래 그 자체가 아니라
특정 장소, 특정 사람과 엮여질 때 기억에 더 사무치는데
퍼박님은 이연실의 소낙비와 진부령이 기억의 패키지로…^^
이연실을 기억하는 이들은 아마 대체로
도시의 뒷골목 막걸리집의 기억과 뒤엉켜 있을 겁니다
저 역시 숱한 노래에 얽힌 추억이 있습니다만 저 소낙비는 아마도 처음으로 자리한 추억의 노래이지 싶습니다.
그당시 아시겠지만 라디오도 시원치 않던 시절이라 더 그랬을거 같습니다.
이연실은 나중에 생맥주집에서 들은 목로주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월말이면 월급타서 낙타를사고...
사막엘 가자....
하는 가사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휴머니즘보다 우선하는가?”
이데올로기 연관 학문을 전공한 입장에서 보면,
이데올로기라는 사악한 무지가
휴머니즘이라는 인간의 위대한 감성을 지배하는,
슬픈 아이러니이지요
이데올로기에 관한 지식이 가장 빈곤한 자들이
허구의 이데올로기에 가장 많이 사로잡혀 있는 것도 서글픈 아이러니고요^^
잼나네요, 그렇게 힘들게 넘어다니는 영‘이었군요 ㅋ
네.
예전엔 영을 넘는 일이 저렇게 큰 의미가 있었지요^^ㅎ
제 주소가 용대리1830번지였던 10여년,,,
덕분에 추억여행 감사합니다!
용대리가 주소지였으면 황태 덕장을 하셨을듯~^^ㅎ
농담입니다.
지금 용대리는 우리나라 최대 황태 덕장입니다.
예전엔 대관령등 여기저기 덕장이 있었는데 명태가 사라지곤 모두 사라지고 용대리만 남았다고 합니다.
기억에 남아있는 아낙 ... 의 첫 울림은
가요제에 출품한 것으로 남아 있는데 ...
그때 들으며 바로 이 노래다 ~!! 했었던 노래 ....
그 가요제에서 이듬핸가
윤복희의 미친 노래 ... 여러분이 대상 탔었던 ...
초대 대상곡(?)이 아낙인가?
확실치 않은 기억을 퍼올립니다....
새벽 몽환에 ㅎ ~~
아낙이 이런저런 스토리가 많은 노래였군요^^
윤복희의 여러분은 워낙 많이 아는 노래라 저도 따라부르곤 했었습니다^^ㅎ
새벽에 이 긴 글을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유년시절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글
흥미롭게 잘 읽었습니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우리들 한번쯤 추억을 소환해서 누구나 찾아가보고픈 마음이 있을겁니다
아련한 그 시절이 그립지만 돌아갈 수 없으니 더 그리워집니다
목산님도 이런류의 추억이 있지 않으신지요?
이런 글쓰기는 아주 색다르네요.
유년의 기억을 소환하는 일.
나이든다는 뜻이겠지요?ㅡㅎㅎ
글 감사합니다.저의 유년시절과 젊을 때 추억을 떠 올리게 하네요.감사합니다.
저와 비슷한 추억을 가지셨군요.
동질감을 느끼시니 글 쓴 보람을 갖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