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道의 광명 지혜의 德…그 깊이 바다와 같거늘”(1957년 4월 내원사 중창 낙성식. 수옥스님 시에 경봉스님이 읊은 답시 中)
선교율 안목 투철…‘이사원융’
금룡스님ㆍ혜옥스님과 함께
‘한국 비구니 3대 강백’ 추앙
상주 남장사 ‘관음강원’에서
비구니 최초로 강의 시작…
서울 보문사 내전 강의 열정
선해일륜 동국제일선원 개원
천성산 내원사 중창불사 등
사찰 운영에도 남다른 면모
금룡(金龍)·혜옥(慧玉)스님과 함께 ‘한국불교의 비구니 3대 강백’으로 추앙받는 수옥스님은 선과 율ㆍ경전(禪·律·經)에 투철한 안목을 갖춰 이(理)와 사(事)에 두루하여 원융한 수행자였다. 사진제공=내원사
화산당(華山堂) 수옥(守玉)스님(1902~ 1966)은 한국불교 비구니의 큰 어른이다. 비구니 수행자의 귀감이며 한국불교 비구니 역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출가이후 당대의 선지식 아래서 경학과 계율을 익히고 신명(身命)을 내던진 참선수행으로 정진력을 깊고 넓게 쌓았다.
선과 율, 경전(禪·律·經)에 투철한 안목을 갖춰 이(理)와 사(事)에 두루하여 원융한 수행자의 풍모를 지녔다. 한시(漢詩)에도 빼어나 경봉스님과 시로써 문답하고 수행처마다 소회를 시로 남기기도 했다. 또한 당대의 비구니로서는 하기 힘든 일본유학으로 당신의 수행을 넓히기도 했다. 수옥스님은 이러한 수행력을 바탕으로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중창불사의 대원력을 세우고 오늘날의 내원사를 일구는데 진력했다.
경남 양산의 천성산은 숲이 울창하고 골이 깊어 사계절 내내 탐방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산(名山)이다. 이 산에 자리 잡은 내원사는 원효대사가 창건한 내원암에서 출발한 천년고찰로 근대에는 해월ㆍ운봉ㆍ향곡선사 등 걸출한 선지식이 머물다간 수행도량이다. 그러나 6·25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어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로 남아 있었다. 수옥스님의 원력으로 1955년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오늘의 대가람으로 위용을 드러냈다. 내원사는 지금은 비구니 수행도량으로 전국에서 손꼽히고 있으며 숱한 수행자들의 고향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수옥스님의 법향이 짙게 우러나는 내원사는 의연하고 당당하면서도 어머니와 같은 자애심을 지닌 수행자들이 불퇴전의 정진열을 불태우는 도량으로 빛을 더하고 있다. 수옥스님 아래서 조계종의 명사(明師: 비구니 최고 법계)가 배출됐다. 명성(수옥스님 법제자ㆍ운문사 회주), 자광(慈光: 수옥스님 은상좌)스님은 스승의 법통을 이어 후학을 길러내고 있다.
수옥스님은 1902년 11월12일 경남 진해시 자은동에서 아버지 동래 정(鄭)씨 태익(泰翼)과 어머니 어(魚)씨의 딸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스님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보통사람들처럼 살아가는 세속의 삶에 뜻이 없고 오직 고상하고 걸림 없는 삶을 바랬다.
그러던 중 “닭장에 갇힌 닭에게 비록 먹이가 있더라도 끓는 냄비가 가까워질 뿐이고 허공을 나는 학에게 양식은 없으나 종횡무진 동서로 걸림이 없네”라는 불가(佛家)의 글을 읽고 발심, 출가를 결행했다. 1917년 16세 때다.
늦가을 어느 날 부모 몰래 집을 나와 경남 합천 해인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해인사는 비구 승가였기에 허락을 받지 못하고 충남 예산 덕숭산 정혜사 견성암으로 갔다. 1918년 6월13일 비구니 묘리당(妙理堂) 법희(法喜)선사를 은사로, 청월(靑月)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다. 1919년 법희선사로부터 ‘석가와 미륵도 중생의 종인데 그 주인은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받고 스승의 문하에서 참선 정진에 들었다.
비구니 위상 제고 위해 日 유학
1924년 가야산 해인사 국일암에 머물면서 해인사 강원의 고경덕원(古鏡德元)스님 아래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수료했다. 1927년 고경스님에게서 사미니율의 범망계 등 계율을 배웠다. 그해 10월 정혜사 견성암에 최초 비구니 선원이 개원하자 동안거에 들어갔다. 1928~29년 견성암에서 안거한 스님은 1930년 봄 금강산 여행을 했다. 이때 ‘금강산 영원암(靈源庵)에서’라는 한시를 지었다. 하안거는 견성암에서 하고 해인사 금강계단에서 용성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아 지녔다.
1931~33년 금강산 유점사 선원과 마하연 선원 만공스님 회상에서 정진했다. 1935~37년 경성부(현 서울시) 중앙선원 부인선원에서 하안거·동안거를 나면서 각황사에 개설된 새벽강좌에서 대은(大隱) 김태흡(金泰洽)스님 지도로 사교과와 대교과를 수료했다.
1937년 일본 유학길에 나섰다. 스님은 당시에는 비구니를 위한 전문교육기관인 강당 하나 없고 규모가 반듯한 선방도 없는 조선불교의 현실을 개탄하고 비구니의 위상을 높이려는 발원으로 유학을 결행했다.
스님의 유학은 만공스님의 권유와 김수곤(金水坤)거사의 후원으로 가능했다. 일본에 간 스님은 오사카 교토 나라 등의 사찰을 순례하고 일련종(日蓮宗)사찰에 머물렀다. 1938년 교토에 있는 묘심사(妙心寺)에서 설립한 기후현(岐阜県) 임제종 사찰의 천의사(天衣寺) 미농니중학림(美濃尼中學林)에 입학했다. 이 절에서 다도(茶道)와 서예 꽃꽂이 등도 배웠다.
1940년 니천학림(泥泉學林)을 수료하고, 참선을 지도하던 관장노사(官長老師)로부터 화산(華山)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그해 귀국하여 견성암에서 동안거를 났다. 1941년 견성암에서 하안거를 나고 동화사 부도암 선원에 머물다 상주(尙州) 노악산(露嶽山) 남장사(南長寺) 혜봉(慧峰) 용하(龍河)스님의 초빙으로 불교전문 관음강원에서 비구니 최초로 강의를 전담하는 강사로 취임했다.
1942년 남장사 관음강원에서 비구니 20여명에게 강의, 1943년 7월 제1회 사미과(3명) 사집과(8명) 수료식을 했다. 1944년 젊은 비구니들에게 일본군 종군위안부 강제 징집이 시작되자 대중 결의에 따라 관음강원이 폐원됐다. 스님은 남장사를 떠나 견성암으로 돌아왔다.
1945년 광복되던 해 견성암에서 하안거와 동안거를 했다. 1948년 봄 서울 동대문구 보문사에 개설된 비구니 강원의 강사로 취임, 약 80명의 학인을 가르쳤다. 1949년 보문사에서 내전(內典)을 강의하면서도 스승 법희선사를 찾아뵙고 참선 정진을 계속했다. 법희스님은 정릉 인수재(仁壽齋)에 머물고 있었다. 1950년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 보문사 강원이 폐원됐다. 스님은 충남 공주 마곡사 영은암(靈隱庵)으로 피난을 갔다가 예산 보덕사(報德寺)로 갔다. 1951년 보덕사 주지로 임명받은 스님은 1952~53년 법희스님의 발원으로 영명스님 등 문도들과 힘을 모아 보덕사를 중창했다. 당시 보덕사는 마곡사 말사로서 근·현대에 비구니로서는 최초로 수옥스님이 주지로 임명받았다.
견성암 스님들과 정화운동
1954년 11월3일 임시종회에 비구니 대표로 참석했다. 그해 12월13일 경무대 시위에 상좌 강자호 등 견성암 비구니들과 함께 선두에 나섰다. 한국불교 정화운동에 나선 것이다. 1955년 3월15일 천성산 내원사 주지로 취임했다.
스님은 이때 내원사 중창불사를 시작, 원만회향하고 열반 때까지 이곳에 주석했다. 이 해 6월23일 전국승려대회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됐다. 총 66명 위원중 비구니는 10명이었다. 8월12, 13일 조계사에서 열린 전국승려대회에 참가하고 불교정화 임시종회 의원으로 선출됐다. 이후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가 개원하기 이전까지 연임했다.
1957년 4월26일 내원사 중창 낙성식을 경봉스님을 모시고 5000여 대중이 모인 가운데 봉행했다.
이때 읊은 스님의 시 한 편.
“확연히 쇄락한 무위무사객이/ 어떤 인연으로 천성산에 살게 되었는지/ 사업이 인연따라 성취되니/ 소박한 흉금이 도처에 한가롭네(廓落無爲無事客 緣何棲居聖山間 由來事業隨緣就 素朴胸襟到處閑)” 1957년4월5일 금요일.
수옥스님의 이 시에 경봉스님이 읊은 시다.
“절개 지켜 닦은 마음 옥같이 맑은데/ 옛 절터 천성산에 새로 절 지었네/ 도의 광명 지혜의 덕 깊기가 바다런듯/ 일을 기필코 이룩하니 뜻이 한가롭네(守節修心淸似玉 古庵新築聖山間 道光智德深如海 事必成功意自閑)”
수옥스님과 경봉스님이 읊은 이 시는 경봉스님 일지(日誌)에 실린 글이다. 1966년 4월15일 초판 1983년 7월27일 재판 1990년 2월20일 증보 1996년 3월25일 재증보한 수옥스님 시집 <화산집>에 옮겨 실었다. 이 ‘화산집’은 명정(明正)스님(통도사 극락암·경봉스님 상좌)이 편집했다.
1959년 3월29일 내원사 선해일륜(禪海一輪) 선방을 낙성, 동국제일선원을 개원했다. 4월25일 경남도지사 김규진으로부터 내원사 중창 공로상을 받았다. 또한 당시 총무원장 효봉스님으로부터 내원사 중창 공로상을 받았다. 1960년 1월1일 산신탱화와 조왕탱화의 점안식을 경봉스님 증명으로 가졌다. 1962년 8월15일 대통령 권한대행 국가재건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로부터 문화재보호 공로상과 문화훈장을 받았고 그해 8월26일 조계종 초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됐다. 1964년 12월20일 조계종 종정 효봉스님으로부터 내원사 중창 공로상을 받았다. 1965년 6월25일 조계종 종정 효봉스님으로부터 모범승려 표창장을 받았다.
1966년 2월7일 14시25분 내원사에서 문도들을 모아놓고 “나는 이미 세상 인연이 다했다. 너희들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출가한 초심을 버리지 말라”는 말씀을 남기고 입적했다. 법랍49년, 세수65세. 이해 4월15일 문도들이 <화산유고>라는 한시집을 펴냈다. 이후 ‘화산집’이 나왔다. 이 책에는 한시 53수, 수필 3편, 시조 2편, 경봉스님과 법문답 1편, 편지 4통 등을 수록하고 있다.
스님 입적 후 2000년 6월 ‘양산 내원사 비구니 화산당 수목화상비’가 경내에 건립됐다. 비문은 지관스님이 짓고 글은 명성스님이 썼다. 스님의 행장은 원과(圓果)스님(서울 삼선포교원)이 비문의 내용이 사실과 약간 다른 곳을 보정하여 2019년 3월7일 펴냈다. 논설위원
■ 도움말 : 자광스님(충남 논산 법계사), 혜등스님(전북 군산 지원사), 승혜스님(서울 법융사), 아용스님(경남 양산 내원사).
■ 자 료 : 화산당 수옥 연보, 화산당 비문, <화산집>.
[불교신문3475호]
이진두 논설위원